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인고락 (인문고전 독서모임) 원문보기 글쓴이: 책벌레
데카르트는 인간의 정념이 그 자체로 선하다고 주장한 점에서 에피쿠로스주의자였으며, 선을 이해하는 것이 곧 선을 행하기를 원하는 것이라고 생각한 점에서 극단적인 도덕적 낙관주의자였다. 그가 보기에 정념은 자발적인 의지이며, 어떤 것을 원하는 것은 그것을 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데카르트는 인간이 세계를 변화시키기 보다는 자신의 정념을 통제해야 한다고 촉구한 점에서 스토아주의자이기도 했다.
데카르트는 정치철학에 관한 글을 쓰지 않았지만, 사물들의 질서에 순종하라는 세네카의 충고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우정을 생애 최고의 거룩한 기쁨으로 여겼기 때문에, 친구를 속이도록 권하는 마키아벨리의 충고는 거부했다. 인간은 홀로 존재할 수 없고 국가·가족 등 사회집단의 일원일 수밖에 없으므로, 자기 자신보다는 집단의 이익을 위해 행동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고 생각했다.
데카르트는 1596년 프랑스의 라에(Lahaye)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1650년 스톡홀름에서 사망한 수학자(해석기하학의 창시자)이자 물리학자이며 철학자이다. 데카르트는 18세까지 당시 유럽에서 가장 유명했다는 예수회학원 라 플레시(La Fleche)에서 교육을 받았다. 1613년부터 1617년까지는 파리에서 공부하였다. 그 뒤 얼마 동안 파리의 사교계에 어울렸다. 1619년에는 군에 복무하게 된다. 군 복무 중에도 연구생활을 계속 하였는데, 이 때 명석성 추구와 진리탐구의 싹이 움튼 것으로 보인다. 그는 학문의 연구를 위해 은둔생활을 했기 때문에 그 당시 접촉한 사람은 극히 소수였다. 그 중 특기할 사람은 메르센 신부와 오라토리오 수도회의 베를느 추기경이었다. 오라토리오 수도회의 정신은 아우구스티노주의이다. 이런 정신은 데카르트의 사상에서 쉽게 간취된다. 1624년 파리로 돌아와 연구에 몰두하였고, 1628년 이후에는 조용한 홀란드로 가서 자기의 철학체계를 완수하는 데 전력을 기울였다. 1649년에 그는 스웨덴의 여왕 크리스티나의 초청을 받아 스톡홀름으로 갔으나 풍토가 맞지 않아 1650년 2월에 그 곳에서 죽었다.
베네딕트 데 스피노자의 합리론적 형이상학은 데카르트에게서 비롯했다. 스피노자는 신이라는 오직 하나의 실체만이 있고 신은 인격(유신론자들의 주장처럼)이 아니라 세계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그의 형이상학은 일원론·범신론·이신론(理神論)이다. 이 실체는 무한한 수의 속성을 갖고 있고, 그 속성들 각각은 신 혹은 세계의 총체성을 표현한다. 모든 속성은 모든 면에서 평행적이므로 정신과 물질은 비록 상호작용하지 않더라도 마치 상호작용하는 것처럼 보인다.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도 정신-육체 문제에 대해 평행론적 답변을 제시했다. 라이프니츠의 단자(單子) 혹은 실재의 정신적 단위(데카르트가 세계에서 추방한 내적 힘)는 자기완결적이다. 각각의 단자는 서로 다른 관점에서 전 우주를 반영한다. 단자는 상호작용하지 않지만 각 단자는 다른 모든 단자와 예정조화 속에 있기 때문에 외적으로 상호작용하는 것처럼 보인다. 조지 버클리는 일원론적 체계를 제시했다. 그는 물질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함으로써 물리적 사물은 지각가능한 관념과 같은 것이라는 믿음을 옹호했다. 그리고 신이 인간정신에 부여한 지각가능한 관념이 과연 사물에 대한 참된 앎을 제공하는가에 대해서도 회의하지 않았다. 버클리에 따르면, 사물이나 현상은 직접적으로 알려진다. 또한 정신-육체의 상호작용의 문제도 없다. 왜냐하면 육체는 정신적 관념들로 이루어져 있고, 인간정신은 그 관념들 중 일부를 통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토머스 홉스는 물질만이 존재한다고 주장함으로써 정신을 제거했다. 사유하고 지각하는 정신은 단지 두뇌활동의 현상일 뿐이다. 사유된 것들은 부수현상이다. 사고와 느낌은 '끽' 하는 소리가 바퀴에 기름칠할 필요가 있음을 나타내듯이 육체에서 무엇이 진행되고 있는지를 반영한다. 그러나 사고는 완전히 파생적이고 육체 기계의 작동에 어떠한 영향력도 갖고 있지 않다. 따라서 홉스의 일원론적 유물론도 정신과 육체의 상호작용 문제를 제거해버리고 있다.
이밖에도 데카르트의 영향으로 볼 수 있는 것은 다음의 2가지이다. 하나는 표상적 관념에 의해 이루어지는 데카르트의 인식이론에서 비롯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코기토'에서 비롯된 것이다. 전자는 갈릴레오가 물체의 실재적 1차 성질(모두 양적인 크기·형태·위치·운동 혹은 정지)과 정신 속에만 존재한다는 지각 가능한 성질 혹은 2차 성질(색·촉감·소리·향기·맛)을 구별한 데 뿌리를 두고 있다. 물체의 2차 성질은 1차 성질이 감각기관에 작용해 정신에 지각 가능한 관념을 만들어낸 결과로 나타나는 성질이다. 로크는 크기·형태·위치·운동 혹은 정지 등 지각가능한 관념은 있는 그대로의 물질적 대상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모든 관념은 정신적인 것이기 때문에, 어느 것도 물질적 대상과 유사할 수는 없다는 반론이 있을 수 있다. 사람은 관념이 물체를 표상한다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버클리의 현상론(정신과 지각가능한 관념만이 존재한다는 이론)은 이러한 회의적 문제에 대한 모범적 해결책이다. 그에 따르면 물체는 지각가능한 관념들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직접적으로 알려진다. 데이비드 흄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정신 역시 관념의 다발일 뿐이라고 말했다. 20세기 영국의 철학자 G. E. 무어와 버트런드 러셀, 독일의 실증주의자 모리츠 슐리크, 루돌프 카르나프, 오스트리아 태생의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등은 흄을 따라 지각가능한 관념들을 감각자료라고 불렀다. 그들은 이 감각자료로부터 세계에 대한 논리적 구성물을 만들었다. 에트문트 후설은 지각가능한 관념들을 기술함으로써 현상학을 확립하고자 했다. 러셀과 미국 실용주의자 윌리엄 제임스는 중립적 단자로부터 정신과 물질 모두를 구성하려 했다. 이 체계들은 모두 데카르트가 제시한 관념의 방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다른 하나의 영향은 데카르트의 '코기토'에서 비롯했다. '코기토'는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신플라톤주의 철학에 뿌리를 두고 있다. 장 폴 사르트르는 각 개인은 무(無)에서 존재로 나타나기를 선택한다고 주장했다. 사르트르는 오스트리아 정신분석학자 지크문트 프로이트가 주장한 무의식을 부정함으로써 자아가 의식적이라는 데카르트의 관점을 지지했다.
데카르트 형이상학의 몇몇 측면은 20세기에 들어서도 여전히 강력한 지지를 받고 있다. 데카르트와 마찬가지로 미국 언어학자 놈 촘스키는 모든 인간이 다른 동물과 달리 언어를 배울 수 있는 본유적 능력을 갖고 있다고 주장한다. 오스트레일리아 생리학자 존 C. 에클스와 영국 영장류(靈長類) 학자 윌프레드 E. 르 그로스 클라크는 정신을 비물질적 실체라고 전제한다.
20세기에 데카르트 이원론을 가장 강력하게 공격하기 시작한 사람은 영국 분석철학자 길버트 라일이다. 라일은 〈정신의 개념 The Concept of Mind〉(1949)에서 정신을 기계 속의 유령의 오류로 설명한다. 그는 정신-유령은 단지 육체의 지적 행동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현대의 많은 분석철학자들과 마찬가지로, 라일은 존재와 실재에 대한 형이상학적 문제는 경험적으로 검증할 수 없는 실체들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에 무의미한 표현이라고 주장한다. 오스트레일리아 철학자 J. J. C. 스마트의 견해와 마찬가지로 그의 견해도 정신은 두뇌라고 주장하는 점에서 궁극적으로 유물론적이다. 미국 실용주의자 리처드 로티는 〈철학과 자연의 거울 Philosophy and the Mirror of Nature〉(1979)에서 확실한 지식에 대한 데카르트의 요구는 신에 대한 인간의 잘못된 추구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로티는 데카르트의 전통을 따르는 철학은 신학에 대한 20세기의 대체물이고 신과 마찬가지로 휴식에 들어가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데카르트의 영향은 매우 침투력이 강해 모든 서양철학자는 데카르트주의를 거부할 때조차도 데카르트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의 견해는 필연적으로 데카르트가 제기한 문제들에 대한 반응이다. 또한 데카르트는 현대 수학의 시초에 서 있다. 그는 해석기하학을 고안함으로써 뉴턴과 라이프니츠의 미적분학을 창시하는 데 중요한 기초를 제공했다. 흄이 사실과 가치를 구분한 것도 데카르트가 수학적·객관적인 것을 감정적·주관적인 것보다 우위에 놓은 데서 영향을 받은 것이다. 데카르트의 회의적·수학적 방법은 현대 과학의 바탕을 이루고 있다. 그의 합리성은 서구인의 현대 의식을 형성하고 있다. 정신과 물질을 지배하려 했던 그의 강렬한 바램은 현대 과학과 사회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세속적 목적과 일치한다. 이처럼 인간을 포함해 자연에 대한 지배를 강조하는 오늘날의 시대 분위기에서 '데카르트주의적'이라는 말은 과학·기술·사회에서 유물론적·논리적·무감정적·비인간적인 모든 것을 뜻하는 말이 되었다.
℺루소(1712. 6. 28 제네바~ 1778. 7. 2 프랑스 에르므농빌)/ 프랑스의 철학자·교육학자·음악가·음악평론가. 이성의 시대를 끝맺고 낭만주의를 탄생시킨 사상을 전개했다. 그의 개혁사상은 음악을 비롯한 여러 예술에 혁신을 가져왔고 사람들의 생활방식에 큰 영향을 끼쳤으며 자녀에 대한 부모의 교육방식에도 변화를 일으켰다. 우정과 사랑에서 예의바른 절도보다는 자유로운 감정표현을 중시했다. 종교를 버린 이들에게는 종교적 감성을 숭배하도록 인도했으며, 누구나 자연의 아름다움에 눈뜨고 자유를 가장 보편적 동경의 대상으로 여길 것을 역설했다.
어머니가 루소를 낳다가 죽자 가난한 시계공이었던 아버지가 그를 길렀다. 아버지가 칼을 휘두른 일 때문에 가족이 제네바로 도망쳐 6년 동안 외가에서 가난하게 살다가 16세 때 모험가의 삶을 꿈꾸며 제네바를 떠났다. 그러나 사보이 지방에서 후원자인 바랑 남작부인을 만나 집사로 일하면서 철학자·문인·음악가가 되기 위한 공부를 할 기회를 얻었다.
30세 때 파리에 도착하여, 문필가로서 야망을 지닌 드니 디드로를 운좋게 만났다. 두 사람은 곧 디드로가 편집자로 임명되었던 프랑스 〈앙시클로페디 L'Encyclopédie〉를 중심으로 모인 지식인 집단인 '철학자들'에서 중심역할을 했다. 급진적·반(反)교권적 견해를 발표하는 주요수단이었던 〈앙시클로페디〉 기고자들은 대개 철학자이자 개혁가·구습타파주의자였다. 이 가운데 루소는 가장 독창적이고 강렬하면서도 유려한 글솜씨를 지녔다. 뿐만 아니라 오페라 〈마을의 점쟁이 Le Devin du village〉(1752)를 작곡하여 왕과 왕실로부터 인정받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칼뱅주의적 기질 때문에 이러한 세속의 영화를 거부했다.
37세 때 반종교적 성향의 글로 구속된 디드로를 만나기 위해 뱅센으로 가는 도중, 훗날 〈고백록 Confessions〉에서 밝혔듯이 '빛'을 보았으며, 그 빛은 당시의 진보가 인간을 개선하기는 커녕 타락시키고 있다는 '무서운 섬광'으로 다가왔다. 이러한 통찰은 뒤이어 쓴 디종 아카데미 현상 논문 〈학예론 Discours sur les sciences et les arts〉(1750)의 골격을 이루고 있다. 이 논문은 "인간은 본래 선하지만 사회와 문명 때문에 타락했다"는 그의 사상의 중심 주제를 잘 보여주고 있다. 많은 로마 가톨릭 작가들도 유럽 문화가 중세 이래 타락했다고 지적했지만, 루소는 인간이 본래 선하다고 본 점에서 독특했다.
첫 논문이 출판된 후 루소는 몇 년 간 음악을 전문분야로 삼아 〈앙시클로페디〉 기고가로 활발하게 활동했다). 1752년 당시 파리에서 페르골레시, 스카를라티, 빈치, 레오 등의 이탈리아 오페라가 상연되기 시작하자 사람들은 이탈리아 오페라 지지자와 프랑스 전통 오페라 지지자로 나눠졌는데, '백과전서파'인 달랑베르·디드로·올바크·루소 등은 이탈리아 오페라를 지지했다. 루소는 당시 유명한 작곡가 라모와 이 문제를 두고 논쟁을 벌였다. 이 논쟁은 음악적일 뿐 아니라 철학적 성격을 띤 것이었다. 라모는 화음을 중시하여 합리적·지성적 규칙을 지키는 것이 예술의 필수조건이라고 주장한 반면, 루소는 멜로디가 화음에 우선해야 한다는 원칙을 내세우면서 이탈리아 오페라가 프랑스 전통 오페라보다 우월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예술에서 창조정신을 자유롭게 표현하는 것이 형식적 규칙과 전통적 절차를 지키는 일보다 중요하다고 봄으로써 낭만주의 사상의 기반을 닦았다. 루소는 음악에서 자유를 옹호한 해방자였다.
루소는 가톨릭교에서 프로테스탄트교로 개종하기 위해 칼뱅주의도시인 제네바로 돌아가면서 당시 사귀었던 세탁소 여종업원 테레즈 르바쇠르를 동행해 사람들을 놀라게 했으며 구설수도 있었으나 그는 별탈없이 칼뱅주의파 교회에 재가입했고 문필가로서의 명성 덕분에 큰 환영을 받았다.
루소는 디종 아카데미의 질문에 답하는 2번째 논문 〈인간 불평등기원론 Discours sur l'origine de l'inegalité parmi les hommes〉(1755)을 완성했다. 그 질문은 "인간들 사이의 불평등의 기원은 무엇이며, 그것은 자연법에 의해 정당화될 수 있는가?"였다. 이 물음에 대해 그는 자연상태의 인간은 선했지만 이후 타락했다는 주장을 발전시킴으로써 첫 논문인 〈학예론〉의 맥을 잇고 있다. 〈인간 불평등기원론〉은 이 주장을 더 가다듬어 자연적 불평등과 인위적 불평등을 구별했다. 자연적 불평등은 건강·지성 등의 차이에 따른 불평등이고, 인위적 불평등은 사회를 지배하는 규율에 의해 생긴 불평등이다. 그가 문제삼은 것은 인위적 불평등이다. 그는 인간 불평등의 기원을 탐구하는 나름대로의 '과학적' 방법으로 인류생활의 초기단계를 재구성했다(원시주의). 그는 최초의 인간은 사회적 존재가 아니라 고독한 존재였다고 보는 점에서 홉스의 자연상태에 관한 설명에 동조했다. 그러나 자연상태의 인간생활이 '가난하고 불결하고 거칠고 부족한' 것이라고 본 영국 비관론자와 달리 최초의 인간이 건강하고 행복하고 착하고 자유롭다고 주장했다. 악은 인간이 사회를 형성한 때부터 시작되었다.
루소는 악의 출현과 관련해서 자연은 책임이 없으며 사회에 문제가 있다고 주장했다. 사회는 인간이 남녀 공동생활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처음으로 거주지를 만들면서 형성되었다. 가족이 형성되고 이웃과 교제하는 생활방식이 생겼다. 이러한 '초기(미숙한) 사회'는 실로 인간의 '황금시기'로서 그것이 지속되는 동안은 좋았다. 그러나 그 시기는 오래 갈 수 없었다. 사랑의 감정과 함께 질투의 파괴적 감정이 일어나고, 사람들은 자신의 능력과 성취물을 다른 이와 비교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불평등을 향한 첫걸음이자 악을 향한 첫걸음이었다". 인간 각자가 다른 이보다 나은 사람이 되기를 열망하면서부터 때묻지 않은 자기사랑은 자만심으로 바뀌어 갔다.
재산의 출현으로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법과 정부를 만드는 일이 필요해짐에 따라 불평등은 더욱 심해졌다. 루소는 토지가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은 상태를 벗어난 데서 비롯된 '끔찍한 사태'를 묘사하면서 재산이라는 '치명적인' 것이 생겨난 상태를 한탄했다. 그러나 과거는 어떤 방식으로든 보존될 수 없고 황금시기로 돌아갈 수도 없다.
시민사회는 2가지 목적, 즉 모든 사람에게 평화를 제공하는 한편 재산에 대한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등장한다. 시민사회는 모든 사람에게 이익을 주지만 주로 부자에게 이익을 준다. 왜냐하면 기존의 소유권을 적법한 것으로 정착시킴으로써 가난한 자를 계속 무소유상태로 만들기 때문이다. 정부를 세우는 일은 가난한 자가 부자보다 얻는 것이 적은 한 어떤 의미에서는 정당하지 못한 사회계약이다. 그렇지만 사회 속의 인간은 결코 만족을 모르기 때문에 가난한 자 못지 않게 부자도 행복하지는 않다. 사회 속에서 사람은 각자의 이해관계 때문에 끊임없이 갈등하며, 적개심을 친절이라는 가면 뒤에 숨긴 채 서로 미워한다. 루소는 인간 불평등을 별개의 독자적 문제로 보지 않고 인간이 자연과 순진무구함으로부터 소외되어 온 오랜 역사과정의 부산물로 보았다.
〈인간 불평등기원론〉을 제네바 공화국에 바치기 위해 쓴 헌정사에서 루소는 이 도시국가가 '자연이 인간들 사이에 설정한 평등과 인간이 그들 사이에서 제도화한 불평등' 간의 이상적 균형을 이루었다고 찬사를 보냈다. 그가 제네바에서 눈여겨본 것은 최선의 사람이 시민에 의해 선출되고 최고의 지위까지 올라갈 수 있는 점이었다. 플라톤과 마찬가지로 그는 모든 사람이 자신에게 알맞는 자리에 있는 것이 공정한 사회라고 보았다. 인간이 어떻게 자유를 잃어버렸는가를 설명하기 위해 〈인간 불평등기원론〉을 쓴 루소는 인간이 앞으로 어떻게 자유를 되찾을 수 있는가를 문제로 〈사회계약론 Du Contrat social ou principes du droit politique〉(1762)을 썼다. 이 글의 모델도 제네바였다.
〈사회계약론〉은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났으나 모든 곳에서 사슬에 매여 있다"는 유명한 문장으로 시작해서 인간이 사슬에 묶여 있을 필요가 없다는 주장으로 나아간다. 〈인간 불평등기원론〉에서 묘사된 부정한 사회계약과 반대로 시민사회나 국가가 참된 사회계약에 바탕을 두고 있다면, 인간은 자연상태의 독립을 희생한 대가로 더 나은 자유, 즉 참된 정치적 자유를 얻을 수 있다. 그러한 자유는 스스로 부과한 법에 복종함으로써 찾을 수 있다.
