州邑西(주읍서)/나주읍 서쪽에
有寒溪洞(유한계동)/한계동이 있는데
由洞口西行五里所(유동구서행오리소)/동네 水口밖 서쪽으로 5리 쯤에
有訪聖小山(유방성소산)/방성이라는 작은 산이 있는데
其形類側甕(기형유측옹)/그 형태가 옹기를 옆으로 논 듯 하고
其下淸流交絡而激觸之(기하청류교락이격촉지)/그 아래로 맑은 물이 서로 섞이어 부딪치는
奇絶境也(기절경야)/기이한 모습이 절경이로구나.
其山之西(기산지서)/그 산의 서쪽에는
大山遮截而反對(대산차절이반대)/큰 산이 가로 막고 그 반대편에
小菴子居其巓(소암자거기전)/작은 암자가 그 산꼭대기에 있다.
卽錦城南條(즉금성남조)/바로 금성의 남쪽 줄기인
長興洞鷹峯東麓也(장흥동응봉동록야)/장흥동의 응봉 동쪽 산기슭이로다.
發地峭竪(발지초수)/땅으로부터 높이 솟구쳐 올라 가파르고
下臨窮谷(하임궁곡)/아래로 내려다보면 깊은 골짜기로
三面則諸峯擁抱團束(삼면칙제봉옹포단속)/3면으로는 여러 봉우리가 둥글게 묶어 껴안고 있어
絶無空缺處(절무공결처)/뚫린 공간도 끊어짐도 없다.
이 저수지를 만들기 전에는 이 계곡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남간 계정이 이 사진 위치 쯤에 있을 것 같다.
위쪽으로 저수지 뚝이 보인다.
멀리 보이는 교량위치에 서수구가 있었다.
필자의 집에서 약 2백미터 거리이다.
<해설>
필자가 어려서 우리 집 앞 溪川의 상류를 寒水洞이라 하였다.
필자의 금계리 집터에서 약150미터 서쪽에 나주읍성의 西水口가 있었다.
訪聖은 오늘날 장원봉으로 장원봉 산록 밑으로 물이 부딪치며 흘러 西水口를 지나
나주 시내를 관통하여 남산 옆의 東水口를 지나 영산강으로 흐르고 있다.
계정의 위치는 수구 밖 풍광 좋은 곳이라 하였으니 오늘날에 백민원 위치 근방으로 추정된다.
남간공께서 성재암기를 쓰신 연도가 남간공 해제에 나타나 있지 않다.
1628년 45세 때에 겨울에 성재암에 들어가 병초진결(兵抄陣訣)을 읽다 란 문구가 있고,
남간정사 계정에 대해서 전혀 언급이 없는 것으로 보아 1630년 이전 그 사이에 써진 듯하다
필자가 성재암기에 써진 나씨 산방의 위치를 찾아갔다.
장원봉 5부 능선 동편에 약수터 표시판을 따라 100여미터를 가면
약수터 흔적이 나타나고 약수터 텃 자리에
집 한 채 들어설 정도의 여유 공간이 있었다.
성재암으로 올라가는 저수지 바로 입구쪽 등산로 이다.
忽東面廖廓(홀동면료곽)/갑자기 동쪽을 보면 아득하고 드넓어
開曠眞平(개광진평)/참으로 평평하고 넓은 들판이 열렸으니
視可八九十里(시가팔구십리)/8-9십리를 볼 수 있다.
白練橫布(백련횡포)/(강물은 마치)하얀 베필 가로 널려 있어
界破野綠(계파야록)/들판의 푸르름을 (강이) 경계로 깨뜨린 것 같아
錦水長也(금수장야)/영산강은 길고 길구나.
川堞邐迤(천첩리이)/냇가와 성첩이 잇따라 나아가고
第宅巖巖(제택암암)/집들은 위엄 있게 서있어
邑居壯也(읍거장야)/邑居의 웅장함이로다.
