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11 : 19 - 30절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백과사전에서 그리스도인이라는 단어를 찾아보면 이렇게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메시아로 예언한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가르침을 중심으로 하는 종교를 믿는 사람들을 통틀어 일컫는 말” 이렇게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아주 간단하게 다시 설명을 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쫓는 사람들”이라고 바꾸어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쫓는 사람들이 되었을 때 그리스도인이라 칭함을 받을 수 있는 것이지 단지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있다고 해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이 있다고 해서, 교회에 출석하고 있다고 해서, 예배를 드리고 있다고 해서 이런 이유 때문에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름을 받는 것은 올바른 모습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언제부터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기 시작 했냐면 예루살렘에서 스데반 집사가 돌에 맞아서 죽게 됩니다. 그때 엄청난 핍박이 있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이 예루살렘에 머물지 못하고 이곳저곳으로 삶의 터전을 옮기게 되는데 안디옥으로 피신한 사람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곳에 가서도 복음을 전파하고 전도를 하니까 21절 말씀에 나타나고 있는 것처럼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 이런 역사가 일어났던 것입니다. 사도행전 1장 8절에 보면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고 하셨는데 땅끝의 첫 출발점이 바로 안디옥이었다고 보시면 됩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주께 돌아 왔는지 그 소문이 예루살렘 교회에까지 퍼져서 바나바를 안디옥 지역에 보낼 정도였습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이 사람들의 소문을 듣고 바나바를 안디옥까지 보내니” 그렇게 보냄을 받은 바나바는 어떤 사람입니까? 사도행전 앞부분에서 좋은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았던 사람인데 24절에서는 이런 평가를 하고 있습니다.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여지더라”
착하게 사는 것이 별것 아닌 것 같아요 이렇게 중요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착하게 살면 사기를 당하기도 하고 이용을 당하도 하고 욕을 먹기도 하고 손해도 볼 수도 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착하게 살아야 우리가 전하는 복음이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지 착하게 살지 않으면 우리 몸은 편할지 모르겠지만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사는 것이기 때문에 헛된 인생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바나바가 얼마나 착한 사람이었냐면 자신의 재산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나누어 준 것도 대단한 일이지만 바나바 때문에 안디옥 지역에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많아진 상황에서 혼자 그 영광을 독차지 할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고 다소에 있던 사울을 데리고 옵니다. 착한 바나바와 사울이 안디옥 지방에서 복음 전파를 위해 일 년여 동안 노력을 했더니 그 때부터 안디옥이라는 지역에서 그리스도인이라는 호칭이 사용되기 시작 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시작된 이름이 그리스도인이라는 호칭이고 기독교인이라는 호칭인데 그런 호칭으로 불러지고 있는 우리가 착하게 살지 못한다면 굉장히 모순적인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그리스도인이라는 구별된 호칭을 가지게 되었으니까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는 것이고 좋은 것 아니냐?’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한편으로는 유대교는 로마 정부에서 인정을 받고 있던 종교였기 때문에 괜찮았지만 그리스도교는 그렇지 않은 종교였기 때문에 그 호칭 때문에 로마 정부로부터 탄압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었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100% 좋다고 단정 지어 말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실제로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로마 정부로부터 탄압을 받고 순교를 당했기 때문에 이 호칭을 듣기 위해서는 사실 목숨을 내어 놓아야 했다고 해도 전혀 지나치지가 않은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굳이 착하게 살고 성령과 믿음으로 충만한 삶을 살아야 할 이유가 뭐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안디옥 지역의 성도들은 그런 피해와 억울함을 감수하면서까지 그리스도인이라 사실을, 예수 그리스도를 쫓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감추지 않고 착함을 보여 주면서 살았던 것입니다. 사람들이 우리도 기독교인이라고 부르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우리도 안디옥의 성도들처럼 그런 각오와 착함으로 잘 살아가고 있는가를 점검해 봐야 하는 것입니다.
어느 날 젊은 중국인 신사가 중국 선교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있는 헤드슨 테일러 선교사님을 찾아와서는 정중하게 질문을 했습니다. “훌륭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는 얼마만큼의 성경 지식과 신앙의 연수가 필요합니까?” 이 질문을 들은 테일러 선교사가 그 젊은 신사에게 이렇게 질문을 던졌습니다. “램프의 심지가 얼마만큼 타야 빛을 냅니까?” “그야 알코올에 담겨 있는 심지에 불을 붙이는 순간부터 빛을 내지요.” “그렇습니다. 램프의 심지에 불을 붙이는 순간부터 빛을 내는 것과 똑같이 성경에 대한 지식이나 신앙의 연수가 전혀 없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러 주셨고, 우리의 인생은 하나님께 필요한 인생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겸손하게 받아들이는 순간부터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초월을 해서 빛이 나기 시작을 해야 합니다.” 이렇게 대답을 해 주었다고 합니다.
