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 우금치 전투 민족 기록화. 2만명의 농민군이 5천명의 조일 연합군과 싸운 우금치 전투는 말로는 전투라고 하지만 실지로는 농기구와 죽창으로 무장한 일반 군중을 기관총으로 학살한 사건이다. 5일간의 전투를 통해 농민군은 완전히 괴멸되고 이후 해산되어 동학 농민 혁명도 무산된다.)
이번 치욕의 조선 전사는 관군의 전투가 아닌 일본군과 관군 연합군에 맞서 봉기한 동학 혁명군의 패전을 다루고자 한다. 공주 우금치 전투는 19세기 말 제국주의의 세계 침략에 깃발 아래서 왜세의 침략을 막고 부패한 국가 기강을 바로 잡음과 동시에 봉건시대의 계급 구조적인 사회 질서를 타파하고자 한 농민 봉기의 종말을 고한 안타까운 전투이다. 하지만 전술적인 면모에서 보았을때 봉건 사회를 벗어나 근대 사회로 넘어가는 시기에서 현대화된 화기와 훈련을 받은 관군과 일본군을 상대로 무모한 공세를 함으로써 결국 패배에 이르고 만 전투로 당시 동학 농민군 지휘부의 군사적인 경험 부족과 전략적 사고 부재가 안타까운 전투이다.
1892년 2월 (음력) 고부군수 조병갑의 전횡에 반발한 농민 반란이 발생하면서 동학 농민 1차 봉기가 발발한다. 보국안민과 패정개혁을 내세운 농민 반란의 기세는 전라도를 중심으로 급속하게 전국으로 번질 기세를 보였다. 이에 민비를 중심으로 한 정부는 일단 안핵사 김용태를 전라도로 급파하여 탐관오리의 처벌을 약속하고 그런 약속에 의거하여 봉기군은 일단 해산 정부의 조치를 기다리게 된다. 하지만 같은 해 4월 안핵사 김용태는 농민 봉기군을 반란군으로 규정하면서, 동학도들을 동비라고 칭하며 축출을 하겠다고 선언, 전라도 충청도 지역의 농민들을 처벌했다.. 이에 사태를 지켜보던 동학 교인들과 농민들은 전봉준을 중심으로 동학 지도자인 김개남과 손화중이 참가한 2차 동학 봉기를 1894년 3월 일으킨다. 이후 3월 황토현 전투에서 감영의 부대들을 격파한 동학군은 장성 황룡촌에서 전라도 병마절도사 홍계훈이 이끄는 관군마저 격파하고 4월 27일 전주성을 점령하게 된다. 이 같은 동학군의 기세에 놀란 고종이 청나라에 원군을 요청하고 이를 빌미로 일본군마저 조선에 출병을 하게 되자, 동학군은 외세의 개입을 막는다는 명분으로 전주 확약을 정부군과 맺고 일단 해산한다. 하지만 1894년 6월 일본군은 경복궁에 난입하여 당시 정권을 잡고 있던 흥선 대원군을 몰아내고 김홍집, 박영효등을 앞세운 친일 내각을 수립하며 갑오개혁을 진행하면서 조선의 내정에 본격적으로 간섭하기 시작한다. 이에 동학군은 항일 전쟁을 선포하고 다시 봉기, 서울을 점령하고 일본인들을 몰아 내겠다는 기치를 내세운다.
(동학 혁명의 민족 기록화. 가운데 서 있는 사람이 동학 혁명군의 총 사령관인 전봉준 장군이다.)
