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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를딛고서는길(31) - 증오(3) 사도행전 9:13-16(신약p.202)
<증오(3) : 타인을 향한 증오> 증오할 수밖에 없는 사람일까!
우리는 살면서 누군가를 향해 미움과 증오심이 생겨날 때가 있습니다. 누군가가 우리에게 상처를 주거나 피해를 줄 때면, 그 사람이 미워져서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집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한번 생겨난 증오의 마음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습니다. 점점더 감정이 복받치면서 그 증오심은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것이지요? 이 증오심이 자라나면 결국 나를 삼켜버릴 것이기에, 얼른 여기서 멈추어야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우리의 마음은 우리의 의지대로 되지 않습니다. 증오는 멈출 수 없는 기관차와 같이 우리를 파멸로 이끌어가는 것이지요. 그렇게 되면, “증오의 마음을 거두고 그 사람을 용서하라”고 말씀하시는 예수님도 미워지고, 그렇게 설교하는 목사도 짜증이나게 됩니다. 혹시 여러분은 어떤 단계에 계십니까?
2001년 발생한 911테러 사건은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앗아간 세계적인 대참사로 아직도 지워지지 않는 아픔으로 남아 있습니다. 사건 당일 미국에 사는 수잔 레틱(Susan Retik)이라는 여성은 아침 일찍 남편이 타고 간 비행기가 세계무역센터와 충돌했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당시 셋째 아이를 임신중이던 수잔은 도대체 이 현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고, 슬픔으로 또 그 슬픔만큼이나 큰 증오심으로 하루 하루를 살게 됩니다. 그런 그녀의 소식을 알게 된 여러 기관과 단체, 개개인들이 위로편지나 지원금을 보내주지만, 그까짓 것들은 그녀에게 아무런 위안도 되지 않았던 것이지요? 그날 그렇게 테러가 일어나 남편을 죽게 한 모든 관련자들의 무력함과 무능함 그리고 그렇게 테러를 일으킨 알 수 없는 대상들을 향한 분노와 증오로 그녀는 그렇게 고통스런 날들, 11일에 매여있는 인생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던 어느 날, 뉴스를 보던 중 아프가니스탄 여성들의 실상을 접하게 됩니다. 수십년간 계속된 종교분쟁 속에 남편과 아이들을 잃고 하루하루를 비참하게 생활하고 있는 여인들의 모습을 보면서, 수잔의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자신의 처지보다 더욱 고통스러운 여인들, 아무런 지원금도 위로의 말도 듣지 못하고 있는 여인들, 분노할 수도 없고, 증오할 수도 없는, 분노한다한들, 증오한다한들 달라질 수 있는 것이라곤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은 여인들을 돕기로 합니다.
수잔은 자신이 받은 911테러 사건 위로금 전부를, 아프가니스탄 여성들과 나누기로 결심하고 Beyond the 11th 라고 하는 비영리단체를 설립합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수잔의 뜻에 동참했고 아프가니스탄 여성들을 지원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던 중 2010년에는 대통령으로부터 “올해의 위대한 시민상”을 수상하기도 합니다. 테러로 인한 증오와 미움, 분노와 상처를 오히려 사랑으로 나눔으로 섬김으로 바꾸어낸 이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는 증오를 이기는 것이, 증오를 멈추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그리고 하나님은 그렇게 살아 역사하시는 분이신 것을 확인해보게 되는 것입니다.
