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가(隨筆家)/ 박 재 식

[한나]

수필가(隨筆家)

                                      박 재 식

출판사에서 졸문(拙文)이 실린 수필집을 보내왔다. 책갈피에 봉투가 하나 끼어 있기에 원고료인가 하고 뜯어보았더니 인쇄로 된 편지였다. 이 책을 내는데 옥고(玉稿)를 주셔서 고맙다는 인사로 허두를 떼고, 제작비에 충당하겠으니 책○○권을 사달라는 청탁이다. 뜻하지 않은 사연에 어리둥절한 나를 더욱 당혹하게 만든 것은 가부간의 연락이 없으면 수락한 걸로 알고 무턱 책을 보내겠다는 덧붙임의 대문이다.

나의 머리 속에는 잠시 궁리의 정체현상이 생겼을 만큼 혼돈이 일어났다.

첫째, 출판사가 요구하는 부수만큼의 책을 사자면 돈도 돈이려니와 그 책을 주체할 길이 난감한 일이다. 아는 사람들에게 강매할 수도 없거니와 고작 졸문 한 편이 실린 책을 기증본으로 돌리기도 쑥스러운 노릇이다. 잘난 글 하나 실린 것을 자랑하자는 건가 하고 나의 속셈을 알량하게 짚기가 십상일 터이다. 그러니 명절 음식처럼 잔뜩 집안에 쌓아놓고 식구끼리 포식할밖에는 없는 노릇이다.

둘째는 좀 무참한 생각이 드는 것이다. 원고료 대신 책을 받아 달라면 몰라도, 원고료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이, 마치 네 글을 실어 줬으니 광고료는 못 낼망정 책을 팔아줘야 할 것 아니냐는 식이다. 흡사 관청에서 수익자 부담으로 시행하는 공공사업 같은 것인데, 이렇게 하면 책에 수록된 필자의 수로 따져 굳이 책방에 낼 것까지 없이 초판본 기천 부는 그럭저럭 소진될성도 하다. 사업치고는 매우 확실성 있는 기발한 착상이기는 하나 필자로서의 심정은 자못 맹랑한 것이 아닐 수 없다. 일단 책방에 내어놓고 팔리지 않는 것을 필자들에게 떠맡기는 것이라면 또 몰라도, 이건 애초부터 너 따위의 글이 실린 책인지라 시판은 글렀으니 너희끼리 사서 지져먹든 삶아먹든 마음대로 하라는 꼴이 아닌가? 옥고(?)의 청탁을 받고 내깐에는 제법 글쓰는 보람에 들떴던 한때가 이처럼 무참해질 수가 없었다.

이런 전차를 어느 문우에게 투덜댔더니, 물정에 어두운 소리라고 되려 핀잔을 들었다. 그나마 맡아서 출판해 주는 독지를 가상히 여겨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라도 해서 엮어내지 않으면 우리 국내 기라성같이 숱한 수필가들의 수필은 좀체 햇빛을 볼 수가 없다는 것이다. 딴은 옳은 말일 것 같았다.

곰곰 생각하니 틀림없는 얘기였다. 나의 경우 활자가 되어 나온 작품이 줄잡아 한 달에 한 편 꼴이 채 못된다. 그 중 정작으로 청탁을 받아 쓴 것이 절반 정도이고, 나머지는 무작정 보낸 불청고(不請稿)가 실려 나온 것이다. 그러자니 제대로 원고료를 받은 것은 몇 편 정도에 불과할밖에 없다.비록 청탁을 받고 썼더라도 무크지(誌)같은 데에 기고한 것은 필자의 몫으로 보내오는 책 한 권을 거저 받기가 미안한 법이고, 불청고에 대해서는 필묵대(筆墨代)로 하는 반례가 생략되는 것이 관례인 듯했다. 수필가가 필경으로 호구할 길이 바이없는 곳이 오늘의 우리 문단이 아닌가 싶다.

한 번은 어느 신문사 계통에서 내고 있는 종합잡지에 불청고를 보냈다. 항상 흥미 짙은 실물기사(實物記事)를 위주로 엮어 '절찬리 재판 돌입'이라는 광고가 신문에 나기도 하는 포퓰러인데, 마치 제사상 한 귀퉁이에 생률 한 접시를 얹어 놓듯 구색용의 수필란이 차려져 있는 것이다. 본래 수필은 문단에서도 서출(庶出) 취급을 받아, 따로 수필란을 두지 않는 문학잡지가 수두룩한 터에 그나마 옹색한 대로 수필이 발붙일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되어 있다는 것은 가난한 수필가들을 위해 얼마나 다행하고 고마운 일인지 모른다. 그 자리에 올리는 밤 한 톨의 구실을 한답시고 정중한 사연의 편지를 곁들여서 불청고를 보낸 것이다.

