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
까미노와 헨로미치의 공통점
이미 누누히 지적한대로 장거리가 아닌 하나의 구간에 헨로미치가 여럿이라는 것은 어느
길도 헨로가 아니라는 뜻도 된다.
오늘의 길 중에서 51번 이시테지~52번 타이산지(太山寺)의 10km안팎도 이에 해당한다.
10.5km에서 11.8km까지, 최단에서 최장까지 5개의 루트에 겨우 1.3km차이라면 각각 200
m정도의 차가 날 뿐인데 루트가 이처럼 많은 이유가 무엇인가.
더구나 마츠야마 시(松山市) 번화가에서 벌어지는 현상이다.
견강부회가 될 수도 있는 추리를 해 볼까.
"본래 도시로 발전하기 전에는 하나의 길 밖에 없었다.
이 지역이 몇 단계로 발전했는데 그 때마다 개발에 밀려 새 길이 조성되었다
그러나, 향수에 붙들려 있거나 축자적으로 헨로를 고집하는 헨로상들은 옛길을 고수했다.
그래서, "최종 개발 기간에 만들어진 새 길과 이전의 길들까지 5개의 길을 모두 헨로미치
라고 고집하게 되었을 것"이라고.
시코쿠헨로에서 이처럼 황당한 경우에 봉착하기를 거듭하면서 나는 내 방식을 개발했다.
출발지와 도착지점 외에는 모든 안내를 버리고 컴퍼스(compass)에 절대 의존한다.
그러면 어디에 숨었는지 보이지 않던 헨로 마크들이 등장하기 경쟁을 하는 듯 나타난다.
이같은 체험이 축적되어 길이 많을 수록 되레 편한 길이 된다.
오늘 아침에도 어제 왕복했던 도고온천의 우아한 원탕건물 출입구부터 그렇게 시작했다.
이것은 까미노의 마드리드 길에서 궁여지책으로 시도한 것이 성공함으로서 이후 까미노
뿐 아니라 헨로에서도 예외 없이 히트 행진이다.
길을 걷는 정서는 밀레니엄 이전의 선인들과 이 시대의 후손들이 한결같음을 뜻한다.
그러므로, 길 위에 장애물(건물)을 세우는 훼방꾼들에 의해서 길이 지리멸렬 되었기 때문
이므로 시각에서 장애물을 지우면 올바른 길이 절로 보인다.
하나 더 유의해야 할 점이 있다.
초기에는 특정 분야에 초자연적 능력이 있다 해도 자연을 거스를 힘이 없었다.
그래서 대자연에 대항하지 않고 순응했다.
다리를 놓거나 터널을 뚫을 수 없던 때는 걸어서 건널 수 없는 강, 넘기 벅찬 산 등은 많이
걷더라도 우회를 주저하지 않았다는 것.
10월 2일(2014년) 아침, 새벽같이 기상했으나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
어제 온천 때문에 보지 못한 경내(石手寺)를 두루 살펴보기 위해서.
도고온천(道後溫泉) 원탕 앞에 도착한 시각은 아침 8시 12분.
원탕 건물에서 10시 방향으로 10km남짓 전방에 자리한 타이산지.
북쪽 외곽길과 서쪽 도심을 통과하는 2개의 헨로미치에서 나는 후자를 택했다.
도고온천 츠바키노유(椿の湯)를 지나는 187번현도로 출발한 후 곧 이면도로를 골라가며
도심을 벗어나는 헨로미치다.
이요은행(伊予/우측)을 지나고 교회다운 모습의 가톨릭교회(좌측)를 지나는데 빨간 헨로
마크와 석주들이 곳곳에서 안내 경쟁에 나서는 듯 했다.
찾는 자에게 나타난다 했으나(聖書) 찾으면 숨고 버리면 나타나는 묘한 속성의 안내판들.
서진하던 헨로미치가 다음 사거리(護國神社 입구)에서 우측의 이면도로로 갈아탐으로서,
다행스럽게도 차량의 왕래가 거의 없는 한가롭고 안전한 길을 걷게 되었다.