其他攢蹙奇勢(기타찬축기세)/그밖에도 기이한 형세 한군데 모여 있으니
參差殊狀(참치수상)/길고 짧고 들쭉날쭉하여 여느 것과 다른 모양이고
么見迭出(요견질출)/작게 보아도 너도 나도 뒤질세라 하고
於雲烟杳藹間(어운연묘애간)/아득히 먼 구름과 연기 사이로 한가한 햇빛
若飛舞踊躍奔走而來(약비무용약분주이래)/마치 날고, 춤추고, 뛰고 달려서 오는 듯하다.
然大抵菴祉號(연대저암지호)/그리하여 무릇 복 많은 암자 부르기를
揭之聖齋者(게지성재자)/聖齋라고 懸名한 사람이 있었다.
菴之背(암지배)/암자 뒤에
有石叢立(유석총입)/돌이 무더기로 서있고
若屛開張(약병개장)/마치 병풍을 펴 논 듯 하고
又有泉(우유천)/또 샘이 있어
從石眼環環中流出(종석안환환중류출)/두 눈 굴려보면 아무것도 없이 텅 비어 있는 돌 틈에서 흘러나오는
味甚甘潔(미심감결)/맛이 아주 좋은 달고 깨끗하여
可設蘸(가설잠)/그 물로 무엇이든 담글 만하다.
故一曰菩薩泉(고일왈보살천)/예전에는 또 다른 말로 보살천이라 하였다.
등산로 입구에서 약500미터쯤 올라가면 약수터 간판이 보인다.
엣 약수터를 현대식으로 복원 하였지만, 갈수기라 물이 없다.
이 약수터 텃자리에 성재암이 들어 설 정도의 공간이 있다.
<해설>
오늘날 장원봉 정상에 금성산과 영산강의 앞 글자를 딴 금영정(錦榮亭)을
나인수(羅仁洙) 시장 때에 나주시가 건립하였다.
정자 난간에 앉아 동쪽을 바라보면,
남간공께서 이 글을 쓰신 풍광을 직접 체험하면서 즐길 수 있다.
금영정 다 올라오기 직전에 등산로 오른쪽 편으로 약수터 길 표지판이 있는데
이 약수터가 바로 보살천인 것이다.
<東坡志林/卷4. 記樊山> 武昌의 西山에 있는 西山寺의 샘물은 백색이고 물맛이 달다.
이름을 보살천이라 하는데, 샘이 나오는 바위가 마치 사람 손을 드리운 듯 생겼다.
이 고사를 인용한 것이다.
昔余曾王父止齋先生(석여증왕부지재선생)/옛날 나의 증조부 止齋선생이
嘗讀書于此(상독서우차)/일찍이 여기에서 책을 읽어
人曰羅氏山房(인왈나씨산방)/사람들이 이르기를 나씨 산방이라 하였고
及夫用翰林錦遊故里也(급부용한림금유고리야)/한림에 등용되어 시중하는 사람과 같이 옛 고향 나주를 놀러 왔으니
方伯地主(방백지주)/방백과 지주들이
爲呼酒于訪聖山(위호주우방성산)/방성산으로 술을 부르고
酒酣(주감)/술로 연회가 무르익자
分韻賦詩(분운부시)/운자를 나누어 시를 짓는데
曾王父得潭字(증왕부득담자)/증조부께서는 潭자를 얻어
有古寺埋煙倚石龕之句(유고사매연의석감지구)/“옛 절은 사리탑에 의존하여 연기에 묻혔구나” 란 시구가 있었다.
성재암에서 동편을 내려다 보면 나주 시내와 광주 무등산까지 보인다.
<해설>
남간의 증조부 止齋는 羅昶을 말한다.
공께서는 성종(成宗) 정유(丁酉) 서기1477년5월10일에 출생하고 신유(辛酉) 서기1501년에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하고 중종(中宗) 경오(庚午) 서기1510년에 문과에 올라 한림원(翰林苑)에
선발되었고 중종(中宗) 병자(丙子) 서기1516년에 무안현감을 지내고 동궁사서(東宮司書)와
승정원 주서(注書) 사헌부 지평(持平)과 사간원 헌납(獻納) 의정부 검상(檢詳)과 사인(舍人)
형조정랑을 차례로 역임하고 국왕의 특별 사랑을 입어 어연(御硯)과 어병(御屛)을 하사받았다.
