고전古典의 숲을 거닐다
「熱河日記」,一夜九渡河記 小考
안 규수
돈키호테-길 위에서다
“본래 땅 위에는 길이 없다. 누군가 걸어가면 그것이 곧 길이 된다.” 중국 근대문학의 대문호 루쉰의 「고향」에 나오는 구절이다. 좀 다르게 표현하면, 길이 있어서 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가는 것이 곧 길이라는 의미다.
스페인의 한 시골 마을 라만차. 50대 독신 남성이 살고 있었다. 그럭저럭 살 만했는데 기사도 소설에 그만 미쳐버렸다. 낮에서 밤까지 쉬지 않고 책만 읽어대는 바람에 머릿속 골수가 말라버려 마침내 정신이 이상해지고 말았다. 일단 녹슬고 청태가 가득한 칼과 창을 들고, 투구를 쓰고, 비루먹은 말 로시난테를 타고 나서는 ‘돈키호테’라는 이름의 사나이다.
나는 문학이라는 길 위에 선 돈키호테였다. 내가 글을 잘 쓰지 못한다는 사실은 해가 바뀔수록 더욱 절실하게 느껴진다. 하여, 더 잘 쓰고 싶어서 나름대로 애를 쓰고 있다. 다름 아닌 독서다. ‘독창성이란 들키지 않은 표절이다.’라고 말한 어느 작가의 말처럼 독서에서 얻은 단편들을 메모한 노트가 나의 글쓰기 산실이다.
연암朴趾源*燕巖 「열하일기熱河日記」
「열하일기」上下권 (박지원 지음/고미숙 길진숙 김풍기역, 북드라망),「연암을 읽는다」(박희병, 돌베개), 「나의 아버지 박지원」(박종채지음/박희병역, 돌베개) 그리고 만난 책이 고미숙의「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북드라망)이다.
연암 박지원의 나이 마흔넷, 당시로서는 반백의 초로에 접어든 때였다. 청 건륭황제 만수절(70세 생일) 축하사절단에 정사 박명원(사촌 형)을 따라 서책과 풍문으로만 듣던 그 땅을 드디어 밟게 된다. 압록강을 건너 연경으로, 연경에서 열하로, 다시 열하에서 연경으로. 총 3천 리가 넘는 5개월의 이 여정은 가히 생사를 넘나드는 모험과 수난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연암은 힘들고 고단할수록 관찰하고 사유하고 기록했다. 그 가공할 관찰력과 기억력은 시대적 통념을 날려 버리는 주옥같은 명문장을 토해낸다.
연암체燕巖體
「열하일기」는 여행기가 아니라 글쓰기의 로드맵이다. “수십만 마디의 말이, 문자로 쓰지 못한 글자를 가슴속에 쓰고, 소리가 없는 문장을 허공에 썼으니, 그것이 매일 여러 권이나 되었다.”(박지원 「열하일기」下권 471쪽) 하여, 그가 가는 곳마다 ‘말과 사물이’ 잠에서 깨어나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때론 화려한 수사와 우아한 논리로, 때론 역설과 유머로 정사 일행이 찌는 듯한 폭염 속에서 제날짜에 연경에 도착하려면 정신없이 달려야 했다. 그 폭풍 질주로 달리는 말 위에서 획획 지나가는 단상을 놓치지 않고 기록하는 연암의 노매드 nomad(유목)가 나은 작품이 ‘일신수필馹汛隨筆’이다. 연암은 문장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하늘과 땅이 아무리 장구해도 끊임없이 생명을 낳고, 해와 달이 아무리 유구해도 그 빛은 날마다 새롭듯이, 서적이 많다지만 거기에 담긴 뜻은 제각기 다르다. 그러므로 날고 헤엄치고 달리고 뛰는 동물 중에는 아직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것도 있고, 산천초목 중에도 반드시 신비로운 영물이 있으니, 썩은 흙에서 지초가 나오고, 썩은 풀이 반디로 변하기도 한다. (초정집서楚亭集序)
언어가 어떻게 하면 ‘끊임없이 생명을 잉태하고, 날마다 그 광휘가 새로운’ 그래서 썩은 흙에서 지초가 나오고, 썩은 풀이 반딧불로 화하는 삼라만상의 무상한 흐름을 능동적으로 ‘절단, 채취’할 수 있을 것인가에 그 핵심이 있다. 더 구체적으로 연암체에 대해 그의 아들 박종채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연암은 ‘문장에는 고문 古文과 금문 今 文의 구별이 있는 게 아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글을 쓰는 것이다. 귀로 듣고 눈으로 본 바에 따라 그 형상과 소리를 곡진히 표현하고 그 정경을 고스란히 드러낼 수만 있다면 문장의 도는 그것으로 지극하다고 했다. (나의 아버지 박종채, 돌베개)
연암체는 한마디로 요약하면 ‘자신의 글을 쓰는 것’이다. 연암은 요동 벌 1천2백 리 아득한 땅을 들어서며 이렇게 탄성을 지른다.
