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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취미성 때문?
까미노에서 잠 못 이루는 이유가 정신적인 어떤 짐(문제) 때문이 아님이 입증된 밤이었다.
이기적이라고 매도하는 가족과의 관계가 절로 정상화되므로서 완전무결한 자유인이 되었으며
공중을 날 수도 있을 듯한 기분인데도 여느 밤과 다름 없이 잠을 자지 못했으니까.
매일같이 육체적 한계를 넘나들고 있기 때문에 곯아떨어지는 것이 당연한데도 어데로 달아난
잠인지 불러들일 길이 없다.
그래서 그 이유를 육체 외적(정신적)인 데서 찾고 있었는데.
공자는 70대를 종심(從心)이라고 정의했다.
"70대가 되면 내키는 대로 해도 걸릴 것이 없다"(七十而從心所欲不踰矩/법적 도덕적 기타모든
면에서)는 것이다.(論語 爲政篇)
주목해야 할 점은 40은 불혹(不惑), 50은 지천명(知天命), 60은 이순(耳順)의 시기라고 했는데
80대 이상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70을 고희(古來稀)라고 한 것으로 보아 당시의 최장수 연령이 70대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종심의 시기를 넘고 산수(傘壽/80)도 지났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는 유일한 것이 잠이다.
알베르게에서 부러운 것이 있다면, 그것은 뻬레그리노스의 곤히 잠들어 있는 모습들이다.
그럼에도 수면의 절대부족이 뻬레그리노의 본분 수행에 아무 걸림돌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야
말로 불가사의가 아닐 수 없다.
하긴, 내 일생이 불가사의 투성이다.
원시적인 의술에 의하여 개복(1941년 가을), 살아난 7세 소년이 80대 중반에 이르기까지 넘긴
고비들이 하나같이 불가사의의 사건들이었으니까.
병원을 부자 별장 드나들 듯 했으며, 시체실로 옮겨지기 편한 길목의 병실에 수용되기도 했다.
이따금 앉은뱅이, 4족(足) 또는 3족 보행의 시절을 반복하면서도(2017년지금도) 산 타고 걸은
길의 거리가 지구를 3주(周)하고도 남을 만큼 된다.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인용한다면 나의 시기는 세 발로 걷는 저녁때지만 아침과 점심,저녁을
무질서하게 반복하면서도 애오라지 걷는 것만이 내 일과다.
그래서 현재, 아직도 야생마처럼 까미노를 걷고는 있지만 어느 곳에서, 어느 순간에 포기 또는
중지가 불가피할 지 모른다.
그러므로, 내 의지가 아무리 확고하고 열정이 불같다 해도 고비마다 내 편이 되어주신 분과의
관계 밖에서는 아무 것도 고집하기는 커녕 계획하거나 생각할 수 조차 없다.
모든 불가사의 또한 사람의 시각일 뿐 그 분에게는 성립이 되지 않는 단어다.
굳이 인정한다면 그 것은 나와 함께 하고 있는 당신의 실존을 확인시켜 주는 과정이라 하겠다.
그 분의 영역이라 사람의 판단이나 생각이 미칠 수 없을 뿐인 것.
가족과의 관계 복원을 자축한 맥주의 소비량 과다로 불편이 가중되었으며 밤새 들락거리다가
새벽 4시경에 간신히 잠 들었기 때문에 겨우 2시간쯤 잤을까.
그랬음에도, 이른 아침(7시 전)인데도 작열하는 햇볕이 무더운 하루를 예고하는 듯 하였을 뿐,
알베르게를 나서는 아침이 예사로웠다.
다만, 술 취하느라 지금껏 빼먹은 적 없는 매일의 예습(survey)을 하지 못했다.
결국, 노르떼 길에서 가장 힘들었고 가장 많은 일이 벌러진 하루가 되었다.
무비유환(無備有患)의 하루를 자초한 것.
노르떼 길 외에도 여러 까미노의 칩(디카의메모리)이 사라졌지만 이 구간이 특히 심하게 백지
상태였으며, 예습하지 않고 들어간 교실, 난해한 과목의 수업시간 같았다 할까.
알베르게를 떠나 들어선 노르떼 길은 곧 급경사 오름으로 시작하며 꾸준히 오르는 길이다.
공동묘지를 지난 후에는 구 국도(N-634a)를 따른다.
빌라노바 데 로우렌사에서 2.5km쯤 되는 미니 마을 아로호(Arroxo)로 가는 숲길에서 키가 큰
나무의 옹이가 머리에 작은 혹 하나를 달아주었다
대미지(damage)는 미약하다 해도 까미노에서 전무후무한 사고(?)를 이른 아침에 당했는데
기분 좋을 리 있는가.
작취미성(昨醉未醒)의 상태였던가.
아침부터 골몰해야 할 어떤 생각이 있는 것이 아닌데 키다리 나무의 옹이를 왜 보지 못랬을까.
해발 54m(Lourenza)~571m(A Xesta) 사이의 고도 517m(자료들이 상이함)를 오르내리는 길,
힘겨운 등산에 다름아니기 때문에 조심하라는 주의환기로 받아들이고 마을을 지났다.
A-8고속도로(고가)를 가로지른(밑으로) 후 오 까르바얄(O Carballal/A Voltina)도 통과했다.
아로호와 비슷한 미니 마을(주민 30명 안팎)의 예배당인 비르헨 데 라 과달루뻬(Capilla de la
Virgen de Guadalupe)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 후.
곧, 몬도녜도 공동묘지(Concello De Mondoñedo Cemeterio Municipal)를 지났다.
몬도녜도에 진입하려면 산 뻬드로 다 또레(San Pedro da Torre)~오 레겡고(O Reguengo)
~산 빠이오(San Paio)~산 라사로(San Lazaro) 등 그만그만한 미니 마을들을 거쳐야 한다.
