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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BC 제07강 모세와 출애굽 : 출애굽기(1)
- (1) 출애굽을 위한 준비 출애굽기 1장 6-14절
자, 오늘부터는 출애굽기입니다. 출애굽기의 이름은 헬라어 성경에 붙여진 이름, ‘엑소도스’(밖으로 나감)에서 만들어졌습니다. 우리말 성경의 이 이름은 출애굽기, “애굽탈출기록”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모세 오경의 두 번째 책으로 이스라엘 역사 속에 일어난 가장 중요한 사건,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을 떠난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일어난 가장 중요한 두 가지의 일,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백성과 언약을 맺고 율법을 주신 일(8강),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임재하시는 성막을 만드는 일(9강)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의미들은 이제 차차 살펴보시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출애굽의 사건은 언제 일어난 것일까요? 출애굽기의 연대를 추정하는 방법은 두 가지입니다. 첫 번째는 출애굽시기를 주전 15세기로 보는 견해인데, 열왕기상 6장 1절의 기록을 근거로 연대를 거꾸로 추정해보는 것입니다. 뭐라고 되어 있는 지 읽어보겠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나온 지 사백팔십 년이요 솔로몬이 이스라엘 왕이 된 지 사 년 시브월 곧 둘째 달에 솔로몬이 여호와를 위하여 성전 건축하기를 시작하였더라”(왕상6:1)
솔로몬이 아버지 다윗이 소원하였으나 하지 못한 성전건축을 시작하게 되는데, 그때가 솔로몬이 왕이 된 지 4년이요, 출애굽한지 480년이라는 것입니다. 솔로몬의 즉위를 주전 960년으로 보는데, 그렇다면 출애굽은 주전 1436년경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때는, 애굽의 제 18왕조(BC1552~1306) 중에서도 투트모세 3세(BC1480-1436)때가 되는 것입니다. 특별히 투트모세 3세 때 대신이었던 레크마이어(Rekhmire)라는 사람의 무덤 벽화에는 벽돌을 굽는 노예들의 모습이 그려져 있는데, 이것이 출애굽 1장 히브리 노예들의 생활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고 근거를 삼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견해는 출애굽시기를 주전 13세기로 보는데, 출애굽기 1장 11절의 기록을 근거로 합니다. 그 기록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감독들을 그들 위에 세우고 그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워 괴롭게 하여 그들에게 바로를 위하여 국고성 비돔과 라암셋을 건축하게 하니라”(출1:11)
애굽에서 비돔과 라암셋에 새로운 건물들이 많이 지어지던 것은 애굽 제 19왕조(BC 1310~1200)때의 일입니다. 당시 왕들이 수도를 나일강 삼각주(델타) 근처로 옮기고 그들의 곡식과 보물을 보관하기 위한 성을 지었던 것이지요? 그렇다면 출애굽은 당시의 바로였던 라암셋(람세스) 2세(BC1290-1224) 치하에서 일어난 사건이 됩니다.
특별히 우리가 알고 있는 영화 이집트왕자, 이미 다 보셨겠지만, 다음주 수요일에 한 번 더 상영을 해볼까 생각하고 있는 이 영화가 바로 이 13세기설을 받아들여 만들어진 영화입니다. 그리고 구약성서학자들의 대다수도 13세기일 것으로 의견을 수렴합니다.
왜요? 열왕기상이 기록하고 있는 480년은 정확하게 연수를 센 것이 아니라, 역대상 6장(4~10절, 50~52절)이 기록하는 열두 세대를 가리키는 대략적인 수치인 것으로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한 세대를 40년으로 보고 12세대를 세면 몇 년이예요? 480년이지요? 그렇게 출애굽으로부터 12세대가 지나 성전건축이 되었음을 서술한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종합해보면, 오늘 이 애굽에서의 이야기와 출애굽의 사건은 요셉에게 너그러웠던 셈족출신 힉소스 왕조가 패망한 뒤, 애굽인으로 다시 왕권이 넘어간 18대 ~ 19대 왕조의 때에 일어난 것 정도로만 생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오늘 본문이 바로 그렇게 시작하지요?
