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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代) |
왕명 |
재위기간 |
약 사 |
비고 |
1 |
예왕(穢王) 용왕(龍王) |
B.C.124-B.C.119 |
재위6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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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
3 |
호왕(虎王) |
B.C.119-B.C.118 |
재위2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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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
자성여주(紫聖女主) |
B.C.118-B.C.99 |
재위20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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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
봉왕(鳳王) |
B.C.99-B.C.93 |
재위7년, 자성여주의 신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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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
월왕(月王) |
B.C.93-B.C.83 |
재위11년, 봉와의 아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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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
벽왕(碧王) |
B.C.83-B.C.65 |
재위19년, 월왕의 아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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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
자제(紫帝) |
B.C.65-B.C.14 |
재위52년, 벽왕의 아들, 사방을 정벌하고 동서에 위엄을 떨쳤다고 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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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
취제(翠帝) |
B.C.14-A.D.3 |
재위17년, 자제의 아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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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
조문(召文) |
A.D.3-A.D.10 |
재위8년, 취제의 아들 탈탈(脫脫)의 계부(繼夫)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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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
경덕(景德) |
A.D.10-A.D.74 |
재위65년, 산운(山雲, 자제의 서자)과 탈탈(脫脫, 취제의 비)의 소생, 문물(文物)이 크게 일으킴. 후에 신라에서 사당을 짓고 모셨다고 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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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
문무왕(文武王,혹은 暖帝라고 칭함) |
A.D.74-A.D.93 |
재위20년, 경덕의 아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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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
문단(文丹) |
A.D.93 |
재위2월, 문무왕의 아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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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
목단(牧丹) |
A.D.93-A.D.107 |
재위15년, 문단의 동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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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
보문(宝文) |
A.D.107-A.D.131 |
재위25년, 목단의 아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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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
경문(景文) |
A.D.131-A.D.160.9 |
재위30년,보문의 아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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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
비패(非貝) |
A.D.160.9-A.D.163.3 |
재위3년, 숭덕에게 국정을 위임하고, 재위3년에 폐위, 신라사초의 재위기와 차이가 있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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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
숭덕(崇德) |
A.D.163.3- A.D.169.겨울 |
재위7년, 180년 12월 사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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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
윤명(允明) |
A.D.180.12- A.D.184.10 |
재위3년, 신라사초의 재위 기간과 차이가 있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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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
호묘(好妙) |
A.D.184.10- A.D.196.8 |
윤명의 처, 재위13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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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
묘덕(妙德) |
A.D.196.8- A.D.228.1 |
윤명과 호묘의 아들, 재위33년, 운모공주의 부친, 조문국이 8국으로 나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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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
묘초(妙楚) |
A.D.228.1-A.D.245.2 |
조문이 8국으로 나뉨, 묘초가 신라에 나라를 바치려고 하자 신라왕이 딸을 주며 돌려보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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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조문국을 찬한 시문
1) 우천 박장춘(愚泉 朴長春)
공의 본관은 함양 자는 원백(元伯) 호는 우천으로 박성양의 후예로 진사시에 2등으로 급제하였으나 벼슬길에 나아가지 아니하고 부모님께 효도와 후진 양성 지역봉사로 평생을 보냈다. 55세에 자비로 사창을 세워 주민들의 불편을 해소하여 주었고 그리하여 창마을 이란 유래가 전해진다. 70세에 임진왜란 때 장남을 전투에 보내고 난민을 구휼하여 조정에서 정려되었다 지금까지 경덕왕릉 조문국에 대한 시가 3수 전하는데 의성인으로 500년전 시를 남긴 분은 오직 우천 선생뿐이다 시대적으로 제일 먼저 시를 남겨 거슬러 올라가는 년대를 천백년으로 조문국 존력 연대를 추정하게 하여준다. 우천실기에서
과조문국유감(過召文國有感)
천백년 긴 세월 한순간 지나가고
옛조문자취 푸른 산만 남아있네
진흙에 묻혀버린 왕실우물 황소가 내닫고
잡초에 덮힌 금성터 비위 머리카락 날리며
첩첩으로 쌓인 능원 모두다 퇴락되어
우뚝히 솟은 석탑만이 굳굳한데
흥망성쇠 만물 이치 하염없이 무상하여
나홀로 슬퍼하며 오락 가락 하는구나
2) 미수(眉受) 허목(許穆)
본관은 양천 호는 미수(1595년 선조28~1682년숙종8)로 퇴계 선생의 학통을 이어 근기학파(近畿學派)의 우두머리로 후학으로 성호 이익 다산 정약용으로 이어졌다. 특히 그림 글씨 문장 모두 능하였고 전서에 뛰어나 동방제일인자라는 찬사를 받았다. 63세가 넘어서 관직에 나가 우의정을 지냈으나 젊은 시절에는 전국을 주유천하했다 미수는 42세에 종형 허후가 의성 현령으로 재임하고 있어 초대를 받고 의성에 와서 조문국의 옛 터전을 둘러보고 시 한수를 남겼다.
