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행일시: 2020. 3. 28.~29.(주말) - 음력(3. 5.~6.), 일몰 18:51, 일출 06:22
●산행지: 금강정맥 1구간(금만봉-함라파출소 )
●산행코스: 중리-금만봉-왕사봉-칠백이고지-봉수대터-선녀남봉-용계재-불명산-시루봉-장성리재-미륵산-말골재-장재산갈림길-수재-남당산-밤아니재-360m봉-작봉산-395m봉-까치봉-말목재-옥녀봉-함박봉-소룡고개-성태봉-고내곡재-누항재-천호산-문드러미재-호남고속도-양동마을-쑥고개-용화산-다듬재-미륵산-석불사거리-삼기제일교회-함열 상마사거리-건널목-황등 용산리-함라파출소
●먹거리: 생수1,500cc, 크림빵4, 호빵4, 제크샌드2, 쏘시지4, 샤브레3, 초코파이3, 사탕, 미니아몬드자유시간5, 게비스콘5
●준비물: 외투2, 조끼1, 충전지, 연결선, 스틱, 헤드랜턴2, 구급약, 경광점멸등, 손수건, 귀마개, 버프, 머리띠, 수면용안대, 반장갑, 휴지, 물티슈, 부직반창고, 우의, 예비양말1, 옷1, 팔토시, 무릎보호대, 마스크
●거리: 약 76.45km
●소요시간: 32.18h
●누구랑: 나홀로
●경비: 택시11,700, 하행KTX34,400, 택시4,300, 버스5,000, 식사10,500, 뒤풀이28,000, 상행고속13,500
●날씨: -1~16도
●산행경과:
- 09:02 : 중리
- 09:53 : 금만봉 (282m)
- 10:31 : 왕사봉 (718.3m)
- 11:28 : 칠백이고지 (700.8m)
- 12:50 : 선녀남봉(써레봉갈림길)
- 13:53 : 용계재
- 14:23 : 불명산 (428m)
- 14:43~15:16 : 화암사
- 15:28 : 시루봉
- 15:57 : 장선리재
- 16:46 : 미륵산
- 17:28 : 말골재
- 18:07 : 장재산갈림길
- 18:22 : 수재
- 19:37 : 남당산 (376m)
- 20:15 : 밤아니재
- 21:10 : 작봉산 (419.6m)
- 23:02 : 까치봉 (456m)
- 23:49~00:25 : 말목재
- 01:27 : 옥녀봉 (411.7m)
- 02:21 : 함박봉 (403.1m)
- 02:50 : 소룡고개
- 03:12 : 성태봉
- 04:20 : 고내곡재
- 05:32 : 누항재
- 06:33 : 천호산 (501m)
- 08:05 : 갈매봉 (초소)
- 08:26 : 문드러미재
- 08:49 : 호남고속도로
- 09:32 : 양동마을
- 10:10 : 쑥고개
- 11:03 : 용화산 (342m)
- 11:57 : 다듬재/아리랑재
- 12:50 : 미륵산 (430.2m, 초소)
- 14:14 : 석불사거리
- 14:18~14:56 : 식사
- 15:23 : 삼기제일교회
- 17:09 : 함라파출소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호남정맥: 378.2km (영취산~망덕포구)
* 금강정맥: 131.5km(조약봉~장계산)
* 금남기맥: 107.6km(싸리봉~구드레)
* 조약봉~싸리봉 22.2km
* 금만(싸리)봉~장계산 109.3km
- 중리~말골재 20.28km
- 싸리재~용계재 13.3km
- 금만봉~말골재 17km
- 말골재~말목재 13.7km
- 말목재~문드러미재 12km
- 말목재~쑥고개 15km
- 문드러미재~수레재 37.27km
- 문드러미재~삼기농공단지 13.8km
-. 소룡고개~쑥고개 12.6km
- 쑥고개~칠목재 26.2km
- 쑥고개~함라파출소 22.4km
-. 쑥고개~석불사거리 10.6km
-. 석불사거리~함라파출소 11.8km
* 사전정보(식수 보충지)
- 중리교~싸리재: 3km
- 화암사갈림길: 0.55km
- 장재봉갈림길: 1km
- 불명산: 화암사 식수보충
- 말목재: 석천교회 수도
- 양동재: 양동마을 다세대빌라 식수
- 쑥고개: 용화리버스정류장쪽 슈퍼
- 석불사거리: 중국집, 슈퍼, 나들목식당
- 용산리: 삼거리슈퍼
- 함라초교: 호남식당, 중국집, 갈비탕, 슈퍼, 마트
* 서울에서 큰싸리재가는 길:
- 서울~전주: KTX, 1.30h, 34,400
- 전주~진안: 모래네 간이버스정류소, 0.30h, 5,000
- 진안~대불리: 무진장여객 내처사행, 0.50h, 1,000
* 서울 오는 길
- 함라초교옆~익산터미널, 약 30분 간격, 0.30h
- 익산시외버스터미널~동서울:
매시간 14:05~18:05, 막차19:10
- 익산고속버스터미널~센트럴시티:
15:20, 16:30, 17, 18, 19시, 19:30, 2.35h, 19,700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호남정맥이 조약봉에서 두 갈래로 갈라져 금강정맥을 내놓고, 다시 금만봉(싸리봉)에서 두 갈래로 갈래쳐 금남기맥은 부여로 향합니다.
신산경표에서는 백두대간 영취산에서 빠져나온 금남호남정맥이 조약봉까지 함께하고 이후 호남과 금남으로 갈라지는데 금남정맥은 부여로 향하여 실제적인 금강의 남쪽에서 벗어납니다. 산경표는 모든 정맥의 산줄기 체계는 분명 입해처(바다 입구)에 이르러야 한다고 기술하고 있으면서도 금남정맥의 끝을 백마강 조룡대로 향하게 해 오류를 나타냈습니다. 하여, 신 산경표에서 금강의 남쪽을 구분하며 금강의 입해처 군산을 향하는 정맥을 금강정맥이라 하고 금만봉에서 부여까지 기존의 금남정맥은 금남기맥의 지위를 주었습니다. 금북정맥과 마찬가지로 금남정맥도 강의 하구언(입해처)을 무시하고 계룡산에서 부여 백마강을 향함으로서 사회적, 정치적 요소를 고려하였습니다.
05:10분 KTX용산역에서 출발하여 07:05분 진안행 우등, 진안에서 08시 내처사행으로 주천면 대불리 중리마을에 08:52에 도착 가능했습니다. 금강정맥을 두 구간으로 끊을려고 허리 아프게 걸었네요.
좌측은 완주군 동상면, 고산면, 경천면, 우측은 운주면의 면계를 따라, 장개산길림길에서 천호산 직전까지는 도계를 따랐습니다. 이번 장거리에서는 코로나-19 이전에 목디스크 탈출증으로 왼손이 저리고 힘을 쓰지 못해 운동을 쉬며 교정치료를 받은 여파가 그대로 묻어났습니다. 체중이 늘어 배는 당기고, 야밤에 추우면 계속 가야하는데 근지구력이 딸리니 그러지 못하는 현상이 생기네요. 졸릴 때마다 5~10분, 세번에 걸쳐 잠을 청했는데 추워서 깨더군요. 새벽에 너무 졸려서 그대로 노박을 했는데 500미터쯤 갔다가 다시 뒤돌아 왔더라는...
내 고향 화산면!!
산골이라 흙이 거멓고, 산속이라 야경이 없다는 사실을 금강정맥이 흐르는 동네라는 자부심으로 환치 가능했습니다. 우리 동네를 금강정맥이 빙 둘러 지나갈 줄이야~ 기대가 컸습니다.^^
가난했던 시골 깡촌이 경천저수지 붕어찜과 한우축산단지로 점차 부자가 되어간다니 기쁘고요. 전북 완주군 화산면 금강정맥의 골짜기 승치에서, 덕동에서, 춘산에서, 운곡에서, 상호에서, 운산에서, 비봉에서 5~7km를 통학하며 중학교를 다닌 고향의 친구들에게 안부를 묻고 싶답니다.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금남기맥 & 금강정맥
금강정맥은 고산자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서 금남정맥이라 표기되어 있어 "대동금남정맥" 이라고도 불리우고 있는데, 전북 진안과 전주 사이 모리재고개 위 조약봉(주즐산 또는 주화산)에서 호남정맥과 갈라져 북진하여 연석산-운장산-장군봉을 지나 완주군과 진안군의 경계인 싸리재와 봉수대 사이의 싸리재분기봉(금만봉)에서 북진하는 금남기맥을 내어놓고 서진하여 금강과 만경강을 가로지르며 옛 백제의 숨결이 오롯이 남은 전주, 익산 땅을 크게 휘감으며 전라북도 완주군, 익산시, 군산의 장계산을 지나 점방산에 이르러 금강 건너 충남 장항의 호서정맥과 마주하는 약120km의 산줄기를 말한다.
금강정맥은 대부분 전북의 고을을 지나나 충남 논산시 일부와 접하게 되는데, 양촌면, 가야곡면, 연무대읍과 경계를 이루다 고내곡재와 누황재 사이의 샐목과 365m봉 근처에서 다시 전북지역의 여산에 인계한다. 또한, 금강정맥은 천호산 남쪽의 갈매봉에서 익산시 왕궁면과 만나 완주군과 이별한다. 금강정맥은 이후 백제의 고도 익산 지역의 중심부를 지나며 용화산과 미륵산을 이루고, 비산비야의 흐리고 여린 기운으로 북쪽으로 이어가며 함라산과 그 연봉들을 이루고는 금강을 따라 서진하여 군산 시내로 들어서서 금강 건너 호서정맥과 마주하며 여정을 마무리 한다.
