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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부사 양사언 |
정하언 |
박내정 |
유한준 | |
삼척부사 재임 기간 |
1571. 10. 15 정두형 조문 방문 |
1750. 11 1753. 11 |
1710. 2 1710. 5 |
1796. 7 1798. 12 |
남은 석각자의 깊이 |
1-2cm |
3-4cm |
7-8cm |
만약 박한설 교수의 주장대로라면 양사언 박내정 유한준 셋이 같은 깊이로 석각하기를 사전 약속했거나 당시 무릉반석에 상주하던 석수들의 석각규범이 그러했다는 근거가 있어야만 가능한 추리다. 또한 같은 시대에 거의 같은 장소에 같은 깊이로 석각을 했다할지라도 암반각서의 위치에 따라 마모가 다르다 곧 관광객들의 쉼 없는 발걸음, 바람과 햇볕의 강약, 흐르는 물에 의한 마모의 속도가 다르다는 것은 상식이다. 동시에 박내정 부사와 유한준 부사의 암반각서는 옥호자의 것과 달리 유별나게 깊고 크게 새긴 것이라는 데 주목해야 할 것이다. 박한설 교수는 이처럼 전제(前提)의 오류를 범했다.
옥호거사를 양사언이라고 최초로 언급한 기록은 1955년 김정경이 편찬한 『삼척향토지』라고 한다. 이 기록은 허구를 사실로 꾸민 오류다.
김정경은 단기 3937년(1604, 선조 37) 경 양사언이 강릉부사 재직시 무릉계에 와 새겼다 하면서, 아울러 그 필력(筆力)의 정묘(精妙)와 심혈을 기울인 신기한 필정(筆精)에 산천이 감응되어 삼일간 산천이 울리어 진동하였다는 이야기가 민간에 전하고 있다고 하였다.8
양사언 부사는 강릉 부사를 두 차례 역임하지도 않았지만, 1604년은 갑진년이지 신미년이 아니다. 거론할 일고의 여지도 없다. 또 1604년은 양봉래가 이 세상을 떠난 지 20년째 되는 해다. 허구가 또 다른 허구를 확대 재생산한 꼴이다.
옥호거사가 썼다고 추정되는 신미년은 1451년·1511년·1571년·1631년·1691년·1751년·1811년·1871년이 해당된다. 삼척부사 김효원의 『두타산일기』(1577년)와 삼척부사 허목의 『두타산기』(1661년)와 같은 무릉계곡 현장 답사기에서 이른바 양사언이 1571년에 썼다는 옥호거사의 암반각서에 대해 약속이나 한 듯이 전혀 언급한 내용이 없다. 이는 옥호거사의 암반각자가 새겨져 있지 않았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다. 만약 이게 사실이라면 신미년인 1451·1511·1571년은 해당이 되지 않는다. 먼저 『두타산일기』와 『두타산기』에서 무릉반석 부분을 살펴보자.
소나무 사이를 걸어 나와 시내를 따라 내려가니 하나의 흰 돌이 물속에 펼쳐져 있었는데 대략 천여 명은 앉을 수 있었다. 붓을 들어 글씨를 쓰려고 하였으나 미끄러워 머물러 있을 수가 없어 언덕을 잡고는 비스듬히 돌아서 한 돌 구릉을 찾았는데, 그 왼쪽으로는 폭포가 떨어지고 있었고 오른쪽은 깎아지른 듯한 바위에 기대고 있었으며 붉은 꽃 한 떨기와 푸른 소나무 한 그루가 앞뒤로 서로 마주보고 있어 마치 옹호하는 것 같았다.9
바위 절벽 아래는 물이 맑고 돌은 흰색인데 그 반석(盤石)을 석장(石場)이라고 하였다. 암석으로 된 골짜기가 넓게 탁 트였고 물은 암석 위로 흐르는데 맑고 얕아서 건너갈 수가 있었으며, 저녁이 되자 소나무 그림자가 물위에 길게 드리워졌다.10
석장의 가장 중심에 자리한 옥호거사의 암반각석 오른쪽 아래에 유한준 부사가 1797년 12월 ‘龍湫(용추)’에도 자신의 이름을 새겼기 때문에 무릉반석에 새긴 이름도 같은 시기이거나 재임 중에 새긴 것으로 보면 옥호거사가 문제의 암반각석을 한 시기는 유한준 부사 재임(1796. 7-1798. 12) 이전이 된다. 그렇다면 1811·1871년은 해당 신미년에서 제외되어야 한다. 이제 남은 것이 1631년과 1691년 그리고 1751년이 된다. 1997년 판 『삼척시지/편년사』의 1631년 2월에는 창석(蒼石)이라는 호를 쓰는 이준(李埈)부사, 1691년에는 박흥문(朴興文) 부사, 1751년에는 정하언(鄭夏彦) 부사가 재임 중이다. 그 중에서 정하언 부사는 ‘옥호(玉壺)’라는 호를 사용한 분이다. 그렇다면 옥호거사는 정하언 부사로 자연스럽게 귀결되는 것이다.