과조문국유감(過召文遺感)
천년의 조문국 빈터만 처량하고
번화한 옛 자취 다시보기 어려워라
거친 풀 우거지고 들꽃이 향기로워
첩첩히 쌓아놓은 옛 무덤만 보이니
씻은 듯이 헤진 백양나무 흔적 없네
밭 갈던 농부 두덤에서 땅 갈다가
경덕왕능 이아기 하여주네
하늘과 땅은 한결같이 유유한데
옛 부터 흥망성쇠 그 얼마나 거듭했나
사물이치 전회만 스스로 상하네
옛일들 한 많음을 새삼스레 느끼면서
나 홀로 외로서니 한숨만이 길어지네
3) 오극겸의 꿈 이야기
여지도서(輿地圖書~1760년발간) 고적조(古蹟條)에 경덕왕분(景德王墳)은 조문마을의 북쪽에 있다는 기록이 있다. 옛 무덤이 첩첩히 쌓여 얼마인지 알 수 없고 그 중 가장 큰 분을 마을 사람이 남몰래 몇 번이나 그 속을 파헤쳐보려 하였다. 이웃에 사는 오극겸이 이것을 보고 놀라 꾸짖고 다시 수축을 하였다. 그날 밤 꿈에 의복 치장이 매우 이상한 한분이 시 한 수를 재삼 정연하게 일러 주시는데 그 시에,
聞韶往事與誰論(문소왕사여수론)
千載有存景德墳(천재유존경덕분)
飛鳳曲調人不見(비봉곡조인불견)
召文琴去畓難聞(조문금거답난문)
문소군 마을 누구와 의논하랴
천년이 지난 오늘 경덕분만 남았도다
비봉곡조 없어지고 볼 수 없고
조문금 가버린 지금 그 소리도 묘연하다
하였다. 극겸은 글자를 겨우 알지만 시구는 넉넉히 알지 못하는데 꿈을 깬 뒤에 이 시를 읊어내니 사람들이 모두 이상하게 여겼다. 영조 원년(1725)에 현령 이우신이 묘를 증축한 후, 한 사람이 지키게 하고 하마비를 세웠다함은 같은 시대로 보아야 할 것이다. 1725년과 여지도서가 만들어진 1760년은 가장 뚜렷한 역사 사실을 남길 수 있는 가까운 시기이다. 그러므로 한시 3수가 전하는 경덕왕릉에 관한 내용은 근접한 사료로 정리하며 천년이란 500여년 전은 조문국 존립시기인 4세기, 또는 5세기로 유추하여 볼 수 있는 전거에 접근할 수 있다고 비정하여 보겠다. 이러한 사료에 몰입되다 보니 새벽녘 자신도 모르게 꿈속에 언뜻 떠오르는 향토 사료들이 지나가곤 하였다.
5. 조문국 학술대회 현황
1) 제1회~잃어버린 문화의 강국 의성 조문국을 찾아서
조문국 관련 문헌과 그 목록~김종우
조문국과 그 고토의 문화유산~문경현
조문국의 성격과 문화~이형우
조문국 문화권 관광자원화 방안~전병해
2) 제2회 다시 찾아야 할 조문국
조문국 문화 유산과 지역 관광 활성화 전략 박순교
의성지역의 토기양식과 사회집단의 성격 김옥순
의성지역의 관광자원의 보존과 활용방안 김종우
토론자
강상문 의성문화원 향토사연구소장
신세훈 전 한국문인 협회장
전병해 의성군청 새마을 문화관광과
3) 제3회 고분에서 깨어난 조문국의 부활
의성 박물관 건립의 필요성에 대한 제언 이한상
공립박물관 건립에 따른 전시자료 확보방안 신종환
조문국 박물관 건립 타당성 조사 이덕희
토론자
강봉원 좌장
신태하 의성군정발전연구회 위원장
김완수 영남이공대 명예교수
마창훈 영남일보 기자
전병해 의성군청 새마을문화관광과
4) 제4회 경북 고도읍 조문국 역사문화 포럼
작가의 눈에 비친 조문국 : 박정수
조문국의 역사 정성일
조문국과 일본 천황가 박찬
토론자
김갑주 전동국대학교 부총장
김완수 영남이공대 명예교수
김종우 문화원 경북도지회장
전병해 의성국청새마을문화관광과
6. 소문국과 일본천황가 박찬
이글은 박찬 선생께서 경북 고도읍 역사문화 포럼에서 발표한 내용 중 일부분을 옮겨 비정하면서 참고 하고자 한다.