수잔만 그러한가요? 수잔보다 더 대단한 인물을 우리 대한민국은 가지고 있습니다. 주일저녁에 소개한 손양원 목사님은 어때요? 자기 아들을 죽인 장본인들입니다. 수잔처럼 증오해도 분노해도 그 대상이 불분명한 이들이 아니었습니다. 증오와 미움으로 복수를 생각하며 살아도 되는 그분은, 오히려 그들을 양아들 삼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자기 아들이라면 그렇게 못했을 사랑으로 더욱 잘 양육했던 것이지요? “계모라서 그렇다.” “양아들이라고 들이더니 그럼 그렇지!” 이런 이야기 듣지 않기 위해서라도 아마 더욱 더 마음과 정성을 다했을 것입니다. 증오를 넘어서는 일, 분노와 미움을 극복하는 일, 가능한 것입니다. 이 일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우리는 어떻게 타인을 향해 생겨난 내 마음속의 증오를 극복해낼 수 있을까요? 증오의 원인들을 살펴보고 그 증오를 이기는 비결을 함께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우리는 우리와 우리 주변에게 상처를 주고 고통을 준 상대방에 대해서 때때로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 사람은 절대로 용서할 수 없어”라고 하는 생각을 가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생각은 아담과 하와가 행한, 선악과를 따먹은 범죄와 같습니다. 내가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판단하는 자리에 앉아 있는 태도인 것이지요? 그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할 수 있는 권한이 우리에게 있는 것처럼 착각하고 있는 태도인 것입니다. 그렇게 마음을 먹어, 내가 저에게 하나님과 같은 존재가 되고자 하면, 정작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역사하실 수가 없는 것이지요. 물론 이런 우리의 잘못된 모습을 한방에 혼내주실 수도 있으시겠지요. 그러나 인격적이신 하나님은 우리를 억지로 바꾸지 않으십니다. 조금 더 시간이 걸리더라도 우리가 스스로 깨닫고 우리 스스로 돌이키고 고쳐지기를 기다려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찌하여 우리 마음에 들어온 이 증오의 감정을 없애기가 어려운 것일까요? 증오로 인한 감정과 생각이 달라지는 것이 왜 그렇게 어려운 일일까요? 한번 자리잡은 이 증오가 사라지지 않는 이유가 있습니다. 오늘 그 이유를 살펴보시면서, 오늘 그 이유가 정당한가 확인해보고, 증오를 이겨나가는 우리가 되시길 축복합니다.
첫 번째, 우리가 증오하는 이유, 증오를 거두기 어려운 이유는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문장이 있습니다.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팩트에 매여 있으면, 오히려 안보이는 것이 많아진다.”
우리 안에 증오심이 만들어지고, 그것이 계속 유지, 증폭되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팩트 때문입니다. 그것이 사실이기 때문에 그래요. 차라리 우리가 오해한 것이고, 잘못 본 것이라면 조금 생각해볼 여지도 있고, 오래지 않아 실수를 인정하고 증오를 거둘 수 있을텐데, 상대방의 말과 행동이 사실이었고, 그로 말미암는 실제적인 피해가 사실인 것이 밝혀지면, 그때부터는 정말 용서가 안되는 것이지요?
사울의 모습을 볼까요? 처음에 사울은 살기가 등등하고 증오심이 가득했습니다. 사울의 눈에 비친 사람들, 저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은 이단의 괴수인, 저 십자가에서 죽고만 신성모독의 역적을 따르는 어리석은 자들이었던 것이지요. 이러한 사울로부터 죽음의 위협을 받고 있는 아나니아를 비롯한 수많은 그리스도인들 역시, 사울을 향한 증오심에 가득 사로잡혀 있었던 것입니다. 수많은 아버지와 어머니, 형제와 자매들이 저 인간의 손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고문을 당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울도, 그리고 그리스도인들도, 자기들이 경험하여 알고 있는 철저한 사실에 근거하여 서로를 증오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서로를 죽여야 속이 시원할만큼 증오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보십시오. 사실은, 팩트는, 상대방을 증오할만한 충분한 근거를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확실한 사실이라는 이유로 오늘 우리의 증오심은 더욱 활활 불타오르는 것입니다.