하지만 동학군의 내부에도 문제가 상존하고 있었다. 일단 동학 운동은 남접과 북접이라는 두개의 단체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북접은 초대 교주였던 최제우의 직계로 최시형, 손병희등이 이끌고 있으면서 종교적 자유를 획득하는데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이들은 동학 농민 1.2차 혁명에도 참여를 하지 않았고, 3차 혁명에 참가하는 것에도 미온적이었다. (이후 제자들의 간청으로 최시형이 참가를 허락함으로써 3차 봉기에 참가하게 되지만 이와 같은 과정이 또 다시 문제가 된다.) 혁명운동을 주도했던 남접은 원래 손화중이 지도자였으나 봉기가 발발하자 전봉준에게 대장군직을 맡겼다. 하지만 남접 내부의 강경 혁명파에 해당하는 김개남은 근왕주의를 비롯한 기존 정체 체제 유지를 주장하는 전봉준측과 반목 혁명 전쟁 내내 독자적으로 움직였고, 이로 인해 동학 농민군은 지도부의 의견과 전략이 일치되지 않은 상황에서 전쟁에 나서게 된다. 이런 와중, 흥선 대원군과 연계하여 정권 교체를 시도하려 했던 남접의 정봉준파의 계획은 일본에 의해 발각되어 와해되고, 이를 근거로 민비와 고종을 중심으로한 조선 정부군은 일본군과 연합하여 농민군을 공격하기로 결정한다. 또한 남접 측에서 제안한 외세 배척을 위한 항일 전쟁에 대해 북접의 수장 최시형이 반대를 함으로써 9월 봉기를 한 농민군은 원래 1차 전략 목표였던 공주 점령을 하지 못하면서 시간이 지체되고 있었다. 결국 최시형이 북접이 혁명전쟁에 참가하는 것을 허락함으로써 손병희가 이끄는 북접의 부대가 전쟁에 참가하게 되지만 이미 봉기에 대한 결정이 내려지고, 정부군과 일본군이 준비를 마친 10월 9일경이였다.
전쟁이 결정나고 양측이 준비와 병력을 모으는 시간이 끝난 10월 23일부터 공주 인근에서 처음으로 전투가 시작되었다. 공주 전투에 참가한 농민군은 남접측의 1만명과 북접측의 1만명의 연합 부대로 약 2만 명이였고, 조일 연합군은 조선군 3000명에 일본군 2000명으로 구성되었다. 공주 인근 총 집결한 농민군의 전체 병력은 약 10만여명이였지만 통일된 전략에 따라 움직이기 보다 각급 부대별로 독자적인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따라서 병력은 농민군이 압도적인 수를 자랑하고 있었지만 농민군은 무기와 훈련에서 절대적인 열세를 면하지 못하고 있었다. 특히 농민군의 무장은 대부분은 농기구와 죽창이였고, 그나마 총기로 무장한 병력들은 대부분 화승총을 가지고 있었다. 일부 병력은 1-2차 봉기 당시 관군에게서 획득한 신식 소총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 수가 너무 적어 전투에 영향을 미칠 정도가 되지 못했다. 반면 조일 연합군은 일본군의 감독아래 훈련을 받은 정예 부대였고, 신식 소총, 신형 대포와 미국에서 들여온 개틀링 기관포도 다수 보유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농민군은 수적인 우세를 이용해 공주성을 우선적으로 점령하기로 결정하고 10월 23일부터 전투에 돌입하게 된것이였다. 하지만 5일에 거친 1차 공방전에서 농민군은 큰 피해를 입고 후퇴하게 되고, 이에 총 사령관 전봉준은 주변의 다른 동학군과 연계하여 농민군의 전열을 재 정비하고 공주성을 점령하기 위한 총 공격을 준비하게 된다.
(우금치 전투에서 농민군을 학살하는데 가장 큰 역할을 했던 미국의 개틀링 기관포. 미국의 남북 전쟁 당시 전선의 고착 상황을 타파하기 위해 리처드 J 개틀링이 개발된 총기로 이후 수 많은 식민지 전쟁에서 활용되었다. 이 대형 총탄을 사용하는 개틀링 포는 미- 스페인 전쟁에서도 그 위력을 발휘하기도 했다. 장전과 발사의 매커니즘의 기계식이 아닌 인력에 의존하는 단점이 있어 1차 세계 대전 이전에 화약 반동을 이용한 맥심 자동 기관총등에 의해 교체 되었다. 현대에 와서는 인력으로 급탄과 발사를 하는 매커니즘을 전기 모터러 교체하여 활용하여 헬리콥터나 전투기등에서 활용되고 있다. 대공 화기 발컨포가 이 개틀링 기관총의 현대화 버전중 하나이다.)