소문국은 왜의 뿌리이고 일본천황가의 시조국이다. 소문국은 인류역사상 유일한 여왕국 으로 기원전 7세기경 김학여왕이 의성지방에서 왜국으로 개국한 후 기원전 70년경 소문국으로 개명하여 도합 약 1400년간 존속하다가 757년(신라경덕왕 35)신라가 구주를 두고 소문국을 문소군으로 격하하여 상주에 넣을 때 막을 내렸다. 왜국이나 소문국은 개국도성산은 금성산 일명 금학산 으로 소문국왕의 고 능이 학미리에 있는 사실을 종합하면 기원전 7세기경 김학여왕이 중국에서 자기부족을 이끌고 현 의성지방에 와서 고대의 모권제 국가인 여왕국을 개국하여 국호를 왜국으로 한 것으로 여겨진다. 소문국의 왕손인 신천지( 新天地)인 일본열도로 건너가서 일본 열도내 왜국을 세우고 왜국과 천황가의 시조가 되었다. 소문국의 왕손 스사노오노미꼬도는 그의 아들을 데리고 일본열도로 건너갔고 비미호(히매꼬)는 야마다이국의 여왕이 되자 173년에 신라와 그의 모국인 소문국에 사신을 보내 래빙 하였는데 히매꼬의 여왕은 신라가 231년에 소문국의 왕자 김효가 세운 감문국을 멸하자 다음해인 232년과 233년 2차에 걸쳐 군사를 보내어 신라를 벌하였다. 신라는 박 석 김 삼성이 지배하였는데 박씨 10대왕 석씨8대왕 김씨38대왕 모두 56대왕이 재위하여 992년 존속하였는데 박씨233년 석씨172년 김씨587년 통치하다가 935년 고려태조 왕건에게 나라를 넘겨주었는데 김씨38대왕은 모두 소문국의 시조인 김학여왕의 친손이고 9대 벌휴왕 모지진 내례부인 10대 내해왕 11대 조분왕 12대 첨해왕 14대 유례왕 15대 기림왕 16대 흘해왕은 김학여왕의 외손이다. 인류역사상 천재소문여왕국은 한일양국에 그의 피를 나누어주고 종막을 내렸다. 이로 인하여 신라에는 3대 3명의 여왕이 나왔고 일본에는 야마타이국의 히매꼬 여왕과 그의 종여이여 대여 여왕외 18명의 여천황이 있었다. 일본천황가의 고대사는 고사기와 일본서기에서 찾아볼 수 있다. 고사기 상권과 일본서기 제일 이권의 신대는 천지개벽과 천황가의 소문국시대까지도 천상의 신화로 만들의 기록하였다. 1940년(소화15년)에 일본에서는 기원2600년을 축하하는 대축전이 있었다. 이것을 보면 일본 황실이 기원전 7세기경에 개국한 소문국의 왕통을 이은 사실을 자인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면 일본서기 신대의 기록 중 신라와 소문국의 국명이 명기된 신대상권 보검조 제4 5 6 의 일서에 나오는 스사노오노미고도와 그의 아들 이소다게루노가미가 신라국 안에 있는 소시무리노도고로 즉 소문국의 다가마가하라(高川原)에서 강림한 신화가 적혀있다. 스사노오노미고도는 그의 아들 이소다게노가미와 같이 고천원에서 강림하여 한동안 금성산 아래 있는 구름골(운곡)에서 살다가 소금 길을 걸어 근오기(斤烏岐)경북영일에 가서 배를 만들어 타고 일본열도로 건너갔다. 