196번국도(今治街道)에 합류한 헨로는 잠시 후 다시 2개의 헨로미치에서 택일하라 한다.
서진을 고수하거나 국도와 함께 북상 하거나.
나는 이번에도 후자를 택했다.
안내에 열의가 더 있는 듯 해서 였는데 그 열의는 1시간 반을 넘지 못했다.
반복하는 '日'자 길이기 때문이었다.
논(畓)의 정지작업과 수리시설의 확충으로 농촌길의 불가피한 현장일 것이다.
최초의 북쪽길을 포함해 하나로 뭉친 북상길은 52번레이조 타이산지의 산문 직전(一の門)
에서 서진해서 올라온 길과 결합하여 산문을 통과한다.
하나가 되지 않으면 입사(入寺)가 허용되지 않는 길이기 때문이다.
산문(仁王門)에서 본당까지 500여m가 외길이기 때문인데 그 안에 갇혀 사는 마을민들이
잠잫고 있는 것이 괴상쩍다.
사찰과 그들의 거주지가 갑을(甲乙) 관계라 사찰의 횡포를 감내하는 주민들인가.
타이산지는 하룻밤 새에 10칸(間) 4면의 목조 본당을 지었다는 절이다.
장사를 위해 오사카로 항해 중 파선의 위기를 만난 오이타 현(大分県/九州豊後國)의 부호
가 관음보살에게 무사 귀환을 빌었다.
타카하마 마치(高浜町/太山寺의 서쪽해안)에 무사히 상륙함으로서 해난을 면한 이 부호는
장인들을 모집해 한밤 안에 건물을 완성했다는 것.
요메이천황(用明/재위585~587) 2년의 일이란다.
무사 상륙을 빌며 어떤(사찰을 짓겠다는) 서원을 했던가.
이 부호는 루소(Jean-Jacques Rousseau) 보다는 언행이 일치한 사람이었던 듯.
루소는 항해중 조난의 위기에 처해서 "무사 귀환만 이뤄지면 여생을 다 바치겠다" 고 서약
하였지만 막상 상륙하고 나니까 까마득히 잊어지더라고 고백했는데.
와케마을의 오셋타이클럽과 갑장 카토야스히코
그 후, 739년에 쇼무천황(聖武/재위724~749)의 칙원으로 교키보살이 리모델링(remodel
ing) 했는데 코보대사가 빠질 리 있는가.
사운이 융성하여 7당가람에 66방을 헤아리는 대 사찰이 되었을 때, 텐초(天長/824~834)
연간에 이 곳에 들른 코보대사가 호마수법을 시행했다.
그리고, 법상종에서 밀교의 진언종으로 바뀌었으니 월척 중 월척을 낚은 것이다.
더구나, 본당은 국보가 되었고 중요문화재들이 된, 밀교 최대의 레이조가 되었으니.
타이산지~53번엔묘지 구간의 일부는 45번이와야지에는 비할 거리가 되지 못하지만 갔던
길을 되돌아 나온다는 점에서는 소위 우치모도리(打ち戻り) 임이 분명한 구간이다.
또한, 52번레이조에서 53번레이조로 이동하는 것은 타이산지마치(太山寺町)를 벗어나서
와케마치(和氣町)로 가는 것과 같은 뜻이고.
타이산지와 엔묘지, 두 후다쇼 사이 2.5km에는 두 마을이 직접 이웃하고 있으니까.
유의해야 할 것은 타이산지 초(太山寺町)와 와케마치(和氣町), 두 마을의 관계다.
공히 우리의 '洞(里)' 에 해당하는 '町' 자를 쓰면서도 전자는 '초', 후자는 '마치'로 읽는데
우리나라에서 법정동(리)과 행정동(리)의 관계에 해당한다 할까.
타이산지 초는 와케마치를 포함하는 광역 타운(법정동)이지만 와케마치와 동일한 행정동
타이산지마치(법정동 타이산지 초 내의 행정동 타이산지마치)의 관계도 된다.
"愛媛県松山市太山寺町太山寺町1730, 太山寺"의 주소가 "에히메켄 마츠야마시 타이산지
'초' 타이산지'마치'1730 타이산지"라고 읽히니까.