“요셉과 그의 모든 형제와 그 시대의 사람은 다 죽었고”(출1:6)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일어나 애굽을 다스리더니”(출1:8)
하나님께서 애굽의 거대한 역사 속에 힉소스 왕조를 등장시키시고 그 가운데 요셉을 보내시고, 요셉을 통해 그 아버지의 아들들, 그 아버지의 손자들, 그 아버지의 가축들까지도 양육하고 돌보았던 것이지요? 요셉이 아버지를 모셔오라며 형들에게 했던 약속을 다시 한 번 확인해 볼까요?
“아버지의 아들들과 아버지의 손자들과 아버지의 양과 소와 모든 소유가 고센 땅에 머물며 나와 가깝게 하소서 흉년이 아직 다섯 해가 있으니 내가 거기서 아버지를 봉양하리이다 아버지와 아버지의 가족과 아버지께 속한 모든 사람에게 부족함이 없도록 하겠나이다 하더라고 전하소서”(창45:10-11)
그렇게 당시 고대근동은 물론이요, 모든 애굽 사람들마저도 7년 흉년으로 모든 사람이 가진 돈과 가축과 토지와 심지어는 자신의 몸마저도 다 팔아 바로의 소유가 되면서 간신히 농사지을 밭과 종자를 얻을 때, 오늘 야곱의 집안 사람들은 조금의 부족함을 모른 채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이지요? 바로가 요셉이 모든 것을 다 지원하고 후원해 주었던 것입니다. 놀라운 구원 계획을 가지고 요셉을 먼저 보내신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그리고 세우신 그 요셉을 통해서 돌봄을 받으며, 하나님의 약속을 하루가 다르게 성취해 나갔던 것이지요?
어떤 약속이요? 아브라함에게 주신 큰 민족을 이루게 될 것이라는 약속이요, 그 날도 잠 못자고 텐트밖에 나와 한숨짓는 고개숙인 가장, 도시빈민 게르촌의 그를 부르시고, 고개를 들라고 저 하늘의 별을 세어 보라고 하시며 주셨던 약속 말입니다. 어떻게 이뤄주셨지요? 장정만 60만이 되게 하셨던 것입니다. 여인과 아이들까지 하면 300만에 가까운 인원으로 정말 바닷가의 모래같이 많은 자손들을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출애굽기의 시작은 이런 선언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은 생육하고 불어나 번성하고 매우 강하여 온 땅에 가득하게 되었더라”(출1:7)
“그가 그 백성에게 이르되 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이 우리보다 많고 강하도다”(출1:9)
거대한 기근으로 쫄쫄 굶던 70명의 이주로 시작한 이스라엘 백성 일개 부족이 이제는 본토 애굽 사람보다 많고 강하게 복을 받고 번성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랬더니 어떻게 되요? 왜 이 사람들이 이 땅에서 이렇게 살고 있는지, 왜 이들만 노예가 아니고, 바로의 소유가 아닌지 의아했던 것이지요? 그래서 바로는 신분을 뒤집어 버립니다. 자유인이었던 이들을 노예로 삼아버렸던 것이지요? 이 부분을 교재로 확인하겠습니다. 63쪽 아랫단, “생육하고 번성하며~” 시작!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에 충만하라”는 것은 하나님이 태초의 첫 인간에게 주신 복입니다(창1:28). 또한 이것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출애굽기는 이 약속이 성취되었다는 선언과 함께 시작됩니다. 애굽의 시각으로 보면, 이스라엘은 약소 민족이며 저급 문화임에 틀림없습니다. 결코 두려워할 가치가 없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히브리 민족은 바로가 두려워할 정도로 강성하게 되어 급기야는 바로의 인구 억제 정책이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바로의 지혜는 그들에게 과거보다 더 심한 노역을 부과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인들은 “학대를 받을수록 더욱 번성하여 퍼져나가니”(출1:12). 억압을 받을수록 약해지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강해진 것입니다. 바로의 두 번째 지혜는 산파에게 여자아이는 살려두고, 남자아이는 죽이라는 명령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두 산파 ‘십보라’와 ‘부아’의 지혜는 바로를 능가하여 바로의 정책을 무색하게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이 강성하게 하는 것을 인간이 막을 수 없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오래전부터 준비해 오던 역사의 물결은 사람의 꾀와 힘에 의하여 멈추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이 사실을 잊지 말고 기억하시길 축복합니다. 