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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90831 (월) -
- 칠궁(七宮) - 역사이야기 (3)
* 엊그제 8/29일은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국치일(國恥日)”이었습니다.
그 때는 1910년 8월 29일이었는데 그 해가 “경술년(庚戌年)” 이었기 때문에
“경술국치(庚戌國恥)”라고 말하지요.
이래서 1392년 이성계가 나라를 세운 뒤 27왕 519년간 존속해 오며 “조선”에
이어 1897년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고친 나라는 없어집니다.
광복절과 국치일이 같은 8월에 있음이 무슨 까닭인지 마음이 가다듬어집니다.
그래서 “박과 식물들” 편을 잠시 뒤로 미루고 우리나라 역사 이야기를
한편 올리오니 우리의 과거를 한번 되돌아보시지요.
* 오늘은 오랜만에 좀 긴 이야기입니다.
여유 있게 한번 읽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다음에는 연속으로 “박과 식물들” 두 편을 올려서 씨리즈를 마무리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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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 북쪽은 북악산(344m), 동쪽은 삼청동과 삼청공원, 팔판동, 화동, 가회동
등이 있고 남쪽은 경복궁 그리고 서쪽은 궁정동, 청운동, 신교동, 효자동, 옥인동
등 등 인데요. 지난번 “복날” 이야기 했을 때의 “북촌”, “우대”의 동네이지요.
저는 초등학교와 중・고등학교를 그 근처에 있는 학교를 다녀서 동네지리도
꽤 밝고 또 즐거운 추억도 많이 있는데요. 초등학교는 없어져서 지금은 아파트와
여러 상가가 들어섰고 중학교는 없어지고 고등학교는 딴 데로 이사 갔지만
학교건물은 모양을 조금 바꾸어서 젊은이들을 위한 도서관으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최근 종로구청에서 이곳 “정독도서관”에서 허례허식을 없애고 알뜰결혼을
추진하고자 무료 결혼식을 올려주고 있어서 좋은 평판을 받고 있습니다.
이 자리는 원래 조선 초에는 사육신으로 유명하신 “성삼문”, 조선말에는 풍운아
“김옥균”의 집이 있었고 현재 옛 “도서관” 건물과 소격동 국군서울지구병원
(전 기무사)에서 옮겨온 옛 “종친부(宗親府)” 건물이 문화재로 등록되어 있습니다.
* 삼청동(三淸洞) :
“산청-수청-인청(山淸-水淸-人淸)”이라 하여 “삼청(三淸)"인데 “서울 도성
안에서 산과 물이 맑고 깨끗하여 사람의 마음조차 맑아지는 곳”이라는 뜻으로
도교(道敎)의 ”삼청도관(三淸道觀)“이 있어 하늘에 제사지내던 곳입니다.
- “춘향전”의 “이몽룡의 아버지 이판서” 와 “춘향의 아버지 성 참판”의 본가가
모두 삼청동에 있었다고 전해지는데 “이 도령”의 얼굴이 맑고 깨끗하고 또
미끈하고 준수한 것은 이 삼청동의 물로 매일 세수하고 목욕해서 그렇다나
뭐라나.... ㅎㅎ
- 학교 다닐 때 삼청동이 저희 “아지트”여서 맨 날 거기 가서 놀고 봄에는
꽃 따먹기, 여름에는 물놀이, 가을에는 단풍놀이, 겨울에는 스케이트 타기
했는데...
아!!! “아지트”라는 말은 저희 일곱 사람의 모임 중 한 아이의 집이 삼청동에
있으면서 무지 무지 부자였는데 그 아이(장남 임) 부모님이 친구들 열사람이고
스무 사람이고 가리지 않고 뭔가 해 먹이는 것을 인생 최고의 행복으로 알고
계시는 분이 계셔서 그렇게 되었었지요...
그리고 저희 학교는 여름에는 “수영(학교에 수영장이 있었음)”, 겨울에는
“스케이트”를 주 종목으로 가르치고 또 체육시험을 그걸로 봐서 저희
동창생들은 두 가지 운동 모두를 제법들 하는데 그래서 지금도 저희 후배들
중에서 수영이나 스케이트에서 국가대표가 많이 나오고 올림픽 금메달도 따곤
하지요..... 참, 옛날 얘기네...
* 소격동(昭格洞) :
위의 ”삼청도관(三淸道觀)“의 제사를 주관하던 ”소격서(昭格署)“가 있어서
동네 이름이 이렇게 붙었는데 조선조부터 임진왜란 때 까지 있었습니다.
지금은 복개되어 안 보이지만 그 당시에는 북악산과 삼청공원에서 발원한 냇물인
“중학천”이 경복궁의 동편을 끼고 흘러서 지금의 종로구청과 미국대사관 옆을 거쳐
지금의 동아일보사 근처에서 청계천으로 흘러 들어갔지요.