* 금강정맥
금강정맥(실질적인 금남정맥, 금강과 만경강 분수령)은 서북으로 방향을 틀어 만경강과 금강을 가르며, 왕사봉(718.3m) 칠백이고지(700.8m), 불명산(427.6m), 말골재, 장재봉 어깨를 지나서 남당산을 일으킨다. 그리고 금강정맥은 남당산에서 서쪽으로 뻗어가면 작봉산, 까치봉, 옥녀봉, 함박봉, 천호산, 용화산, 미륵산, 석불리, 23번국도, 함라면을 지나서 웅포재 부근의 함라산 고스락에 닿는다. 이곳에서 우측으로 함라산 줄기를 나누어 놓고 망해산(230.3m), 취성산(205m), 용천산(141m), 대명산(126m), 오성산 어깨(227.7m), 요동산을 거쳐 금강 하구둑으로 간다. 그러나 금강 하구둑이 없었다면 이 정맥은 대명산, 고봉산(148m), 대초산(109m), 용화산(104m), 청암산(112m), 금성산(126m), 장계산(110m) 방향으로 가는게 맞다.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금강정맥(錦江正脈)은 백두대간이 덕유산을 지나 백운산에 내려서기 전에 영취산에서 장안산-신무산-팔공산-성수산-마이산을 거쳐 진안과 전주사이의 모래재고개 위 조약봉(주줄산 또는 주화산)에서 두줄기로 갈라진다. 한줄기는 남서쪽 만덕산으로 해서 내장산-추월산-무등산-제암산-존제산-조계산-백운산 등 전라남북도를 휘돌아 섬진강 하구의 망덕산까지 이어지는 호남정맥이고, 또 한줄기는 북진하여 연석산-운장산-장군봉을 지나서 싸리재와 봉수대 사이의 싸리재분기봉(금만봉)에서 다시 두 갈래로 갈라진다. 한줄기는 북진하여 인대산-대둔산-계룡산을 지나 부여 부소산에서 맥을 다하는 산경표의 금남정맥이고, 또 한 줄기는 서진하여 왕사봉을 거쳐 칠백이고지-시루봉-장재봉-작봉산-천호산-미륵산-함라산-망해산-고봉산을 지나 군산 장계산에서 서해바다로 잠긴다. 이 산줄기를 보통은 금남기맥 혹은 원 금남정맥이라고 부르는데 신 산경표는 조약봉 분기봉에서 군산의 장계산까지 가는 산줄기를 금강정맥이라고 부르고, 싸리재 분기봉에서 부여의 부소산까지를 금남기맥이라고 부른다. 거리는 조약봉에서 부소산 조룡대까지나 군산의 장계산까지나 신기하게도 같은 도상거리 131.4km이다.
그렇게 이름지어진 이유는 정맥은 강을 구획하는 경계가 되고 맥이 바다에 닿아야 하는데 산경표의 금남정맥은 이 모두를 충족하지 못하니 온전히 금강과 만경강의 남쪽 울타리를 이루고 있는 이 줄기를 금강정맥이라고 해야한다는 주장이다. 이 산줄기의 조약봉에서 시루봉까지 대략 40여km 거리는 산세도 중후하고 교통편도 용이치가 않다. 운주면 말골재(17번국도)를 지나면 적당한 거리로 차도가 지나서 구간을 끊기가 쉬워지고 미륵산을 넘어가면 산은 없어지고 너른 들판이 나와서 과연 산줄기가 있을까 싶지만 표고 2-30m되는 산줄기는 엄연히 이어지고 있다. 장장 6~7km되는 이 들판의 정맥 마루금 위로 물이 흐르고 있다는 사실은 상상도 못한 일이다. 정맥 산줄기 꼭대기 위로 작은 도랑도 아니고 깊이가 2~3m, 폭이 4~5m되는 수로가 그것도 수km나 가다니!! 이유는 금강의 물줄기를 끌어올려서 김제 만경 들판을 적시는 수로다. 이미 일제시대에 만든 것이다. 들판을 건너 익산시 함라면에서 다시 산으로 올라서 얕은 구릉지를 따라서 군산의 대야면에 이르면 이번엔 다시 만자교라는 다리를 건너고, 너른 대야뜰을 건너고, 작은산 몇 개를 넘으면 다시 칠다리를 건너는데 만자교나 칠다리나 모두 이 일대를 농지로 만들면서 생긴 인위적인 물길이 아닌가 생각한다. 금강정맥이 지나는 산은 조약봉 분기봉-연석산-운장산-장군봉-싸리재 분기봉-왕사봉-칠백이고지-시루봉-남당산-까치봉-옥녀봉-천호산-미륵산-망해산-대명산-청암산-장계산 등이다. - 박종율선생님의 산경표를 따라서에서 인용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전라북도
* 완주군
완주군(完州郡)은 대한님국 전라북도 북부에 있는 군이다. 전주시를 둘러싸며, 동쪽으로 진안군, 서쪽으로 익산시, 김제시, 남쪽으로 정읍시, 임실군과 접하고, 북쪽으로는 대둔산을 경계로 충청남도 논산시, 금산군과 도계를 이룬다. 군청은 2012년 6월 전라북도 완주군 용진읍 운곡리로 이전하였다. 완주군의 북부는 과거 고산군(高山郡)이었고, 중부는 우주현(紆州縣)이었으며, 남부는 전주부였다. 1914년 4월 1일 고산군이 전주군에 병합되고, 1935년 전주읍이 전주부로 분리·승격되면서, 완주군으로 개칭되었다. 군의 명칭은 전주의 옛 이름인 '완산주(完山州)'에서 따왔다. 전라북도의 시·군 중에서 면적이 가장 넓다. 본래 백제의 우소저현(于召渚縣, 또는 于召諸)이었는데, 신라 경덕왕 때 우주로 고쳐 금마군(金馬郡: 지금의 익산시 금마면)의 영현으로 하였고, 고려 현종 때 전주에 속하게 하였다. 우주(紆州)에는 우동(紆東)ㆍ우서(紆西)ㆍ우북(紆北)의 3개 면이 있었다. 우주의 북동쪽에 양량소(陽良所)가 있었는데, 이곳은 우양촌(右陽村)의 철소(鐵所)를 뜻한다. 조선시대에는 만경강을 따라 삼례역(參禮驛)에 이르러 전주나 여산(礪山)으로 통하였다. 당시에는 교통상 외진 곳으로, 이 지역에 창(倉)이 있어 주위의 세곡을 모아 만경강을 따라 황해로 날랐다. 이 지역은 산간분지로서 동서의 교통이 불편하여 동쪽의 고산(高山)과는 송치(松峙)를 통하여 연결되었고, 서쪽의 익산(益山)과도 고개를 둘이나 넘어야 하였다. 지금의 봉동읍ㆍ비봉면 지역으로 추정된다.
* 고산(高山)
고산(高山)은 백제 때 난등량(難等良)이라고 하였고, 757년(경덕왕 16) 고산으로 고쳐 전주도독부 관내 전주의 영현(領縣)이 되었다. 고려시대에는 그대로 전주목의 임내(任內)였으나, 1390년(공양왕 2) 감무관(監務官)을 두어 독립시켰다. 이 때 진례(進禮)의 진동현(珍同縣), 전주의 운제현(雲梯縣)을 함께 다스렸다. 1392년(태조 1) 운제현이 속현으로 바뀌었고, 이듬해 진동현이 분리되었으며, 1413년(태종 13) 감무가 현감으로 바뀌었다. 1895년(고종 32) 고산군이 되었고, 1906년 운북면(雲北面)이 충청남도 연산군에 이속되고 전주군의 월경지(越境地)인 양량소면(陽良所面)의 일부가 편입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개편 때 전주군에 병합되었으며, 1949년에 전주가 시로 승격됨에 따라 완주군에 편입되었다. 관내에 철장(鐵場)·옥포역(玉包驛)·화암사(花巖寺)가 있었다. 용계성(龍雞城)은 동쪽의 탄현(炭峴)을 지키려고 백제가 옛 진동성과 함께 쌓은 것이라고 한다. 주요 산은 북동쪽과 동쪽에 대둔산(大屯山, 878m)·천등산(天燈山, 707m)·선녀봉(仙女峰, 666m)·선치봉(仙治峰, 759m)·칠백이고지(701m)·왕사봉(718m)·운장산(雲長山, 1,126m)·연석산(硯石山, 917m)·원등산(遠登山, 713m)·만덕산(萬德山, 762m) 등이 있다. 남부에는 고덕산(高德山, 603m)·오봉산(五峰山, 513m)·갈미산(葛尾山, 541m)·경각산(鯨角山, 660m)·모악산(母岳山, 794m) 등이 솟아 있다. 완주군의 북동쪽과 동쪽의 산지는 금강과 만경강의 분수계가 된다. 만경강의 본류인 고산천은 원등산 동쪽의 동상면 사봉리 무지동에서 발원하여 동상저수지·대아저수지로 흘러든 뒤, 경천저수지에서 흘러오는 지류와 고산면에서 합류하여 봉동읍을 지나 삼례읍에 이른다. 고산천은 만덕산 북쪽의 소양면 신촌리에서 발원하여 소양면·용진읍을 지나온 소양천(所陽川)과 상관면 용암리 슬치(瑟峙)에서 발원하여 전주시를 북쪽으로 관통하는 전주천과 삼례읍에서 합류하여 만경강으로 흘러든다. 그 밖에 군의 북부를 서쪽으로 흐르는 장선천(長仙川)은 논산저수지로 흘러들어 논산천의 지류가 된다. 산성으로는 1675년(숙종 1) 축성된 소양면 산리의 위봉산성(威鳳山城, 전라북도 기념물 제17호)과 비봉면 내월리·대치리의 대치산성(大峙山城), 화산면의 고성산성(古城山城)·산성동산성, 운주면의 산북리산성·만수산성(萬壽山城)·길마재산성, 용진읍의 구억리산성, 고산면의 백현산성(栢峴山城)·이전리산성(泥田里山城) 등이 있다. 전적지로는 임진왜란 때 권율장군이 전라 향병 1,500명을 지휘하여 왜장 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가 이끄는 왜군을 물리친 운주면 산북리의 이치전적지(梨峙戰蹟地, 전라북도 기념물 제26호), 소양면 신촌리의 웅치전적지(熊峙戰蹟地, 전라북도 기념물 제25호) 등이 있다. 또한 한국 최초의 성당이었다고 하는 화산면 승치리의 되재성당이 있고, 1868년 순교한 천주교도들의 무덤인 천호산의 ‘천주교순교자묘’가 있다.