또한 성균관 사예(司藝)와 시강원 필선(弼善)을 역임하였다.
아마 지재공께서 문과 시험 전에 나씨 산방에서 과거 공부를 한 것 같다.
당시의 산 이름이 방성산(訪聖山)인데 오늘날은 장원봉(壯元峯)으로 불리고 있었던 배경에는
지재공의 옛 역사가 숨겨진 듯하다.
오늘날도 마찬 가지이지만 고시공부를 하였던 사람이 고시 합격 후에는 반드시 공시 공부를 했던
암자, 사찰, 토굴, 개인 집 등을 잊지 않고 찾아 가는 것과 같다.
지재공께서 潭자로 읊은 옛절(古寺)은 아마 금성산 산속에 위치한 多寶寺를 지칭한 것 같다.
余每歷遊遺址(여매역유유지)/내가 매양 옛 터를 놀러 오면
自不能無悲憾之懷(자불능무비감지회)/슬프고 섭섭한 마음을 품지 않을 수 없다.
前乎十載(전호십재)/10년 전에도
與明信道人謙(여명신도인겸)/명신도인 謙과 더불어
立社擬淵明故事(입사의연명고사)/ 도연명의 고사처럼 사회에 나섬을
今始就之(금시취지)/이제 처음으로 이루게 되었으니
幸矣(행의)/다행이로다.
康節邵堯夫(강절소요부)/강절(康節) 소요부(邵堯夫) 선생이
人告之以修福則對之而未嘗爲不善(인고지이수복칙대지이미상위불선)/사람이 복덕을 닦으라고
일러주면 대답하기를 “아직 착하지 않은 일을 하지 않았다” 하고
告之以禳災則對之以未嘗妄祭(고지이양재칙대지이미상망제)/재앙 쫓기를 일러주면 대답하기를
“아직 망령된 제사를 지내지 않았다”고 했다 한다.
然則聖齋之云者(연칙성재지운자)/그러한 법칙이 聖齋(聖人)라고 이르는 사람이라면
非吾事也(비오사야)/나의 일이 아니도다
至於佛(지어불)/佛에 이르는 것은
尤非吾族也(우비오족야)/더욱 더 나와 동류가 아니다.
苐長興洞(제장흥동)/장흥동의 싹이
乃吾先墓所也(내오선묘소야)/이에 나의 선대 묘소요
此間只隔了一小嶺(차간지격료일소영)/여기까지 사이에 작은 고개하나 끼어 있어
於拜掃展省也(어배소전성야)/참배하고 청소하고 성묘하는데
邇且便(이차편)/가깝고 또 편리하니
宿願之副(숙원지부)/오래도록 지녀온 소원이 이루어지니
玆非其幸也歟(자비기행야여)/이에 다행이 아니라고 할 수 없구나.
遂書之于壁(수서지우벽)/성취의 글을 벽에다 쓰는 바이다.
<해설>
소강절(邵康節) : 중국 송(宋)나라의 학자. 소옹(邵雍).
소요부는 송나라 소옹(邵雍)을 말한다. 소옹이 젊었을 때 소문산(蘇門山) 백원 위에
몇 년 동안 살면서 몸소 밥을 지어 어버이를 봉양하는 한편 학문에 각고의 노력을 쏟았다.
《宋元學案 卷9 百源學案上》
또 하나의 약수터 자리와 집터가 있다. 위 약수터 아래쪽이다.
여기에는 집터 흔적의 주춧돌도 보인다.
허물어 내린 흙속에 돌담 흔적이 보인다.
600여년 직장공파 가기터 필자의 집 담이다.
옛담의 흔적이 이제는 조금 남아 있다.
앞면에 보이는 기와집이 원래 필자가 살았던 집이다.
지금은 뒤쪽에 지은 2층집에서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