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블로그에서 옮겨온글이라...경어체가 아님점...넓은 이해 바랍니다.^^
-------------------------------------------------------------------------------------------------------------------
아무정보도 없는 미지의 산을 처음으로 오르는 기분은 어떨까?
일전에 60년대후반 설악의 여러 빙폭과 침봉,선인봉의 여러 암벽코스 초등반에 참여한 대선배님께 술자리를 빌어...
여쭤본적이 있었다. 만족할만한 대답을 주셨으나...쉽사리 상상이 안가는건 당연할것이다.^^
그 만큼 미지의 산에대한 도전정신과 열정,두려움은 상상을 초월하니 말이다...
가끔 설악을 들때...처음가는 미지의 길에대한 두려움이 없지않다.그렇지만 호기심과 한번 도전해보구 싶은 생각이 더 크기때문에
배낭을 꾸리게 된다... 산행 도중 예기치 못한 난관을 만났을때도 두려움이 느껴진다... 하지만 그 위기를 잘 극복했을땐 더 없는
기쁨과 희열을 느끼게 되는건 비단 나뿐만 아닐것이다. '알피니즘'이란 서구적 개념을 그다지 좋아하진 않지만......
항상 똑같은 산행...두려움을 느끼지 못한는 산행...호기심없는 산행이 아닌...절대 무모하지 않으면서 호기심과 도전정신이 있는 산행...산행도중 난관을 만나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다...자신의 한계를 알고 깨끗이 돌아서며 '내 지금은 돌아서지만 다시 찾아와 도전한다'라는 정신이 있는 산행이야 말로 진정 '알피니즘'이 아닐까 생각한다.^^
나도 이런 살아있는 산행을 해보고싶고 하려고 노력할것이다.
히말라야 다울라기리산군의 탐사기-박철암 1963년 청구출판사
이 책은 우리나라 산악사중 최초로 히말라야원정길에 나서 다울라기리산군의 등산로 정찰을 하고 6700m 무명봉을 오르고 돌아온
산행기로 그 의미가 크다. 지금에야 히말라야 자이안트봉우리를 두루두루 섭렵한 걸출한 등산가가 많이나오고 등로주의에 입각해
여러 바리에이션루트를 내려는 시도도 하고,각종 세계적인 암벽대회나 빙벽대회에서 괄목할만한 성과를 올리는 산악강대국(?)이나 그 첫발은 이렇게 내딛었다.
목차는
*다울라기리 산군의 탐사기
*히말라야 개관
*네팔 히말라야
*에베레스트 등정
*낭가 팔밧트
*다울라기리 산군의 정찰
*네팔의 역사
*네팔의 종족과 문화
*등산용어집(부록)
이렇게 구성이 되있으며 실제적인 박철암대장의 다울라기리 산군의 탐사기는 책의 반정도 못되고 나머지는 다른나라의 등정기와
후대 네팔 히말라야를 찾는 후배들을 위해 네팔에 대해 비교적 소상히 기록하고 있다.
그럼 왜? 하필 다울라기리산군으로 정찰을 떠났을까?
히말라야에 간김에 이왕이면 최고봉 에베레스트를 놔두고~~~ㅎㅎㅎ
그 이유는 박철암대장이 설악산 신흥사에서 적은 책 맨앞 권두서에 잘 나타나있다.
당시 세계적으로 1950년대부터 시작해 8천미터급 자이안트봉우리는 거의다 초등정이 마무리된 시점이었다. 단지 중국쪽 국경으로
막혀있는 시샤팡마봉(8027m)를 제외하곤 말이다.
또한 마음속으론 경쟁자라고 생각하는 가까운 일본만 하더라도 1956년 마나슬루(8163m)봉 세계 초등정이란 쾌거로 히말라야원정
열기가 고조되 매년 10여개의 원정대가 히말라야를 찾고있는 실정이니 국내 산악계를 자극하기 충분한 분위기였다.
그래서 이왕 할거면 남들 뒤를 따라가느니 8천미터급은 못되더라도 비록 7천미터급이지만 아직까지 아무한테도 접근로를 쉽사리
내주지않고있는 미답봉...다울라기리2봉에 눈을 돌린것이었다.
쉽게 말하자면 우리도 함 히말라야에서 초등정해서 태극기를 꽂자는 얘기였다...용의 꼬리보다 닭머리가 되자^^
그럼...다울라기리2봉(7714m)은 어떤곳이었던가?