하나님이 강성하게 하시는 것을 인간이 막을 수가 없습니다. 다윗의 집이 강해지는 것을 사울이 막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울의 집이 약해지는 것을 사울이 멈추거나 돌이킬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울은 싸움에 능한 자를 골라서 모집합니다(삼상14:52). 다윗은 빚지고 환난을 당하고 마음이 원통한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삼상22:1-2). 누가 이겨야 되요? 그런데 사울은 번번히 다윗을 이기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사울을 버려, 그의 왕위를 다윗에게 주고자 하셨기에 아무리 사울이 꾀를 부려도, 안간힘을 써도 하나님의 계획과 역사를 멈출 수도 막을 수도 방해할 수도 없었던 것입니다. 바로가 아무리 노역을 무겁게 해도, 바로가 아무리 사내아이를 강에 던져 죽여도 그들이 번성하는 것을 멈출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이 이 복을 받으시길 축복합니다. 여러분을 시기하고 해하려는 세력들이 아무리 용쓰는 재주가 있다한들, 여러분에게 손을 댈 수 없는 존재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는 이스라엘이 되시고, 다윗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애굽이 아무리 지혜를 모아도, 방법을 강구해도, 우리를 이길 수 없도록 하나님께서 도우실 것입니다. 사울이 아무리 군대를 모으고 포위하며 수색해도 오히려 저들의 눈을 가려주실 것입니다. 오히려 제발로 죽겠다고 동굴로 들어온 저를 살려 보내줄 수 있는 넉넉함과 여유를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애굽과 고센땅을 구별하셨듯, 우리와 저들을 구별하시고 복을 주시고 형통케 하실 것입니다.
어떤 자격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입니다. 더욱 하나님 앞에 정직하고 진실하시어 늘 그 은혜가 떠나지 않는 분들, 언제고 어디서고 하나님의 한량없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에게 풍성하게 임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습니다. 여기에서도 살짝 보여지지만, 먼저 기억해주실 출애굽기의 특징 하나가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일하시는 방식에 변화가 생겨납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역사로 뛰어들어 오셨다는 것이지요? 하나님께서 주체가 되어서 일하신다는 것입니다.
노아, 아브라함, 야곱을 들어 구원계획을 진행하실 때에 하나님은 그들을 인격적으로 만나주셨고, 대면하셨습니다. 그렇게 그들을 부르시고 말씀하시고 사명을 위임하시고 힘과 지혜를 주셨습니다. 그렇게 인격적인 계시의 방법을 사용하셨지요.
그러나 지난 요셉의 이야기에서는 인간의 욕망과 배신으로 소용돌이치는 삶의 정황들 속에서, 인간이 만들어낸, 아니 인간이 쏟아낸 저 악한 상황들을 반전시키시면서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가셨습니다. 한 번도 인격적으로 찾아오시지도 말씀하시지도 않으셨음에도 저 열일곱살 요셉은,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습니다,
“저들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먼저 보내신 것이구나.
저들의 구원을 위해 내가 지금 고난 가운데 훈련받고 있구나,
그리고 저 원수들이 바로 내 사명이구나.”
이것을 깨달았던 것이지요? 아버지의 눈으로 저들을 바라보며 용서하고, 오늘 그가 입은 채색옷이 복수의 옷이 되지 않게, 모든 자리에서의 선구자의 역할을 잘 감당해나갔던 것입니다. 요셉을 통해 증거하고 보여주신 하나님은? 하나님의 존재가 가시적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그 배후에서 역사를 세밀하게, 크게는 나라와 민족을 넘어서서 일하시는 분, 작게는 인간의 미움과 시기를 선으로 바꾸시어 경륜(經綸)하시는, 꿈을 통해 미래를 보이시는 놀라운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러던 하나님께서 오늘 이 출애굽기에서는 구원의 드라마의 연출자에 머무시지 않고, 이제는 직접 역사의 무대에 뛰어드셨습니다. 특별히 하나님은 저 거대한 세속권력, 통치구조와의 싸움을 진행하시는 분, 위대한 전사로 소개가 되는 것이지요? 오늘도 고통으로 억울함으로 울부짖는 울음소리를 들으시며 당신께서 싸우시는 것입니다.