루소가 정의한 정치적 자유에는 문제가 있다(자유주의). 개인은 단일한 의지를 지닌 존재이기 때문에 스스로 정한 규칙에 복종함으로써 자유로울 수 있다. 그에 반해서 사회는 서로 다른 의지를 가진 개인들의 집합이기 때문에 개별의지들 사이에는 갈등이 있다. 이 문제에 대해 루소는 시민사회를 일반의지에 의해 통합된 인위적 존재라고 답한다. 루소가 말하는 공화국은 비록 개인적 이익 때문에 가끔 갈등을 일으키기도 하지만 일반의지의 창조물이다. 일반의지는 결코 각 구성원의 의지로 흩어지지 않으며, 공적·국가적 이익을 지향하는 의지이다.
시민사회 구성원이 되겠다는 협약 아래 모든 사람은 자신과 자신의 모든 권리를 남김없이 공동체에 양도해야 한다고 본 점에서 루소는 토머스 홉스와 비슷하다. 그러나 루소는 이러한 양도를 시민권을 갖기 위해 자연권을 포기하는 일종의 권리교환으로 이해한다. 이 거래는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유리하다. 즉 포기하는 권리는 전적으로 개인 자신의 힘으로 실현되기 때문에 불분명한 가치를 지닌 데 반해, 대가로 얻은 권리는 공동체의 집합적 힘에 의해 강화되는 합법적 권리이기 때문이다.
루소는 참된 법과 실정법을 근본적으로 구별한다(법철학). 〈인간 불평등기원론〉에서 묘사되듯이 실정법은 단순히 현상태를 보호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사회계약론〉에서 서술하는 참된 법은 정당한 주권자인 민중의 집합적 능력에 의해 만들어졌을 뿐 아니라 다같은 시민인 민중이 복종하기 때문에 정당한 법이다. 루소는 어떤 민중도 자신에게 부당한 법을 만든다고는 볼 수 없으므로 그 법은 부당할 수 없다고 확신했다.
그런데 루소는 민중이 반드시 가장 지성적인 시민을 대표로 선출하지는 않는다는 사실 때문에 고민했다. 실제로 그는 플라톤과 마찬가지로 대부분의 민중이 어리석다는 점을 인정했다. 일반의지는 도덕적으로 항상 건전하지만 때로는 잘못을 범할 수 있다. 그래서 루소는 민중에게는 솔론, 리쿠르고스, 칼뱅과 같이 헌법이나 법률체계를 구상하는 훌륭한 정신을 소유한 입법자가 필요하다고 제안했다(군주제, 교회와 국가, 왕권신수설).
이 제안은 마키아벨리도 비슷하게 제시한 적이 있다. 루소는 마키아벨리를 매우 칭송했으며, 마키아벨리가 공화국정부를 옹호한 점에 공감했다. 마키아벨리의 영향은 시민종교에 관한 서술에서 더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루소에 따르면 그리스도교는 보이지 않는 세계를 지향하기 때문에 시민에게 국가에 봉사하는 데 필요한 용기·남성다움·애국심 등의 덕목을 가르치지 않으므로 공화국 종교로서는 쓸모가 없다(종교철학). 마키아벨리처럼 이교적 제례의식의 부활까지 주장하지는 않았지만 루소는 군사적 덕목의 개발을 강화하기 위해 최소한의 신학적 내용을 가진 시민종교를 제창했다
루소는 1754년 시민권을 회복한 뒤 다시 파리로 돌아왔다. 이전처럼 백과전서파와 어울렸지만 점차 이러한 세속적 생활에 짜증이 났고 동료 철학자들과 다투기 시작했다. 루소는 다시 파리를 떠나 자연에 파묻혀 생활하기 위해 몽모랑시 근처에 있는 친구 에피네 부인의 시골 영지에서 머물다가 얼마 뒤 마레샬 드 뤽상부르의 보호 아래 '몽루이'라는 근처 별장으로 은둔했다. 그러나 높은 지위에 있는 이 친구도 1762년 교육에 관한 저서 〈에밀 Émile〉이 출판되어 프랑스 의회의 독실한 얀센주의자들이 분노했을 때에는 루소를 도와줄 수 없었다. 얀센주의자들은 이 책을 불태우게 했고 저자를 체포하도록 했다. 루소는 피난처를 이리저리 옮겨 다니면서 여생을 보냈다.
몽모랑시에서 지낸 몇 년 동안은 가장 창조적으로 저술활동을 한 시기였다. 〈사회계약론〉과 〈에밀〉에 이어 〈신(新) 엘로이즈 Julie:ou, la nouvelle Héloïse〉(1761)가 1년 안에 나왔는데, 이 세 작품은 모두 독창적이다. 〈신 엘로이즈〉는 소설로 〈사회계약론〉이나 〈에밀〉과 달리 검열을 받지 않았다. 이 소설은 널리 읽혔고 루소의 생애 동안 가장 많은 사람들에게 칭찬받았으며 음악에 관한 글들과 마찬가지로 다른 어떤 문학작품보다 더 낭만주의를 발전시켰다. 또한 〈사회계약론〉과 〈에밀〉이 치안판사와 목사를 적으로 만든 것과는 달리, 특히 교양있는 여성들을 중심으로 많은 독자를 친구로 만들었다. 그래서 루소가 박해를 받을 때면 볼테르나 디드로와는 달리 많은 여성이 그를 위기에서 구해 주었다.
〈신 엘로이즈〉는 〈사회계약론〉과 상당히 대조적으로 국가나 공적 생활이 아닌 가정생활에서 행복을 찾는 사람들에 관한 소설이다. 이 소설에서 주인공인 중류계급의 교사 생 프뢰와 상류계급의 학생 줄리가 신분법상 금지된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는 루소 자신의 경험을 반영한다. 이 책은 그러한 사회질서를 승인하지만 자유로운 감정표현과 극단적인 감수성을 나타낸 점에서 혁명적이었으며 문학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에밀〉은 소설과 교육학논문의 중간형태로서, 〈사회계약론〉의 공화주의윤리와 〈신 엘로이즈〉의 귀족윤리를 번갈아 내세운다. 이 작품은 한 가정교사가 어떤 부자의 아들을 가르치는 이야기이다. 루소는 여기서 악과 오류는 어린이의 본성이 아니라 외적 영향에 의해서 일어나므로 가정교사는 이러한 악영향을 막고 어린이가 자연(본성)에 따르도록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했다(교육철학, 교육학).
〈사회계약론〉이 자유실현에 관한 것이라면 〈에밀〉은 행복과 지혜에 관한 것이다. 루소는 〈에밀〉에서는 시민종교 대신 개인종교를 제시하는데, 그것은 계시나 교리를 갖지 않는 단순화한 그리스도교의 일종이다. 그는 〈사브와 지방 보좌신부의 신앙고백 La Profession de foi du vicaire savoyard〉(1765)에서 신의 존재와 영혼의 불멸성을 의심하는 데 그치지 않고, 신을 경배하는 강한 감정적 충동을 자연, 특히 인간의 손이 닿지 않는 산이나 숲의 자연에서 느낀다. '인간 안에 있는 신성한 목소리'인 양심을 강조하면서 냉철한 합리주의적 윤리범주나 성서의 권위를 모두 반대한다(종교철학).
이러한 최소화한 신앙 때문에 루소는 교회 정통파나 파리의 공공연한 무신론자와 어울릴 수 없었다. 자신의 작품 특히 〈신 엘로이즈〉가 열렬한 찬사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점차 고독하고 고통받고 박해받고 있다고 느꼈다. 루소는 프랑스에서 추방된 후 스위스의 여러 주(州)로 쫓겨다녔다. 그는 제네바에서 〈사회계약론〉을 탄압하는 데 대해 〈산에서 쓴 편지 Lettres écrites de la montagne〉(1764)라는 소책자에서 도시국가체제를 고발함으로써 반격하고 있다. 그는 제네바가 25명의 독재자에 의해 통치되는 곳이라고 비난했다(칼뱅주의).
루소는 베른 주에서 추방된 뒤 영국으로 피신했다. 데이비드 흄이 그를 도와 조지 3세에게서 연금을 받도록 해주었으나 영국 지식인들이 자신을 조롱하고 있고 흄도 마찬가지라고 의심했다. 그는 여러 가지 정신분열증 징후를 보였으며 마침내 이름을 숨긴 채 다시 프랑스로 돌아갔다. 테레즈가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라고 확신하고 1768년 56세 때 그녀와 결혼했다.
마지막 10년 동안 루소는 주로 적들의 비난에 대해 자신을 정당화하는 자서전적 글을 썼는데, 가장 중요한 책은 〈고백록〉이다. 또 적들이 씌운 혐의에 답하기 위해 〈루소는 장 자크를 심판한다 Rousseau juge de Jean-Jacques〉(1780)를 썼다.
가장 감동적인 책 가운데 하나인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 Les Rêveries du promeneur solitaire〉(1782)에서는 초기의 강렬한 열정이 온화한 서정성과 진지함으로 나타난다. 그는 말년에 정신적 평온을 얻었고 프랑스 대귀족 콩티 공과 지라르댕 후작의 영지로 피신했다가 죽었다.
℺헤르첸(1812 ~ 1870)/ 러시아의 혁명적 민주주의자, 유물론자, 나로드니키주의의 창시자. 귀족 신분으로 모스크바 대학에서 수학하고, 그 후 곧 짜르 정부에 의해 유형을 갔으며(1835~1840), 1841~1842년 유럽을 뒤덮은 혁명을 프랑스와 영국에서 목격했다. 58세에 파리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 동안 혁명적인 문학신문 「종」(鍾, Kolokol)을 발행했다(1857~1867). 그의 사상적 발전은 단순한 것이 아니지만 일관하여 관철되고 있는 것은 다가와야 할 사회 혁명의 기초로서의 새로운 사실적ㆍ과학적 이론을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프랑스의 공상적 사회주의, 르네상스기의 역사기술, 독일 고전철학을 섭취ㆍ연구하여, 40년대에는 헤겔 변증법의 유물론적 해석을 시도하고 후에 변증법을 '혁명의 대수학'(代數學)이라고 논했다. 레닌은 그의 사상을 평가하여 변증법적 유물론에 매우 접근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는 존재와 사고, 실천과 이론, 사회와 개인의 통일성을 증명하는 데 힘쓰고, 경험과 사고의 통일을 통해 실재의 참된 인식론을 세우고자 하였다. 역사에 관해서는 거기에 작용하는 객관적 법칙의 연구에 마음을 두고, 역사를 자연발생적인 과정과 개개인의 역사적 활동과의 결합이라고 설명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실천과 이론의 통일이라는 입장에서 대중을 계몽하여 사회주의 혁명에 대비하고자 노력하였다. 그가 심각한 영향을 받은 것은 스스로 목격한 1848~1849년의 혁명이었고, 그 패배를 통해 그는 서유럽에는 사회주의 사상이 출현하고 있지만 이것에 부응하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는 눈을 돌려 러시아의 농민공동체에 사회주의적 미래의 근본이 있다고 하여, 러시아의 농민 사회주의를 제창하고 농민문제 해결과 자본주의를 거치지 않는 사회 발전의 길에 대해 설명하였다. 1850년대의 러시아에서 일어난 사건들을 목도한 그는 부르주아 세력의 진출을 보고 염세적 관념을 버리지 못했지만, 죽음을 앞에 두고 무정부주의자 바쿠닌과의 교제를 끊고 제1인터내셔널에 의한 서유럽 노동운동의 부흥을 기쁘게 맞이하였다.
주요저서
•Diletantizm v mauke, 1843.
•Pis'ma ob izuchenii prirody 1844~1846.
•O razvitii revolyutsionnykh idej v Rossii, 1851.
경력사항
•짜르 정부에 의해 유형(1835~1840)
•혁명적인 문학신문 「종」(鍾, Kolokol)을 발행(1857~1867)
℺프로이트(1856. 5. 6 오스트리아 모라비아 프라이베르크~ 1939. 7. 23 런던)/ 오스트리아의 신경학자, 정신분석학의 창시자. 지크문트 프로이트는 당대 최고의 지적 영향력을 가진 사람으로 볼 수 있다. 그의 정신분석학은 인간의 정신 및 정신병 치료에 관한 이론인 동시에 문화와 사회를 해석하는 시각을 제공하는 이론이다. 반복되는 비판과 논박, 수정에도 불구하고 프로이트의 연구는 그의 사후에도 유력한 분야로 계속 남아 있다.
프로이트는 당시에 합스부르크 제국의 일부였던 모라비아의 프라이베르크(지금의 체크 프르쉬보르)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인 야코브 프로이트는 유대인으로 모직상이었고, 아말리 나단슨과 재혼하여 40세에 프로이트를 낳았다. 1859년 프로이트 가족은 경제적인 사정으로 라이프치히로 이사했고 이듬해에 다시 빈으로 갔는데, 프로이트는 그로부터 78년 후 나치가 오스트리아를 합병할 때까지 그곳에서 살았다. 부분적으로는 빈 시민들의 반유대주의 때문에 프로이트는 이 제국 도시를 싫어했지만, 정신분석학은 그것이 배태된 곳의 문화적·정치적 맥락을 상당히 반영한다. 예를 들면 프로이트는 아버지의 권위가 취약하다는 점에 민감했는데, 이는 자유주의적 합리주의자였던 그의 아버지 세대가 합스부르크 제국에서 겪었던 권력의 쇠퇴에 의해 자극받은 것이다. 또한 딸들에 대한 유혹이라는 주제에 대해 그가 관심을 갖게 된 것도 여성의 성(性)에 대한 빈 사람들의 복잡한 양식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1873년 프로이트는 스페를 김나지움을 졸업했는데, 당시에 유행하던 괴테의 자연에 대한 수필을 읽고 감명받아 전공을 의학으로 선택했다. 빈대학교에서 그는 당시 탁월한 생리학자였던 에른스트 폰 브뤼케, 반생기론 과학의 선두주자였던 헤르만 폰 헬름홀츠와 함께 연구했다. 1882년 빈 종합병원에 들어가 정신과 의사인 테오도르 메이네르트와 내과교수인 헤르만 노드나겔로부터 임상수련을 받았으며, 1885년에는 신경병리학 강사로 임명되었고 뇌의 연수(延髓)에 대한 중요한 연구를 마쳤다. 1885년말 프로이트는 신경병리학을 계속 연구하기 위해 빈을 떠나 파리의 살페트리에르 병원에 가서 장 마르탱 샤르코 밑에서 연구했는데, 프랑스에서의 19주 동안의 경험은 일생의 전환점이 되었다. 샤르코가 '히스테리'라고 분류된 환자들에 대해 연구한 것을 보고 프로이트는 심리적인 질환의 원인은 뇌에 있다기보다는 마음에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샤르코는 팔이나 다리의 마비 같은 히스테리 증상과 최면상태에서 유발되는 현상들을 연결시켰는데, 이는 이 병의 원인이 신경계보다는 정신상태에 있음을 나타내주는 것이었다. 프로이트는 이후 얼마 가지 않아서 최면요법에 대한 믿음을 버렸지만, 1886년 2월 혁진적인 심리학적 방법을 가지고 빈으로 돌아 왔다.
수개월 후 프로이트는 함부르크의 수석 랍비와 하인리히 하이네 등을 조상으로 하는 저명한 유대인 가문의 딸인 마르타 베르네이즈와 결혼하여 6명의 자녀를 낳았는데 그중 하나인 안나 프로이트는 후에 뛰어난 정신분석가가 되었다. 결혼 직후 프로이트와 베를린의 의사인 빌헬름 플리스 사이의 긴밀한 우정이 시작되었고 15년간 친밀한 관계를 맺는 동안, 그는 플리스와 자신이 발전시킨 대담한 개념들에 대한 의견을 지속적으로 나누었다. 그의 인간의 양성(兩性)에 대한 믿음, 신체에는 성적 욕구를 만족시키는 부위가 있다는 생각, 심지어 성욕의 기원이 유아기에 있다고 생각한 것 등이 플리스와의 우정에 의해 발전되었다.
파리에서 돌아온 후 프로이트는 의사인 요제프 브로이어와 협력하여 연구하기 시작했다. 1880년대초에 브로이어는 이후 글에서는 '안나 O.'라고 알려진 베르타 파펜하임이라는 환자를 치료했는데, 그녀는 여러 가지 히스테리 증상을 앓고 있었다. 브로이어는 샤르코의 최면요법을 쓰는 대신 그녀로 하여금 자기최면과 유사한 상태로 빠지게 하여 스스로 자신의 증상의 초기 발현형태에 대해 이야기하도록 했다. 놀랍게도 이러한 행위를 통해 그녀는 그동안 사로잡혀 있던 증상으로부터 회복되었다. 브로이어와 안나 O.가 각각 '담화치료', '굴뚝청소'라고 한 이 방법은 병리적인 행동의 근저에 있는 억압된 감정을 분출시켜 풀어주는 작용을 하는 것으로 보였다.
프로이트는 10년 후인 1890년대 초 자유연상법을 개발하고 나서 비로소 브로이어의 경험이 함축하는 의미를 완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프로이트는 가히 혁명적이라고 할 수 있는 이 방법을 브로이어와의 공저인 〈히스테리에 대한 연구 Studien über Hysterie〉(1895)에 발표했다. 이 방법을 통해 프로이트는 환자에게 마음에 연상적으로 떠오르는 생각을 무작위적으로 표현하도록 함으로써, 그가 무의식이라고 불렀던 정신의 한 영역으로부터 나오는 내용들을 밝히려고 했다. 환자들이 자유연상 도중 갑자기 말을 멈춘다든가 더듬는다든가 하는 등의 어려움을 보일 때, 그는 이것이 환자의 표현에 대한 갈등과 방어를 암시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를 '저항'이라고 불렀는데, 이것은 숨겨진 충돌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반드시 분석되어야할 것이었다(→ 색인 : 억압). 샤르코나 브로이어와 달리 프로이트는 여성 히스테리 환자에 대한 임상적인 경험을 토대로 저항의 가장 두드러진 내용이 본질적으로 성적인 것이라고 결론지었고 더 나아가 신경증의 여러 증상들이 성적 감정 또는 충동과 이에 대한 정신적 방어 사이의 갈등에 기인한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부지불식간에 이루어지는 욕망과 방어 사이의 타협 형성의 결과로 생각되었던 신경증 증상들을 완화하기 위해서는 자유연상을 통해 갈등을 의식 세계로 끌어내고 그것의 함축된 의미를 밝혀내는 것이 필수적이었다.