한자(漢字)의 일본식 발음과 뜻의 문제인데 우리나라도 일본에 못지 않다.
'說'자는 '설', '열', '세' 등 3음으로, '度'는 '도'와 '탁'으로 읽힘으로서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이조 후기(22대 정조)의 문신이며 실학자인 다산 정약용(茶山丁若鏞/1762 ~1836)의 시호
(諡號)는 문탁공(文度公)이다.
1967년에 출간된 한국 최초의 백과사전인 '세계백과대사전'(世界百科大事典(學園社刊/전
질12권) 제10권(P287)을 끝으로 문탁(文度)은 사라지고 문도(文度) 일색이 되었다.
언필칭 다산전문가(연구가)라는 자들이 한자 '탁'을 무심코 '도'로 읽고 썼기 때문이다.
너른 들(畓)을 가로지르며 두 절을 연결해 주는 183번현도를 걷고 있었다.
무료한 시간이며 정오가 넘은 때라 곧 당도할 엔묘지 전후 어디에서 어떤 먹거리가 점심
메뉴로 등장할지 궁금증이 자극받는 시간이었다.
멀잖은 엔묘지를 가늠하고 갈 때 호객하듯 한 곳으로 안내하는 10대말 쯤의 사내들.
고등학교 학생으로 보이는 이 애들은 누구며 왜 아루키헨로상만 골라서 어디로 가는가.
공손히 모셔가듯 앞에서 1대1로 이끄는 대로 따라간 곳은 우측 노변에 자리한 마츠야마시
와케공민관(松山市 和氣 公民館/시민문화회관?).
그리 넓지 않은 실내외의 식탁들에서 식사 삼매경인 남녀 헨로상들.
국수와 고기, 야채 반찬, 과일 디저트와 차 등을 먹고 마시고 나가는 자리에 앉거나, 봉사
학생들(마을거주 松山市고등학교)이 모셔오는 헨로상들.
자진 봉사하는(volunteer) 와케마을의 남녀 노청 주민들.
잔치 마당에 다름아닌 흐뭇한 광경이었다.
식탘과 벽의 안내문과 자료에 의하면 마츠야마시 와케지구의 주민유지(有志)단체인 '오셋
타이클럽'(お接待)이 매월 1, 2일(이틀간) 아루키시코쿠헨로상들에게 제공하는 행사란다.
도보헨로상들로 하여금 시코쿠순례를 무사히 마치도록 건강을 선물하는 프로그램이라고.
시코쿠헨로의 52번(太山寺), 53번(円明寺)두 후다쇼(札所)의 마을인 와케지구가 도보헨로
상들에게 음식을 무상으로 제공함으로서 지역의 접대문화로 뿌리내리게 하려 한다는 것.
타이산지의 경내에 있는 '饂飩接待中'(우동접대중) 이라고 새겨진 옛 비석이 동기가 되어
2008년에 이 일(우동접대)을 시작했으며 매월 1일과 2일이 그 날이란다.
매월 이 두 날 중 하루에 이 지역을 통과하는 도보헨로상은 모두 해당되지만 변수가 많은
여정이므로 이 접대에 초대되는 것도 행운으로 봐야 할 것이다.
제공하는 음식도 이 단체원들이 이 지역에서 생산되는 재료들로 직접 만든다는데 일본인
식성 위주일 텐데도 내 입에도 당겼다.
한 마을에 두 레이조가 있는 곳은 여기뿐이 아니다.
같은 마츠야마 시 소재인 46번조루리지와 47번야사카지도 있으며(조루리마치) 그 곳은 두
레이조 간의 거리가 1km에 불과하다.
더구나 시코쿠헨로의 원조라는 에몬사부로의 고향마을이며 온갖 전설의 산실인데다 12.5
km 안에 레이조 후다쇼가 6곳이나 되는데도 오셋타이는 커녕 냉랭하지 않았던가.
내게도 한 상이 나왔다
공교롭게도 이 일을 하는 최고령자 카토야스히코(加藤安彦)가 나와 동갑이다(호적나이)
오셋타이의 두 갑장 최고령자(10월 2일의 오셋타이 대상자중 내가 최고령자)의 상봉이라
그런지 카토 영감은 내게 더 호의를 베푸는 듯 했다.
