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잘 가는 카페에 여름향기 잘 쓰신 엔딩이야기가
있길래 퍼왔습니다... 재미 있게 읽으셨으면... 매회때마다
양이 좀 많을 거예요.. 그래두 끝까지 다 읽어주세욧!!!(참고로
이글을 쓰신 분의 닉네임이 그 카페에서 deathcard이십니다.)
문화회관 앞에서 혜원과 우연히 마주친 민우는 자신의 눈을 의심하
지만 그냥 비슷하게 닮은 여인이겠지 생각하고 계단을 한걸음 한걸음
올라간다. 혜원은 순간적으로 반가운 표정을 짓지만 그녀는 이내 당황
한 표정으로 얼른 얼굴을 돌려 계단을 빠른걸음으로 내려간다. 민우는
계단을 오르던 발걸음을 다시 멈추고 뒤를 돌아본다. 빠른 걸음으로
이미 계단을 내려 저 만큼 가는 혜원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던 민우
는 돌아서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한다.
"저기 잠깐만요!"
민우는 뛰어가며 빗속을 저만큼 달려가는 혜원을 부르기 시작한다. 혜
원은 마치 무언가에 쫒기듯이 발걸음을 옮기지만 회관 마당을 벗어나
기도 전에 이내 민우가 앞을 가로막는다. 혜원의 앞을 가로막은 민우
는 그러나 혜원의 얼굴을 볼 수 없다. 그녀는 우산으로 자신의 몸 전
체를 덮고 있었다. 민우는 차마 실례가 될 것 같아 혜원을 덮고 있는
우산을 올리지는 못하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한다.
"저, 혹시....아니, 실롄줄 압니다만 우산좀 올려 보시지 않으시겠요?"
그러나 혜원은 그자리에서 굳어버린듯 꼼짝을 하지 않는다. 민우는 빗
물이 주르르 흘러내려 자신의 옷섬을 적시고 있는 혜원의 우산 끄트머
리를 잡고 천천히 올린다. 우산 밑으로 천천히 드러나는 혜원의 모습
에 일순 당황하는 민우, 혜원은 고개를 반쯤 돌린채 입술을 지긋이 깨
문체로 두눈은 습기를 머금고 있었다. 그녀의 어께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민우는 자신의 눈을 의심해 보지만 지금 자신앞에 서있는 여
인은 틀림없이 혜원이다. 그것도 이세상 사람이 아니라던....
"혜원씨...혜원씨 맞죠?"
민우는 쥐고 있던 우산을 놓고 자신을 보려고 하지 않는 혜원의 얼
굴로 떨리는 두손을 가져간다. 그녀의 얼굴을 조심스레 감싸며 정면으
로 돌린다. 혜원은 그제서야 민우를 올려다 본다. 그녀는 3년동안 꿈에
도 사무치고 그리워하던 민우를 보자 그 동안의 갖은 상념에 감정이
복받쳐 올라 얼굴을 감싸쥐고 그 자리에 쪼그리고 앉아 흐느끼기 시작
한다.민우도 가슴이 저며오는 고통을 느끼며 말없이 혜원의 작고 가녀
린 어께를 감싸쥐고 천천히 일으킨다. 민우의 품에 안긴 혜원은 눈물
이 볼을 타고 흘러내리지만 흐느낌은 멈추지 않는다. 빗줄기는 더욱더
거세지고 있었다....
창밖에는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다.
민우와 혜원은 말이 없다.혜원은 시선을 무릎에 둔채 낯선 남자와 마
주한듯 다소곳한 자세다. 그녀의 머리에서는 빗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
다. 민우는 생각난듯 바지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혜원에게 말없이
건네 준다. 혜원은 여전히 고개를 숙인채 두 손을 내밀어 손수건을 받
아쥐고는 조심스레 한쪽 머리를 떨어뜨려 빗물을 훔쳐내고 있지만 그
녀는 시선을 어디에다 둘지몰라하는 표정이 역력하다. 민우는 자신앞
에서 머리를 매만지고 있는 혜원의 얼굴을 뚫어져라 응시한다. 둘 사
이의 침묵을 깨기라도 하듯이 테이블위로 찻잔이 놓여진다. 민우는 종
업원이 돌아가자 온기를 느끼려는듯 찻잔을 두손으로 감싸쥔다. 혜원
은 수건을 내려놓고 조심스레 찻잔을 앞으로 당긴다. 그녀의 머리는
심하게 헝크러져 있었다. 민우는 혜원의 죽음아닌 죽음과 3년이란 공
백이 가져다준 허무감과 허탈감에 현실을 인정하지 못하겠다는 듯 만
감이 교차한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겠지만 그의 머리속은 하얗기만 하
다. 혜원은 혜원대로 그녀의 머리속은 민우에 대한 미안함으로 가득하
다.
민우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긴 침묵을 깨고 혜원에게 말을 건넨다.
"혜원씨, 나 혜원씨 다시 만나서 너무 좋은데...."
민우는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비가 내리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린다.
민우의 시야가 흐려짐은 창문 군데군데 묻어 있는 성애 탓은 아닐것이
다. 혜원은 찻잔을 만지작 거리며 고개를 들고 비로소 입을 연다.
"민우씨... 미안해요. 제가 할 수있는 최선의 방법은 그것 밖에 없었어
요. 민우씨나 저나 행복할수 있는 방법은 서로를 잊는 방법밖에 없다
고 생각했어요. 또한 심장이식 수술후유증이 어떻게 나타날지도 모르
고.."
혜원은 말을 잊지 못하고 입술을 깨문다.
민우는 혜원의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그녀가 한 없이 원망스럽
다.
"그래서 뭐가 나아졌어요? 결국 이렇게 만나고 말것을, 혜원씨가 죽었
다고 하면 내가 혜원씨를 사랑했던 감정이 하루 아침에 기억속에서 지
워질줄 알았어요? 내가 첫사랑인 죽은 은혜를... 혜원씨를 만나 사랑을
할때까지 잊지 못했어요. 그런 내가 다시 혜원씨를 만나 어렵게 두번
째 사랑을 하게 되었는데.. 그런 혜원씨마저 잃으면 ...그것도 죽음으로
잃으면 그걸 내가 어떻게 쉽게 잊을수 있다는 거예요. 두 번째 사랑까
지 잃어본 사람의 심정을 혜원씬 알기나 해요? 그런 고통 혜원씬 알기
나 해요?" 그래서 혜원씬 쉽게 잊었나 보죠? 내가 혜원씨를 사랑했던
감정을 혜원씨의 죽음이 가져갈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혜원씨
의 죽음이 서로를 행복하게 해 줬나요? 혜원씬 행복했는지 몰라도 나
는 이태리생활 3년동안 다시 두번째 사랑까지 죽음으로 내몰았다는 죄
책감에 악몽의 나날을 보냈어요. 그리고 혜원씨의 마지막을 지켜주지
못한 죄책감과 자괴감도 나에겐 너무나 큰 고통 이었어요. 혜원씨의
가짜 죽음이 가져올 나의 충격을 혜원씨는 조금이나 헤아려 봤어요?"