“훌륭한 울음 터로다! 크게 한번 통곡할 만한 곳이로구나!”
이름하여 호곡장好哭場. 이 기나긴 여행의 서곡이자 문턱이다. 저 가슴 깊은 곳에서 터져 나와 천지를 진동시키는 그런 소리다. 열흘을 가도 산이라곤 보이지 않는 그 광활한 평원에 들어서는 순간, 연암은 마치 태초의 시공간에 들어선 듯한 경이로움을 느꼈다. 크게 한 번 울어 볼 만하다는 것은 그런 존재론적 울림의 표현이다. 요동의 광활한 스케일과 마주하는 순간, 연암은 자신이 그동안 얼마나 좁고 답답한 나라에 갇혀 있었다는 것을 온몸으로 실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마치 갓난아기가 처음 세상에 나올 때의 충격과 환희, 바로 그것이었다.
하룻밤에 아홉 번 강을 건너다(一夜九渡河記).
‘두 산山 틈에서 나온 하수河水는 돌과 부딪쳐 으르렁거린다. 그 솟구치는 파도와 성난 물결과 슬퍼하며 원망하는 여울이 놀라 부딪치고 휘감아 거꾸러지면서 울부짖는 듯, 포효하는 듯, 고함을 내지르는 듯 사뭇 만리장성을 깨뜨릴 기세다. 1만 대의 전차, 1만 명의 기병, 1만문의 대포, 1만개의 전고戰鼓로도 우르릉 쾅쾅 무너뜨려 짓누르고 압도하는 듯한 물소리를 형용해 내기엔 부족하다. 모래, 벌 위 거대한 바위는 한쪽에 우뚝 서 있다. 강둑의 버드나무 숲은 어둑하여 강의 정령精靈들이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사람들에게 장난을 거는 듯하고, 양옆에선 교룡交龍과 이무기가 사람들을 물속으로 끌어들이려는 듯하다. 어떤 이는 이렇게 말한다.
“여기가 옛날 전쟁터인 탓에 강물이 저렇게 우는 거야.”
하지만 그게 사실이 아니다. 강물 소리는 어떻게 듣느냐에 따라 전혀 달라진다. 내 집은 깊은 산속에 있다. 문 앞에 큰 시내가 있는데, 매번 여름철 큰비가 한 번 지나고 나면 물이 급작스레 불어나 항상 수레와 병거, 대포와 북이 울리는 듯한 굉장한 소리를 듣게 되고 마침내 그것은 귀에 큰 재앙이 되어 버렸다.
내 일찍이 문을 닫고 누워 가만히 이 소리를 비교하여 들은 적이 있었다. 깊은 소나무 숲이 퉁소 소리를 내는 듯한 건 청아한 마음으로 들은 탓이요, 산이 갈라지고 언덕이 무너지는 듯한 건 성난 마음으로 들은 탓이요, 개구리 떼가 다투어 우는 듯한 건 교만한 마음으로 들은 탓이다. 만개의 축 筑(악기 이름)이 번갈아 소리를 내는 듯한 건 분노한 마음으로 들은 탓이요, 천둥과 우레가 마구 쳐대는 듯한 건 놀란 마음으로 들은 탓이요, 찻물이 보글보글 끓는 듯한 건 흥취 있는 마음으로 들은 탓이요, 거문고가 우조羽調(국악에서, 오음의 하나인 ‘우’ 음을 으뜸음으로 하는 조)로 울리는 듯한 건 슬픈 마음으로 들은 탓이요, 한지를 바른 창에 바람이 우는 듯한 건 의심하는 마음으로 들은 탓이다. 이는 모두 바른 마음으로 듣지 못하고 이미 가슴속에 자신이 만들어 놓은 소리를 가지고 귀로 들은 것일 뿐이다.