지금 복원된 청계천은 거기서부터 시작하는 것으로 되어 있지만....
* 그런데 “중학천”이 일부가 복원된다는 말이 있어서 크게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마디는 하고 넘어가야겠군요.
얼마 전 어느 회원님께서 “안티덤핑으로 밤새 고생할 때의 울고 웃던 세월이
엊그제 같건만...” 이라고 말씀하셔서 새삼 더 생각이 나서 말씀드립니다.
그 때의 수출부가 있던 종로구 수송동 건물과 옆의 삼양식품건물이 지금이야
모두 없어지고 새 건물들이 들어섰지만 모두 제 초등학교 자리이었는데요.
- 지금 제 사무실 바로 옆에 초등학교가 있어서 맨 날 아이들 재잘거리는 소리를
들으니까 이제는 “국민학교” 보다는 “초등학교”라는 말이 제게도 더 익숙해
졌습니다. 옆에 있는 초등학교에 가보니 학생 수가 한 반에 30~35명씩인데
남녀 비율을 맞추려는 노력이 돋보이고요. 책걸상도 참 예쁘고 편하고 교실마다
40“ 이상의 TV도 있고 급식시설과 식당도 잘 갖추어져 있습니다.
또 간식시간에는 팩으로 된 우유도 모두에게 주더라고요.
참~~~ 옛날 한 반에 60~70명씩 꽉꽉 끼어 앉고 그도 모자라 오전반,
오후반도 있곤 했었는데....
그 수출부 자리에 음악교실이 있었는데 그 때 음악선생님의 성함이
“김공선 선생님”이었습니다. 이 분은 나중에 “박화목 시인”의 노랫말에
작곡을 하셨는데 유명한 “과수원길”이라는 동요입니다.
“ 과수원 길 ”
동구 밖 과수원길 아카시아 꽃이 활짝 폈네.
하얀 꽃 이파리 눈송이처럼 날리네
향긋한 꽃 냄새가 실바람 타고 솔~ 솔~
둘이서 말이 없네 얼굴 마주보며 생끗
아카시아 꽃 하얗게 핀 먼 옛날의 과수원 길
과수원 길~~~
* 그때는 “아까시”가 아니라 “아카시아”라고 부를 때이군요. ㅎㅎ
솔직히 “아카시아”라는 말이 참 예쁘지요.... 하지만....
* 요즘 한창 “피맛길”이 없어지고 철거 공사를 하고 있는데요.
서울 한복판에 남아 있던 옛날 건물들이 없어지고 있는데 워낙 낡고 허름한
건물들이어서 보존할 가치가 없어서 이겠지요.
저도 옛날부터 그 곳에 있던 “청일집(빈대떡)”, “열차집(굴전, 빈대떡,
두부부침)”, “실비집(원래는 ‘영일집’이 단골이었는데 없어진 다음에 ‘실비집’
으로 옮겼지요-낙지볶음과 독특하게 맛있는 콩나물)“ 등의 단골인데 바로
엊그제도 갔다 왔지만 이번에 드디어 모두 없어지게 되어서 시간이 나면
이 동네 얘기와 “빈대떡” 얘기를 한번 올려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런데 이 집들은 기본 반찬으로 제가 좋아하는 “어리굴젓”울 주어서
더욱 좋았습니다.
- “피맛길”에 대해 조금 잘못 알고 계신 분들이 있는데 원래는 지금의 광화문
양쪽 즉, 현재의 교보문고와 동아일보사 건물의 뒤편에서 시작하여 흥인지문
(동대문)까지 양쪽으로 계속 쭈욱 있던 골목길로서 이미 많은 부분이 없어져
있지요. (저희 때의 표현으로는 “종로1가 ~ 종로6가”에 걸쳐서 양쪽 뒷길에
있었지요.)
* 광화문이 새로 세워지고 광화문광장이 생기고 경복궁 복원이 마무리되고
또 경복궁 내에는 고궁박물관, 민속박물관, 어린이박물관 그리고 추억의 거리
등이 새로 만들어지거나 보완되어서 서울에서 또 하나의 가 볼 곳이 생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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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 중학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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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오늘 말씀드리려 하는 것은 제 어린 시절 얘기가 아니라
궁정동에 있는 “칠궁(七宮)”입니다.
궁정동은 1979년 비극의 총성이 있던 곳으로도 잘 알려졌지만 많은 부분이
청와대에 속해 있는데 “칠궁”은 청와대 안에 있으며 “조선시대 왕을 낳은 친모이나
왕비의 칭호를 받지 못한 후궁 7분의 신위(神位)가 모셔져 있는 곳”으로서
“사적 제149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말씀 드린 대로 일반인들은 별도 관광은 못하고 청와대 관람 시 입장료 없이
볼 수는 있습니다.
이 분들은 모두 사연이 많고 “야사(野史)”에도 자주 등장하지만 오늘은
간략히 올립니다.
