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친구, 성공회 주교가 되다
친구 고재백, 박동신, 나
부산음식 찜국
주교서품식 현수막이 걸려 있는 성공회 부산주교좌성당
서품을 받고 내빈들께 인사하는 박동신주교
용두산전망대에서 내려다 본 부산항
대학시절 지옥산장이라는 공동체가 있었다.
본래 지옥산장은 엄혹했던 제5공화국 시절 사회변혁에 관심을 가졌던 우리대학교 학생 몇 명이 비밀회합을 가졌던 치악산 외딴 집이었다.
하루에 서너 번 지나가는 버스에서 내려 산길을 몇 십 분씩 걸어서야 도착했던 집.
살기가 힘들어 주인 부부는 산 아래에 새 집을 지어 내려가고, 가끔 농사일을 할 때만 올라오던 그 집에서 우리는 머리를 맞대고 엄혹한 시대를 어떻게 건너야할 지 고민했다.
1987년 겨울,
상도동 한증막에 있는 자취방에서 십 여 명이 부디끼며 겨울을 났다.
처음에는 최선배와 내가 자취방으로 구했던 집인데, 날씨가 추워지면서 갈 곳이 없었던 빈대(?)들이 한꺼번에 몰려든 것이었다.
나중에는 누가 주인이고 누가 빈대인지 분간할 수 없는 날들을 버텨내며 몇 달을 보냈다.
겨울이 지나 새학기를 맞이하면서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던 중 공동체생활에 관심이 많던 친구 진이가 삶과 생각을 공유할 수 있는 아지트를 마련하자고 제안했다.
의기투합한 여덟 명의 친구들은 상도동 숭실대학교 뒤편 산꼭대기에 보증금 50만원에 월 5만 원짜리 방을 구했다.
또 다시 바글거리며 함께 보낸 시간이 1년 반,
봉지쌀과 연탄 두 장에도 행복했던 시절,
추운 겨울 밤 친구가 들고 온 막걸리와 신김치 한 보시기의 따뜻함을 서로 나누며, 우리는
치열하게 고민하며 실천적 삶을 모색할 수가 있었다.
지옥산장에서의 삶은 보수교회에서 보수신앙으로 살다가 보수신학을 공부하여 성직자나 보수적 신앙인으로 살아가려던 친구들을 새로운 세상과 만나게 하였다.
일찍부터 이타적인 삶을 살겠다고 결단했던 친구들이기에 그들은 눈에 보이는 대로 느낀 대로 행동하였다.
그리고 디아스포라!
‘보수’ 안에서 개혁을 꿈꾸었던 친구들은 보수교단의 목사, 선교사가 되어 서울, 중국, 인도네시아로 흩어졌고, 보수의 틀에서 벋어난 친구들은 진보적인 한신대학이나 성공회 신학대학으로 적을 옮겨 신학자와 신부가 되었으며, 본래 목회자를 꿈꿨던 친구는 서울대로 적을 옮겨 역사학자가 되었고, 또 한 친구는 출판사의 편집자, 나머지 둘은 역사교사가 되었다.
30, 40대,
인생의 황금기이며 가장 바쁜 시기에도 우리는 만남을 지속했다.
지옥산장의 정신을 잊지 말자며 서로를 다독였다.
두 명이 해외선교사로 떠나고, 또 두 명이 공부하느라 독일에서 몇 해를 보냈지만 우리는 인연의 끈을 놓지 않았다.
사실 나이 들어서도 만남이 지속되려면 함께 공유하였던 꿈이 현재진행형일 때만 가능하다.
그러고 보면 우리 친구들은 항상 현재진행형의 삶을 살았던 것 같다.
사회적 잣대로 판단한다면 인생이 술술 풀렸다고는 볼 수 없지만, 누구도 자신이 정한 삶에 실망하거나 포기하는 사람이 없었다.
성공회로 옮긴 신이는 타고난 성직자였다.
