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선전도 목판(首善全圖木板)는 순조 25년 경에 김정호가 직접 각성한 것으로서 전하는 서울시가지도의 목판이다. 수선전도의 ‘수선’은 서울을 뜻하므로 이는 ‘서울전도’의 뜻이다.사기의 유림전에 ‘建首善自京師始(건수선자경사시)’, 즉 으뜸가는 선을 건설함은 서울에서 시작된다고 한데서 온 말이다. 이 지도는 지도의 내용·구도·필치로 보아 김정호의 청구도에 단독으로 들어가 있는 서울지도를 바탕으로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헌종 12년에서 15년까지 자하문 밖에 있던 총융청을 총위영으로 고쳐 부른 적이 있다. 이 지도에는 총신영으로 표기되어 있다. 그리고 1915년에 측도한 2만 5천분의 1 북한산 도폭에는 총융청이 위치하고 있던 세검정초등학교 자리에 신영리라고 표시하고 있다. 따라서 총위영을 총신영으로 불렀던 것이 확실하므로 이 지도는‘총신영'으로 부르던 헌종 12년에서 15년 사이에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296호:
김정호의 수선전도를 기초로 펜으로 필사한 지도로, 1892년 경에 제작되었으며 미국인 선교사들이 사용했던 것으로 추정된다.현전하는 한글본 한양지도가 희소하고, 구한말 한양의 지명을 구체적으로 알 수 있는 등, 지도학사적ㆍ어문학적으로 가치가 있으므로 2010년 2월 11일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296호로 지정되었다.
주석:
↑ 서울특별시고시 제2010-32호,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지정 고시》, 서울특별시장, 서울시보 제2959호 12면, 2010-02-11
참고자료:
대한민국의 보물 제853호 - 수선전도 목판 - 대한민국 문화재청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296호 - 수선전도 - 대한민국 문화재청 본 문서에는 서울특별시에서 지식공유 프로젝트를 통해 퍼블릭 도메인으로 공개한 저작물을 기초로 작성된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수성동계곡 더 이상 손대지 말것, 그대로 유지하여야 한다.
===========================================================================================================================
만든이는 알 수 없음. 가로338.4cm 세로593.2cm 이며,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있다. 근대식 지도
창덕궁(昌德宮)은 1405년(太宗 5년)에 정궁(正宮)인 경복궁(景福宮)의 이궁(離宮)으로 창건된 궁궐이다.
세종(世宗) 때 집현전과 장서각 등을 세웠고, 1459년 세조(世祖)가 옮겨오면서 규모를 15만여평까지 넓
혔다. 1592년에는 임진왜란으로 모든 궁궐이 불에 타버렸는데, 1606년(宣祖 39년)에 복구하기 시작하여
1610년(光海君 2년)에 끝마쳤다.
이후에도 여러 차례의 화재와 정변이 있어서, 1623년 인조반정으로 궁궐일부가 소실되었고, 1803년에는
인정전이 전소되어 그 다음 해에 다시 지었으며, 1917년에는 대조전과 희정당을 비롯한 여러 내전
(內殿)이 불에 타는 등 피해가 컸다.
그러나 창덕궁은 조선시대 궁궐건축의 명맥을 이어온 유일한 궁이며, 광해군 이후 고종까지 13대에
걸쳐 258년간 본궁으로 쓰였던 곳으로서, 경복궁보다도 더욱 궁궐다운 궁궐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
모든 넓이는 135,212평이고 궁궐 건물 13동이 원형 그대로 남아있으며, 나머지는 복원공사중이다.
창덕궁 후원(後苑)은, 자연과 어울리는 아름다움을 한껏 살린 한국전통 조경 기법이 잘 보존된 곳이다.
현재 28동의 정자와 누각이 남아 있다. 1976년까지는 자유롭게 모든 곳을 볼 수 있었으나 관광객들에
의한 훼손이 심해져서 그 이후로는 입장을 제한하고 있다.
후원은 '비원(秘苑)'이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으나, 실제 조선시대에는 그런 이름은 전혀 쓰이지
않았고, 일제시기 이후 창덕궁과 창경궁이 일본인들의 놀이터와 공원으로 전락하면서 일본인들 사이에
서 일종의 속어로 쓰인 듯 하다. 일부에서는 비원이라는 말이 이미 널리 쓰이고 있고 신비스러운 느낌
이 드니 계속 쓰자고 주장하기도 하나, 이는 일고의 가치도 없는 것으로서, 반드시 제 이름을 되찾아
주어야 하겠다.