(1) 대빈궁(大嬪宮) :
제19대 숙종의 후궁으로 “장희빈”으로 잘 알려진 제20대 경종의 생모인 “희빈장씨
(禧嬪張氏)”의 신위를 모셨는데 이 분의 본관은 “인동(仁同)”이고
묘는 “서오릉” 내의 “대빈묘(大嬪墓)”입니다.
통상 후궁의 묘는 “원(園)”이라고 부르는데 이 분만 독특하고요.
또 하나 특별한 것은 신위를 모신 칠궁 중 나머지 여섯 개 궁의 건물기둥은 모두
“사각기둥”인데 유달리 “대빈궁”의 기둥만 “둥근기둥”을 썼습니다. 이는 예부터
“천원지방(天圓地方=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 라고 “주역”에서 나왔는데
이는 임금은 하늘이고 임금의 아래는 모두 땅이라 하여 임금과 관련된 것들,
즉 임금이 거처하는 건물의 기둥, 정자, 우물 등등을 둥글게 만들었습니다.
* TV 사극이나 영화를 보면 임금과 벼슬아치들이 “흉배(胸背)”라고 관복의
앞뒤의 가운데에 문,무관 구분 및 관직의 높낮이를 나타내는 수놓은 표지를
붙인 것을 보셨을 텐데 임금은 “둥근 원 속에 용(龍)을”, 문관은 “네모난 사각
속에 학(鶴)을, 무관은 역시 네모난 사각 속에 호랑이를” 붙인 것이 바로
“천원지방”의 법칙에 따라서 그렇습니다.
“희빈장씨”가 숙종의 왕비인 “인현왕후 민씨”를 폐위시키고 약 5년간 왕비자리에
올랐다가 “갑술환국” 때 다시 “희빈”으로 격하되었다가 사약을 받게 됩니다.
따라서 잠시지만 왕비자리에 있었다고 “둥근기둥”을 썼다고 하는군요.
숙종은 이 일을 계기로 하여 이후로는 “빈”은 절대 “비”로 올라갈 수 없도록
법으로 규정하게 됩니다.
* 제가 본관은 “인동(仁同)”이고......는 “인동장씨(仁同張氏)”라는 표현입니다.---
아버지가 중인(中人)인 역관이었다는데 그래도 좋은 가문 출신이었군요.
* 경북 안동(安東) 명문으로 “안동 무슨 무슨 씨”라고 말하려다가 얼른 지웠는데요.
거기는 유명한 “안동고집”에 워낙 명문가가 많아서 어느 특정한 성과 본관만
들어 잘 못 말하면 두고두고 어려움이 생길수도 있어요.ㅎㅎ
그러나 안동 분들은 성격이 굳굳해서 불의를 보면 참지 않으며 어려운 일을 보면
도와주지 않고는 못 견디는 아름다운 마음을 가지고 있고 또 옛 우리전통과
문화를 잘 보존하고 계십니다.
- 우리 카페 회원님 중에도 계시는데 잘 들어오시지 않는군요....
(2) 육상궁(毓祥宮) :
제19대 숙종의 후궁으로 제21대 영조의 생모로 잘 알려진 “숙빈최씨(淑嬪崔氏)”의
신위를 모신 곳으로 본관은 “해주(海州)”입니다.
이 분은 처음 궁중에 들어 올 때는 궁녀도 아닌 가장 아래쪽의 “무수리”로
궁녀들의 심부름하는 신세였지만 어느 날 임금의 눈에 들어(승은을 입어) 이렇게
되었는데 영조는 어머니의 출신이 미천한 것에 항상 마음 아파하다가 돌아가시자
“육상궁”을 지어 모셨으며 사실상 지금의 “칠궁”은 물론 그 후의 분들도 함께
계시긴 하지만 이 모두는 영조의 작품에서 출발합니다.
묘는 파주 광탄면에 있는 “소령원(昭寧園)”인데 왕릉 못지않은 규모로 역시
영조의 배려라고 합니다.
* 승은(承恩) 과 성은(聖恩) :
TV 사극을 보면 “승은을 입은 궁녀가 하루아침에 신세가 달라졌다”
또는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뭐 어쩌구저쩌구 하는데 발음을 잘못 들었는지는
몰라도 모두 “성은을~~ 또는 “성은이~~”로 들려서 대본이 잘못 되었나 하는데
조금 다른 의미입니다.
- 둘 다 “임금님의 은혜”라는 면에서는 맞는데 먼저 예를 든 “여자가 임금님의
총애를 받아 잠자리를 같이하다”의 경우는 “승은(承恩)”을 써야 하고요.
