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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원 꽁트 5제
김만경의 비련
김만경 평야를 스쳐온 4월의 바람은 성산공원 벚꽃 잎을 하얗게 흩으려 놓았다.
오늘은 김제초등학교 봄 소풍가는 날이다. 성산공원 안에 들어선 5학년 1반 반장 이대성은 2반 반장 김순이 머리 위에 사뿐히 내려앉은 벚꽃 잎을 털어주었다.
순이는 얼굴이 붉어지면서 친구들의 눈치를 살피다가 대성의 등을 가볍게 때렸다. 힐끗 돌아본 대성은 웃고 있는 순이의 까만 속눈썹에 마음이 끌렸다. 웃을 때 예쁜 볼우물에 마음 설레기도 했다.
읍내에서 서로 이웃에 사는 대성과 순이는 아침마다 함께 학교를 다녔다.
순이 아버지는 동진수리조합장을 지내고 있어서 가정형편이 부유하다.
대성 아버지는 소규모 문구점을 꾸려가느라 형편이 어렵다. 그러나 두 사람은 서로 반장을 놓치지 않으려고 경쟁적으로 공부를 했다.
대성은 김제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아버지 따라 군산으로 이사하여 그곳에서 중고등학교를 다녔고, 순이는 김제에서 학교를 다녔다.
대성은 일요일마다 김제행 시외버스를 탔다. 두 사람은 흥복사의 절경을 찾아다니며 괴테, 하이네 시를 줄줄 외웠다.
순이는 장래 여류시인이 될 것을 다짐했고, 대성은 소설가가 되기로 약속했다.
그들은 꿈을 키우기 위해서 전북대학교 국문과에 입학했다. 여름이면 덕진 연못에서 보트를 탔고, 밤에는 덕진공원 이씨 왕릉 숲 속에서 달빛을 즐겼다. 대성은 순이의 블라우스 너머로 쏟아지는 달빛에 마냥 황홀하기만 했다. 대낮처럼 밝은 푸른 달빛은 순이의 가슴을 달구었다. 순이는 느닷없이 대성의 목을 껴안고 뜨거운 입술을 불태웠다. 두 사람은 끌리듯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순이가 대학교 3학년 되던 해 집안에서 혼담이 오고갔다.
“여자가 대학은 더 다녀서 뭐해? ”
결국 좋은 신랑 만나는 것이 목적 아니냐는 적극적인 부모의 뜻에 따라 서울에서 3대째 금은방을 운영하는 박 씨 가문 맏아들과 혼례를 치르게 되었다.
순이가 김제에서 시집가던 날, 대성은 예식장 근처를 맴돌며 먼 발치에서 결혼식을 지켜보았다.
축하연도 끝나고 하객들도 뿔뿔이 흩어졌다.
얼마 후, 풍선으로 장식한 하얀 고급 승용차 안에 나란히 앉아있는 신랑 신부를 보는 순간 대성은 눈앞이 캄캄했다.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정신이 가물가물해지면서 다리에 힘이 쏙 빠졌다. 그때, 대성은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결심을 했다.
“오냐! 이 촌년! 두고 보자. 나를 버리고 부잣집 아들한테 시집을 가? 내가 기어코 성공해서 복수할 거다.”
대성은 쓰라린 가슴을 안고 성산공원으로 달려갔다. 넋을 잃은 채 얼마가 지난 후, 김만경 벌판으로 사라져가는 노을빛을 바라보며 대성은 황소울음을 터트렸다.
스물다섯 된 대성은 대학을 졸업하자, 이내 순이 뒤따라 무작정 서울행 기차에 올랐다. 그리고 닥치는 대로 일을 찾아다니다가 쌍방울 회사에 입사하였다.
대성은 때때로 어려운 일과 좋은 일이 있을 때마다 순이를 떠올리고 이를 악물었다.
어언 10여 년이 지났다. 대성은 어느 정도 기반이 서게 되자 여기저기서 중매가 들어왔다.
서른 다섯 노총각 대성은 군산에 사는 친지의 중매로 혼인 날짜를 받았다.
그가 장가가는 날, 신부의 얼굴에는 자꾸만 첫사랑 순이의 속눈썹이 아른거렸다. 순이의 희고 동글납작한 얼굴이며 눈꼬리가 약간 처지긴 했지만 초승달 같은 눈웃음이 떠올랐다.
대성은 정신을 가다듬고 가까스로 혼례식을 마쳤다.
그리고 성실한 남편, 훌륭한 아버지로 열심히 살아가는 동안 중소기업 회장자리에 앉게 되었다.
대성은 군산에다 자리를 잡고 55년을 살아오면서 꼬박꼬박 일기를 써왔다. 말단 사원부터 회장 자리에 오르기까지 꿈속 같은 역사를 소설로 역어낸 것이 뜻밖에 영광스런 소설가로 등단을 하게 되었다.
대성은 드디어 재물과 명예를 한 몸에 받았다. 그러나 볼우물에 눈웃음 치던 첫사랑 순이의 청순한 모습은 아직도 풋과일 향기로 남아 있었다.
순이가 시집가던 날, 이를 악물고 결심했던 때가 엊그제 같았는데, 기어코 해냈다는 승리감에 대성은 목에 힘이 주어졌다.
벚꽃 꿀벌내음이 바람에 묻어나는 아침이다.
J신문을 받아든 대성은 IMF시대 구조조정 감원 기사를 읽고 씁쓸한 표정으로 이리 뒤적 저리 뒤적하다가 문화면을 보는 순간,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4월 11일 오후 3시 서울 신문로 한글회관에서 거행하는 M문학상 수상자 발표가 눈에 띄었다. 거기에 뚜렷한 활자로 이대성 이름과 사진이 함께 실려 있었다.