민우는 여기까지 말을 말을 마치자. 감정이 복바치듯 두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탁자에 고개를 떨군다.
혜원은 민우가 얘기를 하는동안 고개를 숙인채 찻잔만 내려다 보고 있
다가 이내 천천히 고개를 들고 말문을 열기 시작했다.
"민우씨, 미안해요. 사랑하기 때문에 민우씨를 보냈다는 유치한 말같은
건 하지 않겠어요. 무슨 말을 하든간에 민우씨의 마음을 대신할수 없
다는 것을 알아요. 하지만 이런 말은 변명같지만 전 수술 받기전까지
제가 없더라도 민우씨의 마음을 채울수 있는 사람은 은혜씨가 유일하
다고 믿었어요. 적어도 나를 잃은 상실감은 첫사랑이었던 은혜씨가 대
신 할수도 있을거라 믿었어요. 그래서 은혜씨가 나를 민우씨 기억에서
지울수 있을거라고 생각했어요.은혜씨가 민우씨에게서 차지하는 비중
을 제가 대신할수 있다고 생각해 본적이 없어요. 저는.. 지금..아직도 그
래요. 은혜씨는 영원히 민우씨 기억속에서 떠날수 없다는 것을...미국에
서 심장이식 수술을 할때도 생각해 봤어요. 만약 내가 수술에 성공하
고..그리고 다른 사람심장을 이식받고도 내가 과연 민우씨를 만나면 심
장이 뛸까도 생각해 봤어요.그런데...지금 심장이 은혜씨 심장이 아닌데
도 민우씨를 다시 보았을때 심장이 뛰었어요. 제가 갖고 있는 이 심장
이 이젠 정말 완전한 제몸의 일부분이 되었다는 증거겠죠. 그래서 무
척 기뻐요.....제가 민우씨를 피하려 한건 이젠 모든걸 잊고 고통에서 벗
어나 행복한 생활을 영위하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제가 또다시 나타나
잔잔한 민우씨 가슴에 파장을 일으키지나 않을까 걱정이 되어서 그랬
어요...그리고 다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을지도 모르는 일이고 해서요.
더군다나 민우씨나 민우씨 주위사람들은 제가 죽은걸로 알고 있을텐
데.."
혜원은 말을 마치자 찻잔에는 수건으로 한쪽빰을 감싼 채 고개를 숙이
고 눈을 감았다. 온기가 빠져 식어버린 찻잔속으로 그녀 의 눈물이 떨
어지고 있었다.
네온사인은 어둠을 밝히고 내리는 빗물은 네온속에 부서지며 스프링쿨
러를 연상케 하고 있었다. 차는 빗물에 미끄러지듯 네온샤인속을 조심
스레 헤집고 있었다. 민우는 자신의 어께에 머리를 살짝 누이고 곤히
잠들어 있는 혜원을 돌아 본다.
"저.. 기사 아저씨 1시간 정도만 더 돌아 주세요."
민우는 자신의 어께에 전해져 오는 따뜻한 기운에 웬지 모를 슬픔이
배어옴을 느낀다. 민우는 자신의 왼쪽어께에 쓰러질듯 기대고 있는 혜
원의 얼굴을 덮고 있는 머리결을 올리며 볼을 가만히 만져본다. 3년새
에 피부가 많이 거칠어진것 같다는 느낌을 지울수가 없다. 그녀는 민
우가 없는 3년동안 많은 변화를 겪었다고 했다. 정아가 끝내 시집을
갔다고 했다. 민우는 정아 답다고 했다. 화끈하게 자신을 좋아했다가
금방 끓다 식는 냄비 같이 포기를 하고 결혼을 했다는 사실에 민우는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배어나왔다. 한편으론 자신으로 인해 마음
고생을 심하게 했던 정아에 대한 미안함과 연민이 느껴져 웬지 모를
죄책감에 자신을 원망도 해본다.
혜원은 정재 집에서 나왔다고 했다.그 동안 두 번의 재수술과 치료비
하며 완치과정을 거치면서 치르는 모든 어려움을 묵묵히 참고 견뎌주
고 손과발이 되어 줬던 정재나 정아, 그리고 정재부모를 생각하면 자
신의 철면피함에 죽고 싶다는 말을 되풀이 했었다.
더 이상 그들과 함께한다면 영원히 자신은 그들의 짐이 될 수밖에 없
다는 사실에 혜원은 정재 가족들의 끈질긴 만류에도 불구하고 홀로 거
듭나기로 했다고 한다. 민우는 혜원한테 왜 정재와 결혼하지 않았느냐
고는 묻지 않았다. 민우는 혜원을 만난후 그런 말은 필요없음을 께달
았다. 혜원은 이러한 민우의 속내를 알았음인지 묻지도 않았는데도 정
재오빠와 결혼하지 않은 이유는 정재오빠를 더 이상 마음 아프게 할
수없다는 것이었다. 혜원은 3년전 정재오빠를 두 번에 걸쳐배신이라는
깊은 수렁으로 빠뜨린것만으로도 자신은 정재오빠를 더 이상 사랑할
자격이 없다고 했다. 물론 심장이식수술후 결혼하면 다 해결 되지 않
느냐고 되물을지 모르지만 자신이 그 동안 정재오빠한테 준 상처를 갚
기에는 오히려 역효과가 날수도 있다고 했다. 이유는 확실히 모르지만
정재오빠는 혜원이 사랑하는 사람은 여전히 민우라고 믿고 있는 사람
이라는 것이다. 혜원의 마음은 민우란 남자한테 주고 자신은 혜원의
육체란 껍데기하고 사랑하고 산다는 것은 당장은 자신을 이해해 줄지
몰라도 종국에 가서는 파국을 맞을 것이 뻔하다는 것이었다. 정재오빠
도 심장이식수술후 혜원과 결혼하자는 얘기를 꺼내지 않은 것도 정재
오빠 자신도 어느정도 이러한 미래를 예측하고 있지 않느냐 하는 것이
었다. 그래서 혜원 자신은 틈만 나면 정재오빠한테 자신은 자신의 심
장을 뛰게하는 사람이 나타나면 그 사람과 사랑을 할 것이라고 강조를
했다고 한다. 정재오빠의 자신에 대한 감정에 쇄기를 박기 위해서 였
다고 했다.그래서 지금은 예전과 마찬가지로 그냥 좋은 오빠 동생 사
이로 지낸다고 했다.그러면서 혜원은 여태껏 자신의 이 같은 이중적인
정재오빠에 대한 감정이 자신을 죽이고 싶도록 밉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녀는 찻집에서 오열을 했다. 민우는 이 대목에서 혜원이 자신을 원
망하는것 같아 혜원을 똑바로 쳐다볼 수없었다. 혜원은 이제 모든걸
잊으려고 노력하고 있고 일에만 열중하고 있는 중이라고도 했다. 민우
는 자신이 혜원의 불행에 큰 책임이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저려왔다
민우는 오늘따라 이 여인의 인생이 정말 기구하고 불쌍하다는 생각에
눈시 울이 붉어졌다.