“성은(聖恩)”은 말 그대로 “임금님의 거룩한 은혜”이니 남녀노소 신하들이
모두 쓰는 말인데 위의 여자도 “나라님께 승은을 입게 되어 성은이
하늘 같사옵니다” 한다면 또 말이 되지요. --- (ㅎㅎ 국어시간 끝)
(3) 선희궁(宣禧宮) :
제21대 영조의 후궁으로 추존왕 “장조(사도세자=장헌세자)”의 생모인
“영빈이씨(暎嬪李氏)”의 신위.
본관은 ”전의(全義)“ 이며 묘는 서오릉 내의 ”수경원(綬慶園)“ 인데 당초에는
연세대학교 안에 있다가 옮겼지요.
연세대학교에는 지금도 관련 건물이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이 분은 ”사도세자“가 부왕의 눈 밖으로 벗어나자 임금의 사랑이
다른 곳으로 갈 까봐 친아들이 뒤주에 갇혀 죽는데 일조를 하였다는데 어찌 자기가
낳은 친아들을... 물론 이 모든 사건의 중심에는 영조의 두 번째 왕비인
”정순왕후(貞純王后) 경주김씨“가 있었지요.
* 이 “정순왕후(貞純王后)”는 또 “제22대 정조”가 죽은 후에 “제23대 순조”를
잠시 수렴청정하며 많은 사건을 일으킵니다.
* 발음이 같은 제6대 단종의 비인 “정순왕후(定順王后) 여산송씨”와 구분하시기
바랍니다.
--- 이분은 파란만장한 사연을 가지신 분으로 시간되면 별도로 올리겠습니다.
(4) 연호궁(延祜宮) :
제21대 영조의 후궁으로 추존왕 “진종(효장세자)”의 생모인 “정빈이씨(靖嬪李氏)”의 신위.
본관은 ”함성(咸城)“이며 묘는 파주시 광탄면의 ”수길원(綬吉園)“입니다.
“진종(효장세자)”는 “제22대 정조”의 아버지의 자격으로 추존되었는데 사실은
“진종”은 당초 영조의 원자로서 어릴 때 왕세자로 책봉되면서 “효장세자”가
되었으나 9살에 일찍 죽어서 그 다음 “사도세자”가 다시 세자가 되었는데 뒤주에
갇혀 죽임을 당하자 “사도세자”의 아들인 “원손(元孫 = 후일 정조)”를
“효장세자”의 양자로 입적시킵니다.
따라서 정조임금은 두 분의 아버지(친아버지, 양아버지)를 모두 추존왕으로
만들게 되었지요.
* 이번 “칠궁”을 쓰면서 평소 잘 접하지 못하는 한자를 찾아 쓰느라 좀
바빴는데요. 그렇다고 역사얘기를 하면서 한자를 쓰지 않으면 가끔 헷갈릴 때가
많아서요.
지금 위 (4)항의 “연호궁”의 “호(祜)”는 “복(福)”을 특히 “신이 내려주는 복”을
의미하는데 다음 (5)항의 “경우궁”의 “우(祐)”는 “도울 우”자로 “우(佑)”와
같은 뜻과 같은 발음입니다.
- 그래서 “하늘과 신령의 도움"이라는 뜻의 “천우신조”라는 말은 통상
“天佑神助”라고 쓰는데 “天祐神助”라고 쓰기도 합니다.
* 왜 이렇게 장황하게 설명 드리느냐 하면 혹시 “7궁” 얘기할 때 “연호궁”을
잘 못 읽어 ”연우궁“이라고 하는 분들이 많아서요.
제 말을 이해 하셨는지 모르겠습니다.
(5) 경우궁(景祐宮) :
제22대 정조의 후궁으로 제23대 순조의 생모인 “수빈(綬嬪) 또는
수비박씨(綬妃朴氏)”의 신위.
당초는 “수빈”인데 고종 때 대한제국(1897년) 되면서 직계(장조=사도세자 때부터)
를 하나씩 올려 부르기로 해서 그렇지요.
본관은 “반남(潘南)”이며 묘는 남양주시 진접읍에 있는 “휘경원(徽慶園)”입니다.
(6) 저경궁(儲慶宮) :
제14대 선조의 후궁으로 추존왕 원종(제16대 인조의 아버지)의 생모인
“인빈김씨(仁嬪金氏)”의 신위.
본관은 “수원(水原)” 이며 묘는 남양주시 진접읍의 “순강원(順康園)”입니다.
“원종”은 추존왕 이전에는 “정원군”으로 “제15대 광해군”을 몰아내는 “인조반정”
으로 추존되는데요. 사실 “정원군”은 생전에 “왕세자”로 책봉된 적이 없으니
추존왕이 될 자격이 없어 “대원군”이 되어야 맞는데요.
그 이전에 선조의 아버지인 “덕흥대원군”이 이미 나왔었지요.