대성은 제일 먼저 순이가 생각났다. 그리고 그녀가 이 기사를 보았을까? 하는 생각을 떠올리며 출근을 했다.
화장실로 들어간 대성이 자리로 돌아와 앉자마자 전화벨이 울렸다. 잠시 후, 노크와 함께 비서실 미스 김이 사뿐히 다가와서 수화기를 들어 이대성 회장에게 건네고 나갔다.
“네! 이대성입니다.”
“…….”
“여보세요? ”
대성은 문득 머리 속에 순이를 상상하면서 다급하게 ‘여보세요’를 반복했다.
그때, 말문을 열지 못하던 상대편 음성이 가늘게 떨려왔다.
“안녕하세요? 축하드립니다.”
순간 대성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순이? 순이지? ”
대성은 수십 년이 지났어도 순이의 음성임을 금세 알아챘다.
실로 얼마만인가? 사춘기 때의 설렘 같은 첫사랑이 다시금 대성의 가슴에서 소용돌이를 쳤다. 마음 속으로 애타게 기다렸지만 막상 현실로 부닥친 순이의 축하전화를 받고 보니, 대성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어리둥절했다.
“궁금했어요. 뜻을 이뤄서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모두 순이 덕택이지.”
짧은 대화였다.
대성은 후르르 타오르는 불길을 안으로 삭이며, 애써 태연하게 말하고, 시상식 날 만나기로 약속을 했다.
대성은 닷새 후 문학상 시상식에 갈 준비를 철저히 했다.
“코를 납작하게 해줘야지…….”
대성은 마음 속으로 작심하며 까만색 승용차 그랜저를 매일 아침저녁으로 광이 번쩍번쩍 나게 닦았다. 구두도 외출용을 골라 닷새 동안 닦고 또 닦았다.
대성은 순이를 만난다는 반가움과 평생 잠재해 있는 야릇한 복수심이 번갈아 가슴을 부풀게 했다.
시상식 날 아침이다.
대성은 말쑥한 차림으로 집을 나섰다.
식장 안에는 단상 양쪽으로 3단 축하화환이 겹겹이 들어섰고, 화분, 꽃바구니로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었다.
대성은 수상자 석에 앉아서 식이 진행되는 동안 줄곧 하객들을 살폈다.
순이가 어디쯤에 앉아 있을까? 마음 속으로 그녀의 모습을 상상하면서 내빈석을 주시했다. 그러나 대성은 끝내 순이를 발견하지 못한 채 시상식이 끝났다.
대성은 실망과 약간 흥분된 표정으로 건성건성 하객들과 악수를 나누고 있었다.
그때, 서너 발치에서 뚱보 할머니가 꽃다발을 들고 어색한 미소를 띤 얼굴로 대성을 바라보고 있었다.
대성이 그녀의 얼굴을 자세히 살피는 동안, 볼우물은 어릴 때 순이 비슷하지만, 푸르뎅뎅한 높은 코에, 생 고막을 까놓은 듯 쌍까풀 눈두덩이 벌겋게 부어있었다.
순간, 까만 속눈썹 첫사랑의 꿈이 와르르 무너진 대성은, 섬뜩하여 그만 눈을 딱 감아버렸다.
방콕 할머니
뙤약볕이 불항아리로 이글거리는 삼복더위다.
산과 바다가 푸르름으로 기가 넘치고 있다.
이맘 때, 모든 사람들은 잠시 일손을 멈추고 휴가를 떠나기에 바쁘다.
해외로 훨훨 원정을 가기도 하지만, 국내 근교 푸른 숲 속 시원한 산사를 찾아 더위를 보내는 사람도 많다.
여행은 일상의 틀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며, 생활의 재충전이 되기도 하다.
8월 첫째 토요일이다.
전주 삼천동 H아파트에 살고 있는 방콕 할머니는 서울에서 손녀가 온다는 전화를 받고, 찬거리를 사러 현관문을 나섰다. 아파트 정원을 지나 길 건너 슈퍼 앞에 이르렀을 때다.
“어디 가세요? ”
얼굴이 검게 그을린 이금순 할머니가 빙그레 웃으며 다가오고 있었다.
“어머나! 어딜 갔다 오시오? ”
“나? 하와이…….”
“벌써 다녀오시는구만…….”
“동갑네는 어디 안 가시오? ”
“나? 나야 방콕이지…….”
“그래? 소문도 없이 좋은 데 갔다 오셨구만.”
“해외 방콕이 아니고, 우리 집 방콕, 방구석에 콕 박힌다는 말 벌써 잊었소? ”
“아하! 참 그렇군. 깜빡했네. 그래서 동갑네 별명이 방콕 할머니라 했지? ”
두 사람은 서로 손을 잡고 한바탕 웃었다.
그들은 일찍 홀로 된 동갑네다. 10년 남짓 같은 아파트에서 마주보고 살면서 서로 허물없이 동갑네라 부른다. 가끔 국내 여행도 즐기고, 서로 젊었을 적 요리솜씨를 발휘하여 맛있는 음식을 해 놓고, 초대하면서 친하게 지내는 사이다. 다만 ‘휴양체질’인 방콕 할머니는 국내 여행을 즐기는 편이고, ‘여행체질’인 금순 할머니는 좀 다르다.
금순 할머니는 특별한 지병은 없어도 가끔 시름시름 앓다가도 해외여행 계획이 서고, 비행기에 오르기만 하면, 언제 아팠느냐는 듯이 금세 기운이 솟는다. 그래서 적어도 1년에 한 번은 꼭 해외 나들이를 하고 나야 직성이 풀리고 건강을 유지한다.