프로이트의 히스테리에 관한 연구는 여성의 성과 그것이 신경증으로 발현될 잠재성에 초점을 맞춘 것이었다. 정신분석학(1896년 프로이트가 명명)이 보편적인 것이 되기 위해서는 정상적인 상태에 있는 남성의 정신도 연구되어야 했다. 이를 위해 프로이트는 그가 가장 잘 아는 자신의 경험을 일반화시켜 자신을 분석하기로 했다. 이는 그의 생애에서 괴로웠던 한 사건인데 1896년 10월 아버지 야코브 프로이트의 죽음을 통해 가능하게 되었다. 오랫동안 억눌러왔던 감정, 즉 그가 어린시절에 겪었던 가족 내에서의 경험과 애정에 관한 감정이 분출되었던 것이다. 1897년 7월초에 프로이트는 수천 년 동안 이루어졌던 방법인 꿈의 분석을 통해 본격적으로 그 감정들의 의미를 드러내려는 시도를 시작했다. 그가 꿈 분석의 전통에 기여한 것은 실로 혁신적인 것이었다. 그는 꿈의 분석이 '무의식에 대한 지식을 얻는 지름길'이라고 주장하면서, 꿈이 왜 생기며 어떻게 작용하는가에 대하여 매우 상세하게 설명했다. 많은 주석가들이 프로이트의 걸작으로 평가하는 〈꿈의 해석 Die Traumdeutung〉(1899)에서 그는 자신이 발견한 것들을 제시했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꿈은 소원실현(wish fulfillment)이 위장되어 표현된 것이며 신경증의 증상들과 마찬가지로 정신의 내부에서 욕망과 이를 실현하지 못하게 하는 금지 사이의 충돌이 타협한 결과인 것이다. 〈꿈의 해석〉은 프로이트가 '꿈 작업'(dream work)이라고 부른 꿈의 정체를 드러낼 수 있는 도구를 제공했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사람들이 기억하여 이야기하는 꿈의 현상적인 내용은 잠복된 의미를 베일로 가리고 있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꿈은 매일 겪는 즉각적인 경험의 잔재가 가장 깊고도 유아적인 욕망과 혼합되어 있기 때문에 논리적인 정합성을 가지고 있지 않지만, 궁극적으로는 해석이 가능하다. 꿈의 해석은 꿈의 방향과 반대되는 과정이며, 꿈을 의식적으로 설명하는 수준에서 의식의 바로 전 단계를 거쳐 무의식 자체로까지 옮겨가는 과정이다. 프로이트는 〈일상생활의 정신병리 Zur Psychopathologie des Alltagslebens〉(1904)·〈농담과 무의식과의 관계 Der Witz und seine Beziehung zum Unbewussten〉(1905)에 이어 〈성 이론에 대한 3가지 기고 Drei Abhandlungen zur Sexualtheorie〉(1905)를 출간했는데, 이 저서는 그를 성과학(性科學)의 선구자로 확립시켰다. 여기서 그는 성욕의 개념을 관습적인 영역을 넘어서 어린시절부터 계속되는 성애적인 충동들을 다 포함하는 것으로 확장시켰다. 인생의 초기에 시작되며, 만족시킬 것을 요구하고, 표현이 매우 다양하며 쉽게 잘못 발달될 수 있기 때문에, 그는 성욕을 인간 행동의 많은 부분을 움직이는 원동력이라고 결론내렸다.
프로이트는 신체에서 성적 욕구를 만족시키는 부위가 점진적으로 다른 부위에 의해 대체된다는 점에 초점을 맞추어 성적 충동의 발달과정을 설명했다(리비도). 원래 다형태인 인간의 성욕은 태어나자마자 어머니의 젖을 빠는 것을 통해 구강으로 충족시키려고 하며, 이후에는 다른 대체물로 옮겨진다. 구강기가 지나고 2세 때에는 어린이의 성욕의 초점이 항문으로 옮겨지는데, 이는 배변훈련에 의해 더욱 촉진된다. 항문기 동안에 배변을 통한 어린이의 쾌락은 주위의 자기통제 요구와 대립된다. 4~6세까지 지속되는 3번째 기간은 남근기인데, 그는 남성의 성욕을 발달의 준거로 보았고 이 시기의 주된 관심이 거세불안(去勢不安)이라고 주장했다. 때문에 이 시기에 대한 그의 분석은 많은 반대를 불러일으켰다.
그에 의하면, 남근기는 거세공포를 동반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남자 어린이가 어머니와 자고 싶어하는 욕망과 이를 충족시키는 데 방해가 되는 아버지를 제거하고자 하는 욕구)가 해소되어야 성공적으로 극복될 수 있다. 소년이 마침내 어머니에 대한 성적 욕구를 억제하고 소위 잠복기로 들어가며, 아버지의 꾸짖는 금지를 내면화하여 정신의 한 부분인 초자아 또는 양심을 구성할 때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해소될 수 있다. 그는 정신구조 내에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중요하다고 항상 주장했으며, 이의 성공적인 해소가 잠복기를 거쳐 성숙된 성욕의 단계인 생식기로 변화하는 데 선행조건이라고 생각했다. 생식기에서는 자신의 성과 반대되는 부모에 대한 욕구는 없어지고 재생산에 유용한 열정을 서로 주고받을 수 있는 좀더 적당한 사랑의 대상을 선호하게 된다.
만일 성적 발달의 여러 단계를 적절히 통과하는 데 실패하면, 어느 특정한 시기에 성적 대상이나 목표의 고착이 일어나 정신적으로 상처를 입게 되거나 강력한 성적 충동이 봉쇄된다. 이 고착은 나중에 나이가 든 다음에 성도착(性倒錯)의 형태로 표현되는데, 만일 정신의 어떤 부분이 노골적인 표현을 금지하면 충동이 억제되고 검열을 받기 때문에 음성적인 도착인 신경증 증상이 나타나게 된다. 감정의 갈등을 신체 증상으로 전환시키는 히스테리의 신경증 이외에도 그는 강박관념장애·편집증·나르시시즘 등의 다른 전형적인 신경증의 원인에 대해 복잡하게 설명했다. 그가 정신신경증이라고 한 이러한 신경증들은 아동기의 갈등에 그 뿌리를 두고 있으므로 현실의 문제 때문에 발생하는 침울증·신경쇠약증·불안신경증 등의 신경증과는 반대되는 것이다(도착증, 정신신경증).
당시 빈의 많은 사람들은 그의 이론을 불쾌하게 생각했으나, 1900년대초에 그의 이론에 대한 지지자들의 모임이 전세계적으로 열리기 시작했다. 1902년 그의 대기실에서 미래의 정신분석학 운동의 지도자가 될 많은 사람들이 참석한 가운데 '수요심리학회'(Psychological Wednesday Circle)가 열리기 시작했다. 여기에는 A. 아들러와 W. 슈테켈이 종종 S. 페렌치, C. G. 융, O. 랑크, E. 존스, M. 아이팅곤, A. A. 브릴 등과 같이 참석하기도 했다. 이 단체는 1908년에 빈 정신분석학회(Vienna Psychoanalytic Society)로 개칭했고 첫번째 국제학회를 잘츠부르크에서 열었으며, 같은 해에 베를린에 최초의 자매학회가 생겼다. 1909년 그는 융·페렌치 등과 함께 매사추세츠 우스터에 있는 클락대학교로 역사적으로 유명한 여행을 했다. 그곳에서 그가 행한 연설은 곧 〈정신분석학에 대하여 Über Psychoanalyse〉(1910)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는데, 이는 그가 일반 청중들을 위해 쓴 여러 개설서들 중 최초의 것이었다.
〈도라〉(1905)·〈작은 한스〉(1909)·〈쥐사나이〉(1909)·〈정신병자 슈레베 박사〉(1911)·〈늑대사나이〉(1918) 등으로 알려진 가장 유명한 일련의 생생한 증례 연구를 포함하고 있어서, 이 책은 그의 이론을 더 많은 대중에게 알려지게 했다. 치료에서 전이의 힘과 오이디푸스적인 갈등의 보편성을 강조한것에서 예견되듯이,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 운동의 초기 역사는 의견의 불일치, 배신, 변절, 제명 등으로 얼룩진 것이었다. 가장 널리 알려진 것으로 1911년 아들러, 1912년 슈테켈, 1913년 융과의 분립이 일어났고, 곧이어 1920년대에는 페렌치, 랑크, 빌헬름 라이히와 결별하게 되었다. 이러한 계속되는 분열에서 보이는 것처럼 그가 죽은 뒤 그에 대한 연구자들은 그의 정신분석학 운동이 과학자 사회보다는 분파주의적인 교회를 닮았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1920년대에 발간된 2권의 책 〈쾌락의 원리를 넘어서 Jenseits des Lustprinzips〉(1920)·〈자아와 이드 Das Ich und das Es〉(1923)에서 그는 초기에 정신을 무의식·전의식(preconscious)·의식으로 구분하던 것과 이후 자신이 이드(id)·자아(ego)·초자아(superego)로 범주화한 것 사이의 관계를 밝히려고 했다. 그에 의하면 이드는 유아기 때의 만족을 추구하는 가장 원시적인 충동으로서 흥분의 방출과 에너지의 집중을 통해 쾌락을 얻고자 하는 욕망에 의해 지배되는 충동이며, 본능을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1차적 과정에 의해 지배된다. 그리고 2차적 과정의 결과로 자아가 성장하는데, 이는 현실원리를 따르며 이드에 의해 지배되는 쾌락원리와 구별된다. 여기서 자기보존을 위해 욕망의 만족을 유보해야 할 필요를 점차 배우게 되면서 충족되지 못한 욕망으로 인해 갈등이 생기는데, 자아는 이러한 갈등을 처리하기 위해 방어 메커니즘을 발달시킨다. 방어 메커니즘 중 가장 기본적인 것은 억제이지만 그외에도 반동형성·분리·취소·부정·전이·합리화 등이 이에 속한다. 3번째 구성요소는 초자아로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해소되는 동안에 부모의 명령을 동일화함으로써 사회의 도덕적 규범을 내면화하는 것으로부터 발달된다. 초자아는 부분적으로만 의식적이며 이드로부터 자아로 향하는 특정한 공격적인 요소를 빌려와서 죄책감을 들게 한다.
프로이트의 완성된 본능이론은 상당히 형이상학적인 것이다. 그는 자신을 진료실을 뛰어넘는 인물로 만든 대담한 이론들을 구성했는데, 이 작업은 이미 1910년 레오나르도 다 빈치에 관한 연구, 빌헬름 젠센의 소설 〈그라디바 Gradiva〉에 관한 연구(1907) 등에서 시작되었다. 여기서 그는 예술작품들을 작가의 정신역동을 표현하는 상징의 표현으로 보고 예술작품들에 대한 정신분석을 시도했다. 프로이트가 문화적 현상을 분석할 수 있었던 기본 전제는 승화라는 것이었다. 그는 이상적인 아름다움의 창조나 감상의 근저에는 문화적으로 고양된 양식으로 형상을 바꾼 원시적인 성적 충동이 있다고 주장했다. 신경증 증상들만 만들어내고 환자 자신조차도 그 의미를 알 수 없는 억제와는 달리, 승화는 갈등없이 억제가 해소된 것이며 사회의 구성원들이 공유할 수 있는 문화적 작품을 창조하도록 해준다는 것이다.
그는 〈토템과 터부 Totem und Tabu〉(1913)에서는 자신의 이론 영역을 더욱 넓혀 인류학적이고 사회심리학적인 사색들을 펼쳤다. 제임스 프레이저의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에 대한 연구로부터 그는 토템 동물에 대한 두려움과 복수심이 혼합된 감정은 아동의 동성(同性)에 대한 태도라는 해석을 이끌어냈다. 그의 과감한 주장에 따르면, 여성에 대한 아버지의 지배에 반항하여 아들이 실제로 아버지를 죽이기도 했었으나, 이는 곧 자책감을 불러일으켜서 근친상간을 금기하고 아버지의 대체물인 토템 동물을 해치는 것을 금지시켰다는 것이다. 이 토템 조상은 이후 여러 거대한 종교들에서 볼 수 있는 좀더 비인격적인 신으로 발전했다.
그는 이후에 출간된 〈집단심리와 자아에 대한 분석 Massenpsychologie und Ichanalyse〉(1921)·〈환상의 미래 Die Zukunft einer Illusion〉(1927)·〈문명과 이에 대한 불만들 Das Unbehagen in der Kultur〉(1930), 그리고 그의 마지막 저작인 〈모세와 유일신앙 Der Mann Moses und die monotheistische Religion〉(1938) 등에서 정신분석학 이론에 근거해서 인류의 문명과 종교에 대해 분석해나갔다. 이러한 저술들에서 그는 인간의 종교적 신앙과 인류의 문명에 대한 회의를 나타냈다. 그에 의하면 신(神)에 대한 신앙은 인간이 보편적으로 갖고 있는 유아적인 무력함을 신화적으로 재생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즉 신은 이상적인 아버지와 같은 전지전능한 보호자에 대한 유아적인 소원을 투사한 것이다. 그는 또한 인류의 불만에 대한 어떠한 사회적 해결도 가능하지 않으며 문명은 단지 부분적으로 밖에는 해결해줄 수 없다고 주장했는데, 그 이유는 인간들 사이에 존재하는 공격성은 경제적 불평등이나 정치적 불의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 외부로 향한 인간의 죽음에 대한 본능에 기인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모세와 유일신앙〉은 히틀러가 오스트리아를 침공하던 해에 출간되었다. 그는 영국으로 망명할 수밖에 없었고, 나치가 독일을 장악했을 때 그의 저작들은 '유대인 과학'이라는 이유로 가장 먼저 태워지게 되었다. 제3제국(1933~45) 기간 동안 정신치료는 금지되지 않았지만, 정신분석학은 주로 미국과 영국으로 추방될 수밖에 없었다. 프로이트는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지 몇 주 만인 1939년 9월 23일, 문명의 외관 뒤에 숨겨져 있는 불합리성에 대한 두려움을 절감하며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그의 사상의 수용과 전파에 장애가 되지 않았다. 프로이트 학파는 규모가 커졌고, 여러 다른 방향으로 정신분석학을 발전시켰다. 실제로 그의 사상에 대한 가차 없는 비판과 도전이 있었음에도 사실상 그는 20세기의 지적 지평에서 가장 유력한 인물의 하나로 남아 있다.
℺윈클스()
℺오스카와일드(1854. 10. 16 아일랜드 더블린~ 1900. 11. 30 파리)/ 아일랜드의 재사·시인·극작가. 그의 명성은 걸작 희극 〈윈더미어 부인의 부채 Lady Windermere's Fan〉(1892)·〈진지함의 중요성 The Importance of Being Earnest〉(1895)에 의거한 것이다. 그는 19세기말 '예술을 위한 예술'을 주창한 영국 유미주의 운동의 대표자이다. 동성연애와 연루된 유명한 민사·형사 재판에서 유죄판결을 받고 2년간(1895~97) 복역한 일도 있다. 와일드는 문학에 조예가 깊고 전문직에 종사하는 부모에게서 태어났다. 아버지 윌리엄 와일드 경은 눈과 귀에 관한 일류 외과의였고, 고고학과 민속학, 풍자소설가 조너선 스위프트에 대한 책을 저술한 석학이었으며, 어머니는 혁신적인 시인이자 켈트족 신화와 민간전승에 조예가 깊은 권위자였다. 와일드는 엔니스킬렌의 포토라 왕립학교를 다닌 후(1864~71), 계속 장학금을 받아 더블린의 트리니티 칼리지와 옥스퍼드대학교 맥덜린 칼리지에서 수학했으며 우등으로 학위를 받았다.
4년의 대학시절 그는 점잖은 재사이자 고전학자일 뿐만 아니라, 장시 〈라벤나 Ravenna〉로 1878년 선망의 뉴디게이트상을 수상한 시인으로도 이름을 날렸다. 그는 인생에서 예술의 핵심적 중요성을 지적한 존 러스킨, 월터 페이터의 가르침에 깊은 영향을 받았으며, 특히 심미적 열정으로 인생을 살아야 한다고 강조한 페이터의 주장에 많은 감명을 받았다. 그 세대의 많은 젊은이들처럼 그도 "단단한 보석 같은 불꽃을 발하며 늘 타오르라"고 충고한 페이터의 말을 따르기로 결심했다. 한편으로 그는 심미적 자세를 취하기를 즐겼으며, 미술품으로 장식된 옥스퍼드대학교의 여러 방들의 분위기와 연결되어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을 한 적도 있다. "아, 나의 푸른 도자기에 부끄럽지 않게 살 수 있다면!"
1880년대초 유미주의가 런던의 문단에 크게 유행하여 일반인에게는 증오의 대상이었던 때, 와일드는 사회적·예술적 서클에서 기지와 화려함으로 점차 주목을 받게 되었다. 곧 잡지 〈펀치 Punch〉는 예술에 대한 남성답지 못한 집념을 지닌 유미주의자에 대해 반감을 갖고, 와일드를 풍자의 대상으로 삼았다. 그리하여 희극 오페라 〈인내 Patience〉에서 길버트와 설리번은 부분적으로 와일드를 모델로 하여 '육욕에 빠진 시인' 번손이라는 인물을 만들어냈다.
와일드는 유미주의파의 입장을 확고히 하기 위해 〈시집 Poems〉(1881)을 자비로 발간했는데 그것은 와일드가 앨저논 스윈번, 단테 가브리엘 로제티, 존 키츠의 충실한 제자임을 보였다. 1882년 그는 더 많은 인기와 갈채를 얻기 위해 미국과 캐나다에서 강연을 하기로 동의했다. 뉴욕에 도착했을 때 세관에서 "나는 내 천부적인 재능밖에는 신고할 것이 없소"하고 큰소리를 쳤다. 나른한 포즈와 벨벳 재킷, 짧은 바지, 검은 비단양말 등으로 인해 그에 대한 반감이 신문에 노골적으로 드러났으나, 그는 12개월 동안 미국인들에게 미와 예술을 사랑하라고 권했으며, 다시 영국으로 돌아와 미국의 인상을 강연했다.
1884년 아일랜드의 유명한 변호사의 딸 콘스턴스 로이드와 결혼했고, 1885, 1886년에는 시릴과 비비안이 태어났다. 그동안 와일드는 〈팔 말 가제트 Pall Mall Gazette〉의 평론가로 일했고 그후 〈여성세계 Woman's World〉(1887~89)의 편집장이 되었다. 작가가 되기 위한 견습기에 〈행복한 왕자 외(外) The Happy Prince and Other Tales〉(1888)를 발표했으며, 이 작품은 동화 형식의 낭만적인 알레고리를 다루는 그의 재능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생애의 마지막 10년 동안 모든 주요작품을 완성·출판했다.
유일한 장편소설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The Picture of Dorian Gray〉은 1890년 〈리핀코츠 매거진 Lippincott's Magazine〉에 연재되었고, 1891년 개정해 6장을 첨가한 후 출판했다. 그는 이 소설에서 고딕 소설의 초자연적 요소와, 프랑스 데카당파 소설이 담고 있는 형언할 수 없을 정도의 죄의 요소를 결합시켰다. 도리언이 결국 자신의 죄과로 자멸했음에도 불구하고, 비평가들은 그 부도덕성을 비난했다. 그러나 와일드는 그 작품의 명백한 도덕적 결말에 관계없이 예술의 초도덕적 성격을 강조했다. 이전에 발표한 글들을 모은 평론집 〈의향 Intentions〉(1891)에서는 프랑스 시인 테오필 고티에, 샤를 보들레르, 미국 화가 제임스 맥네일 휘슬러 등의 사상을 차용해 예술에 대한 그의 유미주의적 태도를 재천명했다. 같은 해 단편과 동화 등으로 구성된 2권의 책 〈아서 새빌 경의 범죄 외(外) Lord Arthur Savile's Crime, and Other Stories〉·〈석류의 집 A House of Pomegranates〉 등을 발표하여 그의 탁월한 창의력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그러나 와일드가 가장 큰 성공을 거둔 장르는 풍속 희극이었다. 사회적 음모와 인위적 장치로 갈등을 해결하려 한 프랑스의 '잘 짜여진 극'을 고수하면서, 그는 19세기 영국 연극에 새로운 유형의 희극을 만들기 위해 역설적이고 신랄한 기지를 사용했다. 최초의 성공작 〈윈더미어 부인의 부채〉는 이와 같은 기지가 프랑스 연극의 낡은 구조에 새로운 생기를 불어넣을 수 있음을 보여준 작품이다. 같은 해 섬뜩한 공포감을 주는 연극 〈살로메 Salomé〉는 그의 말에 의하면, 변태적인 정열의 묘사로써 관중을 전율시키기 위해 프랑스어로 썼고 프랑스의 연극양식대로 구상된 극이었으나, 그 속에 성서의 인물이 들어 있다는 이유로 리허설 중 검열관에 의해 상연금지되고 말았다. 이 희곡은 1893년 출판되었고, 오브리 비어즐리의 유명한 삽화와 함께 1894년 영어판이 발간되었다. 2번째 풍속희극 〈하찮은 여인 A Woman of No Importance〉(1893)을 보고 평론가 윌리엄 아처는 와일드의 연극이 "현대 영국 희곡의 최고의 차원에서 수용되어야 한다"고 확신했다. 1895년초 와일드의 마지막 두 작품 〈이상적인 남편 An Ideal Husband〉·〈진지함의 중요성〉이 잇달아 공연되었다. 최고의 업적인 후자에서 소극(笑劇)의 전통적 요소가 풍자적 경구로 변형되었다. 이 극은 시시해보이나 빅토리아 여왕시대의 위선을 가차없이 폭로한 작품이다.