음식을 차별할 수는 없겠지만 더불어 식사한 일본인들이 떠난 후에 다른 오셋타이를 했다.
부인을 소개하고 부인이 손수 만들었다는 실로 된 소품을 선물하고 함께 촬영도 하고.
500m 남짓에 불과한 엔묘지 가는 길에 떨어지는 빗방울.
방금 갈아입은 비단옷이 젖으려 할 때 처럼 안타까운 마음으로 엔묘지 경내에 들어섰다.
이 레이조도 텐표쇼호(天平勝寶/749~757) 원년, 쇼무천황(聖武/재위724~749)의 칙원에
따라서 교키보살이 창건했다는 사찰이다.
본존인 아미타여래상과 두 협시상(觀世音菩薩, 勢至菩薩)을 조각해 안치하고 칠당가람을
갖춘 대사찰이었으나 훗날 코보대사에 의해서 88레이조에 들게 되고 진언종이 되었단다.
キリシタン灯籠(マリア観音)과 '후다 박사' 스타(Frederick Starr)
병화와 액운이 겹쳐 위치도 현위치로(和氣西山의 海岸에서) 옮겨 재건했다는데('海岸山'
圓明寺에서' 須賀山'圓明寺로) 양 옆에 민가가 즐비한 길을 통해서 사찰에 들어가야 한다.
취락이 형성된 마을 속으로 사찰이 들어왔는가 사찰 쪽으로 민가들이 모여들었는가.
대부분이 불자 또는 동조자의 관계에 있으므로 분쟁은 없겠지만 종교단체와 실 생활지는
불가근 불가원의 관계가 정석이다.
그럼에도 대사찰과 거민들 사이가 이처럼 가까운 것을 그냥 흘려 보내고 만다?
특이한 마을 이름에 관심이 가지 않을 수 없었기에 이미 궁금증을 풀고 왔는데 현장(사찰)
에서 그 뜻을 재음미하게 되었다.
한자 和氣(화기/일본 발음 와케)는 한.일 양국이 같은 뜻으로 사용하고 있다.
"화목한 분위기, 온화한 기색" 등의 뜻을 담은 '和氣' 는 야마토 시대(大和)인 4 ~ 5 세기에
'和氣氏'라는 성을 가진 호족이 이 지역에 정착함으로서 비롯된 것으로 추측한단다.
아무튼, 그 지명에서 사찰과 주민 간의 화기애애한 관계를 읽을 수 있어 다행이었다.
이 이름에 내포된 또 하나의 역사적 사실을 살펴보았다.
크리스천 금제(禁制/16c에들어온 가톨릭을금지) 시대에 에히메 현에는 숨어 사는 기독교
인이 많았는데 엔묘지는 숨어서 하는 그들(크리스천)의 미사를 묵인하였다는 것.
이 등불(キリシタン灯籠/マリア観音)은 그들의 미사에 사용되었던 등으로 추측된단다.
마을의 이름에서 그들(엔묘지측)의 도량을 가늠해 보았다.
20c중반 이후에 종교계의 화두는 각 종교 간의 화해(Reconcile)와 대화(Dialogue)였는데
엔묘지는 16c에 그럴 준비가 되어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 이닌가.
엔묘지에는 시(松山市)지정(昭和55년/1980) 유형 민속문화재인 사보(寺寶)가 있다.
시코쿠헨로 최고(最古), 유일의 동판노사츠(銅板納札/오사메후다)란다.
<慶安三年京樋口
奉納四國仲遍路同行二人
今月今日 平人 家次>
게이안(慶安)3년은 에도시대(江戶)로 1650년이며 이 동판노사츠는 교토의 히구치에 거주
하는 헨로상(家次)이 봉납한 것임을 알리고 있다.
이즘 시대에는 종이 '오사메후다'지만 당시에는 얇은 송판과 구리, 쇠붙이 등이었단다.
주목할 것은 '시코쿠헨로'라는 명칭에서 '遍路' 2글자.