지금 나는 깊은 밤에 강 하나를 아홉 번이나 건넜다. 강은 새외塞外(북쪽. 곧, 만리장성의 바깥)로부터 나와서 장성을 뚫고 유하와 조하, 황하와 진천 등의 여러 물과 만난 뒤, 밀운성 밑을 지나 백하가 되었다. 어제 배로 백하를 건넜는데 이곳은 그 하류 지역이다. 내가 요동에 들어오기 전에 바야흐로 한여름이었다. ‘중략 (一夜九渡河記)
이 글은 연암의 수사와 은유, 그리고 사유의 깊이를 가늠할 수 있는 「열하일기」가 낳은 최고의 명문장이다. 하룻밤에 아홉 번이나 강을 건너는 대모험, 물소리에 대한 현란한 묘사, 거기다 인생살이 대한 깊은 통찰력까지. 우리가 일상적으로 겪는 갖가지 소음들 역시 마음에 따라 수없이 다르게 변주될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렇듯 연암의 글은 기행문의 관습적 수사를 관두고 느낌을 자신의 목소리로 들어낸다. 또한 심리와 정서의 미세한 부분까지 형상화하고 있다. 소품체가 그만의 독특한 문체로 탄생하고 있다. 이것은 연암이 말한 ‘자신의 글을 써야 한다.’라는 뜻의 구체적 모습이다.
요동 벌판은 평평하고 넓어 강물이 절대 성난 소리로 울지 않아. “하지만 이것은 강을 몰라서 하는 말이다. 요하는 울지 않은 적이 없었다. (중략) 나는 이제야 도道를 알았다. 명심冥心이 있는 사람은 귀와 눈이 마음에 누累가 되지 않고. 귀와 눈만을 믿는 자는 보고 듣는 것이 더욱 섬세해져서 갈수록 병이 된다. 지금 내 마부는 말에 밟혀서 뒷 수레에 실려 있다. 그래서 결국 말의 재갈을 풀어주고 강물에 떠서 안장 위에 무릎을 꼰 채 발을 옹송거리고 앉았다. 한 번 떨어지면 강물이다. 그땐 물을 땅이라고 생각하고, 물을 옷이라 생각하고 물을 내 마음이라 생각하리라. 그렇게 한번 떨어질 각오를 하자 마침내 내 귀에는 강물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무릇 아홉 번이나 강을 건넜건만 아무 근심 없이 자리에 앉았다 누었다. 그야말로 자유자재한 경지였다.(一夜九渡河記)
연암이 그날 밤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깨달은 건 마음과 대상 사이에 분별심이 사라질 때 ‘자유로운 새로운 공간’이 열린다는 사실이다. 무엇보다도 대상과 주체 사이에 경계를 허물고 나에 대한 집착, 곧 아상我相을 버려야 한다고. 명심銘心이 바로 그것이다. ‘어두운 마음’이란 사사로운 집착을 다 놓아 버린 상태. 그리되면 당연히 나 아닌 외물에 대한 고정된 허상도 버릴 수 있다. ‘물을 땅이라고 생각하고, 물을 옷이라 생각하고, 물을 내 마음이라 생각하리라’라는 대목이 바로 그런 의미이다. 물이 옷이 되고, 물이 몸이 되고, 물이 마음이 되는 경지, 그것이 곧 연암이 말하는 ‘도道’다.
연암이 마을의 어린아이들에게 천자문을 가르쳐주다가 아이가 읽기를 싫어하는 것을 나무랐더니 그 아이가 하는 말이“하늘을 보면 새파란데 하늘 천天자는 전혀 파랗지 않아요. 그래서 읽기 싫어요.”했다는 것이다. (창애에게 답함3答創厓之三)
문장은 곡진曲盡해야 함을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문학이라는 하나의 틀에 어느 순간 속박당하고 있을지도 모를, 사로잡혀 있을지도 모를 타성에 대해 나지막하게 말하고 있는 것 같다. 글이란 읽는 이들을 촉발하는 그 무엇이어야 한다. 한탄이든 증오든 허망이든 그 무엇을 불러내지 못한다면 그것은 참이 아닌 글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고미숙은 그의 저서「로드 클래식, 길 위에서 길 찾기에서」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근대적 글쓰기에 대한 관념은 주체가 일방적으로 글을 생산한다고 여기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글쓰기는 일찍이 이옥李鈺이 설파했듯“내가 짓는 것이 아니라 천지 만물이 나로 하여금 짓게 하는 것이다.” 글은 천지 만물에 깃든 기운이요 정보의 흐름이다. 그것이 신체적 흐름과 접속할 때 언어적 기호가 되어 세상에 흘러나온다. 저자와 작품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이런 식의 마주침이 곧 글이다.”
*박지원朴趾源 자는 중미, 호는 연암. 1737년 서울 야동에서 출생, 노론 명문가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과거를 통한 입신양명이라는 코스에서 벗어나 이덕무, 홍대용, 이서 구, 백동수 등과 어울려 속칭 백탑파라는 ‘연암 그룹’을 이끌었다. 69세에 ‘깨끗이 목욕시켜 달라는 말만 유언으로 남기고 생을 마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