다수의 작품들이 은밀한 죄나 무분별한 행위, 또 그 결과로 야기되는 망신 등을 주요줄거리로 삼고 있다. 인생이 예술을 모방한다면, 수필 〈거짓말의 파멸 The Decay of Lying〉(1889)에서 주장한 대로, 그는 쾌락의 무모한 추구방식에 접근한 셈이다. 더욱이 1891년에 만난 앨프레드 더글러스 경과의 친밀한 교제는 더글러스의 부친인 퀸즈베리 후작을 몹시 노하게 했다. 드디어 후작에 의해 남색자라는 죄목으로 고소당하게 되자, 그는 앨프레드 더글러스로부터 힘을 얻어 명예훼손으로 후작을 맞고소했다. 그러나 증거가 드러나자 소송을 취하했다. 프랑스로 도피하라고 친구들이 취하했지만, 그는 자신의 예술세계에 종말을 고할 때가 왔음을 믿을 수 없어 그 충고를 태연스럽게 거절했다. 결국 그는 체포되어 재판을 받게 되었다.
와일드는 법정에서 재치 있게 증언했지만 배심원은 평결을 내릴 수 없었다. 재심에서 그의 유죄가 판명되어 1895년 5월 그는 2년간의 중노동형을 선고받았다. 대부분 리딩 형무소에서 복역했으며, 옥중에서 더글러스에 대한 긴 편지를 썼다(1905년 〈옥중기 De Profundis〉로 철저히 삭제된 후 출판됨). 이 편지는 자기를 방탕의 길로 유인하고 마음을 어지럽혀 집필을 방해한 연하의 더글러스에 대한 비난으로 가득 차 있다.
1897년 5월 와일드는 파산상태로 감옥에서 석방되었다. 그는 작가로서 재기할 생각으로 즉시 프랑스로 떠났다. 옥중 시기에 관한 작품으로는 〈리딩 감옥의 노래 The Ballad of Reading Gaol〉(1898)만 남아 있는데, 이 작품은 비인간적인 감옥의 상황에 대한 그의 관심을 잘 보여주고 있다. 끊임없이 재정문제로 고통을 받았지만, 조지 버나드 쇼의 말처럼 '그의 억누를 수 없는 쾌활함' 때문에 그는 계속 견뎌낼 수 있었다.
그는 막스 비어봄이나 후일 그의 유언 집행자가 된 로버트 로스 같은 충실한 친구들의 방문을 받았고, 더글러스와도 다시 화해했다. 그러다가 귀 전염병으로 인한 격심한 뇌막염 증상으로 갑자기 죽고 말았다. 그는 의식이 몽롱한 마지막 순간에 그가 오랫동안 찬양했던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했다.
℺룩크(1632. 8. 29 잉글랜드 서머싯 링턴~ 1704. 10. 28 에식스 오츠)/ 영국의 철학자. 영국과 프랑스 계몽주의의 선구자로서 미국 헌법에 정신적 기초를 제공했다. 당시 '새로운 과학' 곧 근대과학을 포함한 인식의 문제를 다룬 〈인간 오성론 Essay Concerning Human Understanding〉의 저자로 유명하다.
로크의 집안은 청교도적 경향을 가진 국교도였다. 시골 변호사였던 아버지는 청교도혁명 당시 의회파에 가담하여 싸웠는데 이러한 경력은 로크가 웨스트민스터 학교에 입학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이곳의 교육은 철저했지만 뒷날 로크는 규율이 너무 엄격했다고 불평했다. 1652년 옥스퍼드의 크라이스트처치 칼리지에 입학했다. 청교도적 개혁에도 불구하고 학교에는 수사학·문법·도덕철학·기하학·그리스어 등 전통 스콜라식 교과과정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로크는 교과과정에 흥미를 느끼지 못했으며, 낡은 교과과정에서 벗어난 실험과학이나 약학 등에 관심이 있었다. 1656년에 학사학위, 2년 뒤에 석사학위를 받았다.
1661년 아버지의 재산 중 일부를 상속해 어느 정도 안정된 수입을 얻었다. 로크는 가르치는 것을 평생직업으로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학생을 가르친 것은 4년뿐이었다. 1665년 브란덴부르크에 파견된 외교사절단의 서기로 일했고 돌아오자마자 또다른 외교직책을 제안받았으나 거절했다. 이 시기 그의 논문·편지·비망록 등을 살펴보면 주요관심은 당시의 자연과학과 도덕적·사회적·정치적 삶의 근본원리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자신이 받은 교육의 편협성을 절감한 로크는 당대의 철학, 특히 근대철학의 아버지인 르네 데카르트의 철학을 공부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의 관심을 끈 것은 실험과학이었다. 그는 근대화학의 선구자로서 자신의 절친한 친구였던 로버트 보일과, 얼마 뒤에는 역시 친구인 저명한 의학자 토머스 시드넘과 공동작업을 했다
로크가 처음으로 정치가 애슐리 경(나중에 샤프츠버리 백작이 됨)의 주목을 받은 것은 의사로서였다. 1666년 여름 옥스퍼드를 방문했을 때 애슐리 경은 치료를 받아야 할 상태였고 친지의 소개로 로크와 만나 곧 친구가 되었다. 다음해 로크는 의학학위도 없었고 의료활동을 하려는 뜻도 없었지만 애슐리가(家)의 주치의가 되었다. 그는 단지 의료문제 뿐아니라 일반문제에 관해서도 애슐리의 개인상담자가 되었다.
애슐리리는 정력적이고 과감한 정치가였으나 정적이 많았다. 그러나 애슐리에 대한 로크의 존경심을 감안할 때 애슐리가 과연 정적들이 주장하듯 사악한 인물이었는지는 의심스럽다. 애슐리는 입헌군주제, 시민의 자유, 종교적 관용, 의회의 통치, 영국의 경제적 성장등을 단호히 옹호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목표는 로크도 이미 적극 지지했기 때문에 처음부터 두사람은 의기투합했다.
로크의 사교모임 대부분은 사실상 친구와 더불어 철학·과학의 문제들을 논의하기 위한 것이었다. 1668년에 이미 그는 새로 설립된(1663) 왕립학회 회원이 되었다. 또 로크의 집에서는 여러 친구들(애슐리 경, 의사인 존 메이플토프트, 토머스 시드넘, 신학자이기도 했던 제임스 티럴 등)이 모여 토론을 벌였다고 한다. 로크는 〈인간 오성론〉의 서문에서 어느 날에 있었던 모임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참석자들이 여러 가지 어려운 문제에 당황해 다음 모임에서는 "우리 자신의 능력을 검토하고 우리의 지성이 적절히 다룰 수 있는 대상과 그렇지 못한 대상을 가려보기 위해" 정신의 능력에 대해 논의하기로 결심했다.
로크는 직접 이 토론회를 열었고 모임이 끝난 뒤 인간의 인식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아직도 남아있는 2개의 초고(1671)로 정리했다. 여기에는 19년 뒤 〈인간 오성론〉에서 전개할 사상의 싹이 나타나 있다. 또 이즈음에 로크는 그리스도교 인문주의자들로 이루어진 케임브리지 플라톤 학파의 대표자들과 사귀었다. 이들은 경험과학에 공감하면서도 인간 삶의 이성적 요소를 설명할 수 없다는 이유로 유물론을 반대했다. 또 이들은 정치와 종교에 대해 자유주의적 태도를 취했다. 로크는 이들이 본유관념에 기반한 플라톤주의를 주장하는 점에는 동의하지 않았으나 관용, 종교적 삶의 일부로서 실천행위를 강조하는 것, 유물론을 거부하는 것 등에 대해서는 큰 매력을 느꼈다. 이 학파의 정신은 당시 로크에게 영향을 준 광교회파(廣敎會派)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광교회파는 누구나 그리스도 신앙을 고백하는 것만으로 그리스도교 교회의 일원이 될 수 있으며 그밖의 비본질적인 것을 요구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자유주의).
1672년 애슐리는 샤프츠버리 백작 1세로 귀족이 되었고 그해 말 영국 대법관으로 임명되었다. 샤프츠버리 백작은 곧 왕의 총애를 잃고 해임되었으나 재임기간 중에 무역 및 식민지 평의회를 설립하였다. 로크는 여기서 2년간 간사로 일했다. 그러나 심한 천식으로 고생하면서 런던의 공기와 과중한 업무에 시달리다가 1675년 옥스퍼드로 돌아왔다.
6개월 후 로크는 프랑스로 가서 4년 동안(1675~79) 머물렀다. 프랑스에서는 가생디 학파 특히 그 지도자 프랑수아 베르니에와 만났는데, 이 만남은 로크의 형이상학·인식론 등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철학자이자 과학자인 피에르 가생디는 데카르트 철학의 지나친 사변적 요소를 거부하고 에피쿠로스의 3가지 학설 곧 경험론·쾌락주의·원자론으로 돌아갈 것을 주장했다. 경험적 증거에서 이성적 추론을 통해 더 나아간 정보를 이끌어낼 수 있지만 외적 세계의 인식은 어디까지나 감관에 의존한다는 것이 가생디의 견해였다.
영국에 돌아왔을 때 나라사정은 뒤숭숭했다. 찰스 2세의 동생인 제임스는 로마 가톨릭교도였기 때문에 샤프츠버리가 이끄는 청교도 다수파는 그의 왕위계승을 저지하고자 했다. 이로 인해 샤프츠버리는 1년 동안 투옥되었고 로크가 귀국할 즈음에는 다시 신임을 얻어 추밀원 의장으로 일하고 있었다. 그러나 왕과 의회 사이의 이해관계를 절충하지 못하자 다시 체포되어 재판을 받았다. 샤프츠버리는 1년 후 네덜란드로 망명하여 1683년 죽었다.
로크는 1683년 9월 네덜란드로 망명했다. 네덜란드에 체류하는 동안 새 친구를 많이 사귀었고 그동안 생각해왔던 문제들을 정리할 여유를 가졌다. 1684년 찰스 2세는 크라이스트처치가 로크에게 주던 장학금을 중단했다. 다음해 로크의 이름은 영국정부가 유럽에 지명수배한 84명의 반역자 명단에 올랐다.
로크는 1685년에 왕이 된 제임스 2세가 쫓겨날 때까지 5년 이상 외국에 머물렀다. 1688년 가을 제임스 2세의 반대자들이 네덜란드 오라녜의 빌렘을 왕으로 추대했다. 다시 영국으로 돌아온 로크는 외교관 직책을 제의받았으나 거절했고 탄원위원회에만 참여했다. 그러나 런던의 공기가 또 건강을 악화시켰기 때문에 1691년부터는 친구 프랜시스 경과 매섬 부인의 집인 '오츠'에 은거하면서 이따금 런던에 들르곤 했다. 로크는 은둔하면서도 휘그당의 정신적 지도자로서 영향력을 발휘했다. 비록 토리당의 압력으로 그 폭이 제한되었지만 로크와 샤프츠버리가 추구하던 개혁은 '무혈의 명예혁명'으로 달성되었다. 입헌군주제가 수립되었고 시민의 자유, 종교적 관용, 사상과 표현의 자유 등이 대폭 확대되었으며 1695년에는 출판의 자유도 보장되었다(군주제).
말년에 로크는 주로 자신의 저작을 출판하는 데 힘썼다. 또 이자·이자율·조폐·무역 등에 관한 소책자를 쓰고 출판했다. 1695년에는 〈그리스도교의 합리성 The Reasonableness of Christianity〉을 출판하여 덜 독단적인 그리스도교를 옹호했다.
로크는 1704년 죽은 뒤 하이레이버 교구 교회에 묻혔다. 매섬 부인은 "그의 죽음은 그의 삶처럼 경건하면서도 자연스럽고 편안했으며 고요했다"고 전했다.
℺J. R 그린( 1837년 12월 12일 ~ 1883년 3월 7일)/ 영국의 역사가, 옥스퍼드에서 출생하였으며, 1856년 옥스퍼드 대학을 졸업하고 성직자가 되었다. 캔터베리 대주교 저택의 도서관 사서로 일하면서 영국의 역사 연구에 몰두하였다. 그의 《영국 국민 소사》(Short History of the English People) 는 영국 국민 발전의 역사를 생생하게 그린 것으로 오늘에 이르기까지 높은 문학적 가치를 가지고 있다. 멘톤에서 사망하였다.
19세기 영국의 역사가.《영국민의 소사》는 생생하고도 다채로운 묘사로 이름을 떨쳤고, 영국 통사의 대표작으로 손꼽힌다. 그 외 영국 초창기의 연구로서 주목되는 《영국의 성립》등이 있다.
옥스퍼드대학을 마친 뒤 한때 목사가 되었으나 신병으로 그만두고, 1869년 캔터베리대주교(大主敎) 저택의 도서실 사서로 근무하면서부터 역사 연구에 전념하였다. 저서 《영국민의 소사(小史)》(1874)는 소사라고는 하지만 1000페이지에 이르는 대작으로서, 그 생생하고도 다채로운 묘사(描寫)로 이름을 떨쳤고, 영국 통사(通史)의 대표작으로 손꼽히고 있다. 이 밖에 영국 초창기의 연구로서 주목되는 《영국의 성립》(1882) 《영국의 정복》(1883) 등의 저서를 남겼다. 그의 아내(Alice S. Green)도 저명한 역사가이다.
℺조셉니담(1900년 12월 9일~1995년 3월 24일)/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의 교수이자 박물학, 사회학, 중국학, 생화학, 과학사회학, 영국의 대표적인 동양학학자이다. 니덤이 중국 전통시대의 과학이 세계 어느 문명권의 그것보다도 훨씬 더 뛰어났다는 점을 연구하고 밝혀내면서 왜 16~17세기에 이르러 중국이 서구과학에 뒤쳐지게 되었는가는 의문을 품게 된다. 그는 “왜 중국에서는 과학혁명이 일어나지 않았는가?”라는 Why not 질문을 던지게 되고 중국 전통사회의 과학과 자연관, 사상, 제도에 대해서 분석한다. Why not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 많은 학자들이 중국전통과학 분야에 뛰어들었고 여러 가지의 대답을 촉발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Why not 질문이 갖고 있는 근본적인 한계성-서구 중심의 세계관-을 지적하는 시빈, 그레이엄 등이 등장하기도 하였다.
영국의 캠브리지대학교 연구소의 생화학자였으나 중국의 역사를 연구하여 《중국의 과학과 문명》이라는 저서를 남겼다.
1900년 12월 6일 영국 런던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는 의사였고 어머니는 음악교사였다. 1921년 케임브리지대학교(Cambridge University)에서 학사학위를 받았다. 1925년 같은 대학교에서 생화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케임브리지대학교 곤빌 앤드 키스 칼리지(Gonville and Caius College)의 홉킨스연구소(F.G. Hopkins's laboratory)에서 생화학 분야를 연구했다. 하지만 1937년부터 생화학과는 동떨어진 중국역사 연구에 헌신하였다. 영국 케임브리지에 거주하는 중국인 루퀘이전(魯桂珍)을 통하여 중국의 문명과 과학기술에 관심을 가졌고 연구 조수였던 중국인 왕링(Wang Ling 王玲)과 함께 방대한 중국의 문명을 연구하였다. 1954년 《중국의 과학과 문명 Science and Civilization in China》이라는 대저작을 집필하였다.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중국학자. 영국 카이우스 칼리지에서 화학발생학과 발생생물학으로 학위를 취득했다. 1930년대 중반 젊은 중국인 연구자들과의 만남에 영향을 받아 학문 연구의 방향을 설정한다.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후 중국으로 건너가 충칭에 중영과학협동부를 개설했다. 전쟁 이후 유럽에 돌아온 니덤은 “중국이 광범위한 과학적 발전을 이루었는데도 어째서 유럽에서 산업혁명이 일어나게 되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에 대한 답으로 대작 『중국의 과학과 문명』을 여섯 권에 걸쳐 집필했고, 니덤 사후 일곱 번째 책부터는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니덤 연구소에서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조선의 서운관>,<그림으로 보는 중국의 과학과 문명>,<중국의 과학과 문명 : 수학, 하늘과 땅의 과학, 물리학> 등 <총 47>이상 남김
℺티유몽(1637-98)
℺기번(1737. 5. 8(구력 4. 27) 영국 서리 퍼트니~ 1794. 1. 16 런던)/ 영국의 합리주의 역사가. 2세기부터 1453년 콘스탄티노플의 멸망까지의 로마 역사를 다룬 〈로마 제국 쇠망사 The History of the Decline and Fall of the Roman Empire〉(6권, 1776~88)의 저자로 잘 알려져 있다.
할아버지인 에드워드는 재산을 상당히 모았고 할아버지와 같은 이름을 가진 그의 아버지도 별 어려움 없이 사회생활과 의정(議政) 활동을 했으며 독일계 가문 제임스 포르텐의 딸 유디스를 아내로 맞았다. 에드워드 기번 역시 일생을 남에게 의존하지 않고 지낼 만한 재산이 있었다. 그는 7명의 자녀들 가운데 맏아들이자 유일하게 살아남은 자식이었다. 나머지 아이들은 어릴 때 죽었다.
어린시절은 투병생활의 연속이었으며 생명이 위태로운 적도 몇 번 있었다. 어머니의 보살핌을 받지 못하고 이모 캐서린의 양육을 받으면서 자랐는데, 기번은 그녀를 '내 마음의 어머니'라고 불렀다. 1747년 어머니가 죽은 뒤에는 거의 전적으로 이모의 보살핌을 받았다. 어려서부터 닥치는 대로 책을 읽는 독서광이었으며 학교교육을 아주 불규칙하게 받은 까닭에 독서 취미에 더욱 깊이 빠질 수 있었다. 퍼트니에 있는 주간(晝間)학교를 다닌 뒤 1746년 킹스턴 그래머 스쿨에 다녔으며 거기에서 "많이 울고 피땀도 좀 흘린 대가로 라틴어 구문에 대한 지식을 얻었다"고 〈회고록 Memoirs〉에서 말했다. 1749년 웨스트민스터학교에 입학했으나 1750년 건강을 위해 바스와 윈체스터로 갔다. 학교로 돌아가려던 일이 안되어 다음 2년 동안은 가정교사들과 함께 지냈으나 그들에게서 배운 것은 거의 없었다.
아버지를 따라 시골의 여러 집을 방문했으며 오래된 책들로 가득찬 도서관들을 마음대로 드나들었다. 기번은 12세 때 지식이 가장 많이 성장했다고 하며 이때 이미 자기에게 '꼭 맞는 음식', 즉 역사를 발견했다고 〈회고록〉에 쓰고 있다. 일찍이 14세 때 나중에 걸작을 남기게 될 주된 분야들을 섭렵하는 한편, 연대기의 어려운 문제들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그의 어린 시절 학습의 기본 방침은 스스로 해나가는 것이었다. 처음에 이모의 지도를 받은 것을 제외하면 기번은 자신의 지적인 성향대로 혼자서 고독하게 공부했으며 이런 특징은 일생을 통해 계속되었다. 기번의 위대한 작품은 다른 학자들의 자문을 전혀 받지 않고 쓴 것이어서 그의 독특한 개성을 드러내고 있다.
기번은 〈회고록〉에서, 사춘기가 시작되면서 갑자기 건강이 좋아졌고 그뒤로 일생동안 건강했다고 말한다. 그는 힘이 세거나 활동적이지는 못했고 작은 키에 마른 체격이었으며 나이가 들어서는 뚱뚱해졌다. 이렇게 건강이 좋아지자 아버지는 그가 옥스퍼드의 모들린 칼리지에 들어가도록 갑작스럽게 결정했다. 그는 15세 생일 3주 전인 1752년 4월 3일 학교에 들어갔다. 이제 그는 법적으로 독립된 성인이 되었다. 그러나 대학은 지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그를 만족시키지 못했고 심지어는 출석하는지 여부에도 관심을 두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옥스퍼드에 걸었던 면학의 기대는 모두 어긋났다. 외로운 기번은 신학에 관심을 돌렸고 독서를 통해 로마 가톨릭 신앙에 빠지게 되었다. 단지 지적인 욕구를 위한 개종이었으나 가톨릭 신자로 행동했고, 1753년 6월 8일 런던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 성체를 받았다.