일본의 야마도(大和)는 고천원이 있는 금성산 아래 금성면 대리리에서 따왔고 이즈모(出雲)은 고천원의 금성산 아래 구름골(雲谷)에서딴것으로 풀이된다. 또한 사무라이의 명칭은 의성군 봉양면 구산일리 사불래이인데 소문국시대 군사훈련장 으로 구전되어 왔다고 한다. 또는 소문국여왕의 명에 따라 신천지인 일본열도의 개척과 개국을 위하여 현 의성군 봉양면 구산리 사불래이에서 훈련받은 장병 즉 사무라이를 거느리고 소금길을 따라 영일에 가서 군선을 타고 일본구주에 있는 일상국에 가서 대화평정 되기 전까지 거주하였다. 일본의 사학자 가네자와쇼사부로의 의저작 일한 고지명 연구가 있고 그는 이와같은 고대사를 인정하고 있다 한다. 특히 발표자인 박찬 선생께서는 오래전부터 끊임없이 위의 내용을 강력히 주장하고 있다. 소문국이 인류 역사상 유일한 여왕국 모권제 부족국으로 기원전 7세기경 한반도 남부에서 개국하여 한반도는 물론 일본열도의 모국이 되었고 기원전 70년경에는 왜의 국호를 일본 열도내의 자손국에 넘겨주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7. 조문국시대의 고분출토 현황
의성지역에 조문국 신라 가야시대에 이르는 동안에 분포된 고분을 통하여 그 시대 문화상을 살펴볼 수 있다. 의성지역에서 1960년 국립박물관에서 금성면 탑리 고분 한기를 최초로 발굴하여 궁금증을 해소하여 주었다 이어서 1965년 1980년에 1987년 1995년 2009년 현재 발굴중인 것을 합하면 일곱 차례에 이른다. 출토된 유물로는 연대를 추정하는데 차이점이 있으나 대체적으로 조문국시대로 미루어 비정하고 있다.
1) 제1차 고분 발굴 의성 탑리고분
1960년 국립박물관에서는 신라의 포섭 하에 있었던 것으로 믿어지는 조문국의 옛 터전의 성격을 규명하려고 미국 하바드대학 엔칭학사 연구 보조비로 의성 탑리 고분군중 한기를 선택하여 40여일간 발굴을 하였다 한 무덤에 불과하지만 다섯 개의 묘곽이 자리 잡고 있었으며 동족묘 또는 가족묘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하겠다.
제일 묘곽에서 금동관 한점을 비롯하여 이기 토기류 마구류 골각기 철제잡품 등 다양한 출토품이 발굴되었다 이로서 조문국에 대한 인식이 새로워지고 유존하는 고분군들에 관심이 달라 지게 되었다.
2) 제2차 의성대리 고분 발굴
1965년 7월 19일부터 29일 까지 11일간 경희대학교에서 의성군 금성면의 대리 고분 중 비교적 분구가 뚜렷한 한 기를 선정하여 발굴조사 하였다. 이곳에는 한 봉분 안에 두기의 묘곽이 있었고 출토유물로는 장신구와 철제류 토기류 인골류 등이 출토 되었고 경덕왕릉으로 전해오는 부근에 위치함으로 선정하였으나 기대하는 만큼 실적을 거두지 못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곳에서 특이한 점은 철모 두 점이 출토되었는데 공부는 원통형이며 봉부는 ∧형으로 현장은 26.1cm이다.
