딩 때의 여름방학, 어느 금요일 오후. 소년은 떨떠름한 기분이 들었다.
내일이면 가족들이 바닷가로 피서를 간다고 하는데…. 이것저것 준비한답시고 부산을 떠는 식구들과 달리, 6학년짜리 이 녀석은 그저 뜨악하기만 하다. 아마 4학년 때부터였을 게다. 가족들과 함께 보내는 여행이 그닥 재미있지 않다는 걸 깨달았던 시기가.
‘가족들하고 같이 있는 것도 지겨울 텐데, 하물며 바다엘 간다고라…!’
시루 속에 빼곡이 늘어선 콩나물 대가리마냥 이리 치이고 저리 북적대는 해수욕장에 가봤자 뻔할 뻔 자다. 분명 탈의실이나 샤워시설은 사람들로 미어 터질 거고, 기껏해야 튜브에 매달려 물장구나 몇 번 깔짝대다가 결국은 파김치가 되어 돌아올 테니까 말이다. 그럴 바엔 차라리 소파에서 뒹굴뒹굴 사과나 깨물어 먹으며, 애거서 크리스티Agatha Christie의《오리엔트특급 살인사건, Murder on the Orient Express》을 마저 읽어 치우는 게 훨씬 낫지. 이제부터 우리의 명탐정 에르큘 포와로가 본격적으로 활약할 시점인데….
‘아, 쓰바… 무슨 핑계를 대야 이 엿 같은 상황을 모면할 수 있을까나?’
뭐가 그리 신이 나는지 동생은 벌써부터 물안경을 쓰고 온 집안을 휘젓고 다닌다. 김치며 깻잎, 멸치볶음 등의 밑반찬을 비닐봉지에 싸서 아이스박스에 꼼꼼이 챙겨 넣는 어머니와 모든 준비 상황을 지휘하는 외삼촌 사이를 어슬렁대며, 소년은 계속해서 잔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그때였다. 방바닥에 아무렇게나 굴러다니던 신문 쪼가리가 소년의 눈길에 포착된 것은.
자석에 이끌리듯, 소년의 몸은 펼쳐진 신문의 사진 한 컷을 향해 스르륵 다가섰다. 아니다, 사진이 점프컷을 하면서 물수제비처럼 소년의 눈으로 통통 튀어 들어왔다는 게 맞을 것이다. 소년은 화들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사진 속에는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른 클린트 이스트우드Clint Eastwood가 시가 꽁다리를 잘근잘근 씹으며, 잠에서 막 깨어난 듯한 특유의 눈빛으로 잔뜩 가오를 잡고 있었다. 기사 내용을 보니까… 아니, 이게 웬일! 내일 ‘주말의 명화’ 시간에『석양의 무법자, The Good, the Bad and the Ugly<1966>』을 한다는 게 아닌가!
계속 기사를 읽어 내려갔다. 출연진에 클린트 이스트우드, 리 밴 클립Lee Van Cleef…
‘오잉? 매부리코에 뱁새눈을 한 인상파 형님 리 밴 클립도 나오잖아!’
피서고 뭐고 지금 그 따위가 중요한 게 아니다. 소년은 가슴이 콩닥콩닥 뛰면서 다급한 마음이 일기 시작했다. 이제 결단을 내려야 할 때가 온 것이다.
‘갑작스레 친구와 약속이 생겼다고 우겨?’
어림 반 푼 어치도 없는 소리일 뿐이다.
‘열이 나고 감기 몸살 기운이 있다면서 아예 드러누워 버려?’
