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 버스 터미널에서 걸어서 15분 남짓이면 닿는 곳에 강화 본당이 있어 강화도를 순례하는 이들을 안내해 준다. 성당에서 채 100미터가 안 되는 곳에 조선 시대 천주교인들에 대한 혹독한 박해의 현장이 있다.
울창한 나무들 속에 하얀 건물로 세워진 강화 본당 위쪽으로 조금만 걸어 올라가면 고려가 몽골의 침략에 항전하던 39년간의 궁궐터가 있다. 1232년 고려 고종 때 강화천도와 함께 세워진 궁궐터는 1964년 사적 제133호 '고려궁지'로 지정 보전되고 있다.
현재 이곳에는 조선시대에 건립된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5호인 강화유수부 동헌과 유형문화재 제26호인 이방청, 외규장각(2003년 복원), 강화 동종(1999년에 만든 복제품, 원래 종은 강화역사관으로 이동 전시) 등만 남아 있다. 1866년 병인박해 당시 이곳 동헌과 형방에서 천주교인들에 대한 극심한 고문이 자행됐다고 한다.
고려궁지 밖에는 교우들을 끌어내다 참수했던 처형지인 진무영(鎭撫營)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고 또 일부 주민들이 그 위치를 증언하기도 하지만 아직 정확한 고증에 의해 확인되지는 않고 있다. 다만 연구 결과 강화 성당 부근 농협 자리(현재 은혜 교회 자리) 근처로 추정되고 있다. 강화는 굽히지 않는 신앙의 현장이자 역사의 교육장이기도 하다.
약 2만 년 전 구석기 시대의 유물인 지석묘를 비롯해 단군 신화의 유적인 참성단과 삼랑성 그리고 고려 시대 항몽의 역사, 팔만대장경 및 금속활자와 고려자기 등을 꽃피웠던 곳이 바로 강화이다. 조선 시대에는 정묘호란, 병자호란,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운양호 사건, 강화도 조약 등 역사의 굵직한 사건들이 강화를 배경으로 이루어졌다.
수려한 자연 경관과 아울러 보물, 사적, 천연 기념물 등 모두 88점의 문화재들은 강화를 찾는 순례객들에게 신앙 교육뿐 아니라 살아 있는 역사 교육에도 큰 의미가 있을 것이다.
강화도를 찾는 순례자들이 둘러봐야 하는 곳으로는 그 외에도 갑곶 돈대, 황사영 생가 터, 일만위 순교자 현양동산 등이 있다. 인근의 통진과 김포 지역에도 신앙의 숨결이 서려 있는 곳들이 군데군데 있다. [출처 : 주평국, 하늘에서 땅 끝까지 - 향내나는 그분들의 발자국을 따라서, 가톨릭출판사, 1996, 내용 일부 수정 및 추가(최종수정 2011년 11월 8일)]
강화가 천주교와 특별한 인연을 맺게 된 것은 1839년 기해교난을 겪으면서였다. 그동안 천주교 신앙 유입의 통로는 육로뿐이었다. 하지만 육로의 경비와 기찰(譏察)이 심해지자 해로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이로 인해 강화도와 황해도 연안의 뱃길이 매우 중요하게 되었다.
강화도는 19세기 후반, 한국 역사에서 동서양의 사상과 문화가 만나 첨예한 갈등을 빚은 곳으로 상징되는 곳이다. 이러한 연유로 1866년 병인년부터 시작한 박해로 강화도에서 수많은 신자들이 순교하였으나 현재 알려진 순교자로는 1868년 5월 22일 진무영(鎭撫營)에서 최인서(崔仁瑞, 요한, 애오개 회장, 59세), 장치선(張致善, 張周基 요셉 성인의 조카, 59세), 박서방(朴順集 베드로의 형), 조서방(趙參奉의 부친, 50여세) 등이다.
특히 최인서와 장치선은 병인박해(1866-1871년)로 성직자 12명중 9명과 신자 10,000여 명이 처형되자 생존 성직자 중 한 분인 리델(Ridel) 신부를 배로 천진(天津)으로 탈출시키고, 서양 배를 불러다가 신교(信敎)의 자유, 남은 교우들의 구출, 성교(聖敎 : 천주교) 전파 등의 목적으로 상해(上海)까지 다녀왔다는 죄로 처형되었는데, 그들은 자신의 목숨을 내놓으면서까지 성직자의 보호와 신교의 자유, 그리고 복음 전파를 위해 노력하는 삶을 살다가 마침내 순교의 월계관을 받았다.