“아히멜렉이 골리앗의 칼을 다윗에게 주었습니다.”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 사실로 사울왕은 아히멜렉을 증오합니다. 그리고 놉땅의 제사장 85명을 죽입니다. 남녀와 노소와 짐승들까지 다 죽입니다. 확실한 사실이라는 이유로 다 죽입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이 부분에 있어서 우리들이 간과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이 그토록 분명하다 할지라도, 그 사실 자체역시 엄청난 한계를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비록 그 사실 자체는 틀린 것이 없다고 하나, 그 사실 하나만을 가지고, 모든 것을 판단하고 한정짓는 것이야말로 “사실”을 가지고 “거짓”을 만들어내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말 속담 가운데 참으로 무서운 말이 있습니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 긍정적으로 쓰이는 경우는 거의 없고, 부정적인 경우에 많이 사용됩니다. 그리고 참 악한 편견과 선입견으로 작용되는 경우가 많은 것이지요? 길 가다가 쓰레기를 버리는 아이를 보면서, “부모는 알콜 중독에 바람피는 인간이고, 성격은 공격적이고 무례할 것이고, 맨날 피씨방에서 게임만 하고 담배피고 술먹고 훔치고 유치장 가고 공부도 안하고 학교에서도 자퇴나 퇴학을 당했을 것이다.” 막 있는 것 없는 것 같다 붙이는 것입니다. 여러분, 절대로 사람을 이렇게 보시면 안됩니다. 지금까지 내가 경험한 99명이 전부 그러했다고 하더라도 지금 만나는 백 번째 사람은 그렇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여러분, 우리네 그리스도인들만큼은 기억해주셔야 되는 것이지요.
여러분, 한 가지를 보면, 그 잠시 잠깐 본 것으로는 한 가지도 제대로 모르는 것이지, 열을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하나를 보고 열을 짐작하는 것은 뇌의 오류입니다. 전문용어로는 “확증편향” 이라고 합니다. 뇌가 스트레스를 받기 싫어서 서둘러서 답을 내리고 결론을 짓는 것을 뜻합니다. 일전에도 한번 말씀드렸지요? 편견, 선입견이 그런 것입니다. 우리 안에 보고서를 빨리 빨리 도장을 찍고 마무리를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근대 심리학에서는 “착각적 상관의 오류”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저도 보다가 말았는데 궁금하거나 필요하신 분들은 찾아보셔도 좋겠습니다.
그렇습니다. 한 가지 사실은, 그저 한 가지 사실입니다. 그러하기에 한 가지 사실 혹은 반복되어 경험된 몇 가지 사실에 근거해서 그 사람을 판단하는 것은 객관적인 행동이라기보다, 그 사람에 대한 철없는 매도가 되기가 쉬운 것입니다. “내가 아는 사람은 그런 사람이 아닌데요?” 라고 하는 이야기를 이내 그 주변의 사람에게서,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듣게 되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사실이 사실일지라도 사실에만 함몰되고 집착하면 문제가 생기게 됩니다. 이는 상대방의 본질과 미래를 단 하나의 사실에만 가두어버리는 일이 되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우리네 짧은 인생, 언제 또 본다고, 저 사람은 그냥 그 때 그 일로 나한테는 평생토록 그런 사람일 뿐이예요!” 여러분, 우리 예수님이 우리를 그렇게 대해주셨으면 우리는 지금 여기서 예배 드리는 것을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상대방이 일정한 시간과 일정한 공간에서 행한 그 한 가지 사실이 사실이기는 하지만, 동시에 이제는 지나간 과거의 일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 가지 사실을 가지고, 지나간 일을 가지고 오늘도 여전히 증오심을 가득 채운 채 그를 대하고 있다면, 여러분 우리는 범죄하고 있는 것입니다. 상대방의 가능성을 무시한 채, 상대방의 반성과 노력을 지난 날의 사실로 근거해서 계속 무의미한 것으로 만들어버리면, 우리는 정말 나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과거 한 순간의 기억으로 우리는 그 사람을 가두어버린 때문인 것이지요? 전능하신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저 세상 사람들이나 할 짓인 때문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이러한 사실에 근거한 증오가 문제되는 가장 큰 이유가 바로 하나님을 제한해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저 인생을 통해 얼마나 위대한 변화를 일으키실지 우리는 아무도 모르는 것입니다. 다윗의 형을 보세요. “나는 네 교만과 네 마음의 완악함을 아노니 네가 전쟁을 구경하러 왔도다”(삼상17:28).
