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계 자료
국명 : 아르메니아 공화국
면적 : 29,800 sq km
인구 : 3,500,000
수도 : 예레반 (Yerevan)
인종 : 코카서스 인
종교 : 아르메니아 정교 94%
정부 : 공화제
대통령 : 로버트 코차얀 (Robert Kocharyan)
지리 및 기후
벨기에 보다 작은 크기의 아르메니아는 흑해와 카스피아해의 지협에 위치해 남서쪽에 이란, 남서부 가장자리에 터키, 북쪽에 조지아, 동쪽에 아제르바이잔과 국경을 접하고 있다. 지형은 북부는 소 코카서스(Little Caucasus) 산악지형(Maly Kavkaz)으로 높아지고, 불모의 평지는 남부로 뻗어 터키와 이란으로 이어진다. 해발 1,000m 이하는 10% 밖에 안되며 가장 높은 곳은 4,090m의 아라갓 산(Mt Aragats)이다. 아락 강(Araks River)은 대부분의 이란 국경과 터키 국경의 일부를 흐른다. 사막 비슷한 언덕과 알파인 지형이 불과 몇 킬로 사이에 있으며, 비옥한 아라랏 밸리(Ararat VAlley)지역에서 대부분의 농산물이 재배된다.
아르메니아의 동물은 투르(tur, 야생 염소), 무플론(mouflon, 야생 양), 차모이스(chamois, 영양같이 생긴 염소)가 있으며 엄청나게 다양한 양생화가 봄과 여름에 핀다. 가을의 세반 호수(Sevan Lake) 주변은 색은 눈부시게 아름답지만 불행이도 호수의 1/3이 수자원 보호지역으로 지정되어 화력발전소로 물이 배수된다. 아제그바이잔의 에너지 봉쇄로 인해 수목들을 화목으로 쓰기 위한 대규모의 삼림벌채가 행해졌다.
국토의 삼림지역은 겨우 10%에 불과하며 18%는 불모지, 1/3은 목초지다. 북부 코카서스 산맥은 겨울 러시아의 혹독한 추위를 막아주고 그 결과로 아르메니아의 기온은 페르시아와 시리아의 영향을 받는다. 11월부터 4-5월이 가장 비가 많이 오는 시기지만 인접국가와 비교해 비가 많이 오는 편은 아니다. 북부의 산악지역은 겨울에 눈으로 덮혀있지만 아라랏 밸리 같은 저지대는 따듯하고 여름에는 매우 덥다. 남부는 아열대 지역이다.
역사
불쌍한 아르메니아인은 오랜 시간동안 내분과 전쟁을 하는 국가들 사이에서 샌드위치에 낀 모플론 신세로 수시로 변하는 국경을 넘어 달아났다 돌아오길 수 없이 반복했다. 과거와 현재의 국경은상대국가에 따라 변동했지만 흑해와 카스피해는 민족 이주, 종교 싸움, 민족간의 증오, 전쟁, 승리와 패배가 혼재하던 지역임에는 변함이 없다. 아르메니아는 현재의 에레반(Yerevan)에 성을 건설한 아기스티스 왕(King Argistis)의 우라투(Urartu)와 마케도니아 제국의 알락산데 대왕, 셀루시드(Seleucid), 로마제국과 비잔틴의 지배를 받았다. 428년에 아르메니아를 점령한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교 강요로 인해 451년에 반란이 일어나 아르메니아에게 정치적, 종교적 자유를 가져오게 했다.
무슬림 아랍제국은 7세기에 아르메니아 북부를 지배했으며 카니보로스(Canivorous)의 실력자인 아솟 바그라투니(Ashot Bagratuni)가 당시 위세를 떨쳤다. 하지만 11세기에 비잔틴 제국이 세력을 재확장해왔고 뒤를 이어 투르크(Turk) 제국의 점령을 받았다. 12세기말에는 이집트의 맘룩(Mamluks)과 십자군이 지배를 했으나 서양 방식의 재편이 일루어졌다.