방콕 할머니가 찬거리를 사들고 현관에 들어서자, 전화벨이 요란했다.
“임마! ”
5년 전 남편 따라 LA로 이민 간 고명딸 현정이다.
“오냐, 현정이냐? ”
“엄마! 금년 생신은 칠순이네. 강서방이 비행기표 예약해서 오늘 아침에 보냈으니까, 꼭 오셔야 해요.”
“얘야, 나 비행기 한 번도 안 타봤는데, 어떻게 혼자 가냐? ”
“괜찮아, 비행기 타고 그냥 오시기만 하면 돼요. 우리가 마중 나갈 테니까.”
9월 5일.
한가위를 일주일 앞둔 방콕 할머니는 전주에서 새벽 첫 고속버스를 탔다. 아담한 키에 이목구비가 또렷하여 야무진 인상을 주는 방콕 할머니는 평소에 악세사리를 즐기지 않기 때문에 모처럼의 해외여행임에도 몸단장에는 예외가 아니었다.
그러나, 방콕 할머니에게는 특별한 매력이 있다. 양쪽 귓볼 한가운데에 깨알만한 검은 점이 있어 자연스럽게 귀걸이가 되어 눈길을 끈다.
방콕 할머니가 인천공항에 도착하자, 서울에서 살고 있는 아들이 배웅을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방콕 할머니는 아들의 안내를 받아 10시 출발하는 아시아나 항공기에 무사히 올랐다.
방콕 할머니는 딸을 만나러 가는 설렘과, 난생 처음 비행기를 탄다는 두려움 때문에 아침도 드는 둥 마는 둥하고, 오로지 LA까지 9시간 남짓 걸린다는 예비지식만으로 출발을 했다.
기내에 들어선 방콕 할머니는 상냥한 승무원 아가씨의 안내를 받아 자리에 앉았다. 마침 창쪽으로 젊은 커플이 앉아 있어서 방콕 할머니는 안도의 숨을 쉬었다.
잠시 후, 비행기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비행기는 조금씩 높이높이 올랐다. 방콕 할머니는 가슴이 두든거렸다. 할머니는 안전벨트를 다시 한 번 꼭 묶고, 의자 손잡이를 힘주어 잡았다. 그리고 자신이 공중에 떠 있다는 생각을 하자, 발바닥이 간질간질했다. 금방이라도 수 만길 아래로 떨어질 것만 같은 생각에 온 몸은 긴장감이 돌았다.
옆자리에 앉아있는 한 쌍의 젊은 커플들은 마냥 즐거운 듯 창문 커튼을 열고 감탄사를 연발하고 있었다.
“와─! 바다다. 하늘이다. 저 구름 좀 봐! ”
이에, 방콕 할머니는 두려움 반 호기심 반으로 슬쩍 훔쳐보듯, 창밖을 내다본 순간, 바다인 듯, 하늘인 듯, 분간할 수 없는 푸른 광경에 사뭇 황홀했다.
방콕 할머니는 자신이 탄 비행기가 푸르디푸른 바다 위에 붕 떠 있다는 사실과 구름을 가르며 날아가고 있다는 현실에 오금이 저려 와서 그만 눈을 딱 감아버렸다.
방콕 할머니의 가슴이 가까스로 진정이 되자, 푸른 하늘과 흰 구름이 눈앞에 다가왔다. 평소에 간간이 시를 쓰고 있는 방콕 할머니의 가슴에 휘파람 소리가 들리는 듯싶었다.
“사나이란 상처가 있어야지, 손을 턴 휘파람 소리에 구름이 흘러 간다.”
푸른 하늘에 흘러가는 흰 구름에 매료된 방콕 할머니의 가슴에서 무심코 이동주 시인의 시가 흘러 나왔다.
“뭘 드시겠습니까? ”
산뜻한 미소로 다가온 미녀 승무원이 음료수를 날라와서 물었다.
방콕 할머니는 고개를 저었다. 사실은 아까부터 속이 탔다. 시원한 물이라도 한 모금 마시면 긴장감이 좀 풀릴까 싶었는데, 막상 음료수를 보는 순간 물 생각이 싹 가셨다.
점심시간이 되었다.
승무원 아가씨는 앞에서부터 질서 있게 조용조용히 식사를 운반하고 있었다. 주위에서 구수하고 향긋한 음식 냄새가 방콕 할머니의 코끝에 맴돌았다. 방콕 할머니 앞에 음식이 배달되어 왔다. 할머니는 또 고개를 저었다. 승무원 아가씨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지나갔다.
방콕 할머니는 식욕에 대하여 꾹 참기로 했다. 그리고 애써 이런 저런 생각에 잠겨 있었다.
오후 7시, 드디어 LA에 도착했다.
방콕 할머니는 정신을 가다듬고 사람들을 따라 기내에서 나왔다.
시장기에 뱃속이 매스꺼운 채, 눈이 천리쯤 들어간 방콕 할머니는 마중 나온 딸 내외를 보자마자 다급하게 말했다.
“얘야! 배고파 죽겠다. 어디 가서 요기부터 하자.”
“엄마! 기내에서 음식 나오는데, 안 잡수셨어요? ”
“돈 아까워서 아무 것도 안 먹었다.”
“네? 그거 다 공짠데……. 비행기표에 다 들어있는데…….”
연인과 애완견
삼한사온을 제끼고 영하 8 ~ 9도를 오르내리는 섣달, 토요일 오후 3시.
유희숙과 이경훈은 서울 ‘남산식물원’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했다.
