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AECL에 파견되어 와서 1년 4개월 동안 가장 조심한 것이 그 회사의 복사기를 가능하면 사용하지 않는 것이 었다.
그래서 옆자리의 그 문서를 복사하려면, 집으로 가져와 집 주변 쉐리든 몰에 있는 문방구점의 복사기를 이용해야 한다.
이것은 25센트 동전을 넣으면 1 페이지를 복사할 수 있는데, 천 페이지를 모두 복사하려면, 거의 250 불이 들어가고, 또 한번에 100 페이지 정도를 복사하는 것이 고작이고, 주말에는 그 문서를 반출해 오는 것이 위험할 것 같으니, 주중에만 작전을 수행한다면 총 2주는 걸려야 복사를 마칠 수 있을 것 같다.
이러한 것을 종합 검토하여 세부 작전 계획을 세우고, 첫 날 임무를 수행하려고, 모두 퇴근하고 30분이 더 지나, 아무도 사무실 근처로 오지 않는 것을 확인한 후에 옆자리의 보고서를 슬쩍해서 내 가방에 넣고 사무실 전등을 끈 후에 집으로 돌아 왔다.
저녁을 먹는둥~마는등~하고 문서를 꺼내 오늘 복사할 예정인 100 페이지만 따로 챙겨서 문방구로 가서 복사를 하는데, 내 등 뒤로 지나가는 사람들이 자꾸 신경에 거스른다.
그래서 첫날은 50 페이지 정도만 복사하고 집으로 돌아와, 다음 날 아침 제일 먼저 출근하여 어제 들고 나온 문서를 제자리에 돌려 놓고, 쓸만한 다른 복사기가 어디가면 있나~? 찾아보니 내가 타고 다니는 버스 노선 중간에 있는 미시소거 대학(사진 참조)이 생각난다.
거기에 가보니 학생들이 이용하는 넓은 휴게실에 복사기가 여러 대가 있고, 학생들이 이용하는 것이어서 가격도 저렴하여 1페이지를 복사하는데 10 센트 동전 하나면 되었다.
대학교 구내 복사기를 사용하니, 가격도 저렴하고 한번에 좀 많은 량을 복사할 수가 있어서, 며칠만에 모든 자료를 전부 복사할 수가 있었다.~^♡
그 후로는 사무실에서는 공식적으로 허가된 자료들만 공부하고, 일찍 집에 와서 훔쳐서 복사해 논 제조관련 문서를 세세하게 검토하면서, AECL 설계 문서와의 차이점을 비교해 보고, 내용이 차이 나는 경우에는 그 이유를 생각해 보았다.
즉, 내 옆자리의 담당자가 해야 하는 일을 나는 집에 와서 비공식적으로 해 보는 < 스스로 하는 OJT> 를 열심히 하였다.
그리고 뭔가 의문 사항이 생기면 내가 볼 수 있는 공식 자료들에 관련 내용이 있는지 추가 자료를 찾아서 검토하였다.
AECL 실장, 팀장, 동료들은 내가 혼자서 뭔가를 열심히 하는 덕분에 돈 많이 쓰는 일본 팀과 시간을 많이 보넬 수 있어서 내심 좋아했을 것이다.
이 < 스스로 하는 OJT> 는 모든 일을 하면서 신경써야 하는 사항이 많아서 아주 조심스럽게 진행을 해야 되었고, 그 덕분에 나머지 파견 기간은 눈 코 뜰 사이도 없이 지나가고~
어느덧 귀국할 때가 와서 파견 올 때와 마찬가지로 아내와 부쩍 큰 딸과 아들, 그리고 올 때에 가지고 온 커다란 여행용 가방 두개에 기저귀나 애들 옷가지 대신에 그 동안 틈틈히 모아 논 노다지(?)들을 가득 싣고 귀국 길에 올랐다.
&&( P.S. )
그 당시에 내가 가지고 간 공식 자료, 즉 CANDU형 핵연료 설계 자료 및 컴퓨터 코드는 그 후에 우리 연구소와 AECL 사이에 정식으로 기술 이전 계약을 맺고 기술료로 몇십만불을 지불하였다.
그리고 내가 훔쳐 온 제조관련 문서는 AECL 소유가 아니 어서 돈을 주고 사 올 수 없는 것이 었지만, 만약 그 제조 회사에 가서 사 올려면, 아주 아주 비싼 값을 지불해야 했을 것이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 다시 되집어 생각해 보아도 < 돈 주고 사려면 수백만불(?)의 가치가 있는 핵연료 제조 관련 문서철>이 왜(?) 내 옆자리 책상 위에 놓여 있게 되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그 때로부터 15년 8개월이 지난 1998년 10월~ 온 국민이 금 모으기 운동을 하고 있을 때에 서울에서 사는 여동생으로부터 어머니의 암이 방광, 유방, 자궁으로 전이 되어 며칠 후에 수술을 받아야 한다는 연락이 왔는데, 요즈음 우리 회사도 IMF 대책으로 장기 근속자를 명예 퇴직시킨다는 이야기가 돌아 마음이 뒤숭숭~ 도무지 뭔가를 하기가 싫다.