1905년 영국의 유명한 산악인 롱스텝박사라는 분이 서부네팔의 아피(7132m)와 남파(6755m)에 이르는 접근로를 찾다 우연히 발견한 산이다. 그후 프랑스 엘조그가 북동방향 정찰을 했고 그후 54년 영국 로버츠대, 55년 독일대, 55년과 58년에 일본대가 정찰을 했지만 모두 북쪽으로만 시도하여 이 산의 남쪽으로는 아무도 접근을 허락치 않은 미답봉이었으며 1봉(8172m)를 비롯해 7천미터이상의 5봉까지 성곽같이 쭉 이어져있는 거대한 산군을 다울라기산군이라 불렀다.
우측사진이 우리나라 원정대 캠프모습.(돔형이 아닌 A형 텐트인 모습이 이채롭다.)
박철암대장의 다울라기리산군원정대는 1958년 2월초쯤에 설악산 동계등반을 마치고 돌아와 어느 종로의 다방에서 한양대산악회대원과 히말라야에 대해 이야기하며서 시작된다.(추측하건데...다방이 아니라 술집이라고 믿고싶다...ㅎㅎㅎ)
그후...모교 경희대산악부의 지원과 동아일보사의 후원으로 당시로선 거금인 원정경비 110만원을 모으고 모자란 나머지는 박철암대장이 집을 팔아 충당했단다. 또한 개인부담금은 약 25만원정도였다고 하니 당시로선 자금문제가 젤 커다란 난관이었다고 한다.
*오른쪽이 다울라기리원정대 4인의 모습-박철암(38대장), 김정섭(27), 주정극(38), 송윤일(27)
드뎌 1962년 8월15일 광복절날 장도에 오른다.
*일본에 들려 고산장비와 식량을 구입
*방콕을 거쳐 8월22일 인도 캘커다도착-8월27틸 네팔 카트만두에 도착 4명의 셀파와 1명의 쿡을 고용
*9월4일 30명의 포터와 포카라출발 캐러반개시-다울라기리의 남쪽계곡 마얀디강을 거쳐-정글지대통과-협곡을 건너 다울라기리
2봉의 남쪽산록 4600m지점에 베이스캠프설치완료(캐러반시작 19일째)
*20일간에 걸쳐 5100m(10월2일), 5950m(10월10일)에 2개의 캠프설치, 마얀디빙하상단 6300m(10월11일)에 제3캠프설치.
*다울라기리산군의 6700m 무명봉등정후...하산...귀국...이렇게 인명사고 없이 무사히 성공적인 원정길이었다.
*캠프3에서 출발준비를 하는 박철암대장
박철암대장은 경희대학교출신으로 당시 경희대산악부를 창설하였고 우리나라 최초로 1962년 히말라야원정대를 꾸려 다녀왔으며
그후 1971년 대한산악연맹주관 로체샤르(8400m)원정대 대장으로 11명을 이끌고 도전, 남동릉 8000m도달후 악천후로 등반포기한다.
또한 다울라기리산군 탐사대원중 한명인 김정섭이란 분이 눈에 띄는데 이분...저번 블로그에도 언급한바있는 히말라야와 애증의 관계가 엄청난 분이시다. (집념의 마나슬루-김정섭)
1970년 한국산악회주관 추렌히말(7371m)원정대 대장으로 6명의 대원을 이끌고 도전, 동생 김호섭외 셀파1명이 동봉을 초등정하는 쾌거를 올리나 일본대의 이의제기로 초등정 시비에 휘말린다. 당시 국가적인 쾌거라고 엄청난 난리가 났지만 좀 씁쓸하다.
또한 1972년 마나슬루(8163m)2차 원정대대장, 1976년 마나슬루 3차원정대장으로 도전하지만 형제들을 차례로 히말라야에 묻는
비극을 겪는다...ㅠㅠ
책 중간 흥미로운 대목이 있다.