3) 제3차 의성군 문화유적 지표조사
의성군의 선사유적의 흔적인 문화유적을 발굴하여야 된다는 필요에 따라 일찍이 1977년 문화재 관리청이 고인돌과 선돌에 일부분을 조사한바 있었다. 그로부터 10년 후에서야 의성군에서는 1987년 의성군 전역에 걸쳐 일제히 문화유적 지표 조사를 대구대학교 박물관에 의뢰하여 실시하였다. 그 결과 대표적인 묘제(墓制)인 지석묘 즉 고인돌 11개소 87기와 거석숭배 유적인 입석 즉 선돌이 9개소 13기가 발견 조사되었으며 석창 1점도 채집되어 선사문화 규명에 좋은 자료가 되었다 그러나 지표상의 고대유물 대부분을 조사하였으나 누락된 부분도 일부 있었던 것은 오늘날 향토사가 들이나 학자들에 의하여 추가로 확인되어 현재까지 약 300여기에 이른다고 발표한 바 있다 당시 조사 때에는 대체로 고인돌 선돌 고분군에 중점을 두었다. 고분군은 조문국의 옛 터전인 금성면 일대에 대체로 규모가 큰 고분이 200여 기 가 확인되고 그 실태로 제1군은 금성면 탑리리 대리리 학미리 일대와 제2군은낙동강 대 지류인 미천 유역을 중심으로 가장 넓은 하상평야(河床平野) 둘레에 분포하고 있는 단촌면 후평리 관덕리 병방리 장림리 전역에 270여기 가 확인 되었다. 제3군은 서부 지역인 다인면 달제리 송호리 평림리 일대에 분포하는 고분들이다. 의성군 일대 고분군은 1000여기로 흩어진 고분에서 출토된 유물로 그 시대 사회상에 접근하여 볼 수 있었다. 그로서 고분 수에 있어서나 자연환경 등에 몇 세기 동안 집단이 그 일대에 정착하여 자체의 문화를 형성한 것으로 미루어 보겠다. 현재 고분군은 당시 확인조사 때 보다 경작지 개발 확장 등으로 훼손되어 그 분포 군은 다수 줄어들었다. 당시 조사로 이제까지 금석문이나 문집에만 집착하던 향토사는 선사시대 고대사회 문화에 새로운 국면으로 다다르게 되었다. 의성지역은 다수의 고분군으로 실제로 유존하는 유물로서 다른 지역과 비교되는 사료로서 문화유산 지역으로 긍지를 가질 수 있다.
<의성군 고분군 분포상태>
소재지 |
지형 |
하천 |
해발 |
평야 |
봉분형태 |
수량 |
비고 | |
① |
단촌면 후평리 |
구릉,산중복 |
미천중류 |
130~180m |
유 |
원형봉토분 |
180여기 |
|
② |
단촌면 병방리 |
능선상 |
미천중류 |
150~180m |
유 |
원형봉토분 |
50여기 |
병방리성지 |
③ |
단촌면 관덕리 |
능선상 |
미천중류 |
150~200m |
유 |
원형,타원형분 |
120여기 |
|
④ |
단촌면 장림리 |
구 릉 |
망률천 |
150~180m |
무 |
원형봉토분 |
100여기 |
|
⑤ |
점곡면 윤암리 |
능선상 |
미천상류 |
150~200m |
유 |
원형봉토분 |
90여기 |
|
⑥ |
점곡면 송내리 |
구 릉 |
미천중류 |
150m |
유 |
원형봉토분 |
30여기 |
|
⑦ |
옥산면 입암리 |
구 릉 |
미천상류 |
180m |
유 |
원형봉토분 |
5기 |
|
⑧ |
옥산면 구성리 |
구 을 |
미천상류 |
210m |
유 |
? |
현망 |
|
⑨ |
옥산면 오류리 |
산중복 |
400m |
무 |
? |
현망 |
||
⑩ |
사곡겸 공정리 |
구 릉 |
남대천상류 |
150m |
무 |
원형봉토분 |
2기 |
|
⑪ |
금성면 탑리리 |
구릉,적선상 |
쌍계천중류 |
110~150m |
유 |
원형봉토분,원형,타원형분 장방형분,전방후원분 |
130여기 |
금성산성 |
⑫ |
금성면 대리리 |
구릉,평지 |
쌍계천중류 |
50~80m |
유 |
원형봉토분 |
30여기 |
금성산성 |
⑬ |
금성면 학미리 |
산중복,적선상 |
쌍계천중류 |
110~150m |
유 |
원형,타원형분 |
40여기 |
금성산성 |
⑭ |
안계면 안정리 |
구 릉 |
130m |
무 |
원형봉토분 |
10여기 |
봉양리성지 | |
⑮ |
구천면 위성리 |
구 릉 |
위천중류 |
70m |
유 |
원형봉토분 |
1기 |
|
다인면 평림리 |
적선상 |
80~100m |
유 |
원형봉토분 |
30여기 |
|||
다인면 송호리 |
구릉,산중복 |
120~150m |
유 |
원형봉토분 |
60여기 |
|||
다인면 달제리 |
구릉,산중복 |
120m |
유 |
원형봉토분 |
40여기 |
|||
다인면 양서리 |
적선상 |
낙동강변 |
120m |
유 |
원형봉토분 |
20여기 |
||
다인면 덕미리 |
산중복 |
180m |
유 |
원형봉토분 |
1기 |
|||
다인면 봉정리 |
산중복 |
낙동강변 |
150m |
유 |
원형봉토분 |
20여기 |
||
신평면 월소리 |
평 지 |
신평천상류 |
120m |
유 |
원형봉토분 |
4기 |
||
단밀면생송리,낙정리 |
구 릉 |
낙동강변 |
100m |
유 |
원형봉토분 |
10여기 |
조선시대묘 |
4) 제4차 의성 장림동 폐고분군 조사
의성군 단촌면 장림동 고분군은 지금까지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고분 유적이었으나 1980년도에 이곳에서 도굴된 토기유물이 경찰에 압수된 것이 연유가 되어 그 존재를 알게 된 것이다. 경상북도 도문화재 과에서 현장 답사한 결과 전체가 도굴로 인해서 무참하게 파괴되어 있었다. 이곳에서 66기를 조사하였으나 도굴되지 않고 온전한 상태는 거의 없었고 도굴로 인해 유물이 분실되었음에도 발굴된 유물로는 대부장경호 고배 파수 부배 왕 철병 등이 주류였다. 석곽 유구는 부분적인 파손은 있어도 대부분이 유존되어 구조적 특징을 통해서 연구 자료가 될 것으로 보아진다.