11월 9일 2, 동학군 총 사령관 전봉준 장군의 공격 명령에 따라 약 2만명의 농민군은 일본군 모리오 마사이치 대위가 지휘하는 조일 연합군이 진을 치고 있던 우금치 고개를 수차례 정면 공격했다. 이와 동시에 일부 부대는 우회하여 공주 감영을 공격했다. 하지만 고지대에 진을 치고 각종 대포와 기관총을 무장한 신식 군대를 죽창과 낫, 곡괭이를 든 농민들이 공격하는 것은 자살 행위였다. 기록에 따르면 농민군은 조일 연합군의 진지 앞 150m 이상 진격을 하지 못하고 조일 연합군의 집중 사격에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고 한다. 진격이 이루어 질 수 없는 상황에서 피해가 급증하자 농민군의 물러났다 다시 돌격하는 것을 반복했지만 그러는 사이 병사들의 사기는 급격하게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 때 조선 관군측의 이기동과 조병완이 지휘하는 부대가 농민군의 좌우를 기습 결국 농민군 진영이 무너지고 후퇴하게 된다. 한편 공주 감영을 공격하기 위해 우회 공격을 준비하던 농민군 역시 관군의 매복에 걸려 대부분의 병사를 잃고 퇴각한다. 4일간에 걸친 우금치 전투에서 참가한 농민군 2만명중 살아서 후퇴한 병력은 약 500여명에 불과 했고, 조일 연합군측의 피해는 거의 없었다. 그리고 12월 완전히 괴멸된 농민군의 총 사령관 전봉준이 체포되고, 농민군에 참여한 사람들에 대한 학살이 이루어지면서 동학 혁명은 막을 내리게 된다.
동학 농민 혁명의 실패는 국내의 하층 계급으로부터의 최초의 적극적인 집단 개혁 운동의 실패로 볼 수 있다. 농민군은 적절한 훈련을 받지도 못했고, 제대로된 무기도 갖추지 못한체 신무기로 무장한 관군과 일본군을 맞상대하였으니 그 결과는 이미 전투가 일어나기 시작되기 전부터 알 수 있었다. 또한 동학 혁명군을 지휘했던 지휘부가 일치되지 못하고 대립과 반목을 했다는 것에도 문제가 있었다. 특히 남접과 북접으로 나누어져 있었던 동학군이 힘을 모으는데 지나치게 많은 시간이 걸려 전략적 요충지였던 공주를 너무 쉽게 조일 연합군에게 내주었고, 결국 지형이 불리한 상황에서 전투를 수행했던 것이 우금치 전투 패배에 큰 요인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에 남접에서도 왕권파였던 전봉준과 김개남의 반목이 너무 심해 상호 통합된 군사적 움직임을 보일 수 없었다는 점도 문제로 지적될 수 있다. 이와 같은 지휘부의 의견 불일치는 적을 상대하는데 있어 큰 약점으로 다가올 수 있으며, 특히 전쟁을 앞두고는 절대 있어서는 안되는 일이였지만 동학 농민군의 지도부는 이를 인지 하지 못한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반목이 공주 인근에 모여든 총 군사 10만명이 5000명의 조일 연합군과 싸우면서 수적인 우세를 이용할 수 있는 연합 공격과 같은 합동 작전을 수행하지 못한 것에 영향을 미친 것 역시 아쉬운 일이다. 하지만 가장 아쉬운 것은 농민군의 지휘부가 관군과 일본군이 사용할 무기에 대해 이미 사전 지식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대책을 제대로 세우지 못했다는 점에 있다. 2차 봉기 당시 농민군측은 관군이 사용하고 있던 무기 다수를 노획했고, 이때 개틀링 건을 비롯한 신무기를 획득 이에 대해 충분한 사전 정보를 가지고 있었지만 이에 대한 대책이나 작전을 세우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은 상대방의 기관총 진지를 향한 정면 돌격과 집단 학살에 가까운 전투 결과로 결말났다. 오자는 “적을 충분히 알고 싸워야 하고, 승산이 있으면 싸우고 없으면 물러날줄 알아야 한다.”라고 말한바 있다. 하지만 동학 농민군에게는 이런 병법의 기본적인 내용보다 대의를 쫓아 외세를 몰아 낸다는 명분이면 전쟁에 승리 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 같다. 하지만 전쟁은 명분만으로 승리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외국군과 힘을 합쳐 농민군을 상대한 조선의 정부에게는 과연 그것만이 최선이였냐고 물어 보고 싶다. 그들의 힘을 이용해 외세를 밀어내고, 좀 더 자주적이고 좀 더 독립적인 정부를 수립할 기회를 보지는 못했냐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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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로빈의 서재 원문보기 글쓴이: 로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