정조 때 영의정에 오른 번암 채제공(蔡濟恭, 1720-1799)이 1751년 7월에 삼척에 와서 1년 간 귀양살이를 할 때 절친하게 지내던 정하언 부사를 ‘옥호(玉壺)’ 또는 ‘옥호공(玉壺公)’으로 호칭하는 한시가 전한다. 예컨대 ‘重訪武陵吟奉玉壺’, ‘余之自武陵溪轉訪指祖菴也書玉壺公曰’, ‘自菴下纔脫雲梯有僧急來言玉壺公’, ‘玉壺公以公赴旌善歸路約會於虎溪故云’, ‘玉壺公至共坐武陵石上雲上人亦與焉’이라는 한시에 덧붙인 시구를 보아도 알 수 있다.11
삼척부사 정하언은 용추폭포 옆에다 몇 칸의 정자를 지으려고 했다가 이루지 못했다는 ‘玉壺公於湫傍嘗經營亭數間未果’12라는 내용도 음미할만한 대목이다. 왜냐면 무릉반석의 암반각자로 무릉계곡의 아름다움을 찬양하고, 용추폭포 옆에는 정자를 만들어 이른바 화룡점정(畵龍點睛)을 하려던 의중을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 양사언의 호는 봉래(蓬萊)· 완구(完邱)· 창해(滄海)· 해객(海客) 등의 호를 사용했어도 ‘옥호(玉壺)’를 호로 한 번도 사용한 적이 없다고 박한설 교수와 배재홍 교수의 견해가 이구동성으로 언급하였다.13
다만 한 가지 걸림돌이 되어 있는 것이 「玉壺居士」라는 號이다. 왜냐하면 楊士彦의 號로는 蓬萊 完邱 滄海 海客 등만 傳할 뿐 「玉壺」라는 號를 썼다는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14
이같이 박한설 교수는 양사언이 옥호라는 호를 쓴 기록이 없다하면서도 정하언이 옥호라는 호를 썼지만 암반각서의 마모 결과를 가지고 ‘옥호’라는 호에 매달려선 아니 된다는 일관성이 없는 지적을 하면서 옥호자 정하언을 애써 외면하는 모순된 추정을 하고 있다.
또 『동해의 뿌리』15 와 『동해시 역사와 문화유적』16에는 옥호자의 암반각서 하방서가 멸실된 글자 없이 일곱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도 도대체 무슨 생각인지 ‘玉壺居士書 辛未仲春’으로 아홉 글자라 한다. 그러나 『동해시 무릉계의 문화유적』17과 『두타산의 역사』18 그리고 『문헌·금석문 자료로 본 두타산 무릉계』 등에는 ‘玉壺居士書 辛未’로 제대로 기록했다. 도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관련 문헌 |
내 용 |
동해시, 『동해의 뿌리』, (1982), 138쪽. |
玉壺居士書 辛未仲春 |
동해교육청, 『해 뜨는 고장 동해』, (동해교육청, 1995), 30쪽. |
玉壺居士書 辛未仲春 |
김형섭, 「동해시의 자연환경과 천연기념물」, 『동해시 역사와 문화유적』, (관동대박물관·강원도·동해시, 1996), 531쪽. |
玉壺居士書 辛未仲春 |
박한설, 「동해시 무릉계의 문화유적」, 『동해문화논총』, (동해문화연구회, 1996), 54쪽. |
玉壺居士書辛未 |
장정룡, 『동해시 삼화동의 기층문화』, (동해문화원, 1998), 97쪽. |
玉壺居士書辛未 |
배재홍, 『문헌·금석문 자료로 본 두타산 무릉계』, (동해문화원, 2005), 131쪽 |
玉壺居士書辛未 |
손재영, 『두타산과 무릉계곡의 문화적 가치와 관광화 방안』, (동해문화원, 2005), 30쪽. |
玉壺居士書辛未 |
동해문화원, 『두타산의 역사』, (2009), 235쪽. |
玉壺居士書辛未 |
동해시, 『동해시 30년사』, (동해시, 2010), 349쪽. |
玉壺居士 辛未 |
다음은 동해시청 홈페이지의 관광안내 자료 중 무릉계곡 관련 부분이다.
사진14 동해시청 홈페이지 관광 안내자료, ‘仲春’이 하방서 되었다고 안내를 하고 있다. http://www.dhtour.go.kr/korean/tour/07.htm
일관성이 없는 와중에 동해시에서 제작한 안내 표지판에는 ‘玉壺居士書 辛未’를 ‘玉壺居士 辛未春’으로 엉터리로 표기해놓았다.