페르시아와 오스만 투르크가 뒤를 이어 아르메니아를 통치했는데 오스만 투르크는 400년이나 아르메니아를 지배했다.18세기의 아르메니아는 여러 제국들의 개선과 정치적 문화적 자립을 위한 노력이 이어졌다. 아르메니아의 문학, 예술, 종교와 교육은 오스만과 러시아 제국의 통제하에서 활성화 됐고 이는 결국 아르메니아의 정치운동을 야기하게 된다. 19세기에는 러시아가 예레반 뿐 아니라 현재의 터키까지도 지배를 했으며 러시아와 터키의 전쟁이 1870년대 발생했다.
터키에 거주하던 아르메니안들은 민족 말살정책으로 인해 학살당했으며 1890년대 수 십만 명이 죽었다. 1905년의 러시아 혁명과 1908년의 터키 혁명은 아르메니아의 독립의 기회를 가져왔으나 세계 1차대전 발발과 함께 오스만 제국과 러시아 제국이 진입해왔다.
아르메니아인에 대한 박해는 1915년 대학살로 이어졌는데 젊은 투르크 운동은 아르메니아 기독교가 전쟁기간동안 러시아에 동조할 것을 우려해 1-2백만명이 살해됐다. 1916년 러시아는 오스만 아르메니아를 점령했으나 1차대전 동안 러시아 군대의 고통으로 인해 아르메니아에게 일시적인 자치권을 부여했다. 트랜스코카시아(Transcaucasia)로 독립을 선표했으나 1개월 4일만에 아제르바이잔, 조지아, 아르메니아로 분리됐다. 터키가 재진입하고 러시아 제국도 소련으로 국가가 바꿔 1921년까지 지배했다.
국경에 대한 불만은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간의 70년 가까운 긴장을 야기했고 소련의 비공식적인 개방정책은 또다른 폭력으로 이어졌다. 1988년 겨울에 일어난 북서부의 지진은 2만 5천명의 인명피해와 5천만명의 피해자뿐만아니라 10%의 경제능력과 주택을 파괴시켰다. 무슬림 아제르바이잔에 둘러 쌓인 아르메니아 기독교인인 나고노-카라바흐(Nagorno-Karabach)는 아르메니아와 통합을 위한 투표를 실시했는데 80%를 차지하면서 소수민족인 아르메니아은 아제르바이잔의 반대로 인해 진압의 피해를 입었다.
유전을 보유한 이 지역은 소련의 잘못된 지도작성법으로 인해 아제르바이잔의 영토를 소련이 가지게 되었고 수십만의 아르메니아인과 아제르바이잔인은 잘못된 국경에 생활하고 있어 양국간의 전쟁으로 발전했다. 아제르바이잔의 수도인 바쿠(Baku)에서 소련과 마주친 아르메니아인이 참사를 당했다.
소련이 결국 바쿠를 점령하고 아제르바이잔은 1980년 선거를 통해 사회주의 국가가 되고, 국가주의자 대통령인 레본 테 페트로시안(Levon Ter Petrosian)은 아르메니아를 통치하게된다. 소련이 철수한 1991년에 아르메니아는 독립을 선포하고 1993년에는 나고노-카라바흐를 포함한 아제르바이잔의 1/5의 영토를 통제하고 있으며 1994년 양국간의 휴전이 이루어져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군사행동은 신생국가와 이란, 터키로부터 경제봉쇄를 당하게 했으며, 아라랏 산(Mt. Ararat)을 포함한 역사적으로 아르메니아의 중요한 땅들은 현재 터키에 속해있다. "아라랏을 열망하는 것이 정상에 이르는 것보다 더 고귀하고 흥분된다"고 아르메니아 시에 적혀있다. 나로고-카라바흐는 명목상 아제르바이잔의 소유지만 아르메니아를 통해서만 접근이 가능하고 아르메니아 군대가 경비하고 있다. 이런 상황은 경제를 더욱 약하게 만들고 있으며 조지아(Georgia)와의 분쟁으로 인해 공급로가 차단되어 경제는 활력을 잃고 있다. 1998년 3월에 59%의 지지를 받아 당선된 대통령인 로버트 코차얀(Robert Kochayan)은 5년 임기다.