살아있는 선한 사마리아인 정신
세월의 때가 잔뜩 낀 돌다리(Puente de San Lázaro/중세다리?)로 발리냐다레스 개울(Rego
Valiñadares)을 건넌 후 산 라사로 길(Rua)의 그늘 있는 곳에서 바게트를 먹었다.
이른 아침부터 쏟아낸 땀에는 체내의 알콜이 몽땅 포함되었는지 취기(醉氣)가 말끔히 사라진
것은 다행이지만 전에 없이 허기가 찾아왔기 때문이다.
까미노에서 내 백팩 안에 있는 상비 품목 1호가 비상약이라면 2호는 바게트와 딸기잼이다.
삼시 세끼 또는 따로 정한 식사 시간이 있는 것이 아니고 소위, 배꼽시계에 의해 먹기 때문에
인스턴트 식품을 선호하며 식당 출입의 빈도도 패스트 푸드점이 높을 수 밖에 없다.
간편 일변도가 결국 바게트와 프레사 메르멜라다(fresa mermelada/strawberry jam/딸기잼
)로 귀착되었고.
(나는 한동안 '스트로베리 잼'의 스페인어를 모르고 대형 마켓의 종업원들은 영어를 몰라서
애먹다가 영어 아는 젊은 여인의 도움을 받기 까지 해프닝이 있었다)
간혹 있는, 나를 포함하는 공동생활에서 피아간의 애로 또한 식생활이다.
집 안팎에서 정한 시간에 3끼 식사를 한다는 것은 내게 고역 중 고역이며 먹거나 마시지 않는
등산 습관 때문에 나는 많은 등산인들로부터 기피 인물이 되어 있다.
식 습관에 관한 의사들의 주장에 의하면 내가 80대를 살고 있는 것도 불가사의다.
지나가다가 나를 유심히 바라보았던 한 노녀가 500ml 패트병 얼음냉수와 자기 집에서 구운
듯한 쿠키 몇개를 들고 왔다.
노변에서 뭘 먹고 있는 늙은이에 대한 측은지심이 발했는가.
기독교국가였으며 지금도 기독교도가 전 국민의 76%(정상적 교회 출석 여부는 논외로 하고)
라는 땅에서 '선한 사마리아인 정신'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옛 관습을 상기하며 동전(1~2€)을 주는 고령자들이 아직도 있으며 도움이 필요한 긴급 상황
에서는 경이롭게 헌신적이니까.
일본의 순례길인 1.200km 시코쿠 헨로(四國遍路)에서도 일부러 다가와서 100엔 동전을 주고
가는 나이든 이들이 간혹 있다.
정숙해 보이는 중년 여인이 운전하며 1.000엔 지폐를 축원 메시지와 함께 밀봉한 예쁜 봉투를
정중히 주고 갔고 어떤 회사의 간부로부터 1박 숙박비 명목의 5.000엔 봉투를 받은 적도 있다.
스스로 조각한 상징물 또는 손수건을 고이 포장하여 선물하는 이들도 있다.
모두 함께 순례하지는 못해도 순례에 대한 열의와 염원의 한 표시란다.
밀레니엄(millennium) 전후의 순례 풍속도를 상상, 비교해 보면 이즘의 순례자들은 어메이징
그레이스(Amazing Grace)를 노상 노래하며 걸어야 할 것이다.
의도적이지 않다면 풍찬노숙할 경우가 없고 저렴한 먹거리들이 지천이라 굶주릴 일이 없다.
까미노 주변 교통망의 확충으로 드문 예외 외에는 양질의 의료 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
까미노 곳곳에 박혀 있는 십자가(순례중 사망자의 표지)의 증가를 억제한다는 뜻이다.
그래선지, 근래(2000년대)에 사망한 뻬레그리노스의 표지는 보이지 않는다.
나는 쁠라따길(Via de la Plata/The Silver Way)에서 강제로 입원되어 밤샘 종합검사 결과가
'이상 무'로 확인된 후 비로소 다시 까미노에 들어설 수 있었다.
위급한 질병의 유무와 관계 없이 고가의 진료, 치료비를 능히 감당할 수 있는 뻬레그리노스가
얼마나 되겠는가.
나 역시, 치료비를 이유로 진료 받기를 거부하고 퇴원을 주장하였지만 밤 새우며 온갖 검사를
강행한 후 검사결과지에 의사 2명과 내가 서명한 사본 1부를 주며 출구로 안내한 그들.
어떤 프로그램이 내게 적용되었는지 모르는 채 자유(?)의 몸이 된 나를 감동먹인 의사의 말.
"까미노에서 죽을 수도 있는 환자를 그냥 내보낼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사)의 관심은 오직 환자의 생명 뿐입니다"
그 감동은 까미노에서 뿐 아니라 병원문을 뻔질나게 드나드는 내게 지금도 진행형이며 아마도
많이 남지는 않았다 해도 목숨과 함께 갈 것이다.
의사는 물론 전, 현직 간호사를 포함하여 전체 까미노에서 내가 만난 모든 의료인의 생명 존중
정신의 감동이.
의료인에 국한된 감동이 아니다.
평상시에는 히치하이킹(hitchihiking/편승)에 냉혹하리 만큼 냉담하지만 액시던트(accident/
사고) 또는 핸디캡((handicap) 앞에서는 180도 다른 모습이다.
자기의 도움이 필요한 약자와 고령자에게 베푸는 헌신은 참으로 감동적이다.
소수의 경로우대석 또는 교통약자석을 따로 지정함으로서 해당자끼리 경쟁을 하게 하는 우매
하기 짝 없는 짓 하지 않고도, 입 따로 몸 따로 가는 우리의 경로보다 월등히 경로한다.
내게 도움을 준 사람들은 하나같이 내 나이를 묻고 자기네 부모와 비교했다.