* 진안군
북동쪽은 무주군, 남동쪽은 장수군, 서쪽은 완주군, 남서쪽은 임실군, 북쪽은 충청남도 금산군과 각각 접하고 있다. 군청은 전라북도 진안군 진안읍 군하리에 있다. 진안군은 소백산맥 서쪽 사면과 노령산맥 동쪽 사면의 사이의 산간고원지방에 위치한다. 군의 동부는 소백산맥의 서쪽 사면과 이어진 높이 300m 내외의 진안고원이 있다. 서부는 노령산맥의 주능선인 운장산(雲長山, 1,126m)·만덕산(萬德山, 762m) 등의 비교적 높은 산들이 있다. 노령산맥 일대는 중생대 백악기의 진안층군에 속하는 퇴적암류로 이루어져 있고, 진안고원은 대부분 화강암질 편마암으로 이루어져 있다. 말의 두 귀처럼 생긴 특이한 형태 때문에 관광지로 널리 알려진 마이산은 백악기 말에 퇴적된 것으로 추정되는 역암이며 그 주변은 화강암질 편마암으로 되어 있다. 이 일대가 지반의 융기에 의해 고도가 높아진 뒤, 상대적으로 풍화에 강한 역암이 주변의 화강암질 편마암에 비해 풍화·침식을 적게 받아 높은 산으로 남게 된 것이다. 운장산의 북쪽 골짜기를 흐르는 주자천의 상류는 운일암(雲日岩)·반일암(半日岩)으로 유명하다. 이들 고원과 산지의 중앙에 진안읍과 마령면의 경계를 이루는 마이산(馬耳山, 685m)이 있다. 남동부의 소백산맥 서쪽 사면에는 성수산(聖壽山, 1,059m)·팔공산(八公山, 1,151m)·덕태산(德泰山, 1,113m) 등의 높은 산들이 있다. 그 밖의 산으로는 구봉산(九峰山, 919m)·부귀산(富貴山, 806m)·대덕산(大德山, 875m)·내동산(箂東山, 887m) 등이 있다. 호남의 지붕이라고 일컬어지는 진안고원은 금강과 섬진강의 발원지이다. 금강은 장수군 장수읍 수분리 수분령(水分嶺, 530m)에서 발원하여 진안읍·정천면·용담면을 거쳐 무주군으로 흘러 들어간다. 섬진강은 백운면의 팔공산 북쪽에서 발원하여 마령면·성수면을 거쳐 임실군으로 각각 흘러들어 간다. 대체로 성수산∼마이산∼만덕산을 잇는 선이 두 강의 분수계가 된다. 두 강의 지류들은 낮은 산지 사이에 여러 방향으로 뻗은 골짜기를 만들면서 주변의 곳곳에 충적지를 만들고 있다. 진안읍은 금강의 지류인 진안천의 침식분지이다. 금강 본류는 학천(鶴川)·구량천(九良川)·진안천·정자천(程子川)·주자천(朱子川) 등의 지류와 합해져 무주군으로 흘러, 용담면 월계리의 금강 본류에 합류된다. 선사시대의 유물·유적은 발굴된 바 없으며, 삼한시대에는 마한의 영토로서 어느 정도 부족국가의 형태를 이루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삼국시대에는 백제의 영토인 난진아현(難珍阿縣)으로 완산주(完山州) 99현 가운데 하나였으며, 월랑(月浪, 또는 越浪)이라고 불리었다. 백제와 신라가 이곳을 차지하려고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는데, 주민들이 살 수가 없어 한 신동(神童)으로 하여금 백일기도를 드리게 하자, 산신령이 나타나 이곳에 절을 짓고 탑을 세우면 평화롭게 살 수 있을 것이라는 계시를 내려, 이 때 세운 탑이 상전면 주평리의 삼층석탑(檜寺洞石塔)이라고 전해진다. 이러한 설화는 이 지역이 백제와 신라의 국경지대로 빈번한 전란에 시달렸던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신라가 백제를 병합한 후 757년(경덕왕 16)에 진안(鎭安)으로 개칭되었고 장계군(長溪郡)의 속현이 되었다. 통일신라시대에 무염선사(無染禪師)가 천황사(天皇寺)를, 혜감대사(慧鑑大師)가 금당사(金塘寺)를 창건하였다고 한다. 고려 초에 진안현은 전주의 속현으로 감무(監務)를 두었으며, 1391년(공양왕 3)에는 마령현(馬靈縣)을 겸무하였다. 한편 용담현은 원래 청거현(淸渠縣)으로 진례현(進禮縣)의 속현이었다. 1313년(충선왕 5)에 용담으로 개칭되어 현령이 파견되었다. 1391년(공양왕 3)에 현령인 최자비(崔自卑)가 용담향교를 건립하였다. 1413년(태종 13)에 마령현이 통합되어 진안현으로 개칭되었고, 이듬해 진안향교가 창건되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진안현의 호구수는 169호 772인이었고, 용담현은 86호 274인이었다. 임진왜란 때에는 이복남(李福男)을 비롯한 의병이 웅치(熊峙)에서 용담·진안을 거쳐 전주를 공략하려던 왜병을 격퇴하였다. 진안읍 죽산리 어은동(魚隱洞) 골짜기에서도 왜병과 혈전을 벌였는데, 후에 이 골짜기를 ‘왜너더리’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1589년(선조 22)에 전주사람인 정여립(鄭汝立)이 대동계(大同契)를 조직하여 모반을 일으켰다가 실패하여 죽도(竹島)에서 자살하였다고 전해진다. 이 지방은 청자도요지로 유명했는데, 특히 성수면 도통리 도요지는 초기 청자문화를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이다. 한편, 어은동성당은 천주교에 대한 거듭된 박해를 견디어내고 이 지방에 천주교를 전파하며 그 명맥을 이어온 성지이다. 1894년(고종 31)에 동학혁명이 일어나자 진안의 동학접주인 문계팔(文季八)과 이사명(李士明)·전화삼(全和三)·김택선(金澤善) 등이 봉기하여 일본군에 대항하였다. 1895년에는 남원부 진안군으로, 1896년에는 전라북도 진안군이 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용담군이 병합되어 11개 면을 관할하였다. 1919년에 3·1운동이 일어나자 3월 24일 장날을 기하여 만세운동이 일어났으며, 많은 사람들이 이에 참가하였다. 1950년 북한의 남침으로 인해 공공기관 및 학교·주택 등이 파괴되었으나 산간지대였기 때문에 많은 피해는 입지 않았다. 한국전쟁 당시 비밀경비대를 조직하여 북한군 511명을 사살하고 1,065명을 생포하는 대전과를 거두었다. 또한 9·28수복 후에는 주천으로 도주해온 공비들의 약탈이 심해지자 애국청년들이 의용전투대를 조직하여 이들과 대항하다가 33명이 전사하였다. 그 때 전사한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대한의백비(大韓義魄碑)가 건립되었다. 1979년 5월 1일에 진안면이 읍으로 승격되었으며, 1983년 2월 15일에 마령면 연장리가 진안읍에, 정천면 구룡리가 상전면에 편입되었다. 1987년 1월 1일에 상전면 설산리가 진안읍에, 정천면 용평리가 상전면에 편입되었다. 1994년 12월 26일에는 동향면의 신송리 일부가 장수군에 편입되었다. 진안은 소백산맥과 노령산맥의 경계에 펼쳐진 고원이기 때문에 선사시대의 유물이나 유적은 거의 발견되지 않았으며, 마령면 평지리, 정천면 모정리 등지에 지석묘가 남아 있을 뿐이다. 삼국시대에 이르러 백제와 신라의 접경을 이루면서 인근의 장수군·무주군과 함께 국방상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봉수대로는 남원의 봉화산(烽火山)과 장수의 장안산(長安山) 방면에서 승계하여 운주(雲州)·회현(澮縣)으로 연결되는 주천면 대불리의 태평봉수대(전라북도 기념물 제36호)가 있다. 동남쪽으로 주천면 추령봉수대와 완주군 운주면 탄치봉수대를 거쳐 부여 방면으로 연결되는 정천면의 성치(城峙)봉수대가 있다. 도요지로는 전라남도 강진의 초기 청자요지에서 발견된 것과 같은 황색·회색·녹색의 유약이 발라진 토기조각이 발견되어 초기 청자문화의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성수면 도통리 청자요지가 대표적이다. 1589년(선조 22)에 정여립이 모반사건을 꾀하다가 피신하여 자결한 곳인 죽도, 임진왜란 당시 왜군을 물리친 웅치전적지를 비롯하여 독특한 산세로 유명한 마이산(馬耳山, 명승 제12호), 마령면 동촌리의 돌로 쌓은 마이산탑(전라북도 기념물 제35호)도 유명하다.