다윗의 형의 말이 사실에 근거한 것일 수 있습니다. 다윗이 교만했을 수도 있고 마음이 완악했던 적도 있었겠지요. 그러나 그렇게 과거의 일로 다윗을 이야기해서는 곤란했던 것이지요? 지금은 전쟁을 구경하러 온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심부름을 따라 온 것이고 크게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오늘 이스라엘 모든 군대가 손 못대고 있는 골리앗을 때려잡기 위해 훈련시켜서 보내셨던 것이니 말입니다.
요셉은 어때요? 꿈쟁이, 고자질쟁이입니다. 그 증오심은 오늘 그를 구덩이에 던져 죽여버리자고 합니다. 그랬다가 아예 영영 이 땅에 못 돌아오게 팔아버리자고 합니다. 사실에 근거한 증오심입니다. 그랬더니 어떻게 되요? 요셉은 아버지와 형들, 그의 자녀들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 예비하신 저 “애굽의 총리감” 이었던 것이지요?
상대방의 미래를 과거의 사실(실수와 잘못)에 제한시켜버리는 실수, 그것을 반복하면, 오늘 우리는 골리앗을 잡고 돌아오는 다윗 앞에 얼굴이 뜨뜻하고, 오늘 자기에게 식량을 주며 용서하겠노라 말하는 요셉 앞에 고개를 들 수 없는 형들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 실수를 하지 말라고 수도 없는 이야기를 해주고 계시는 것이지요.
무슨 말씀입니까? 과거 사실이 우리를 아프게 하는 것이 사실일 수 있지만, 여전히 하나님을 신뢰하는 마음으로, 상대방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못할 때가 참 많지요.
“그 사람이 그랬어. 정말이야, 내가 두 눈으로 똑똑히 봤다니까. 아니면 내가 장을 지진다.”
우리 속담 “장을 지진다”를 궁금해서 찾아보니 영어로는 “내 모자를 먹겠다!”(eat my hat!) 이렇게 하더라구요. 그만큼 확신이 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여러분 기억하세요. 사실, 그것도 지나간 사실로 미래를, 그리고 현재의 노력과 반성을 무의미하게 만드시면 안됩니다. 하나님의 시선으로 오늘도 그를 긍휼히 자비로 기다려 주시고 받아주시기 바랍니다.
사울의 경우를 보십시오. 사울이 회심했습니다. 곧바로 예수님이 그리스도요, 부활의 주님이라고 증거하기 시작합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말하지요? “예루살렘에서 이 이름을 부르는 사람을 멸하려던 자가 아니냐”(행9:22)
여러분, 사실입니다. 그러나 지금 사울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변화되고 있는 중입니다. 아니 이미 많이 변화되어 있습니다. 과거의 사실과는 정반대의 사람이 되어서, 정반대의 일을 시작한 것입니다. 지금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증거하고 있고, 한때 자신처럼 그리스도인을 핍박하고 있는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을 증거하는 사람으로 바뀌어져 있는 것입니다. 사울에게는 과거의 그 실수와 잘못, 그 사실과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있는데, 아니 그랬던 사람이 지금 이렇게나 달라졌다는 것이 또 어쩌면 놀라운 복음의 통로가 될 수 도 있는데, 어때요? 사람들은 여전히 과거의 사실을 붙들고 있는 것입니다. 아니, 여전히 과거, 나에게 아픔을 주고 상처를 준 기억들만을 붙들고 저 사람을 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음문을 열지않고 미워하며 멀리하고 다시는 말도 안섞을 작정으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왜요? 저 인간을 믿었다가 또다시 상처를 받기엔 내 마음이 이미 너무 너덜너덜해진 상태인 때문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또다시 믿어주고 신뢰해주어야 합니다. 왜요? 우리 예수님이 우리를 늘 그렇게 또다시 믿어주시고 또다시 기대해주시고 또다시 기다려주시는 때문입니다. 그분의 가슴은 너덜너덜하다 못해 어쩌면 남아있지 못하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여러분, 이제는 더 이상 우리 예수님의 마음에 아픔과 상처를 주지 마시고, 오늘 저와 여러분도 상처를 받지 아픔을 경험하지 않는 복된 관계를 세워가실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그렇게 선하고 아름답게 역사해주실 것입니다.