‘난 아직 신앙의 연수가 적으니까, 난 아직 성경 공부를 제대로 못 했으니까, 난 성경 일독도 못 했으니까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부족한 사람이다, 그렇게 부르는 것이 합당하지 않다.’고 말을 하면 안 됩니다. 예수님을 믿기로 작정한 순간부터 자신이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자긍심과 책임 의식을 가지고 최선을 다해 살아야지 성경의 지식을 따지고 신앙의 연수를 따지는 것은 올바른 그리스도인의 자세라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성경을 많이 읽었고, 아무리 신앙생활의 연수가 길다고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쫓는 사람이 아니라면 그리스도인이라 말할 수가 없습니다. 안디옥 지역의 성도들은 생명을 걸고 이런 호칭을 들었는데 우리는 아무 책임 의식도 느끼지 못하고 또 이런 이름으로 불리게 된 것에 대한 자긍심도 없이 살아간다면 우리를 기독교인이라고,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를 때마다 창피함을 느낄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가 예수 그리스도를 쫓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때 비로소 세상의 빛이 되고 소금이 되어 어두운 세상의 빛이 되고 살 맛 나지 않은 세상 속에서 맛을 내는 필요한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자살률이 OECD 국가 중에서 1위인데 이런 부분에 대해서 기독교인들이, 그리스도인들이 그 누구보다 부끄러워하면서 책임감을 느껴야 합니다. ‘혹시 우리의 착함이 부족해서 이런 현상이 나타난 것은 아닌가?’ ‘우리가 너무 어둡고 맛을 못 내서 이런 세상이 된 것은 아닌가?’ 회개하는 마음으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안디옥 지방에서 최초로 그리스도인이라는 호칭이 사용되기 시작을 했는데 왜 이 지방에서 그런 호칭이 처음으로 사용이 됐냐면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가르침을 쫓는 사람들이 급속도록 많아졌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 표현들이 계속해서 나오고 있는데 21절에도 보면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많은 사람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믿게 되었다는 의미이고, 24절에도 보면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여지더라” 이런 표현들을 통해 안디옥에서 그리스도의 도를 따르는 사람들이 급속도로 많아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게 많은 무리들이 구별된 모습으로 살아가니까 그런 무리들을 따로 부를 수 있는 호칭이 필요로 했었던 것이고 그 호칭이 바로 그리스도인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중요한 것은 큰 무리가 형성이 된 이유에 대해서 21절에서는 주의 손이 함께 하셨기 때문이라고 되어 있고 24절에는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여지더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의 손이 함께 계셨을 때 성장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은 당연한 것인데 거기에 무엇이 더 필요하냐면 바나바와 같은 착함과 성령의 충만함과 믿음의 충만함이 있었을 때 큰 무리가 주께 더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되고 그렇게 되었을 때 그리스도인이라는 호칭을 받게 되는 역사가 일어날 수 있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그리스도인이라는 호칭을 받고 있는데 그런 우리들도 똑같은 모습을 살아야겠다는 도전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하나님의 손이 우리 교회에, 우리 가정에 항상 함께 해 달라고 날마다 기도해야 하는 것이고 또 바나바처럼 성령과 믿음 충만한 상태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착한 행실을 보여 주어서 빛과 소금을 본분을 잘 감당을 하는 사람이 되어야지 착하지 않으면, 선하지 않으면 우리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는 착해야 합니다. 선해야 합니다. 악을 선으로 이길 정도로 착한 사람이 되어야지 비로소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는 호칭을 받을 수 있고 그런 삶을 살았을 때 우리의 중보자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영원한 중보자가 되셔서 우리의 기도에 능력을 주시고 응답을 주실 수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5장에서 너희는 세상의 빛이 되고 소금이 되라고 말씀을 하시면서 강조하신 것이 뭐냐면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5:16)
착한 행실을 보이는 것이 우리가 세상에서 빛이 되고 소금이 되는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씀을 하시고 있습니다. 착하지 않으면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고 그런 호칭을 들을 수 있는 자격도 없습니다. 이 당시 사람들은 생명을 걸고 예수를 주라 고백하면서 이런 호칭 듣는 것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는데 이런 호칭을 듣고 있으면서도 자긍심도 없고 책임감도 없고 착한 모습도 아니고…. 이런 신앙의 자세로는 우리 스스로가 기독교인이라고 불리우는 것을 부끄러워해야 하고 그런 사람들의 기도는 영원한 중보자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능력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자의이든, 타의이든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쫓는 사람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착하고 선하셨던 것처럼 우리도 착하고 선한 사람이 되어야 그리스도인의 능력을 가지고 세상을 이기면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런 값진 삶을 살아가라고 우리를 먼저 부르시고 기독교인이 될 수 있는 영광을 허락해 주신 것을 믿으시고 지금보다 더 착하게 살고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삶을 살다가 우리의 착한 행실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을 목표로 삼아 살다가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기쁨을 나누는 교회 모든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