5) 제5차 의성대리 3호분 발굴조사
1994년 의성군에서는 조문국 도읍지 고분군 정비사업으로 경북대학교 박물관에서 1995년 4월19일부터 7월 17일 까지 약 90일간에 걸쳐 의성군 금성면 대리리 3호분에 대한 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이일대가 옛 조문국의 터전이었기에 선정되었으나 벌써 훼손이 심해저 확인된 곳은 42기로 안타까운 실정 이었다. 이곳에서는 한 봉분 안에 3기의 유구가 확인되었는데 제1곽은 적석목곽묘 제2곽은 목곽묘 제3곽은 변형적석목곽묘 형태로 볼 수 있다. 제일곽에서 출토된 유물로는 금제세환이식 삼엽문대도 은제과대 등 장식품 위주 이었다. 또한 제2곽에서는 다량의 토기류 철기류이다. 유구의 구조나 유물의 종류가 다르고 현격한 차이가 있는 것으로 보아 후자가 전자의 순장곽일 가능성을 추정할 수 있다
6) 제6차 학미리 고분 발굴조사
제5차 의성대리리 발굴조사에 이어 2차로 학미리 고분을 발굴조사하게 되었다 1996년 3월부터 6월까지 약3개월간 이었다 이곳은 해발150.5m에 위치하며 횡혈식 석실분이었으며 출토유물로 은장삼엽모자환두대도 한점이 손잡이는 어린문(魚鱗文)으로 장식되었다 또한 이 일대에서는 처음으로 청동령이 출토되었는데 상태가 양호한 것으로 령부 하단에 고리가 있고 그사이에 철제반부가 끼워져 있었다. 이 청동령은 고리를 이용해 어딘가에 매달아 제의행위에 사용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 무덤에서는 고분축조와 관련된 제의행위를 추측할 수 있는 다수의 자료가 확인되었다. 편평석 아래에서 전복 껍질도 발견되어 피장자 매납과 관련된 의례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될 것이다. 학미리 고분에서 축조과정에 따른 매장의례의 정형성을 엿볼 수 있다.
7) 제7차 대리리 발굴조사
조문국 박물관 건립을 위하여 이제까지 출토된 유물을 전시하려고 소장하고 있는 국립박물관을 비롯한 각 박물관에 되돌려 주기를 요청하였으나 규정상 돌려줄 수 없다하여 의성군에서 고분군중 2기를 선정하여 2009년 현재출토작업을 진행 중이다.
8. 여인천하 조문국
남당 박창화 와 일양 박찬 선생의 양비론
햇빛에 가려진 조문국 정사(正史)
달빛에 잠겨진 조문국 야사(野史)
햇빛 달빛 비켜 얼굴 내민 조문국 유사(遺事)
2007년 경북 고도읍 역사문화 자원을 활용한 지역 특화 관광자원화 사업이 시작 되었다. 경북의 고도읍 몇 곳 중 조문국은 역사적으로 강성한 성읍 국가로서 많은 고분군이 산재한 곳이다. 지역에서는 전설이나 빈약한 문헌 또는 고분 몇 기를 발굴하여 출토된 유물에 한정된 채 많은 자료에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위의 고도읍 사업이 진행되면서 의성군에서는 조문국 박물관 건립이 추진되어 학술대회가 이어져 2009년 6월 11일 네 차례 열렸다. 발표자로 주제1 작가의 눈에 비친 조문국 박정수 소설가, 주제2 조문국의역사 정성일 역사연구가, 주제3 조문국과 일본 천황가 박찬 변호사의 자료가 발표 되었다. 발표 내용의 줄거리는 남당 박창화(1899~1962)의 남당 유고집에서 조문국 관련 부분과 일양 박찬 변호사의 소문국과 일본천황가의 자료에서 조문국이 여인천하로 비정되고 있어 관련 내용을 간추려 보았다.