경제
GDP : 9백 7천만 달러
1인당 GDP : 2,800 달러
인플레이션 : 5.7%
주요 산업 : 기계, 의류, 화학, 극소 전자공학, 대부분 공업이 소련의 철수로 폐쇄됨
주요 교역국 : 이란, 러시아, 투르크메니스탄, 조지아,
문화
예레반을 둘러보면 서남아시아의 문화가 어떤지 쉽게 알 수 있는데 중동과 비슷하지만 이슬람과 이슬람 사원이 없는 중동의 문화다. 교회 건축은 복잡한 석조 조각으로 꾸며져 있으며 7세기에 종교적 건축이 활발했는데 아르메니아의 교회는 러시아의 교회보다 단순하다. 이집트 태생으로 아르메니아에 1962년에 정착한 하콥 하콥얀(Hakob Hakobyan)은 중요한 현대화가이며, 작곡가 아람 카차투리안(Aram Khachaturian)과 조각가 코렘 데 하루티안(Korem Der Harootian)은 국내외적으로 유명하다.
전통음악은 중동의 박자기호에 따른 중동의 사운드이며, 아름다운 민속음악은 생활의 일부로 연주된다. 아르메니아 문학은 속담, 우화, 민속설화가 발달했고 소설가와 시인들은 20세기 문학의 발전에 공헌을 했는데 카차토우 아포비안(Khachatour Apovian)은 현대 아르메니아 문학의 창시자로 평가받고 있다. 코카서스 지역을 언어로 구분한다면 코카서스인, 인도-유럽인, 터키인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아르메니아는 인도-유럽인에 속하며 코카시아에서 인도-유럽어를 가장 많이 쓰는 국가이다.
아르메니아는 일찍 기독교로 개종했으며 가장 오래된 교회는 4세기에 건설됐다. 아르메니아 정교 교회의 수장은 에쉬미아드진(Echmiadzin)에 살고 있다. 교회의식은 예배와 성가 등의 종교적인 의식을 행하지만 크리스마스를 축복하지 않는다.양고기를 주로 먹으며 쌂은 양고기인 카쉬아마(kashiama)가 특별요리이다. 세반 호수(Lake Sevan)에서 잡은 숭어 또한 훌륭하다. 아제리(Azeri) 경제봉쇄에도 불구하고 과일과 채소는 쉽게 구할 수 있으며 콩, 이집트 콩, 가지, 요구르트, 타보울레(tabouleh)와 중동음식이 다양하고 코냑은 최고 수준이다.
축제 및 행사
아르메니아인은 기회가 있으면 축제와 콘서트, 연주회, 전통 춤과 음악공연을 일년 내내 개최한다.신년이 가장 큰 휴일로 선물을 교환하고 집을 개방한다. 어머니와 미의 날은 4월 7일, 3월/4월에 열리는 부활절에는 자기 계란을 깨뜨리지 않고 다른 계란을 깨뜨리며 소망을 기원하고, 성 금요일(Good Friday)부터 시작된 종교의식은 1주일간 지속된다. 아르메니아 정교 교회는 유일하게 크리스마스를 축복하지 않는다. 승리 기념일인 5월 9일은 군대 퍼레이드가 펼쳐진다.
아르메니아인은 아직도 희생을 숭배하며 어린 아이들은 꽃과 키스를 선사하고 나이가 있는 어린이들은 보드카와 코냑을 마시는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 대부분의 마을은 봄의 시작과 같이해 문화와 음악 축제를 하며, 모든 지방은 여름동안 전통축제와 현대적인 축제를 개최한다. 7월에 열리는 물의 날은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물을 서로 끼얻는다.
세반 호수는 주말 행사와 여름동안 콘서트가 열리며 야외공연장은 수공예품과 음식을 준비해 전통 춤과 음악 공연이 열린다. 흐라즈단(Hrazdan?)에서 열리는 가을 축제인 보스키 아슌(Voski Ashun)은 10월에 열리고 수확이 끝나고 겨울로 접어들면서 예라반에서 문화 시즌이 시작된다. 예라반의 버니사게 문화 공원(Vernisage Art Park)은 자발적인 콘서트와 즉흥적인 춤 공연이 일년 내내 주말에 수시로 열린다.