그런데 “인조반정”시 “광해군”을 몰아내고 나중에 “인조”가 되는 “능양군”을 옹립
할 때 “정원군”의 아들로서가 아니라 “선조”의 아들 자격으로 옹립하였으므로
추존할 근거가 더욱 없는데 인조와 반정세력들이 좀 무리하게 추존왕을 만들어서
당시부터 나중까지 말이 많았다는 기록이 있더군요.
옛날에는 이럴 때 중국에서 가타부타 따지는 일이 있었는데 이 시기는 명나라가
망해가고 새로 청나라가 한창 성할 때라 바빠서 간섭을 않은 모양입니다.
그래도 같은 인조 임금 때 “정묘호란(1627년)”, “병자호란(1636년)”을 겪으며
그 치욕스러운 “삼전도”에서의 “삼배구고두례”의 치욕을 당하게 됩니다.
* 삼배구고두례(三拜九敲頭禮 또는 三拜九叩頭禮) :
병자호란 때 인조임금이 남한산성으로 피신하셨으나 결국 패전하여 항복을
하게 되었는데 청태종은 임금이 직접 나와서 항복의 예를 갖추라고 합니다.
그래서 현재의 “송파구 삼전동”에 있었던 “삼전도(三田渡) 나루”에 인조임금이
임금이 입는 “곤룡포”와 “익선관”을 모두 벗고 청나라 신하의 복장으로 걸어
나가서 청태종에게 “삼배구고두례”를 올리는 치욕의 역사를 말합니다.
이는 청나라의 근본인 만주에서 상대방에게 최고의 예의를 나타낼 때 하는
것으로 “한번 절할 때마다 머리를 세 번 땅에 소리가 나게 부딪치는 것을 세 번
반복하는 것” 즉 절을 세 번 해야 하니까 머리를 아홉 번 찧어야 한다는 말인데
청태종은 부딪치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며 다시 할 것을 명령하여 결국
수십 번을 반복하여 인조임금의 이마가 완전히 피투성이가 되었다는 슬프고
울분의 사건입니다.
- 이 당시 우리나라 전역에서는 죽어 나가는 백성들이 산을 이루었다고 하며
- 그 다음에 슬픈 말 즉, 지금의 “화냥년”의 말이 만들어지는
“환향녀(還鄕女)”가 생기고 “싱겁고 허튼 웃음”을 “환녀함소(還女含笑)”라고
하고 또 여인이 싱겁게 웃으면 “웃기는... 되놈한테 업혀 갔다가 왔느냐?” 하고
말하곤 했는데 이 말들의 내력들은 너무 슬프고 가슴 아프니까 여기서는
설명 드리지 않겠습니다.
- 후에 그 자리에 청태종의 공덕을 기리는 “비(碑)”를 세우라고 또 명령하여
1639년 세워서 그 것이 아직도 “삼전공원”에 남아 있는데 그 비문에는 참으로
괴로운 내용들이 씌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비문의 내용을 그 당시 신하들 중에는 아무도 지으려고 하지 않아
두고두고 말이 나는 일이 또 생깁니다.
# 이 비는 정식으로는 비에 쓰여 있는 대로 “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
라고 부르는데 (3.95m x 1.4m x 0.39m)로 매우 크며 앞면에는 몽골어와
만주어, 뒷면에는 한자로 쓰여 있어서 당시의 언어 연구에 도움이 된다는 데
다르게는 “삼전도의 욕비(辱碑)”라고도 부릅니다.
# 그런데 당시 의도적이었는지는 모르지만 부드러운 돌의 재질을 사용했고
글씨도 비교적 얕게 새겨서 지금은 탁본해도 그 내용을 잘 알아보기가
힘들다고 합니다.
# 이 비 때문에 동네 분들의 민원이 끊이질 않아 현재 박물관으로 이전하는
검토가 진행되고 있다고 합니다.
- 얼마 전 어느 분이 빨간 페인트로 이 비석을 마구 훼손하여 송파구청에서
지우느라 애를 먹었다는데요.
슬프고 치욕의 역사라도 마구 망가뜨리면 안 되겠지요.
- “삼배구고두례”는 통상 “삼배구고두” 라고 말하는데요.
위 처음에서 “敲” 와 “叩”는 모두 “부딪치다”, “두드리다”, “조아리다”의
뜻을 가지고 있어서 같은 뜻입니다.
- 여기서 다음 임금인 “효종”의 “북벌계획”이 싹 트게 되지요.
(7) 덕안궁(德安宮) :
제26대 고종의 후비이며 제27대 순종의 뒤를 이어 황제위에 오를 황태자였던
“영친왕 이은(英親王-李垠)”의 생모인 “순헌황귀비 엄씨(純獻皇貴妃 嚴氏)”의 신위.
본관은 ”영월(寧越)“이고 묘는 서울 청량리에 있는 ”영휘원(永徽園)“입니다.
여기는 원래 ”명성황후“의 릉인 ”홍릉“이 있던 자리였는데 ”홍릉“을 남양주시
금곡동으로 이장하고 이 분이 자리하였습니다.