* 논산시
동쪽은 계룡시 두마면, 대전광역시·금산군, 서쪽은 부여군, 남쪽은 전라북도 완주군·익산시, 북쪽은 공주시와 접하고 있다. 계룡산과 대둔산(大屯山, 878m) 줄기가 군의 동북부에서 동남부에 걸쳐 지나고 있어 험준한 산악지를 형성하고 있다. 북서부에서 남서부는 평균높이가 60m 내외의 낮고 평평한 구릉지가 전개되는 전형적인 동고서저의 지형적 특색을 지닌다. 남북방향으로 뻗은 계룡산은 연천봉(連天峰, 742m)·향적산(香積山, 575m)·국사봉(國師峰, 421m)·함지봉(咸芝峰, 386m)·천호봉(天護峰, 386m)으로 연결된다. 진안고원(鎭安高原)과 철산고원(鐵山高原)으로 이어져오는 산지는 대둔산을 정점으로 하여 바랑산(555m)·월성봉(650m) 등이 벌곡면·양촌면 일대에 산지를 이루고 있다. 대둔산의 동서 방향으로 장재봉(長才峰, 487m)·작봉산(鵲峰山, 421m)·옥녀봉(玉女峰, 410m)·함박봉(咸博峰, 332m) 등이 연결되어 전라북도와 도계를 이룬다. 금강의 지류가 계룡산과 대둔산으로부터 발원하여 북서류 내지 남서류한 뒤 논산천에 집수된 다음, 강경읍 부근에서 금강본류에 흘러든다. 강경천(江景川)은 연무읍·채운면·강경읍 일대를 흐르며 논산천에 합류한다. 주요 하천으로는 노성천(魯城川)·연산천(連山川)·갑천(甲川)·성평천(城坪川)·방축천(防築川) 등이 있는데, 주변에 넓은 논강평야와 낮은 구릉지가 발달되어 관개가 용이하다. 소수로는 논산농지개량조합저수지 등이 있어 농업용수로 이용된다. 금강 유역에서 구석기시대 유적이 출토되었고, 1965년에 양촌면 신기리에서 발견된 고인돌 및 채운면 하리, 성동면 원북리, 은진면 토량리와 등화리, 노성면 송당리, 연산면 청동리 등의 고인돌에서 출토된 마제석검과 동검 등으로 선사시대의 문화를 알 수 있다. 백제의 웅진문화권 시절이던 동성왕에서 성왕 때에는 신라와 결혼동맹을 맺으면서도 성을 쌓은 것으로 미루어보아 화전 양면정책을 썼던 것 같다. 연산의 황산성을 비롯하여 여러 곳의 산성들이 모두 이때에 축성된 것이다. 660년(의자왕 20)나당연합군이 쳐들어오자 기울어져가는 백제를 구하려고 결사대 5천 명을 뽑아 황산벌에서 싸우다가 장렬한 최후를 마친 계백의 묘가 부적면 충곡리에 있다. 이 지방은 백제시대에는 황등야산군(黃等也山郡)과 덕근군(德近郡)에 속했고, 신라시대에 이르러서는 황산(黃山)·이산(尼山)·덕은(德殷)·석산(石山)의 4군으로 개칭되었다. 고려 초에 황산이 연산(連山)으로, 덕은(德殷)이 덕은(德恩)으로, 석산이 석성(石城)으로 개칭되었다. 왕건은 후백제의 신검으로부터 황산에서 항복을 받아 삼한을 통일하게 된 것은 하늘이 도왔기 때문이라고 하여 황산을 천호산으로 고치고 그 밑에 개태사를 지었다. 968년(광종 19)에 제작한 반야산 밑의 미륵보살석불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미륵상일 뿐 아니라 고려시대의 불교예술을 대표하는 것으로, 이러한 예술과 신앙이 고려왕조를 지탱하게 하는 힘이 되었다. 조선이 개국되자 태조는 국호를 조선이라 하고 도읍지를 논산의 계룡산 신도안에 정하기로 하고 2월부터 역사를 시작했으나 반대의견으로 인해 중지하고 서울로 옮기게 되었다. 중엽에 와서는 논산 일원이 예향(禮鄕)을 이루는 고장이 되었다. 김장생(金長生)이 그 선구자로 많은 학자들이 이곳에서 배출되었다. 그 아들 김집(金集)은 김현(金灦)과 아울러 당대의 예학의 연원을 잇는 주자학의 선구자이었다. 한편 노성의 윤증(尹拯)은 송시열(宋時烈)·유계(兪棨)와 그 장인 권시(權諰)에게서 배워 예학에 밝았고 당시 소론의 영수로 조야의 관심을 끌었다. 그 뒤 후학들이 학통을 계승하여 이 지방에 서원을 세우고 인재를 길러내었다. 강경의 죽림서원(竹林書院)을 비롯하여 돈암서원(遯巖書院)·충곡서원(忠谷書院)·휴정서원·효암서원(孝巖書院)·행림서원(杏林書院)·노강서원(魯岡書院) 등이 있었다. 덕은군은 시진현(市津縣)과 합쳐져 세종 때 은진현(恩津縣)으로 되었다. 1646년(인조 24)에 이산현 사람인 유탁(柳濯)이 모반하는 사건이 발생하여 은진·이산·연산이 폐합되어 평천역(平川驛) 서쪽에 은산현(恩山縣)이 설치되었다가 1656년(효종 7)에 세 현이 다시 설치되었다. 이산현(尼山縣)은 영조 때 이성현(尼城縣)으로, 정조 때 노성현(魯城縣)으로 그 이름이 바뀌었다. 한편,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로 논산에 남아 있게 된 서원은 연산의 돈암서원과 광석의 노강서원뿐이었으나 그 뒤 거의 복원되었다. 1919년 3월논산읍을 선두로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하더니 강경읍과 연산면에서 장날을 이용하여 만세시위행진이 계속되었다. 논산 출생의 김태오(金泰午)는 논산만세시위운동을 주도하다 붙잡혀 옥사하였다. 그 밖에 권기수(權基洙)·배영식(裵榮植)·이충규(李忠圭) 등이 옥사하거나 총살당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은진군과 연산군의 전부와 노성군의 소사면을 제외한 전부와 석성군·공주군·진잠군(鎭岑郡) 등의 일부지역이 병합되어 논산군이 설치되었다. 1931년강경면이 읍으로 승격되어 1개 읍, 14개 면이 되었으며, 1938년에는 논산면이 읍으로 되었다. 1962년두마면에 신도안(新都內) 출장소가 설치되었다. 1963년 1월 1일구자곡면의 7개 리(里)와 전라북도의 익산군 황화면이 합해져 연무읍으로 승격되었고, 구자곡면의 나머지 삼전리·왕암리·야촌리는 가야곡면에, 시묘리는 은진면에 편입되었다. 1966년 7월 10일마전(麻田) 출장소가 폐지되었다. 1973년 가야곡면의 석서리가 양촌면으로 편입되었다. 1983년 2월 15일가야곡면의 중산리와 양촌리 일부가 양촌면에, 양촌면의 신량리가 연산면에, 은진면의 토량리 일부가 연무읍에 편입되었다. 1987년 1월 1일에는 은진면 강산리·내동리·관촉리가 논산읍에, 1989년 1월 1일에는 대덕군 진잠면 남선리가 두마면에 편입되었다. 1993년 군간 경계 조정으로 상월면 원오리 일부가 공주군 계룡면 월곡리로 편입되었으며, 1996년 3월 1일 도농복합으로 논산군 전체가 시로 승격되고, 논산읍을 취암동과 부창동으로 분리하였다. 2003년 9월 19일논산시 두마면이 계룡시로 분리되었다.
