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전설 29회

[신상득]

“하모, 하모. 그카는 기다. 우헤헤헤…….”
덕암이 만족스런 웃음을 흘렸다. 김정의 승리였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데 고바우가 핏발선 눈으로 일어서서 손에서 가죽을 끌렀다. 찢어진 손등에서 붉은 피가 흘러 떨어져 금세 바닥을 적셨다. 내리치는 속도가 찔러오는 속도보다 빨라 손목이 아닌 손을 벤 것이었다. 고바우가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니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미안하게 되…….”
“요시-.”
김정이 고바우에게 다가가 정중히 사과하는 바로 그때 느닷없는 고함과 함께 고바우의 빌랑대 날끝이 가슴을 파고들었다. 고바우가 옆에 떨어진 목검을 집어 들고 순식간에 찌른 것이었다.
‘아차-.’
늦었다는 직감이 고통스럽게 머리를 강타했다. 몸을 비껴나면서 목검을 세워 서둘러 걷어 냈다.
“욱-.”
비명이 절로 쏟아졌다. 숨이 콱 막히고 눈앞이 캄캄했다. 예상치 못한 힘이었다. 나름 충분히 막았다고 여겼건만 워낙 무지막지하게 찌르는 통에 왼쪽 가슴을 찔리고 말았던 것이다. 몸을 돌린 덕에 다행히 큰 내상을 입지는 않았으나 오기가 발동했다. 어금니를 굳게 물고 목검을 곧추세웠다.
“씨팔-.”
고바우가 욕지거리와 함께 목검을 바닥에 내동댕이치고 도장을 나가 버렸다.
“우헤헤헤헤…….”
덕암의 웃음소리가 도장 밖으로 울려 퍼졌다. 덕암이 필시 둘의 싸움을 즐기고 있었음이다. 길을 가다가 어린아이 싸움만 목격해도 이러쿵저러쿵 하는 덕암이었으니 이상할 것도 없었다.
“죄송함니더.”
“아이다, 잘했다, 글마 자슥. 헤헤헤…….”
덕암은 호탕하게 웃었다. 김정이 이날 고바우와의 목검 겨루기에서 손을 내리 벤 것은 실력이라기보다 운이었다. 고바우가 김정을 너무 손쉬운 상대로 여겨 방심한 탓에 가능한 일이었다. 강자가 약자에게 당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 그것은 강자가 방심하다 틈을 내주기 때문이다.
“범이 말이다, 토끼 한 마리 잡을라 캐도 신경을 잔뜩 모다가 하는 기다. 대충 하마 안 된데이. 깜빡 당하는 벱이라. 알았나?”
덕암은 상대를 얕잡아보다가 당하는 경우를 빗대어 이렇게 말하곤 했다. 아무튼 그날 이후 고바우는 더 이상 도장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사범 임명