혜원은 피곤했던지 가끔 머리만 미세하게 움직일뿐 새근새근 작은 숨
소리만이 택시안의 정적을 말해주고 있었다. 민우는 자신과 혜원의 사
이를 조금더 벌여 혜원의 몸을 조금더 편안하게 뉘어 자신의 허벅지를
베개 했다. 차창밖은 오후의 늦은 여름풍경과는 달리 비로 인해 인도
가 한산했다. 민우는 창밖을 보면서 자신의 재등장으로 인해 웬지 또
다른 형태의 분란이 생기는건 아닌지 하는 불안한 생각이 들기도 했
다. 하지만 민우는 이러한 생각을 이내 접었다. 이젠 아무것도 거칠것
이 없다. 자신이 혜원을 사랑하는데에는 이제 아무런 장애가 없다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민우 자신은 이제 영원히 이 여인과 같이 할 것이
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혜원씨, 일어나요."
민우는 창문의 커튼을 열면서 아직도 눈을 뜨지 않고 있는 혜원을 부
른다. 혜원은 눈부신 햇살이 방안을 가득채우자 그제서야 몸을 뒤척이
며 손을 눈으로 가져간다. 혜원은 상황판단이 안되는지 뜨다만 눈으로
주위를 두리번 거린다.
"무슨 여자가 그렇게 잠이 많아요."
민우는 혜원이 누워있는 침대에 엉덩이를 걸치며 그녀의 코를 장난스
레 쥔다. 혜원은 그제서야 정신이 들었는지 화들짝 놀라며 이불로 자
신을 가린다.
"어머! 여기.. 어디에요..?"
민우는 입가에 미소를 띄우며 혜원의 코앞에 얼굴을 갖다댄다.
"택시에서 업고 여기까지 오는데도 한 번안깨고 잠을 자다니 혜원씬
정말 잘땐 누가 업어가도 모르겠어요."
혜원은 다시 주위를 한 번 두리번 거리고 나서야 안심이 되는듯 환한
표정을 짓는다. 민우는 혜원이 해맑은 미소를 짖자. 3년전 카라리조트
에서 혜원과 프로포즈방 외벽에 페인트칠 할때의 혜원의 웃음을 떠올
렸다. 그리고 점핑파크에서 뜀박질을 할 때도 혜원은 까르르 넘어가듯
한 특유의 웃음을 지었었다. 얼마만에 보는 혜원의 사랑스런 미소인
가....민우는 혜원의 미소를 보면서 사람의 미소가 저토록 아름다울수
있다는 사실에 가슴이 뭉클해왔다
"여기... 민우씨... 집인가 보죠? 아.. 참.. .여긴 서울인데도 방 실내 구조
가 3년전의 민우씨 집하고 똑 같네요."
민우는 대답은 않고 식탁으로 가서 준비해둔 커피를 들고 다시 침대로
온다.
"옛날 살던집 실내 구조가 너무 마음에 들어서 그 집을 거의 밴치 마
킹 한거죠. 자, 따뜻한 차라도 한 잔 마셔요. 술 마신건 아니지만 어제
비를 많이 맞았잖아요. 마시면 속이 좀 풀릴거예요."
혜원은 침대에 앉은 자세에서 두 손으로 민우가 건내 주는 찻잔을 받
는다.
"민우씨... 고마워요."
민우는 미소로 대답한다. 혜원은 차를 마시며 주위를 두리번 거린다. "
혜원씨, 왜 그래요?"
"민우씨, 지금 몇시예요?"
민우는 손목의 시계를 보고 아침 아홉시 삼십분이라고 대답한다.
"어머, 큰일 났네....?"
혜원은 이불을 걷으며 침대에서 내려온다. 민우는 의아한듯이 묻는다.
"왜요, 혜원씨 바쁜일이 있어요?"
혜원은 애교있는 웃음을 띄운다.
"가만 놀고 먹는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오늘 결혼식 준비 때문에 가 봐
야해요."
혜원의 말에 민우는 화들짝 놀란다.
"결혼..식요?"
혜원은 장나스레 웃는다.
"아니, 농담이예요, 후후.., 참, 민우씨도.. 제 직업이 플로리스트잖아요.
요번주 일요일 회관행사 부케쇼 리허설 때문에 오늘 빨리 가봐야 해
요. 그래서 어제도 그일 때문에 문화회관 부근 꽃집에 갔었던 거구요."
혜원이 침대에서 내려오자 민우는 자신도 회관 공연장 리모델링 변경
공사때문에 가 봐야 한다고 하면서 준비해둔 아침을 먹고 같이 나가자
고 한다.
"혜원씬 세수부터해요. 치솔 준비해 뒀어요. 난 그 동안 아침을 차릴께
요."
혜원은 민우의 배려에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혜원은 주방으로 향하는
민우를 향해 말한다.
"민우씨, 민우씨 집에서 3년만에 밥을 먹어보네요. 오늘 메뉴는 뭐예
요?"
민우는 뒤돌아보며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윙크를 한다.
"오늘은.... 씨레기국이예요."
늦은 오전, 비온뒤의 9월의 햇살은 포근하고 실바람은 싱그런 내음을
풍기고 있었다. 간밤의 소나기는 도시의 탁한 공기를 말끔하게 거둬가
버렸다. 언제 하늘이 저렇게 맑은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몇날 며칠
을 쏟아 붓던 비의 흔적은 온데간데 없다. 아침을 먹고 나란히 민우의
집을 나선 두 사람은 한가하기 이를데 없는 사람들 같아 보인다. 혜원
은 오랫만의 맑은 공기를 마시려는 듯 양팔을 뒤로 꺅지 낀체 가슴은
한껏 앞으로 내민체 고개는 하늘을 향하고 걷는다. 어께에서 허리까지
걸쳐져 있는 핸드백은 혜원의 작은 몸짓에 좌우로 그네를 타고 있었
다. 두 어걸음 뒤쳐저 걸어가는 민우는 혜원의 뒷모습이 그렇게 천진
난만해 보일수 없었다. 사랑하던 여인을 우여곡절끝에 만났기에 민우
의 설레임은 말로 표현할수 없는 듯한 표정이다. 두 사람은 바쁘지만
그런 내색을 전혀 않는다. 영원히 시간이 멈춰버렸음 하는 듯이, 아니
면 이대로 영원히 걷고만 싶은 듯이 민우와 혜원은 누구도 먼저 말을
꺼내지 않았다. 두사람의 망중한을 깨는 소리는 차의 클랙션 소리다.