지금도 홍릉이라는 지명은 “홍릉동”으로 남아 있지요.---홍릉갈비, 홍릉수목원......
* 일반에서 통상 ”엄비”라고 불렀던 이 분은 특히 “신문화”와 “신교육”에
관심이 많아서 우리나라 사립학교의 명문들인 남자고등학교인 “양정(養正)”과
여자고등학교인 “진명(進明)” 과 “숙명(淑明)”을 설립하는데 큰 기여를
하였습니다.
* 저희가 고등학교 다닐 때만 해도 모두 교복을 입었는데 “양정” 학생들은
“엄비”가 지원하여 첫 번째 세운 학교라고 동복의 경우 양쪽 소매 끝과 모자에
흰줄 하나씩을 넣고 다니며 뽐냈었고(우리 때는 이 학교에 깡패가 많았었는데
ㅎㅎ, 그래도 마라톤의 손기정 선생님이 이 학교 출신이어서 자부심이
엄청 강합니다).
“진명”과 “숙명“은 왼쪽가슴 주머니 있는 자리에 각 각 감색 바탕에 두 개의
흰줄 과 세 개의 흰줄이 무늬 된 표지를 달고 다녔는데 무척 예쁘게 보였지요.
* 순종황제와 배다른 형제인 엄귀비의 아들 “영친왕”과 부인인 “이방자여사”는
남양주시 금곡동에 있는 “홍유릉(고종과 명성황후 그리고 순종과 두 분 황후의
릉)” 뒤쪽에 모두 묻혀 있는 데요(산책길로서 아주 좋습니다).
이들 사이의 둘째 아들이었던 “이구(李玖)”씨가 지난 2005년에 돌아가서 이분의
장례는 “마지막 황손”이라며 전주 이씨 문중에서 옛날 궁중예법에 따라 크게
치루어 화제가 되었었지요.
* 그리고 지난 2009. 06. 04일 “영친왕”의 이복동생인 “의친왕”의 모친인
“귀인 장씨(본관 : 덕수)”와 첫 번째 계비인 “수관당 정씨”의 묘도 금곡으로
이장하여 이제 “고종”의 본인과 부인, 아들과 딸들, 며느리, 손자의 대 까지
모두 금곡으로 오게 되어서 가족 릉이 되었습니다.
물론 고종의 부친인 흥선대원군 묘도 가까운 남양주시에 있으니 남양주시에
“대한제국” 황실 릉과 묘가 모두 모여 있게 되었습니다.
- 이곳에 들어가는 입구에 전 세계에서 우리나라에서만 자생하고 있어서 우리나라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미선나무”가 있습니다. 이 식물은 꽃모양이 조그만
개나리꽃 비슷하고 꽃 색깔은 흰색이어서 “하얀 개나리”라고도 부르는데
이른 봄 일찍 피니까 내년 봄 구경 오시면 보실 수 있습니다.
(전에 한번 소개한 적 있습니다.)
# 미선(尾扇) : 옛날 영화 등을 보면 임금님 뒤에서 시녀들이 손잡이가 길고
둥근 부채를 슬금슬금 부치는 것을 보셨지요? “미선나무” 열매가
마치 그 둥근 부채 모양이라서 이렇게 이름 붙였습니다.
- 또 “홍유릉” 경내는 보존이 잘 되어 있어서 멀리 가야만 볼 수 있는
“하얀 민들레”나 파란색의 “현호색”, 예쁜 “제비꽃”, “양지꽃” 등을
일찍 볼 수 있습니다.
- 서울시내버스가 연결되어 있고 버스정류장 바로 앞에 “홍유릉”이 있어
편리합니다.
* 영친왕의 또 다른 이복형제인 의친왕의 아들인 가수 “이석”은 지금은 본인이
진정한 마지막 황손이라고 주장하며 전북 전주시에서 살고 있습니다.
(이 분 노래는 “비둘기처럼 다정한~~” 밖에 없는 줄 알았는데
그 외에도 많이 불렀다고 하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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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희빈장씨”의 “대빈궁” --- 둥근기둥입니다.
--- “순헌황귀비엄씨"의 ”덕안궁“ --- 사각기궁입니다.