명석한 두뇌와 진실된 삶의 자세, 신앙에 대한 진정성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성공회 교단 안에서 판단할 때 성골(聖骨)이라고 말할 수는 없었지만 특유의 명석함과 진실됨으로 일찍부터 두각을 나타냈다.
잘 차려 놓은 평탄한 길을 마다하고 의정부 교회를 개척하고, 울산교회를 부흥시키고, 성공회 선교의 불모지 제주도에 교회를 세워 자립시킨 것은 일찍이 누구도 흉내 내지 못했던 일이었다.
몇 달 전 성공회 교단에서 차기 주교를 선출하게 되었을 때 신이는 비교적 젊은 나이에 후보가 되었다.
전해 듣기로는 처음에는 성공회 신학대학을 졸업하고 교단 안에서 성장한 후보가 유력하게 부각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박빙으로 진행된 1차, 2차 투표가 부결되고 논의가 거듭되는 과정에서, 교단의 개혁과 발전을 위해서는 올곧고 열정 있는 인물이 이끌어야 한다는 쪽으로 분위기가 형성되었다고 한다.
한국 성공회 교단에서 주교는 서울교구, 대전교구, 부산교구 단 3명뿐이다.
세계적으로도 모두 1,000명밖에 되지 않는다고 한다.
그것도 한 번 선출되면 만 65세 은퇴할 때까지 직임을 수행하는 자리라서 교단에서의 권위는 각별하다.
2월 18일 신이의 주교 서품 승좌식이 부산 대청동의 성공회 부산주교좌성당에서 있었다.
나는 며칠 전 친구 백이에게서 함께 참석하여 축하해주자는 전화를 받고 한동안 망설였다.
하루를 온전히 내줘야 한다는 것도 부담이었지만 요즘 경제사정이 나빠서 오가는 경비도 마음에 걸렸다.
하루쯤 생각하다가 함께 가자고 전화를 하였다.
18일 아침 난생 처음 부산 가는 KTX를 탔다.
KTX는 새마을호나 무궁화호와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속도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2시간 15분 만에 고속열차는 나를 안전하게 부산역에 내려주었다.
거의 10여 년 만에 다시 찾은 부산역은 새로 지은 건물이어서 엄청나게 컸지만 바깥 풍경은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달라 보이지 않았다.
백이를 만나 택시를 타고 남포동 옛 부산미문화원 앞에 내렸다.
부산미문화원 자리는 그동안 부산근대역사관으로 바뀌어 있었다.
우리가 도착했다는 전화를 받고 신이는 부리나케 뛰어나와 점심식사 중이었다며 식당으로 이끌었다.
식당에 앉아 있던 신이 일행 중에는 대학시절 출판사에 근무할 때 동료였던 천제욱 신부도 함께 있었다.
천신부는 고향집에도 같이 갈만큼 친했던 사이인데 10여 년 전 평택에서 한 번 보고 우연찮게 부산에서 다시 만나게 되어 무척 반가웠다.
식당에서 ‘찜국’이라는 것을 처음 먹었다.
올갱이에 콩나물 등을 넣고 풀죽처럼 끊여내는 음식인데, 젓갈 냄새도 나는 것 같고 좀 구수한 뒷맛도 있어 묘한 느낌으로 먹었다.
서품식은 오후 2시에 시작되었다.
텅 빈 성당에 앉아 있기도 뭐해서 여분의 시간에 근처 답사나 하자며 길을 나섰다.
부산근대역사관은 부산지역의 근현대사를 체계적으로 전시한 사료관이었다.
1982년 ‘부산미문화원방화사건’을 일으켜 금단의 영역이었던 ‘미국’이라는 존재에게 처음으로 문제를 제기하고 책임을 물었던 역사적 현장이 ‘역사관’으로 탈바꿈한 모습은 참 부럽게 느껴졌다.
역사관 직원과 대화를 하던 중 근처에 일제강점기 백산상회 터가 역사관으로 바뀌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아직 시간은 1시간이나 남았고 해서 그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백산상회는 독립운동가 백산 안희제가 세웠던 무역회사다.