이전에는 노사츠는 물론 시코쿠헨로에서 헨로의 한자를 '辺路'로 썼는데 이 동판노사츠에
'遍路'로 쓰인 이후, 후다 뿐 아니라 모든 명칭에서 현재와 같은 '遍路'가 사용된다것.
이 동판노사스를 발견한 사람은 프레데릭 스타(Frederick Starr/1858~1933).
미국 시카고대학의 인류학부 조교수였던 그는 종족 연구에 관심을 가지고 중남미와 아프
리카, 필리핀, 한국을 방문했으며 일본과 인연을 맺게 된 후 완전히 친일학자가 되었다.
일본인들로부터 인기를 누림은 물론 이 분위기를 이용, 일본의 고고학관계 유물들을 쉽게
구입하여 미국의 관련 박물관과 수입상에게 고가로 매도함으로서 부자가 된 사람이란다.
종족연구라는 명분으로 저개발국조상의 유골을 몰래 가지고 귀국하다가 문제되기도 했던
인물인데 일본에서도 무차별, 다량을 구입하여 미국에 넘겼다.
시카고대학의 인류학부는 그의 공로를 인정하여 스타 강좌(Starr Lectureship)를 대학원
코스에 지속하고 있었는데 클로즈된 듯.(최근의 시카고대학 인류학부 강좌에 없으니까)
도굴과 밀수(밀반출) 등이 공로가 된다면 선후진국, 유무식을 가릴 것 없이 선악의 기준이
아전인수식 아닌가.
더구나 소위 상아탑이라는 대학의 도덕성과 윤리의식이 고무줄잣대라면?
우리의 경우에도 일확천금을 노린 두더지꾼들에 의해 도굴, 밀반출된 유물과 문화재들은
차치하고 양요(洋擾)때 강탈해 갔음에도 반환을 거부하고 있는 문화재들이 부지기수다.
하긴, 고려말기의 문익점(文益漸/1329~1398)이 들여온 목화씨도 밀수(密輸)였으며 한.일
양국이 중국에서 수입한 곡식들의 씨앗이 모두 그랬다.
당시의 중국(唐과 元 등)이 종자들의 국외 반출을 엄격히 통제했기 때문에.
특히 후다(札)에 관해서는 마니아 수준인 그(Starr)는 자기 이름을 대신해서 '壽多有'라고
인쇄한 노사츠(千社札)를 일본의 여러 사찰과 진자를 순방하면서 사용했다.
그로 인하여 그는 일본인들로부터 '후다 박사'(札博士) 또는 '노사츠(納札)박사'라는 별칭
으로 불리며 사랑받게 되었다지만 그는 미국인이다.
살아서는 철저히 친일했지만 그의 부(富)를 비롯해 모든 것은 미국의 누이(妹)에게 맡겨
졌고 타국(日本)의 유골은 도둑질, 신주 모시듯 했지만 자기 유골은 타국땅에 묻혀 있다.
일본인들이 세운 비석마저도 정착하지 못하고 이리저리 이사다니는 팔자라나.
세찬 태평양 바람과 대결한 빗길 행진
비가 본격적으로 내릴 차비를 하는 때, 엔묘지를 나선 시각은 14시 10분.
10시 방향의 사거리, 패밀리마트 앞에서 차로를 따라 두개의 짧은 다리(馬木橋, 明神大西
橋)를 건넜다.
빗줄기가 굵어가고 있는데 고만고만한 다리가 또 있다(花見川橋)
이 개천에 다리가 없던 때, 취락의 형성 전에는 개천의 폭이 꽤 넓었을텐데 연달은 개천을
건너느라 당시의 헨로상들 꽤 고생스러웠을 것이다.
엔묘지가 자리한 와케마치와 접해 있으며 이미 취락을 이룬 호리에초(堀江町)가 바닷가로
긴 마을이라 바다로 뛰어드는 개천들이 많기 때문에.
호리(堀江)우편국을 지난 헨로는 곧 T 자를 이루는 347번현도의 좌측 길이다.
