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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예수가좋다오 원문보기 글쓴이: (일맥)
어떤 회개를 해야만 천국 가는가? 글/扈一麥
부흥회를 열기만 하면 강사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모두가 다 회개하라고 외친다. 많은 사람들은 천국에 들어가려면 철저하게 회개해야 한다고 한다. 진정으로 우리가 꼭 회개해야만 천국에 들어가는가? 회개를 한다면 어떻게 어떤 방법으로 회개를 해야 하는가? 우리 기독교에 있어서 회개에 대한 문제는 참으로 중요한 문제이다. 그리고 천국에 들어가려면 얼마나 오래, 또는 얼마나 많이 회개해야 하는가? 많은 눈물을 흘리면서 해야 하는가? 아니면 눈물을 흘리지 않고도 회개만 하면 되는가?
1. 자백하는 회개/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게 하실 것이요”(요일1:9) 2. 생명 얻는 회개/ “저희가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가로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하니라”(행11:18)
위와 같이 회개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자기의 죄를 낱낱이 자백 하는데도 생명을 얻을 수 없고 하나는 그렇지 않아도 생명을 얻을 수 있는 회개가 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날마다 회개를 하면서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는 죽을 때 까지 회개를 하여도 지옥 가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어떤 사람들은 구원을 얻기 위하여 날마다 눈물을 흘리며 회개 하고 있다. 이런 자들은 한마디로 자기 자신이 속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어떤 것이 생명을 얻는 회개인가?
예수님과 요한이 외친 회개 1. 요한이 외친 회개/ “세례 요한이 이르러 유대 광야에서 전파하여 가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마3:1) 2. 예수님이 외친 회개/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가라사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마4:17) 그럼 예수님은 무엇을 회개하라고 했으며 요한은 무엇을 회개하라고 했는가?
“요한이 유대 광야에서 자기에게 나오는 자들을 향하여 외치기를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리라”
1. 옷이 두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 주고,
예수님에 대한 증거
1. 그는 경건한 사람이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인정하는 고넬료는 베드로를 만나기전에 구원을 받은 자였을까?
고넬료는 하나님의 지시에 의하여 베드로를 청하여왔다.그러면 베드로가 그 가정에 전한 구원의 말씀은 무엇인가?
행10:34 “베드로가 입을 열어 가로되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시고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붓듯 하셨으매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 우리는 유대인의 땅과 예루살렘에서 그의 행하신 모든 일에 증인이라 그를 저희가 나무에 달아 죽였으나 하나님이 사흘만에 다시 살리사 나타내시되...미리 택하신 우리에게 하신 것이라”
베드로가 고넬료의 가정에 전한 구원의 말씀은 곧 예수님의 십자가의 흘린 피로 인하여 누구든지 그 사실을 믿는 자 마다 속죄함을 받는 말씀이었다. 베드로는 입을 열어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시고 중심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을 받으시는 분이며 그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화평의 복음을 전하”게 하셨고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나무에 달아 죽였으나 하나님이 사흘만에 다시 살리사” 자기들에게 그 사실을 전하도록 하셨다고 하였다.
그렇다 십자가의 사건은 구원의 필수적인 사건이다. 죄를 자백하는 회개가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이어서 증거하기를 “우리를 명하사 백성에게 전도하되 하나님이 산 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으로 정하신 자가 곧 이 사람인 것을 증거하게 하셨고 저에 대하여 모든 선지자도 증거하되 저를 믿는 사람들이 다 그 이름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는다 하였느니라”(10:42)하였다. 베드로는 예수님에 대하여 증거하면서 예수님은 하나님이 정하신 우리의 재판장이요 그 이름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는다고 하였다.
그러면 이 두 가지는 우리에게 무엇을 제시해 주는가?