* 익산시
동쪽은 완주군, 서쪽은 군산시, 남쪽은 만경강을 경계로 김제시와 접하고, 북쪽은 충청남도 부여군·논산시와 접하고 있다. 시청은 전라북도 익산시 남중동에 있다. 시의 동쪽 일부를 제외한 대부분의 지역은 구릉과 충적평야가 넓게 발달해 있다. 동부의 여산면·금마면에는 옥천계의 변성퇴적암류가 분포해 노령산맥의 지맥인 천호산(天壺山, 500m)·미륵산(彌勒山, 430m) 등의 산지를 이루면서 동쪽의 완주군으로 연결된다. 천호산은 석회암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서쪽 사면에는 석회석광산과 석회동굴인 천호동굴이 있다. 삼한시대에는 마한의 영역에 속했는데, 마한 54개국 중 건마국(乾馬國)·감해국(感奚國)·여래비리국(如來卑離國) 등의 소국이 있었다고 한다. 또, 기자(箕子)의 41대손인 기준(箕準)이 위만의 난을 피해 금마지방에 마한을 세웠다는 설도 있다. 백제의 시조 온조(溫祚)가 마한을 병합하고 이 곳을 금마저(金馬渚)라 했으며, 무왕은 이 곳에 도성을 두어 사비성·웅진성과 함께 3경제(三京制)를 경영하였다. 무왕은 거대사찰인 미륵사·제석사(帝釋寺)를 창건했고, 왕궁평성(王宮坪城)을 쌓았다. 이때부터 금마지방은 백제의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지가 되었다. 백제시대에 웅포·함열 일대는 금마군(金馬郡)·감물아현(甘勿阿縣)·소력지현(所力只縣)·알야산현(閼也山縣) 등이 있었다고 하는데, 자세한 연혁은 문헌 자료가 미비해 잘 알 수 없다. 다행히 입점리에서 왕릉으로 추정되는 백제고분이 발굴 조사되었을 뿐만 아니라, 주변에 다수의 백제고분이 분포하고 있어 이 지역은 백제시대 상당히 유력한 정치 세력이 존재한 지역이었음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지리적으로 공주와 부여를 잇는 금강하구에 자리잡고 있어서 방어의 요충지로 전초기지의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삼국을 통일한 문무왕은 668년(문무왕 8) 금마에 보덕국(報德國)을 세우고 고구려의 유족인 안승(安勝)을 보덕국왕으로 임명했으나, 683년(신문왕 3) 보덕국을 폐하였다. 경덕왕 때 금마군(金馬郡)으로 개칭되어 옥야현을 영속시켰으며, 감물아현을 함열현으로 고쳐 임피군의 영현으로 삼았다. 또한 백제시대 알야산현을 야산(野山), 소력지현을 옥야현으로 고쳐 금마군의 영현으로 삼고, 지량초현(只良肖縣)을 여량현(礪良縣)으로 덕은군 영현을 삼았다. 그리하여 금마군은 옥야·야산·우주(紆洲) 등 3개 현을, 임피군은 함열·옥구·회미 등 3개 현을, 덕은군은 시진(市津)·여량·운제(雲梯) 등 3개 현을 각각 영현으로 거느렸다. 후삼국시대에 고려 태조는 후백제를 정벌하기 위해 연산(連山)을 거쳐 마성(馬城, 일명 미륵산성)에 진을 치고, 신검(神劍)형제를 공격해 탄현과 진터에서 승리를 거두고 후삼국을 통일하였다. 고려시대에는 금마군·여량현·낭산현·함열현·옥야현·도내산소(道乃山所) 등의 군현이 전주목(全州牧)의 관할하의 속군현으로 있었다. 1012년(현종 3) 거란의 침입으로 현종이 나주로 파천할 때 여량(礪良)을 거쳐 남행하였다. 금마군은 1344년(충혜왕 복위 5) 원나라 순제 황후 기씨(奇氏)의 외향이라 해 익주(益州)로 승격되었다. 고려시대 이 지방은 지방교통의 중심지로서 전공주도(全公州道)에 속한 많은 역참(驛站)이 산재해 있었다. 1390년(공민왕 2) 권근(權近)이 윤이(尹彛)·이초(李初)의 옥사에 연루되어 청주에 유배되었다가 이 곳으로 이배(移配)되었는데, 그 때 『입학도설(入學圖說)』을 지었다고 한다. 1413년(태종 13) 현재의 명칭인 익산군으로 개칭되었다. 임진왜란 때 이 곳 사람인 오응정(吳應鼎)·오욱(吳彧)·오동량(吳東亮) 부자는 남원성을 지키다가 전사했으며, 의병장 이보(李寶)는 진산전투(珍山戰鬪)에서 전사하였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조정에서는 이 곳 여산에 의병청(義兵廳)을 설치하고 정홍명(鄭弘溟)을 호소사(號召使)로 임명해, 많은 의병들을 모아 청주·과천 등지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다. 조선시대에는 조운(漕運)의 거점지로 중시되어 웅포에 덕성창(德成倉), 성당포에 성당창(聖堂倉)이 있었으며, 남해에서 서울로 연락되는 함열의 소방봉봉수대(所方峰烽燧臺)와 용안의 광두원봉수대(廣頭院烽燧臺)가 있어 군사상 중시되었다. 1895년 기존의 여산부(礪山府)가 여산군으로 개편됨으로써 여산부에 속해 있던 익산군이 전주부 익산군으로 개편되었고, 1896년 전라북도 익산군이 되었다. 1899년 옥야현이 전주부에서 분리되어 익산군에 편입되었다. 이리 지역은 원래 갈대가 무성한 습지였는데, 만경강유역의 황무지개척이 이루어지면서 양전으로 개간되어 농민들이 모여들었고, 군산이 개항된 뒤에는 전주와 군산의 중간지점으로 내왕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1912년부터 호남선이 구간별로 개통되었고, 이어서 이리∼군산간의 지선이 개통되었으며, 1914년이리∼전주간의 철도가 개통됨에 따라 이 지방은 교통의 중심지가 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익산군·여산군·함열군·용안군을 통합해 익산군으로 개편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3월 3일 익산지방에 독립선언서가 배포된 것을 시발로 많은 사람들이 만세운동에 가담하였다. 1931년 읍·면제의 실시에 따라 익산면이 익산읍으로 되었다가 곧 이리읍으로 개칭되었다. 1947년 4월 이리읍이 이리부로 승격됨에 따라 익산군에서 분리되었고, 1949년 8월 15일 이리시로 개칭되었다. 이후 이리시와 익산군은 별도의 행정구역으로서 존재하면서 수차의 행정구역의 개편조정이 있어 왔다. 5·16후 군사정부에 의해서 육군훈련소가 있던 익산군 황화면(지금의 충청남도 논산시 연무읍)이 충청남도로 이속되었다. 1977년 이리역 폭발사고로 많은 인명과 재산피해를 입기도 했으나, 시민들이 합심해 이를 극복하고 오늘날의 발전된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1979년 5월 1일 함열면이 읍으로 승격되었고, 그 해 군청사가 이리시에서 함열읍의 현 위치로 이전되었다. 1995년 5월 10일 도농통합에 따라 이리시와 익산군이 새로운 익산시가 되었다. 익산지역은 6·25전쟁 후 전후 복구사업과 함께 1970년대의 새마을운동으로 그 면모를 일신하였다. 그리고 영농의 기계화와 과학화를 추진해 호남지방의 미곡산지로서, 농산물 집산지로서 그 역할을 다하고 있다.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중리~싸리재~금만봉(분기점)~왕사봉~칠백이고지~677.2m~용계재-불명산-시루봉-장선리재
장선리재~능바위산~말골재~장재봉삼거리봉~수재~남당산~445.5봉~밤아니재~360봉-작봉산-까치봉-말목재-옥녀봉-범머리재-함박봉-함박재-소룡고개~고내곡재
고내곡재-365봉-누황재-천호산-갈매봉-문드러미재-쑥고개-172봉-용화산(남봉)-돌탑-다듬재-미륵산-우측능선-석불사거리
석불사거리~함라~봉화산(함라산 소방봉)~칠목재~180.4봉~철탑~수레재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피암목재를 지났건만 내처사가 어디에 있는 절인줄 알았습니다.^^ 진안터미널에서 처사마을로 가는 버스로 운장산아래 내처사가 종점인 버스를 탑니다. 내처사 가는 길에 내려선 중리로 들어가는 마을 입구입니다. 8시 출발했는데 48분 걸렸네요.
산이 높아 해가 뜨는둥마는둥 하다가 금방 기운다는 동네, 운일암반일암으로 유명한 진안군 주천면 대불리 그 안쪽 처사마을 가는 길에 개울가에 굴러온 바윗덩이가 장난 아니게 큽니다. 작은싸리재 오르는 장동마을 지나 중리마을이 있습니다.
큰싸리재와 작은싸리재 사이에 있는 봉우리라 싸리봉이라고 하는데, 신 산경표 금강정맥 이후 금강과 만경강의 수계를 가른다는 금만봉으로 불려집니다.
싸리재는 백제시대 진안고원에서 익산 왕궁을 걸쳐 수도 부여로 향하는 제1국도와 같았습니다.
♤ 금만봉(錦萬峰 755m)/ 싸리봉/ 삼면봉
금만봉은 전북 진안군 주천면과 완주군 동상면, 운주면의 경계에 있는 삼면봉이다. 정식 명칭은 아니고, 금강과 만경강을 가르는 산줄기의 분기봉이라 금만봉이라 부르는데 또 다른 이름으로 싸리봉이라고도 부른다. 이곳의 빗줄기가 우측으로 떨어지면 금강의 수계인 논산천으로 흘러들고 좌측으로 떨어지면 만경강으로 흘러든다고 한다. 분기점 봉우리에 금만봉이라는 푯말이 붙어 있으며, 잡목에 사방이 막혀있다.
702고지, 800고지, 600고지를 뛰다니던 빨치산들은 정맥의 흐름을 꿰차고 있었을까요? 아닙니다. 그들은 보급투쟁을 해야했기에 능선만을 고집하진 못하고 민가 인근에 비트를 마련하고 보급창고를 운영했을 가능성이 더 많습니다. 시간을 다투는 선요원이라면 어느 정도 능선의 흐름을 알 수 있었을까 그 마저도 정맥과는 연관짓지 못한 세대겠죠.
702고지를 향해 왕사봉으로 달려가며 뒤돌아보니 나만의 착시일까 성재봉(태평봉수대) 봉화가 타오르는 모습이 보입니다.^^
아! 피묵마을.... 고당리에서도 길게 늘어진 산길을 따라 싸리봉 아래로 깊숙히 숨어들었습니다.
보초바위, 망바위, 전망바위라 부름직한 그 곳에 서서.... 멀리 대둔산을 바라봅니다.
♤ 왕사봉(王師峰 718.3m)
왕사봉은 전라북도 완주군 운주면 고당리와 동상면 대아리에 걸쳐있는 봉우리다.
왕의 스승을 왕사(王師)라고 하는데 왕사봉이라 불리게 된 정확한 유래는 알 수 없다. 국사봉(國師峰)이란 이름은 전국에 많다. 반면 왕사봉이라 불리는 이름은 전라북도 완주 한 곳에만 있다.
아무런 표식도 없습니다만 갈림길이 갈라져 가는 능선이 흐름이 시작되는 곳입니다.
