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 괴테 마을 일구는 세계적 석학
멀어진 서원 본관에서 맑은 풍경 소리가 들렸다. 낙엽이 날아와 앉은 곳은 시비(詩碑)였다.
한글과 독일어로 적힌 시는 독일을 대표하는 서정시인 라이너 쿤체(89)가 쓴
《옛 문체로 쓴 한국의 귀한 옛날 일》이다.
그가 고려 말기 이방원과 정몽주 사이에 오간 《하여가》와 《단심가》를 접하고
독일어로 쓴 시를 제자인 전 교수가 번역했다.
정몽주의 충절을 온전히 이해하고 시조 운율까지 완벽히 맞춰 지은 독일어 시에 입이 떡 벌어졌다.
독일의 대시인이 어떻게 시조를 그대로 구현해낼 수 있었을까.
“앞서 쿤체 시인은 조선 중기의 대학자 이이가 쓴 《고산구곡가》 첫 곡에 화답하는
《메아리 시조》를 내게 전하곤 ‘시조에 대해 더 알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시조 장르의 정착에 기여한 《하여가》와 《단심가》를 소개했더니
곧바로 《옛 문체로 쓴 한국의 귀한 옛날 일》을 지어 나를 깜짝 놀라게 했다.
그가 한국에 단 일주일간 머문 경험을 바탕으로 쓴
《서울의 거리 모습》 《뒤처진 새》 등에도 우리 사회에 대한 통찰이 짙게 배어 있다.”
《옛 문체로 쓴 한국의 귀한 옛날 일》의 시비는 독일에도 놓인 것으로 안다.
“2012년 4월 독일 파사우의 도나우 강가에 있는 쿤체 재단 부지에 ‘시정(詩亭)’이라는
작은 한옥 정자를 지어 선물했는데, 거기에도 이 시비를 세웠다.
두 시비에는 시와 함께 ‘육백년 전 정몽주의 꼿꼿한 바른 걸음을 기리며
나의 한국 친구들에게’라는 쿤체 시인의 헌사가 새겨져 있다.
몇 년 전 앙겔라 메르켈 당시 독일 총리 부부가 쿤체 시인을 예방하며 한옥 정자와 시비를 구경하기도 했다.”
사람의 마음을 읽는 시인이 놓은 다리가 한국과 독일을 이어준 셈이다.
“그렇다. 세계에 한국을 알리려 얼마나 많은 노력과 비용이 들어가고 있나
시인이 깊은 통찰을 바탕으로 금세 해낸 일을 보면 격조 높은 문화의 힘이 얼마나 대단한지 새삼 느끼게 된다.”
“괴테라는 사람에게 문인(文人)은 일면일 뿐이다.
그는 우선 소공국 바이마르의 문화·교육·산업·세무 등 4개 부처를 총괄하며 군주를 보필하는 정치인이었다.
또 식물학·동물학·광물학·기상학·광학·색채론에 천착했고, 이 중 동물학과 색채론 부문에선
괄목할 만한 업적을 냈다.
그림까지 많이 그리면서 문학책 143권, 편지 2만여 통을 남겼다.
괴테의 글 하나하나엔 200여 년이 지난 지금도 감탄하지 않을 수 없는 성찰이 담겨있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했는지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다.”
현대의 한국인들이 200여 년 전 독일에서 살다 간 괴테의 업적과 삶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과거에 비해 물질적인 부분이 풍족해진 반면 정신문화는 성장하지 못했다.
한국처럼 너무 급속히 변하는 사회에선 인간 정신이 발맞춰 가기 더욱 어렵다.
대부분 쓸데없이 계산하고 남과 비교하느라 힘을 다 쏟지 않나. 뜻을 가지고 그저 할 일을 하면
괴테처럼 자기를 어마어마하게 키울 수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괴테는 어떻게 뜻을 가지고 자기를 키웠나.
“괴테의 활력은 세상을 향해 열려 있는 사유와 강한 체험 능력, 긍정적인 성품, 자신의 삶을 스스로
빚어가는 능동성, 남다른 위기 극복 능력 등에 힘입은 것으로 보인다. 끊임없는 노력, 특히 평생의 글쓰기가
병행됐음은 물론이다.”
요즘 개개인이든 사회든 도처에서 위기 신호가 감지된다.