가톨릭교도가 됨으로써 기존의 법률로는 모든 공직과 관직을 얻을 자격을 스스로 포기해버린 아들의 처사에 격노한 아버지는 그를 급히 로잔으로 보내 칼뱅주의 목사 다니엘 파비야르의 집에서 지내도록 했다. 환경이 완전히 변했고, 엄격한 감시 아래 자유로운 시간을 거의 갖지 못한 채 매우 불쾌한 마음으로 지냈지만, 기번은 나중에 이 시기에 대해 고마운 마음으로 이야기했다. 그는 파비야르에게서 친절하고 훌륭한 지도를 받아 규칙적으로 공부하는 습관을 키울 수 있었으며 방대한 분량의 라틴 고전 문학을 완벽하게 익히고 수학과 논리학을 공부했다. 또한 프랑스어와 프랑스 문학에 정통하게 되었는데 이는 그에게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이런 공부를 통해 기번은 상당한 학식을 갖춘 사람이 되었을 뿐 아니라 명문장가가 되었다.
그는 첫 작품 〈문학연구론 Essai sur l'étude de la littérature〉(1761)을 프랑스어로 썼다. 엄격한 감시가 계속되었으므로 생각 끝에 결국 가톨릭 신앙을 버렸고 1754년의 성탄절 프로테스탄트 성찬식 참여를 공식적으로 허락받았다. "바로 그때 나는 종교 탐구를 중단하고,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가 공통으로 채택하고 있는 교리와 의식을 따랐다"고 그는 말하고 있다.
로잔에서의 생활 후기에는 볼테르의 파티에도 참석하고 젊은 스위스인 조르주 데베르댕과 지속적인 우정을 맺는 등 로잔의 사교계를 자유롭게 드나들었으며 대단히 매력있고 지적인 목사의 딸 수잔 퀴르쇼와 사랑에 빠져 약혼도 했다. 기번이 21세 생일을 맞기 바로 전인 1758년 아버지는 그를 고향으로 불러 300파운드의 연금(年金)을 떼어주었다. 아버지와 계모가 그의 약혼을 끈질기게 반대했으므로 어쩔 수 없이 파혼하고 난 뒤 그는 끝까지 독신으로 지냈다("나는 연인으로서는 탄식했고 아들로서는 복종했다").
헤어진 뒤 얼마 동안 기번과 퀴르쇼의 관계는 서먹서먹했지만 그들은 일생 동안 친구로 지냈다. 그녀는 루이 16세 때 프랑스 재무장관을 지낸 자크 네케르와 결혼했다. 다음 5년 동안 기번은 폭넓게 독서를 했고 역사책에서 다룰 수 있는 많은 주제들을 생각했다. 1760~62년에는 햄프셔 주의 시민군으로 향토 방위 의무를 이행해야 했기 때문에 연구 활동에 상당히 지장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대위로서 양심적으로 자기 의무를 다했고 사람들과 병영 생활을 한 경험은 뒷날 역사가로서 자신에게 유익했다고 말했다.
1763년 1월 25일 기번은 영국을 떠나 파리에서 얼마 동안 지내면서 드니 디드로, 장 르 롱 달랑베르 등 몇몇 철학자들과 사귀었다. 그해 가을과 겨울에는 로잔에서 연구도 하고 즐기기도 하면서 나중에 셰필드 경(卿)이 된 존 베이커 홀로이드와 친구가 되었다. 그는 뒤에 기번의 유저(遺著) 관리자가 되었다. 1764년에 기번은 로마로 가서 고대의 제도와 풍습을 철저히 연구했다. 1764년 10월 15일, 로마 카피톨리누스 언덕의 폐허에서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 로마의 쇠퇴와 멸망에 관해 글을 써야겠다는 영감이 떠올랐다. 그러나 로마 제국의 역사를 쓰기로 결정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지나야 했다.
영국에 돌아와 지낸 그 다음 5년은 기번의 생애에서 가장 불만족스러운 기간이었다. 그는 아버지에게 의존해 있었고, 나이가 30세가 다 되었는데도 이루어놓은 것이 거의 없었다. 역사 서술에 마음이 기울어 있었지만 명확하게 주제를 결정한 것도 아니었다. 프랑스 문명이 유럽에서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사실을 깨닫고, 프랑스어로 스위스 자유의 역사를 쓰기 시작했지만 중도에서 그만두었다.
1768~69년 기번과 데베르댕은 2권으로 된 〈대영제국의 문학에 관한 연구 Mémoires littéraires de la Grande Bretagne〉를 출판했다. 1770년에 기번은 〈아이네아스 제6권에 대한 비판적 고찰 Critical Observations on the Sixth Book of the Aeneid〉을 간행해 어느 정도 주목을 끌었다.
1770년 아버지가 유언을 남기지 않은 채 죽은 뒤 2년간의 지루한 사후 처리를 마친 기번은 런던의 벤팅크 가(街)에 정착해 로마사 연구에 몰두했다. 그는 상류사회 여러 클럽에 가입했고 문인들 사이에서도 이름이 알려졌다. 1775년 '문인 클럽'의 회원으로 뽑혔는데, 이 클럽은 화가 조슈아 레이놀즈가 작가이자 사전 편찬자인 새뮤얼 존슨 박사를 중심으로 조직한 화려한 단체였다.
그는 클럽에서 활발하게 활동했고 레이놀즈와 연극배우 데이비드 개릭과 친하게 되었다. 그러나 새뮤얼 존슨은 그를 싫어한 듯하며, 존슨의 전기를 쓴 제임스 보즈웰도 드러내놓고 기번을 미워했다. 한편 기번은 의회에도 진출해(1774) 총리인 노스 경을 조용하고 꾸준하게 지지했다.
℺리비스(1895. 7. 14 잉글랜드 케임브리지셔 케임브리지~ 1978. 4. 14 케임브리지)/ 영국의 평론가, 문학비평가. 조지 세인츠버리를 비롯한 영국 평론가들의 평이한 서술적 접근 방식이 지배하던 평론 분야에 엄격한 기준을 새롭게 도입했다.
케임브리지에서 태어나 대학을 다녔고 제1차 세계대전 동안 내내 서부전선에서 앰뷸런스 대원으로 복무했다. 1925년부터 케임브리지대학의 에마뉴엘 칼리지에서 강의했으나 1930년대초 다우닝 칼리지로 옮겨 1936년 그곳에서 펠로(fellow)로 선임되었다. 그는 1962년에 은퇴한 뒤 영국의 여러 대학에서 객원 교수로 일했다. 1967년 케임브리지대학의 트리니티 칼리지에서 클라크 강연(Clark Lecture)을 했으며, 이 내용은 1969년 〈우리 시대의 영국 문학과 대학 English Literature in Our Time and the University〉이라는 책으로 출판되었다. 1978년 명예 훈장을 받았다. 1932년 아내 퀴니 도로시 로스와 함께 비평 계간지 〈스크루티니 Scrutiny〉를 창간해서 1953년까지 발행했는데, 이는 영국 문학에 대한 그의 가장 큰 공헌으로 간주된다. 항상 자신의 의견을 엄격하게 표현하는 리비스는 문학이란 인생에 대한 비판과 밀접히 연관되어야 하며, 따라서 문학평론가의 임무는 작가의 도덕성에 따라 작품을 평가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리비스의 평론은 2가지 단계를 드러낸다. 처음에는 T. S. 엘리엇의 영향을 받아 영국 시에 몰두했다. 〈영국 시를 보는 새로운 태도 New Bearings in English Poetry〉(1932)에서는 영국 후기 빅토리아 시대의 시를 공격하고 T. S. 엘리엇, 에즈라 파운드, 제라르 맨리 홉킨스 작품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재평가:영국 시의 전통과 발전 Revaluation:Tradition and Development in English Poetry〉(1936)은 영국 시의 연구를 17세기 전까지 확대한 비평서이다. 1940년대에 그의 관심은 소설로 옮겨갔다. 〈위대한 전통 The Great Tradition〉(1948)에서는 영국의 소설을 재평가하여 제인 오스틴, 조지 엘리엇, 헨리 제임스, 조지프 콘래드를 지난 시대의 위대한 소설가로 선언하고 〈소설가 D. H. 로렌스 D. H. Lawrence:Novelist〉(1955)를 통해 D. H. 로렌스를 그들의 유일한 후계자라고 주장했다. 1955년 이후에는 디킨스와 톨스토이를 비롯한 여러 소설가에게 관심을 보여 〈안나 카레니나와 그밖의 평론 Anna Karenina and Other Essays〉(1967)·〈소설가 디킨스 Dickens the Novelist〉(1970)를 아내와 함께 집필했다. 그의 지식 범위는 아마도 선집 〈공동 연구 The Common Pursuit〉(1952)에 가장 잘 나타나 있을 것이다.
℺사무엘 모리슨()
◆◈용어사전◈◈◈
⧭휘그적 해석이란/ 영국혁명에 대한 다양한 연구들을 살펴봄에 있어서 최초로 등장하는 두 학파가 '휘그(Whig)파'와 '토리(Tory)파'이다. 먼저, 휘그파는 혁명시 의회파의 전통을 계승한 지방파로서 개인의 자유를 중시하고 반권위주의적인 견해를 가진 런던의 대상인과 도시의 중하층인 그리고, 농촌의 젠트리(GENTRY) 이하Freeholder를 기반으로 그 상층부에는 귀족과 젠트리로 구성된 집단이었다. 반면, 토리당은 왕당파의 전통을 계승하여 기사의회에서 관직의 특혜와 뇌물로서 다수파를 형성한 궁정파로서 개인의 자유와 토론보다 강력한 왕권에 의해 주도되는 의회와 법률 그리고, 질서를 중시하였다.
먼저, 17세기에서 18세기 중반까지를 주도한 견해는 토리사관으로 그들은 기본적으로 이 사건을 '혁명'이 아닌 '반란'으로 규정하고 있는데 이들 사관의 핵심은 국왕 주권하의 '혼합군주정'이 영국의 기본적인 국제(國制)라는 관점에서 혁명을 설명하는 것이다. 토리파 해석의 원형을 제시한 사람은 Clarendon인데 역사가로서의 공정성에 대한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왕당파로서의 성향을 드러낸 그의 해석은 결론적으로 일련의 사건들을 '반란'으로 규정하고 있고 國制를 파괴한 책임도 의회에 있다고 서술하여 휘그사가들에 의해 당파적 해석이라는 비난을 받았으나 David Hume에 의해 학문적 시야에서 보완되었다. 또한, 그는 17세기 당시의 영국에는 잘 정의된 국제가 없었고 그 국제의 애매성이 내전의 원인이었다고 주장하면서 의회파의 행동은 합법적인 것이 아니라고 비판했다. 그의 해석은 1820년대까지도 인기를 누렸으나 1848년 휘그의 당파적 사가인 마콜리에 의해 비판 받고 그 권위를 상실했다.
18세기를 주도한 토리 사관 대신에 19세기 중반부터 1세기간 주도 사학으로서의 권위는 휘그파로 옮겨간다. 이들의 특성은 먼저, 의회정치의 우월성을 믿는 것이다. 먼저, 이들은 영국사를 전제적 군주정과 개인의 자유권을 옹호하는 의회간의 헌정적, 정치적 투쟁 과정으로 보고 있고 인간과 사회는 가치증진적인 방향으로 전진한다는 낙관적인 진보사상을 바탕으로 하고있다. 그리고 이 휘그 사관은 목적론적 사관의 하나로 그들에 의하면 의회의 발달, 민권과 자유의 실현이 역사의 목적 이었으며 과거를 그 자체를 위해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와의 관계에서 연구하는 현재주의가 그들의 또 하나의 특징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그들의 사상은 사회, 경제적 요인을 도외시 했으며 역사의 과정을 지나치게 단순화 했고 그 직선적인 발전 만을 강조함으로써 변화의 변증법을 이해 못 하고 과거와 현재와의 상이성보다 유사성을 더 중시한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17 8세기 내에서 있었던 Thomas May와 Henry Hallam에 의한 휘그 사관에 입각한 서술은 토리파의 클라랜든과 반대 입장에 서서 의회의 권리와 자유 그리고, 프로테스탄트의 대의를 옹호하고 국제를 파괴한 책임을 국왕에게 돌리는등 국왕의 愚行을 비난하고 있으나, 당시의 토리 사학의 권위를 능가하지 못 했고 19세기에 와서야 맥콜리에 의해 토리 사관의 압도와 휘그 사관의 고양이라는 과제가 완수 되었다. 그의 저서인 {영국사}는 휘그파가 집권하던 당시의 시기적 분위기에 편성하여 인기를 누렸으나, 1869년 이 후 전문적 역사가에 의한 과학적 역사가 주창됨에 따라 그의 당파적, 서술적 역사는 非역사적이라는 평가 절하를 받기에 이르렀다.
학문적 차원에서 영국 혁명을 서술하기 시작한 휘그 사가는 S.R.Gardiner였다. 그는 공정하고 객관적인 영국사 서술을 위해 엄밀한 사료 비판과 연대순 기술 방법을 택했다. 그에 저서 {영국사}에 의하면 영국 혁명은 정치 종교적 자유를 얻기 위한 투쟁 이었고 이 투쟁을 수행한 이데올로기가 청교주의(Puritanism)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이 대사건을 '청교도혁명'이라 명명하여 현재까지도 그 용어가 쓰일 정도로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러한 가드너의 영국 혁명 모델은 Charles Firth와 G.M.Trevelyan등에 의해 계승, 발전 되면서 영국 혁명 해석의 정통설로 확고히 자리잡았다. 그러나, 20세기 중반 양차의 세계대전을 겪고난 후의 세계사의 변화는 이 모델을 유지시키기에는 너무 급격했고 Lewis Namier의 이른바 네이미어 방법론 그리고, Butterfield의 [휘그사관 비판]등에 의해서 이 모델은 비판되고 타격을 받았다.
1930년 이후 영국 혁명의 연구는 마르크스주의 연구자들의 주테마가 되었고 주도권을 잃은 휘그 사관 대신 등장한 것이 사회, 경제적 역사 해석이다. 이들의 특성은 무엇보다도 역사에 있어서 경제적 요인을 중시하는 것이었는데 부르조아가 일으킨 혁명이라는 점에서 '영국 혁명'이란 용어는 19세기에 프랑스 사람인 기조에 의해서 최초로 사용되었으나 고전적 부르조아 혁명 이론을 정식화 한 사람은 F.Engles였다. 그는 영국혁명을 봉건적인 국왕과 지주 계급에 대항한 최초의 부르조아 혁명으로 규정하였지만, 새로운 혁명 사관 즉, 마르크스주의적 혁명 해석은 C.Hill에 의해서 정식화 되었다. 그는 영국 혁명을 계급 투쟁이고 부르조아 혁명이라고 규정하였으나 실증적 연구자들에 의한 비판과 공산당을 떠나 유연한 사화주의자로 변신한 그 자신에 의해 일부 수정이 가해졌다. 그러나, 그는 사회의 전환점 이론으로서의 부르조아 혁명론을 여전히 견지하고있다.
젠트리의 발흥에 의한 영국 혁명론을 실증하기 위한 사회사적 분석은 토니와 스톤을 한 편으로 하고 H.R.Trevor-Roper를 다른 한 편으로 하는 '젠트리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이 논쟁을 통하여 영국 혁명 사학은 질적, 양적으로 풍부해졌고 특히,주공동체(州共同體)와 도시에 대한 지방사적 연구와 하층민에 대한 '밑으로부터의 역사'연구의 활성화는 특기할 만하다. 그러나, 이 논쟁은 그 시작과는 달리 사회 경제적 역사 해석 특히, 마르크스주의적 계급 투쟁설을 부정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래서 이것에 대안으로 나타난 것이 먼저, P.Zagorin에 의한 '궁정파 대 지방파'의 개념에 의한 혁명 파악이다. 즉, 그는 영국 혁명을 동일한 지배 계급내의 분열에 의한 투쟁으로 보고 계급 투쟁설을 부인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맥락에서 산업화 이전 영국 사회를 단일 계급 사회로 규정하고 게급 투쟁의 불가능성을 주장한 Peter Laslett이 있다. 또 다른 하나의 대안은 스톤에 의한 사회사적 분석으로 그것은 혁명의 원인을 귀족의 군사력 약화와, 사회적 권위의 실추로 보고 장기적인 근본 원인(Preconditions) , 중기적인 촉진요인(Precipitance), 단기 우발적인 촉발 요인(Trigger)으로 내전에 이르게 되었다는 복합, 다원적인 나선형 인과 연소론(Complex multiple helix chains of causation)이다. 그러나, 이러한 자고린이나 스톤의 대안도 기본적으로 휘그적 해석의 범위를 크게 넘어서지 못 하고있다.
영국 혁명사 연구의 또 다른 하나의 해석 방법은 1970년대 중반 부터 나타난 수정주의 사가들에 의한 것이었는데 이들의 연구는 어떤 학파를 형성한 조직적인 연구가 아니므로 그 연구 성과는 다양하게 나타난다. 그러나, 정통설의 비판이라는 점에서는 몇 가지 공통점을 찾을 수 있는데 먼저, 그들은 내전의 발발이 불가피한 것이 아니며 우발적이었음을 강조하고 있다. 이는 과거의 사실을 혁명이라는 대단원에 끼워 맞추기식으로 왜곡하는 소위 정통사학의 대단원적 선입견을 비판한 것이다. 다음으로 이들은 내전의 발생과 진전이 의식적인 목적과 상관 시키기에는 너무 산발적이고 우발적이어서 내전으로 이어지는 불가피한 직행로가 없음을 지적하였다. 셋째로 서민원의 주도권 장악이라는 정치적 우월성에 대해서도 비판이 가해졌다. 즉, 17세기초의 잉글랜드 의회들은 정치의 중심이 아니었으며 서민원은 무력했다는 것이다. 넷째 그들에 의하면 17세기초 의회의 구조와 관행 그리고, 의사 처리 방법상 정부에 대한 반대파는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국왕의 자문 역할을 수행하던 의회에 근대적 의미의 야당은 존재할 여지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장기 의회 이전의 대결 정치의 존재를 부정하고 이는 내전의 원인이 아니라 그 산물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끝으로 그들은 마르크스적 해석이나 사회사적 분석을 결정론 또는, 대단원적 해석이라 부정하면서 군주정에 반대하는 것을 진보적이라 해석하는 전통 사학을 비판하고 개혁적 요소는 오히려 군주측에 있었음을 주장한다. 결과적으로 이들은 우발적 내전으로 영국 혁명을 규정했고 이들의 연구는 17세기초 의회 정치사를 세밀히 밝히는 효과를 거두었다.
이러한 수정주의자들에 대한 비판은 신휘그사가들과 후기 수정주의자들에 의해서 제기 되었다. J.H.Hexter등의 신휘그사가들은 수정주의의 세부적, 실증적 사실들의 성과를 인정 하면서도 17세기초의 역사는 의회와 국왕의 투쟁이라는 관점 이외로는 이해 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후기수정주의자들은 전통 사학과 수정주의 사학의 합일점을 모색하고 있다. 이러한 수정주의에 대한 비판은 다음의 몇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단기적, 개인적, 정치적 사건 분석과 실증은 필요하고 유익한 것이나, 자칫 사건 중심의 역사로 전락하여 체계적인 설명을 마련하지 못할 위험이 있다. 둘째, 수정주의자들에 의한 역사의 원자화는 근시안적 역사 파악이란 과오를 범할 수 있다. 셋째, 개개 사실의 분석은 전후에 일어난 인과 관계를 모른다면 무의미한 것이다. 따라서 역사에 있어서 목적론적 의식을 배제하기란 어려운 것이다. 마지막으로 서민원의 무력성에 대한 반론이 제기 된다.