일제강점기 안희제는 겉으로는 거물 사업가로 행세하면서 백산상회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하고 국내외 연락망을 구축하였으며, 각종 학교를 설립하고 만주에 발해농장을 세워 독립운동기지건설에도 앞장섰던 대표적 독립운동가였다.
1990년대까지 남아 있었다는 백산상회 건물은 현재 사라졌고, 터에는 화장실과 지하에 조그만 사료관이 지어져 오가는 사람에게 옛 역사를 추억하게 하였다.
시간이 30분이나 남았는데도 성당 안은 발 디딜 틈도 없이 꽉 찼다.
오후 2시가 지나가자 십자가를 앞세우고 신부님들이 입장하였다.
원로 신부님들 가운데는 낮 익은 김성수 주교도 계셨다.
서품식은 카메라 셔터를 누르기가 부담스러우리만치 엄숙하게 진행되었다.
식을 진행하는 의장주교의 손을 거쳐 신이 머리에 주교관이 씌워지고 손에는 모세가 들었던 능력의 지팡이가 건네졌다.
축하의 성만찬이 진행되고, 취임사를 하고, 선임 주교들과 일본에서 축하사절로 온 오끼나와 주교의 축하인사가 있은 뒤에야 모든 일정이 끝났다.
그렇게 우리는 대한성공회 부산교구 주교에 오른 친구를 하나 두게 된 것이다.
서품식이 끝나고 24년 만에 부산에 왔다는 친구 백이와 함께 용두산에 올랐다.
전망대에 오르니 비로소 부산항과 시가지가 한 눈에 들어온다.
입장료 4천 원을 생각해서는 한 두 시간쯤 머무르다 내려와야 하는데 20여 분 보고 나니 더 이상 머무를 명분이 없어진다.
자갈치 시장으로 이동하여 바다가 잘 내다보이는 횟집에서 우럭매운탕을 시켰다.
마음 같아서는 생선회 한 접시를 주문하고 싶었지만 요즘 내 뱃속이 날것을 소화시키지 못하는 터라 부득이한 선택이었다.
우리는 진한 생선찌개에 소주잔을 기울이며 삶을 이야기하였다.
기차시간 1시간을 남겨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원한 바닷바람을 맞다보니 문득 부산밀면을 먹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돼지똥국하고 물회를 못 먹은 것도 아쉬운데 부산까지 와서 밀면을 먹지 못했다니......
배가 부르다는 백이를 졸라 부산역 앞 초량밀면집으로 들어갔다.
초량밀면은 그리 유명한 집은 아니라는 데도 제법 널찍한 식당 안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주위를 둘러보니 손님들은 대부분 만두를 먼저 시키고 후식으로 밀면을 먹고 있었다.
우리도 격식을 차리고 싶었지만 뱃속은 밀면 마저도 소화시키지 못할 상황.
눈물을 머금고 밀면만 두 그릇 시켰다.
백이는 비빔면을 먹고 나는 물면을 먹었는데 둘 다 맛이 괜찮았다.
다음에는 꼭 만두까지 먹자고 다짐하며 우리는 손을 흔들었다.
(2012.2.19)
출처: 평택향토사이야기 작성자: 바다
첫댓글 감동적인 글 잘 읽었습니다. 모태로부터 장로교 통합측 신앙생활하다가 성공회 교회로 옮긴진 1년 가까이 되어갑니다. 우리 부부도 금요일 저녁에 올라가서 광안리에서 성요한 신부님과 친구분하고 진하게 이야기 나누고 토요일 승좌식 끝날때까지 모든 일정을 눈여겨 보았습니다. 성가연습도 했지만 워낙 음치라서 마지막에 성가대 앉지 않고 일반석 앞자리에 앉아 예전의식을 보았습니다. 친구분들의 따뜻한 마음과 사랑 사나이의 의리가 느껴지네요....
감동 그 이상입니다 주교님 멀리서 나마 다시한번 축하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