(나머지 다른 5개 궁도 모두 사각입니다)
- “숙빈최씨”의 “소령원”
- 삼전도비
*** 남양주시 금곡동의 홍릉(고종황제와 명성황후의 릉) :
황제의 “릉”이라서 다른 왕릉 보다는 옆에 시립하는 문,무관의 크기도 다르고
짐승의 종류와 숫자도 많고요. 특히 종전의 왕릉과 다른 점은 앞에 보이는
“침전(寢殿=당초는 임금이 주무시는 곳이 있는 건물을 말하나 ”릉“에서는
제사 지내는 집을 또 이렇게 부릅니다)”이 “일자(一字) 모양 = 일자각(一字閣)”
으로 다른 왕릉의 “정자(丁字) 모양 = 정자각(丁字閣)”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건물 뒤쪽이 “릉”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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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덧붙임 ]
* 조선시대 “4대 요부(妖婦)”는 통상 연산군 때의 “장녹수”, 중종-명종 때의
“정난정”, 숙종 때의 “장희빈”과 비교적 덜 알려진 선조-광해군 때의
“상궁 김개시(=김개똥)"을 드는데 이 들은 얼굴이 예뻤는지는 모르겠으나
모두 한때 임금의 총애를 받아 잘 살았으나 제 명을 못 채우고 죽임을
당했다는데 있지요. 그래도 그 당시 여자가 “성(姓)”이 있었다는 것은
양반출신이었음을 나타냅니다.
이 중 “김개시”는 선대 선조임금과 후대 광해군에게서 모두 사랑을 받아서
신라시대 여러 왕과 관계가 있었던 “미실”과 비교되곤 합니다.
- 이들 4분은 모두 영화 또는 TV 사극에 자주 등장하는데 모두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서 언젠가 따로따로 한번쯤은 언급해 볼만하다고 보여 집니다.
- 그런데 저는 드라마를 보지 않아서 모 방송국에서 방영하는 “선덕여왕”이
어떻게 진행되는지는 모르겠는데 역사적으로는 “미실”은 신라 제24대 진흥왕,
제25대 진지왕, 제26대 진평왕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나오고 있습니다.
들은 얘기에 따르면 “미실”과 “27대왕 선덕여왕”이 미묘한 관계라고 하던데
진평왕의 딸인 선덕여왕과 선덕여왕의 위 3대와 연관 있으면서 아버지인 진평왕
보다 훨씬 연상인 미실이 왜 얽히는지 이해가 안 됩니다---“드라마니까...ㅎㅎ”
* 조선시대 명문이라고 일컫는 가문들은 통상 “왕비”를 배출한 가문이나
정승판서를 많이 배출했거나 또는 문과에 급제한 사람이 많은 가문을 말하는데
“전주이씨, 여흥민씨, 청송심씨, 파평윤씨, 청주한씨, 풍양조씨, 연안이씨,
동래정씨, 남양홍씨, 안동권씨, 안동김씨, 광산김씨(그냥 “光金” 이라고도
부르지요)...” 등 등 그 외에도 한참 많은데 왕비나 후궁에 의외로 인구가 많은
“김씨”가 적은데요. 이는 왕실의 성인 ”이씨“는 ”목성(木姓)”으로 “김씨성(金姓)”
과 맞지 않아서 그랬다는데 재미있는 것은 제14대 선조는 왕비가 2분, 후궁인
“빈”이 6분, 합해서 8분 중에 ”김씨“가 네 분이어서 특이합니다. (영창대군을
생산한 인목왕후, 광해군 친모인 공빈, 위에 나오는 원종의 친모 인빈 그리고
순화군을 낳은 순빈이 모두 김씨 이지요. 물론 본관은 서로 다릅니다).
* 광해군의 생모인 “공빈김씨(恭嬪金氏)”의 묘도 광해군과 같이 남양주시 진건읍에
있는데요. 광해군이 왕에서 격하되어 “군(君)”으로 되어 “릉(陵)”이 아니고
“묘(墓)”라고 부르고 산비탈을 깎아서 초라하게 만들었는데 공빈 김씨도
“빈”에서 “서인”으로 격하되어 다른 빈하고는 달리 묘 이름은 그냥 “성묘(成墓)”
입니다.
그래도 광해군은 왕위에 즉위하자 생모인 “공빈”을 “공성왕후(恭聖王后)”로
추존하고 릉 이름도 “성릉(成陵)”이라고 부르며 손보아서 비교적 규모도 있고
반듯한데요. 물론 나중에 “성묘”로 격하되지만요.
광해군이 죽을 때 ”엄마 발치에 묻어 달라“고 해서 이렇게 배치되었다고 하는데
작은 골짜기를 사이에 두고 각 각 얕으막한 산 중턱에 서로 마주 보고 있으니
발치라고 해도 되겠습니다.
광해군묘는 잘 돌보지 않아 석물(石物) 등이 많이 훼손되었고 또 너무 초라한데
바로 이웃하고 있는 어느 유명한 교회의 엄청난 규모의 묘지와 비교되어
볼 때마다 눈물이 납니다.
광해군묘는 이 교회 묘지로 들어가서 산비탈로 아슬아슬하게 내려가야
찾을 수 있습니다.
광해군의 친형인 “임해군”의 묘도 바로 근처에 있는데 즉, 친엄마인 “공빈”과
두 친아들인 “임해군”과 “광해군”의 묘가 서로 가깝게 삼각형 구도를 이루고
있어 잠시 생각을 하게 만듭니다.