“대구가 장사해야 한다 카메 부산으로 가뿟다.”
1960년 음력 정월 초이튿날 세배를 갔더니 덕암이 곰방대를 빨면서 말했다. 대구를 보낸 섭섭함을 달래기라도 하는지 술에 얼근히 젖어 있었다.
김정은 1년 남짓 무예를 배우면서 종종 덕암의 스승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상세한 이야기는 없었지만 스승과 약속 때문에 누군가에게 기술을 가르쳐야 한다거나, 기술을 제대로 배우는 놈이 없어 답답하다는 내용이었다. 제자라는 놈들이 대충 배워 나가서는 본부도장 간판을 걸기도 하고, 되레 덕암을 가르쳤다고 거짓말해 혼쭐냈다고도 했다.
“이제 보이 그 양반 말이 올쿠마. 죽을 때까지 마음에 드는 제자 하나 만나마 큰 복이라 캤구마.”
입에 정종을 털어 넣는 덕암의 얼굴에서 쓸쓸한 미소가 묻어났다. 그 양반이란 덕암의 스승을 일컬음이었다.
대구가 덕암을 떠난 이유는 두 가지였다. 그중 하나는 대구를 향한 덕암의 엄청난 구박이었다. 김정이 처음 수련을 시작할 때 집에서 가르치던 덕암은 얼마 뒤 유종권이란 장사꾼이 건물을 거저 쓰라고 해서 도장을 북성로로 옮겼다. 유종권은 회비가 싸면 회원이 많이 몰릴 것이라고 판단하고 수련비를 스무 날에 3만 환해서 한 달에 6천 환으로 대폭 내리라고 조언했다. 듣고 보니 그럴싸해 그 말을 따랐지만 사정은 예상을 완전히 빗나갔다. 회원이 전혀 늘지 않아 한 달 평균 18만 환 하던 수입이 2만4천 환으로 떨어졌다. 도장은 운영난에 빠졌고 그것은 곧바로 덕암의 생활고로 이어졌다. 성미 급한 덕암이 가만있을 리 만무했다. 도장 건물을 거저 내놓은 유종권을 나무라기 머쓱
하자 대구를 닦달했다.
“일마 자슥아, 니가 문젠 기라. 회비도 싸고 도장도 좋은데 회원이 없는 건 니가 옳케 몬 해가 글타 이 말이라.”
이런 닦달이 심심찮게 되풀이 됐다. 처음에는 그러려니 하고 넘기던 대구도 시간이 흐르면서 노골적인 반발을 보였다.
“세임예, 그기 와 지 잘못잉교. 세임이 회원들 하도 조지뿌가 글마들이 다들 내뺐다 아잉교?”
이 소릴 듣고 잠자코 있을 덕암인가.
“뭐라꼬? 이 새끼가.”
다짜고짜 손찌검이었다. 스승이 죽으라고 제자를 때렸을 리 없지만 이런 일이 잦아지자 둘 사이에는 감정의 골이 깊어지기 시작했다.
대구가 떠난 또 다른 이유는 김정에 덕암의 눈에 띄는 편애였다. 단짝인 고바우가 도장을 뛰쳐나간 뒤 대구는 외톨이 신세를 면치 못했다. 여기에 김정을 향한 덕암의 지나치리만큼 친근한 태도는 대구를 질투심을 활활 타오르게 했다.
“장군, 집에 가 쪼매 더 하고 가그래이. 좋은 거 갈키 주꾸마.”
눈치가 보여 견딜 수 없을 정도였다. 처음부터 개인지도를 받은 데다 덕암이 이렇게 애착을 갖고 가르치니 실력이 일취월장할 수밖에. 사범은 대구였지만 실력은 김정이 대구를 압도했다. 간간이 겨루기라도 하면 대구가 패배의 쓴맛을 보기 일쑤였다.
“김 형요, 덩치도 크고 힘도 좋은데 뭐 할라꼬 배우능교? 안 배아도 암도 몬 덤비겠네요. 고마하이소.”
대구는 종종 이렇게 구슬렸다. 이렇게라도 해서 도장에서 경쟁자를 몰아낼 꿍꿍이였던 것이다. 그러다 생계가 곤란해지자 마침내 대구는 훌쩍 부산으로 떠나고 말았다. 대구보다 김정에 마음이 더 가는 건 사실이었지만 도장을 맡고 있던 대구가 떠나자 덕암은 헛헛한 감정이 들어 대낮부터 술에 절어 얼굴이 불콰해져 있었던 것이다.
“내사 안 믿는다. 인자는 절대 사람을 안 믿을 끼다.”
덕암은 이렇게 뇌까렸다. 김정은 할 말이 없었다. 대구 대신 도장을 맡아 해 보고 싶은 욕구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무예가 진로를 변경할 만큼 생애에 비중 있는 일은 아니었다. 어릴 때부터 총신대에 입학해 목사가 되길 꿈꿔 왔던 이상은 변함없던 터였다. 경북대학교 수의학과에 진학한 것도 훗날 시골에서 목회를 하려면 가축 기르는 일 따위를 배우는 게 좋다는 교회 전도사의 조언 때문에 선택했다. 어찌 한낱 무예가 인간의 구원문제를 다루는 종교에 비할 바인가.
“장군, 나와 보그라. 인자는 니가 사범인 기라.”
그로부터 나흘 뒤인 정월 초엿새. 도장을 찾았을 때 덕암이 김정을 불러 세웠다. 덕암의 외아들 방렬이 친구와 함께 갈탄 난로에 불을 지피고 있었다. 을씨년스런 날씨만큼이나 도장 분위기는 썰렁했다.
“예?”
갑작스런 주문에 입이 딱 벌어졌다.
“옛 말이 나가마 새 말이 대신하는 기라.”
김정의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덕암의 태도는 단호했다. 섭섭한 감정을 추스르고 나온 탓인지 얼굴에 비장한 결의마저 서렸다. 사실 지난 나흘 동안 김정은 김정대로 고심했다. 삭막한 도장을 운영하는 데 자신 외에 뾰족한 대안이 없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명령에 가까운 사범 역할 수행을 거부할 형편이 아니었다. 다만 자칫 너무 깊숙이 개입했다가 목회의 길에 걸림돌이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사범이 우째 흰띠를 매겠노?”
이번에도 일방적이었다. 덕암은 미리 준비해 둔 검정띠를 내밀었다. 김정은 엉겁결에 검정띠를 받아들었고, 그것으로 사범 임명과 수락이 동시에 이뤄졌다.
덕암은 도장을 운영하면서 회원들에게 띠와 단을 만들어 주었다. 처음 입문하면 흰띠, 3개월 지나면 파란띠, 6개월 지나면 붉은띠를 매도록 했다. 검정띠는 덕암이 적당한 시기를 보아서 내주었다.
“흑띠를 맸다 카는 기는 거듭난 기라. 다시 태어났다 이 말이라.”
덕암은 승단식 때 검정띠를 매는 회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승단 하는 회원들은 덕암에게 고마움의 표시로 양복이나 금반지를 선물했다. 승단식이 거행되는 날은 덕암과 제자들이 양껏 술을 마셨다. 코가 비뚤어지도록 마신 회원들의 마지막 행선지는 대개 영화 관람이었다. 영화는 최고의 선물이었다. 학생들은 어른회원의 승단식 때 끼워서 승급 및 승단을 해 줌으로써 경제적 부담을 덜어 주었다. 승단식 때마다 나름 성대한 잔치를 열 수 있었던 것은 수련생이 의사나 회사 사장 등 상당한 재력이 있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김정은 입문하고 난 이후 사범이 될 때까지는 한 차례의 승단식도 거행되지 않아 줄곧 흰띠를 매야 했다. 흰띠를 매고 수련하면서 검은띠를 맨 대구와 고바우를 상대했으니 그들의 자존심이 얼마나 구겨졌을지는 상상이 갈 만한 일이다. 덕암이 흰띠를 매던 김정에게 검은띠를 건넨 것은 실력에 대한 나름대로의 덕암의 믿음이 바탕에 깔려 있기 때문이었다.

