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em 수필|이두래
어떤 김장
이두래
배가 남산만 한 쌀자루 두 포대가 거실을 차지하고 앉아 있었다. 베란다에는 배추, 무가 주방에는 반찬이며 파, 모과, 탱자까지 어지러운 모양새가 반가웠다. 곁다리로 따라온 모과, 탱자는 차로 방향제로 인테리어 효과까지 두루 쓰임새가 다양하다. 시골 가면 내 젓가락이 자주 가는 밑반찬까지 잊지 않고 보내셨다. 가지 채 꺾어 온 납작 감들도 벽 한쪽을 차지할 양으로 드러누워 있었다. 가을걷이를 끝내고 사소한 것들까지 갈무리해 보내 주신 것이다. 남편이 시골 큰댁에 다녀왔다. 시부모님이 안 계시니 두 분이 부모 맞잡이 인 셈이다.
그날부터 종종걸음을 쳤다. 김장하기 전 지레김치를 담아야 하기 때문이다. 배추김치, 동치미, 깍두기도 담고, 남은 배추, 무는 이웃과 나눔하였다. 벽에 걸어두려 꺾어 온 감들은 벽에 못 박기가 어려워 곶감을 만들었다. 나는 감을 깎고 남편은 실에 꿰어 베란다에 걸었다. 거실에서 보면 아이 방 창문에 오종종 매달려 있는 감들은 주홍빛 주렴처럼 예뻤다. 아이들은 하루에도 몇 번씩 베란다에 들러 언제 곶감이 되느냐고 위를 우러러 곤했다.
12월, 외출을 하고 돌아왔는데 베란다에 배추들이 올망졸망 쌓여 있었다. 이웃의 부모님이 도시 근교에서 밭농사를 지으신다고 했다. 농약을 뿌리지 않고 손수 벌레를 잡아 키운 배추는 얼금얼금 벌레 먹은 자국이 있었지만 얼마나 귀한 것이랴. 배추 포기가 작고 노란 속도 덜하지만 씹으면 달고 고소하기가 여느 배추의 곱절이다.
배추는 내재 된 사랑이 안으로 영그는 채소다. 다디단 실과를 오롯이 품고 고갱이부터 서서히 노랗게 익어간다. 오래 두어도 물러지지 않는 단단함이란 천천히 눌러 다져온 부모님의 내공처럼 단단하면서도 아삭한 식감을 잃지 않는다. 속도와 잇속에 치우친 시장 바닥에 자리 잡은 배추와는 비교 불가의 김치 미식이다.
배추와 함께 우리 집을 찾아온 손님들도 있었다. 배추벌레는 물론이려니와 알찬 배추 속 같은 노란 은행잎, 갈색 솔잎과 작은 솔방구리들도 따라왔다. 배추밭 풍경이 시야에 잡힐 듯 머릿속에 그려졌다. 배추밭은 산 가까이에 있을 터이고 밭 가에는 은행나무 한 그루도 서 있을 것이다. 가을날, 노부부는 배추를 돌보다 은행나무 그늘에서 새참으로 시원한 막걸리를 마시기도 하셨으리라. 그리고 노부부의 살뜰한 노고에 은행나무와 배추는 노랗게 여물어 가자고 약속했을 것이다. 어느 해 짧은 하루, 알찬 배추는 떠나고 잎조차 떨구고 빈 밭을 지키는 은행나무는 겨울 된바람에 외롭기도 하겠지. 배추와 은행잎은, 자식이 그리운 부모님의 마음 한 자락이 그렇게 내 집에까지 찾아와 머무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후 은행잎은 우리 집 식탁 유리 속 압화가 되었다.
다음 날 아침, 배추벌레 한 마리가 톡톡히 손님 대접을 받고 싶은지 거실을 한가로이 기어다녔다. 아이들은 무섭고도 신기한 듯 멀찍이 서서 한참을 지켜보다 급기야 코를 박고 관찰하는 품이 배추벌레 괴롭히기에 여념이 없었다. “엄마, 이 푸른 벌레가 커서 배추흰나비가 돼요.”사람도 겨울 준비를 하는데 미물인들 다를 바 있을까. 번데기로 겨울을 나고 봄이 되면 나비가 되겠지.
친정 어머니가 보내준 대봉감과 고춧가루도 김장에 한몫했다. 무채도 듬뿍 넣고 사과, 홍시도 넣어 김장 양념을 버무렸다. 올해 김장은 여러 부모님의 은덕을 모아 담았으니 당연히 맛이 있으렷다. 내게 맛있고 귀한 먹을거리를 보내 준 여러 부모님에게 부디 여생이 복되시라고 김치냉장고 문을 닫으며 맘속으로 빌었다.
지금 내 집에는 홍시가 질펀하게 입에서 녹아내리고 곶감이 창가에서 하얗게 몸을 말리고 있다. 창고엔 쌀자루가 만삭이고 김치냉장고에선 김치가 맛내기에 한창 열을 올리고 있다. 나는 겨우살이 준비를 거뜬히 끝내고 창고를 들여다보며 흐뭇해하고 있다. 쌀자루가 몸을 풀면 갓 지은 햅쌀밥에 갖가지 김치로 식탁을 차리고 허벅지게 먹어야겠다.
배추김치를 먹으며 겨울을 나고, 햇살 보드라운 봄이 오면 나도 혹 배추흰나비가 되는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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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두래|2013년 경남신문 신춘문예 수필이 당선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