두 번째, 우리가 증오하는 이유, 증오를 거두기 어려운 이유는 나만 증오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지배적인 여론이 증오인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우리가 상대방을 증오하고 용서하지 못하는 이유는, 대세에 편승하기 때문입니다. 무슨 말이예요? 나만 증오하는 것이 아니라, 남들도 증오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아나니아가 지금 예수님께 항변하고 있지요? 읽어보겠습니다.
“내가 여러 사람에게 듣사온즉, 그가 예루살렘에서 주의 성도에게 적지 않은 해를 끼쳤다 하더니”(행9:13)
하나님 그것은 사실이요, 많은 사람이 겪고 증언하는 바입니다. 나만 지금 사울에 대해서 이런 불편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저들 중에는 실제 저 사울로 인해 직간접 고통을 겪은 이들이 많습니다. 지금 이 이야기를 하나님 앞에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 이것은 제 개인적인 생각만이 아닙니다. 여러 사람이 저 사울을 용서할 수도 용납할 수도 없습니다.”
여러분, 용서하려다가도 주변 사람들이 용서를 못하니 나도 또다시 증오하고 미워하게 되는 것, 이것이 증오를 극복하지 못하는 또 하나의 이유요, 사실상 계속 저를 증오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핑계”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는 누군가를 판단하거나 미워할 때, 우리들만의 경험과 판단으로 상대방을 미워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얼마나 부정확하게 판단하는지를 알고 우리의 느낌과 생각을 의심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있잖아요. 오늘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이나 집단이 있다는 것을 확인하면, 우리는 증오를 더 이상 미루지 않습니다. 단숨에 수퍼카가 제로백 4초에 달리듯, 여지껏 잠잠하다가도 한 순간에 증오에 확 사로잡히는 것이지요. 나만 증오하는 게 아니라는 아주 보잘 것 없는 이유 하나를 확인하는 그 순간에 말입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증오하고 미워하게 될 때를 보세요. 우리는 누군가로부터 그 사실을 듣고 증오하고 미워하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누군가가 전해준 사실을 너무나도 쉽게 정설로 받아들이고 신뢰해버리는 경우가 많은 것이지요? 뉴스나 신문, 그리고 우리가 신뢰할만하다고 여기는 누군가로부터 전해들은 이야기라면 우리는 곧바로 수용, 그리고 그 여론과 대세의 분위기에 편승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한 사람 한 사람, 그리고 사실과 사실, 데이터가 모이면 모일수록, 그 증오는 더욱 강화되고 커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육하원칙에 의해서 이야기되는 사실도 거짓이 많습니다. 뉴스나 신문, 인터넷 메인기사로 올라와 있어도 맞지 않는 이야기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의견을 모았고 결정을 했다한들, 그들의 평가, 그들의 합의가 정확하고 옳다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동의하면 그것이 옳은 일입니까? 바른 일입니까?
여러분 우리는 사람들의 시선을 따라서, 사람들의 생각을 따라서, 사람들의 판단을 따라서 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럴 것이면 예수님을 주로 고백할 이유가 없습니다. 사람들을 주라고 고백하고 살아야지요. 여론을 주님으로 모시고 살아야지요. 우리는 여론(輿論)으로 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주론(主論)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또 말하면 잔소리이지요? 여러분, 가나안땅을 정탐하고 와서 주된 여론은 무엇이었습니까?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죽는다. 우리와 우리 자녀들이 여기서 저들의 칼과 창에 죽는다. 돌아가야한다” 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밤이 새도록 목을 놓아 통곡을 했습니다. 그래서 하루에 1년씩 40년,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을 반대했던 사람들이 다 죽어, 그 시신이 사라질 때까지, 그들과 그 자녀들이 광야에서 방황해야만 했던 것이지요. 읽어볼까요? 민수기 14장 27-35절입니다.