⧭휘그당원/ 휘그당/
휘그(Whig)란 말은 본래 17세기 중반의 스코틀랜드의 폭도라는 뜻으로서, 1679년 왕제(王弟) 요크공(후일의 제임스 2세)을 가톨릭교도란 이유로 왕위계승권에서 제외하려고 하는 왕위배제법안이 상정되었을 때 샤프츠버리 백작(초대)을 중심으로 이에 찬성한 의원들을 경멸하여 가리킨 말이다. 이것이 토리당과 더불어 영국 정당의 시초였으나, 당시에는 근대정당 이전의 한 정치그룹에 불과하였다.
귀족을 지도자로 하면서도 상인이나 비국교도(非國敎徒)의 지지를 받아 반왕권적(反王權的) 성격이 강하였다. 명예혁명 때에는 토리당과 협력하였으나 실질적인 주도권은 그들이 쥐고 있었기 때문에 그후에는 거의 우세를 유지하였으며, 특히 1714년의 하노버왕가 성립 이후 약 50년간은 전성기를 맞이하였는데, 전반은 R.월폴경(卿), 말기에는 W.피트(大)가 지도하였다. 그러나 조지 3세 시대에 분열되어 약체화하고, 1783년 피트(小)의 조각 이후 약 50년간은 토리당에게 정권을 빼앗겼다. 19세기에 들어서자 신흥 시민층과 제휴하여 자유주의적 개혁을 목표로 선거법개정 등을 실현하였으며, 그 무렵부터 자유당으로 전신(轉身)해 갔다.
(영어: Whig Party)은 1834년에서 1860년까지 존재했던 미국의 정당이다. 앤드루 잭슨의 정책에 반대하여 조직되었다. 왕정에 반대하는 영국 휘그당과 정치적으로 유사하다. 이 정당은 노예제와 노예제도를 둘러싼 남북의 날카로운 정치적 대립의 와중에 명확한 입장을 취하지 못하다가 결국 해산되었다. 미국 역사에서 1834~54년에 활동한 주요 정당이다.
국가 발전 계획을 지지했지만, 점점 높아지는 지역 감정의 물결 속에서 침몰하고 말았다. 휘그당이 정식으로 결성된 것은 1834년이었다.
존 퀸시 애덤스의 국민공화당은 1828, 1832년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공화당 잔당(미국 민주당)의 잭슨에게 참패를 당하여 큰 타격을 입었다(이 두 파는 민주공화당의 분열로 생겼음). 그러나 잭슨이 제2미국은행과 싸우고 사우스캐롤라이나 주의 연방법거부에 정면으로 대항하자 반대파들이 결집할 기회가 생겼다. 헨리 클레이는 재정에 대해 보수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 및 남부 주의 권리를 옹호하는 사람들을 모아 여전히 보호관세나 연방정부가 지원하는 국내 개량사업의 추진 같은 국민 공화당의 정책이 타당하다고 믿는 사람들과 제휴시켰다. 이렇게 해서 탄생된 휘그당에는 1830년대 중엽에 사라진 반(反)프리메이슨당 출신의 반프리메이슨 운동가들도 합류했다. 앤드루 잭슨 대통령을 '앤드루 왕'이라고 부르면서 그의 독재적인 행정에 반대하여 느슨한 제휴관계를 맺고 있던 집단들이 휘그당의 깃발 아래 모여들었다. 휘그당이라는 이름은 왕의 특권에 반대하는 영국 정당에서 따온 것이었다.
그러나 휘그당은 오로지 잭슨과 그의 정책에 대한 공통된 혐오(그리고 나중에는 공직에 대한 갈망)만으로 뭉친 휘그당은 결정적인 선거 공약을 하나도 개발하지 못했다. 1836년에 휘그당은 각각 동부와 남부 및 서부를 대표하는 3명(대니얼 웹스터, 휴 L. 화이트, 윌리엄 헨리 해리슨)의 대통령 후보를 내세워 각 지역에 호소하는 한편, 표를 분산시켜 하원에서 결선 투표를 하려는 전략을 세웠지만 실패했다.
1840년에는 지역적인 접근 방식을 버리고 전쟁 영웅인 윌리엄 헨리 해리슨을 대통령 후보로 지명했다. 해리슨은 '통나무집' 이미지를 앞세운 유세에서 지지자들의 지속적인 선거 운동을 바탕으로 승리를 거두었다. 1840년에 휘그당은 백악관과 의회를 장악한 뒤 미국의 가장 유력한 정당이 될 준비를 갖추고 헨리 클레이의 국가주의적 계획안을 법제화할 준비를 했다. 그러나 해리슨은 취임한 지 한 달도 채 지나기 전에 죽었고, 그의 후임자인 부통령 존 타일러는 미국은행 재설립을 비롯한 휘그당의 주요입법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존 타일러는 당을 탈당하였다.
1844년에 휘그당 대통령 후보로 지명된 클레이는 국민들에게 퍼져 있던 팽창주의의 인기를 과소평가하고 텍사스 병합에 반대했기 때문에 선거에서 제임스 포크에게 패배했다. 1840년대말에 이르자 '양심적인'(노예제에 반대하는) 휘그당원과 '면화'(노예제에 찬성하는) 휘그당원이라는 파벌이 나타나면서 휘그당의 결속은 무너지기 시작했다 (면화 휘그당원). 1848년에 휘그당은 다시 전쟁영웅인 재커리 테일러를 대통령 후보로 내세워 선거에서 승리했다. 그러나 노예제에 대한 남북 갈등에서 헨리 클레이가 제안하고 밀러드 필모어(1850년에 테일러가 죽자 부통령으로 대통령직을 승계)가 서명하여 입법화된 ' 1850년의 타협'은 양심적인 휘그당원들을 당에서 완전히 소외시켰다.
휘그당은 다시 전직 장군에게 관심을 돌려 1852년에 윈필드 스콧 장군을 대통령 후보로 지명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북부와 남부가 노예문제를 둘러싸고 정면으로 대립하게 되었기 때문에 '미국 헌법과 연방에 대한 변함없는 애착'이라는 휘그당의 슬로건은 더이상 전국적인 호소력을 가질 수 없게 되었다. 남부의 많은 휘그당원들은 주권(州權)을 주장하는 민주당(주권 민주당)의 깃발 아래로 모여들었으며, 스콧이 얻은 선거인은 고작 42명뿐이었다. 1854년까지 대다수의 북부 휘그당원들은 새로 결성된 미국 공화당에 합류했다. 당이 존속하는 동안 휘그당을 계속 지지한 지역은 남부의 주 가운데 연방 탈퇴보다는 타협을 택한 경계주들뿐이었고, 휘그당을 계속 지지한 계층은 지역 갈등에서 어느 한쪽을 편들기를 거부한 보수주의자들뿐이었다.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휘그당원들은 대부분 1850년대 후반에 국수주의적인 노우 낫씽당(不知黨)에 들어갔고, 1860년에 정당들이 남북으로 분열 된 뒤에는 입헌연방당을 지원했다.
⧭체스타른 베로크 학파
⧭시니시즘/ 세상의 풍속, 습관, 도덕, 사상 등을 비웃거나 무시하는 주의
⧭미련학파
⧭케렌스키정부/ 1917년 3월 15일, 차르에 반대하는 러시아의 제국 의회인 두마 의원들이 구성했던 정부로, 러시아 공화국의 첫 번째 내각이다. 1917년 3월 15일에서 동년 7월까지 유지되었다.
1917년 3월, 2월 혁명이 일어나자, 반황제주의가 기승을 부리면서 당시 황제인 니콜라이 2세 를 의회는 명목상 퇴위시키고 시베리아 지방으로 유배 보낸 후에 제국 의회에서 러시아 국토를 통치하기 위해 수립한 정부이다.[1] 러시아 임시 정부의 주류를 이루는 인사들은 반황제적인 러시아 제국의 두마 의원을 비롯해 모두 대신, 장군 들이었다.
비록 의회에서 공식적으로 수립한 국가였고 정부였지만 당시 정부 인사들과 두마의 주류를 차지하고 있던 정당인 입헌 민주당의 의원들은 보수주의적인 이들이 많았을 뿐만 아니라 당시 흐름을 타고 있던 사회주의는 철저히 배척하고 사회주의 정당들 역시 탐탁지 않게 여겼다. 이런 식의 정부 운영은 국민의 뜻과 어긋나 군대에서는 탈영병이 속출하고 새 정부가 세워짐에도 불구하고 각 지방에서 크고 작은 봉기가 일어났다. 또 제1차 세계대전에서 아직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에 동맹국인 독일 제국의 공격을 계속 받은 상태였다.
국내 혼란이 계속되다보니 정부 운영도 힘들어졌으며 연합국에 러시아는 전쟁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정부가 다짐한 것이 결정적으로 영향을 미쳐 세금이 거두어지지 않는 최악의 상태까지 이르었다. 혼란 수습을 위해 결국 정부에서는 사회주의 정당과의 연립 내각을 구성하도록 조치했다. 그 결과 멘셰비키의 알렉산드르 케렌스키가 정부의 국방 장관에 임명, 볼셰비키와 멘셰비키의 인사들도 정부 요직에 임명될 수 있었다. 정부는 전쟁을 중단하고 강화를 맺을 때 우위적 위치를 얻기 위해서 대규모 병력을 전투 지역에 파견했으나 독일군에 의해 거의 전멸되다 시피하면서 군을 후퇴시키게 되었다. 이 대패가 크게 작용, 볼셰비키는 부르주아 장관과 협력하여 전쟁에 참여하는 것을 결사반대하게 된다.
임시 정부의 4대 수상인 케렌스키는 블라디미르 레닌이 전쟁에 반대한다고 하여 독일군의 스파이라는 누명을 뒤집어 씌워 없애기로 했다. 레닌은 망명지인 스위스에서 핀란드로 이동해서 또 다시 페트로그라드로 이동했고 이에 호응하여 대중들은 10월 혁명을 일으켰다. 1917년 11월(당시 러시아에서 쓰고있던 율리우스력은 10월이었다), 혁명이 시작되고 나서 마침내 트로츠키가 지휘하는 혁명군은 페트로그라드로 들어가 러시아 국립 은행, 페트로그라드 역, 발전소와 전화국 등 도시의 주요 기능을 담당하는 관공서들을 점령했다. 그리고 케렌스키와 정부 장관, 두마 의원들이 숨어있는 겨울 궁전으로 몰려갔다. 그리고 몇 분 뒤 장관과 의원들을 체포했으나, 케렌스키는 여자로 변장해 미국 대사관으로 도망쳐 망명했다. 혁명의 성공으로, 임시 정부는 붕괴하였다.
⧭케렌스키 [Aleksandr Fyodorovich Kerensky](1881. 5. 4(구력 4. 22) 러시아 심비르스크~ 1970. 6. 11 뉴욕 시)/ 러시아의 온건한 사회주의 혁명가.
1917년 7~10월 러시아 임시정부의 수반을 지냈다. 상트페테르부르크대학교에서 법학을 공부하던 중 나로드니키 혁명운동에 매력을 느낀 그는 1904년 졸업을 하고 나서 1905년경 사회주의 혁명당에 가입하여 정치범으로 고발당한 혁명가들을 변론하는 뛰어난 변호사가 되었다. 1912년에는 볼스크(사라토프 지방에 있음)의 노동자 단체 대표로 제4대 러시아 의회의원으로 선출되었다. 그후 몇 년이 지나자 그는 활동적이고 언변이 능란한 온건좌파 정치인으로 명성을 얻었다. 일부 급진적 사회주의자들과는 달리 그는 러시아의 제1차 세계대전 참전을 지지했다. 그러나 그는 갈수록 황제의 전쟁수행방식에 실망을 느껴 1917년 2월혁명이 발발하자 군주제의 해산을 요구했다. 그는 러시아 의회가 구성한 임시정부의 법무장관직과 페트로그라드(지금의 상트페테르부르크) 노동자·병사대표 소비에트의 부의장직을 기꺼이 수락했다. 그는 임시정부와 소비에트 양쪽에 모두 직위를 가진 유일한 사람으로서 양방 사이의 교섭책임을 맡았다. 그는 러시아 전역에 시민의 기본적 자유(언론·출판·결사·종교의 자유, 보통선거권, 여성의 동등권)를 제도화했으며, 혁명지도자들 중에서 가장 널리 알려지고 인기 있는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
5월에 발표된 러시아의 전쟁목표성명서(케렌스키가 승인함)가 국민들 사이에 불평을 야기시키고 그로 인해 몇몇 장관들이 사임할 수밖에 없게 되자, 케렌스키는 육군장관 겸 해군장관이 되어 새로운 정부에서 가장 권력이 있는 인물이 되었다. 그는 새로운 공격안을 계획하고 전방을 시찰하면서, 사기가 떨어져 있는 군인들에게 전쟁수행 노력과 혁명수호를 위해 필요한 의욕들을 불어넣기 위해 감동어린 연설을 했다. 그러나 그의 달변도 전쟁의 지겨움과 군기 결여를 보충해주지는 못했다. 케렌스키의 '6월공세'는 완전한 실패로 끝났다. 그러나 7월에 임시정부의 조직이 재편될 때, 완고한 정치적 도그마에 빠지지 않고 극적인 연설로 광범위한 민중의 지지를 받았던 케렌스키는 또다시 총리로 선출되었다. 그가 모든 정치파벌들을 통합시키려고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라브르 G. 코르닐로프 총사령관을 해고하고 9월에 자신이 직접 그 직위를 차지하자, 온건파 및 장교단과의 사이가 멀어졌다. 그는 좌익으로부터의 신임도 상실했는데, 그것은 그가 좌익의 급진적인 사회·경제 계획안을 거부하고, 또 독재권력을 행사하고자 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마침내 1917년 10월혁명으로 볼셰비키들이 권력을 장악하자 케렌스키는 전선으로 피신했다. 그러나 그의 정부를 방어할 군대를 모을 수는 없었다. 1918년 5월까지 러시아에서 숨어 지내다가 서유럽으로 망명하여 혁명에 대한 책을 쓰고, 망명자 신문과 잡지 편찬에 헌신했다. 그는 1940년 미국으로 이주해 여러 대학교에서 강의하며 자신의 혁명경험을 계속 책으로 펴냈다.
⧭비잔틴왕국
이 국가(Byzantinologie)와 그 문화를 대상으로 하는 전문연구분야는 비잔틴학(프랑스어), Byzantinistik(독일어)라고 한다. 그 탄생은 H. 울프를 비롯한 16세기의 르네상스 인문주의자들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연구대상이 동일한 그리스어 문헌이었던 관계도 있어서, 비잔틴학은 아직 고전문학과 다른 전문영역을 형성하지 못했다. 이어서 모든 것을 이성의 빛에 비추어서 보는 18세기의 계몽주의자 볼테르, 몽테스키외, 기봉에 의해서 비잔틴제국은 근대 유럽의 생활이상을 선취적으로 실현했다고 그들이 생각하는 고대 그리스ㆍ로마와는 대조적인, 야만과 종교가 승리를 거둔 타락형태라는 평가가 주어졌다. 오늘날 번거로운(의식), 교활한(외교), 아첨하는(미사여구), 지엽적인(논의), 그리고 구태의연한(태도) 등의 의미로 이용되는 〈비잔틴식〉이라는 형용사는 거기에서 발하고 있다(그것은 역사적 한 국가의 특성으로서, 사실, 부정할 수 없다). 역사적 개체를 다른 것으로 치환할 수 없는 고유한 가치로서 이해하려는 19세기의 역사주의하에서, 비잔틴학 또한 독자적인 자각과 엄밀한 방법을 갖춘 역사연구의 한 전문영역으로서 확립되었다
시대적 경계
비잔틴제국의 종말을 오스만제국의 술탄, 메흐메트 2세에 의한 콘스탄티노플 정략(1453년 5월)에 두는 것에는 견해가 일치한다(단, 비잔틴제국의 명목적 종주권하에 있었던 모레아 공국의 미스트라는 1460년에, 그리스인을 지배자로 하는 1204년 이후의 분열국가의 하나인 트라페춘트 제국의 수도는 1461년에 개성). 비잔틴제국은 1453년에 멸망했다고해도, 오스만제국 지배하 및 독립후의 그리스만이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 널리 후대에 〈비잔티움 없는 비잔티움〉이라는 문제를 남겼다. 이에 대해서 그 개시시점을 설정하는 것은 고대로마제국의 연장인 이상, 원래 문제는 끊임없으며, 대신에 서술의 편의상 어떤 발족시점을 설정해야 한다고 하더라도, 일의적으로 행할 수는 없다. 가령 그것을 콘스탄티누스 1세에 의한 〈제2의 로마〉로서의 콘스탄티노플 개도식(330년 5월)에 두는 것은, 이 수도가 이어지는 역사에서 문자대로 제국의 중심으로서 비교할 수 없는 역할을 한 점에서 결코 부당하지는 않지만, 그에는 1세기 정도를 요한 것으로, 오히려 4세기는 알렉산드리아, 아테네, 안티오키아, 예루살렘 등 오랜 전통을 가진 제국 동반부 여러 도시의 병존에 의해서 특징지어지는 시대였다. 또한 통치기구의 점에서 보면, 비잔틴제국의 기초는 콘스탄티누스 1세보다도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로 거슬러 올라가며, 테오도시우스 1세의 죽음(395) 후에 시작되는 동서분치도, 광대한 영토를 다스리기 위해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정한 사분치제에 의거한 행정조치의 적용 예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문화적으로도 문학사상, 4세기는 헬레니즘의 연장으로서 정리된 단위를 이루지 않고, 그리스도교 교부의 문학활동이라는 점에서는 이미 3세기 전부터 시작되었다.
지리적 조건과 민족ㆍ언어분포
비잔틴제국의 지배가 현실에 미친 지역은 그때의 국제 정치 관계를 반영해서 시대와 함께 변화했는데, 영토가 축소한 최후의 수세기를 제외하면 지리적 자연조건을 달리한 다양한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을 큰 특징으로 들 수 있다. 테오도시우스 1세 사후의 로마제국 분치시의 동쪽 반의 영토는 6세기 전반의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재정복 결과, 다르마티아 북부에서 이탈리아 반도, 시칠리아, 사스디니아, 코르시카, 발레아레스 제도, 아프리카 북부, 그리고 일시적으로는 이베리아반도 남동부에까지 미쳤다. 이어지는 람고발드족의 남하에도 불구하고, 이탈리아 남부는 노르만인이 진출하는 11세기 후반까지 비잔틴제국 지배하에 머물렀다. 또한 7세기 이후의 아랍ㆍ이슬람 교도의 지중해 진출로 이집트 서쪽의 아프리카 북안을 최종적으로 잃었는데, 10세기에는 크레타와 아랍의 공동통치하에 있었던 키프러스가 탈회되었고, 11세기에는 시칠리아 재정복도 부분적으로 수행되었다. 한편, 시리아에서 아나트리아 동부에 걸친 지대도 10~11세기에 다시 비잔틴 지배하에 편입되었다. 이렇게 해서 이탈리아 반도 이동의 지중해의 도서와 해안지대, 흑해연안 및 그 북쪽의 남러시아의 스텝을 바라보는 크리미아 반도, 높은 산맥이 삼림으로 덮여있는 발칸반도, 아나트리아 고원과 그에 이어지는 아르메니아 산악지대에서, 그리고 중동의 사막까지의 다른 경관을 가진 여러 지역으로 이루어진 것이 비잔틴제국의 영토였다. 이들 지역간의 커뮤니케이션도 당시에 주어진 수단으로서는 용이하지 않고, 9세기에 콘스탄티노플에서 해로로 이탈리아로 향하는 비잔틴사절은 해가 긴 하기에도 족히 2개월을 요했다.