희숙은 교보문고에서 시집 《바람난 살구꽃처럼》을 사들고 경훈을 만나러 버스에 올랐다.
두 사람은 이제 연인으로 2개월째 접어들었다.
그들은 일주일 동안의 일상에서 잠시 벗어나고 싶은 마음에서 남산식물원을 찾기로 했다.
“희숙아, 여기! ”
경훈은 식물원 입구에 들어서서 먼저 와 있는 희숙을 부르며, 키 큰 나무처럼 손을 번쩍 들었다.
“어! 어쩜, 딱 3시다. 좀 일찍 오지…….”
희숙은 온실 속 꽃처럼 부드러운 미소를 흘렸다.
“나 보고 싶었구나! ”
“몰라…….”
두 사람은 손을 꼬옥 잡고 푸르름으로 생기 넘치는 실내를 거닐었다. 희귀종 식물 이름을 들여다보고 서로 눈빛이 부딪치자, 씽긋 웃었다. 그럴 때마다 두 사람의 가슴은 기쁨으로 물결쳤다.
도심 속의 ‘생태섬’이라고 불리는 ‘남산식물원’에는 세계 각지에서 생산되는 수백 종류의 선인장과 희귀한 열대식물들이 눈길을 끌었다. 그들은 마치 밀림에 들어온 듯 자연의 아름다움에 흠뻑 취했다.
한참 후, 희숙과 경훈은 ‘남산식물원’에서 나와, 나목과 상록수가 어우러진 외진 산책길로 들었다.
희숙은 경훈의 반코트 주머니에 손을 넣고 걸었다.
경훈은 주머니 속 희숙의 손에서 신비감을 느끼며, 산책길에서 조금 떨어진 한적한 곳을 찾았다.
그리고 비밀스런 반반한 돌 위에 손수건을 깔고 희숙에게 앉기를 권했다.
“남산 평수坪數가 얼마인지 알아? ”
경훈이 말했다.
“글쎄…….”
“알아둬. 자그마치 89만여 평, 거대한 공원이지. 무엇보다도 평지로 잘 닦여진 조깅코스가 많아서, 누구에게나 신선한 공기를 공짜로 마시게 한다는 점이 큰 축복이지.”
“정말 그러게.”
“그 상쾌한 공기를 마시려고 매일 아침 조깅 오는 팬들이 꽤 많다고들 해.”
“우리도 근처에서 살면 매일 아침 만나서 그 신선한 공기 맘껏 마실 텐데……. 아쉽다. 그치? ”
“나중에 이 근처에서 살면 되지.”
“맞다.”
희숙은 손뼉이라도 칠 듯 기뻐하며 남산 부근에 대해 물었다. 경훈은 뭐니뭐니해도 남산순환도로를 빼놓을 수 없었다.
“남산순환도로는 남측과 북측이 있는데, 남측 순환도로에서 서울을 내려다보면, 콩나물시루처럼 빽빽이 들어선 우람한 건물들의 모습을 볼 수 있고, 북측 순환도로에서 보면, 서울 뒷동네의 아기자기한 삶을 읽을 수 있지. 또 거기에 석호정이 있거든. 그 석호정을 지나, 필동 약수터에서 잠시 목도 축이고, 서울 유일의 필동 한옥마을도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지. 제갈공명을 모셨다는 목멱산 와룡묘까지 3 ~ 4㎞ 거리에서 즐길 수 있어서 참 좋은 환경이지.”
희숙은 남산 주변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문득 경훈이 일본 ‘쏘니’ 회사에 출장 간다는 말이 번쩍 떠올랐다.
“참, 월요일부터 일본 출장이랬지? ”
희숙이 물었다.
“어.”
“며칠 동안? ”
“일주일.”
희숙은 갑자기 한기를 느끼고 몸을 움츠렸다.
“추워? ”
“음.”
“그럼 군불 지피자.”
경훈은 느닷없이 키스를 퍼부었다.
그리고는 희숙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사랑해’를 귓전에 속삭였다. 희숙은 기다렸다는 듯이 두 손으로 경훈의 장발을 움켜쥐고 뜨거운 입술로 경훈의 얼굴을 더듬었다.
얼마쯤 지나자, 그들이 앉았던 얼음 같은 납작한 돌은 온기가 돌았다. 아마도 두 사람의 가슴 속 뜨거운 불길을 흠뻑 빨아들인 이유가 아닐까 싶다.
시장기도 들고 체온이 내려간 두 사람은 몸도 부들거렸다.
그들은 꽁꽁 얼었던 아랫도리의 근육이 풀린 채, 서서히 국립극장까지 조깅코스로 내려왔다.
월요일, 희숙은 인천공항에서 경훈을 배웅하고 돌아오는 길로, 곧장 친구 김순애를 찾아갔다.
허전한 마음으로 집에 들어가기가 싫었다.
일산 주엽역에서 1번 출구로 나온 희숙은, 순애가 운영하는 애완견센터로 들어갔다.
“나, 왔다.”
“어서 와. 공항에서 오는 길이니? ”
순애는 치와와에게 옷을 입히면서 희숙을 반겼다.
희숙은 치와와를 보는 순간, 경훈의 얼굴이 떠올랐다.
“나, 기르기 쉬운 것으로 하나 주라.”
“뭐? 니가 웬일이냐? 가슴이 뚫렸구나. 아님 애인 대타? ”
순애는 평소에 애완견을 별로 좋아하지 않던 희숙의 말에 의외란 듯이 놀랬다.
“그럴래? 아주 좋은 생각이다.”
순애는 털이 짧고 영리한 것으로 검정색 치와와를 권했다.