♤ 671m봉 (삼면봉)/ 운암산갈림길
전북 완주군 동상면, 운주면, 경천면의 경계를 이루는 삼면봉이다. 좌측은 운암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이고 정맥은 우틀한다. 10분 정도 진행하면 칠백이고지에 이른다.
702고지에 설치된 산불예방감시탑입니다. 저 카메라로 70년 전인 1950년을 볼 수 있다면...
더 이상 직진하면 안됩니다. 헬기장에서 벗어나지 말고 90도 우틀해야 합니다.
702고지 헬기장에서 바라보는 맨 뒤의 능선이 연석산에서 구봉산으로 흐르는 호남알프스입니다.
♤ 칠백이고지(700.8m)
칠백이고지는 그 고도가 701m이나, 702고지라 부르고 있다. 이곳 칠백이고지를 비롯 충남 금산군 남이면에 위치한 서암산西岩山과 육백고지는 한국전쟁 때 수많은 국군과 애국지사들이 산화한 피로 얼룩진 비극의 현장이다. 1950년 9월28일 수복과 아군의 진격에 북녁으로 쫓기던 괴뢰군 패잔병과 공산분자들이 이곳 칠백이고지와 동쪽으로 육백고지, 팔백고지, 느티골, 대활골, 피목리, 고당리, 싸리재, 왕사봉 등에 진을 치고 해방촌을 근거지로 삼아 불야성을 이루었다. 무기탄약까지 만들어 금산군 전 지역과 논산, 전북 완주군과 무주군 등의 지역까지 출몰하였다. 그리곤 양민대학살, 식량과 가축 약탈, 민가 방화, 경찰관저 습격등 천인공로 할 만행을 일삼았다. 이곳을 무대로 준동하던 공비들의 소위 남조선 빨치산 총사령관은 이현상이었다. 그 휘하의 45사단 총참모장 길병래 등 거물급이 통솔하는 지휘하던 백두산부대, 압록강부대, 청천강부대, 한듬산부대, 외팔이부대, 나팔부대, 호량병단인민학교, 인민병원, 남로당 완주. 금산. 논산군당 등 각부대 괴뢰군 대위 전광순외 거물급이 통솔하는 2만 명이 집결하였다. 그리고 인접 대둔산, 운장산지역과 멀리는 덕유, 지리산을 거점삼아 출몰하던 공비들까지 합동작전을 지휘하던 막강한 세력으로 국내 치안을 교란했다. 아군과 경찰, 향토청장년들이 혼연일체가 되어 9·28수복과 동시 약 5년 반 동안 공비 토벌작전을 감행 수백회의 치열한 공방전을 거듭하였다. 충남도과 전북경찰대 향토방위대 국군 8사단 화랑부대 김화산 부대 등이 합동작전을 전개하여 적사살 2,287명 생포 1,025명과 중화기 탄약등 다수의 전리품을 노획하는 전과를 올렸다. 싸리재 주변이 옛날에는 산적들의 소굴이었고 6.25전쟁 이후에는 공비소탕지역으로 싸리재 근처에 화전민이 거주하였으나, 전부 전소 또는 산개하였다 한다. 칠백이고지의 물줄기는 남쪽은 고산천을 통하여 만경강으로 흐르고, 북쪽은 장선천을 통하여 금강으로 흘러든다. 행정구역은 전북 완주군 고산면과 운주면의 경계에 위치하고 있다.
♤ 606m봉 (삼면봉)
칠백이고지에서 20분 진행하여 새부리바위를 지나 만나는 완주군 운주면, 고산면, 경천면의 경계를 이루는 삼면봉이다. 정맥은 여기에서 우틀해 운주면과 경천면의 경계를 따라 진행한다.
꿈엔들 잊힐리오~ 정중앙에 퐁라라의 고향 마을 경천저수지 물머리에 있는 고성산이 보입니다. 반대편 산줄기의 봉우리가 내일 아침에 도착하는 금강정맥 천호산 쪽이고요.
♤ 화산저수지(경천저수지)
일제시대인 1933년 6월 20일 시작하여 1937년 12월 20일 완공된 규모가 큰 저수지이다. 당시 공사비가 120만4천8백원이었다고 한다. 수몰된 지역은 운동상면 옥포, 운동마을, 운계, 거사리 등으로 고산 위에서 제일 너른 들판이었다. 수몰민은 익산군 황등과 팔봉면 일대로 옮겨가기를 권장하였으나 모두 간 것은 아니고 연고 따라 여러 곳으로 흩어졌다.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저수지는 현재 화산면에 있다. 저수지에 고이는 물 모두가 화산의 산천에서 흘러온 물이므로 화산저수지로 바꿔야 한다는 여론이다. 관리기관은 수리조합에서부터 여려가지 이름으로 불리더니 지금은 한국농어촌공사이다.
고성산 앞쪽 마을이 화산면 소재지입니다. 야간에 이동하는 말골재에서 말목재까지 저 고성산 뒤쪽 산에 파묻힌 골짜기의 마을(승치, 춘산, 운곡, 운산)을 감싸고 돌기에 야경이라곤 1도 없습니다.
♤ 고성산성(374m)
완주군 화산면 소재지의 뒷산에 있는 산성으로 북쪽 일부를 제외하고는 높고 험하여 오르기가 사납다. 꼭대기의 '고성산성'은 전주,완주지역 문화재 조사보고서(전북대 박물관 1979)에 "주위는 걸음으로 재어 300간(도지에는 546m)이고 동서의 직경 100m, 남북 직경 60m 삼각형의 성으로서 무너진 편이나 비교적 잘 보존된 상태"라 하였다." 산성에서 서쪽, 북쪽, 북동쪽, 동남쪽에 네 개의 성채(城砦)는 있으나 누각과 문은 남아 있지 않다. 서쪽 성채는 2중으로 남아 있으나 우물터는 없고 기왓장이 더러 있다. 지금 남아있는 성벽은 임진왜란 직후에 쌓여진 것으로 추측된다." 전라북도지 1권(1989년 발행)에는 고려 공민왕 때 쌓은 성이라 하였다. 그런데 삼국시대 축성으로 백제 동방성(은진)의 바깥 진지 구실을 한 성이란 학설도 있다. 화산 면소재지와 경천저수지를 바라보는 정상의 뷰가 좋다. 정상부분에 산불감시 안테나가 있어 완주군 북동부를 지켜보고 있다.
☞고성산: http://www.sjb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658549#
써래발의 모양이 나오는지요? 써래가 뭔지 모른다고요?
♤ 써래봉
모내기 직전 소에 매달아 물댄 논의 무른 흙덩이를 고르던 농기구인 써래를 닮은 모양의 봉우리로 내장산국립공원내 구 내장사인 백련암 뒤에 있는 써래봉이 대표적이다.
전기가 들어오기전 시골집에서 쓰던 호롱(등잔대)같이 보인다고도 하고, 견훤에 얽힌 천등산의 전설을 아시나요? 천등산 남쪽 끝자락 산성이름이 용계성(龍鷄城)입니다. 용계원 지명과도 관계있죠.
빨치산 출신 비전향장기수 고 송세영님의 전언입니다.
완주군 운주면 완창리에 갔다.
미군 연대기를 노획한 완창리 매복작전
“완창리는 전주에서 대전으로 가는 길에서 논산으로 갈라지는 삼거리입니다. 1950년 10월 2일이네요. 완창리를 통과하던 미군연대 지휘부를 우리 매복부대가 기습해서 연대기가 꽂혀 있던 지프차를 비롯하여 여러 대의 차량과 무기를 노획했고 연대기를 빼앗았다고 합니다. 어찌된 일인지 연대 병력과 지휘부가 별도로 이동했던 것 같습니다. 미군 병력은 없었고 지휘부만 녹아났답니다. 연대기가 낡아서 너덜너덜한 것으로 보아 아주 오래된 연대가 아닌가 싶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노획한 연대기를 충남에서 가지고 다녔는데 어떻게 했는지는 모릅니다.”
부대가 잠복했던 곳이 여긴가 저긴가 당시의 전투정황을 머릿속에 그려보며 역사적인 곳, 완창리를 떠났다. 운주면 용계원에서 차를 세웠다. 송세영 동지가 설명을 했다.
“이곳은 1950년 12월 10일경부터 1951년 1월 17일까지 충남도당 도사령부와 도 기관들이 거점으로 사용했던 부락입니다. 일제시대에 한지를 생산한 고장이었고 산간부락이면서도 부촌이었습니다. 1951년 1월 14일 인민군과 중국지원군의 서울 입성을 환영하는 대대적인 기념행사가 충남도당 주최 하에 개최되었어요. 그날 수많은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그런데 그날 밤 참모부 일꾼들의 경각성이 부족했던 모양입니다. 고지에 부대배치를 늦게 했어요. 그 짬에 경찰의 기습을 받았습니다. 용케도 신속하게 반격했기 때문에 피해가 없었습니다. 도당위원장 박우연 동지는 있지도 않은 여러 부대를 호칭하면서 동서로 포위, 공격하라고 명령하였습니다. 이에 겁먹은 경찰들이 퇴각함으로써 희생 없이 무사했지만 외곽방어선인 운주면 영평부락에 있던 압록강부대가 같은 시간에 기습을 받아 약간의 피해를 입고 철수했습니다.”
출처 : 통일뉴스(http://www.tongilnews.com)
도립공원인 대둔산이 천등산 뒤에 버티고 있네요. 천등산 아래로는 용계원이 있던 마을이 보입니다. 역원이 설치된 곳은 교통의 요지를 말함이지요. 그래서 천오백년전 신라군 또한 탄현과 이곳 천등산을 통해 황산벌로 향했으니깐요.