그렇게 호락호락 속아 넘어갈 어른들이 아니다. 더구나 섣불리 꾀병을 부렸다간 오랜만에 나들이하는 엄마마저 못 가게 될 가능성도 있다. 소년의 꿍꿍이속 때문에 다른 사람까지 피해를 볼 수야 없는 노릇! 정면 돌파 외에는 달리 뾰족한 방법이 없어 보였다. 어차피 다른 이유를 둘러대봤자 통하지도 않을 거, 솔직하게 쇼당을 걸었다. 거의 땡깡에 가까운 수준이었다. 잠시 지방에 가신 아버지를 대신해 대장 노릇을 하는 외삼촌이었기에 그나마 돌부처와도 같은 막무가내식 버티기 신공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마침내 우여곡절 끝에 집에 남기로 했다. 초등학교 6학년짜리 꼬맹이 혼자서 말이다!
비디오니 DVD니 그런 개념조차 없던 시절이다. 소년이 두 살 때 만들어진 이 영화가 극장에서 다시 개봉할 리 없다. 또 언제 다시 TV에서 방영해 줄지도 모를 일이다. 영화를 저장해서 가끔씩 되새김질해 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머릿속에 꾹꾹 눌러 담아두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본방’을 사수해야 한다.
그런데… 생각해보시라. 철딱서니 없는 꼬맹이 혼자 1박 2일 동안 버틴다는 것이 생각만큼 그리 수월한 일은 아닐 게다. 어쨌든… 비상금이라고 엄마가 쥐어준 돈 몇 천 원과 얼마간 먹을 수 있는 냉장고 안의 먹을거리와 함께 토요일 오후부터 ‘Home Alone!’
심부터 해결해볼까. 소년은 엄마가 준비해놓은 음식은 안중에도 없었다.
우선 걸어서 15분 거리에 있는 국수집에서 가락국수(* 당시에는 가끼우동이라고 불렀다)를 한 그릇 사 먹었다. 이 국수집은 당시 3학년이던 동생과 단 둘이 손잡고 가서 몇 번 사 먹었던 곳이다. 할머니라고 부르는 게 더 적당할 듯한 아줌마가 운영하던 허름한 가게였는데, 다른 손님들이 없을 때는 꼬맹이 손님들한테 노래를 시키곤 했다.
“낙엽 지던 그 숲속에 파란 바닷가에 떨리는 손 잡아주던 너…”
그때 나무젓가락으로 장단까지 맞춰가며 신나게(?) 불렀던 것들이 이종영의 <너>라든지 “나는 네가 좋아서 순한 양이 되었지 풀밭 같은 너의 가슴에…”로 시작하는 이수미의 <내 곁에 있어주> 같은 노래들이었다. 나름대로 열심히 불렀던 데는 다 이유가 있다. 노래를 부를 때마다 못내 귀엽다는 듯 주름 가득한 아줌마 얼굴에 미소가 번지며 오뎅이나 유부를 몇 조각 더 얹어주기도 했으니까.
아마 노래 가사의 뜻도 잘 모르고 지껄였을 거다. 당시 유행했던 노래 중에는 코미디언이었다가 가수로 데뷔한 김미성의 <아쉬움>이란 곡이 있었다. “그대가 떠나간 뒤에 잊겠지 생각했는데 날이 가면 갈수록 그리움 내 맘에 쌓이네…”라며 청승을 떠는 노래였는데 가사 중에 나오는 ‘잊겠지’가 ‘will be forgotten’이라는 데까지는 아직 생각이 미치지 못했던 것 같다. 이 노래를 듣거나 부를 때마다 언제나 머릿속에 솟아오르던 의문 하나.
‘아니… 그대가 떠나갔다며? 그럼 지금은 당연히 없는 거지 말이야. ‘있겠지’, 하고 생각하는 건 또 뭐람? 투덜투덜…’
‘뭔가 다른 깊은 뜻이?… 도대체 어른들의 세계는 참으로 알 수 없도다. 궁시렁궁시렁…’
각설하고, 우쨌든동 생각 같아서야 가끼우동이 아니라 청량리까지 버스를 타고 나가 당시 동일극장 옆에 위치한 ‘우영종합분식’에서 함박국수(* 스파게티 같은 면발에 햄버그 스테이크가 곁들여지고 그 위에 계란프라이가 올려져 있었던 걸로 기억이 난다. 한 300원 정도 했던가!)를 먹고 싶었지만 어디 초반부터 무리해서야 되겠나. 체력을 아끼자…. 탁상시계의 자명종을 맞춰놓고 미리 낮잠까지 한 시간가량 자두었다.