그러나 미상불 보낸 원고는 함흥차사였다. 몇 달째 그 수필란의 목차에는 나의 이름이 모습을 나타내지 않는 것이다. 알고 보니 그 수필란은 수필가들의 둥지가 아니었던 것이다. 거기에 실린 필자의 면면을 살펴보니 주로 대학교수나 정치인, 법조인, 연예인 등 문학의 문외한이 대부분이고, 간혹 시인이나 소설가의 이름은 끼어 있어도 정작으로 수필가의 수필은 눈을 씻고 보아야 찾아볼 수가 없다. 또 수필의 내용도 시사적인 것과 전공 분야의 지식이나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면, 유명 인사의 신상 발언같은 글이 대종을 이루는 것이다.

아하 내가 번지수를 잘못 찾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영문 없이 날아든 나의 불청고는 그 잡지사의 편집실에서 미운 오리 새끼가 된 것이 분명했다.

몇 해 전에 겪었던 일의 무참한 기억이 느닷없이 떠올랐다. 어느 외국에서 열린 국제회의에 참가했을 때 그 모임이 갖는 리셉션 장소에 조금 늦어서 당도했다. 문간에 써 붙인  안내 판만 대강 스쳐보고 방 안에 들어섰더니 뭔가 서먹한 느낌이 드는 것이다. 몇 백 명이 득실거려야 할 연회장치고는 홀의 규모도 작거니와 술잔을 들고 서서 담소를 나누고 있는 사람들의 숫자도 성글었다. 바텐더가 주는 칵테일 잔을 받아 들고 쭈빗거리는데, 그 방의 호스트로 보이는 신사가 넌지시 다가와서 나의 가슴에 달린 명패를 한 번 눈여겨보더니 고대 의아쩍은 표정을 짓는 것이 아닌가. 아차 싶어 슬그머니 잔을 놓고 문 밖으로 나와 안내 판을 다시 확인했더니, 아니나다를까 번지수를 잘못 찾아든 것이다. 본연회장은 바로 옆방에 있었고, 그곳은 각국의 운영위원들만이 모여서 얼굴맞춤을 하는 곳이었던 것이다.

구실을 못할 글이라면 원고를 되찾아야 하겠는데, 이런 때의 궁리가 또한 따분한 법이다. 청하지도 않은 것을 보낸 처지에 우편으로 되돌려 달랄 수도 없거니와, 그렇다고 찾아가서 달라기에는 더욱 체면이 쑥스러운 일이다. 궁리 끝에 신문사에 있는 아는 이를 통해 챙겨 달라고 부탁했더니 뜻밖에도 다음 호에 싣는다는 회답이 돌아왔다. 말하자면 알음의 연줄을 탄 청탁이 작용하여 비로소 불청고는 빛을 보게 된 셈이다.

그런데 실려나온 글을 보니, 필자의 이름 곁에 덧붙인 직함이 '수필가'가 아니고 내가 몸담고 있는 현업의 직책명을 달아놓았다. 원고에는 분명히 '수필가'라고 밝혀 두었는데 그것은 일껏 지워버리고, 짧지도 않은 현직의 이름으로 바꾸어 놓은 것이다.

이런 수고를 감행한 편집자의 의도가 무엇이었을까? 참으로 궁금한 노릇이다. 나를 수필가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일까? 아니면 수필가라는 직함 자체를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인가? 수필을 쓴 사람은 다 수필가인데 너만이 쥐뿔난 수필가이냐는 뜻일까? 어쩌면 아는 이를 시켜 원고를 챙기니까, 잡지의 성격상 수필가의 수필은 싣기가 곤란하니 현직명을 대라고 하여 바꾸어 쓴 것인지도 모른다.

경우야 어쨌든 명색이 수필가를 자처하는 나로서는 마음이 착잡할 밖에 없다.

[현도현]

수필가의 애환과
한국 문단에서의 수필의 위치를
가감없이 나타내었음에도
글이 유치하지 않다.
오히려 솔직한 고백을 담백하게 써 내려 간 글에서
향기가 좋습니다.

[德田]

문단의 실상을 글에 담았군요
문,서, 화, 단이 공히 탈피해야 할 현실 입니다
좋은글 읽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