대부분이 나보다 연하인데도 작고했거나 와병중인 부모를 떠올리며 도우려 한 것이다.
히치하이킹이 고리가 되어 맺어진 인연들은 에스빠뇰들 외에도 뽀루뚜게스(Lucena), 알레만
Timodeo) 등과의 우의가 페이스북을 통해서 두터워가고 있다.
국내의 경우도 편승을 통해 맺어진 인연이 다른 경우보다 특히 돈독하다.
내 지인들은 까미노에서도 내가 유독 히치하이킹 덕을 많이 보는 것은 최고령자라는 이유 외
에도 뿌린 대로 거두는 수확(추수) 원리로 이해하고 있다.
1970년대 초부터 굴린 내 승용차는 히치하이킹 전용이다시피 많은 사람을 태웠다
손을 드는 사람은 물론 지방에 갔다가 귀로에는 버스 터미널에 들러서 교통경찰에 주문했다.
편승자를 구해달라는 부탁이었는데 영업행위로 오해받지 않는 상책이다.
어차피 오는 길인데 여럿이 함께 오순도순하는 것이 나홀로 보다 낫지 않은가.
히치하이킹을 악용하는 범죄 집단의 등장, 발호로 인하여 1980년대 후반부터는 선의의 편승
(능동 피동 간에) 마저도 신중해야 하는 세태가 되고 말았지만.
그보다, 마이카 시대인데다 대중교통망의 확충으로 편승할 이유가 거의 사라져가고 있지만.
몬도녜도 까떼드랄이 불러온 교회에 대한 소고
몬도녜도(Mondoñedo)의 까떼드랄(Catedral/Cathedral/주교좌교회)이 시야에 들어왔다.
아직 상거가 있는데도 소란스런 공기가 퍼져오는 듯한 느낌에 괴이쩍었는데 이런.....
까떼드랄 앞 광장에 장이 서고 있기 때문이었다.
닷새를 주기(週期)로 하는 우리의 5일장과 달리 1주(7일) 주기의 장이란다.
대개 주말에 열리는 줄 알았는데 이곳은 평일인 목요일에.
우리나라의 농어산촌에 섰던 재래시장은 현실(당시)의 축소판이었다.
5일만에 열리는 장마당이야 말로 그 지역의 모든 것을 담고 있었다.
오만 소식이 교류하고 서로의 애환을 나누고 어루만지며 늘어만 가는 주름살을 헤아리는 5일
장이야 말로 그 지역의 서민들에게 최고로 절실한 공간이었다.
그러나 대형 할인매장들의 물량공세와 생활 환경의 업그레이드로 인하여 우리나라의 5일장은
거의 퇴출되었는데 이곳 이베리아반도에는 상존하고 있다.
놀라운 것은 장마당의 면면이 지구의 이쪽과 저쪽이 지극히 유사하다는 점이다
운송도구와 좌판 겸용으로 개조한 차량과 매매가 이뤄지는 분위기 등등.
고객도 장 노년 일색이고 상품도 질이 낮고 낙후된 것임을 금방 알 수 있다
젊은 층은 환경과 품질에서 월등한 대형매점과 상설 할인매장에 뺏겼으며 가격 경쟁을 하려면
질에서 밀릴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노르떼 길 초반에 살펴본 적이 있는데 이방인의 관심을 끄는 것은 이베리아 반도의 향토사가
담겨있는 골동품 코너라 할까.
이미 고백한 대로 예습을 하지 않아서 주마간산이 될 수 밖에 없는 몬도녜도.
지금은 루고 주(Lugo/A Coruña, Pontevedra, Ourense 등 4개 주 중 1)의 기초지자체지만
갈리씨아 지방의 7개 주(A Coruña,Santiago,Betanzos,Mondoñedo,Lugo,Ourense,Tui)중
하나였던 때(1833년)가 있는 도시다.
한데, 1900년에 1만명을 상회하던(10.619명) 인구가 100년(2000년) 만에 반토막이 되고 지금
(2015년)은 3천명대(3.900명 안팎)로 추락했다.
시청소재지인 도심 마을도 어렵사리 2천명을 유지하고 있다.
갈리씨아지방의 노르떼 길에서 유일한 주교좌교회(Catedral)가 있으며 이 루트의 중요하고도
아름다운 유적들이 집결해 있는 곳들 중 대표적인 도시라지만 믿기지 않는 현상이다.
갈리씨아 지방에서 가장 유명한 주교좌교회는 단연코 산띠아고 데 꼼뽀스뗄라(Santiago de
Compostela) 까떼드랄이지만 4개의 주요 까미노 데 산띠아고 루트에도 까떼드랄이 있다.
쁘리미띠보길(Camino Primitivo)의 루고(Lugo), 뽀루뚜길(Camino Portugues)의 뚜이(Tui),
쁠라따길(Via de la Plata)의 오우렌세(Ourense)와 노르떼길의 몬도녜도다.
주도(州都)인 루고 시와 오우렌세 시가 각기 98.500명과 106.900명을 상회하며 뽄떼베드라 주
(Pontevedra)의 도시인 뚜이도17.200명이 넘는데 겨우 2.000명을 턱걸이하고 있다.
게다가 증가세를 보이고 있는 타 지역과 달리 감소 일로에 있으니.
몬도녜도의 추락과는 무관하지만 까떼드랄의 우리말 번역에 대해 집고 가야겠다.
'대성당' 이라는 번역은 물론 '교회'를 '성당'으로 번역하고 부르는 한국 가톨릭교회를 비판한
한국인 신부(Canada Saint John 교구 주교좌 보좌신부 신성국)의 글을 소개한다.
나는 가톨릭교 신도가 아니며 개신교파 중에서도 진보적인 색채가 농후한 편이지만 대부분을
동의하기에 본인의 허락을 구하지 못한채 핵심 부분을 전재하게 되어 송구스럽기 짝이 없다.