조선시대 궁궐 가운데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된 창덕궁은 현재 사적 제122호로 지정 보호되고 있으며,
1997년 12월에는 UNESCO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동궐도(東闕圖)는 조선후기 순조 연간에 도화서 화원들이 동궐인 창덕궁 과 창경궁의 전각과 궁궐 전경을 조감도식으로 그린 궁궐 그림이다.동궐도는 현재 두 점이 전해지는데, 고려대박물관과 동아대박물관에 각각 소장되어 있다.
두 점의 동궐도는 채색과 배경산수 표현 등에서 약간의 차이만 보일 뿐, 규모와 표현 방법이 동일한
작품이며 두 점 모두 보존상태는 비교적 양호하여 본래의 상태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동궐도는 오른쪽 위에서 비껴 내려다보는 시각으로, 산과 언덕에 둘러싸인 두 궁의 전각과 다리·담장은 물론 연꽃과 괴석 등 조경까지 실제와 같은 모습으로 선명하고 세밀하게 묘사되어 있다. 배경이 되는 산과 언덕 부분의 묘사방식은 남종화(南宗畵)의 준법을 따르고 있으나, 채색을 써서 입체적으로 그린 건물의 표현과 자연스러운 원근 처리 등에 있어서는 서양화법의 영향을 받은 듯하다.
이 작품은 도화서 화원들의 원숙하고도 절묘한 기법으로 그려진 우수한 작품으로서 《궁궐지》 등에서 찾아볼 수 있는 내용들이 보다 입체적이고 정확하게 표현되어 있다. 또한 과학기술사의 자료로서 매우 중요한 각종 건물·시설·명칭 등이 상세하게 나타나 있다.
따라서 이 동궐도는 당시에 유행했던 화풍을 파악할 수 있는 조선시대 회화사 연구자료일 뿐만 아니라, 건축·조경·과학기술사·궁궐사 등 각 분야의 연구에서도 귀중한 자료가 된다. 그리고 화려하고 장엄했던 조선후기 궁궐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어, 옛 모습을 잃은 현재의 궁궐들을 복원할 수 있는 자료를 제공해 주고 있는 작품으로 평가된다.
궐외각사는 국가의 기간 관서들로서 궁궐 정문 앞 궁궐과 인접한 곳에 설치된 관서들을 말한다.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 남쪽 좌우에는 의정부, 육조, 사헌부, 한성부등 관료기구의 중추를 이루는 관서 건물들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늘어서 있었다.
흔히 '육조(六曹)거리'로 불렀다. 이곳에 배치된 관서들은 궁궐, 특히 경복궁과 친밀한 관계를 갖고 정치와 행정의 중추적 기능을 담당하였다. 이런 점에서 볼 때 궁궐의 정치 행정적 기능과 비중은 비단 궐내각사의 구성만 가지고 이해할 것이 아니라 육조거리의 궐외각사를 함께 고려하여 생각해야한다.
궐외각사는 경복궁 광화문 앞 육조거리에 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크고 작은 관서들이 서울 전역에 흩어져 있었다. 그러나 이런 관서들을 모두 궐외각사로 주목할 것은 아니다. 조선후기에 육조거리에 있던 것들 외에 궐외각사로서 주목할 것은 비변사였다.
비변사는 처음에는 국방 업무를 잘 아는 고위 관료들의 회의체였으나 점차 재정을 비롯한 국정 전반으로 그 업무처리 범위가 확장되어 오늘날의국무회의와 비슷한 성격을 갖는 기구가 되었다. 비변사는 실무를 담당하는 기구가 아니라 국정 전반에 대해서 논의하고 감독하는 기능을 갖는 기구로서 거기에 참여하는 위원들을 비변사 당상이라고 한다.
동궐-창덕궁과 창경궁이 법궁, 경희궁이 이궁으로 쓰이던 조선 후기에 비변사의 청사는 창덕궁 돈화문 바로 앞에 하나, 경희궁 흥화문 바로 앞에 하나가 있었다. 의정부육조 등의 관서들은 경복궁 앞 육조거리에 고정되어 있었지만 비변사는 국왕이 이어하는데 따라 청사를 번갈아 썼던 것이다.
비변사는 그만큼 현실적으로 의정부를 대신해서 국정 전반을 총괄하는 궐외각사의 대표라는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지금은 그 청사는 없어지고 돈화문 길 건너 파출소 앞에 표석 하나만 이 세워져 있다.
출처 - 『우리 궁궐 이야기-홍순민 저』54p 펌...
고지도와 지금의 서울지도를 비교해 보면 차이점도 있다.
현, 서울지도에 맞추어 볼수 있는 물길을 알려면 아래 큰 글씨 클릭 클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