용계재는 규모로 보아 말골재보다는 늦게 개통된 고개인가 봅니다.
가천리쪽 가까운 마을에서 개를 놓아 기르는지 갑자기 길에 개가 나타나 깜짝 놀랐다는...
♤ 용계재(龍溪峙)
용계재는 전북 완주군 운주면 금당리(우측방향)와 경천면 가천리(좌측방향)를 이어주는 고개로 금강정맥 선녀봉(써래봉)과 불명산 사이의 고개이다. 조선조에 용계원이 있었다고 한다.
용계원에서 30분 올랐습니다. 그대로 정맥을 따르는 길과 화암사로 내려서는 길이 있습니다.
좌측으로 화암사 기와지붕이 보이는데 대체 내려서는 길은 어디야? 20분 진행해야 합니다.^^
♤ 불명산(佛明山/ 428m)
전북 완주군 경천면에 자리한 산으로 높이는 480m이다. 불명산은 남서쪽 산자락에 신라시대 고찰인 화암사(華巖寺)를 품고 있으며, 크게 세봉우리가 반달 모양으로 연봉을 이루며 서 있다. 전 구간이 촘촘하게 자란 활엽수들로 밀림을 이루고 있으며 북서쪽에는 해발 423m의 시루봉이 자리를 하고 있다. 불명산이라는 지명은 부처의 가르침을 밝혀주는 산이라는 뜻이다.
♤ 화암사
화암사, 내 사랑
- 안도현 -
인간세(人間世) 바깥에 있는 줄 알았습니다
처음에는 나를 미워하는지 턱 돌아앉아
곁눈질 한번 보내오지 않았습니다.
나는 그 화암사를 찾아가기로 하였습니다
세상한테 쫓기어 산속으로 도망가는 게 아니라
마음이 이끄는 길로 가고 싶었습니다
계곡이 나오면 외나무다리가 되고
벼랑이 막아서면 허리를 낮추었습니다.
마을의 흙먼지를 잊어먹을 때까지 걸으니까
산은 슬쩍, 풍경의 한 귀퉁이를 보여주었습니다
구름한테 들키지 않으려고 구름 속에 주춧돌을 놓은
잘 늙은 절 한 채
그 절집 안으로 발을 들여 놓는 순간
그 절집 형체도 이름도 없어지고,
구름의 어깨를 치고가는 불명산 능선 한 자락 같은 참회가
가슴을 때리는 것이었습니다
인간의 마을에서 온 햇볕이
화암사 안마당에 먼저 와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세상의 뒤를 그저 쫓아다니기만 하였습니다.
화암사, 내 사랑
찾아가는 길을 굳이 알려주지는 않으렵니다.
화암사는 안도현의 시로 소개를 마감할까 합니다.^^
화암사를 내려가 한바퀴 둘러보고, 물도 보충하고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는데 30분 걸렸습니다.
여름에 천렵하기 좋은 천등산 아래 개천따라 마을이 내려다보입니다. 시루봉에 떡은 없습니다.^^
♤ 시루봉(427.6m)
봉우리 모양이 떡시루를 뒤집어 놓은 모양으로 둥구스름하게 생긴 데서 부르는 이름이다.
중앙 젤 멀리 계룡산 보이세요. 월성봉에서 바랑산 곰치로 향하는 금북기맥의 능선은...
그 아래 뜨거운 여름볕에 웅치산성과 산직리산성을 항해 한삼천리로 넘어가는 저 양촌면의 마을을 걷는 행군에 지친 신라군들의 모습이 보이시나요.
♤ 장선리재
완주군 운주면 장선리와 경천면 가천리를 연결하는 고개이다.
여러사람의 후기를 보며, 산불감시탑 울타리를 만나면 알바라는 사실을 알고 뒤돌아 서라는 그곳...
아무 것도 없는 정상석에서 우틀해서 내려서야 합니다. 저도 직진해설랑은,, 아차차 여기가 거기로구나 했다는...
♤ 능바위산(476.4m)/ 미륵봉
완주군 경천면 가천리에 있는 능바위산은 전주에서 대둔산을 가다보면 석장마을 뒤로 커다란 암봉이 눈에 띈다. 능바위산의 두 개의 암봉으로 이루어져 있고 우뚝 솟은 바위들은 옛날 농의 채처럼 켜켜이 포개져 절벽의 층을 이루고 있다. 때문에 '농처럼 생긴 바위'라는 뜻에서 '농바위'라 불렀으며 이것이 '능바위'로 바뀐듯 하다. 능바위산, 능암산, 미륵산, 와룡산이라고도 불린다. 정상 직전에 산불무인감시 시설이 있으며 정상에서 바라보는 석장마을 뒤쪽으로 경천저수지가 보인다.
트럭이 넘다가 잠시 그쳐 소변을 보고가는 말골재...
암벽하는 분들에게는 대둔산이나 천등산에서 전주로 나가며 넘어서는 고개이기도 합니다.
능바위산/ 미륵봉에서 온전하게 운주면으로 들어서서 가파르게 20분 정도 내려서니 말골재입니다.
♤ 말골재(馬骨峙)
전주에서 대둔산으로 향하는 17번 국도상의 완주군 경천면과 운주면 말골마을을 잇는 고개로 옛날 천등산 부근에서 애기장수가 탄생을 하였는데, 장차 집안에 액운을 갖다주는 애기라 하여 그 부모가 돌로 눌러 죽였다 하며, 3일 뒤에 용마(龍馬) 한 필이 나타나, 울부짖으며 애기장수를 사방으로 찾아다니다 결국은 이 고개에서 죽으니 사람들이 마골치(馬骨峙)라 부르게 되었다 전한다.
♤ 고산 성당 수청리 공소
말골재 아래 구제리에 1888년 설립된 고산 성당 수청리공소가 있다. 고산에 신앙공동체가 형성된 시기는 1791년 이후부터이다. 타 지역에서 이주하는 관문 구실을 한 고산은 진산(당시 전라도)과 충청도 신자들이 목숨을 보존하고 신앙생활을 계속하기 위해 숨어들어 왔다. 그러다가 1801년 신유박해 후부터는 전국에서 모여들기 시작하더니, 1866년 병인박해 이후로는 전국에서 이주해 온 교우들로 절정을 이루었다. 그래서 이곳은 박해를 경험한 교우들과 순교자들의 가족과 친인척들이 많이 살았다.
전라북도와 충청남도 도계에 닿았습니다. 장재봉은 바쁜것도 있지만 말골재에서 너무 힘들게 올라 진이 빠져서 못 가겠더라고요. ㅠㅠ
♤ 장재봉(487m)갈림길
말골재에서 40분 가파르게 치고 오르면 충남과 전북의 경계인 장재봉갈림길에 닿는다. 장재봉 삼거리에서 북쪽으로 10분쯤 오르면 삼각점과 표지판이 있는 장재봉에 닿는다.
수재에서 물이 떨어졌다고요. 수고스럽겠지만 저 아래 보이는 임화저수지 마을까지 다녀와야 ...
♤ 수재(秀峙)
전북 완주군 운주면 수청리와 충남 논산시 양촌면 임화리로 넘어다니는 좁은 고개이다. 수치(水峙)라 부르기도 한다. 옛날에 이곳이 소나무가 빽빽하게 많았고 골짜기의 깊이가 8km나 되어 재를 빠져나가기가 힘이 들어 빼재라고 불렀다는 기록도 있다고 한다. 수재(빼재)는 장재봉 서쪽에 있는 큰 고개였다. 수재에 이정표(장재봉1km, 남당산 2.9km, 수곡사 0.5km)가 마중 나온다. 서쪽(직진)은 남당산, 북쪽(우측)은 논산시 양촌면 수곡사, 남쪽(좌측)은 완주군 운주면이 장재봉으로 가는 길이다. 남당산(2.9km) 방향으로 직진한다. 이정표를 충남 논산시에서 세우면서 금강정맥의 중요성을 전혀 고려치 않았기 때문에 정맥종주꾼들에게는 매우 불편하다.
♤ 백석공소
억지로 억지로 떨어지는 해를 부여잡고자 고도를 높여 올라보니 백석리공소가 있던 백석마을이 내려다 보입니다. 고산공소, 수청리공소, 백석리공소, 되재공소에서 얻을 수 있는 공통점은 박해를 피해 산속으로 숨어든 깊은 골짜기였다는 사실입니다. 그게 금강정맥의 품이라는걸 알았을까요?
산우님들은 방금 완주군 경천면에서 퐁라라의 고향 완주군 화산면으로 진입하셨습니다.^^
♤ 남당산(南堂山/ 376m)
전북 완주군 화산면과 충남 논산시 양촌면 경계 능선에 있는 산으로 양촌면 고산리 상고마을의 남쪽에 있는 산이라하여 남당산이라 부른다고 한다. 남당산은 한국전쟁 때 빨치산과 국군의 주요 격전지였다. 지금도 남당산에서 까치봉으로 이어지는 금강정맥 산등성이 곳곳에 반공호 흔적인 석축이 남아있다. 전북 완주군 경천면 가천리 출신 유격대장 황월주는 한국전쟁 때 북한 괴뢰군이 운주면을 점령하자 자위대장에 임명되었다. 하지만 국군이 운주면을 점령하자 자수한 뒤 경찰유격대에 입대를 결심했다. 그리고 경천지역 소대장을 맡아 세 차례에 걸쳐 10여명의 빨치산을 수색하여 사살하는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 금강정맥이 북쪽으로 운주면계를 따르다가 능바위산에서 운주면 구제리와 같이 하고, 장재봉갈림길과 수재를 지나 이곳 남당산에 이른다. 남당산은 금강과 만경강의 분수령으로 금강정맥의 장재봉 서쪽의 수재(빼재)와 밤아니재 동쪽에 솟아있다. 지형도의 도엽명(5만분의 1)은 논산이며, 행정구역은 충남 논산시 양촌면과 전북 완주군 화산면에 경계해 있는 산으로 남쪽으로 경천저수지가 시원스럽게 보인다. 동쪽은 대둔산과 천등산이 우뚝하게 솟아있고, 북쪽은 호남고속도로와 탑정저수지가 보인다. 서쪽은 작봉산과 까치봉이 다가온다. 남당산의 물줄기는 북쪽은 논산천을 통하여 금강에 합수되고, 남쪽은 승치천과 경천저수지에서 화평천이 합쳐져 고산천을 이루어 만경강 합수되어 모두 서해로 흘러든다.