민우가 차도쪽을 보자 택시 한대가 타지 안겠냐는 신호를 보낸다.
"혜원씨, 가요."
혜원은 민우가 부르는 소리에 꿈에서 깬듯 뒤돌아 본다.
문화회관에 도착한 택시는 민우와 혜원을 부려놓았다. 혜원은 휴대폰
을 꺼내 시계를 본다.
" 많이 늦었네요. 민우씨 그만 들어가 보세요. 늦게 왔다고 욕 먹겠네
요."
민우도 손목 시계를 본다.
"괜찮아요. 난 서초동 사무실에 들렀다 와야돼요. 혜원씨 일 보세요. 난
여기서 전철 타고 갈께요."
혜원은 눈을 동그랗게 뜬다.
"민우씨, 그럼 집에서 바로 사무실로 가시지 그랬어요? 서초동이면 민
우씨집에서 더 가깝잖아요."
"괜찮아요. 어차피 늦은건데요 뭘.. 난 갈께요. 어서 들어가요."
민우는 혜원을 남겨놓고 인파속으로 사라졌다. 혜원은 민우가 인파속
으로 사라져 보이지 않을때까지 물끄러미 쳐다 보았다. 혜원이 회관쪽
으로 발길을 돌리자 휴대폰이 울린다.
"혜원아 오빠다."
"응 오빠."
"너 왜 어제부터 전화를 안 받냐. 오빠가 얼마나 놀랐는지 아니. 무슨
일 있는거 아니니? 병원에 전화해보니 어제 병원에도 안왔다더구나.
약은 제대로 챙겨 먹는거니?"
"오빠, 정말 미안해..일은 무슨...좀 바빠서.. 전화를 못받은 거지."
"어제 늦게 너 집에도 전화를 했는데...너 설마 다른곳에서 잔건 아니
지? 장미씨 한테도 전화를 했는데 모르겠다 하더라."
정재는 혜원이 자신의 집에서 나온후부터 무척 예민해져 있었다. 혜원
도 모르는 바는 아니다. 여자 혼자 나와서 산다는게 요즘세상에 얼마
나 위험한 일인지 혜원 자신도 알고 있었다.
"응, 오빠.. 친구 집에서 잤어. 안암동에 사는 옥수란 친구 알지..?"
정재는 그제야 안심이 되는지 목소리 톤이 낮아졌다.
"그래 알았다. 혜원아, 오늘 몇시에 일 마치냐 저녘에 시간 좀내라 오
빠하고 저녘이나 같이 먹자. 알았지".
혜원은 난처한 표정을 짓는다.
"오빠, 다음에 하면 안돼?"
"왜? 약속있어?"
"아니, 그런건 아니지만..."
"그럼 됐어,우리가 자주 갔던 흐르는 강물처럼이란 카페 알지. 오늘 7
시 30분이다."
수화기 놓는 금속성소리가 혜원의 귀속을 찌릿하게 했다. 혜원은 오늘
일 마치고도 바쁘게 움직여야 될것 같은 생각을 하면서 회관으로 발길
을 돌렸다.
정재는 수화기를 내려놓고 잠시 생각에 잠긴다. 그러다 정재는 갑자기
생각난듯 수화기를 다시 들어 버튼을 누른다.
"여보세요? 거기 지대풍씨 댁이죠?"
"네, 그런데 누구세요..?"
"아 장미씨 입니까?"
"어머, 정재씨 아네요? 어제 밤에도 전화하고 오늘도 전화를 하시네요.
근데 혜원이한텐 아직 연락이 안되나요?"
장미특유의 비음이 수화기를 울린다.
"아닙니다. 연락이 되었습니다."
"어머, 그래요. 그래 어제 집에는 들어왔대요?"
"예..다름이 아니고 뭐좀 물어 볼려구요."
"뭔데요. 제가 나갈까요?"
"아, 아닙니다.별거 아닙니다. 혹시...유민우씨 소식 들었나 해서요. 물론
알고 계시겠죠."
장미는 하마터면 수화기를 놓을뻔 했다.
"아..예 알..고 있는데요. 대풍씨한테 들었어요. 민우씨 귀국하고 바로 ...
그러니까 한달전에 우리집에 한 번 왔다 갔어요.그런데 정재씨는 어떻
게 알았어요?"
정재는 짐짓 정색을 한다.
"아, 예... 그렇군요. 민우씨가 귀국하고 바로 저를 한 번 찾아온적이 있
었어요. 제가 전화를 드린 이유를 아시겠죠."
장미는 정재의 목소리가 상당히 떨리고 있음을 느꼈다.
"예, 정재씨 물론 알고.. 있죠. 근데 정재씨, 언제까지 숨길수 있다고 생
각하세요. 혜원이와 저는 친자매 이상이고 대풍씨는 저의 남편이고 대
풍씨는 민우씨와 호형호제 하는 사이예요. 더군다나 민우씨가 귀국하
고 부터는 둘이서 일을 같이 하고 있다구요. 혜원이나 민우씨는 시간
문제일 뿐이지 언젠가는 둘이 만날날이 반드시 온다구요. 대풍씨도 불
안하대요. 혜원이와 민우씨가 우리집에서 우연히 만날수도 있다구요."
"........"
"정재씨, 제 얘기 듣고 있어요?"
"예, 듣고 있습니다."
"그러니까요. 만약에 그럴경우에...물론 한달동안 숨기고 왔지만, 혜원이
나 민우씨가 만나면 두사람이 대풍씨나 저를 욕하지 않겠어요.아니 욕
먹는건 둘째치고 민우씨가 많이 황당해 할텐데요. 정재씨, 그냥 두사람
한테 두사람 얘기를 해주는게 낫지 않을까요?"
"장미씨, 괜찮습니다. 저는 민우씨를 만나고 바로 혜원이한테 민우씨가
귀국한걸 얘기해 줬습니다."
장미는 놀라며 다시 묻는다.
"어머 그래요. 근데 혜원이는 저한테 그런얘기는 안하던데요."
"물론 그렇겠죠. 혜원인 이미 오래전에 민우씨를 가슴속에서 지웠다고
하더군요. 만나보라고 얘기했더니 그러더라구요."
장미가 되묻는다.
