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인 캠페인 – 이 자리를 돌아보며 】
이제는 이 자리에 앉아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익숙해질 법도 한데 아직도 마주하게 되는 세상에 대해 조심스러움과 두려움, 두근거림이 좀체 수그러들지 않는다. 이 세상을 가득 메운 전문가들을 존중하고 존경하며 그들이 구축하고자 하는 세상을 조금이라도 더 이해하려 하며, 그들이 애쓰고 용기 내어 만들어놓은 세상에 누가 되지 않기 위해 그간 이 자리에서 나의 일에 더욱 박차를 가하여 왔다. 세상 돌아가는 일에 눈 감고 귀 막으며, 보지도 듣지도 않으면 나의 일을 더 잘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우물 안의 개구리가 되어 내 앞에 앉은 사람들의 말귀를 정말 못 알아듣게 되는 것 같다. 뒤 처지지 않으려고 하루하루를 살아온 것이 아니라 내가 어디쯤에 서 있는지를 늘 알고자 노력해 온 것이 그간의 하루하루 였다. 내가 이루고자 하는 바와 타인이나 혹은 나와 관련된 관계자들이 기대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살피고 그 간격을 늘 좁히고자 노력하며 나의 ‘쓰임’이 제대로 되길 바라며 지내왔다.
그러나 그간의 시간이 바로 내 눈앞에서 무너지는 일이 있었다. 지식의 목마름을 채우고 내가 나아가는 길에 더 많은 동료를 얻기 위해 찾아간 상아탑에서 너무나도 얼토당토 않은 이야기를 들은 것이다. 이전에는 다른 이들이 ‘당했던’ 에피소드를 들으며 심장이 벌렁거렸는데, 필자가 현실로 접하게 되니 이는 무기력함으로 돌아와 아주 깊은 바다로 가라앉는 상황이 되었다. ‘여성폭력시설’이라는 단어를 누가 만든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상아탑에서 들은 반응은 일단 혀를 끌끌 차는 모습이었다. ‘반폭력’도 아니고 여성폭력이 뭐냐? 라는 반응이었다. 그 말은 들은 느낌이 여지껏 내 생은 이런 거 하고 관련 없이 살았는데, 막상 접해보니 너무 웃긴다 라는 정말 형언할 수 없는 무지의 표출로 보였다. 이건 그럴 수 도 있겠다 라고 넘어갈 수 있는 만큼, 최악의 무지를 접한 것이었다.
“당신들이 가정폭력, 성폭력 상담소 차려놓고 가해자를 만들어내는 거 아니야?”,
“성폭력은 난폭한 성행위 아니야?”
“가해자들 모아놓고 교육하면 그냥 나와서 시간 떼우지 뭐 제대로 하겠어?”
“그런 돈 받으면서 일 왜해?”