참고 : 스페인어 이글레시아(Iglesia/영어 Church)는 일반적인 교회를 뜻한다.
이 교회에 주교가 상주하면 까떼드랄(Catedral/영어 Cathedral)이라 하고, 단순한 예배(미사)
용 건물은 에르미따 또는 까삐야(Ermita, Capilla) 등으로 불린다.
바실리까(Basilica)라고 부르는 대형 교회도 있는데 끝 부분이 둥그렇고 내부에 기둥이 2줄로
서있는, 이른바 '바실리까 풍'으로 지은 건물을 말한다.
까떼드랄이라 하지 않고 바실리까라고 부르는 대표적인 예가 로마의 산 뻬드로 교회다.
<‘교회(Ecclesia, Church)' 는 성서적, 신학적 용어다. '성당(Chapel)' 이라는 용어는 ‘거룩한
건물, 장소’ 의 명칭으로서 협소하고 국한되어 있다. 즉 ‘성당’은 건물 중심의 용어다.
그러나, ‘교회’는 하느님 백성, 그리스도의 몸, 성령의 성전, 부르심 받은 공동체라는 풍부하고,
다양한 의미를 품고 있다. 이렇게 좋은 '교회' 의 의미와 신학적 용어를 포기하고 갈라져 나간
개신교의 고유 용어로 넘겨주어서도 인정해서도 안된다.
교회의 기원과 의미는 성서로부터, 그리고 사도들이 즐겨 사용한 ‘크리스찬 공동체’다.
교회라는 용어 안에는 구원적, 신학적 의미를 풍부히 담고 있는 가톨릭 교회를 지칭하 는 독점
적이고 고유한 단어다. 사도시대로부터 이어져 2000년간 지속돼온 가톨릭 교회의 고유 명칭인
‘교회(Ecclesia)’가 한국민들에게는 개신교를 지칭하는 고유용어로 뿌리내리는 현실을 방치해
서는 곁코 안된다. 이를 하루 빨리 시정 개선해야 할 절박성을 호소하고자 한다.
사도들이 물려준 신앙은 ‘교회 = 가톨릭 교회’다. 이는 우리 신앙의 정체성을 드러낸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물려받은 신앙의 보물을 간직하고 우리에게 신앙의 유산을 물려
주는 구원의 기관이다. 건물과 장소인 성당은 형식상의 하나의 도구이고 수단일 뿐이다.
공동체로서의 교회가 우리 신앙의 기반이고 목표이고, 방법이다. 교회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
는 성당은 아무 의미를 지닐 수 없다. 즉 교회는 우리 신앙의 완전한 근거다. 따라서 우리가 ‘성
당 = 천주교회’라는 용어에 집착하는 것은 본질을 잃고 비본질적 수단에 매여있는 꼴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가톨릭 신앙의 중심 단어인 ‘교회’를 일상의 안에서 ‘교회 = 개신교’로 지칭하고 있
는 것은 가톨릭 신앙에 대한 부정을 저지르는 모순적 태도가 아닐 수 없다.
우리의 신앙적 모순은 고스란히 우리 후손들 세대에게 이어질 것이고. 그들은 ‘교회’라는 용어를
천주교회와는 무관한 개념으로 의식화 될 위험성(Risk)을 안고 살게 될 것이다. 따라서 신앙의
선배들이 잘못된 용어를 바로잡지 않으면 후손들이 고스란히 그 피해를 입게 됨을 분명히 자각
하고 ‘교회’라는 용어를 회복하는 데에 심혈을 기울여야 한다.
만일 우리가 이러한 언어 문화를 대수롭게 생각한다면 앞으로 개신교는 ‘교회’ 로 고착화 되어
그들의 고유 용어로 전유물이 될 것이고, 천주교회는 ‘교회’ 아닌 ‘성당’ 으로 고착되어 풍부한
성서적 의미의 교회상마저 상실하게 될 것이다.
'교회’를 지켜내지 못한 한국 천주교회의 모든 구성원들은 사도들 앞에서 어떤 낯을 들어야 할지
부끄러울 뿐이다. 훗날 천주교회가 ‘교회’라는 용어를 사용하면 사람들이 이상하게 여길 정도로
교회와 천주교회는 무관한 미래도 예측해 보지 않을 수 없다.>
로마가톨릭교회와 개신교를 막론하고 기독교는 하느님(하나님)을 믿는 종교다.
한국에 최초로 전래될 때 중국을 거쳐서 왔기 때문에 한자인 천주(天主)로 번역되었을 뿐.
이베리아 반도에서 스페인어 '끄리스띠아노'(Cristiano/Christian)는 가톨릭교회와 개신교를
망라해서 하느님과 그의 아들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신도를 말한다.(여성은 Cristiana)
까미노에서 내가 많이 받는 질문 중 하나가 끄리스띠아노냐는 것인데 그 때마다 짧은 물음에
긴 답변이 불가피했다.
개신교의 진보적인 경향이지만 가톨릭교회에 더 호의적이라고.
모순같지만 그럴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
내가 중히 여기는 기독교의 사회(현실) 구원 활동에서 개신교가 형식적이며 공치사가 많은데
반해 그들은 실질적이며 묵묵히 헌신적이니까.
곁길로 가는 화제를 바로잡기 전에 한 가지만 더 짚고 가야겠다.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1483 ~1546)가 당시의 기독교의 부패와 타락을 성토하는 95개의
문제를 제기한 해가 1517년이므로 금년(2017년)이 500년 되는 해다.
소위, 종교개혁(엄격히 말하면 기독교개혁) 500주년을 맞은 지금의 상황은 어떠한가.
가톨릭교회를 프로테스트(protest)하여 탄생한 개신교회(Protestant)가 500년이 되기도 전,
한국에 들어온지 1.5세기도 못되어 프로테스트의 대상으로 전락해버린 것이다.