김정은 덕암의 수하에서 모든 기술을 배울 때까지 하루 여덟 시간씩 만 6년간 수련했지만 급증이나 단증을 받은 적은 한 차례도 없었다. 덕암을 대신해 심사를 보아 주고 단증을 발급하면서도 정작 자신은 아무것도 받지 않았고 또 거기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지금은 어느 무예를 막론하고 단증과 급증을 발급하고 거기에 맞게 띠를 매도록 한다. 하지만 단증과 급증, 띠는 결코 실력을 가늠하는 척도가 아니다. 그저 어느 정도까지 기술을 배웠다는 상징적 의미일 뿐이다. 날마다 똑같은 다리질을 하는 태권도의 경우 다리질의 속도와 정확도를 가지고 단증이나 급증을 발급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꺾꽈시를 비롯해 목검, 다리수 등 다양한 기술을 두고 어떻게 단증을 줄 수 있겠는가. 꺾꽈시는 8단 실력인데 빌랑대는 전혀 배우지 않은 회원에게 무슨 수로 단증을 준다는 말인가. 그래서 김정은 훗날 한풀을 창제한 뒤 단증이며 급증을 아예 없애 버렸다.

좋았던 두 기억

봉대 이야기5

후유코와의 재회

다케다와 봉대 등 일행은 도쿄로 가기 위해 미즈카키산을 내려왔다. 도쿄로 가려면 니라사키에서 기차를 타야 했다. 6년만에 하산하는 이들의 행색은 산에서 내려올 때부터 가관이었다. 흐르는 계곡물에 얼굴이나 가끔 비춰 보았을 뿐 거울 한 번 제대로 보지 못하다 보니 차림새가 저잣거리의 사람들과는 전연 딴판이었다. 산을 내려간답시고 치렁치렁한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대충 빗어 넘기고 옷을 골라 입었으나 꾀죄죄하기 그지없었다. 새까맣게 그을린 얼굴이며 너덜너덜한 옷가지는 거지에 견줄 수준이었다.
산에서 생활할 때 이들은 주로 도복을 입고 지냈다. 도복은 6년 전 산에 오를 때 니라사키에서 구입한 광목을 겹겹이 누빈 뒤 얼기설기 엮어 만들었다. 그동안 광목을 몇 필이나 도복으로 만들어 입었는지 몰랐다. 밤낮 도복을 입고 지내다 보니 당연히 다른 옷을 입을 기회가 없었다. 가끔 마을을 내려갈 때는 깨끗한 도복으로 골라 입고 다녀왔다.
그러다 막상 산을 내려가게 되니 마땅히 입을 옷이 없었다. 키가 훤칠해진 탓에 바지는 설멍했고, 소매는 길이가 짧아져 팔뚝이 그대로 드러났다. 작은 옷에 간신히 팔다리를 끼워 입자 ‘북’소리가 나며 실밥이 터졌다. 겨드랑이며 사타구니가 찢어지기도 했다. 꼬질꼬질 구겨지거나 실밥이 터진 것은 그나마 양호했다. 심지어는 허리춤에 곰팡이가 슬어 쾨쾨한 냄새가 코를 찌르기도 했다.
어쩔 수 없이 하나씩 골라 입었는데 그게 꼴불견. 몸집이 비교적 작은 봉대는 모리가 입산할 때 입었던 상하의를 얻어 입었는데 길이가 짧아 종아리며 손목이 드러났다. 짧은 상하의에 도복을 외투처럼 걸쳐 입으니 수도승에 다름 아니었다. 야마모토의 외투는 어깨가 해진 데다 안감으로 넣은 솜이 찢어진 겉감 틈바구니로 불쑥 튀어나와 있었다. 꿰매 입으려다가 바늘허리가 냉큼 부서지는 바람에 그마저 무위로 돌아갔다. 몸집이 큰 모리는 도무지 입을 옷이 없어 수련하던 도복을 빨아 입었는데 꼬질꼬질 구겨진 데다 색까지 누렇게 바래 있었다. 돼지털처럼 꼿꼿하게 뻗친 수염에 치렁치렁한 머리카락은 산적의 행색에 다르지 않았다. 종종 마을을 다녀온 덕택에 비교적 말쑥한 차림의 다케다도 텁수룩하게 수염을 기른 데다 헝클어지지 않도록 질끈 동여맨 긴 머리칼은 마찬가지로 기이해 보였다.

[쌈닭]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