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이래도 되는 겁니까? 홍대입구에는 '걷고 싶은 거리'가 있다는데, 턱이 높은 곳이 많아서 걸을 수가 없으니 말입니다."
|
|
|
|
김동희 소장(사진 우)이 프로그램을 진행하며 게스트와 대화를 나누고 있다. |
|
독특한 오프닝 멘트와 함께 시그널 음악이 깔리면서 차분한 톤의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안녕하세요. 장애인방송 '함께 쓰는 희망노트'의 진행자 김동희 입니다."
매주 월요일과 수요일 오후 2시 서울 마포와 서대문 일대에서 라디오 주파수를 FM 100.7MHz에 맞추면 국내 최초이자 유일하게 장애인이 기획하고 제작하는 방송을 들을 수 있다. 이 방송은 소출력 지역방송국(마포FM)을 통해 청취자들을 찾아간다.
프로그램 PD와 진행자, 코너별 리포터와 작가, 엔지니어 등 10명의 제작진이 모두 소아마비를 비롯해 지체장애를 안고 있다. 이들은 서울 마포지역에서 '라디오 스타'로 통한다.
지난해 1월 1일 오후 2시 첫 전파를 탔으니, 이제 1년이 조금 넘었다. 프로그램 진행자인 김동희 소장(마포장애인자립재활센터)의 기획으로 시작된 이 프로그램은 출발 당시 2천여 명의 마포지역 장애인들에 청취 대상이 맞춰졌지만, 현재는 비장애인 열혈 청취자도 많을 정도로 인지도가 높아졌다.
김동희 소장은 "기존의 장애인 방송과는 차별성을 두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는 "장애인 방송은 모두 비장애인이 기획하고 제작하면서, 장애인을 동정과 시혜의 대상자로 몰고 간다"면서, "장애인적 관점에서 만드는 방송"이라고 소개했다.
방송 시작 후 각 코너마다 장애인들의 삶과 주장을 생생하게 담아내며 동네 주민들의 귀를 사로잡는 반향을 일으켰다. 장애 여성들의 애환을 그린 '그녀들의 수다', 장애인의 사건과 사고를 알려주는 '장애인 뉴스', 장애인 관련 정책과 정보를 소개하는 '세상의 중심 마포에서 장애인을 만나다', 장애인들의 노래실력과 입담을 뽐내는 '마이크를 잡아라', 꽁트 형식을 빌린 '두리의 일기' 등의 다채로운 프로그램이 만들어져왔다.
코너 가운데 '마이크를 잡아라'는 중증장애인들을 사회 속으로 불러 모으는 계기를 만들었다. 중증장애인은 외출과 이동이 어려워 사회와 유리되는 경우가 많은데, 이 코너가 탈출구 역할을 하고 있다.
'함께 쓰는 희망노트' 프로그램의 중요한 의미는 여기에 있다. 장애인들이 찾아오지 못하면 찾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희망노트'를 펼쳐놓고 함께 기록하는 것이다. 말 그대로 '함께 쓰는 희망노트'인 셈이다.
이 프로그램은 장애인들에 대한 비장애인들의 고정관념과 잘못된 인식을 바로잡아주고 선도하는 매개체가 되고 있기도 하다. 현실성이 떨어지는 정부의 장애인 정책이나 사회적 통념을 신랄하게 비판하기도 한다.
|
|
|
|
'함께 쓰는 희망노트' 제작 현장. |
|
PD와 구성작가, 편집 엔지니어 등 1인 3역을 소화하고 있는 차미경 씨는 "장애인 방송이지만 비장애인이 더 많이 청취했으면 한다"는 바람을 전했다. 그 이유로 "방송을 들으면 장애인에 처하는 여러 가지 상황들을 공감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생방송이 아닌, 녹음방송이기는 하지만 에피소드도 많다. '마이크를 잡아라'에 초청된 게스트가 갑작스레 출연을 하지 못해 진행자인 김 소장이 자신의 '18번'을 불러 청취자들의 열렬한 호응을 얻었다. 또 의사전달이 어려운 중증장애인의 경우, 진행자가 뜻을 다시 전달해주기도 한다.
최근에는 장애인들에게 희망과 고민을 풀어냈다는 공로가 인정돼 한국커뮤니티라디오 방송협의회로부터 대상을 받기도 했다. 장애인을 위한 프로그램으로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사는 세상을 현실화하는 데 견인차 역할을 한 것.
이러한 공로와 에도 불구하고 제작 여건은 어렵다. 제작진에게는 특별한 출연료나 제작비가 없다. 제작에 턱없이 부족한 소정의 금액만 지원을 받을 뿐이다.
김동희 소장은 "방송을 통해 세상에 주도적으로 참여하는 장애인들이 늘어나는 것을 보면서 어려운 여건이지만 힘을 얻는다"면서 "교회에서도 관심을 갖고 많은 기도를 부탁드린다"고 말했다.
'희망노트'는 이제 1년간의 기록을 마쳤다. 지금까지도 그랬지만 앞으로도 '희망노트'에는 이러한 내용들로 채워질 것이다. "장애인은 복지와 동정의 대상이 아니다. 장애인이 추제적인 삶을 살지 못하는 것은 비장애인의 편견 때문이다. 장애인들이 사회의 구성원으로 이동권과 교육권, 노동권 등의 기본적인 권리를 향유하며 비장애인들과 통합하여 살 수 있는 날이 구현되기를 기대한다. 파이팅!!"
|
|
|
|
마포장애인자립생활센터 김동희 소장. |
|
*마포장애인자립생활센터 김동희 소장
'함께 쓰는 희망노트'를 처음 제안하고 현재 진행을 맡고 있는 김동희 씨는 마포장애인자립생활센터 소장을 겸하고 있다. 그는 장애인의 문제를 인권 문제로 보고, 10년 넘게 장애인의 자립생활 정책연구를 통해 해결책을 제시하는 운동을 하고 있다.
김동희 씨는 "기존의 장애인 복지는 장애인을 사회 구조에 맞추는 패러다임"이라면서 "장애인의 욕구 반영은 물론 당사자의 의견존중과 참여가 주체적으로 이뤄지는 정책체계를 구성하고자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20년 넘게 사회에서 객체로 지냈다. 돌이 지날 무렵 소아마비를 안게 됐고, 20살이 넘어서야 사회의 문을 두드렸다.
"20살이 넘도록 집에서 홀로 보냈죠. 26살까지 학력이 없었어요. 이후에 검정고시를 보기는 했지만요."
그는 독실한 감리교(인천 주안감리교회) 신자다. 감리교단 목회자인 외조부로부터 신앙을 이어받아 모태신앙을 가진 그는 기독교방송의 한 라디오 프로그램을 통해 인생의 '희망노트'를 적기로 다짐했다.
"방송에서 삶과 죽음의 관계에 대해 나왔어요. 문득 '돌봐주시는 부모님이 계시지 않으면 어떻게 하나'라는 생각을 해봤죠. 직업을 갖고 자립을 해야 한다고 마음을 먹었죠."
그는 국립재활원을 통해 컴퓨터 프로그래머가 됐다. 그리고 한국장애인단체총연맹에서 운영하는 장애인방송아카데미를 수료한 후 KBS 제3라디오에서 MC와 성우로 활동한 경험을 살려 '함께 쓰는 희망노트'를 기획했다.
"장애인은 그저 '불쌍한 사람'이 아니에요. 중증장애인이 지역사회의 주체적인 구성원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그들의 권리 확보를 위한 권익옹호 활동을 계속 진행할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