저녁 때쯤에는 동네 시장에 나가 빙수(* 요즘처럼 고급스런 팥빙수가 아니다. 얼음을 대충 갈아 그릇에 담고 그 위에 미숫가루 두 숟갈, 정체불명의 노란색 액체와 분홍색에 가까운 액체를 한 줄기씩 뿌려서 먹는 일종의 불량식품이었다)를 사 먹고, 돌아오는 길에 시장 한쪽 귀퉁이에 좌판을 차린 단골집에 들러 떡볶이를 샀다. 물론 떡볶이 국물에 불려 양념 고추장을 슬쩍 묻힌 오뎅과 야끼만두를 포함시키는 것도 잊지 않았다. 지금도 그렇거니와 예전에도 이렇게 조악한 음식을 만드는 곳이 어딘가 항상 궁금했다. 별로 유쾌하지 않은 기름 냄새로 범벅된 채 딱딱하기로는 거북이 등껍질 같은 것이 그 안의 내용물이래봤자 바싹 말라비틀어진 당면 쪼가리가 전부인… 그렇지만 나이 들어서까지도 계속 이런 불량식품이 은근히 맛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아무래도 엄마나 마누라가 먹지 말라고 하는 것을 몰래 사 먹는 금단의 맛이기 때문이리라!
이제 ‘칠성사이다’를 한 병 사서 영화 볼 시간에 맞춰 액체의 표면에 살얼음이 낄 정도까지만 냉동실에 넣어 두는 일만 남았다.
제는 영화가 끝난 다음부터였다. 불어터진 떡볶이에 사이다를 한 모금씩 홀짝이며(* 소싯적부터 ‘주사파’의 기질이 다분했나 보다) 영화에 등장하는 무법자 ‘가오대형’들의 멋들어진 결투 장면을 음미하는 것도 잠시….
새벽에 접어들자, 집에 나 혼자뿐이라는 사실이 뼛속 깊이 스며들기 시작하면서 며칠 전에 본 납량 특집극의 귀신까지 떠올랐다. 그래도 까짓거 ‘구미호’ 정도야 콧방귀도 안 뀌겠지만, 에드거 앨런 포Edgar Allan Poe의《검은 고양이, The Black Cat》에 그려진 끔찍한 삽화가 머릿속에 맴도는 건 아무래도 감당하기 힘들었다.
‘… 지하실의 시멘트 벽 사이에 썩어들어가는 시체….’
구들장 어디선가 희미하게 갸르릉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기도 하다.
‘혹시… 시체에서 흘러내린 피를 고양이가 핥아먹는 소리 아닐까!’
‘드라큘라 백작은 자유자재로 변신할 수도 있단던데….’
당시 집집마다 청소년들의 필수 소장품이었던 리샤오룽李小龍의 쌍절곤을 언제든지 손만 뻗으면 닿을 거리에 갖다 놔도 두려움이 가시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날 밤, 소년은 온갖 환청에 시달려야만 했다. 잠결에 마루 건너편 창문이 슬그머니 열리는 듯한 소리, 누군가 두런두런 속삭이는 소리, 저벅저벅 다락방을 걸어다니는 발자국 소리…. 쌍절곤을 꽉 움켜쥔 손에 촉촉이 땀이 배어 나왔다. 하필이면 그때 쉬가 마려운지… 방광이 터질 듯 아랫배가 저려와도 옴짝달싹할 수조차 없었다. 날이 밝을 때까지 설핏 잠이 들었다가도 무슨 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라며 숨죽여 깨어나는 과정의 반복이었다.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기나긴 악몽의 밤이었다.