< 하루는 한 재판장이 어릴 때 자기와 같이 자란 친구를 직접 재판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 졌는데 이때 판사는 고민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자기의 친구를 정죄해야 하기 때문이다. 판사가 볼 때 법대로 하면 친구를 감옥에 넣어야 하고 만약 그를 감옥에 넣지 않으면 자신에게 문제가 생기기 때문이다. 법이 있는 한 판사도 죄인을 무죄로 판결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왜냐 판사도 법대로 판결하지 않으면 옷을 벗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 판사라고 자기의 마음대로 판 결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왜냐 하면 판사도 자기위에 법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판사는 고민을 하다가 법에 의하여 자기의 친구에게 벌금형을 선고 했다.
예수님은 우리의 재판장이다. 그분은 죄로 인해 사형에 처해진 우리를 십자가로 말미암아 죄 값을 대신 갚으시고 지옥에서 우리를 건지신 재판장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런 공로도 없이 그 재판장 되신 예수님의 은혜로 죄 사함을 받게 된 것이다.
베드로의 두 번째 전한 복음의 내용은 예수님의 이름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는다는 것이었다.
하나는 자백하는 것이요, 하나는 타인의 이름을 힘입어 받는 것이다. 많은 교인 들은 자기가 지은 죄를 철저하게 자백함으로 사함을 받는 것만 알고 있다. 그러나 성경에는 또 다른 죄 사함 받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으니 그것은 타인의 이름을 힘입어 받는 것이다. 자백함으로 받는 것은 자기의 노력이 있어야만 받고 타인의 이름을 힘입어 용서 받는 것은 아무런 노력도 없이 은혜로 받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로서는 아무것도 할 일이 없다. 그저 공짜로 받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내가 은행에 1000만원 빚이 있다면 그 빚을 갚는 방법이 두 가지다. 하나는 자기의 노력으로 자기 자신이 갚는 방법이고 하나는 타인이 그 빚을 갚아 주는 방법이다. 그런데 타인이 빚을 갚아 줄때는 본인은 아무것도 할 것이 없다. 그저 그 갚아준 사실을 인정만 하면 된다. 바로 그렇게 타인이 갚아 주는 것을 가리켜 그 이름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는 다고 하는 것이다. 이렇게 타인이 빚을 갚아 주었을 때에는 그 갚아준 사실을 인정만 하면 된다. 이미 빚이 없어 졌기 때문에 인정하는 것 외에는 본인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우리의 죄의 빚을 예수님이 갚아 주셨다. 그러므로 성경은 그 사실을 가지고 증언하기를 그 이름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는 다고 한 것이다.
율법적으로 용서 받는 방법과 그 이름을 힘입어 용서받는 방법...
그렇다. 자기 자신이 율법을 잘 지키는 것으로나 죄를 자백하는 것으로는 의롭게 될 수가 없다. 우리의 노력으로는 죄의 빚을 청산 할 수가 없다는 말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내 대신으로 나의 빚을 갚아 주셔서 우리가 그것을 믿음으로 죄가 없어 졌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를 힘입어서 의롭게” 된 것이다. 우리가 회개해서 죄가 없어진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십자가의 피로 죄를 사해서 죄가 없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고넬료의 가정에서 “저를 믿는 사람들이 다 그 이름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는다”(행10:43)고 하였던 것이다.
베드로가 고넬료의 가정에서 이 말씀을 증거 할 때 어떤 현상이 일어났는가? 말씀 듣는 자들에게 성령의 역사가 일어났고 고넬료의 가정은 모두가 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함을 받았다. 행10:43 “저에 대하여 모든 선지자도 증거하되 저를 믿는 사람들이 다 그 이름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는다 하였느니라 베드로가 이 말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 오시니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 주심을 인하여 놀라니 이는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 높임을 들음이러라”
베드로가 예수님의 속죄를 증거 할 때 말씀 듣는 고넬료의 가정에는 성령이 내려지고 모든 자들이 성령을 받고 구원함을 받았다. 그래서 베드로는 고넬료의 가정이 성령을 받고 구원함을 받았음으로 “명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주었다. 베드로는 이때의 사실을 11장에서 설명하면서 그들이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고 생명을 얻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베드로는 이어서 고넬료의 가정은 오순절에 자기들이 받았던 것과 같이 저들도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다고 하였다. 그리고 베드로는 이어서 증거 하기를 “그런즉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저희에게도 주셨으니 내가 누구관대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하였다. 그러자 “저희가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가로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하였다.