여행자 정보
비자: 유효한 여권과 비행기 티켓이 있으며 3-4주 비자가 공항에서 발급된다.
보건위생 : 간염, 박테리아 전염, 스테파나컷(Stepanakert) 주변의 지뢰
시간 : GMT + 3시간
전압 : 220V, 50Hz
도량형 : 미터법 (도량형 환산법 참조)
경비 및 환전
통화 : 드람 (Dram, AMD)
일반 경비 :
저렴한 숙소 : US$1
중급 호텔 : US$5-10
고급 호텔 : US$50 이상
저렴한 현지 식사 : US$2.50-5
중간가격대의 레스토랑 식사 : US$10-20
최고급 레스토랑 식사 : US$20 이상
아르메니아는 싸게 여행할 수 있는데 조금 인색하게 군다면 하루에 US$20-25면 가능하다. 교회와 유적들을 돌아보는데도 큰돈이 안 든다. 하지만 편안한 여행을 원한다면 하루에 US$50는 필요하고 예레반에는 세계적인 수준의 가격인 호텔도 여러 개 있다. 환전은 서유럽에 비해 불편한데 환전소와 현금인출기가 많이 없다. 달러와 여행자 수표는 예레반의 Arm-econobank나 시장 거래소에서 적당한 가격으로 환전을 할 수 있다. 소련의 붕괴로 인해 루블화는 더 이상 가치가 없다. 가격흥정은 일반적인 것이 아니며 좋아하지도 않는다. 서비스에 대한 10%의 팁을 권한다.
여행 시기
가을(9월-10월)이 여행하기 가장 좋은 시기이며 성수기가 없어 숙박시설을 구하기 위해 여행자들과 경쟁할 필요가 없다. 겨울의 추운 날씨를 원하지 않는다면 5월에서 10월까지가 적당하며, 아르메니아의 스키 리조트는 유럽에 비해 저렴하고 훌륭한 시설을 갖고 있어 스키를 타려면 1-2월이 적당하다.
주요 여행지
예레반(Yerevan)
20개 이상의 박물관이 있는 예레반은 세계에서 오랜된 정착지 중의 하나로 삼면이 언덕으로 둘러 쌓여 있으며 동북부에서 남서부의 아라랏 산으로 완만하게 경사져있다. 중심 도로는 거대한 공화국 광장(Republic Sqare, 한때 레닌 동상이 있어 레닌 광장으로 불리움)으로 향한다. 공화국 광장에는 역사 박물관, 중앙 우체국, 호텔 아르메니아와 수많은 상점과 미드랜드 아르메니아(Midland Armenia), 미랏(Milat)같은 외국 은행이 위치하고 있다.
신년 축제 같은 행사나 기념일에는 행사와축제를 즐기려는 사람들로 공화국 광장이 복잡하고, 독립 기념일에는 군대 행진이 펼쳐진다. 주요 거리인 울리차 아보비아나(Ulitsa Abovyana)와 울리차 마쉬톳스(Ulitsa Machtots)에 중요한 시설들이 위치하고 있다. 반원의 풍치지구는 동쪽 끝에 위치하는데 인상적인 기념관, 빌딩, 동상들이 거리를 우화하게 만드는데 조로아스터교인 페르시아를 물리친 아르메니아 기독교 군의 바단 마미코냔(Vardan Mamikonyan)의 거대한 기마 상, 아르메니아의 서사적인 영광의 상징인 에레부니 박물관(Erebuni Museum), 1915년 터키의 대학살로 피해를 당한 백 5천만명을 추모하기 위한 아르메니아 학살 기념관이 위치하고 있다.
1937년 건축 디자인 대상을 받은 화려한 오페라 하우스는 현재 아르메니아 교향악단의 카차투리안 홀(Khachaturian Hall)로 쓰이고 있고, 소련의 잔인한 건축학교였던 코미타스 실내악 연주장(Komitas Chamber Music Hall)은 현재 가장 훌륭한 공연장으로 코미타스 4중주단의 연주장으로 쓰이고 있는데 코미타스는 민속음악을 녹음하고 전통을 보존하는데 공헌한 작곡자 겸 성직자의 이름에서 유래됐다.
