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속담에 이런 말이 있다.
(1) 나한에도 모래 먹는 나한이 있다.
이 속담은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라도 고생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여기서 특이한 낱말은 "나한"이다. 이것은 사실 "羅漢"인데, 우리는 그저 [나한]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두읍법칙에 따라 한 말이며, 그 두음법칙을 적용하지 않으면, [라한]이다.
(2) 羅漢 : 阿羅漢[아라한]의 준말.
이 [아라한]은 산스크리트의 "arahan"의 음역이며, 그 뜻은 "불교에서 온갖 번뇌를 끊고 깨달음을 얻어 공덕을 갖춘 성자(聖者)"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더욱 우리는 두음법칙의 소리를 내서는 안된다. 겨우 산스크리트의 "Arahan"을 한자를 빌어 "阿羅漢" 도는 "羅漢"이라고 했을 뿐인데, "훈민정음"이 만들어지기 전의 표기야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치더라도, 세종대왕이 만든 그 글자 이후 이제 "한글"이 번듯이 있는 이상, 그리고 그 소리가 세상 만물의 모든 것을 다 나타낼 수 있다고 해놓고서 어찌 두음법칙을 적용하여 소리를 제한할 수 있단 말인가?
반드시 "두음법칙", 즉 머리소리되기"는 없애야 옳다. 그래야 한다.
그렇게 하면 비록 "羅漢"[라한]이라고 적더라도 아마도 소리는 [아라한]에 가깝게 들릴 수 있을 것이며, 한글로 만약 [라한]이라고 적으면, 소리낼 적에 아마도 [아라한]이라고 들릴 것이며, "阿羅漢"이라고 적으면 더더욱 [아라한]이라고 들을 것이다. 왜냐 하면 한글로는 늘 [아라한]으로만 쓰고 읽기 때문이다.
불교 낱말이든, 기독교 낱말이든, 아니 일상생활의 말이든, 두음법칙의 틀에서만 벗어난다면, 정말로 훌륭한 한글일 수 있을 것이다. 두음법칙이 있는 한에는 "한글"은 세계에서 일류가 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