“쾌활하고 잘 놀고 건강해.”
“그래? 기왕이면 남자로 줘.”
“OK! 잘 키워 봐. 심심치 않다, 너! 어쩌면 애인도 깜빡 잊을 수도 있으니까 너무 빠지지 말고…….”
순애는 케이지 속에 잠자리와 화장실을 함께 넣은 치와와를 희경에게 건넸다.
“쓰다듬어 주고 예뻐해 주면, 빨리 정이 드는데, 있잖니. 옛말에 개와 여자는 가까이 하면 버르장머리가 없고, 멀리 하면 원망을 품는다는 말이 있으니까 아무리 애완견이지만 처음부터 길을 잘 들여야 한다. 그리고 주의할 것이 있어. 치와와는 머리뼈 한 부분에 천문개존泉門開存이라고 구멍이 열려 있어서 머리를 때리는 일은 절대 금물이니까 특별히 조심하고, 알았지? ”
순애의 당부를 새기며 집으로 돌아온 희숙은 우선 거실에 치와와를 풀어놓았다.
치와와는 똘람똘람 한동안 낯선 주위를 돌아보더니, 희숙을 빤히 쳐다보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툭 불거진 까만 눈동자가 유난히 반짝거리고 예뻤다.
희숙은 치와와에게 ‘해피’라고 이름표를 달아주었다. 그리고 불끈 들어 안았다.
‘해피’는 희숙이가 잠자리에 들 때면, 어느새 쪼르르 달려와 희숙의 가슴으로 파고들었다.
경훈이 일본으로 출장 떠난 지 삼일째 되는 날이다.
희숙이 잠자리에 들면서 ‘해피’를 쓰다듬으며 즐기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희숙아! ”
“어? 경훈이구나! ”
뜻밖의 전화에 희숙의 가슴이 뛰었다.
“왜 그렇게 놀라? 지금 뭐하고 있어? ”
“어? 어! ”
“보고 싶어도 조금만 참아.”
“알았어. 일 잘 보고 와! ”
희숙은 치와와를 데리고 온 후, 조금씩 마음의 여유를 느꼈다.
하루도 안 보면 못살 것 같은 경훈을 잠깐씩 잊고 있었다.
“아가야, 우리 아가야! 맘마 먹자! ”
‘해피’는 어느새 희숙의 가족이 되었다.
희숙이 외출에서 돌아오는 날이면, ‘해피’는 꼬리를 흔들며 가슴까지 훌쩍 뛰어오른다. 그리고는 정신을 차릴 수 없이 온 얼굴에 키스세례를 퍼붓는다.
곁에서 이런 모습을 볼 때마다 희숙 어머니는 기겁을 했다.
드디어 경훈이 귀국하는 날이다.
희숙은 아침부터 설레는 마음으로 인천공항에 마중 나갈 준비를 했다.
‘해피’에게 브라운 색 옷을 입히고, 목엔 빨강 나비넥타이로 코디를 마쳤다.
희숙은 신사차림으로 단장을 한 ‘해피’를 안고 지하철 5호선에 올랐다.
얼마쯤 달리던 전동차 안에서 ‘해피’가 몸부림을 치며 끙끙거렸다.
희숙은 한사코 ‘해피’를 달랬다.
“아가야, 아가야, 예쁘지? 뚝! ”
희숙이 연신 ‘아가야! ’를 부르며 애를 태우고 있었다.
그때, 곁에서 그 모습을 안타깝게 지켜보던 어느 노인의 입에서 참다못해 한 마디 불쑥 튀어나왔다.
“쯧! 쯧! 쯧! 어쩌다가 강아지새끼를 낳아가 저리 고생하노? ”
죽부인
햇살 따가운 7월이다.
오늘은 짙푸른 기운이 술렁이는 소서小暑이자, C사범학교 동창회 날이다.
나선심은 친구들을 만나기 위해 서울 종로1가 종각 옆 한일관으로 들어섰다. 선심은 입구에 서서 단정한 유니폼 차림으로 맞아주는 종업원 아가씨를 따라 2층으로 안내되었다.
그들은 거의 교직에서 퇴직한 동문인데, 한 달에 한 번 열두 명이 정규적으로 모인다.
방안에는 미리 와서 앉아 있는 김부자를 비롯하여 열 사람, 이덕분만 보이지 않았다.
이들은 덕분을 기다리는 동안 서로 안부를 주고받았다.
“금년은 10년 만에 오는 무더위라는데, 어떻게 보내지? ”
“그러게, 그게 말이지, 중국과 일본, 아시아 일대를 뜨겁게 달구고 있는 북태평양 고기압 때문이라고 하는데 어쩌겠어…….”
“그래서 전화로 잠깐 말했듯이 요즈음 웰빙 바람이 한참이잖아. 우리도 이번에 웰빙 여행 떠나자.”
“웰빙? ”
“그래, 웰빙! 신체적 건강과 정신적인 편안함을 기반으로 한 여행 말이야. 이제 우리는 바쁘게 돌아다니는 여행보다도 한 곳에 머물면서 여유롭게 시간을 즐기는 것이 좋지 않겠어? ”
“그렇고 말고, 아주 좋은 생각이다. 또 지금은 노마디즘 시대가 아닌감? ”
여행 이야기에 한참 꽃을 피우고 있는데, 덕분이 활짝 웃으며 들어왔다.
“늦어서 미안.”
덕분은 선심이 옆으로 다가 앉았다.
“무슨 이야긴데, 계속해 봐…….”
덕분의 말을 받아 선심이가 분위기를 띠웠다.
“애기야, 우리 여행 계획하고 있었다.”
