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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자신
철없이 살아가던 어떤 사람이 인생의 어느 순간 지적 망치의 공격을 받는 경우가 있다. 평생 철없이 살다가 인생을 마치는 사람들도 많지만. 그 공격이란 내부에 찾아오는 심오한 의문이다. “나는 무엇이며 누구인가?” 이 세상에서 자기가 무엇인가를 궁구하는 존재는 인간 밖에 없다. 물질적인 인생관을 가진 사람이라면 지금 자신이 음식을 먹고 옷을 입고 잠을 자고 돈을 벌고 목숨을 이어감에 있어 굳이 자기가 무엇인지를 따져야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기껏 그들이 도달하는 대답은 “나는 이 몸뚱어리야”라는 바위덩어리 같은 것일 것이다. 그런 걸 안다고 해서 더 잘 먹거나 더 잘 살 것 같지도 않은데 왜 그런 질문이 생기는 것일까?잘 살건 못 살건 관계없다. 인간에겐 잘 살고 못 살고보다 훨씬 근원적인 문제가 바탕에 깔려있는 것이다. 개나 돼지라면 이런 의혹에 휘말리는 일은 없겠지만 인간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이걸 모르면 밥을 못 먹고 옷을 못 입고 잠을 못 자고 돈을 못 버는 것보다 훨씬 심각한 정신적 결손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대로 우리의 존재와 삶을 좀먹는 존재의 병이 된다. 그 병의 이름은 ‘무의미’다. 왜일까? 인간이기 때문이다. 숲에 서 있는 나무는 자기가 무엇인지 모르고 우주도 자기 존재의 의미를 모른다. 우주 안에 잠재하는 정적은 어두운 침묵이요, 이 어두운 침묵에 지성의 빛을 투사하는 존재가 인간이다. 그리고 그 지성의 빛이란 하나님과의 관계로부터 온다. 인간은 하나님 지식과 더불어 자기 지식을 가져야 한다. 그런데 자기 지식은 하나님 없이는 결코 가질 수 없는 지식이다. “그냥 살면 되지 자기 정체성이나 인생의 의미 같은 걸 왜 알아야 하는가? 또 그런 게 있기나 한 것인가?”라고 말할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동물이라면 그냥 살고 또 그렇게 살 수밖에 없지만 사람은 다르다. 여기 긴 끈에 커다란 빵 한 덩어리가 묶여있다 하자. 그 빵 앞에서 배고픈 곰과 배고픈 사람이 취하는 행동은 다르다. 곰은 아무 생각 없이 그 빵을 덥석 집어먹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은 그게 무슨 빵인지, 그 빵이 왜 거기 놓여있는지, 누가 무슨 목적으로 기다란 끈에 빵을 묶어놓았는지, 이 끈의 끝은 어디인지를 추적할 것이다. 빵에 관해서 그렇다면 자기 존재의 기원과 목적에 대해선 어떠하겠는가? 정체성이란 관계 속에서의 자기 신분 또는 위치다. 건강한 지성의 소유자라면 이 우주라는 무대에 서있는 자기의 실체와 기원과 역할과 목적과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 탐구하지 않고는 배기지 못한다. 집이 기반 위에 서있듯이 인간은 이런 지식의 기반 위에서 자기를 이해하고 자기가 살아야 할 삶을 경영하는 존재인 것이다.