깨져버린 꿈 '알베르게 오 비손떼'
몬도녜도의 3대 중요 기념물은 12c~16c에 걸쳐 건축했다는 산따 마리아 까떼드랄, 17c 건물
세미나리오 꼰씰리아르 데 산따 까딸리나(Seminario Conciliar de Santa Catalina)와 16c에
지은 건물이라는 베야 샘(Fonte Vella)이란다.
까떼드랄의 바로 이웃에 자리한 이 폰떼처럼 오래되고 성대한(?) 샘집은 3.000km에 다가가는
내 까미노에서 최초라고 생각된다.
내 기억력이 아직 신뢰할만 하다면 아마도 6.000km에 달하는 전 까미노에서 유일할 것이다.
그런데도, 그럴싸한 전설 하나쯤은 있을 법한데도 아무 말도 없는 것이 되레 괴이쩍게 느껴진
폰떼 베야를 뒤로 하고 내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미니 알베르게를 향해 매진했다.
급경사 길을 올라야 했지만 뒤돌아볼 때마다 몬도녜도 다운타운의 아늑하고 평화로운 정경에
도취되는데다 다가오는 알베르게에 대한 호기심과 기대가 부풀어 힘드는 줄 몰랐다.
그보다 더욱 이해되지 않는 것은 작지만 도시인데도 시골처럼 평온하고 시골같은 분위기지만
짜임새 있고 호감 가는 이 주교좌 도시가 왜 퇴락 일로에 있을까.
리게이라 거리(Rua Rigueira)끝까지 간 후 무명도로 따라 남하를 계속하여 당도한, 몬도녜도
에서 2.5km 지점에 위치한 알베르게 오 비손떼(Casa Abierta O Bisonte).
산띠아고 데 몬도녜도(Santiago de Mondoñedo)교구마을에 속한 주만 38명(2014년현재)의
작은 마을 마아리스(Maariz)의 초입에 있는 외딴 건물이다.
노르떼 길에서 1층쯤 낮은 지형에 자리한 허름한 2층 집.
대낮이라 해도 방비가 전혀 없고 문이 활짝 열려 있다면 누구나, 아무 때나 '웰컴'을 뜻하리라.
기척을 알리는 큰 소리 '디스꿀뻬'(disculpe)에 2층에서 내려온 오스삐딸레라(hospitalera).
다이어트(diet)가 필요할 듯한 젊은 여인이 환한 미소로 나를 맞았다.
그러나 간밤에 로우렌사 알베르게에서 그리기 사작한 나의 까사 아비에르따 오 비손떼(Casa
Abierta O Bisonte) 그림은 유감스럽게도 그녀의 미소를 끝으로, 미완으로 끝나고 말았다.
정오를 막 넘은 시각에.(핸드폰에 담긴 사진의 시간)
내 꿈을 여지없이 깨뜨려버린 것은 사족(蛇足)에 다름아닌 그녀의 인사말이었다.
이랏샤이마세(いらっしゃいませ/어서 오세요)
곤니찌와(こんにちわ/안녕하세요)
노 소이 하뽀네스(Yo no soy Japones/나 일본인이 아닙니다)
나의 성난 대꾸에 몹시 당황한 그녀는 더욱 황당했다.
치노?(Eres tu Chino?/중국인?)
"노노노노...꼬레아노"(Yo soy Coreano)라는 내 대답에 그녀는 충격을 받은 듯 했다.
변명이 횡설수설, 비이성적이라고 느껴졌으니까.
일본인으로 보여서 좋은 분위기를 만들려고 겨우 인사말 정도 아는 일어로 인사했으며 다음에
중국인이냐고 물은 것은 일인이 아니라면 당연히 중국인일 것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라나.
한국을 모르기 때문이었다고 하나 궁색한 변명으로 보였다.
사실이라면, 더욱 '데 돈데'(de donde/또는 from where)라고 묻는 것이 기본 매너니까.
그렇다 해도, 나는 이 여인이 일본에 편향되어 있다거나 한국에 비호의적인 에스빠뇰라(espa
ñola)라고 보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내가 일본의 식민 압제를 겪으며 반일 정서가 충일되어 있는 영감임을 그녀가 알 리
없거니와 순례자를 위한 집에서 순례자의 감정을 격화시킬 이유는 더욱 없겠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불쾌한 해프닝으로 인하여 우리는 모두 패자가 되고 말았다.
나는 정서적으로 최악 상태가 되었기 때문에 그림의 완성은 커녕 촌각을 다퉈 이 집을 떠나려
한데 반해 그녀는 험악해진 내 기분을 조금이라도 진정시켜 보려고 갖은 시도를 했으니까.
런치타임(lunchtime)인 것을 기화로 부리나케 먹을것과 커피 등 식탁을 준비하였으며 판매용
(5€) 가리비(concha)에 즉석 서명을 하여 선물하는 등.
예습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복습으로 확인한 것은 이 오스삐딸레라가 알베르게(Casa Abierta
O Bisonte de Maariz)를 운영하는 화가 가또바(Zili Katova/nombre artístico)라는 것.
까르멜라 또메 발리엔떼(Carmela Tome Valiente/Karmele)가 본명이며 라틴 아메리카에서
자원봉사(volunteer) 활동을 한 것이 그녀의 간략한 이력이다.
마드리드 태생(madrileña)인 그녀가 노르떼 길 순례자들을 위해 갈리씨아 땅에서 알베르게를
운영하게 된 까닭은 무엇일까.
산띠아고 순례길(Camino de Santiago/루트未詳)을 걸은 후 뻬레그리노스를 위한 집을 만들
결심을 하게 되었다는 그녀.