“애기야? ”
“그래, 애기야, SBS 연속드라마 <파리의 연인> 안 봐? ”
“왜 안 봐, 우리 그이는 드라마보다도 바라보는 내 얼굴이 더 가관이란다. 그래서 내가, ‘어이구 저 한기주 반 만 닮아봐’ 했더니, ‘애기야, 자자.’ 해서 어이 없이 한바탕 웃었지.”
“다들 젊어서 좋구나. 하기야 백년을 살아도 마음은 청춘이니까…….”
그들은 갑자기 물고가 터진 양 극중 대사가 줄줄 흘러 나왔다.
“애기야, 가자! ”
“우리 애기 놀랬잖아.”
듣고만 있던 부자가, 가슴에 손을 대고,
“이 속에 너 있다.”
잠시, 젊은 시절로 돌아간 그들은 한 마디씩 흉내 내면서 크게 웃었다.
“우리가 이러는데, 요새 2,30대들은 어쩌겠어. 통화할 때, 건네는 첫 마디는 당연히‘애기야’라고 하겠지.”
그뿐인가, <파리의 연인>이 방영되면서 각 직장에서도 유행처럼 대사를 즐긴다.
정오가 되면 누군가가 장난기가 발동하여,
“애기야, 점심시간이다.”
하면, 아무리 무뚝뚝한 상관이라도 웃음을 참지 못한다.
이야기하는 동안 냉면이 나왔다.
“많이 잘라주세요.”
선심이가 말했다.
“음식에도 ‘기氣’라는 것이 있어서 잘라먹으면 ‘기’가 빠져서 영양가가 떨어진다는데 그냥 먹어.”
덕분이가 열무 동치미 국물을 한 수저 뜨면서 이야기는 다시 웰빙 여행으로 이어졌다.
“우리가 휴가로 떠나기엔 아무래도 ‘괌’이 좋겠다.”
“나는 두 번 갔다 왔는데…….”
“나는 세 번 다녀왔다.”
“사실 이제 우리는 건강을 지키기 위해서 열심히 운동하고 유기농 채소를 먹고 아름다운 풍경을 감상하면서 한가로이 거닐고 그래야 해.”
선심은 ‘괌’에 대해 더욱 열을 올렸다.
“‘괌’하니까 태평양 전쟁이 생각난다. 엊그제 신문을 보니까 아키히토(明仁) 일왕의 당숙인 아사카노 마사히코(朝香誠彦, 62)가 백제무령왕릉을 참배했다던데 참 기분 좋은 일이야. 일본 왕족의 백제왕릉 참배는 사상 처음이지. 그리고, 아키히토 일왕은 2001년 ‘무녕왕의 손녀 디카노니 가사가 일본 50대 왕인 간무(桓武)를 낳았기 때문에 나는 백제의 피를 이어 받았다’고 말한 사실이 있잖아, 역사가 사실로 밝혀지는 시대가 왔지.”
동창생들은 처음 듣는 듯 모두 놀라는 분위기였고, ‘괌’은 이미 다녀 온 사람과, 아직 안 가본 사람의 의견들이 분분했다. 그러나, 선심의 제안 설명을 들었고, 또 웰빙 여행이니까 건강관리와 휴양 차원에서 편안히 쉬어야 하기 때문에 ‘괌’으로 가는 것이 좋겠다고 의견을 모았다.
닷새 후, 그들은 다시 만났다.
저마다 남편들의 반응을 털어놓았다.
“하이고 이 더위에 어딜 가? ”
“집에 가만히 앉아서 쉬는 것이 제일 좋은 피서지.”
“잘 됐네. 나도 제주도 골프 약속이 있어서 고민했는데, 따로따로 놀자고…….”
“갔다 와, 건강할 때, 부지런히 다녀.”
그런가 하면 100점짜리 남편도 있었다.
“여행을 제대로 하려면, 뭘 좀 알고 가야지” 하면서,
“‘괌’은 거제도 크기의 작은 섬이다. 한바퀴 휙 둘러보는데 4시간 정도면 충분할 만큼 작지만, 환상적인 섬이다. 곳곳에 숨겨져 있는 은밀한 비치‘관’의 역사를 알 수 있는 유적이나, 전쟁의 아픈 상처를 간직한 전적지다. 자연의 신비를 느끼게 하는 다양한 볼거리와, 여러 나라의 지배를 받았던 탓에 스페인풍, 일본풍, 미국풍, 그리고 차모르 원주민의 생활모습까지 각기 다른 문화를 간직한 이색적인 볼거리들이 가득하다. 특별히 차모르족의 전통춤을 볼 수 있다. 해질녘 해변 가에서 석양을 즐길 수 있고, 에메랄드빛 바다에서는 우리나라에서 수족관이나 가야 볼 수 있는 열대어들이 바다 속에서 같이 수영한다. ‘괌’은 가도 가도 즐거운 섬이다”라고 자상하게 풀어놓았다 한다.
“‘괌’은 신혼여행으로 가는 곳 아닌가? ”
“너무 환상적이니까 신혼여행으로 많이들 가나 봐. 참, 좋은 세상이지. 지금 사람들은 복 받은 거야. 우리 때는 꿈도 못 꿨지. 기껏해야 온천 아니면, 문화유적지를 찾아 경주 불국사 정도였으니까…….”
그들은 많은 이야기 끝에, 4박 5일의 웰빙 여행지를 남태평양 최고의 휴양지인 ‘괌’으로 정했다.
덕분은 간단한 여행가방을 챙겨 들고 집을 나섰다. 인천공항 내 외환은행 앞으로 한 사람 두 사람 모여들었다.