좌회전한 길에서, 와케공민관에서 함께 식사대접 받았던 두 일본인을 만났다.
한참 먼저 떠난 그들인데 식사중의 대화로 미루어 오늘 급조된 2인동행인 듯이 보였다.
나이도 60대 후반과 30대인데다 이미지도 교활한 영감과 깐깐한 이기주의자 타입의 청년
이라 어울리고 숙소도 함께 예약하는 것이 괴이쩍었는데.
(수일 후, 그들을 따로 만났는데 사카우치로 떠나며 와케마치 때와 달리 침묵으로 일관한
영감과 영감 만났다는 내 말에 몹시 언짢은 표정인 청년. 정녕 무슨 일이 있었던 듯)
바다가 지척인 호리에교(橋)를 건넌 헨로는 마침내 바다와 밀착한다.
밀착이 시작되는 지점, 모서리에 있는 '카페 트레인'(CAFE TRAIN/열차를 개조한 찻집)에
들러서 차 한잔 마셔봄직 한데, 그럴 만큼 낭만적이지 못하는 날씨(風雨)를 탓하겠는가.
세토나이카이의 호리에 만을 따라 해안을 걷는 낭만을 앗아간 비바람이지만 해안 산록을
달리는 JR요산선(予讚線) 열차 승객들은 그 풍우에 되레 더 낭만적일 것이다.
해안로의 산자락에서는 혼슈~시코쿠 간의 열차가 추파를 보내오고 태평양의 하얀 파도가
공격을 멈추지 않아 두려운 형국 만으로도 아루키상들의 불만도 충분히 털어냈을 것.
차량과 파도의 위해에 대비해 가드레일을 설치한 347번현도의 인도에 의탁하고 있는 헨로
미치에는 한동안 보이는 것이 없었다.
아직은 시야가 괜찮은데도 보이지 않은 것은 바다에도 지상에도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인데
아스라하게 시야에 잡힌 수직 기둥과 건물.
윤곽이 들어난 것은 오가와(小川) 마을 해안에 자리한 입간판과 대형식당(海鮮北斗)이다.
날씨에 남아있는 오늘의 자비는 여기까지 였나.
이 곳을 통과하는 시각이 15시 40분이므로 엔묘지를 떠날 때 부터 1시간 반 사이에 마감
하라는 것이었는가.
8일 전(9월 24일) 오후의 완벽한 재연이었다.
식당 맞은편(도로 건너) 아와이사카 타이시도(栗井坂大師堂) 처마 밑에서 비 단속을 마친
후 2시간 반에 걸친 세찬 태평양 바람과 대결한 빗길 행진이었으니까.
단 1장의 사진도 만들지 못했기 때문에 아무 것도 기억할 수 없다.
아와이교(栗井川)를 건넌 후 179번으로 바뀐 현도를 걷고 있을 때 마주 오던 택시의 심성
고운 기사 외에는.
그는, 억수 같은 비를 맞으며 걷고 있는 우리 3인 중에서 비에 온전히 노출되어 있는 동행
영감에게 하얀 비닐 우산을 씌워 주고 갔다.
청년과 나는 판초로 방비했으나 내가 준 우산도 사양하며 스스로 방비를 거부한 영감인데.
"도모, 아리가토..."(どうも ありがと...)
179번현도는 걸어서는 몇시간 후에 당도할 이마바리시를 두고 벌써 이마바리카이도(今治
街道)라는 이름을 달고 간다.
비 그칠 기미는 전혀 없고 비오는 날이기 때문인지 빨리 찾아오는 어둑발에 마음이 급해
지는데 다행히도 호조츠지(北条辻) 마을에 당도했다.
영감은 한국노인에게 나름의 오셋타이를 한다고 생각했는지 자기네의 예약여관에 청년을
보낸 후 이요호조역(伊予北条驛) 앞까지 나를 안내했다.
등하불명이라 하지만 호조츠지에서 JR요산선의 역을 찾아가지 못할 사람도 있을까.
호조역 앞 어느 지점에 있는 것으로 되어 있는 요고인(養護院)에 가는 것이 문제지.