가만히 보십시오. 모세와 아론을 싸움의 주체로 세우시지 않습니다. 그저 그들은 바로와 대적자들 앞에 서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시는 일을 소개하고 전하는 역할을 할 뿐인 것입니다. 특별히 모세가 홍해 사건 앞에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 고백했던 말을 기억해보십시오.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출14:13-14)
출애굽기가 소개하고 있는 모든 싸움은 하나님께서 친히 수행하시는 싸움인 것입니다. 곧 살펴보시겠지만, 애굽에 내리신 열 가지 재앙의 싸움도, 모세와 아론이 바로와 싸우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싸우시는 것입니다. 강개이파수독우황캄장 열 개중에 아홉 개의 재앙이 충격적입니다. 애굽인들이 그토록 신성시하여 숭배하며 섬기던 존재들이 오히려 그들에게 고통을 주고 손해를 끼치고 숨을 쉴 수 없게 하는 존재로, 희망을 잃어버리게 만드는 존재로, 하나님의 손에 들린 도구가 되어서 오히려 그들을 쳤던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출애굽기는 하나님께서 역사의 방관자가 아니요, 숨어있는 모사가 아니라, 역사의 창조주요, 경륜자이며, 역사를 친히 주관하시는 “주”이심을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저까짓, 강이 개구리가 이가 파리가 독종이 우박이 황충이 하늘의 광명이 “주”가 “신”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친히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출애굽기를 읽으며 모세와 아론을 영웅시하는 실수를 범하시면 안됩니다. 모세를 준비시키고 사용하신 것은 사실이지만, 출애굽의 전 사건의 드라마는 모세에 의해서 주도된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싸움에 모세를 부르시고 역할을 맡기셨을 뿐이지요.
이 하나님의 싸움은 어떻게 시작이 되지요? 하나님의 백성에서, 바로의 노예로 전락한, 오늘도 ‘흙이기기’와 ‘벽돌굽기’와 ‘농사일’에 시달리던 당신 백성 이스라엘의 울부짖음을 들으시면서, 그들이 당하는 학대를 하감하여 보시면서 오늘 그 싸움이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혹시 하나님과 싸우고 싶으신 분 계십니까? 오늘도 누군가를 울부짖게 만드시면 됩니다. 누군가를 학대하시면 됩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싸우시는 지 분명하게 보실 수 있으실 것입니다. 더욱 마음이 강퍅해지면서 망해가는 것이지요? 고집부리다가 자식죽고 병거를 잃고 나도 죽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은 어느 편에 서 계십니까? 하나님 편에 서 계십니까? 아니면 재앙에, 징벌에, 죽어가는 바로의 편에 계십니까? 저와 여러분 모두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대적하여 싸우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대적과 싸우시는, 그 구원을 보시는 참된 주의 백성들이 되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저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종되었던 때를 너무 쉽게 잊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위해서 싸우셨던 것을 너무 쉽게 잊었습니다. 그래서 어느 새 하나님과 대적하는 자리에 서게 되었지요? 자기들보다 힘이 없고 약한 이들을 노예로 부리며 살았지요. 고아와 과부, 나그네의 눈에서, 아니 오히려 동족들, 이웃들의 눈에서 피눈물나게 하는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지금, 그렇게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출애굽기를 우리에게 소개하고 계시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자, 그러면서 이런 비교도 있습니다. 즉각적인 심판과 기회를 주는 심판입니다. 하나님만 이스라엘 백성들의 울부짖음을 들은 것이 아닙니다. 비록 왕실에 있었지만, 어머니 요게벳으로부터 젖을 먹으며 자란 모세는, 동족을 향한 애정도 열정도 살아있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동족 히브리인들이 당하는 고난과 눈물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동족의 고난과 학대를 보았을 때, 애굽인의 ‘악’을 더 큰 ‘악’으로 제압하려 했던 것입니다. ‘악’을 ‘악’으로 갚아 동족을 구원하려고 했던 것이지요? 그러나 결과가 어떠했습니까? 악을 악으로 갚는 싸움은 결국 패배와 도피로 이어지게 될 뿐이었습니다. 동족들이 그 의도를 알아주지 않습니다. 뭐라고 하지요?