많은 민족이 살고, 그 귀의하는 종교나 소속하는 교회, 사용하는 언어가 다른 점에서 비잔틴제국은 또한 전형적인 다민족국가의 하나이다. 그 정치, 종교, 문화에서 지도적 역할을 한 것은 말할 필요도 없이 그리스인인데, 비잔틴제국은 그 이외의 민족을 다수 안고 있었다. 유대 교도는 비그리스도 교도로서, 가끔 박해와 탄압의 대상이 되었으며 콘스탄티노플에서 원군을 얻지 못한 채, 자력으로 람고발트족과 대항하였던 서경의 이탈리아의 도시 주민 사이에는 7세기 중에 지역주의적 독립의식이 성장했다. 또한 동쪽 경계인 콥트인, 시리아인, 아르메니아인은 모두 각각 고유한 문자로 자신들의 최초의 민족문학으로서 그리스도교 문학을 전개시키기 시작하고, 칼케돈(㉮ 칼체돈)공의회(451)에서 이단시된 단성론을 신봉하고, 콘스탄티노플 정부에 대한 동조를 거부했다. 기타 동부국경지대에는 시리아의 산지를 기지로 약탈을 업으로 한 그리스도 교도 말타이인, 아나트리아 동부에 세력을 뻗쳤던 이단 그리스도 교도 바울파 등, 콘스탄티노플 정부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는 집단이 있었다. 한편, 비잔틴 제국은 고대 페르시아 제국의 재흥을 기치로 내건 유일한 문화국가인 사산조 페르시아 제국과의 대항관계를 별도로 하면, 그 모든 기간을 통해서 계속 국경에 몰려오는 민족이동과 직면해야 하였다. 발칸에서는 4세기 말에는 고트족(이어서 그들이 이동한 앞의 이탈리아는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재정복 후, 6세기 말 람고발드족이 침입), 5세기에는 훈족, 6세기 이후에는 슬라브인, 6세기 말~7세기 전반에는 아바르족, 이어서 세르비아인, 크로아티아인, 그리고 불갈족이 나타났다. 또한 7세기 중엽에는 아라비아 반도에서 지중해 연안에 도달한 아랍이 팔레스타인, 시리아를 석권해서 아르메니아, 아나트리아에 침입하는 한편, 이집트에서 아프리카 북안을 서진하는 동시에, 해군력으로서 콘스탄티노플을 지향해서 에게해를 북상했다. 9세기 중엽 이후에는 바이킹이 흑해에서 콘스탄티노플을 계속해서 공격했다. 카스피해ㆍ흑해북안의 스텝지대에서는 9세기 말에는 마자르인, 11세기에는 페체네그, 쿠만이 계속해서 나타나고, 11세기 후반에는 셀주크 터키의 아나트리아 침입이 시작되었다.
11세기 말 이후 비잔틴제국은 서유럽에서의 새로운 세력과 대응해야 하였는데 노르만인의 침입을 예고로 한 십자군기사의 원정, 경제적 활력에 넘친 베네치아, 피사, 제네바 등 이탈리아 상업도시의 레반트 무역진출이 그것이며, 그 귀결이 비잔틴 영토에서의 십자군 봉건국가(라틴제국)의 건설 및 이탈리아 도시국가의 식민지 설정이었다. 그리고 유럽의 대포주조기술자를 고용한 오스만ㆍ터키에 의해서 결국 콘스탄티노플은 함락당했다. 이상의 여러 민족의 일부는 비잔틴제국 영토에 살면서 그 통치에 복종하는 제국민이 된(이어서 그들은 가끔 국내의 인구과소지대에 식민을 위해서 이주되었다) 것 외에, 국경 밖에 사는 자도, 집단적으로 또는 개인적으로 국경을 넘어서 비잔틴제국의 군대에 용병으로서 편입되었다. 국가 고위의 문무관직이나 작위의 소유자가 된 이들 여러 민족의 출신자도 결코 적지 않으며, 그들은 비잔틴 제국의 정통신앙을 수용하고, 그리스적 교양을 급속히 몸에 익혔다. 그점에서 특히 현저한 것이 7~11세기에는 아르메니아인, 12세기 이후에는 프랑스인이라고 하는 서유럽인이었다. 이상의 여러 민족과의 관계를 제어하기 위한 비잔틴제국의 외교 기본원칙은 그리스도교의 로마제국이념에서 발하였다.
그리스도교 로마제국이념
콘스탄티누스 1세 시대에 체살레아의 주교 에우세비오에 의해서 제창된 이념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즉, 로마제국 초대 황제 아우구스티누스는 신의 섭리로 세계를 그리스도 탄생의 그때로 통일하고, 그로써 그리스도의 복음이 확산된 정치적 틀을 완성시켰다. 그 300년 후에 콘스탄티누스 1세가 나타나, 마찬가지로 신의 섭리로 스스로 그리스도교로 개종하는 동시에, 로마제국 중에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유기적으로 심었다. 이렇게 출현한 그리스도교 로마제국은 전 세계를 포괄하고, 전 인류를 그리스도의 재림까지 통합하여야 할 유일한 질서로서, 신의 인류구제계획의 최후의 필연적인 일환이다. 천상의 그리스도 제국의 불완전한 모상인 이 제국에 군림하는 것은 천상의 유일한 〈전능의 신〉에 상당하는 〈전능의 황제〉이며, 그는 세속적인 일만이 아니라 정신적인 일에 대해서도 최고의 권한을 신으로부터 위탁받은 대리인이다. 이 황제의 신민인 〈로마인〉은 천상의 질서의 모상인 로마법의 질서에 의해서 지켜지고, 그것이 보장하는 평화하에 문화적인 생활을 독점적으로 향수한다. 그리고 천사의 계층질서를 규범으로서 서열지어진 황제 관리에 의해서 통치되었는데 이 로마인에 속하지 않는 것이 〈야만스러운〉 민족이다. 그들은 로마황제의 지배하에 있지 않지만, 언젠가는 그에 복종할 잠재적인 그의 신민으로 그들에 대해서는 황제의 이중의 사명, 즉 지배권(인펠리움)에 의해서 세계를 통괄할 정치적 사명과 포교에 의해서 세계를 그리스도교화 할 종교적 사명이 같이 수행되었다. 이렇게 해서 역사적 우연에 지나지 않는 한 국가를 필연화하는 하나의 정치신학이 탄생했다.
이 〈로마인과 야만족〉이라는 구절에 의해서 표명된 것은 비잔틴 제국 국민의 정치적 독점의식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로마라는 것은 테베레 하안 도시의 명칭이 아니라, 인류사상 최후의 것으로서의 제국의 명칭이며, 그 이름을 칭할 수 있는 것은 지상에서 자신들의 국가밖에 없다. 그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칼 대제가 로마황제를 칭했을 때, 그들이 나타낸 거부반응이다. 그리고 이 〈로마인〉이 독점적으로 소유하고 있다고 그들이 생각하는 문화라는 것은 내용적으로는 바로 고전 그리스문화였다는 것을, 라틴어를 만족용어로 보는 그리스어 중심의 언어관이 뒷받침한다. 어쨌든 이런 의식의 배후에 있는 것은 지중해 주변의 전역에 걸친 민족이동의 속에서, 단 하나 비잔틴 제국에서만 그 이름에 걸맞는 국가와 문화가 존속한 것에 반해서, 그 국경지대에 정주한 여러 민족이 예외없이 비로소 그 국가와 문화의 건설에 임하여야 했다는 것이 중세초기의 현실이다.
그러나 비잔틴 제국은 그리스도교 로마제국 이념의 국제관계에 대한 적용에 있어서는 놀라울 정도로 유연하였다. 그것을 나타내는 것이 비잔틴 황제를 가부장으로 하고, 제국의 지배자들을 형제, 아들, 친구 등으로 비유하는 영(靈)을 기반으로 한 의제적(擬制的) 집의 이론이며, 비잔틴 제국은 자신이 유일한 세계제국이라는 기본 이념은 버리지 않고, 이 이론에 의해서 현실적으로 대등한 정치세력이 된 프랑크왕국이 아랍ㆍ이슬람 국가의 지배자를 비잔틴 황제와의 형제관계에 위치짓는 평화공존의 길도 심득하고 있었다. 또한 그 지배권이 타당한 범위가 전세계에 미친다는 주장에도 불구하고, 스스로의 힘의 한계를 알고 있었던 비잔틴 제국은 대외관계에서 대부분의 경우, 기술적인 외교수단으로서 문제 처리에 노력했으며, 소수의 황제를 제외하면, 아주 절박하지 않으면 군사력을 투입하지 않았다. 종교를 위한 십자군이라는 사상은 이 제국에는 관계가 없었다. 비잔틴 제국이 주력한 것은 그리스도 교화의 사명이며, 주변 여러 민족에 대한 그리스도교 포교는 비잔틴 황제를 세례명을 부여한 부모로서, 먼저 그 지배자와 그 궁정을 수용하는 형태로 발단하며, 민족단위의 개종의 길이 열리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남 슬라브족이나 키예프 러시아의 그리스도 교화가 일어나 동방정교권이 성립했다. 이민족 궁정의 그리스도교 개종과 조합된 비잔틴 황녀의 〈결혼〉도 적어도 일시적인 국제적 긴장완화에 도움이 되었다. 이어서 콘스탄티노플을 방문하는 주변 〈만족〉의 사절을 위한 영빈관 마그나우라 궁전의 알현에서는 그들이 세 번 절하는 사이에 황제는 천장까지 매달려 올라가서 〈기계적 장치의 신〉이 실연되었다. 그들의 열석하에 펼쳐진 궁전의식에 대한 참마를 통해서, 콘스탄티노플 시민은 자신들이 선택한 시온의 마을 백성이라는 것을 확인했다.
제국의 정치와 사회
황제제
정치신학에 의해서 이 세상에서의 신의 대리인으로까지 높아진 비잔틴 황제의 지위는 대내적으로는 매우 불안정하였다. 황제 지배의 정체, 그 자체를 변혁하려는 기도는 일어나지 않았지만, 제위에 오른 각 황제 개인이 끊임없는 비판에 처해진 것만이 아니다. 이 제국의 1000여 년의 역사에서 주제(主帝)로서 문자대로 통치를 한 88명 중, 43명 이상이 혁명으로 실각하고, 이중 30명이 비업의 최후를 맞이했다. 또한 이 숫자는 혁명이 성공한 예외적 경우에 지나지 않으며, 불발로 끝난 대부분의 예는 이루 다 헤아릴 수 없다. 제위에 일족 출신자를 계속 내보낸 지배자 가족, 소위 왕조를 헤아리면 30개에 이르며 또한 4~5개라는 소수에 의해서 보전된 비잔틴 제국 최후의 300년에서조차, 혈통 카리스마의 관념이 지배의 정통화의 원리로서 자신을 관철시킨 것은 아니었다. 이는 국민이 황제를 선거할 관리를 가진다는 콘센서스가 비잔틴 제국의 쓰여지지 않은 헌법으로서 사람들의 의식 속에 정착했기 때문이다. 단지 선거라고 해도 그것은 투표가 아니라, 후보자로서 새로이 이름을 올린 자를 국민이 환호해서 받아들이는 형태로, 환언하면 자신들의 동의를 의식으로서 연출하고, 그것을 법적으로 구속력 있는 것으로 표명함으로써 행하여졌다. 또한 현 황제가 자신의 아들을 후계자 후보로서 국민 앞에 제시하고, 동일한 절차로 그들로부터 승인을 받는 형태로 행하여졌다. 즉 비잔틴 제국에서는 혁명이든, 아버지에서 자식으로의 제위계승이든, 황제가 되는 자는 이렇게 합법성을 얻은 것이며, 그 어느 쪽이 될지는 그때의 정부에 대한 세론의 동향이나, 그때의 힘 관계와 관련되었으며 절차의 생략은 반드시라고 할 정도로 비판을 불러 일으켰다. 이는 바로 비잔틴 제국에서 황제라는 것은 공동체의 주인이 아니라, 공동체의 멤버로 그 관리를 위임받는, 위임받은 존재이며, 사실 몇 명의 비잔틴인 자신의 입을 통해서 그것이 이야기되고 있다. 그것은 로마 국가의 전통이, 아우구스티누스가 설치한 황제권(원수정)에 의해서도, 또한 그 강화(독재정)에도 불구하고 포섭되지 않고 계속 존속했기 때문이다. 황제선거권자로서 국민을 대표하는 세력은 시대와 함께 변천했다. 황제가 군단을 이끌고 국경지대를 전전하였던 3~4세기에는 황제 후보를 군대 숙영지에서 황호에 의해서 신임하는 것은 군대였다. 그렇지만 4세기 말 이후 황제는 신수도 콘스탄티노플을 상주의 땅으로 하게 되었다. 수도에서 제국통치를 위한 중앙정부의 관료기구가 형성됨에 따라서, 황제는 고관이나 원로원 의원에 의해서 둘러싸이는 한편, 그 무렵 속주 각지에서 급속히 진행된 대도시 주민의 가운데에 놓여지게 되었다. 이 변화에 맞추어서 황제선거권자로서 새로이 등장한 것이 원로원 및 시민이라는 2요소이며, 군대와 함께 이 3자에 의한 선거가 합헌적인 황제를 창출하게 되었다.
총주교에 의한 새로운 황제 재관은 이런 헌법행위의 의미를 가지지 않았다. 제국 행정의 최고간부로 이루어진 원로원은 고대 로마와 같이 오래된 가문의 의원으로 이루어지지는 않았지만, 그 후계자로서 임명하고, 과거에 공화정적 여러 특권의 이양을 통해서 황제권을 설정한 것은 자신들의 선조라는 것은 결코 잊지 않았다. 이에 반해서, 잡다하게 구성된 시민은 의존해야 할 이런 전통을 가지지 않았다. 그러나 사회적 유동성이 풍부하고, 이외에 정치에 관심을 가지는 레반트적 대도시 주민으로서, 그들은 오로지 수적으로만 의지하며, 수적으로 황제선거에 대한 참가를 획득하는 동시에, 전제국민을 대표하는 수도시민이라는 자의식을 급속히 몸에 익히고, 이 최고의 국가의식에 대한 참가를 통해서 그 만큼 황제선거권자로서의 자신의 지위를 몸으로서 재확인했다. 이에 반해서 군대는 더욱더 배후로 물러나고, 의장병으로서 그에 가담하는 심벌적인 한 요소에 지나지 않았다. 11세시 이후, 수도 성직자층의 황제선거의 개입이라는 새로운 경향이 일어났는데 그 담당자의 하나는, 총주교가 주최하는 <잠재자 종교회의>에 참가하는 수도에 체재하는 주교들이며, 아나트리아 대부분이 아람, 터키에 인해서 잃은 결과, 관할구를 잃고 수도에 머무르는 그들의 수는 늘어났으며, 회의는 항상적(恒常的)이 되었다. 또 하나의 담당자는 이 회의의 본래의 의사진행자인 하기아 소피아 교회의 부제나 관리직 스탭이며, 그들은 에쿠소카타키로이라고 해서 법학적 지식을 공부하고 수도의 명가와 동족관계에 있었는데 황제와 교회 관계에 대해서는 <황제교황주의>의 항목을 참조하기 바란다.
행정운영
〈유럽 중세에서의 비잔틴 제국의 독자성은 13세기 이전에는 이 제국이 단 하나, 중앙집권적인 국가의 타입을 제시한 점에서 유래한다. 여기에서는 중앙에서 발한 충격은 최원격의 속주에 이르고, 국가는 언어가 다르며 때때로 이해가 엇갈린 여러 민족에 단 하나의 의지를 강요하는 것이 가능했다〉라고 한다. 그러나 비잔틴 제국의 행정조직은 관료의 권한이 지휘명령 계통이나 직무분장관계상 일부의 여지도 없이 정연히 통합된 상태는 아니며, 반대로 다음과 같은 제 특색이 보였다. 가령 각각 별개로 설정된 관직체계와 작위체계와의 사이에는 통상 대응관계가 보이는데, 그때 황제와의 긴밀한 관계를 나타내는 작위가 관직을 능가하는 사회적 평가를 부여받았다. 특정 관직을 가지지 않은 작위유지자도 존재했다. 그 위에 본래 두 체계의 어디에도 속하지 않고 자신은 소관청을 가지지 않는, 비잔틴인 역사가에 의해서 오스만ㆍ터키의 대 와지르와 비교된 황제보좌가 있어서, 여러 관청의 직무수행을 조정하고 통괄, 감독했다. 기타 궁정내의 직무를 담당한 환간은 황제에 가장 가까운 장소에 있는 관계상 가끔 특명을 자주 받았다. 이런 다양한 수단으로 황제는 고유한 자의식을 가진 관료세력을 통어하면서 정책실현을 도모하였다.
관료는 문관, 무관으로 이루어졌는데, 문관은 콘스탄티노플을 아성으로서 전국의 행정, 재정, 사법을 장악하는 동시에, 황제로부터 특정한 군사적 직무가 부탁되는 경우가 흔하며, 또한 직분 이외의 다른 특정한 문관직무의 수행에 기용되는 경우도 많았다. 무관이 특정 문관의 직무가 위탁되는 예도 존재하는데, 그들은 대개 본래의 직무에 전념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기타 겸직은 가끔 행하여졌다. 또한 매관, 매위는 널리 보급된 관행으로 국가재정관리에 의한 징세와 함께 조세징집의 청부제가 대폭으로 채용되었다. 군대사령관이나 재정관리에 맡겨진 보제(輔祭)나 수도사의 개별 예에도 불구하고, 사회통념상, 성직자 신분은 국가관직취임의 부적격자로 보았다. 비잔틴 관료의 전형은 그리스적 교양을 몸에 익힌 〈만다린〉이었다. 4세기 관료제의 급속한 전개와 함께, 제국 행정의 사관에 의해서 입신하려는 젊은이를 위해서 로마제국 동반부에도 로마법학 교육이 보급되었는데, 시대와 함께 그리스적 일반 교양에 의거한 교육이념이 승리를 거두고, 이 이념을 체현한 비잔틴 문인에 의해서 관료층이 구성되었다. 콘스탄티노플의 제국대학 법학부가 목표로 한 것도 국가행정의 전문직으로서의 고급관료의 양성은 아니다.
고대 로마제국에서 계승된 국가행정기구(그 기원은 공화정의 공동체적 관직보다는 원수정 하에서 황제가 만든 가산적(家産的)인 관직에서 발한다)는 시대의 변화에 유연하게 순응했다. 그 대표적 사례가 테마제이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속주에 주둔한 여러 군단이 계속해서 혁명을 일으키고, 각각의 사령관을 황제로 추대한 3세기의 교훈을 본받아서, 군민양정을 분리하는 동시에 종래의 속주단위를 세분화하였다. 그러나 계속해서 이민족 침입의 압력이 증대하는 중에 예외조치를 다시 취해야 하는 사태가 도래했다. 6세기 말 라벤나와 카르타고에 설치되고, 콘스탄티노플의 황제에게서 〈부왕(副王)〉에 가까운 대폭적인 독립적 권한을 부여받아서 군민 양정을 담당하는 총독제가 그것이며, 특히 7세기에 아나트리아에서 개시하는 테마제가 그것이다. 군민 양정의 권한은 다시 주둔군의 사령관의 손에 들아가는 동시에, 그 관할영역으로서 보다 넓은 지역이 정해졌다. 이렇게 해서 침입 아랍군에 대한 재지의 군사저항조직이 생기는데, 그 결과, 독단 전행권을 중앙정부에서 인정받는 이 군인 속주지사는 황제에 대해서 반란을 일으켰다. 그래서 속주의 규모는 축소되고, 한 명의 군인의 손에 집중된 군민양정의 권한은 다시 분리되어서, 그 일부는 문관에 돌아가는 동시에, 지방에 분산되었던 군대지휘권은 새로이 중앙에 집중되어야 하였는데 사실, 동방 및 서방군 총사령관 같은 대지휘권이 나타났고, 이어서 이 두 가지를 합친 통일적 지휘권의 보유자가 제위에 오르게 되었다.
