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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지 유심
선사와 지사로 나툰 진속불이(眞俗不二)의 행로 |
― 내가 만난 철운 조종현 대선사 ― |
한정섭 |
계간 《유심》에서 스님의 추모 특집 원고 청탁이 왔다. 생각해 보니 쓸 것도 없고 보여줄 것도 없지만 그 그림자 내 그림자 되어 폭우처럼 몰려오니 천둥 번개 어찌하랴.
우뚝 서면 따라서 같이 우뚝 선다 한자욱 한자욱을 피해도 어찌 못하는구나 세월은 흘러도 한결같이 따르는 꽃송이 이슬 방울을 여기 새겨 스님을 추모하고자 한다. 경희대학 병원에서 “내 자네들과 의논하고 싶은 일이 있어 오라고 하였네. 자식들이 주사라도 한 대 맞아야 된다고 하여 억지로 입원은 하였으나 보름 동안 입원해 있었으니 내 할 일은 다 한 것 같네. 마른 나무 가지에 물을 준다고 새 잎이 피어나겠는가. 그래서 2, 3일 있다가 퇴원코저 하는데 장차 이 가죽 주머니를 어떻게 처치했으면 좋겠는지 자네들의 의견을 듣고자 하네. 내 생각 같아서는 이 몸 그대로 필요한 사람들께 다 주어 버리고 가고 싶은데…….” 장내 분위기는 매우 무겁고 엄숙하였다. 관음종 총무원장 홍파 스님께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죄송한 말씀이오나 우리 형제들은 모두 9남매입니다. 그러나 각기 흩어져 살다 보니 한 번도 한 자리에 모여보지 못했습니다. 이번 기회를 통해 가족이 한데 모여 화합하고 단합할 기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그렇다면 가족장을 하겠다는 말씀입니까?” “그렇습니다.” “한 법사님 생각은 어떻습니까?” “종단의 입장으로 볼 때는 곤란한데요. 더군다나 일생을 불문(佛門)에 몸담고 계신 분을 어떻게 속가에서 장례를 치른다는 말씀입니까? 죽은 뒤 49재도 지내는데 산 사람들의 원을 풀어줄 수 없다면 어찌 진속(眞俗)을 초월한 큰스님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가족들의 원을 따르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렇게 하여 장례식은 가족장으로 하고 49재는 종단에서 치르고 비석은 불교통신대학에 세우기로 하였다. 나는 나오면서 스님의 손을 잡고 눈을 맞추었다. “스님, 가시면 언제 오시렵니까?” “인연 따라.” 철운 스님은 한참 있다가 “내 이 달을 넘기지 않네. 잘 있게.” 하고 마지막 인사를 하였다. 과연 스님은 이 달을 넘기지 않고 8월 30일 85세로 입적하셨다. 서대문 자택에서 장사를 치렀을 때 한국불교의 대강백이요, 시인이며, 여러 종단의 총무원장, 종정을 지내신 분이 가족장을 지낸다는 것이 말이나 되느냐 하고 핀잔을 하신 분들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스님의 마음은 진속이 둘이 아니라 살아서 다하지 못한 사랑을 죽어서라도 통째로 주고 싶은 심정뿐이었을 것이다. 면목동 묘법사(妙法寺)에서 “이만 했으면 진각(眞覺) 국사가 《선문염송(禪門拈頌)》을 짓게 된 동기와 구곡각운(龜谷覺雲)이 《염송설화(拈頌說話)》를 쓴 마음을 알 것이네. 나머지는 각자 자기 분수대로 가서 판단해 보기 바라네.”
양지도 없는 땅 한 조각 있다면 뿌리 없는 나무 한 그루 손 씻고 정성스레 심으리 외쳐도 부르짖어도 메아리 없는 골짜기가 그립다. 쳐다보아도 치쳐다 보아도 못 다 보는 창공이여! 내가 스님을 친히 뵌 것은 사간동 법륜사에서였지만 실질적인 친견은 중곡동 ‘포교사 전문대학’에서였다. 중곡 극장을 빌려 불교정신문화원을 개원하고 포교사 교육에 심혈을 기울리고 있을 때에 “이것은 한 종단 소속의 교육기관이니 종단에 넘겨주고 포교사협회를 만들어 초종파 범불교운동을 하는 것이 어떠냐?”고 제안하였다. 그렇지 않아도 종단에서는 미국의 오리엔탈대학과 결연을 하여 그 분교로서 학교를 운영하는 방법과 한방병원의 운영문제를 놓고 설왕설래하던 참이라 쾌히 승낙하고 포교사 협회를 만들었다. 그러나 막상 회를 만들어 놓고 보니 회관이 있어야 하고 운영기금이 필요하였다. 그리하여 포교사협회 회장을 안덕암 큰스님으로 정하니 덕암 스님께는 그의 상좌이신 본원종 석천 스님을 사무총장에 임명하게 되자 전문인 교육기관인 포교사협회보다는 본원종 종도들을 양성하는 포교사협회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어떻게 되든지 포교사를 양성하는 일은 일선 불자가 의무적으로 해야 할 일이었으므로 우리는 다 같이 한 가지 과목씩 분담하여 강의하였다. 스님은 선문(禪門)을 담당하고 나는 《천수경(千手經)》을 담당하고 김어수, 이종익, 무진장 큰 법사 스님들께서 강의를 하여 포교사 전문 대학은 80년 전통을 가진 동국대학교 불교대학 이상으로 잘 돌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불교통신대학을 졸업한 학생 10여 명이 신년 인사차 모였다가 큰스님을 뵙고 선문(禪門)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선문염송》을 공부하자” 하여 면목동 묘법사에서 강의를 시작하였다. 만 2년 8개월, 추운 겨울에도 연탄난로를 피워 놓고 역대 조사들의 화두를 녹여 내었다. 큰스님께서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 하면 “적나라(赤裸裸) 적쇄쇄(赤灑灑) 몰가파(沒可把)” 하고 지천지지(指天指地)의 독립 지인을 선언하는 학생들도 많았다. 참으로 재미있는 시간이었다. 저녁 6시부터 9시까지 세 시간이 어떻게 갔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원겁일념(遠劫一念)·동정일여(動靜一如)로 《선문염송》을 공부하였다. 여기에는 스승도 없고 제자도 없고 남자도 없고 여자도 없었다. 그런데 어느새 차(茶)가 나오고 담(談)이 이루어지면 열두 시, 한 시가 넘었으며 어떤 때는 날을 새기도 하였다. 나는 밤새도록 하시던 말씀까지도 그 자리에서 기록을 하고 그 다음에 공부시간이 되면 어김없이 프린트하여 자료로 제공하였다. 어제 하신 말씀이 오늘 녹음기보다도 더 정확하게 책자로 만들어져 나오면 “핫, 번개불이로다.” 하고 좋아 하셨다. 어떤 분이 눈을 깜박이고 눈썹을 꿈틀거리면 스님은 깔깔 웃으시며 박수를 치고 “맞아, 맞아.” 하고 긍정을 보내시기도 하고 “아니야, 그것은 10만 8천리야. 방(棒)을 맞아야 하겠는데.” 하고 할(喝)을 하시기도 하였다. 이것이 저 유명한 《선문염송》 강의이다.