고넬료의 가정은 베드로를 만나 생명 얻는 회개를 하였다. 생명 얻는 회개라고 하는 말씀은 평범한 말씀이 아니다. 생명 얻는 회개는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고넬료가 울면서 회개를 한 것이 아니다. 단지 저들은 베드로가 전하는 십자가로 말미암아 구원 받는 속죄의 말씀을 듣고 그저 “아멘” 한 것뿐이다. 그리고 고넬료는 베드로가 전하는 설교를 열심히 듣고 있었으므로 회개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그저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를 구원하는 구속사를 듣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때의 고넬료에게는 회개하고 기도할 시간적 여유가 조금도 없었다. 이 생명 있는 회개는 사람마다 단회적이다. 한번만 있다.
고넬료는 기도의 사람이다. 그러므로 고넬료는 날마다 자기의 죄를 회개(참회)했다고 우리는 인정할 수 있다. 그렇지만 고넬료는 구원을 받지 못한 상태였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고넬료를 구원시키기 위하여 베드로를 부르도록 한 것이다. 그래서 고넬료는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구원함을 받았다. 고넬료는 복음을 듣기 전에 아무리 회개해도 구원을 받을 수 없었다. 구원은 회개해서 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속죄하는 피를 믿음으로 받는 것이다.
그렇다면 회개를 하지 않아도 구원을 받는가?
탕자의 비유에서 얻는 회개의 교훈
많은 신앙인들은 눈물을 흘리며 통회자복 하여야 용서를 받고 천국갈 수 있는 것으로 생각 하고 있으나 눈물을 흘리는 회개와 믿음으로 얻는 구원은 별개의 것이다. 우리 한국기독교가 찬송은 잘 부르면서 찬송가에 있는 가사는 무시해 버리고 있다. 당신은 찬송가의 가사를 믿는가? 믿는 다면 울어서 죄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은 다윗이 우리아를 죽이고 밧세바를 취했을 때 눈물을 많이 흘리며 회개했기 때문에 죄를 용서 받은 것으로 알고 있으나 그것은 착각 하고 있는 것이다. 다윗은 간음하고 살인한 죄를 용서 받을 때 눈물을 조금도 흘리지 않았다. 거의 모든 기독교인들이 다윗은 간음한 죄로 인해서 침상이 떠나가도록 눈물을 많이 흘렸기 때문에 용서받은 사람으로 알고 있으나 그것은 완전히 잘못된 생각이다. 다윗은 죄를 용서받을 때 눈물을 조금도 흘리지 않았다. 다윗이 용서받은 사건을 자세히 보라.
삼상12:9 “그러한데 어찌하여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업신여기고 나 보기에 악을 행하였느뇨 네가 칼로 헷 사람 우리아를 죽이되 암몬 자손의 칼로 죽이고 그 처를 빼앗아 네 처를 삼았도다. 이제 네가 나를 업신여기고 헷 사람 우리아의 처를 빼앗아 네 처를 삼았은즉 칼이 네 집에 영영히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고 여호와께서 또 이처럼 이르시기를 내가 네 집에 재화를 일으키고 내가 네 처들을 가져 네 눈 앞에서 다른 사람에게 주리니 그 사람이 네 처들로 더불어 백주에 동침하리라 너는 은밀히 행하였으나 나는 이스라엘 무리 앞 백주에 이 일을 행하리라 하셨나이다
다윗이 나단에게 이르되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 하매 나단이 다윗에게 대답하되 여호와께서도 당신의 죄를 사하셨나니 당신이 죽지 아니하려니와 나단 선지자는 다윗을 혹독하게 책망 하였다. 그러자 다윗은 “나단에게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 하였다. 그러자 나단이 다윗에게 “여호와께서도 당신의 죄를 사하셨나이다”라고 하면서 하나님께서 죄를 용서해 주셨음을 선언 했다.