장소를 물색하다가 2013년 10월에 여러 해 동안 방치되어 있던 마아리스(갈리씨아 땅)의 한
농가를 임차, 리모델링하였단다.(현재의 건물로)
사진으로 본 최초의 집은 20c 중반까지도 우리 농촌에서 군림하던 정미소를 연상하게 했다.
집과 앙상불(ensemble)을 이루고 있는 부속 오레오(horreo/곡물 창고)는 마치 당시의 뒷간
(厠間)처럼 보였는데 많이 정비된 것 같다.
그해(2013년) 연말에 6베드의 미니 알베르게를 도나띠보(donativo/기부) 체제로 오픈했단다.
채소류와 딸기, 도마도 등 농산물은 농장에서 자급하며 건물 내의 화실(taller/workshop)에서
그림 T-셔츠와 그림 엽서, 기타 그림 수공품을 제작 판매하여 부족한 유지비에 충당하고.
연륜은 일천하나 단체나 기관의 조직적인 지원을 거부하고 갈리씨아의 토착적인 자연에 순응
하며 자립을 지향한다면 가상한 정신이며 주목해야 할 사회적 실험이라 할 수 있다.
한데, 그녀에게 왜 그런 허점이 있을까.
경박부허(輕薄浮虛)하거나 교활한 것이 본 모습인가.
알베르게의 전통적 개념을 완전히 새롭게 바꿔놓는 그녀의 선언, 구구절절이 교활한 슈가코팅
(sugarcoating)에 다름아니란 말인가.
산산조각난 기대에 대한 아쉬움 정리보다 구겨진 그녀( 카또바)의 이미지 복구가 현안이 되어
버렸으니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해프닝인가.
아름다운 꿈은 박살이 나고 질식하거나 폭발할 듯한 분위기에서 해방은 되었으나 여간 아닌
아쉬움에 발걸음이 허탈했다.
이제는 그녀를 향했던 화살이 부메랑처럼 나를 향해 날아오고 있지 않은가.
일체의 짐을 내려놓고 거추장스러운 모든 것을 버렸으면서도 왜 그까짓 일본에 대한 정서만은
남겨두느냐는 질책이다.
남겨둘 리 있는가.
뼈속까지 깊숙이 들어있기 때문에 버려지지 않는 것이 나도 안타깝다.
종교의 힘으로도 내쫓을 수 없는데 순례길이라 해서 벗어날 수 있는가.
안고 달래고 적응하며 살 수 밖에 없는 숙명이라면 순응할 수 밖에.
(무더위를 이기지 못하겠는지 상체를 알몸으로 하고 일을 하던 청년을 불러 함께 포즈를 취한 화가 가또바.
나도 말 실수할까봐 묻지 않았는데 내 짐작대로다. 빼닮은 용모대로 그들은 남매간임을 훗날 확인)
파괴 일로에 있는 이베리아 반도의 자연을 곡하노라
노르떼 길에서 또 하나의 이색적인 체험을 할 기회가 무산된 것이다.
깐따브리아 지방의 도나띠보 알베르게인 구에메스의 '뻬우또 할아버지의 오두막집'과 베사나
의 '라 산따 끄루스'의 연이은 대조적 감동 체험을 잊을 수 없다.
꾸에레스(Asturias지방) 마을에 있으며 아침에 들렀을 뿐인 알레만 부부의 '까사 벨렌'은 두고
두고 아쉬움으로 남을 것이다,
제2의 까사 벨렌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 노심초사했건만 깨져버린 꿈이 되고 말았다.
그래도 내 침체된 기분을 달랜 것은 역시 자연이다.
아름답고 인적 드문 발리냐다레스 계곡(Rego de Valiñadares)을 왼쪽에 끼고 걸었으니까.
계곡을 지근에 두고 오다가다, 띄엄뜨띄엄 있지만 마을 이름이 붙어있는 농가들을 지났다.
우리 농촌처럼 흉물스런 폐가로 전락한 집들을 지날 때는 도깨비 또는 귀신의 출현으로 신고
되어 집단으로 몰려온 마을 청년들에게 봉변 당할 뻔 했던 일이 문득문득 고소짓게 했다.
늙으면 추억으로 산다는 말이 과연 옳거니.....
초미니 마을 빠아딘(Paadin)과 교구마을 산 비쎈떼에 속한 오 뻬드로소(O Pedroso)를 지나
예배당(Capilla de San Vicente deTrigas)과 공동묘지 앞에서 잠시 쉬었다.
예배당은 아마도 마지막 장례(하관?) 미사에 필요한 곳이 아닌지.
산 비쎈떼 데 뜨리가스 교구마을 패밀리의 묘지라 그 수가 적을 수 밖에 없겠다.
신생은 없고 사망만 늘어가므로 자연 감소도 오래지 않아 종지부를 찍게 될 것이다.
그 후의 이 지역은 어떤 모습으로 남게 될까.
부질없는 생각을 접고 길을 떠나는데 내 옆을 지나 저만치 앞에서 멎은 한 소형승합차가 누굴
기다리는 듯 움직이지 않았다.
왠지 나를 기다린다는 느낌이 들었는데 내 느낌대로 였다.
뒤에서는, 옆을 지날 때도 몰랐지만 백미러에 비친 나를 보고 정지했다는 늙은 운전자.
기분은 잡쳤으나 한낮의 더위에도 아직 걸을만 한데 이 68세 영감으로 하여금 차를 세우게 한
것은 동병상련의 정서?
이미 언급했지만 이베리아 반도인의 정서는 늙은이와 병약자에게 헌신적이다.
늙기는 했어도 자기 연배로 봤는데 무려 13세나 더 많은데 경탄하며 찻길의 종점까지 달렸다.
되돌아가는 것으로 보아 자기의 목적지가 아닌데도 그는 그랬다.(운전석의 그를 디카에 담았
으나 도둑이 정상을 참작해 줄 리 있는가)
이 마을은 로우사다(Lousada).