괴테의 위기 극복 능력을 엿볼 수 있는 사례가 있다면.
“괴테는 외국어를 이것저것 배우는 게 힘들던 6세 때 여러 외국어 소설을 지음으로써
그 문제를 한꺼번에 극복한다.
라이프치히대 재학 시절엔 당대의 얕은 유행·취향에 따라 자신의 글이 무참히 비판당하자
원고를 다 불태워버렸을 만큼 절망감을 느꼈다.
큰 병에 걸려 학업을 중단하지만, 그 비판의 잣대를 규명해 보기 위해
그때까지의 독일 문학을 섭력하고 문학사를 써낸다.
학업을 마무리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변호사로 활동하면서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출간한 건
연애 문제에 대한 극복 방법이었다.
이미 약혼자가 있는 샤로테 부프를 사랑하게 된 괴테가 이룰 수 없는 사랑에 절망하다가
비슷한 처지의 소설 주인공을 만들어 (작중에서) 죽이고 자신은 해당 문제를
4주 만에(소설 집필 기간) 털어낸다.
젊은 날의 괴테 하우스 2층 전시실 테마가 바로 ‘극복’이다. 젊은 사람들이 얼른 와서 보면 좋겠다.”
불안한 한국 문화…“사람을 키워야”
괴테는 창작의 모든 단계에서 당대의 조류를 뛰어넘었고,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극복해낼 수 있었다고
전 교수는 설명했다.
그럼으로써 자신과 모국의 문학, 더 나아가 세계 문학·문화사에서 한 시기를 창조했다.
인생과 사상에 대한 성찰이 평생 그침 없었고, 그것이 모든 성취의 원동력이다.
이런 괴테의 정신은 헌신적인 부모와 당대 독일인들을 통해 형성되고, 후대 독일인들에 의해 계승 발전했다.
전 교수는 “독일을 숱하게 오가며 괴테, 프리드리히 실러 등 대문호들의 존재보다
그들을 있게 한 교양 시민층이 더 부럽다는 생각을 늘 했다”며 “잠재력이 뛰어난 사람을
괜히 밀어내거나 미워하지 말고
처음엔 낯설더라도 호기심과 애정 어린 눈으로 ‘어, 이거 뭐지?’ 하고 바라봐야 따라 클 수 있다”고 제언했다.
이는 K컬처의 세계화를 꿈꾸는 우리 정부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괴테가 태어났을 당시 독일어는 지방(地方)어라는 인식을 면치 못했고, 독일 문학도
지방 문학 취급을 받았다.
독일의 문화 저변에서 쑥쑥 성장한 괴테는 자국 문학을 단숨에 세계 문학으로 끌어올렸다.
괴테가 독일 문화에 기여한 바를 설명하는 전 교수의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부러움과 우리 현실에 대한 안타까움이 함께 묻어났다.
한국 문화에 대한 세계인의 관심이 높아졌으나, 내실이나 지속 가능성 등을 두고는 의문부호가 달린다.
“즉흥적인 발상보다 장기계획이 필요하다.
장기계획의 핵심은 다름 아닌 사람을 키우는 일이다. 괴테 자서전 《시와 진실》에는 ‘우리의 소망이란
우리들 속에 있는 능력의 예감이다’라는 문장이 있다.
사람 하나 잘 키워놓으면 나라 전체의 문화 수준이 올라간다.”
전 교수는 괴테의 운문 《파우스트》를 읽기 버거워하는
서울대 학생들에게 “에베레스트에 올랐던 사람(《파우스트》를 독파한 사람)이 관악산을 못 가겠느냐”며
학업 동기를 부여하곤 했다.
알고 보니 이는 그냥 나온 말이 아니었다.
그의 아버지는 2005년 85세의 나이로 아프리카 최고봉인 킬리만자로(5895m) 정상에 올라 화제를
모은 고(故) 전우순 선생(2010년 작고)이다.
역대 킬리만자로 등정에 성공한 사람 중 두 번째 고령자였다.
전우순 선생은 킬리만자로를 정복한 뒤에도 작고하기 한 해 전까지 매년 에베레스트에 올랐다.
전 교수는 “아버지는 사람이 뜻을 가지면 할 수 있는 일이 많다는 사실을 증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