임해군묘는 사슴농장과 폐품수집상 한쪽 구석에 있고 광해군묘는 교회묘지
한쪽에 있어서 누군가 서글픈 농담을 하는 분이 광해군이 너무 마음이 아프니까
그리스도교로 개종했나 하는데 영 웃을 기분이 아닙니다.
* 그런데 “공빈묘”인 “성묘”는 유명한 명문가인 “풍양조씨(豊壤趙氏)”의 시조(始祖)
이며 고려개국공신인 “조맹(趙孟)”의 묘 바로 뒤에 있는데요. 그래서 이 동네
이름이 남양주시 진건읍 송릉리인데 원래 조선시대에는 왕실의 묘가 들어서면
일반인들의 묘는 옮겨야 하는 법인데 선조임금이 “공빈”의 외가 쪽이 “풍양조씨”
이기에 그대로 두라고 해서 지금도 함께 있습니다.
* “풍양조씨”는 조선말에 안동김씨와 함께 큰 세도를 휘둘렀는데 추존왕
“익종(翼宗)”의 비이며 제24대 헌종(憲宗)의 생모인 “신정왕후(神貞王后) 조씨”가
나중에 “조대비” 시절에 흥선군 이하응과 가까워 고종임금을 세우는 것은
모두 아시지요?
* “풍양”은 지금의 남양주시 진건읍, 진접읍, 오남읍과 별내면, 퇴계원면 일대를
가리키는 지역으로 그래서 남양주시가 넓으니까 남양주시는 “풍양출장소”를
별도로 운영하며 위 5개 지역주민들의 민원 등 일부 업무를 처리하고 있습니다.
* 우리 회원 중에 “풍양조씨”가 계신지는 모르겠는데 혹시 계셔서 물어 오시면
시조되시는 분의 묘를 자세히 알려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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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해군묘
--- 공빈묘
--- 임해군묘
오늘도 감사합니다.
첫댓글 무척 길어서 자세히 끝까지는 못읽었습니다. 고저 청와대 안에 징희빈같은 후궁들의 신위가 모셔져 있는 칠궁이 있다는것으로 만족하겠습니다.ㅎㅎ 제 경우 살아가며 뭔가를 배울때 가장 신나는 일이 공식을 깨우치는 건데요..지난 학기 가까운 대학에서 ESL 작문강의를 들었는데 뜸금없이 5형식을 가르치더군요. 예전부터 지랄~ 5형식이 영어하는데 무슨 필요가 있누..했는데 그게 아니란걸 이번에 깨우쳐서 매우 기뻤습니다만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이기 때문에 왕=원이라는 공식은 유용한 지식이 될것 같습니다. ㅎㅎ 칠궁을 읽으며 갑짜~기 베게머리송사라는 말이 생각나네요...
ㅎㅎ 강프로님, 읽으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사실 이번 테마는 당초 최소 두개 이상으로 나누려고 하다가 그냥 올렸는데요. 회원님들께 전부를 읽으시라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제가 자료정리하려고 하는 편이 더 컸다고나 할까요. "칠궁"이 뭐 시험에 나오는 항목도 아니고 극단적으로는 우리역사에서 몰라도 되지만 저는 좀 관심이 있었고 또 너무 짧으면 추가 질문이 있을수 있어서 모두 써 버렸습니다. 이중 몇개는 나중에 따로 보충 설명할 내용이 있습니다. 파란글씨만 읽는 것이 더 재미있을텐데..... ㅎㅎ "영어작문 5형식" !!! 참 그리운 말입니다. 가끔 영작하면서 괴로움을 느낄때 많이 생각나지요. 언젠가는 영어로 한번 올리시지요.
사장님 덕분에 머릿속이 많이 정리가 되었습니다. 경술국치일날 조선총독부가 국호를 조선으로 고쳤다는데, 일제시대의 우리나라 공식 국호를 조선으로 알고 있는 게 맞는건지요? 사장님 고견으로 마지막 황손은 이구/이석 어느분 이신가요? 이몽룡 실물은 어떻게 생겼을까 궁금했는데 삼청동에서 세수하고 목욕하며 자라신 사장님과 비슷한 이미지로 알고 있으면 되는거지요?
배사장님, 오랜만입니다. 말씀하시는 내용으로 보아 제 글을 모두 읽으신 느낌입니다. 교정을 보느라 제가 다시 읽어도 너무 길었는데... 고맙습니다. 그런데 저는 평면에 글을 썼는데 배사장님 질문내용은 세가지 모두 입체적인 질문이시군요? ㅎㅎ 그래서 일일이 답변을 않아도 되겠지요? 질문하신 내용 모두가 배사장님 마음속에 답이 있다고 보여지거든요. 요즘은 카페에 잘 나타나시질 않는데 무슨 좋은 일이 있으신지요? 함께 즐거움을나누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