어떤 기준을 갖고 이야기를 했는지 예전에 진흥원에서 강의한 공무원이 상담소 소장님을 비롯하여 상담소 종사자들을 모아놓고서는 “당신들은 보육교사만도 못하다”라는 이야기를 했다고 했을 때도 어떻게 해서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고 그 말을 거침없이 꺼낼 수 있었는지 또 왜 그 자리에서 앉아서 그들은 그런 이야기를 듣게 되었는지가 무척 궁금하였는데, 위에 나열한 말을 직접 듣고 보니,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구나’를 깨달았고 무장해제를 완전히 해버렸다. 발악 발악을 하며 부정을 하는 것도 의미 없고, 계속해서 심해에 가라앉을 필요성도 없고, 분노할 필요는 더더욱 없다고 생각은 드나, 이 자리를 이 만큼 지켜오고 나름의 자리매김을 해온 필자도 휘청거렸는데, 이 분야를 새로 시작하거나 성실하게 살아온 다른 이가 접하게 되면 어찌될까라는 걱정스러움이 좀처럼 떠나지 않았다. 1인 캠페인의 시작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대한민국에서 배울 만큼 배우고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이해할 만큼 가진 것에 대한 베풀음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자로서 세상의 약자를 대변하기 위해 어쭙잖게 세상과 타협하면 안 되겠다는 신념으로 시작한 것이었던 것이다. 이 세상 모든 사람이 편하게만 살고자 한다면, 노력하여 얻어지는 것은 의미가 없어져 배움 자체가 이 세상에서 사라질 것으로 여겨지고, 배운 대로 실천하며 살아야 하는데, 생겨먹은 대로만 살아간다면 세상은 아마도 정말 혼란 그 자체일 것 같다. 우리나라의 눈부신 발전이 ‘기적’과도 같다고 묘사되는 것은 바로 ‘알고자 하는 것’에서 끝나지 않고 ‘실천하기’운동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알면 실천해야 하는데, 세상은 점점 알고자 하려 하기보다는 알고 있는 것만을 최우선으로 삼아 살고자 하는 이가 많은 것 같다. 상아탑에서 ‘실습’과 관련된 교육시간에 이런 말을 한 상아탑 주인, 아니, 관리인의 의도가 무엇일까? 정말 알아보고 싶지만, 가해자의 의도는 중요치 않다는 힘의 논리로 이해해 보면 학생을 청출어람이 아닌 찍어 눌러야 되는 대상으로 보았다는 안타까움만 느껴진다.
이 길을 내가 제일 먼저 만들지 않았다. 만들어진 길을 따라가고 있었다. 모두에게 이해를 바라며 만들어진 길이 아니었겠지만, 이러한 현상을 접하고 나서 필자는 늘 그랬듯이 앞에 놓인 할 일들에 충실하게 보내고 나니 보람과 성취감이 감싸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직업에 귀천이 없다 했다. 이는 성실하게 일하며 얻는 성취감을 직종에 따라 비교할 수 없음을 의미하는 것일 것이다. 다른 분야에 가면 모르는 것 투성이라 전문가를 알아보지도 못하겠지만, 그 사람의 일하는 모습을 보면 전해지는 것이 분명 있을 것이고, 그 크기를 가늠하는 것은 각자가 가진 그릇에 따라 다르리라고 본다. 성실한 모습은 일의 내용을 불문하고 눈에 띨 것이고, 전문 지식의 유무를 떠나서 그런 모습은 존중할 수 있는 것이라고 본다.
우문에 대한 현답은 있다. 하지만 자동사고가 만들어낸 답일 수 있기에 경계하고 또 조심해 본다. 종사자의 모습이 다양하고 그 출신역시 특징이 될 수 있으나 내담자 앞에 선 모습은 별반차이 없는 가장 일반적인 모습일 것이다. 우리의 필요성은 우리가 소리 높이지 않아도 우리를 찾아오는 사람들이 가장 잘 알 것이다. 우리는 다른 사회복지기관처럼 사람들을 명단으로 작성하여 대상자 관리차원에서 문제를 발굴하여 해결해주려고 애쓰지 않는다.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잘 관리하다가 삐걱거림에 지친 사람들이 잠시 머물다 가는 곳이다. 우리는 문제라고 제시된 것도 잘 살펴보지만 무엇보다도 ‘시기’에 대해 더 집중해 본다. 왜 지금, 왜 이때에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가 하고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문을 닫을 수가 없다. 그 ‘때’를 맞이한 사람을 혼자 두면 안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병원처럼 처방전을 써주지도 않고, 경찰이나 판사처럼 잘잘못을 가려주지도 않는다. 우린 그런 처방이 필요하고 잘잘못을 가리고 싶은 사람들을 마주하고 이야기를 건네 본다. “오시는 길이 힘들지는 않았냐고…” 말이다. 우리가 가진 능력은 작다. 하지만 커다란 세상에 하나의 부품이 되어 커다란 세상을 활용하는 지혜는 크다고 자부한다. <행가래로 1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