"정말 혜원이가 그런 얘기를 했나요? 그럼 잘 돼었네요. 근데 민우씨가
문제네요. 민우씨는 여전히 혜원이 죽은걸로 알고 있잖아요."
"예, 그래서 이렇게 전화를 하는 겁니다. 하지만 혜원이도 만약에 민우
씨를 막상 만나게 되면 마음이 어떻게 흔들릴지 모릅니다."
장미는 전화기를 당기며 자세를 고쳐 앉는다. "근데, 정재씨, 혜원이는
그럼 되었다치고 민우씨가 문제네요. 죽었던 사람이 살아있다는 사실
을 알면 충격을 많이 받을텐데요."
"예, 장미씨 그러니까 어쨋든 알때 알더라도 비밀로 해주세요. 대풍씨
한테도 다시 한 번 당부해 주시구요. 제말 아시겠죠."
"예, 정재씨 알았어요. 전 뭐가 뭔지 모르겠어요. 어쨋든 정재씨가 알아
서 하세요. 비밀은 지킬께요."
정재는 수화기를 내려놓고 생각에 잠긴다. 민우의 귀국후 혜원의 마음
이 민우를 떠났다는 걸 확인을 했지만 두 사람간에 놓인 운명의 끈이
아직 끊어졌다고 보기는 어렵다. 정재는 혜원에 대한 자신의 감정이
아직도 이성으로 보여진다는데에는 부정을 못한다. 3년전 혜원이 위독
할때 혜원과 정재를 프로포즈 방에서 만나게 해줬지만 정재본심은 그
게 아니었다. 단지 그 순간은 혜원을 살리기 위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혜원에 대한 정재의 마음은 변한게 없다.
정재는 혜원이 미국에서 심장이식수술후 혜원에 대해서 그냥 좋은 오
빠로 남기로 했지만 정재 자신으로서는 쉽지 않은 `포기`였다. 어릴적
부터 키워온 사랑인데...그 사랑을 포기한다는게 정말 쉬운 일인가...정
재는 자신에게 물어본다. 아직도 혜원을 사랑하냐구....
정재는 혜원이 자주하던 말이 뇌리를 스쳤다. `난 내 심장을 뛰게하는
사람이 나타날때까지 기다릴거야`
"야, 민우야. 우리 회관 리모델링변경공사 괜히 맡은거 아냐."
대풍은 사무실에 들어서며 화가 잔뜩난 표정으로 도면뭉치를 책상위에
집어 던진다.
"형 미안해, 나 때문에..."
"에휴..그게 왜 니 탓이냐. 친구 잘못 둔 탓이지. 친구가 널 추천해서
우리가 이 공사를 맡았는데... 아니 대체 그 놈의 김이사 때문에 일을
할 수가 있나. 우리가 무슨 아트 컨설턴트에서 파견나온 화쟁이들도
아니고 대체 이 도안이 왜 마음에 안든다는 거야. 아니 그러면 자기가
미술 감독까지 다 하든지...나 원...."
내부 홀 디자인은 단순하게 디자인을 해야지 무슨 무대 디자인을 카바
레 무대로 착각을 하는지...그럴러면 인테리어 디자이너에게 전부 맡기
든지...그래서 무대를 아예 장식품으로 주렁주렁 달아버리지...."
대풍은 화가 안풀리는지 책상위에다 발을 올려놓은채 고개를 의자뒤로
젖힌다.
"형, 이거 말이지 다시 한번 검토를 해봐, 수정할건 수정하고, 어차피
시작한거 끝내야 하지 않겠어. 이번건 친구부탁이라서 할 수없지만 앞
으론 공사수주를 제대로 따올테니까 이번건은 어떡하든 마쳐야 하지
않겠어. 형, 빨리 서둘러야 겠어 공기 맞추기도 힘들겠어."
대풍은 발을 내려놓고는 책상에 머리를 대고 한숨을 토한다.
"야, 물론 그렇지만 답답하니까 하는 소리아냐. 김이사란 인간은 아주
꼴도 보기 싫어. 내일 또 그 인간을 볼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지근해 온다."
민우는 책상을 정리하고 윗도리를 갈아입으며 일어난다.
"형, 나 약속있어서 먼저 갈께,형이 수고 좀해줘."
"야 민우야, 이 밤늦은 시간에 대체 어딜 간다는 거냐. 이따 우리집에
가서 저녘이나 같이 먹자."
민우는 벌써 현관을 나서고 있다.
"형 안돼, 미안해 바이바이.. 나 먼저 갈게."
대풍은 어이가 없다는 듯 허리에 손을 얹고 민우가 바람처럼 빠져나간
문을 바라본다.
"짜식 ,오늘 따라 기분이 되게 좋아보이네 무슨 좋은일이라도 있나."
그래봤자 홀애빈데, 아이고 우리 마님한테 전화나 해볼까."
정재와 마주 앉은 혜원은 휴대폰을 들었다 내렸다를 반복하고 있다.
정재는 와인잔을 기울이다 혜원이 안절부절 초조해 하는 듯하는 표정
에 의혹가득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혜원아, 누구한테 전화 오기로 했니?"
혜원은 휴대폰을 핸드백속으로 집어넣는다.
"아니... 오빠 시간...을 보는 중이었어."
혜원은 말을 더듬으며 다시 벽시계를 본다.
"왜 누구랑 약속있니?"
"응..오빠 ..일 관계로 만날 사람이 있거든."
"그럼 낮에 전화를 하지 그랬어."
혜원은 입술이 뾰류퉁해서 정재를 노려본다.
"오빠는 요즘 나랑 통화하면 내가 얘기할 시간을 안주고 일방적으로
끊어 버리잖아."
혜원은 몸을 약간 창문쪽으로 튼채 밉지 않은 눈을 정재에게 흘긴다.
"오빠가 그랬어? 미안하다. 난 오빠로서 동생을 걱정하는데... 그래서
오빠로서의 의무를 다할려구 하는데 너 한테는 참견이나 간섭으로 비
춰지는것 같구나."
혜원은 바로 앉으며 말한다.
"오빠...그건...알지..만.. 그거 알어, 오빠가 예전과 많이 달라졌다는거...."
"오빠가 달라져? 뭐가?"
정재는 무슨 소리냐는 듯이 묻는다.
"동생에 대한 오빠의 지나친 집착 같은거 말이야."
그러면서 혜원은 자리에서 일어난다.
"오빠, 나먼저 갈께, 정말 약속이 있단 말이야. 오빠 정말 미안해, 나
먼저 갈께."
혜원은 정재한테 미안한듯 환한 미소를 지어보이고는 카페를 나갔다.
`지나친 집착이라....`정재는 혜원이 던져 놓고간 문제에 가슴이 서늘해
온다.