마텐다다란(Matendadaran)은 9세기부터 쓰여진 만 2천여점의 아르메니아 원문, 채식 사본, 책과 원고를 연구하는 곳으로 아르메니아 문화의 보고이다. 예레반의 호텔은 많지 않지만 중심에 위치해 찾기 쉽고, 소련의 붕괴로 인해 경제가 악화됐으며 작은 게스트 하우스와 펜션이 수도에 들어서고 있다. 페르시아 방식으로 사람을 만나거나 거리를 서성대거나 차나 음식을 즐길수 있는 예레반의 거리 카페는 쉽게 찾을 수 있으며 영어 메뉴가 있는 곳도 있다.
에쉬미아드진(Echmiadzin)
아르메니아의 두 번째로 큰 도시로 기원전 340년부터 184년까지 아르메니아의 수도였다. 아르메니아인에게 신성한 도시로 티리다테(Tiridates) 3세가 기원전 400년 이곳에서 기독교로 개종 한 곳으로 성모마리아를 돌로 사형한 후 정신이상을 일으켰으나 기독교인 죄수인 그레고리(Gregory)의 구원으로 개종했다. 에쉬미아드진은 정교도 성당의 가장 중요한 도시로 한때 이교도의 숭배지였으나 현재는 아르메니아 정교도 교회의 수장이 거주하고 있다.
성 흐립시메 교회(St Hripsime Church)는 618년에 재건설한 교회로 원래는 성 흐립시메가 죽은 곳에 세워진 예배당이었다. 가장 아름다운 건물로 평가받는 성 그레고리 교회(Church of St Gregory)는 641-61년에 건설되어졌으나 10세기의 지진으로 파괴되어 유적만이 남아있으며 예레반의 아르메니아 역사 박물관에서 원래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예레반의 버스역에서 서쪽 20km 지점에 아쉬미드진이 위치한다.
아쉬타락(Ashtarak)
아쉬타락은 5-6세기의 치라나보(오렌지)교회(Tsiranavor Church)와 7세기의 카름라보(붉은) 교회(Karmravor Church)가 남아있고, 아르메니아의 가장 높은 산인 아라갓 산의 2,300m 고지에 11-13세기의 암버드 성 (Amberd fort)과 교회가 있다. 아쉬트락-타린(Ashtarak-Talin) 국도에서 6km 떨어진 뷰라칸(Byurakan)은 기상대가 위치한다. 아쉬타락은 예라반에서 북쪽으로 22km 떨어져 있으며 버스로 이동이 가능하다.
아타샷(Artashat)
코 비란 수도원(The Khor Viran Monestery)와 초기 아르메니아 수도의 유적이 남아있는 아타샷은 계몽자 그레고리가 수감된 수도원이 있고 기원전 2세기의 수도였다. 현재 발굴중인 기원전 340년 경의 수도였던 드빈(Dvin)이 인접하고 있다. 예라반에서 버스가 운행되며 남쪽으로 30km 떨어져있다.
세반(Sevan)
트랜스코카시아에서 가장 큰 호수인 세반 호숫가에 위치한 작은 마을로 호수는 해발 1,900m에 위치하고 있으며, 크기는 1,360 sq km로 구 소련 아르메니아의 5%를 차지하고 있었으나 수력발전과 관개용수로 라즈단 강(Razdan River)이 이용되면서 420 sq km로 크기가 감소됐다. 하지만 호수의 크기가 작아지면서 2,000년 이상 된 성, 가옥, 문화유물이 출토됐으며 일부 고고학적인 발견품들은 예레반의 아르메니아 역사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
9세기의 수도원이었던 두 개의 교회가 세반 반도(원래는 섬이었다.)에 있고, 구 소련이 1980년대 건설한 호수의 남부와 아파(Arpa) 강을 잇는 산악 터널로 인해 물이 라즈단 강으로 유입된다. 예레반에서 북동쪽으로 50km 떨어져 있으며 에레반-초바규흐(Yerevan-Tsovagyukh) 노선의 기차가 하루가 3회 세반으로 운행된다.