“중은 산감(山鑑) 사감(舍鑑)이 아니여, 산의 주인이 되고 집의 주인이 되어야지 산을 지키고 집을 지키는 산지기가 되어서야 되겠어.” “제사를 드리고 불공을 드리고 밥을 얻어먹는 것은 남방 불교에서 보면 북방 불교의 걸사행(乞士行)이야. 그런데 그 밥을 먹고 공부해야 할 사람들이 재(齋)받이에 이리 몰려다니고 저리 몰려다니며 가수 댄스 노름을 하고 있으니 이래 가지고 한국불교가 달라 질 수 있겠어. 정신차려야 해.” 흥미진진한 시사(時事) 후에는 반드시 이러한 경구(警句)가 붙어 우리들의 마음을 흥분시켜 주었으며 불자로서의 사명과 각오를 가질 수 있도록 깨우쳐 주셨다. 스님 49재는 숭인동 관음종에서 지내고 백일재를 맞이하여 상락향수도원에 〈철운 조종현 대법사 기공비(鐵雲 趙宗玄 大法師 紀功碑)〉를 세워 임종 전 약속대로 모든 것을 이행하였다. 그런데 그 뒤 얼마 있다가 인도를 갔다 오니 나의 서재에 라면 박스 네 개 분량의 비품들이 전해져 와 있었다. “무엇이냐?”고 물으니 조종현 원장님 사모님께서 “스님의 유언이라 하시면서 놓고 갔다”고 한다. 무릎을 꿇고 향 사루고 삼배를 한 뒤 끌러 보니 한 상자에는 평상시 사용하시던 가사, 장삼, 낙자, 신, 허리띠, 시계 등 여러 가지 비품이 들어 있고 한 상자에는 그 동안 모아 놓았던 여러 사승(師僧)들과의 왕래한 서첩이 들어 있었다. 그 가운데는 선암사 대강주 경운(擎雲) 스님의 글씨와 박한영 스님의 편지 등 30여 명의 유명인사들의 서첩이 들어 있기도 하였다. 다시 한 상자를 열어보니 그 동안 사용하시던 책들이 꽉 차 있고 또 다른 상자를 열어보니 선인(先人)의 서화(書畵)와 기타 시작(詩作) 원고들이 꽉 차 있었다. 어떤 것은 좀이 나서 알아 볼 수 없게 되었고 어떤 것은 물기에 젖어 얼룩덜룩하였다. 그러나 나는 스님의 뜻을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들을 표구하여 재생시켜 놓고 문인들을 모아 말했다. “내 들으니 스님께서 ‘자식들은 잘 가르치지 못하고 잘 먹이고 입히지 못했으나 최선을 다해 낙오자가 없게 되었다’고 하시면서 다행이라 하였는데, ‘늦게 둔 상좌들에게는 무엇 하나 남겨 준 것이 없이 신세만 많이 지고 간다’ 하시면서 얼굴을 붉히셨는데, 이거라도 기념품으로 받고 마음속에 새겨 매년 3월 3일과 9월 3일 조사다례 때는 빠지지 말고 참석하여 스님의 정신을 계승해 가자.” 모두가 쌍수로 환영하였다. 그 가운데 출가제자로서는 백남활, 석승암 스님이 있고 재가제자로는 배승자 법사 등이 있는데 모두가 시서(詩書)에 일가견을 가진 사람들이다. 나는 생존해 계실 때 전강(傳講) 제자로 지목하여 《금강경》 병풍 1족과 서화 2품을 주셨는데 박한영 스님의 불정게(佛頂偈)는 동국대학교 대학원에 다니는 대각 김기훈 법사에게 전하였다. 끝으로 스님의 사후송(獅吼頌)을 읊어본다.
룸비니 봄동산에 하날 꽃비 노리우네 갓나신 빨가숭이가 ‘나’만 높다 하더라 나라고 하시니 빨가숭이 나란말가 높다고 하오시니 하날우에 또하날가 외친이 가고 없으니 무를 곳을 몰라라 물을 곳 몰랐더니 곳곳마다 빨가숭이 놀라서 돌처보니 나 또한 빨가숭이 옳거니 나날 때 한소리로세 기억다시 새롭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