민우는 레스토랑에 팔짱을 끼고 시계만 들여다 보고 있다. 전화해 볼
까도 생각해 봤지만 몇번이나 핸드폰을 열었다가 접었다. 벌써 약속시
간 40분이 넘어서 열시가 가까워 오고 있었다. 종업원은 밤늦은 시간
에 손님이 없어서인지 아무것도 시키지도 않고 석고처럼 앉아있는 민
우에게 살살맞은 눈초리를 보낸다. 문이 열리면서 혜원이 헐떡이며 들
어선다. 혜원은 어두운 조명 아래지만 넓은 레스토랑을 두리번거리다
가 이내 창문쪽에 앉은 민우를 발견한다. 혜원은 몸을 던지듯 소
파에 앉는다. 그녀는 할딱거리며 민우의 표정을 살핀다.
"민우씨.. 미안해요. 일이 좀 많아서 늦었어요. 너무 늦게 왔죠?"
민우는 개의치 않는다는 표정이다. 혜원은 테이블에 놓인 보리차를 단
숨에 들이킨다.
"놀랐잖아요. 오다가 무슨일 생긴줄 알았잖아요."
혜원은 민우의 이말에 오늘 하루의 피로가 말끔히 풀리는 기분이다.
"민우씨, 배 고프죠. 뭐든 시킬까요?"
"괜찮아요. 이따 시키죠. 혜원씨도 저녘 안 먹었죠?"
"예, 저도 안 먹었어요.... 근데 민우씨, 저한테 준다는 게 뭐죠?"
혜원은 거친 숨결이 좀 가라앉는지 가슴을 손으로 만지며 긴 숨을 내
쉰다. 민우는 양복 주머니에서 빨간색의 작은 케이스를 꺼내 탁자위에
놓는다.
"혜원씨, 손 내밀어봐요."
혜원은 왼손을 천천히 앞으로 내민다. 민우는 반지를 혜원의 손에 끼
워준다. 혜원은 행복한 미소를 만면에 띄우며 눈을 지긋이 감는다. 그
녀의 눈에서는 눈물이 배어나온다. 혜원은 눈을 뜨고 민우에게 말을
한다.
"민우씨, 나 이반지.. 알아요. 이 반지... 3년전의 반지죠?"
민우는 놀란 입을 다물지 못한다.
"혜원씨가 그걸..어떻게 알고 있어요..? 이 반지를 알고 있는 사람은 아
무도 없는데...?"
혜원은 반지낀 왼쪽손을 오른손으로 가만히 감싼다. 그녀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3년전.. 민우씨와의 언약식이 무산되고 제가 심장의 비밀을 알아갈때
쯤 두 번째로 민우씨 집에 간적이 있어요. 그때 민우씨 침실 서랍에
민우씨가 은혜씨와 나눠 가졌다던 목걸이 옆에 이 빨간 상자가 놓여
있었어요. 제 기억이 틀림..없다면... 그때 그 상자가... 틀림...없어요. 맞
죠?"
민우는 대답대신 어두운 실내 조명에 반짝이는 혜원의 젖은 눈빛을 말
없이 바라본다.
"그래요, 혜원씨... 그 반지는 그때 언약식 하려고 할 때 준비 해 뒀던
거예요." 정재씨로부터 혜원씨의 죽음을 연락 받았지만 난 혜원씨의
죽음을 받아들이기 힘들었어요. 은혜에 이은 혜원씨의 죽음...내가 사랑
하던 사람들의 연이은 죽음을 인정한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
죠. 만약 내가 혜원씨의 죽음을 담담하게 받아들였다면... 그래서 혜원
씨와의 사랑을 기억의 저 편에 추억으로 소중하게 간직 할수 있었겠죠
하지만 애써 잊으려 하지 않았어요. 혜원씨와 사랑했던 추억만큼 혜원
씨는 내 가슴속에 예전 그 모습 그대로 고스란히 남아있었어요. 이태
리 생활 3년동안 난 혜원씨를 한시도 잊은적이 없어요. 혜원씨에 대
한 기억과 함께 그 반지는 혜원씨를 느낄게 할수 있는 매개역할을 했
어요. 그 반지는 이제 역할을 다하고 주인을 찿아갔어요." 민우는 얘기
를 마치자 케이스를 두 손으로 가만히 감싼다. 혜원은 달뜬표정으로
눈가를 손등으로 찍어낸다.
"민우씨..."
그녀는 말을 잇지 못하고 창 밖으로 고개를 돌린다.
머리를 천연색으로 도색한 종업원이 메뉴판을 식탁위에 던지듯이 내려
놓는다. 시간은 10시30분을 향하고 있었다.
시간은 내일이란 미래를 위해 자리를 비워줘야 할 의무라도 있는지 도
시는 거리의 혼잡함을 뒤로 한채 깊은 어둠속으로 잦아들고 있었다.
드문 인적속에 차들만이 도로위를 분주하게 오가고 있었다. 민우와 혜
원은 거리로 나왔다.
"미안해요 혜원씨. 오늘 같은날..... 분위기 좋은 곳에서 저녘을 먹었어
야 했었는데.....몇번 왔던 곳이라서 익숙한 마음에 다시 왔는데 종업원
이 바뀌었네요."
민우는 입을 실룩거리며 껌을 신경질적으로 십던 종업원을 떠올리며
혜원에게 진심으로 사과한다.
혜원은 거리를 두고 앞서 걷다가 민우의 말에 두 팔을 뒤로 한채 빙글
돌아선다 .발레리나가 돌듯이 그녀의 원피스 끝자락이 부채살처럼 돌
았다. 혜원은 무슨 소리냐는 듯이 환하게 웃는다.
"뭐가요 민우씨? 분위기 그 정도면 좋잖아요. 좋은 음악, 향기로운차,
맛있는 음식이면 되죠. 꼭 뭐 호텔 같은 곳이라야 하나요. 전 호텔 가
본지도 오래 돼었어요. 물론 일 때문에 호텔을 가끔 가지만 사적인 일
로 그런 고급스러운데 가서 분위기 잡진 않아요. 전 이런 전원분위기
를 갖춘 레스토랑이 좋아요."
민우는 혜원이 옛날의 혜원이 아님을 깜박했다. 그녀는 이제 호텔이나
리조트를 운영하는 갑부의 딸이 아니다. 민우는 혜원의 말에 눈웃음을
짓는다.
"아현동 다 왔습니다"
택시는 이화여대 부근에 민우와 혜원을 내려주고 어둠속으로 사
라졌다.
인적이 끊어진 어두운 아파트촌 샛골목은 가로등 불빛아래 연무만 하
얗게 가득 빛의 공간을 유영하고 있었다.
"혜원씨, 그만 들어가요. 오늘도 나 때문에 또 늦었네요. 나 갈께요."