그리고 1871년 신미양요(辛未洋擾) 때 순교한 박상손(朴常孫), 우윤집(禹允集), 최순복(崔順福) 등이 갑곶나루터(甲串津頭), 일명 '막구터'에서 목을 베어 말뚝에 올려놓아 천주교를 경계하도록 하였다.
진무영은 조선시대에 해상경비의 임무를 맡았던 군영이며, 동시에 천주교 신자들의 처형지이기도 하다. 1700년(숙종 26년) 강화부(江華府)에 그 본영을 설치하고, 1779년(정조 3년) 통어영(統禦營)을 병합하였다가 1789년(정조 13년) 다시 분리하였다. 특히 1866년의 병인양요(丙寅洋擾) 이후, 외국 선박의 출입이 빈번하여 쇄국정책을 쓴 당시로서는 수도의 관문을 지키는 국방상 중요한 군영이었으므로, 그 유지를 위해 국가에서 포량미(砲糧米)라는 특별세를 설정하여 군영의 경비에 충당하였다. 1887년(고종 24년) 심영(沁營)으로 그 명칭이 바뀌었다. 진무영에는 강화유수(江華留守)가 겸임하는 사(使 : 정 2품) 1명, 중군(中軍 : 정 3품) 1명, 진영장(鎭營將 : 정 3품) 5명, 경력(經歷)이 겸하는 종사관(從事官) 1명, 총관(摠官) 4명, 파총(把摠) 10명, 초관(哨官) 63명, 교련관(敎鍊官) 10명, 기패관(旗牌官) 71명, 군관(軍官) 15명이 배치되었다.
일성록(日省錄, 1868년 5월 22일자)에 "사학죄인 장치선, 최영준(일명 인서)이 진무영으로 압송되어 효수(梟首, 목을 베어 매달아 둠)됐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진무영은 지금은 고인이 된 성지 연구가 한종오(베드로) 씨가 10여 년 전 문헌과 구전을 통해 성당 부근 농협 자리(현재 은혜교회 자리)를 진무영 터로 지목한 바 있다. 큰길에서 약 100m 성당 방향으로 올라오면 왼쪽에 은혜교회가 있고 이곳에 진무영 관련 건물이 있었고, 이곳에서 약 200m 더 가서 있는 강화 성당 있는 곳까지 정도가 진무영 터가 아닌가 하는 추측을 하고 있다.
강화성당 구내에 이들 4명의 순교를 기념하는 현판과 아담한 제대가 마련되어 있다. 2004년부터 성지를 개발하기 시작해 아직 미흡하나 문헌 연구와 고증 작업을 하고 있다.
'좌우포청등록'과 달레의 "한국 천주교회사" 등에 따르면 장치선은 제천 배론 신학교 집주인이던 장주기(요셉) 성인의 조카다. 그리고 최인서는 서울 아현(애오개) 회장이다. 이들은 병인박해로 성직자 12명 중 9명이 처형당하자 생존자 리델 신부를 중국 천진으로 탈출시킨 데 이어 상해에서 프랑스 신부들과 접촉했다. 리델 신부는 박해 참상을 프랑스 공사에게 알려 로즈 제독의 강화도 출병(병인양요)을 촉발한 장본인이다.
흥선대원군이 생각한 대로 천주교인들이 정말 서양 배를 불러들여 국가를 위태롭게 하려 했던 것일까. 그 답은 장치선이 중국에 다녀온 직후 재동에 사는 조주서와 나눈 대화록에 있다.
"서양배가 나라를 침범할 생각은 없나요?"(조주서)
"성교의 본뜻은 다른 사람의 나라를 빼앗는 법이 없고, 만일 성교가 널리 퍼지면 풍속 중 괴상한 것은 혹 바꿔지고 고쳐지는 법은 있소."(장치선) [출처 : 오영환, 한국의 성지 - http://www.paxkorea.kr,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