연구소의 오랜 동료로 아주 아주 예전에 내가 실에서 2인자일 때에 3인자 노릇을 하다가, 내가 다른 부서로 옮기면서 2인자가 되었던, H 박사가 오랜만에 집으로 찾아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서형~! 어머니가 입원한 병원에 가서 한번 확인해 보세요.' 해서 ' 뭘~? '하고 되물어 보니~
자기의 작은 아버지는 우리 어머니가 지금 입원하고 있는 구로동 K 병원에서 원무 과장으로 근무하다가 최근에 명예 퇴직을 했는데, 요즈음 그 병원도 사정이 나빠 수술을 받지 않아야 할 환자들도 모두 수술을 받도록 강권한다고 한다.
H 박사한테 이런 말을 듣고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 수술받기로 예정된 전날 저녁에 아내와 함께 병원으로 찾아가서, 연락을 받고 기다리는 동생들에게 어머니 연세가 74세인데 몇시간씩 걸리는 힘든 수술을 받는 것은 오히려 위험해질 수도 있다고 설득하여 어머니를 그냥 퇴원시키고, 다음 날 대전으로 모시고 왔다.
그리고 그 당시 나주에 있는 동신대에서 한의학과 4학년에 다니고 있던 처조카에게 전화로 전후 사정을 이야기하고 도움이 필요하다고 하니, 마침 다음 날이 일요일이어서 바로 우리 집으로 찾아 온다. 그리고 진맥을 하고 홍체와 혀를 들여다 보고 하더니, 당분간은 뜸을 떠야 한다며, 가지고 온 뜸 도구를 꺼내고 나에게 뜸 뜨는 방법을 자세하게 설명해 준다.
어머니의 배꼽과 그 위와 아래로 2치 떨어져 있는 3군데 혈자리에 콩비지로 만든 원반형 받침틀을 3중으로 놓고, 그 위에 커다란 원뿔 모양의 쑥뜸을 올려 놓는 방식의 전통 왕뜸(사진 참조)을 하루에 2~3회 하여 드리고,
이런저런 책을 뒤져서 어머니 병에 도움이 되는 치료법을 찾아 닥치는대로 이것저것 해드렸고, 그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나팔꽃의 입, 줄기, 씨를 통채로 말린 것을 끓여 그 증기를 환부에 쪼이는 훈증료법인데, 모든 재료와 도구를 준비하느라 많은 시간과 수고가 들었었다.
그로부터 한달쯤 지난 어느 날 총무과 직원이 찾아와 서류를 한 장 주면서, 회사 방침으로 20년 이상 근속한 4분이 이번에 명예 퇴직 대상이 되었다고 한다.
일찍 퇴근하고 집에 돌아와서 어머니에게 뜸과 훈증을 해드리고, 저녁 식사를 마친 후 회사에 일이 있어 늦게 온다고 하고 다시 사무실로 가서 시간을 보내다가, 아주 늦은 시간에 연구소 구내에 있는 골프 연습장으로 가니, 불도 모두 꺼져 있고, 주변이 아주 고요하다.
불을 전혀 켜지 않고, 5번 아이언 하나만 달랑 들고 연습대 앞에 있는 잔디밭으로 내려 가니, 여기저기 널려 있는 골프공의 윤곽이 초승 달빛에 어렴푸시 보인다.
나는 그 공들을 툭툭 쳐서 연습장 중앙부에 만들어 놓은 긴 도랑으로 쳐 넣었다.
이렇게 한두 시간을 치고 있자, 하루 종일 온 몸과 맘을 불태우던 화도 조금씩 가라앉고, 오늘 벌어진 일의 상황과 원인을 조금씩~ 조금씩~ 되새길 수가 있었다.
다시 두어 시간이 지나, 잔디에 있던 공들이 거의 모두 도랑으로 들어 갈 즈음에 이 모든 사태가 15년전 초봄 캐나다에 파견 가서 있을 때에 내 옆자리 책상 위에 놓여 있었던 문제(?)의 문서철을 내가 몰래 훔쳐 와서 생긴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다음 날 아니 어제 밤을 꼬박 세웠으니 그 날 회사에 출근하여 전 날 받은 서류의 빈칸을 모두 채우고 사인을 하여 회사 총무과에 제출하였다.
그리고 보름 후인 1998년 12월 12일에 퇴직을 하고, 또 보름쯤 지난 크리스마스 다음 날에 어머니가 자신의 방광과 자궁 부위가 모두 깨끗하게 되고, 유방만 그대로인데, 거동에는 별로 불편함이 없으니 서울에 있는 여동생 집으로 가신다고 하여 모셔다 드리고, 나는 일주일에 한번씩 찾아가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