“그가 이르되 누가 너를 우리를 다스리는 자와 재판관으로 삼았느냐 네가 애굽 사람을 죽인 것처럼 나도 죽이려느냐”(출2:14)
히브리인의 고백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적을 향해 악을 행할 수 있는 사람은, 같은 편을 향해서도 악을 행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사실은 틀림없는 것입니다. 누군가에게서 나쁘고 악한 사람을 다 때려잡는 모습이 멋있게 보이시나요? 언젠가 그 주먹이 나를 때리게 되어 있습니다. 막 누군가에게 컴플레인을 멋지게 하는 사람이 매력적이게 보이시나요? 언젠가 나를 향해서도 조목조목 논리적으로 컴플레인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다른 사람 험담을 나에게 와서 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 사람은 내 험담도 여기저기 하는 사람입니다. 정말 나쁜 사람에게도 욕을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끝까지 나에게도 욕을 하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정말 어떤 누구에게도 손찌검을 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나에게도 손찌검을 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에이~ 나한테는 안그래~! 아뇨! 여러분 한테도 곧 그렇게 합니다.
그래서 사람을 때려죽인 모세는 히브리인들과 같이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흥! 나도 죽이려고? 그랬던 것이지요.
일전에도 한 번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악을 악으로 갚으면 악이 소멸되는 것이 아닙니다. 악이 두 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악은 갚는 것이 아닙니다. 내게서 끝내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세상법정에 싸움을 가지고 갔던 고린도교회에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 하여 이 말을 하노니 너희 가운데 그 형제간의 일을 판단할 만한 지혜 있는 자가 이같이 하나도 없느냐 형제가 형제와 더불어 고발할 뿐더러 믿지 아니하는 자들 앞에서 하느냐 너희가 피차 고발함으로 너희 가운데 이미 뚜렷한 허물이 있나니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고전6:5-7)
우리가 얻기를 원하고, 알기를 원하고, 붙잡기를 원하고, 이르기를 원하는, 본받기를 원하고, 만나기를 원하는 그리스도 그분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인간의 불의와 악함에 똑같이 갚아주셨습니까?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엊그제도 읽었지만 한 번 더 읽어보시지요?
“너희 듣는 자에게 내가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너의 이 뺨을 치는 자에게 저 뺨도 돌려대며 네 겉옷을 빼앗는 자에게 속옷도 거절하지 말라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 것을 가져가는 자에게 다시 달라 하지 말며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너희가 만일 너희를 사랑하는 자만을 사랑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사랑하는 자는 사랑하느니라 너희가 만일 선대하는 자만을 선대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이렇게 하느니라 너희가 받기를 바라고 사람들에게 꾸어 주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그만큼 받고자 하여 죄인에게 꾸어 주느니라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하시니라”(눅6:27-35)
그렇게 말씀하신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지요? 도수장에 끌려가는 양처럼, 인간들의 완악함을 당신의 힘으로 능력으로 갚아주지 않으셨습니다. 당신을 조롱하고 멸시하고 머리를 치고 침을 뱉고 비아냥거리는 저들에게 본때를 보여주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저들의 죄까지 짊어지고 죽으셨던 것이지요? 저들을 용서하시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렇게 악을 끊으셨습니다. 그리고 구원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21-22절에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살전5:21-22)
상대방이 아무리 나쁜 사람이어도, 그를 향해 내 속에서 내 입술을 통해서 악이, 욕이, 저주가 쏟아져 나오지 않게 하시길 바랍니다. 그것이 나오려면 내 속에 악이 욕이 저주가 쌓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하셨던 말씀 한 군데 읽어볼까요?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마12:34-35)