원정대가 베이스캠프에서 셀파들과 추위를 피해 모여 담소를 나누는 장면이 있는데...셀파입에서 설인(雪人.Yeti)얘기가 나온다...^^
[그의 말에 의하면 1961년 봄 (죠고리 히말)에서 설인 5명의 습격을 받았는데 그들을 발견하자 겁에 질려 깡통을 두들겨서 이들을
쫓아보낸 일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들의 목격담으로는 설인의 형상이 키는 3피트(약91cm)정도로 마치 8,9세 어린이 키와 같으며
얼굴과 몸은 원숭이와 같이 긴 털이 전신을 덮고 배에서 허리에는 붕대같은 흰줄이 있었으며 또 두손과 발이 있었으나 사람과 반대로 발뒤축이 앞으로 오고 발끝이 뒤로 돌아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실지 앞으로 걷고 있지만 발자욱은 반대로 간 것 같이 보인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설인들은 (구구),(츄츄)하는 소리를 내더라는 것이다. 이들은 비록 키는 작은 것 같이 보이지만 사람을 만나기만 하면 손쉽게 휘어잡고 달아나서는 와작와작 먹어버린다는 것이다. 그리고 설인은 대단히 높고 한적한 곳을 찾아서 다니기 때문에 쉽사리 눈에 띄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는 반신반의했지만 이 말을 어느정도 증명할 만한 사실이 얼마후에 나타났다...............]
ㅎㅎㅎ... 그후에 원정대가 설산을 오르다 흥미로운 맨발의 발자국을 발견하게 되는데 박철암대장은 필름에 담는다.
그 발자국은 인가에서 아주 멀리 떨어져 사람의 발자국이라 할수없고 영하의 살을 에는 기온에 맨발의 발자국이라하면 설인의 발자국이 틀림없다 확신한다...(ㅎㅎㅎ 그 사진 함 보구싶다~~~^^)
1962년 히말라야 다울라기리산군 원정대는 비록 목표로 하였던 다울라기리2봉엔 오르지 못했지만 다울라기리산군의 접근로와 2봉에 대한 등정가능성을 타진하였고 6500m 무명봉을 등정하고 아무 인명사고 없이 마무리한 성공적인 원정이었다.
아무한테도 듣지못하고 경험해보지못한 거대한 빙하와 천길 끝을 알수없는 크레바스...천지를 진동하는 눈사태모습과 굉음...텐트아래로 빙하가 이동하며 균열하는 '쩡~~~'하는 굉음, 살인적인 눈폭풍과 화이트아웃~지상의 1/3밖에 안되는 산소량에 의한 고소증...정말 무섭고도 살떨리는 경험이었을것이다...하지만 초등정, 첫경험의 도전정신과 야릇한 희열...불굴의 의지등...으로 극복할수 있지 않았을까 감히 상상해본다.^^
덧붙여...
이런 다울라기리2봉은 그후 10여년동안 처녀봉으로 남아있다 1971년 오스트리아팀이 동릉으로 초등에 성공한다.
그 다음 78년과 79년에 일본대가 등정하고 1986년까지 어느팀에게도 정상을 내어주지 않는데...
1986년 대구 팔공산악회원들로만 구성된 한국대(이돈용대장,김성규,조명호,김기태)가 다울라기리산군에 첫발을 내딛은지 24년만에 김성규대원과 셀파2명이 동릉으로 다울라기리2봉 정상에 선다. 하지만 12시간이상의 고소등반에 지친 김성규대원은 하산하다.......추락사하는 비극을 맞는다...ㅠㅠ
-끝-
첫댓글 좋은 글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좋게 봐주시니 감사할따름입니다.^^
50년 전에 발행된 책인데도 보관 상태가 양호하네요... 책 내용을 정리하는 솜씨만큼 관리도 깔끔한듯~ 박철암 대장은 현재 월간 <사람과 산>에 '박철암 교수의 산과 탐험의 생애'라는 원고를 연재하고 있는데, 등반과 탐험이 일맥 상통하고 도전의 범위를 무궁무진하게 넓히는 정신적인 영역이 강한 세계인듯 합니다. 그런 분과 한 시대를 같이 호흡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즐겁습니다^^
네...저두 <사람과 산>에서 박철암의 연재글 흥미롭게 보구있습니다.또한 제가 가진 산서의 저작자들과 같은 울타리안에 있다는 사실만 생각해도 가슴이 벅차구요...가끔 한번 만나뵙는 상상을 하곤 합니다.^^
감사합니다.
산서회로 오시면 됩니다.상상이 현실이 됩니다.
자료 잘 감상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