잘 알려지지 않은 여행지
디리잔(Dilizhan)
고산도시인 디리잔은 아르메니아의 광천수 공급원이며, 주도로인 울리차 먀스니카나(Ulitsa Myasnikyana)에있는 박물관은 방문 할 만하다. 가구와 카펫 공장은 쇼핑하기에 좋고 좁은 골짜기를 사이에 두고 있는 13세기의 수도원(마토사반크Matosavank와 듀흐탁반크Djukhtavank)을 구경할 수 있다. 과장된 표현이기는 하지만 아르메니아인들은 천국이 디리잔처럼 생겼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며 나무와 온천이 있는 매우 아름다운 산악지역이다.
아가친(Agartsin) 계곡과 아가친 수도원은 가을에 방문해 볼만한 곳으로 중세시대 아르메니아 문화의 중심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었고 아르메니아 건축 양식의 걸작이다. 스파를 즐길 수 있는 아즈니(Arzni)가 인접하고 있다. 디리잔은 2,114m에 위치하고 있으며 120km 에레반으로부터 떨어져 있고 버스로 이동이 가능하다.
아라버디(Alaverdi)
아르메니아 동북부의 데베드(Debed)계곡에 위치한 구리 광산마을로 세 개의 고대 기독교 유적지가 아라버디 주변에 위치하고 있다. 사나인(Sanain) 수도원의 가장 중요한 작품인 아메납르키치(Amenaprkich) 교회가 남서쪽으로 몇 킬로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고 6세기의 오드준(Odzun) 교회와 중세의 묘지가 아라버디에서 17km 떨어진 사나인의 서쪽에 있다. 10-13세기에 건설된 악흐팟(Akhpak) 수도원은 아라버디의 동쪽으로 11km 떨어져있다.
트빌시시(Tbilisi)의 왕실 시인이었던 현재도 인기가 있는 러브송을 부른 18세기의 음유시인인 사얏-노바(Sayat-Nova)가 망명한 곳이도하다. 아라버디로 가는 가장 좋은 방법은 113km 떨어진 조지아의 트빌리시(Tbilisi) 출발하는 것으로 예레반보다 2개 가까이 가깝다. 하지만 기차로 트빌리시에서 하루 투어를 하기는 불가능하다.
레저스포츠
예술가 협회에서 운영하는 예술 투어를 참여할 수 있고, 건축과 도시 디자인에 관심이 있다면 예레반 건축 협회가 주관하는 투어를 참여해도 된다. 동굴탐험가와 활동적인 사람을 위해서는 아르메니아 동굴학협회에서 주관하는 등산, 동굴 탐험 투어는 환상적인 경관을 따라 초보자를 위한 쉬운 코스부터 한달짜리 힘든 지형을 등산하는 코스가 있다. 싸이클링도 해 볼만 하지만 자전거를 가지고 와야하는 불편함이 있다. 하지만 아르메니아의 수많은 종교적 건축물들을 천천히 전부 돌아 볼 수 있다.
아르메니아로 가는 길
베를린 장벽과 소련이 붕괘 되기 전에는 모스크바에서 비행기로 아르메니아로 입국하는 게 가장 보편적인 방법이었지만, 현재는 입국장소가 여러 곳으로 늘어났다. 여전히 모스크바에서 비행기를 타거나 이틀 반이 걸리는 기차를 타고 올 수 있다. 시간이 많은 여행자들은 터키의 카스(Kars)에서 아쿠랸(Akhuryan)으로 기차로 입국이 가능하지만 현재 양국의 국경은 폐쇄돼 있다. 소련으로부터 독립한 후 아르메니아와 터키의 외교관계는 호전됐으나 부분적인 면에서는 여전히 안 좋은 사이다. 아제르바이잔에서 아르메니아로 입국은 불가능하지만 이란과의 국경은 개방돼있다.
국내 교통편
버스가 신뢰할만한 교통수단으로 기차가 운행되지 않는 지역까지 운행되고 있다. 경제 봉쇄로 인해 유가가 상승해 교통은 불편하다. 차를 빌려 여행하는 건 아르메니아를 여행하는 가장 좋은 방법으로 가난한 국가에서 쉽게 접하는 어린이들과 가축들을 피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