위의 성경에 명시된 대로 다윗은 눈물을 조금도 흘리지 않고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 하자 하나님께서 당신의 죄를 용서하셨다고 했다. 죄란 진정으로 잘못을 느끼고 진정으로 회개하면 용서 받는 것이지 눈물을 흘려야 용서받는 것은 아니다. 나오지도 않는 눈물을 억지로 짤 필요가 없다.
롬4:6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 바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면 다윗은 전혀 울지 않았는가 하고 반문할 것이다. 아니다 울었다. 그런데 간음한 죄를 용서받기 위하여 운 것이 아니라 죄는 이미 용서 받았으나 간음한 아내를 통해서 태어난 아들이 죽게 생겼으니 아이를 살려달라고 금식하며 울었던 것이다.
삼하12:15 “우리아의 처가 다윗에게 낳은 아이를 여호와께서 치시매 심히 앓는 지라 다윗이 그 아이를 위하여 하나님께 간구하되 금식하고 안에 들어가서 밤새도록 땅에 엎드렸으니 그 집의 늙은 자들이 곁에 이르러 다윗을 일으키려 하되 왕이 듣지 아니하고 저희로 더불어 먹지도 아니하더라 이레만에 그 아이가 죽으니라” 다윗은 금식하며 1주일 동안 울었으나 아이가 죽자 금식과 우는 일을 중단 하였다.
삼하12:21 “신복들이 왕께 묻되 아이가 살았을 때에는 위하여 금식하고 우시더니 죽은 후에는 일어나서 잡수시니 어찜이니이까 가로되 아이가 살았을 때에 내가 금식하고 운 것은 혹시 여호와께서 나를 불쌍히 여기사 아이를 살려 주실는지 누가 알까 생각함이어니와 시방은 죽었으니 어찌 금식하랴”
그렇다 다윗은 1주일동안 금식하며 울었다. 그러나 그것은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대로 하나님 앞에 죄를 용서받기 위하여 침상이 떠나가도록 운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 죄를 용서받을 때는 눈물을 한 방울도 흘리지 않고 그저 “나단에게 이르되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 하매 나단이 다윗에게 대답하되 여호와께서도 당신의 죄를 사하셨으니 당신이 죽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다윗이 침상이 떠나가도록 울며 회개했기 때문에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 하고 있다. 눈물을 흘리는 회개와 구원은 전혀 관계가 없다.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만 받는 것이다.
그렇다 우리는 구원받을 자격이 하나도 없는 죄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십자가의 공로로 우리에게 “죄없는자라 선언” 하시고 우리의 죄를 “인정치 않는 것” 이다. 당신은 죄를 회개하므로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피로 당신의 죄를 사하였기 때문에 구원받은 것이다. 만약에 회개하므로 구원을 받는다면 우리를 구원하는데 있어서 우리에게는 회개하는 공로가 포함 된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아무런 공로도 없이 구원한 것이다. 구원은 거저 받는 것이요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다. 어느 누구도 선물을 통해서 구원을 받지 않는다면 이 세상에는 구원을 받을 사람이 하나도 없다.
엡2:8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위의 말씀을 현대어 성경에는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 받은 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믿게 된 것조차도 여러분의 자발적인 의지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인 것입니다.”
그러면 회개를 하지 않아도 되는가?
고넬료는 베드로를 만나기 전에도 하나님을 경외하며 경건하게 산 위인이다. 그는 하나님께 상달할 만큼 자기를 다스리며 회개와 기도를 많이 한 사람이다. 그러나 고넬료는 구원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베드로를 청해서 복음을 듣도록 한 것이며 그 시간에 고넬료는 십자가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하는 복음을 듣고 죄 사함 받은 사실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 그런데 이렇게 구원받은 것을 가지고 성경은 고넬료가 생명 얻는 회개를 했다고 기록하였다.(행11:18)
요일1: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게 하실 것이요” 내가 말 하고자 하는 것은 회개를 하지 말라고 하려는 것이 아니라 회개는 해야 하지만 그 회개가 구원을 얻게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구원과 상관이 없을 지라도 회개를 해야 한다.