“나를 원망하는 이 악한 회중에게 내가 어느 때까지 참으랴 이스라엘 자손이 나를 향하여 원망하는 바 그 원망하는 말을 내가 들었노라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내 삶을 두고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 너희 시체가 이 광야에 엎드러질 것이라 너희 중에서 이십 세 이상으로서 계수된 자 곧 나를 원망한 자 전부가 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 외에는 내가 맹세하여 너희에게 살게 하리라 한 땅에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너희가 사로잡히겠다고 말하던 너희의 유아들은 내가 인도하여 들이리니 그들은 너희가 싫어하던 땅을 보려니와 너희의 시체는 이 광야에 엎드러질 것이요 너희의 자녀들은 너희 반역한 죄를 지고 너희의 시체가 광야에서 소멸되기까지 사십 년을 광야에서 방황하는 자가 되리라 너희는 그 땅을 정탐한 날 수인 사십 일의 하루를 일 년으로 쳐서 그 사십 년간 너희의 죄악을 담당할지니 너희는 그제서야 내가 싫어하면 어떻게 되는지를 알리라 하셨다 하라 나 여호와가 말하였거니와 모여 나를 거역하는 이 악한 온 회중에게 내가 반드시 이같이 행하리니 그들이 이 광야에서 소멸되어 거기서 죽으리라”
여러분, 이것이 여론을 따른 결과였습니다. 여론의 또 하나의 무서운 결과 아시지요? 예수님이 무수한 군중들의 여론에 의해 돌아가셨습니다. 십자가에 못박으라. 바라바를 놓아주고 예수를 못박으라.
다수의 의견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뜻과 말씀을 무기력하게 만들어버린다면, 하나님의 계획과 하나님의 약속에 따른 행진을 멈추게 만드는 것이라면, 여러분, 이것은 우리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의 자녀들이 우리 시체가 소멸되기까지 방황해야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무서운 민폐입니까?
여러분, 이 나라 우리와 우리 자녀 세대가 광야에서 방황하는 것과 같은 삶을 살아야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보도지침을 내리고, 여론을 댓글을 조작해가면서까지, 거짓 정보를 흘리고, 그것이 정설인양 믿도록 가르치고,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는 일을 행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계획을 멈추게 만드는 일을 해온 때문이 아닐까요?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며, 죄없는 사람들을 너무나도 쉽게 고문하고 죽여온 때문이 아닐까요? 한두 가지 사실로 수많은 학생들을 가두고 구타하고 죽게 만들었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렇게 싹을 잘라야 한다며 어떤 나무가 될 지도 모르는 나무들을 다 베어버렸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 결과 지금 우리는 이토록 인물이 없는 나라에서 살고 있는 것이지요? 우리는 앞으로 더 몇 년을 광야에서 유리하고 방황해야할까요? 저들은 언제 죽어 언제 그 시체가 소멸될까요? 아니, 바로 내가, 저 광야에서 죽어 소멸되어야할 완악한 사람은 아니겠습니까?
여러분, 하나님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어떻게 생각해도 하나님께서 그를 얼마나 귀하게 여기시는 지를 보셔야 합니다. 우리는 오늘도 들끓는 여론에 편승해서 이놈을 죽이려 했다가 저놈을 죽이려 했다가 하면서 살아갑니다. 오늘도 매스컴과 여론은 우리의 마음을 이 사람을 향한 증오심으로, 저 사람을 향한 증오심으로, 대상을 바꾸어가며 증오심으로 채워 놓고 있습니다. 이것은 분명 마귀 새끼의 장난질이지,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 각자를 향한 놀라운 비전을 품고 계십니다. 나를 아프게 하고 속상하게 한 과거의 분명한 사실들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지만, 오늘 그들을 통해서도 놀라운 일을 계획하고 계십니다. 변화시키실 것입니다. 새롭게 사용하실 것입니다. 그 전능하신 하나님을 고백하시는 대로, 여러분 오늘 우리의 마음 속에 있는 증오를 풀어내시고, 하나님의 역사를 다시 한번 기대하시고 신뢰하시는 복된 분들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그렇게 우리네 생애 증오로 채우지 마시고, 사랑과 기대와 신뢰, 기쁨과 웃음으로 채우시길 축원합니다.
다음 시간에 하나 더, 우리로 하여금 이 백해무익한 증오를 내려놓지 못하게 하는 것 한 가지를 더 생각해보고, 예수님은 당신에게 상처를 준 사실과 사람 앞에서 어떻게 하셨는지 생각해보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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