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산[錦山] - 신비의 영약 고려인삼
금산(錦山)은 금수강산(錦繡江山)에서 의 줄임말로, 비단에 수를 놓은 듯한 아름다운 풍광을 간직한 땅 금산(錦山) 동쪽은 영동군·옥천군, 서북쪽은 논산시·대전광역시, 남쪽은 전라북도 완주군·진안군·무주군과 접한다.
금산 문화관광 http://tour.geumsan.go.kr/html/tour/index.html
영상포엠 한국 100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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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삼터(開蔘터) 남이면 성곡리
지금으로부터 1,500년 전 남이면 성곡리 개안이 부락에 강씨 성을 가진 선비가 부친을 여의고 모친마저 병이 들어 자리에 눕자 진악산 관음굴에서 정성을 들여 모친의 쾌유를 빌던 중 어느 날 꿈속에서 산신령이 현몽하여 “관음봉 암벽에 가면 빨간 열매 3개 달린 풀이 있을 것이니 그 뿌리를 달여 드려라”는 계시가 있어 그곳을 찾아가니 과연 그러한 풀이 있어 뿌리를 캐어 달여 드리니 모친의 병환은 완쾌되었고, 그 씨앗은 지금의 남이면 성곡리 개안 마을에 심어 재배하기 시작하니 인위적으로는 처음 재배가 된 것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당시 그 씨앗은 3개가 달리고 인삼의 모습이 사람의 형태와 비슷하다하여 “인삼”이라 불 리게 되었다고 한다. 1,500여 년 전에 최초로 성곡리 개삼터에 인삼을 심었는데 그 뜻을 기리기 위해 1983년 7월에 개삼각을 지었으며, 개삼각의 안에는 진악산 산신령이 강처사에게 인삼을 하사하는 그림이 있으며 개삼각 앞에는 강처사가 살던 고택을 재현해 놓아 현재에 이르고 있다
금산 인삼관 충청남도 금산군에 있는 전시관이다. 재배 역사가 1500년에 이르는 금산 인삼에 관한 자료를 주로 전시한다. 금산 인삼관은 금산군이 지역 특산물인 금산 인삼의 우수성을 홍보하기 위해 1998년 설립했다.
금산 인삼시장 전국 인삼 생산과 유통량의 80%를 차지한다는 금산 인삼시장은 단연 세계 인삼의 중심지이다. 금산 인삼을 취급하는 장소는 금산 약령시장, 금산 인삼국제시장, 금산수삼센터, 인삼쇼핑센터 등 다양하다. 1,200여개의 인삼약초상점이 있는 세계 최대 규모의 인삼약초시장입니다.
금산인삼축제[錦山人蔘祝祭] 전국 최대 규모의 인삼집산지이며 세계 최대 규모의 인삼·약초 시장이 있는 충청남도 금산군의 대표적인 향토축제이다.
금산 인삼 세계엑스포 조물주가 인간에게 내려준 신비의 명약! 인삼. 특히 고려 인삼이라고 불리는 우리 한국의 인삼은 그 효과와 명성이 널리 알려졌다고 합니다. 인삼의 성지라 불리는 금산에서 2006년에 이어, 2011년에도 두번째 인삼엑스포가 열린다 합니다.
금산 인삼백주[人蔘白酒] 1996년 2월 27일 충청남도무형문화재 제19호로 지정되었다. 도수는 43도이다. 이 술은 백제시대 때부터 제조되었던 것으로 전해지나, 기록에는 1399년 도승지와 이조판서를 지낸 김문기(金文起) 가문에서 대대로 내려왔다고 한다.
년근 3년근은 뇌두가 1개, , 5년근은 뇌두가 3개, 6년근은 4개다. 즉 뇌두숫자+2=년수
금산 천내리 용호석[川內里龍虎石] 제원면 천내리 1006
1973년 12월 24일 충청남도유형문화재 제4호로 지정되었다. 용과 호랑이 모습을 각각 2기(基)의 돌에 새긴 것이다. 천내리의 서쪽을 흐르는 천내강변 제원대교에서 북쪽으로 50m 지점에 용석(龍石)이, 그로부터 다시 북쪽으로 230m 지점에 호석(虎石)이 위치하고 있다.
1361년 홍건적의 난 때 안동에 피난가 있던 공민왕이 풍수지리설에 의하여 대길지(大吉地)를 찾을 것을 지사(地師)에 명하자, 지사가 태백산 지맥에 평사낙안 부사도강의 명당이 금주(즉 錦山)에서 동쪽으로 20리 지점에 있으니 왕릉이 될 지대라고 하여 왕이 자신의 능소로 작정하고 왕릉에 필요한 용석과 호석을 제작하였다고 한다.