“선심이가 왜 아직 안 오지? ”
“글쎄…….”
덕분은 두리번거리며 주위를 살폈다.
“아니, 무슨 일이야? 모임 때마다 제일 먼저 나타나는 열성파가…….”
덕분의 말이 끝나자, 헐레벌떡 다가오는 선심이를 발견했다.
“왜 늦었어? 안 오는 줄 알았다.”
“안 오긴 왜 안 와.”
“무슨 일 있었어? ”
“있었지.”
“뭔데? ”
“알잖아, 우리 그이, 아무리 더워도 나를 꼭 끼고 자야 잠을 잔다는 거…….”
“그래서? ”
“그래서? 탱탱하고 톡톡 튀는 만점짜리 여자 하나 집으로 보내놓고 왔지.”
“뭐라고? ”
덕분은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아, 내 이름이 나선심 아닌감? 그래서 선심 좀 썼지.”
선심은 계속 놀라는 덕분을 바라보며, 웃기만 했다.
“아니, 뭐야? 빨리 말해 봐.”
그때, 선심은 초조하게 다그치는 덕분의 귀에다 대고, 속삭이듯 “죽부인! ” 하자, 곁에서 귀를 쫑긋 세우던 친구들이 박장대소로 출렁거렸다.
크리스털 시인
서울 은평구 불광사佛光寺 산자락에 은행잎이 수북이 흩날렸다.
이동찬 시인은 신선한 산바람을 마시는 아침 등산길에서 황금빛 양탄자를 밟는 촉감으로 고샅길을 내려왔다.
이동찬이 집 앞에 이르렀을 때, 뒷집 누렁 똥개가 꼬리를 내리고 물기를 흘리면서 대문을 기웃거리고 있었다.
그가 대문을 열자, 하얀 수캐가 기다렸다는 듯이 벼락같이 뛰어나와 누렁 암캐의 꼬리를 핥으며 따라갔다.
“백구야! 백구야! ”
동찬이 백구를 불러댔다. 백구는 들은 시늉도 않은 채 누렁 똥개를 따라갔다. 동찬은 문득 인사동 ‘예’다방을 운영하는 양숙희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는 숙희가 눈웃음칠 때마다 도톰한 아랫입술에 드러나는 까만 점에 매료되었다.
동찬은 58세의 가난한 시인이다. 가난해서 시심詩心이 깊어지는지 시심詩心이 깊어서 가난해지는지 알 수는 없지만, 그는 일상생활이 시詩다. 항상 공활한 가을 하늘처럼 맑고 순수한 그의 심성은 정녕 천생시인天生詩人이다.
그를 만나는 사람은 누구라도 천진난만한 어린이로 돌아간다. 그에게서 시의 향기를 맡을 수 있고, 가식 없는 사랑의 향기를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그와 마주앉아 있으면, 모든 시름을 잊게 되고, 마음이 수정처럼 맑아진다.
그는 입성이 변변치 않아 평소에 정장한 모습을 거의 볼 수 없다. 겨울에는 두툼한 점퍼로 찬 바람을 막아내고, 여름에는 반팔 차림으로 더위를 잊고, 봄가을에는 구김 없고 부담 없는 편한 옷으로 계절을 보낸다.
동찬은 얼굴 표정과 말씨가 조금 어눌한 편이지만, 그의 시세계詩世界는 우주의 근원, 죽음의 세계, 인생의 비통한 현실을 추구하는 등 매우 철학적이다. 그와 함께 있으면, 저절로 시심을 배우게 된다.
순수무구한 시인이다. 맑고 고운 심성을 지닌 그의 아름다움을 어찌 겉모양에 비하겠는가. 그래서 그와 가까운 문인들은 더러 크리스털 시인이라 부르기도 한다.
동찬은 또 아무하고나 친하지 않는다.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이라야 함께 시간을 보낸다. 그러한 동찬은 하루도 빠짐없이 ‘예’다방에 들른다.
‘예’다방 숙희에게 혼이 빠진 그는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면, ‘천사 같은 사람’을 소개시켜 주겠다며 손목을 잡고 앞장서서 ‘예’다방으로 끌고 가기 일쑤다.
숙희를 바라본 이李시인은 마냥 황홀하기만 하여 별로 말도 없고, 습관처럼 오른발만 떤다.
어쩌다 손님이 뜸한 시간이면 아름다운 이야기로 숙희를 감동시키기도 한다.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에 걸쳐 청淸나라 소주蘇州에 살았던 심복沈復의 아내 운芸이라는 여인은, 중국문학에서 가장 사랑스런 재녀才女였다. 여름에 연꽃이 필 때, 꽃이 저녁에 오므라들고 아침에 피어나는데, 운이는 작은 비단주머니에 엽차를 조금 싸서 저녁에 연꽃 화심花心에 놓아두었다가, 다음 날 아침에 그것을 꺼내서 샘물을 끓여 차茶 만들기를 좋아했다. 그 차향茶香은 유난히 좋았다”는 격조 높은 문학 이야기를 듣던 숙희는 한동안 연꽃 시심에 잠기기도 했다.
그때, 이李 시인은 숙희의 표정을 살피고 넌지시 말을 했다.
“나 원고료 받으면 근사한 호텔에 가자” 하면서 새끼손가락을 폈다.
숙희는 순진한 그에게만은 가끔 귓가에 흘리듯이 재미 반 농담 반 미소를 머금고 새끼손가락을 걸어 엄지로 도장까지 꾹 찍었다.
어느날, 이李 시인은 일년 남짓 공들여 온 숙희와의 약속을 실현하기 위해, 전 날 받은 원고료를 챙겨 넣고 모처럼 넥타이도 매고 집을 나섰다.