로고데라피란 말이 있다. 로고스(logos-말씀, 이성, 뜻, 의미)라는 단어와 데라피(theraphy-치료)라는 단어의 합성어이다. 이것은 인간 문제의 근본은 자기 삶의 의미를 모른다는 것에 있으니, 인간의 실존적 의미를 발견하게 함으로써 그 사람의 병을 치료한다는 정신요법이다. 이는 나치수용소에서 아내와 식구를 잃고 죽음을 기다리다가 독일이 패망함으로 구사일생한 빅터 프랭클이 창시한 것이다. 그는 그의 ‘죽음의 수용소에서’라는 저서에서, 나치 수용소에서조차 인간에게 중요한 것은 의미라고 했다. “인간에게 있어 가장 무서운 일은 지금 자신이 겪고 있는 일이 무의미하다는 사실이다.” 빅터 프랭클은 의미 찾기를 인간 생활에서 가장 중요시했다. 아우슈비츠, 비르케나우 트레블린카, 마이다네크 등 나치가 설치한 섬멸수용소에서 극한 두려움과 고통으로 죽어가는 포로들이 더 두려워했던 것은 그들이 겪는 그런 일들의 의미를 모른다는 것이다. 만일 자기들이 겪는 일이 조국의 평화를 위한 밑거름이라든지, 사랑하는 가족을 지키는 길이라든지, 가족과의 만남을 위한 준비라든지, 정신적 성장의 밑거름이 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면 고통을 견뎌낼 명분이 있지만, 그렇지 않고 무의미의 의식 속에서 그들이 당하는 두려움과 고통은 배가된다는 것. 전쟁 후 빅터 프랭클은 많은 사람들의 정신 질환이 존재의 의미에 대한 무지에 그 원인이 있다는 것을 주장하며 나름대로 치유의 길에 나섰다. 생활고, 질병, 고난, 손해, 상실, 재난, 불행 등이 사람들을 공략해도 삶의 의미를 안다면 이런 것들이 그 사람을 근본적으로 파괴시킬 수는 없다는 주장이다. 사람에겐 권력 의지나 쾌락 의지도 있지만, 사람의 가장 심오한 의지는 의미를 찾고자 하는 의지라고 그는 주장한다. 프랑스에서 있었던 여론 조사를 예증으로 든다. 그 결과 89%의 사람들이 삶을 위하여 “뭔가 뜻있는 것”이 필요하다는 점을 인정했으며, 61%의 사람들은 그들의 삶에 무엇인가 또는 누군가 있었고 그것을 위해서는 죽을 각오까지 되어 있다고 인정했다. 빅터 프랭클은 또 빈에 있는 그의 진료소에서 환자들과 의료진들을 상대로 같은 여론조사를 실시했는데 그 결과는 프랑스에서 수천 명을 상대로 한 실시와 2% 정도의 차이만 나는 동일한 것이었다. 그는 경고한다. “우리는 모름지기 자기 자신들부터 알아야 한다. 우리가 삶에 걸고 있는 기대는 문제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삶이 우리에게 걸고 있는 기대인 것이다.”라고. 나는 이 로고데라피가 인간의 모든 문제를 유아기의 성적 억눌림의 표출로 본 프로이트의 발상보다도 훨씬 더 건전하고 성숙한 것이라고 본다.
그런데 나는 자기 실체, 자기 정체성을 아는데 왜 하나님 신앙이 필요하다는 논리를 펴는 것일까? 광야 한복판에 컵 하나가 떨어져 있다. 이 컵이 생각하기 시작했다. “도대체 나는 무엇일까? 왜 나는 여기 있는 것일까? 아, 주변에 개미가 많은 걸 보니까 개미집인가 보다. 아냐, 그런 게 아냐. 무엇일까? 아, 새나 다람쥐 등이 지나가다가 목이 마르면 마시라고 하늘의 비를 담아두는 용기인가 보다. 아냐, 그런 것도 아닌 것 같아. 뭐지? 아, 알았다. 토끼나 여우가 지나가다가 심심하면 땅땅 때려보는 장난감인가 보다. 아닌데... 이것도 아닌 것 같아. 도무지 알 수가 없네.” 백 년 동안 궁리해보라. 컵은 자기가 무엇인지 알 수 없을 것이다. 알 수 있는 길이 없을까? 반드시 인간에게 와야 한다. 그 컵을 만든 인간만이 왜 그 컵을 만들었는지, 그 컵이 무엇을 위한 용도인지 컵에게 말해줄 수 있는 것이다. 컵이 인간에게 와서 정중하게 자기 정체성을 묻는다면 인간은 대답할 것이다. “너는 내가 물을 마시거나 차나 커피 등을 담기 위해 하얀 진흙으로 만든 사기그릇이란다.” 라고. 간혹 책이나 현수막에서 자기를 발견하라, 자기 내면으로 침잠하여 자기가 무엇인지 찾으라는 문구를 대할 때가 있다. 어떻게 알라는 말일까? 자연과학과 철학과 문학과 사회학과 생물학과 인문학을 총동원해보라. 수천 년 동안 인간을 연구하고 수만 년 동안 자기를 궁구해도 인간은 자기 정체를 알 수 없을 것이다. 왜 그럴까? 