“만일 그 자손이 내 법을 버리며 내 규례대로 행치 아니하며 내 율례를 파하며 내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면 내가 지팡이로 저희 범과를 다스리며 채찍으로 저희 죄악을 징책(懲責)하리로다 그러나 나의 인자함을 그에게서 다 거두지 아니하며 나의 성실함도 폐하지 아니하며 내 언약을 파하지 아니하며 내 입술에서 낸 것도 변치 아니하리로다”(시89:30)
성경은 증거 하기를 율법을 어기면 “지팡이로 저희 범과를 다스리며 채찍으로 저희 죄악을 징책(懲責)하”신다고 하였다 그러나 법을 지키지 않아도 하나님께서는 세우신 언약만은 페하지 않겠다고 하였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언약의 피로 구원 받은 사람들이 율법을 범하면 그 죄악을 징계 할 지라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받은 구원은 취소하지 않겠다는 말씀이다. 성경은 율법을 범한 사람에 대하여 구체적인 징계의 단계를 설명해주고 있다.
“이러므로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아니하니 우리가 우리를 살폈으면 판단을 받지 아니하려니와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죄 정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고전11:30)
그렇다고 해서 죄를 범한 자들을 그대로 둘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죄를 범한 자들을 처음에는 약하게 하시고 다음에는 병들게 하시고 그래도 하나님의 일에 방해가 될 정도로 도저히 용납 할 수 없는 자들은 잠들게 하시므로 죄에 대한 징벌을 내리시고 복음에 방해를 받지 않도록 하신다. 그러나 한 가지 놀라운 것은 세상 사람들과 같이 “죄 정함을” 받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 말은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지옥으로 보내지는 않는다는 말씀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하나님 앞에 감사해야 할 것은 우리가 지은 죄를 따라 처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시103:10 “우리의 죄를 따라 처치하지 아니하시며 우리의 죄악을 따라 갚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하늘이 땅에서 높음 같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그 인자하심이 크심이로다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같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나니 이는 저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진토임을 기억하심이로다”
하나님은 우리의 체질을 아신다. 이 말씀은 엄마가 애기의 체질을 안다는 의미이다. 애기의 체질을 아는 엄마는 애기를 함부로 때리지 않는다. 애기가 이불에 오줌을 싼다 하여도 함부로 때리는 엄마는 없을 것이다. 왜냐 엄마는 애기의 체질을 알기 때문이다. 그와 같이 하나님은 우리의 체질을 알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죄를 진 것에 따라 처치하지는 않는다. 한 부모의 자녀들이 똑 같은 죄를 범해도 나이나 성숙한 척도에 따라 때린다. 그와 같이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죄를 따라 처치하지 않는다고 하셨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이 죄를 묵인 하는 것은 아니다. 반듯이 징계 하신다. 성경은 징계가 없으면 사생자라고 하셨다.
히12:7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또 우리 육체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늘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여 살려 하지 않겠느냐 저희는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예케 하시느니라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히12:8)
기독교가 이방 종과와 다른 점은 이방 종교는 자의적 구원 종교요 기독교는 타의적 구원 신앙이다. 내가 노력해서 천국가려는 종교는 세상 종교이고, 하나님이 내가 한 것이 없는데 은혜로 미리 다 아시고 길을 열어 놓으신 것이 그리스도교(敎)이다. 이방 종교는 죄를 없애는 방법을 다 동원하여서 노력을 해도 지옥가고 예수그리스도 믿는 이는 예수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로 내 대신 속죄양이 된 것을 믿기만 하면 용서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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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두가지 회개(회심과 자백)을 구분 못하여 생기는 이단이 무자백구원파(박옥수계열 구원파이단)과 자백구원파 이단(변승우등 율법주의 행위구우너론 이단)입니다. 전자는 거룩을 이루라는 하나님의 뜻을 무시하는 것이고, 후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완전대속 복음을 믿는 믿음으로 구원 진리를 무너뜨리는 사탄의 간교한 미혹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