안국역에서 내린 이李 시인은 풍성한 가을 그림전시 플래카드가 펄럭이는 인사동 입구로 들어섰다. 푹신거리는 은행잎을 밟으며 ‘예’다방 앞에 이르자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李 시인은 가쁜 호흡을 고르며 계단을 내려서 ‘예’다방 문을 열었다. 조용한 실내는 슈베르트의 세레나데 선율이 잔잔하게 깔리고 있었다.
일요일이어서인지 10시 30분이 되었는데도 숙희는 아직 보이지 않고, 머리카락이 희끗거리는 할머니가 카운터를 지키고 있었다.
이李 시인은 할머니에게 목례를 하고 자리에 앉았다.
“할머니! 숙희 씨 아직 안 나왔습니까? ”
“곧 나온다고 전화 왔어요. 조금만 기다리세요.”
이李시인은 커피를 마시면서 뭉게구름처럼 담배 연기를 날렸다.
카운터 뒤에 조명등에 비친 액자 속 복숭아 정물화가 유난히 탐스럽게 보였다. 부산에서 미대美大 다닐 때, 그렸다는 숙희의 유화가 오늘따라 명화로 돋보였다.
금방 따다 놓은 싱싱한 복숭아처럼 보송보송한 털이 이李 시인의 가슴을 설레게 했다. 그는 카운터에 앉아 있는 할머니가 자신의 마음 속을 엿보고 있는 것만 같아서 얼굴이 후끈거렸다.
12시가 가까워도 숙희는 나오지 않았다.
이李시인은 줄담배로 시간을 보내면서 재떨이에 공초가 수북이 쌓여갔다.
“할머니! 담배 한 갑 주세요.”
“무슨 담배 드릴까요? ”
“아무거나 주세요.”
담배를 받아든 이李시인은 떨리는 손으로 담배 한 가치를 꺼내어 불을 붙였다. 그리고 연기를 내품으면서 상상의 나래를 폈다.
‘숙희가 오늘은 일요일이어서 늦잠도 좀 자고, 사우나도 다녀오고, 미장원에도 들르고…… 아무래도 시간이 늦어지겠지……’ 생각했다.
그는 지난 여름 내내 숙희를 바라보았다. 우유빛 목덜미, 소매 없는 블라우스 너머로 보이던 그 탄력, 그리고 그 은밀한 미소가 생각이 나자, 문득 사우나실 거울 앞에 서서 머리를 말리는 그녀의 누드가 떠올랐다.
이李시인은 가슴이 부르르 떨렸다. 그리고 오늘은 무슨 일이 있어도 약속대로 근사한 호텔을 가야 한다고 수 없이 머릿속에 다짐했다.
둘이 나란히 걸어가면 남의 눈에 띄니까 따로따로 가야 할런지, 택시로 함께 빨리 가야 할런지, 고민이었다.
뿐만 아니라 이럴 때, 그 흔해빠진 핸드폰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싶기도 했다.
먼저 가서 방값을 지불하고, 핸드폰으로 “나 지금 R호텔 몇호실이니까 빨리 오시오” 라고 연락을 한다면 얼마나 좋을까만은 핸드폰이 없어서 심히 안타깝기도 했다.
그러나, 막상 호텔방에서 숙희와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지, 또 어떻게 시작을 해야 할지 그것이 걱정되었다.
숙희가 웃으면서 순순히 들어줄까 하는 생각으로 이李시인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이李 시인이 볼 때, 숙희는 그냥 다방 주인이기보다는 여류화가女流畵家요 숙녀이다.
숙녀가 거짓말을 할 턱이 없으리라고 생각되었다. 새끼손가락을 걸고, 엄지로 약속 도장까지 찍었는데, 설마 이제 와서 시침 딱 떼고 돌아설 리가 없을 거라고 여겨지기만 했다.
이李 시인은 시간이 흐를수록 초조했다.
가슴이 몹시 뛰었다.
타오르는 가슴을 달래기 위해서 위스키티를 주문했다. 따끈한 위스키티 한 잔이 향긋하게 전신에 스며들었다.
이李 시인의 귀에는 음악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의 눈에는 복숭아 그림도 보이지 않았다.
두어 시간 기다리다 지쳐 위스키티 한 잔에 정신이 몽롱한 채 계속 가슴 뛰는 소리만 귀에 울렸다.
그때, ‘예’다방 문이 열리면서 숙희의 환한 미소가 실내를 핑크 빛으로 밝혔다.
“어머! 선생님 안녕하셨어예. 언제 오셨어예. 제가 너무 늦었지예……. 어젯밤 잠이 안 와서 선생님 시 <산새>를 줄줄 암기했지예.”
이李 시인은 그만 눈시울이 뜨거웠다.
“아침 일찍 나와서 지금까지 기다렸다.”
이李시인의 말에 숙희는 새삼 수줍은 듯 말했다.
“어머나, 어떻게 해예. 미안해예.”
숙희는 그제야 넥타이를 매고 새 옷으로 정장차림을 한 이李시인을 발견하고 방긋 미소지었다.
“오늘 좋은 일 있어예? ”
“가자! 나 어제 원고료 받았다. 지금 빨리 가자.”
이李시인이 숙희를 향해 정색을 했다.
“뭐라꼬예? 어디를 가예? ”
“호텔 가기로 약속했잖아? ”
“언제예, 아니라예.”
숙희가 펄쩍 뛰었다. 순간, 크리스털 같은 이李 시인의 두 눈은 사납고 무서운 호랑이 눈으로 급변하여 시퍼런 빛이 번뜩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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