광야에 떨어진 컵이 주인 없이 자기를 이해하려는 시도니까. 컵들이 모여서 서로 자기가 무엇인지 묻는 것이나 그 물음에 답하는 것이나 모두 우스꽝스런 행동이다. 자기 정체성을 알기 위해선 컵은 반드시 컵을 만든 사람 앞에 와야 하고, 인간은 반드시 인간을 만드신 하나님 앞에 와야 한다. 컵에 대한 정의는 그것을 만든 인간만이 할 수 있듯이, 인간에 대한 정의는 창조주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이 자기 자신을 알기 위해서는 반드시 창조주 하나님을 믿어야 하고, 창조주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어야 한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잠언9:10). 성경은 하나님은 왜 자신을 만드셨으며, 하나님과 자신은 무슨 관계이며, 그래서 자신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하는 자기 정체성을 말해준다.
사람은 무엇일까? 나는 무엇이며 누구일까? 사람을 볼 때 경이감 같은 게 든 적은 없는가? 인간의 독특성은 첫째 인간의 지성이다. 대체로 인간의 기원이나 인간의 역사를 논하는 인물들은, 고대의 사람들은 당장 먹을 것을 마련하기 위해 원시적인 방법으로 수렵이나 사냥만을 하고, 사고력이나 지적 능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미개한 부류의 인간들로 묘사한다. 자기들이 본 것처럼. 거짓말이다. 인간이라면 원시사회건 현대사회건 단순히 먹고 사는 문제에만 집착하지 않는다. 참새는 오천 년 전이나 후에도 참새요, 개는 오천 년 전이나 후에도 개다.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는 한 인간은 오천 년 전이나 후나 지적 문제를 궁구하며 이 문제 해결 없이는 인간적 삶의 영위가 불가능한 것이다. 이 지적 기능을 감당하는 것이 능력이다. 이 사고의 능력으로 인간은 자기를 비롯하여 자기를 둘러싼 세계와의 관계를 헤아리고 이해한다. 그 중에 중요한 헤아림이 자기 헤아림 곧 자기 정체성에 대한 이해인 것이다. 동물들은 사족 보행을 한다. 하지만 인간은 직립 보행을 한다. 사람은 자기가 창조하지 않은 지성과 감정과 의지를 가지고 있으며, 그의 지성으로 자기의 기원과 역할과 목적 등 정체성을 궁구하는 것이다. 둘째 인간 본유의 특이하고 영광스런 특징은 영성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간으로 태어난 자 안에는 신에 대한 지울 수 없는 본능이 있는데, 그것은 어떤 피조물에도 나타나지 않는 성향이다. 인간에겐 의식주의 기초 문제나, 정신적 작용까지 넘어서 창조주 하나님을 추구하고 그분과의 관계를 모색하며 그분을 예배하려는 성향이 있는 것이다. 인간 역사를 돌아보라. 어느 민족 어느 나라 어느 시대에도 하나님을 추구하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흔적이 남아있다는 사실이 그 증거다. 하나님은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을 닮도록 만드셨고 이 형상에 하나님과 교통하고 예배하려는 본능과 의지가 소재하는 것이다. 비록 인간이 타락하여 우상숭배로 이탈 현상을 보이기는 하지만 그것조차 인간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불가피한 본능의 소유자라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셋째 인간의 개성이다. 모든 사람에게 각자의 얼굴이 있는 것처럼 각자의 개성이 있다. 어떤 특징을 조금씩 공유하거나 비슷한 사람들은 있어도 완전히 똑같은 사람들은 이 세상에 없다. 땅 위에 내리는 수 조개의 눈송이들 하나하나가 모두 다른 모양을 하고 있는 것처럼 모든 사람은 각자 유일하며 특징을 가지고 있다. 어린애들을 관찰하다보면 그 아이들이 추구하는 방향이 다 다르다는 것을 발견한다. 어떤 아이들은 인형이나 장난감, 어떤 아이들은 자연물, 어떤 아이들은 책 종류, 또 어떤 아이들은 인형이나 장난감엔 관심 없이 유별나게 전기 제품이나 기계류에 관심을 보인다. 또 다른 아이들은 이런 취향이 조금씩 섞여있다. 모차르트는 뉴턴이 될 수 없고 뉴턴은 렘브란트가 될 수 없다. 음악의 천재 모차르트에겐 뉴턴이 지닌 과학적 소질이 없고, 과학의 천재 뉴턴에겐 렘브란트가 지닌 화술 재능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다양한 재능이 인간세계를 구성한다.