혜원은 민우의 말을 들었는지 못들었는지 가로등아래 고개를 숙인채
한 쪽 발로 보도블록을 끄적이고 있었다. 그 모습은 흡사 실연한 여인
의 모습과 같이 처연해 보였다.
"민우씨..."
혜원은 돌아서 발길을 옮기려던 민우를 자그만 목소리로 부른다. 그녀
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민우는 반쯤 돌아서서 혜원을
바라본다.
"가지....말아...요."
민우는 가로등 기둥에 기대어 자신을 보고 있는 혜원의 목소리가 심하
게 젖어있음을 느꼈다. 민우는 말 없이 혜원에게 다가갔다. 민우는 그
녀의 목소리가 젖어있음이 눈물 때문이란걸 알았다. 민우는 가슴에 심
한 통증을 느꼈다. 그녀를 말없이 끌어안았다. 혜원의 눈에서 흘러내
리는 눈물이 민우의 목덜미을 적시고 있었다.
"혜원씨...날... 쳐다봐요"
민우의 눈도 어느새 물기를 머금고 있었다 혜원은 고개를 들었지만 민
우를 똑바로 쳐다볼수가 없다. 혜원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
혜원씨...울지 말아요. 내가 혜원씨한테 있어서 빛과 소금같은 존재였다
고 3년전...카라리조트 프로포즈방에서 혜원씨가 나한테 한 말 기억나
요...? 그 말 지금도 유효한거죠." 이젠 정말 영원히 내가 혜원씨한테
빛과 소금같은 존재가 될께요."
민우는 고개를 가로숙여 그녀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살며시 가져갔
다. 그녀의 입술은 눈물에 젖어 엷은 짠맛이 났다. 혜원은 까치발을 하
고 민우에게 전신을 의지하고 있었다. 그들의 입맞춤은 밤의 적막처럼
깊었고 계속 될 것만 같았다.
민우는 입술을 떼고 붉게 홍조를 뛴 혜원의 얼굴에 묻어나는 눈물을
양손 엄지손가락으로 닦아낸다. 혜원의 깊은 눈은 물기에 젖어 가로등
불빛을 받아 작은 빛을 발하고 있었다.
혜원은 부끄러운듯 엷은 미소를 지으며 눈물로 얼룩진 자신의 얼굴을
양손으로 찍어낸다.
"민우씨....난 왜.. 이렇게... 잘 울죠?"
혜원의 목소리는 미열에 들떠 있었다. 민우는 아무말 없이 혜원을 다
시한번 껴안았다. 민우는 혜원이 물기를 가득 머금은 스펀지 같은여
자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멀리서 전철소리가 밤의 고요를 가르고 있
었다.
"민우야, 수고 많았다. 정말 십년묶은 체증이 다 내려가는 것 같다."
대풍은 사무실 소파에 몸을 가로 누이며 기지개를 켠다. 민우는 커피
두잔을 들고 대풍의 맞은편에 앉는다.
"수고는 형이 했지 나야 뭐 한 일이 있나. 몇날 며칠을 도면과 시름을
했는데 작품이 안나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있겠어. 이 계통에서
떠나야지. 어쨋든 공사를 무리없이 끝마쳤어 다행이야."
대풍은 몸을 일으키며 찻잔을 든다.
"어이구, 민우가 오늘 오랜만에 제 정신이 든 것 같구나. 맨날 바쁘다
면서 딴데 정신 팔고 다니는 것 같더니...."
민우는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말없이 찻잔을 입으로 가져간다. 대풍은
찻잔을 내려놓고 양팔을 소파에 걸친채 입술을 한자나 내밀고 의문부
호가 가득한 얼굴로 민우를 노려본다.
"민우야, 너 여자 생겼냐? 아무래고 너 요즘 보면 뭔가 신변에 좋은일
이 생긴 것 같다. 현장에서도 실없는 사람처럼 혼자서 실실 웃고 다니
질 않나...그리고 양평엔 무슨일로 자주 가냐?"
"형도 참 여자는 무슨.....양평엔 그냥 개인적인 볼 일로 갔다오는 거라
니까."
"너 혹시 혜...."
대풍은 왼손으로 자신의 입을 막는다.
"형 무슨 소리야. 혹시 뭐...?"
"아.....아니다."
민우는 갑자기 생각난듯 찻잔을 내려놓고 책상위에 놓여있는 가방 안
에서 서류뭉치를 꺼내 대풍앞에 가져다 놓는다.
"형 이거 노원동 신한쇼핑센터 조감도 및 설계도면이야 개보수공사 및
리모델링공사를 우리가 하게 되었어 이거 보고 구상을 좀 해보고 어울
리는 조형을 한번 그려봐."
대풍은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킨다.
"민우야....너 방금 어디라 그랬냐?"
"형 왜 그렇게 놀래? 신한쇼핑센터 몰라?"
"아..아니다. 야, 그거.... 안하면... 안되겠냐. 그거 꼭 해야...되냐."
"형, 그게 무슨 소리야?"
대풍은 두 손을 가로젖는다.
"그냥...아무것도 아니다...야, 그긴 구조가 아주 복잡해서 작업하기가 까
다로울 것 같아서 하는 얘기야."
"형, 그건 어쩔수 없잖아, 우리가 직접 공사하는것도 아니고 우린 미래
기획의 의뢰를 받아서 할 뿐이야. 시간은 많으니까 천천히 여유를 갖
고 해도 돼. 다음주에 실사를 한번 가야돼 그곳 실무자들도 만나봐야
하고...그때가서 구체적으로 얘 기를 하도록해. 그 동안 형도 좀 쉬도록
해. 그리고 형, 차좀 빌 려줘.. 난 보성 어머니한테 좀 다녀올려구 해."
"어머님한테 다녀온다구? 그래, 가져가 조심해서 운전하고, 내려 가면
내 안부도 좀 전해다오."
"알았어 형. 나 다녀올게.
민우는 작업복을 벗고 양복으로 입는다.
대풍은 출입문을 나가는 민우를 바라보며 걱정스런 시선을 던진다.
"왜 하필 신한쇼핑센터야. 이거 참 큰일 났네....."
"오빠, 나 왔어."
혜원은 정재방을 빼꼼히 열고 얼굴을 익살스레 들이민다. 민우는 혜원
의 그러한 행동이 귀여운지 슬며시 웃음이 나온다.
"오빠 늦었지, 미안해."
헤원은 소파 한켠에 앉는다. 정재는 인터폰으로 차를 시키고 혜원과
마주 앉는다.
"괜찮아, 너 원래 지각하는 것이 트레이드 마크잖아.".
"오빠, 그렇다고 꼭 그렇게 얘기해야돼."
혜원은 입을 쑥 내민다.