1) 남당 박창화의 조문국
남당 유고집은 신라 사료의 고기 필사본 이라며 그중 아달라이사금 16년 기사에서 자성여주(B.C118~99)가 여성으로 왕이 되어 20년간 재위한 것으로 기록 되어 있다. 다음 여왕으로 호묘(A.D184.10~196.8)가 13년 간 재위 하였으며 그는 전왕 윤명의 부인으로 부부간 왕위를 계승 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조문국 존력 369년에서 여왕이 등극하여 통치한 기간은 33년간이며 소설가 박정수의 왕국의 부활에서 자성여주는 남려의 딸로서 조문국의 개국과 왕통을 이어가는 터전을 연 여인으로 볼 수 있다 하겠다. 남려는 예족으로 진국과 한나라와의 분쟁에서 실패로 돌아감에 따라 여태후의 숙청대상에서 벗어나려 하려다 예는 남려의를 부장으로 그 무리들 중에서 흩어졌다가 모인 34명이 위기를 탈출할 때 남려의 셋째딸 은교(해금이)가 남장하여 함께 빠져나와 지금 봉양면 구산1리 마질기에 역사적인 조문국의 터전이 열엿다. 마질기에서 부장으로 남하한 예는 예왕으로 천거되었다. 미광에서 예왕을 무덕왕이라 하였다. 은교는 남려왕의 공주로 남장한 채 탈출한 34명의 장수들과는 항상 보이지 않게 비중 있는 위치에 있었다. 그 후 은교는 용왕의 귀의후(歸義侯) 중전이 되었다. 용왕의 선정에 큰 역할이 되니 그 공덕을 칭송받아 용왕의 대를 이어 자성여주로 왕이 되었다. 자성여왕 으로 20년간 선정 후 다음 왕의 승계를 그의 신하 봉왕에게 물려주고 난 후 조문국은 세습으로 왕계가 이어졌다. 남당유고 에서는 조문국은 남려의 딸 은교가 여왕으로 선정을 내린 뿌리 있는 여인천하 조문국 이라고 추단해보겠다.
2) 일양 박찬 의 조문국
일양 박찬의 “소문국과 일본 천황가” 주제 발표문에서 소문국은 왜의 뿌리이고 일본 천황가의 시조국이다. 소문국은 인류 역사상 유일한 여왕국으로 기원전 7세기경 금학여왕(金鶴女王)이 의성 지방에 와서 외국(倭國)으로 개국한 후 기원전70년경 소문국으로 개명(改名)하여 천 사백년간 존속하다가 신라 경덕왕757년에 신라가 구주(九州)를 두면서 소문국에서 문소군으로 하였다고 기록 하였다. 개국 당시에는 모권제 국가로 여왕인(女王人)을 합성한 왜(倭)자로하여 국호로 삼았다가 기원전 222년 연(燕)이 진(秦)에 패망한 후 기원전 70년 왜의 국호는 일본 열도 내 자손 국에 넘겨주고 명문(名文)인 소공(召公)의 후손임을 내세워 소문(召文)으로 바꾸었다. 소문국의 왕손은 그의 아들을 데리고 일본으로 건너가 히매고(비미호:卑彌呼)는 야마다아국(邪馬台國)의 여왕이 되었으며 신라의 삼성인 박. 석. 김씨에서 박씨10대왕. 석씨 8대왕, 김씨 38애와 992년간 존력 중 김씨 38명의 왕은 조문국 시조 금학여왕의 친손이며 9대 벌휴왕 10대 내해왕 11대 조분왕, 12대 첨해왕 14대 유례왕 15대 기림왕, 16대 흘해왕은 김학여왕의 외손이라 하였다.
또한 신라에서 세 명의 여왕이 나왔고 일본에서는 히미꼬를 비롯하여 열명의 여왕이 나왔다는 발표자의 주장으로 소문국은 인류 역사상 유일한 모권제 부족 국으로 한일 양국에 근본을 이루는 왕통의 피를 나누어 주었다고 하였다.