사진15 모사본 앞 안내판(무릉반석, 사진 김수문)
이 부분도 결코 소홀히 다룰 문제가 아니다. 만약 ‘仲春’이나 ‘春’이라는 글귀가 있었다면 글쓴이가 ‘양사언이 아니다’라는 데 재론의 여지가 없고, 만약 이런 글귀가 없었다면 엉터리 안내를 한 것이다. ‘중춘(仲春)’은 음력 2월이고 양사언은 음력 4월에 강릉부사로 부임 직후 찾아왔다면 ‘만춘(晩春)’이라야 2개월의 시차가 극복된다. 또 정두형 부사가 별세한 날은 음력 10월 15일이기 때문에 ‘중춘’이 아니고 ‘만추(晩秋)’라야 시차가 없다.
그 楊蓬萊가 가까운 江陵의 府使로 왔었는데 그것도 바로 辛未年인 1571년이었고 또 그가 바로 前任府使인 鄭斗亨의 喪을 弔問하기 위해 武陵溪에 인접한 飛川洞을 다녀갔다는 기록이 있다.19
그러나 봉래 양사언 부사의 삼척 비천마을 방문 시기는 신미년 10월 15일이다. 양사언이 찬한 정두형 부사의 묘비명을 보면 알 수 있다.
사진16 ‘武陵仙源 中臺泉石 頭陀洞天 玉壺居士書 辛未’(무릉반석, 사진 이효웅)
사진17 모사본. 하방서 내용은 모사를 해 놓지도 않았다.(무릉계 금란정 옆, 사진 이효웅)
사진18 삼척부사 ‘吏隱 鄭夏彦 美仲樹杜株桂檀’의 암벽글자. 우상단에 삼척으로 유배된 채제공의 이름도 보인다(죽서루, 사진 이효웅)
사진18-19 옥호자 정하언 부사의 친필 서예작품. 아마추어가 보아도 무릉반석의 ‘武陵仙源 中臺泉石 頭陀洞天 玉壺居士書 辛未’와 붓 놀림이 닮았다(연일정씨 판결사공파 중앙회 정하언 부사 9세손 정태식 교수 제공).
사진22 강릉부사 양사언이 신미년 10월 15(음력)에 비천마을을 방문해서 찬한 정두형의 묘비명. 세월의 흐름에 따라 1차 비문은 마모되어 글씨를 전혀 알아볼 수 없고 2차 비문도 원형을 잃고 있었다. 사진은 정두형 부사의 후손들이 3차로 복제한 것을 촬영한 것으로 봉래의 필체는 아닌 것 같다(동해시 비천동, 사진 이효웅)
효성이 지극한 정두형 부사가 부친의 간병을 위해 강릉부사직을 사임한 후 귀향하여 부친 병간호를 하면서 지내다 이듬해인 신미년에 부친상을 당했다.(歸鄕翌年辛未) 그런데 정두형 부사도 부친이 돌아가신 해 10월 15일에 별세하였다는 내용(哀毁致疾是年十月十五日)이 확인된다.
반면에 죽서루 암벽에 새겨져 있는 ‘吏隱 鄭夏彦’ 다섯 글자의 주인공은 삼척부사 정하언이다. 하방서한 ‘미중수두주계단(美仲樹杜株桂檀)’라는 글귀 중에서 ‘미중(美仲)’은 정하언의 자다. ‘이은(吏隱)’이란 ‘비록 낮은 벼슬은 하고 있으나 마음은 늘 귀거래를 원한다.’는 뜻이니 정하언 부사의 겸손과 도가(道家)적 성향도 짐작할 수도 있다. 또 ‘수두주계단(樹杜株桂檀)’이란 옛날 주(周)나라 소목공(召穆公) 호(虎)가 남순(南巡)할 때 팥배나무 아래에서 백성들의 민원(民願) 곧 아픈 곳을 잘 어루만져 주었더니, 그가 세상을 떠난 다음에 이곳 백성들이 소목공에게 햇볕을 가리고 시원한 그늘을 제공했던 붉은 팥배나무를 베지 않고 감당편(甘棠篇)이라는 추모시까지 지어 그의 덕을 기렸다는 이야기처럼, 계수나무 기둥을 박아 만든 단에 붉은 팥배나무를 심고 이 나무아래에서 삼척부민들의 어려움을 해결하는 어진 수령이 되겠다는 각오를 밝힌 글귀다.
정리를 하면, 정하언 부사는 당시 삼척도호부내 3대 절경지의 하나인 죽서루에서는 ‘수두주계단(樹杜株桂檀)’을 새겨 삼척부사의 정치 포부를 새겼고, 무릉반석에는 ‘武陵仙源 中臺泉石 頭陀洞天’을 새겨 무릉계곡의 아름다움을 극찬했으며, 용추에는 작은 정자를 세워 이곳을 찾는 이들과 더불어 풍류를 즐기려했다.
[출처] 삼척보호부내 암각자 연구|작성자 무일빈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