금산향교 금산읍 상리 산 4
향교는 조선시대의 관립교육기관이자 선현(先賢)을 향사(享祀)하는 곳으로, 고을마다 건립되었다. 창건연대는 미상이나, 조선시대에 현유(賢儒)의 위패를 봉안, 배향하고 지방의 중등교육과 지방민의 교화를 위해서 하옥리 백학동(白鶴洞)에 창건되었다.
1684년에 지금의 위치로 이건하였으며, 1967년에 명륜당과 부속건물을 보수하였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대성전·명륜당·동무(東廡)·서무(西廡)·내삼문·외삼문·동재·서재·교직실·제기고·창고 등이 있다. 대성전 안에는 5성(五聖), 송조2현(宋朝二賢), 우리 나라 18현(十八賢)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보석사(寶石寺) 남이면 석동리 711
보석사는 통일신라 때 활동하던 조구대사가 885년(헌강왕 11)에 처음 지은 천년고찰이다. 금산 지역에 큰 가뭄이 든 해였다. 백성들의 고통이 심해지자, 조구대사는 가뭄을 해갈할 샘을 찾아 진악산에 올랐다. 대사는 산 기슭에서 커다란 바위를 찾아내고는 주장자(柱杖子)로 바위를 내리쳤다. 그러자 바위 아래에서 맑은 샘이 콸콸 솟아나왔고 이내 샘물은 금산 지방의 논과 밭으로 흘러들어 가뭄을 이겨낼 수 있게 했다.
대사는 그 영험한 바위를 지키고자 바위 옆에 암자를 짓고, 영원한 샘이 있는 암자라는 뜻으로 ‘영천암(永泉庵)’이라 했다. 제자들과 함께 수행하던 조구대사는 얼마 뒤, 암자 앞을 흐르는 개울을 건너편 산기슭에서 금을 캐내어 불상을 만들고, 절을 세웠다. 보석으로 지은 절이라는 뜻의 절집 이름 보석사(寶石寺)는 그렇게 지어졌다.
큰일을 이룬 누구라도 그러하듯이 보석사를 지은 조구대사도 나무를 심었다. 그는 다섯 제자와 함께 각각 한 그루씩, 모두 여섯 그루의 은행나무를 절집 앞의 언덕에 심었다. 여섯 그루는 불가에서 수행해야 하는 여섯 가지 덕목인 육바라밀을 상징하는 의미도 있었다.
무럭무럭 자라난 여섯 그루의 은행나무는 세월이 지나자, 한데 모여 한 그루의 나무로 합쳐졌다고 한다.
보석사 은행나무(천연기념물 제 365호)는 충남 금산의 대표적 자연유산이자, 무려 1100살이나 된 이 나무는 보석사를 처음 지었을 때 이곳에 자리 잡고 절집의 역사와 이 나라의 역사를 지켜온 유서 깊은 나무다. 이 은행나무는 나라에 큰일이 있을 때마다 울음소리를 내는 영험을 지닌 것으로 유명하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불에 탄 것을 명성황후가 중창해 원당으로 삼았고, 일제강점기에는 31본산의 하나로 전라북도 일원의 33개 말사를 거느렸다.
신안사(身安寺) 제원면 신안리 52번지
신음산 국사봉에서 내려온 지맥의 산록에 있는 신안사(身安寺)는 신라26대 진평왕 5년인 무염 무량선사가 창건한 고찰로 신안사라는 이름은 신라 마지막 왕 경순왕이 충북 영동군 양산면에 있는 영국사에서 수학할 때 이 절에 가끔 들러 유숙하였는데 주위환경이 산자수명하고 정적한 유수경으로 몸과 마음이 편안하다고하여 신안사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이라 한다. 전성기에는 대웅전과 극락전·진향각(眞香閣)·요묵당(寥默堂) 등 호화롭고 장엄한 건물이 즐비했고, 불상 또한 10여 위가 있었으며 3,000여 명의 승려들이 수행하는 거찰(巨札)이었다. 그러나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퇴락했으며 6·25전쟁 때 전각이 다수 불타고, 불경·불기 등의 여러 비품들이 소실되어 행방을 알 수 없다. 이때 불상은 금산군 진산면의 태고사(太古寺) 등으로 옮겨 지금은 5위만 남아 있다. <사진 : 신안사 7층석탑/극락전>
칠백의총[七百義塚] 금성면 의총리 216
사적 제105호. 1963년 지정. 충남 금산군 금성면(錦城面) 의총리 소재. 면적 7만 5240 m2. 1592년(선조 25) 8월 18일의 제2차 금산싸움에서 조헌 ·승장(僧將) 영규(靈圭) ·참봉 이광륜(李光輪) ·만호 변계온(邊繼溫) 등 700의사가 장렬한 전사를 하자 조헌의 문인(門人)인 박정량(朴廷亮) 등이 이 곳에 유골을 모아 큰 무덤을 만들고 ‘칠백의총’이라 하였다.