영감은 가버렸고 이미 밤이 왔는데 요고인은 행방이 묘연해 난감이 각각으로 더해 갔다.
비내리는 가을밤이기 때문인지 초저녁인데도 가게들의 불이 속속 꺼지고 문 닫기 직전인
역 지근의 이발관(トシ理容室)에 들렀으나 아무리 말을 해도 대꾸가 없는 주인(?).
많은 사람 중에 하필 농아(聾啞)에게 말을 걸었으니.
호리에우편국 지근, 진자의 썩 좋은 잠자리를 두고 빗길을 강행하게 한 것은 요고인이다.
많이 이른 시각이기도 했지만 부정적인 정서가 심한 진자(三穗神社)에서 자는 것이 선뜻
내키지 않은데다 하기모리가 추천한 곳이라 믿었는데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으니.
39번 엔코지의 전력(前歷)을 재현하려면 저녁 식사거리의 준비가 우선이었다
문 닫기 직전의 역내 편의점에서 구입하며 푸념하듯 하는 말을 귀담아 들은 두 젊은 여인.
47번 야사카지 후다쇼의 여직원을 연상하게 하는 미모의 여인들은 이 편의점을 경영하는
친구 사이인 듯 한데, 그들은 닫았던 노트북을 열고 요고인을 추적하여 찾아냈다.
여기(이요호조 역)에서 한참 떨어져 있는 바닷가에서.
백지에 약도를 그려가던 여인들이 그리기를 포기했다.
자기네가 그리기도 쉽지 않은데 이 밤중에 오지이상이 찾아갈 수 있겠느냐는 것.
태워다 주겠다는 말의 다른 표현이다.
넓은 길과 좁은 길, 골목들을 돌고돌아서 도착한 요고인 앞.
그들의 차량으로 오지 않았다면, 물어볼 아무도 없는 밤중에 나홀로 찾아올 수 있었을까.
참으로 고마웠다.
자진해서는 단 한마디도 쓰지 않은 일본말로 "도모, 아리가토....."(どうも ありがと...)
(고맙다 해서 손녀에 해당하는 여인들에게 경어는 글쎄..)
조금 전에도 영어로 물었건만 고맙다는 인사말 만은 그네의 말로 하는 것이 진정이 담긴
표현일 듯 해서 그랬다.
그리고, 서로 합창하듯 "사요나라"(さようなら)
그들의 경차가 사라진 후 닫혀 있을 뿐 잠기지 않은 대문(?)을 열고 들어갔다.
외등 하나만 켜있을 뿐인 빈 집에서 방 밖의 내가 누울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한 후 모기향에
불을 붙이고(극성스런 모기와의 싸움이 식사보다 우선이었으니까) 저녁 식사를 했다.
와케마을의 오셋타이 이후 태평양의 거센 풍우와 싸우느라 고갈된 체력을 정상으로 끌어
올리는데 먹는 것 외의 선이 없으니까.
일체의 선(善)이 실종된 이 시대에는 먹는 것 조차도 선이 되지 못하지만.
요고인을 찾느라 고생을 하고 해프닝이 벌어진 것은 부실하게 작성된 '아루키헨로상 숙소
리스트'를 오랜 세월 수정 없이 방치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수정된 리스트를 갖지 않은 초행 아루키헨로상이 이 요고인 츠야도에서 일박하려면 예외
없이 고생하게 될 것이다.
나 처럼 아름답고 선량한 여인들을 만나는 행운이 따라주지 않는다면.
내게도 두 딸이 있다.
그 애들이 나 같은 외국영감을 만났을 때 이 여인들 처럼 할까.
원죄론도, 자손 3~4대까지 라는 연좌제도 모두 겁박에 불과하다.
식민지도, 세계대전도 조상 중에 일부 패륜세력이 저지른 불장난이다.
그러면 오죽이나 좋을까.
눈부신 황금마차로 둔갑한 두 여인의 경차가 떠날 때 들려온 한마디.
"오야스미나사이"(おやすみなさい/편히 주무세요).
지친 늙은이로 하여금 편안한 잠길에 들도록 불러주는 천사들의 자장가로 환청되는 밤.
<계 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