하나님은 왜 인간을 만드셨을까?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만들어진 존재” 라는 말 속에 그 이유가 내재하며, 성경 도처에 그에 대한 설명이 있다. 그러나 인간의 범죄로 인간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은 깨지고 흐려졌다. 그것은 마치 갈라진 도장을 찍었을 때 그 사람의 이름이 깨져서 나오고, 깨진 거울에 상이 깨져 보이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깨진 도장도 도장의 흔적을 지니고 있으며 깨진 거울도 거울 조각을 지니고 있듯이 비록 깨졌더라도 인간 안에는 하나님의 형상이 남아있다. 즉 인간은 아무리 타락하고 변질되어도 인간일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그 인간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변화될 때 인간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은 소생하고 변화된다. 그렇게 변화된 인간의 정체성을 성경은 몇 가지 개념을 들어 정의하는데, ‘하나님의 자녀(요1:12)’ ‘그리스도의 신부(고후11:2, 계21:9)’ ‘하나님의 성전(고전3:16)’이 그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생명을 받아 하나님을 닮고 알고 사랑을 나누는 존재로서의 존재를 의미한다. ‘그리스도의 신부’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써 구속받아 영원히 그의 소유가 되어 그와 사랑의 교제를 나누는 존재를. ‘하나님의 성전’은 하나님의 성령을 통해 하나님이 그 안에 임재하시고 하나님의 것으로 구별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인간 이상의 대상을 향하여 살아가는 것이다.” 라는 빅터 프랭클의 말은 맞는 말이다. 대표적으로 이 세 가지는 하나님으로부터 그 존엄성이 부여된 인간의 개념이며, 이 정체성을 가지고 인간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가는 것이다. 인간에겐 하나님의 파트너라는 존귀한 의미가 있다. 원래 없었던 자가, 아무 것도 아닌 자가 하나님의 파트너가 되어 사랑과 섬김을 실현하는 위치에 서있는 영광스런 존재라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인간의 정체성이다. 이것을 모르거나 무시한 상태에서의 모든 인간 이해는 진실이 아니다. 그리고 이것을 모르는 상태에서의 인간의 삶은 불행이다. 어느 순간 우리가 눈을 떠서 사면을 살펴보니 우리가 이 무한한 공간의 한복판에 서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렇게 주변을 둘러보면서 이 공간이 무엇인지, 자기는 무엇인지, 왜 여기에 있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목적이 무엇인지를 알 수 없는 캄캄함 속에 있었다. 그렇다면 컵이 컵을 만든 주인 앞에 와서 존재의 의미를 묻듯이, 우리는 우주와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 모든 것을 온전히 이해하는 순간 우리는 완전히 어둠을 벗어난 빛 속에서 하나님을 찬양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지상에 보내진 목적/이호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