1603년(선조 36) ‘중봉조헌선생일군순의비(重峰趙憲先生一軍殉義碑)’가 세워졌고, 1634년에는 순의단(殉義壇)을 세워 해마다 8월 18일에 제향을 올렸다. 1647년(인조 25) 종용사(從容祠)를 건립하여 700의사의 신위(神位)를 모셨다. 일제강점기 말에 이르러 일제가 그 역사적 사실을 은폐하기 위하여 파괴한 것을 1963년에 정화작업을 하면서 묘역을 넓히고, 1968년에는 종용사를 다시 지어 묘역을 조경(造景)하였으며, 1976년에 기념관 ·칠백의사순의탑, 한글의 ‘일군순의비’ 및 관리사무소 등을 건립하였다
조헌[趙憲] 조선 중기의 문신·의병장. 김포출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옥천에서 의병을 일으켜 영규 등 승병과 합세해 청주를 탈환하였다. 이어 전라도로 향하는 왜군을 막기 위해 금산전투에서 분전하다가 의병들과 함께 모두 전사하였다. 뛰어난 학자로,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을 지지하여 이이의 학문을 계승 발전시켰다.
관직에서 물러난 뒤에는 옥천군 안읍밤치[안읍율치(安邑栗峙)]로 들어가 후율정사(後栗精舍)라는 서실을 짓고 제자 양성과 학문을 닦는 데 전념하였다
태조대왕 태실[太祖大王胎室] 추부면 마전리
1393년(태조 2)에 태조(1335~1408)의 태실을 마전리 태봉산(胎封山:이전의 만인산)에 조성하였다가 1928년 4월 조선총독부가 태를 창덕궁으로 옮겼다. 이후 태실은 파괴되었고 1993년에 비석과 여러 석물들을 모아 복원하였다. 이곳은 조선 초기에 한 시인이 만인산을 보고 산세가 깊고, 중첩한 산봉우리는 연꽃이 만발한 것 같고 99산의 물이 한곳으로 모여든다고 찬양한 곳이다. 이 소식을 들은 왕실이 이곳에 태조의 태실을 축조하였고, 옥계부사를 두어 관리하도록 하였다. 태봉산은 이전에는 만인산이라 불렀으나 태조의 태를 묻었다 하여 태봉산이라 부르게 되었다. 태를 묻었던 능선은 쌍봉낙타령으로 남향이며, 태봉산의 북풍을 막을 뿐만 아니라 햇빛이 잘 드는 곳이다.
태고사 진산면 행정리 산 29
대둔산 낙조대(大屯山 落照臺) 아래에 있는 사찰. 신라 신문왕 때 원효대사가 창건하였고, 조선시대에는 진묵대사가 재건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이 절에서 우암 송시열이 수학하였다고 전해지며, 절 입구의 바위에 ‘석문(石門)’이라는 우암의 필적이 움푹 들어가게 새겨져 있다. 대웅전은 석가모니불을 중심에 모시고 그 좌우에 문수, 보현보살을 모신 건물이다. 이 절의 대웅전은 원래 1,200년의 역사와 72칸의 웅장함을 자랑하던 건물이었으나 6.25전쟁 중에 불타 없어졌으며, 1976년에 복원된 현재의 대웅전은 목조건물에 기와지붕으로 되어있다. 원효 대사가 절터를 발견하고 3일간 춤을 추었다는 태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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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경명선생비[高敬命先生碑] 1984년 5월 17일 충청남도문화재자료 제28호로 지정되었다. 문인출신 의병장으로 임진왜란 당시 금산(錦山)에 침입한 왜군을 맞아 싸우다 순절한 고경명의 충혼을 기리는 비로 정확한 건립연대는 알 수 없다.
금산 깻잎
전국 깻잎의 40%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금산깻잎이 농가소득 효자작목으로 급 부상하고 있다. 최근에는 해외 수출은 물론 깻잎 가공품까지 생산하며 급성장하고 있다.
금산산림문화타운 금산의 푸른 숲과 맑은 정취를 만끽 할 수 있는 대규모 생태종합휴양단지인 금산산림문화타운은 ‘남이자연휴양림, 느티골산림욕장, 산림생태문화체험단지, 목재문화체험장 등의 시설을 갖추고 숲에서 즐길 수 있는 모든 문화를 체험 할 수 있도록 조성된 금산의 명소이다.
문배주 1986년 면천두견주·경주교동법주와 함께 향토술담그기로 무형문화재 제86호로 지정되었다. 처음 만든 사람이나 장소는 확실하지 않으나 평양 부근에서 만들기 시작했다고 한다. 문배를 사용하지 않았는데도 그 향기가 마치 문배와 같아서 붙은 이름이다. 알코올 도수(40도)가 높아 영구히 저장이 가능하다. 2000년 남북정상회담 때 두 정상은 술 한잔을 기울이며 팽팽한 긴장감을 풀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이 건배한 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