기초지자체 몬도녜도의 교구마을 사스도니가스(Sasdonigas)에 속해 있으며 해발440m 위치
에 들어선 주민 34명(2014년현재)의 작은 산촌이다.
고지대인데다 해마다 감소 일로에 있는 이 마을의 인구가 멀지않아 1자리 수로 줄면 기다리는
것은 비극적인 폐촌(abandonar)의 공식화 일 것이다.
잠간 휴식 중일 때 연이틀 내게 자기의 하단 벙크를 양보한 알레만 청년을 만났다.
그의 보속(步速)으로 미루어 보면 산띠아고 데 꼼뽀스뗄라에 접근하는 중인 것이 정상일 텐데
오브라도이로 광장(Plaza do Obradoiro)이 150km 이상 남은 지점에서 나와 재회를 하다니.
신심 깊은 불보살인 내 산우(山友/수선혜)의 지론을 빌리면 만나야 할 인연인 사람은 기필코
재회하게 된다는데 이 청년과 나의 관계가 그런가.
그와 함께 한 셀카(self camera) 사진 1장이 내 폰에 보존되어 있어 얼마나 다행인지.
그를 앞세운 잠시 후에 또 하나의 알레만 영감을 만났다.
내가 만난 독일인 중에서 2번째로 나이든 67세의 볼프강(Wolfgang).
그의 말대로 그가 나보다 더 나이들어 보이는 영감이다.
(앞 뒤를 교대해 가며 2일을 동행한 후 헤어졌지만 그도 깊은 인연관계인 영감인가.
아무 약속이 없었는데도 내가 골인(goal in)한 다음날 우리는 재회했고 내 숙소에서 같이 묵고
저녁과 아침식사까지 함께 했으니까)
노르떼 길은 마을 끝 삼거리에서 왼쪽 길이다.
뻬드라 계곡(Rego de Pedra 또는 Rego de Carballo)을 건넌 후 고도 110m 이상의 된비알
(해발420m~530m)을 지그재그하며 오르는 길.
수직 길이가 일정할 때 사변의 길이가 짧을수록 사각(斜角)이 커지는 직삼각형의 원리를 상기
하면 이 길의 구배각(勾配角)이 얼마나 큰지 이해할 수 있다.
더구나 체력이 소모된 오후에는 더욱 가파르게 느껴진다.
어렵사리 올라선 정상부의 참상은 목불인견(目不忍見)의 지경이다.
A-8 고속도로(autovía/motorway)를 건설하느라 수려한 발리냐다레스 계곡을 비롯해 자연을
어떤 대책이나 보완 고려 없이 무자비하게 파괴한 현장이다.
해안길에서 친환경적으로 다스리고 관리하는 그들의 지혜에 탄복하였는데 뭍에서는 왜 그런
지혜가 실종되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정상의 고가고속도로(A-8) 옆 넓은 지대에 산 꼬스메 다 몬따냐 교회(Igrexa de San Cosme
da Montaña)가 외로이 있다.(공사중에 철거했다가 복원했는가 신설인가)
교회가 있다면 마을도 있었을 텐데 마을은 철거, 타지로 이주되었을 것으로 짐작해 본다.
전(내가 걷던 2015년 6월)에는 없던 곧동묘지도 들어섰다.(위성사진)
그렇다면, 미구에 어떤 형태의 인가가 다시 등장할 것이다.
광대한 정상에는 A-8, N-634, LU-P-0105 등 최상위~ 말단 등급의 길들이 엉키고 설켜 있다.
각기 대형 로터리를 거느리고 있기 때문에 자칫 잘못 들면 적잖이 헤매게 될 지대다.
경계가 분명하지는 않으나 교회는 이미 기초지자체 몬도녜도를 벗어나 아바딘(Abadin) 지역
이며 교구마을 산 마르띠뇨 데 갈가오(San Martiño de Galgao)에 속한다.
노르떼 길은 N-634국도를 건너 교구마을 껜데(Quende)에 속하며 오늘 길의 최고 지점(해발
530m)인 아 헤스따(A Xesta)를 지난다.
자료에 의하면 2010년에 23명이던 주민이 현재(2014년) 19명이란다.
매년 1명씩 감소한 꼴인데 이 추세라면 20년 안에 폐촌될 운명의 마을?
소 잃기 전에 외양간 고쳐라
3km남짓 남은(이정표) 곤딴(Gontan)까지의 노르떼 길은 변수(variable)가 적지 않은 길이다.
고정(permanent)된 까미노란 있을 수 없기도 하지만 고속도로 건설이 너른 고지대를 분탕질
함으로서 이름을 가진 길들에 무명의 길들이 파생되었기 때문이다.
모두 완만하게 내려가는 길이므로 선택에 따라 약간의 단축효과가 있거나 반대현상이 가능한
길이다.
당도한 곤딴, 한 바르의 실외 탁자에서 맥주를 마시던 알레만 청년이 반기며 앞장 섰다.
길 왼편의 예배당(Capilla de Gantan)을 지나 우측 광장에 자리한 알베르게(Albergue de pe
regrinos de la Xunta de Galicia/Praza Campo da Feira 11).
나의 입실이 이른 편이라 그의 양보를 받지 않아도 되어 다행이었다.
샤워까지 모든 절차를 마쳤을 때 볼프강이 도착했다.
아 헤스따 이후 이런저런 생각하느라 그를 앞세웠는데 한참이나 지각하다니.
내게 행운이 따랐다면 그에게는 불운의 길이었던 것.
잘못 들어섬으로서 적잖이 돌았단다.
입실을 마친 볼프강과 그와 친분있는 알레만녀 니콜(Nicole), 내게 하층침대를 연거푸 양보한
청년 루디거르(Rudiger) 등 우리 3남 1녀가 모처럼 한팀이 되어 외식하게 되었다.