이게 다 그놈의 무법자 형님들을 영접하기 위해서 자초한 일이다.
옛날 옛적 서부에서(Once Upon A Time In The West)의 타이틀 시퀀스에서 제일 마지막 감독의 이름이 나오기까지 오프닝 크레딧은 무려 10여 분 동안 계속되는데, 폼생폼사의 가오를 잡는 형님들이 등장하여 총격전을 벌이는 이 장면은 세르지오 레오네 영화의 스타일을 집약해서 보여준다. 흙먼지를 일으키며 나타난다는 고사성어 권토중래(捲土重來)와 어울리는 이 하모니카 사나이는 과연 누구인가? 철길 건너편의 하모니카가 하는 촌철살인의 한마디, “You have bought two too many horses(말을 두 마리나 더 갖고 왔군그래).” |
그런데… 지금부터 말하려고 하는 영화는 ‘석양의 무법자’가 아니다.
이 글은 스파게티 웨스턴의 창시자 세르지오 레오네Sergio Leone가 그동안 서부극에서 갈고 닦은 내공을 맘껏 펼쳐 보인 작품『옛날 옛적 서부에서, Once Upon A Time In The West<1968>』에 한없는 애정을 바치고자 하는 마음의 표현이자, 그의 영화를 보기 위해서라면 혼자서 집을 지키는 걸 마다하지 않았던, 어느새 귀밑머리에 허옇게 서리가 내려 중년이 되어버린 꼬맹이가 거장에게 바치는 헌사이다.
첫댓글 주말의 명화라...
참, 오랫만에 들어 보는 말이네요.
소년 만큼은 아니었으나, 저도 소시쩍 뜻도 모르면서 열심히 봤던 기억이...
어린 나이에도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던지,
오래도록 가슴에 담아두었는데,
메디슨카운티의 다리에서 너무나 초라하다 못해 추하기까지 한 모습에 그만...
거세게 쏟아지는 빗속에서 의연한 모습으로 메릴스트립을 기다리는...
세상의 잣대로는 감히 잴수 없는,
불륜을 넘어 중년의 아름다운 사랑을 보여줘야 할 중요한 장면에서,
이미 너무나 늙어버린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모습은
아름답기는커녕 딱해 보이기기까지...
책읽은 두근거림으로 남길것을 하고 후회했던...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거의 살아 있는 전설입니다.
사막에 우뚝 솟은 선인장처럼 껑충한 키에,
무표정한 얼굴 자체가 그대로 황량한 서부의 풍경을 이루는….
게리 쿠퍼나, 존 웨인하고는 캐릭터가 확연히 다르지요.
그럼에도 배우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연기력은 그다지…
하지만 감독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얘기가 달라집니다.
살아 있는 전설이란 그가 만든 일련의 영화 덕분이지요.
그가 감독한 영화에는 폐부를 찌르는 통찰이 담겨 있고,
불편한 진실을 직시하면서 주위를 아우르는 노회한 ‘관용’의
정신을 기가 막히게 그려냅니다. 보수주의자로서 일정하게
미국 공화당의 시각을 반영하는 경우가 많기는 해도, (→계속)
영화를 잘 만드는 사람임은 틀림없습니다.
진정한 보수주의자인 셈이죠. 감히 보수를 참칭하면서
꼴통에 가까운 행태를 보이는, 이 땅의 자칭 타칭
보수주의자들하고는 ‘類’가 다르겠지요.
같은 시대를 살아온 소년 덕분에 잠시 추억여행을 다녀왔네요.
읽는 내내 즐거웠어요.
오호! 마마께서도 동시대의 공기를 같이 호흡하셨더이까?
어여삐 헤아려주시는 마음씀씀이가 그저 무량하나이다.
흔히들 보수가 물질적 이익과 세속적 출세를 탐낸다고 하지만
진짜 보수주의자는 ‘이익’이 아니라 ‘가치’를 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