사회경제사정
모든 행정ㆍ문화기능을 자신에게 집중시킨 콘스탄티노플은 또한 상공업활동의 최대의 중심지이며, 그에 대한 과세는 중요한 국고수입을 낳는 한편, 전국 농촌인구로부터 국가재정기구를 통해서 징수되는 지조(地租)가 여기에 유입되었다. 이들 조건하에서 수도는 전 제국을 휩쓸리게 한 사회적 유동성의 주무대가 되었으며, 하층에 속하는 자들의 상승과 상층에 속하는 자들의 전락이라는 사회적 대류현상이 대규모로 반복되었는데 그 기동력이 된 것은 황제이다. 황제는 가끔 최하층의 속주민 가족의 출신으로, 무일푼으로 행운을 구해서 수도로 상경하여 고관, 고작위의 권문세가를 돌아다니며 봉사를 하면서 사회적으로 상승해서, 자신도 그 대열에 끼고 혁명으로 제위에 올랐다. 그는 자신의 종자단(從者團)을 이용해서 그것을 행하였으며, 성공의 새벽에는 멤버에 논공행상으로서 이권이 얽힌 관직과 작위를 배분하고, 통치기구의 중추부를 자파로 굳혔다. 이는 바꾸어 말하면 동일한 순서로 황제권을 획득한 선행 황제하에서 요직을 차지하였던 종자단 멤버의 상층으로부터의 전락과 재산의 몰수가 동시에 진행된 것을 의미한다. 동일 지배자 가족 내에서의 정권교대시에도, 선행 황제의 정부 수뇌부가 새로운 황제에 의해서 계승된다고는 할 수 없으며, 사정에 따라서 나름대로의 교대가 일어났다. 상층에서 쫓겨난 선행황제의 종자단은 중층의 상공업자의 단계에 머무르게 되거나, 최하층의 무산 도시노동자가 되거나, 속주민 중에 모습을 감추었는데, 그 결과, 수도의 중층에는 정치적 요소가 유입되었고, 그들이 현 정부에 대한 명확한 비판의식의 지주로서 혁명 기도에 참가하는 요인도 되었다.
사회상층의 이런 불안정성에서, 비잔틴 제국에서는 세습귀족신분의 형성은 현실적으로 매우 곤란하였다. 반대로 사회의 최하층에서 입신양명해서 관직에 오른 예가 드물지 않으며, 상층에 오른 자는 사회통념상 멸시의 대상은 되지 않았다. 비잔틴 제국에서 상층이라는 것은 국가라는 거대한 〈재분배〉 기구의 요직에, 또는 관직 또는 작위를 매개로 상층에 올라, 권위를 내세워 특정상품의 독점판매제를 실시해서 거기에서 이익을 얻는 기회를 손에 쥔 아르콘테스(archontes)라는 사회층이다. 거기에는 속하지 않는 자들도 그들과 관계를 맺음으로써 자신도 나름대로 이런 기회에 관여하려고 광분했다. 이는 상기의 재분배에 대한 관여가 비잔틴 제국에서는 얼마나 〈맛있는〉 것이었는지를 증명하며, 매관, 매위의 보급도 이와 관계있다. 사회적 상층소속자의 토지소유는 기본적으로는 이렇게 해서 그들이 손에 쥔 이익의 투자 결과인데 중앙정부는 재직 중의(특히 수도의) 고관의 속주에서의 토지취득에 여러 가지 규칙을 세워서, 중앙집권적 국가행ㆍ재정기구의 운영에 지장을 초래하지 않도록 배려했다.
12세기 이후, 수도의 사회적 유동성은 상실되는 한편, 전역을 덮었던 중앙집권적 행ㆍ재정기구에는 균열이 발생했다. 그 대신에 비잔틴 제국 최후의 300년간은 서유럽의 봉건제의 특색과 유사한 다음과 같은 정치적ㆍ사회적ㆍ경제적 현상이 일어났으며, 그것을 둘러싸고 학계에서는 비잔틴 봉건제 논쟁이 일어났다. 그 현상이라는 것은, ①특정 구역의 징세권이 이양된 프로노이아 보유자, 대행정지역을 그곳의 국가고권과 일괄해서 하사된 지방행정장관, 그 소령에 대해서 불수불입(不輸不入)의 특권이 부여된 수도원, ②황제에게 특별한 사적 서약을 하고, 봉사의 대상으로서 황제로부터의 일정한 반대급부에 관계한 가인단(家人團), ③대소령의 예속농민의 등장이다. 이들의 유사점은 역사에서의 합류현상이기는 하지만, 비잔틴 제국과 서유럽이 〈발전단계설〉상의 동일 발전단계에 속한 것을 나타낸다고 해석하는 양자의 역사상의 출발점, 그리고 또한 귀착점의 기본적 차이에 의해서 아마 성립되지 않을 것이다. 또한 새로 온 슬라브인에 의한 비잔틴 제국의 재생이라는 서유럽 게르마니스트 학설 및 엥겔스의 설에 대해서도 동일한 것을 말할 수 있다.
성직자 신분
비잔틴 제국에서는 사회적, 경제적으로 동질이 아닌 구성원을 통합할 수 있는 고유한〈성직자〉적 단체의식도, 서유럽 중세성직자 신분에게 정신적 통일의 기초가 된 신학적 교양과정도 결여되었다. 반대로 이 제국의 세속 분야에서의 상중하의 사회층 구분이 성직자 신분에도 해당해서, 그 최상층인 콘스탄티노플 총주교는 황제에게 봉사하는 세속고관의 불안정성을 나누어 가지며, 황제는 그 인선에 결정적 역할을 하는 동시에, 마음대로 그들을 파면했다(유스티니아누스 1세부터 일렉시오스 1세 코무네노스에 이르는 550년 정도 사이에 총주교좌에 오른 52명 중, 19~20 명 이상이 황제에 의해서 일시적이나 최종적으로 강제 퇴위되었다). 많은 부주교는 서간에서 이야기하듯이, 황제의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교구에 머무는 것을 기본적인 유형으로 받아들여서, 세속의 상층의 중앙지향과 궤를 같이 하였다.
비잔틴 제국에서 초등교육은 성직자, 속인을 불문하고 동일한 그리스적 일반교양과정이었으며 신학고등교육기관은 존재하지 않았다. 한편, 신학은 성직자에게 고유한 신분특권이 아니며, 그에 관련된 속인이 높은 비율을 차지하였다. 문필활동에 관계한 성직자 층이 신봉한 것은 그리스적 교양이상으로, 이 점에서 그들(특히 수도의 교회관계기관에서 서기직을 역임한 다수의 성직자)은 이 이상을 담당하는 수도의 문인층에 속했다. 그와 대조를 이루는 것이 파파스라는 마을의 가정을 가진 사제이다. 그들은 고해를 〈영을 짊어진 사람〉이라고 하는 수도사에게 빼앗기고, 미사와 세례와 매장의 집행자에 지나지 않게 되며, 그 적은 수입을 보충하기 위해서 때때로 장사, 밭농사나 수작업으로 호구지책을 하였다. 비잔틴 제국에서는 서유럽처럼 구체적인 생활목표와 보편구속적인 생활방법을 든, 세부에 걸친 규칙에 의해서 관철된 통일적 수도원 단체는 존재하지 않았다. 각 수도원마다 개인주의가 일반적이며, 공동생활이 아니라 몇 개의 소그룹으로 갈라져서 각각이 자활하는 형태나, 수도사가 한 수도원에 정착하지 않고 이동을 계속하는 관행까지 나타나는 한편, 성서를 읽는 것조차 경고를 하는 황야의 고행의 달이나, 주두행자(柱頭行者) 같은 전통이 생겨났다. 한편 서유럽과 달리, 비잔틴 수도사에게 신에 대한 귀의와 문예의 장려는 조화가 아니라 양자택일이 대상이며, 그들은 피안을 지향하는 명상생활을 이상으로, 완전한 그리스도 신자라는 극한가치를 사회에서 대표하는 존재가 되었다. 비잔틴 제국에서 교양이상이라는 것은 비수도사적이며, 이는 수도의 문인층에 의해서 담당되었다. 기타 수도사는 폐위, 파면된 황제, 고관에 강제적으로 할당된 신분, 또는 주교직 취임을 위한 과도적 수련자 신분도 의미하였다.
역사적 경과
330년 제2의 로마로서 출발한 콘스탄티노플은 순조로운 발전을 계속하고, 문자대로 제국의 중심이 되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 콘스탄티누스 1세 양제의 행정기관 개혁은 전 역사를 통해서 국가생활의 기초가 되었다. 콘스탄티누스 1세가 발행한 금화는 노미스마(nomisma)라는 이름으로 중세의 대표적 국제통화의 지위를 차지했으며 테오도시우스 1세 때 국가교회제가 정착되었다. 테오도시우스 1세 사후의 동서 분치에서의 동반부가 비잔틴 제국의 영토적 기반이 되었다. 4~5세기의 민족이동은 서쪽으로 전환했는데, 가이나스, 아스파르 등의 만족 출신의 군대지휘자가 중앙정부를 좌지우지하고, 전자와 그 일당이 수도 시민의 반 게르만 감정의 폭발로 400년에 쫓겨난 후, 후임자인 후자를 이사우리아인이 일소하였으며(471), 자기세상처럼 이 최후의 군인세력을 아나스타시오스 1세(재위 491~518)가 평정하여서 문민정치체제가 확립되었다. 니케아(㉮ 니체아)(325), 콘스탄티노플(381)의 두 공의회에서는 아리우스파 문제, 에베소(㉮ 에페소) 공의회 (431)에서는 네스토리우스파 문제, 칼케돈(㉮ 칼체돈) 공의회(451)에서는 단성론파 문제가 모두 〈정치적 정통〉원칙(황제교황주의)으로 처리되고 동일한 정치적 결과를 수반했다. 특히 단성론 문제에서는 비타협적인 칼케돈파의 로마와, 단성론을 받드는 이집트, 시리아, 아르메니아 등의 동방 제속주 사이에 긴 제논제(재위 474~475, 476~491)는 통일령(482)을 발포했는데 대립을 수습하지 못하고 로마와의 교회관계 단절은 519년까지 계속되었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재위 527~565)는 게르만 민족에게 빼앗긴 구로마제국 서반부를 재정복하였는데(533~555), 한편 540년 이후 사산 왕조 페르시아와 교전상태에 들어갔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국내에서는 수도시민의 반란(경마장에서의 소란에서 발단한 니카의 난)이나 단성론파의 동방 속주주민의 반항에 직면했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사후, 경마장에서의 소란은 더욱더 격화되었으며, 동방속주와의 종교상의 불일치는 이들 속주가 아랍ㆍ이슬람 교도의 손에 떨어질 때까지 계속되었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 하에서 시작된 슬라브인의 발칸 남하는 그 후계자 시대에 더욱 격렬해져서 아바르는 도나우 북안에 이르는 대국가를 세우고, 페르시아와의 전투도 재개되었다. 또한 이탈리아에서는 람고발드족이 침입을 개시하고, 이에 대항하기 위해서 라벤나에는 대폭적인 군민 두 정권을 병행한 총독부가 설치되었으며, 벨베르의 압력이 가해지는 북아프리카에서도 총독부가 카르타고에 놓여지게 되었는데 6세기 말~7세기 초에 사태는 극도로 악화되었다.
등극해서 이런 위기에 직면한 헤라크레이오스 황제(재위 610~641)는 페르시아 대원정을 시도하여(622~628), 점령된 동부 여러 속주를 탈회했다. 헤라크레이오스 황제의 부재 중에 페르시아와 결합한 아바르의 콘스탄티노플 포위(626)는 실패하고, 아바르 대국가는 괴멸되었다. 그러나 아라비아 반도에서 일어난 이슬람 교도의 아랍군은 헤라크레이오스 황제를 야르무크의 전쟁(636)에서 무찌르고, 결국 이슬람 교도의 지중해지역 진출이 시작되었으며 마르말라해의 키지코스를 발판으로 거기에서 매년 반복되는 그들의 콘스탄티노플 포위공격(674~678)은 〈그리스의 불〉로 겨우 격퇴되었다. 또한 그들의 침입이 계속되는 아나트리아에서는 현재 방위를 조직화하기 위해서 테마제가 실시되었으며 발칸에서는 불가르족이 황제 자신이 지휘하는 원정군을 격파하여(680) 도나우강을 건너서 수적으로 우세한 슬라브인의 지배하에 새로운 국가를 세웠다.
7세기 말~8세기 초의 20년의 정치적 혼란에 종지부를 찍은 레오 3세(재위 717~741)는 콘스탄티노플을 포위하는 아랍ㆍ이슬람군을 격퇴하고(717~718), 그후도 아나트리아에 계속해서 침입하는 그들을 아크로이논에서 격파해서(740), 대아랍관계에 전환점을 긋고, 아들인 콘스탄티노스 5세(재위 741~775)는 시리아 (746), 아르메니아, 메소포타미아(752)에 원정해서 전투를 국경전으로 국지화하는 단서를 열었으며, 불가리아에 대해서도 원정했다. 그러나 두 황제가 개시한 종교정책 이코노클라즘(제1기 726~787, 제2기 813~843)은 대내적으로 혼란을 초래하는 한편, 로마 교황청과의 단절을 낳아 보복조치로서 비잔틴측은 시칠리아, 카라브리아, 이릴리아의 교회관할권을 로마에서 콘스탄티노플로 소속을 바꾸었다. 또한 라벤나가 람고 발드족의 손에 떨어진(751) 결과, 콘스탄티노스 5세는 서방의 실력자, 프랑크 국왕 피핀 3세와 결합해서 이탈리아의 사태를 수습하고자 하고, 이콘숭배를 부활한 이레네 황제(재위 797~802)는 로마황제에 재관된 피핀의 아들 칼 대제와 새로운 관계에 섰다(중세 그리스도교 세계의 2황제 문제).
이콘숭배의 최종적 부활(843)은 정치적ㆍ문화적으로도 암흑시대를 극복한 비잔틴 제국의 출발점을 의미했다. 이미 콘스탄티노플의 문화적 명성은 바그다드의 아바스 왕조 칼리프 궁전에 이르고 수도의 제국대학은 〈재흥〉되었다. 슬라브인에 대한 사도, 키릴로스와 메토디오스는 그리스도교 포교를 위해서 모라비아로 여행을 떠나고(863), 키예프ㆍ러시아의 콘스탄티노플 습격(860)은 비잔틴정부에 그들의 그리스도교 개종을 연상케하였다. 콘스탄티노플 교회의 이런 위세를 배경으로 일어난 것이 총주교 포티오스의 니콜라우스 1세 및 그 후계인 로마교황들과의 대립이다(860~879).
바실레이오스 1세(재위 867~886)에서 2세에 이르는 그 후계자들 밑에서 비잔틴 제국의 군사력은 가장 신장하였는데 지중해에서 맹위를 떨친 이슬람 교도에 대해서는 9세기 전반 테오피로스 황제와 카롤링거 왕조의 루트비히 1세 사이의, 대 이슬람 공동전선 체결의 시도는 실현되지 않았지만, 이 세기 후반, 이슬람교도가 점령한 남 이탈리아의 재정복이 시작되어, 1세기 중반에도 그들의 점령하에 있었던 크레타도 탈회되었으며(961), 아드리아해의 슬라브인 해적도 토벌되었다. 이슬람 교도와의 국경은 티그리스, 유프라테스 두 강까지 밀리고, 시리아 북부도 다시 비잔틴 제국의 지배하에 들어갔으며 발칸에서는 30년 정도의 전투 후, 제1차 불가리아제국이 소멸되었다(1018). 이런 국제적 긴장완화 중에서 11세기에는 〈문관파〉 황제가 계속해서 즉위했다. 그러나 총주교 미하엘 케르랄리오스의 로마교황청과의 단절(1054)은 남이탈리아에서 대두한 노르만인을 억누르는 표의 방기를 의미했다. 남이탈리아에서의 최후의 거점 발리는 그들의 손에 들어가고(1071), 같은 해, 비잔틴군은 동쪽 국경의 마라즈길드의 전투에서 아나트리아에 침입하는 셀주크ㆍ터키로부터 괴멸적 타격을 받았다. 한편 3명의 황제 후보자가 콘스탄티노플의 제위를 둘러싸고 싸우는 사이에, 터키세는 보스폴라스까지 진출했다.
황제권의 쟁탈에 결착을 맺고 즉위한 알렉시오스 1세(재위 1081~1118)는 아드리아해를 건너서 침입하는 노르만인을 베네치아 함대의 원조를 받아서 격파하는 동시에, 마침 그때 시작된 제1회 십자군의 콘스탄티노플 통과를 이용해서 그들과 주종계약을 맺고, 그들의 힘으로 터키인에게서 아나트리아의 실지를 회복하는데 상당히 성공했는데 알렉시오스 1세와 그 후계자 밑에서 콘스탄티노플은 국제정치의 한 중심점이며, 그 화려함은 방문하는 자의 눈을 휘둥그레지게 만들고, 궁정에서는 서방의 기사적 풍습이 유행하였다. 그러나 12세기 후반, 코냐야의 서 밀리오케파론에서의 셀주크ㆍ터키인에 대해 대실패(1176), 노르만인의 데살로니가 점령(1185)에 더해서 불가리아 국가는 재건되고, 세르비아인도 독립국가를 세웠다. 베네치아 상인은 알렉시오스 1세로부터 위의 원조의 대상으로서 성립시킨 비잔틴 전역에서의 면세로 자유롭게 거래를 하는 특권을 수단으로 특별한 지위를 쌓았는데, 이는 비잔틴상인에게 참기 어려웠다. 한편 1171년 비잔틴제국에 체재하는 모든 베네치아인이 구금되고, 그 전 재산이 차압되었는데 베네치아측의 보복조치가 함대에 의한 해안지방습격과 키오스, 레스보스의 두 섬 토벌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제4회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고 라틴제국이 출현했는데(1204) 멀리 달아난 비잔틴 귀족은 각각 트레비존드 제국, 니케아 제국, 에피루스 제국을 세웠다.
니케아의 테오도로스 1세(재위 1204~22)와 그 후계자들이 점차로 지배를 굳힌 후에, 미카엘 8세(재위 1259~82)가 베네치아의 대항세력 제네바의 원조를 받아서 콘스탄티노플을 라틴황제로부터 탈회하였다(1261). 그렇지만 재건 비잔틴 제국에 도전을 한 발칸의 남슬라브인국가, 콘스탄티노플에서 권익을 독점하는 베네치아인, 제네바인에 더해서, 국내적으로는 파라마스주의를 둘러싼 투쟁으로 당시의 종교ㆍ사상계는 이분되고, 데살로니가의 제로타이 지배(1342~50)를 비롯해, 트라키아 도시에서는 사회적 대립이 격화되었다. 그 사이 오스만 터키는 요하네스 5세 팔라이오로고스(재위 1341~91)와 싸우는 6세 칸타크제노스에 초대받아서 아나트리아에서 트라키아로 건너가고(1354), 이어서 궁정을 부르사에서 아드리아노플로 옮겨서(1361년경) 발칸에서 급속히 영토를 넓히는 한편, 콘스탄티노플을 압박했다. 이에 대한 니코폴리스의 십자군(1396)도, 바루나의 십자군(1444)도 성공하지 못하고, 한편 페랄라ㆍ피렌체 공의회(1438~39)에서도 서방으로부터의 구원을 받지 못한 채로, 콘스탄티노플은 1453년에 오스만ㆍ터키군의 손에 함락되었다.
⧭크라케트역사
첫댓글 ........ 유구무언.......
이 글 개뻥이님이 쓰신글입니까?
헐~~~~~~~~~~~~~~
넹! 어찌알공.
댓글 달꺼라고는 아무도 예상 못했습니다
대학다닐 때 누구나 한 권식 구입해서 읽었던 에이치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에 등장하는 인물이 궁금하여 정리해 본 것 뿐입니다요 이구
꽤긴뎅 ㅜㅜ
제가 그랬짜나유.
개뻥이님. 이상한 천재라공~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