3) 맺는말
“E.H카의 역사란 무엇인가” 에서 역사는 현재와 과거의 대화라고 하였다. 과거의 사실에 의미를 부여하는 역사가의 해석 기능 없이도 역사는 성립되지 못한다 한 사건이 통일성을 부여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인과의 열쇄를 선택하는 절대적이고 객관적인 기준은 없다. 선택 기준은 결국 역사가의 해석, 가치관에 달려 있고 그 중에 가장 유익한 일반화를 이끌어 내야 합리성이 이루어진다. 남당과 일양의 기록은 양비론으로 독자 들이나 향토사가 역사연구가들에겐 의아심을 던져 줄 것이다. 덮어두고 무조건 그것이 아니다. 어림없다는 부정적인 사고에서 벗어나 접근 하면서 좀 더 깊이 있고 이해하는 자세에 올인 할 과제라고 보겠다. 선택과 집중도 좋지만 선택되지 않는 곳 지나친 집중에서 벗어나 광범위하면서 동참할 수 있는 군민적 이해를 이끌어 낼 수 있는 균형 있는 문화권을 형성하는데 전문적인 학자나 용역기관에 얽매이지 않고 저변 층의 삶의 터전을 이어온 지역 우리들의 몫으로 사고를 펼쳐 나가는 의성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
주제2 발표문에서 소문국이라고 표명함은 지역에서는 조문국이라는 명칭으로 일반화 되어있고 또한 학계에서도 조문국으로 인정하고 있음을 밝혀 두는 바이다. 우리 모두 조문국 이라는 명칭으로 자긍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나가는 글
한국고대사에서 국가기원 및 형성에 관한 문제는 1970년부터 연구되기 시작했다. 1960년대 후반 미국을 중심으로 한 자유주의나 또는 전통 마르크시즘에서 국가의 본질적 속성과 역할에 대한 문제가 제기되면서 정치, 사회, 경제 등의 여러 분야에서 국가에 대한 본격적 검토가 이루어진데 영향을 받았던 것이다. 한국 고대사 분야에서 국가 기원 및 형식과 관련된 논의는 미국인류학계에 수용되고 또한 국내에서 축적된 고고학적 성과에 의해 종래 불신되었던 삼국사기, 삼국유사 초기기록에 대한 신빙성이 제고되는 상황에서 나타나게 되었다. 1970년대 들어서자 부족국가라는 용어에 문제점이 제기되어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묘제인 고인돌을 권력의 소유자가 나타난 하나의 징표로 구릉이나 토성을 쌓고 살면서 성밖의 평야에서 농업이나 수렵에 종사하는 시대사회를 성읍 국가에 알맞은 존재로 가닥이 잡혔다.1970년대 1980년대 1990년대에 따라 학자들마다 고대 국가에 대한 주장이 달라져 가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조문국이 위치하였던 의성지역에는 여타의 소국들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난 양의 고분들이 집중하고 있다. 고분은 통속적으로 성토하여 봉토를 만드는 묘를 의미하는데 고분 자료의 수가 다른 지역보다도 많고 고분이 당시 사람들이 살던 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군집화 하여 한 집단이 대개 한곳에 계속 고분을 조성한다는 사실은 당시 사회상의 복원작업에 고분이 충분히 활용하였음을 보여준다. 이는 조문국이 여타소국들에 비하여 종주적인 위상을 나타내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서 기록 되지 않은 사료가 많아짐으로 고대국가에 대한 관심도가 높아지는 경향으로 가고 있는 실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은 오늘날 조문국 실체가 드러남으로 더욱 박차를 가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2000년도 들어서면서 의성 문화원에서는 조문국에 관한 자료를 수집하면서 다각적인 홍보와 더불어 조문국 문화 형성에 역점을 두어 왔다. 이와 더불어 경북 고도읍 역사 문화자원을 활용한 지역 특화 관광 자원화 사업에 대한 세미나에 이어 고대 문화권 사업으로 발전적인 목표 정립이 이루어졌다. 의성지역에서도 앞에서 예시한 사례들은 문헌이나 고분출토 등 사료에 접근하면서 3대문화권 사업 중 조문국 문화사업에 치중하고 있는 오늘날의 시점에서 체계적인 자료구성을 위하여 연구에 집중력을 가져야 할 것이다.
한국국학진흥원 자문위원장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
전 한국문화원연합회 경북지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