같은 알레만인데도 내가 소개해야 한 루디거르를 포함해 3독 1한이.
마치 알레만 단합 모임에 꼬레아노가 초대된 형국이라 할까.
노르떼 길에서 알레만은 프랑스와 2위를 다툴 정도의 비중이지만 내게는 절대적임을 듯한다.
그들에게 호의적인 것은 맞지만 티나게 선호하는 것도 아닌데 그들과의 접촉이 많아진다.
아마도 '자기네끼리'라는 게르만인의 특성 효과일 것이다.
그들이 내게 각기 1사람씩 소개해도 기하급수적 증가 현상이 불가피하니까.
그럼에도, 전번(2011년)에도 그랬지만 이번(2015년)에도 알레만과 마주하게 되면 예외 없이
하켄크로이즈(Hakenkreuz/나찌의 갈고리십자가)에 시달리게 된다.
내가, 또는 내 조상이 나치에게 유린당한 적이 있는 것도 아니건만 왜 욱일기 또는 일장기(일
본 국기) 못지 않게 예민한 반응이 절로 나타나는지 모를 일이다.
공교롭게도 선택한 메뉴도 3독 1한이었다.
그들은 까바요(caballo/말고기)를 합창했고 나는 까바요를 제외한 또도(todo/모든 것)였는데
쎄르도(cerdo/돼지고기)로 낙착되었으니까.
나의 모든 선택기준은(특히 까미노에서는 더욱) 같은 값이면 좋은 것, 같은 것이면 싼 것일 뿐
기호(선호) 또는 금기 품목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닌데 말고기는 왜 그럴까.
어떤 토테미슴(tomemism)에 걸려 있거나 말에게 특별한 감정을 가진 것아 아니므로 아직 내
정서를 파고들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유명 연예인들을 포함한 소위 서양의 명사들이 동물사랑과 보호를 명분으로 하여 높이고 있는
개고기 반대 목소리를 나는 치졸한 위선이라고 혹평한다.
개고기 먹는 나라라는 이유로 한국에서 열리는 올림픽 보이콧 캠페인(boycott campaign)을
격렬하게 벌린 때가 1988년이다.
개고기를 한국보다 열광적으로 먹는 중국에서 개최된 20년 후의 올림픽에서 그들의 목소리는
실종되고 말았다.
한국을 향해 고압적이었던 그들은 건재한데 목소리가 죽었다면 약대강 강대약(弱對强强對弱)
의 표본인 그들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지 자명하지 않은가.
갈리씨아 지방의 식당에서 '뻬레그리노스 메뉴'라면 대부분이 양적으로 넘친다.
그런데도 맘씨 좋은 주인은 부족한 듯 하면 더 채워주는데(refill) 이 집(Restaurante Niza)이
그런 집에 속한 듯 자꾸 나왔다.
모처럼 포식했는데도 남았고 까바요가 오랜만인 듯 식사에 몰두하던 3독의 동작도 둔해졌다.
속담 '금강산도 식후경'은 과연 명언이다.
포만 상태가 된 후 비로소 사물이 제대로 보였으니까 내가 꽤 굶주린 상태였던가.
소등시간(10:00)이 임박해 돌아온 알베르게가 식사하러 가기 전과 달리 위험덩어리로 보였다.
비상탈출구가 전무하고 2층에서 26명이 일시에 탈출하기에는 턱없이 협소한 출입계단 하나가
있을 뿐 안전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는 건물이기 때문이다.
갈리씨아 자치지방 정부(Xunta)가 순례자들의 편의를 위해 위피(W I F I)까지 갖추며 최신형
알베르게로 신축은 했지만 결정적인 하자의 건물.
화마(火魔)가 까미노의 알베르게는 피해가겠다고 약속이라도 했는가
극한 상황일 때 큰 부상에서 사망까지 각오하고 2층에서 뛰어내려야 하는데 안전하도록 중력
(重力)이 눈감아 주겠다던가.
어찌하여 가장 기본적이고 지극히 상식적인 문제를 간과한 건물을 세웠을까.
숙박업소를 비롯하여 낯선 집에서 밤을 보내게 되면 맨 먼저 확인해야 할 곳이 출입구다.
다중이 집단적일 때는 특히 자기 위치에서 가장 가까운 출구를 알아두는 것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화재와 붕괴 등 돌발적 위기에 직면할 때 탈출해야 하니까.
그럼에도 얼핏 살펴본 방명록에는 이같은 문제 제기는 한마디도 없고 찬사로 가득찼으며 특히
이 알베르게에서 묵고 간 한국인들의 감격어린 표현들은 간지러울 지경이다.
나는 쓴 소리지만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우를 범하기 전에 대비할 것을 촉구했다.
<'Cuidado!' "Despues del caballo hurtado, cerrar la caballeriza"
"Mend the barn after the horse is stolen"
Coreano - Santiago, Kim>
(모자라는 스페인어 때문에 스마트폰을 뒤져서 썼음을 고백한다)
내가 그들의 자존심에 먹칠하는 망언을 하고 있는가.
그러나, 당신이 하나 밖에 없는 좁은 출입구에 서서 곤히 떨어진 26명의 뻬레그리노스를 응시
하고 있다고 가정해 보라.
이 때 인화물질로 가득찬 이 방에서 어떤 원인으로 화재가 발생했다면 어떤 현상이 벌어질까.
뻬레그리노스는 모두 도덕적이고 희생정신이 강해서 자기는 죽어가면서도 고령자와 연소자를
앞세우고 질서 정연하게 탈출하리라고 기대하는가.
그렇게 한다면 몇명이나 탈출할 수 있겠는가.
아비규환의 현장에서도 컴퍼터블(comfortable)하고 해피(happy)한 알베르게라고 극찬하며
훈따(Xunta)의 자존심을 자극한 나를 규탄할 수 있겠는가. <계 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