오늘도 입술에서 악한 것을 내는 존재, 오늘도 내 속에 이 악이 가득히 쌓인 존재가 되면, 이제 나는 아무도, 특별히 예수님마저도 함께 하실 수 없는, 성령이 탄식하는 존재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모세는 악을 악으로 갚아서 패배하고 도피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애굽인들이 만들어낸 악으로부터 오늘 고난받는 이스라엘의 신음과 탄식을 들으셨을 때, 악을 악으로 갚으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악을 바꿀 수 있는 기회를 주셨던 것이지요? 어떻게 하시면서까지 기회를 주세요? 저 바로가 오히려 이스라엘을 더 힘들게 하지요? 그래서 모세와 아론이 백성들로부터 원망을 듣고 미움을 받지요. 보십시오. 이스라엘에게 짐을 지우고, 모세와 아론의 마음을 희생하시면서까지 저 바로에게 기회를 주십니다.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바로가 이르되 너희가 게으르다 게으르다 그러므로 너희가 이르기를 우리가 가서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자 하는도다 이제 가서 일하라 짚은 너희에게 주지 않을지라도 벽돌은 너희가 수량대로 바칠지니라”(출5:17-18)
“그들이 바로를 떠나 나올 때에 모세와 아론이 길에 서 있는 것을 보고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우리를 바로의 눈과 그의 신하의 눈에 미운 것이 되게 하고 그들의 손에 칼을 주어 우리를 죽이게 하는도다 여호와는 너희를 살피시고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출5:20-21)
“모세가 여호와께 돌아와서 아뢰되 주여 어찌하여 이 백성이 학대를 당하게 하셨나이까 어찌하여 나를 보내셨나이까 내가 바로에게 들어가서 주의 이름으로 말한 후로부터 그가 이 백성을 더 학대하며 주께서도 주의 백성을 구원하지 아니하시나이다”(출5:22-23)
몇 번이나? 자그마치 열 번이나 말입니다. 그렇게 참으시고 기회를 주셨던 것입니다. 누구에게? 저 마음이 강퍅해진 바로에게 말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와 아론을 통해 당신을 알리십니다.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내 백성을 보내라”(출5:1) “악”을 “선”으로 갚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은 이 명령을 거절하는 바로를 그 자리에서 쳐서 죽여 모래에 묻지 않으십니다. 참으심으로 그에게 구원의 기회를 주십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싸움은 처음부터 진멸이 아닙니다. 바로에게 기회를 주시고 주시고 주시고 또 주시고 주셨음에도 그것을 거절하였고, 끝까지 하나님을 대적해서 싸우고자 나왔기에, 오히려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학대의 날을 더욱 세워댔기에 결국 싸우셨던 것이지요. 악을 악으로 즉결처형했던 모세와 달랐던 것입니다.
잘 보십시오. 출애굽기의 은혜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만 찾아와주시지 않습니다. 모세만 찾아와주시고 다시금 쓰임받을 수 있는 기회를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에게도 찾아와주십니다. 모세는 한번 찾아가셨습니다. 그러나 바로는 열 번을 찾아가주셨습니다.
그렇게 오늘 우리에게도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당신을 보여주시며, 우리가 오늘도 행하고 있는 악을 그치길 요청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당신을 알려주시고 가르쳐 주시며, 당신이 우리에게 바라시며 허락한 사명을 이제라도 조금이라도 감당하기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아직은 괜찮을까요? 다음번에 또 찾아오실까요? 다음번에 또 기회를 주실까요? 오늘이 마지막 기회인 것처럼, 하나님 앞에 돌이키시길 바랍니다. 분명히 하나님은 오래 참으십니다. 그러나 그 참으심에는 끝이 있습니다. 그게 언제인지를 모른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오늘 이 저녁에 그분의 요청 앞에 그분의 명령 앞에 내 완고함을, 내 강퍅함을 내려 놓으시고, 내 상황과 판단, 형편과 처지를 내려 놓으시고, 그분의 말씀과 능력을 의지하시고, 오늘 저 모세의 심정이 되어, 마주하기가 죽기보다 어려운 내 생명을 해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저 바로와 마주하여 서시는 사명자가 되시길 축복합니다. 그리곤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시는 은혜로운 인생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시간 시간 출애굽기를 묵상하시며 오늘 우리 안에 있는 악을 소멸하시고, 우리가 섬기고 있는 헛된 신들을 다 제거하시고, 우리에게 있는 악한 습관과 행실들을 다 버리실 수 있는 복된 여정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무엇보다 고집스럽고 강퍅해져만 가는 우리의 마음이 깨어지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그렇게 과거의 종노릇 하던 삶에서, 매일 매일 고되고 울부짖던 삶에서 자유함을 얻으시고, 이제는 마귀의 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왕자와 공주로, 우리에게 허락하신 바, 왕자로서의 삶, 공주로서의 삶을, 이제는 행복하게 여기며 배워나가시는 저와 여러분 모두가 되시길 우리 구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다음시간 예습
성경 출애굽기 1장~15장
교재 62-6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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