"혜원아, 너 요즘 달라진거 아니?"
"오빠, 뭐가...? 내가 뭐가 달라져?"
"요즘 굉장히.... 얼굴이 유난히 밝아보인다구."
혜원은 대답은 않고 미소만 짓는다.
"오빠, 그런데 무슨 일이야."
"너 회관 부케행사는 무사히 마쳤냐?"
"오빠도 참, 내가 누구야. 풍부한 원예지식을 바탕으로 나름대로의 노
하우를 갖고 있는 일급 플로리스터야."
혜원은 어깨를 으쓱해 보인다.
"어쭈 이제 자신만만해 하는구나."
정재는 혜원의 그러한 동작이 사랑스러 보이기만 한다. 비서가 찻잔을
놓고 나간다.
"혜원아, 너 화원은 잘 운영하고 있냐?"
"응, 직원을 한사람 채용했어. 내가 현장을 다니다 보니 가게 볼 시간
이 전혀 없어. 그래서 사람을 채용했어."
"그래, 잘했어.. 다름이 아니고 이번에 여기 리모델링공사를 하게 되었
거든. 그래서 네 도움이 필요하게 되었어. 혜원이 너의 원예미학을 최
대한 살려 장식을 위한 미적인 기술이 어떤건지 보여줘.. 그래서 고객
들을 열락의 나락으로 한 번 빠뜨려 보자꾸나. 꽃의 아름다움이 어떻
게 극대화 되는지 오빠도 한번 보고 싶다."
"오빠 알았어... 최대한 노력해 볼게."
혜원은 두손으로 찻잔을 들고 입으로 가져간다. 정재는 찻잔을 든 혜
원의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에 시선이 멈춘다.
"혜원아, 너 그.. 반지 웬 거니... 너 반지 원래 안끼잖아. 어디서 난거
니..."
혜원은 차를 마시다 말고 당황한 듯 손을 테이블 아래로 감춘다.
"응....오빠.. 그냥 내가 샀어 .....손이 허전한거 같아서..."
혜원은 정재를 바로 쳐다보지 못하고 말한다.
"응, 그러냐...어디 손 좀 보자."
"오빠도 참, 보긴... 뭘봐 다 같은.. 반지지..."
"아냐, 빨리... 손좀 이리.. 내 밀어봐."
혜원은 할 수없다는 듯이 반지낀 손을 정재앞으로 내민다.
혜원의 왼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정재는 반지를 유심히 본다.
"내가 봐서 뭐 아나, 반지가 이쁘구나..."
정재는 그러면서 알듯모를듯한 표정을 짓는다.
정재는 혜원을 보내고 난 뒤 깊은 생각에 잠긴다. `반지를 자기가 사서
자기 손에 낀다` 정재는 의문을 털어버리지 못하고 어디론가 전화를
한다.
정아가 회의를 마치고 사무실을 나서자 휴대폰이 울린다.
"응, 오빠구나, 오빠 근데 갑자기 무슨 일이야? 혜원인 잘 있어?"
"일은 무슨 일... 그냥 전화 해본거지.... 너 혜원이와 연락 자주 안하
니?"
정아가 엘리베이터 스위치를 누르고 손으로 핸드폰을 바꿔지고 정색
을 한다.
"오빠도 참, 결혼생활하랴 직장생활하랴 솔직히 거짓말 좀 보태서 혜원
이 한테 전화할 시간도 없어. 애 까지 생기면 어떡할까 큰 고민이야."
"............."
"오빠, 나 바뻐 용건만 얘기해."
"응, 뭐좀 물어볼려구."
"뭔데?"
"반지에 관한 건데 말이야...."
"반지...?
"반지를 자기가 사서 자기손에 낄수 있는 거니?"
정아는 엘리베이터를 타려다 말고 벽에 기댄다.
"오빠, 그게 무슨 소리야. 누가 그런 사람이 있어?"
"아니....그냥.. 갑자기 궁금해서 물어보는 거야. 반지의 성격이 뭐니?"
"오빠, 반지는 선물하기 위해서 태어난거야. 물론 자기가 사서 자기 손
에 낄수도 있어, 하지만 이건 극히 예외야. 애들이 호기심에 사서 낄수
도 있는게 그런 경우에 해당되지. 두 번째는 타인들한테 선물용으로
사는게 대부분이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커플 반지라고, 이것도 역시 자
기손으로 살순 없는 거지. 자기가 산다해도 커플 반지이기 때문에 한
개는 반드시 그 선물받을 대상에게 가게 되지."
"그럼.....다 큰 어른이..그것도 결혼안한 사람이 반지를 끼고 있다면 그
건 선물 받은거나 커플 반지란 말이지."
정아는 다시 왼손으로 핸드폰을 바꿔진다.
"네 오라버님, 제대로 알아들으셨어요. 오빠, 그리고 반지는 크게 두가
지가 있는데 하나는 큐백이고 또 하나는 오닉스라는게 있지, 더 얘기
해 줄까?"
"아냐, 됐어."
"오빠, 혜원이한테 안부 좀 전해줘. 그만 끊는다."
정재는 의자에 깊숙히 몸을 가라앉힌채 의자를 돌려 창 밖을 응시한
다.
첫댓글lucky.ⓨⓔⓙⓘⓝ드디엉 작품을 가지고 오셨군요. 아주 상세한 민우와혜원이의 만남에서부터 모든 출연자들이 그대로 나와서 최고입니다. 글 쓰신분도 여름향기 왕펜이신거 같구요. lucky님이 올려주셔서 함께 할수 있어서 감사드리구요. 천천히 행복하게 볼께요. 카페에서의 민우와혜원이의 대화씬이 쥑입니다. 집을 나와
첫댓글 lucky.ⓨⓔⓙⓘⓝ드디엉 작품을 가지고 오셨군요. 아주 상세한 민우와혜원이의 만남에서부터 모든 출연자들이 그대로 나와서 최고입니다. 글 쓰신분도 여름향기 왕펜이신거 같구요. lucky님이 올려주셔서 함께 할수 있어서 감사드리구요. 천천히 행복하게 볼께요. 카페에서의 민우와혜원이의 대화씬이 쥑입니다. 집을 나와
홀로 생활하는 혜원이도 많이 건강해진거 같구,, 대풍엉아와 장미언니는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고 있구..언제나 정재는 혜원이만 걱정하고,,,언제나 당당한 정아의 모습도 보기 좋네요. 천천히 쭉 보겠습니당. 감사해요
감사해요.. 일등으로 읽어주셨네요?? 역뛰 쥔장님 다워서 너무 조아요!!!!!!!!!!! 민우혜원카페가 최강입닷!!!!!!!!!!!!!ㅋㅋㅋㅋㅋ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