♤ 전북 완주군 화산면(華山面)
화산면은 전북 완주군의 북부에 있는 면이다. 금호남정맥의 서사면에 위치하여 충남과 도계(道界)를 이루는 산간지대의 면이다. 동쪽으로 운주면(雲洲面), 서쪽으로 비봉면(飛鳳面), 남쪽으로 만경강 상류의 지류인 고산천(高山川)을 경계로 고산면(高山面), 북쪽으로 까치봉(456m) 등을 경계로 충남 논산시 가야곡면(可也谷面)·연무읍과 접한다. 남부의 고산천 주변에 충적평야가 있고 해발고도 200∼400m의 산지여서 경지율은 낮다. 주곡농업 외에 잎담배가 재배되며, 감·곶감·밤·대추 등의 특산물이 산출된다. 전주∼대전 사이의 국도가 통과하며, 고산천 상류에 경천저수지(庚川貯水池)가 있어 관광지를 이룬다. 문화재로는 고성산성(高城山城), 천곡단(泉谷壇), 길마재산성, 만수성지(城址) 등이 있다.
저 참호가 보이시지요. 봉화대의 돌들을 주워모아 반공호를 쌓고 빨치산과 대치한 흔적입니다.
♤ 445.5봉 (삼면봉)
남당산에서 서쪽으로 10분쯤 운행하면 446m봉의 성터 흔적, 또는 성황당 흔적이 묻어난다. 완주군 화산면, 경천면과 충남 양촌면의 삼면봉이다.
한낮인데도 얼마나 어두웠으면,, 지금 밤 아니제??? 하며 물었을까...
♤ 밤아니재
전북 완주군 화산면 승치리와 충남 논산시 양촌면 중산리, 임화리 상고마을 경계에 있는 고개다. 옛적에 그 고개를 넘어 다니는 산길이 너무 좁고 험해서 대낮에도 밤같이 어두침침했다고 하여 지명이 유래되었다. 고개의 동쪽 능선은 남당산에 이어지며, 서쪽은 작봉산과 까치울재에 이어진다. 북쪽은 충남 양촌으로 빠지는 길이 있으나, 남쪽의 운주면과 화산면으로 빠지는 길은 잡목이 우거져 찾기가 힘들다. 이곳에는 이정표를 잘 보고 독도에 유의해서 가야곡 방면으로 가야한다. 자칫 잘못하면 희미한 금만정맥 길을 놓치고 길이 좋은 북쪽방향의 쌍계사(2.7km)로 빠지기 십상이다. 전북 완주군, 충남 논산시의 행정 경계로 이용되고 있다. 산지로 둘러싸여 있어 평야의 발달은 미미하며, 남쪽과 북쪽에 작은 지류의 하천들에 의한 소규모 곡저충적지만이 있을 뿐이다. 고개의 북서쪽으로 양촌면 중산리 마을과 쌍계사가 있고, 동쪽에는 임화리가 있다.
곳곳에 설치된 이정표에 쌍계사가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가야곡방면으로 진행해야 하건만.... 쌍계사 주차장이 가깝다며 탈출을 유도하는군요.^^
역시나 이곳도 교통호, 참호, 반공호의 흔적이 나타나 보입니다.
경찰공비토벌대로 이곳에 올라와 진을 쳤던 국군과 의용군들... 직접적 교전은 없었더라도 야간에 산줄기를 타고 이동하는 빨치산을 차단하기 위한 차단 진지로 활용된 장소입니다. 선친 또한 6.25참전용사이신데 지리산으로 가셨더라는....
승치리에서 십리 올라오는 360m봉... 승치(升峙)는 고개가 매우 높은 되재를 한자어로 승치(升峙)라고 썼습니다.
불에 탄 쌍계사의 재목을 지고 고개를 넘어 되재공소를 지었다는 어른들 이야기에 등장하는 그 고개입니다.
♤ 되재공소
원승치에 한강 이남의 첫 성당인 되재성당이 1894~1895년에 건축되었으며 블란서 신부님들이 오셔서 선교활동을 한 곳으로 전국에 유명한 마을이다. 1894년 1월 '비에모'신부는 본당을 "되재"로 옮기고, 즉시 성당 신축공사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동학농민전쟁(당시 동학란)으로 공사는 중단되었고, 신부는 피신하게 되었다. 이듬해인 1895년 본당으로 돌아온 '비에모'신부는 나머지 공사를 마치고 성신강림 축일에 첫 미사를 봉헌하였다. 주보는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였다. 이때 완성된 '되재 성당'은 전통 한옥 형태로 자재는 운주면에 있는 '화암사'와 충남의 은진에 있는 '쌍계사'에서 나온 목재를 사용하였다. 되재 성당은 우리나라에서는 서울 약현 성당(현 명동성당)에 이어 두번째, 전라도에서는 최초의 성당으로 완공되어 한국 천주교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1896년 11월 1일, 전라도 지역 사목방문에 나선 '뮈텔'주교는 '되재'를 방문하여 성당 축성식과 종헌종식, 그리고 십자처 설치 예절과 견진성사를 집전했는데, 주교의 일기에는 수용인원이 500~600명 정도가 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한국전쟁 때 불타 흔적조차 볼 수 없게 되었다. 1954년 3월 옛 성당 자리에 목조 건물로 '공소' 강당을 건축하였고, 1958년 4월에 고산 본당이 설립되면서 '되재 공소'는 고산 본당 소속 '공소'가 되었다.
여전히 쌍계사가 하산을 유혹합니다.
반대편 승치로 내려선다면 '되재공소'도 둘러보고 뒤풀이로 고향의 명물 화산붕어찜과 한우고기를 드시고 말목재를 넘어 논산IC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화산붕어찜은 시래기에 된장을 넣고 자박자박 지지는 맛이 별미인데 붕어고기가 뼈를 발라내며 먹어야 해서 번거롭죠.
작봉산에서 낮에 같으면 양촌면 중산리 쇠목마을이 내려다 보였을 것입니다.
트럭 두대가 비켜갈 정도로 큰 산판도로입니다. 저는 화산 면소재지 살아서 승치같은 촌에서 이곳으로 올라오는 들머리는 알지를 못합니다. ㅋㅋ~
뭐라고 쓰여 있어요. 글씨가 작아서 잘 안보여요...
♤ 작봉산(鵲峰山, 419.6m)
작봉산은 충남 논산시 양촌면 중산리와 전북 완주군 화산면 승치리에 걸쳐있는 산이다. 작봉산에는 넓은 공터와 삼각점이 있다. 장성천과 승치곡천 발원지가 되며 동쪽 능선은 남당산에, 서쪽 능선은 까치봉에 연결된다. 조선문헌에 "쌍계사가 불명산에 있다(雙溪寺在佛明山)'고 기록되어 있어 작봉산의 옛지명이 불명산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보물 2점이 있는 쌍계사의 주산이 작봉산이다.
고향마을 뒤 금강정맥길의 특징은 북쪽으로 충청남도 양촌면은 넓은 들판이 형성되어 야경이 화려하게 밝다는 것입니다. 반면, 남쪽으로 저희 동네는 산이 첩첩 쌓여 있는 곳이라서 도무지 불빛 하나 없이 깜깜하다는.... 죄송합니다.
♤ 쇠목재(피재)
작봉산에서 금강정맥은 서쪽으로 급하게 쏟아지듯이 내려간다. 고도가 뚝 떨어지며 인적이 드문 쇠목재(피재)로 내려선다. 북쪽 양촌면 중산리 쇠목마을까지 도로가 개설되었으나, 남쪽의 화산면 춘산리 방향은 도로가 없다. 작봉산에서 까치봉은 U자형으로 돌아가며 작봉산이 뚜렷하고 작봉산과 까치봉 사이로 쇠목마을이 손짓한다. 피재에서 올라선 380m봉에서 경천저수지위 예봉산으로 산줄기가 분기한다.
♤ 완주군 화산면 춘산리
춘산리의 행정리로는 예곡과 덕동이 있다. 예곡(禮谷) 마을은 춘산리 가장 남쪽에 있는 마을로, 달리 여수개라고도 불린다. 이것은 예곡에서 승치리 미남리로 넘어가는 고개인 여우고개와 관련해서 마을 이름이 생성된 것과 관련이 있다.『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에는 운서상면 예곡(禮谷), 『전주군면계변경예정도』에도 ‘예곡(禮谷)’이란 지명으로 나오지만 『호구총수』에는 운서면에 호치리(狐峙里)로 나오는 것으로 보아 여우고개와 연관된 지명임을 알 수 있다. 다만 호치리와 예곡을 동일한 것으로 볼 것인가는 여전히 의문이지만 예곡을 달리 여수개로 칭했다는 점은 둘 사이의 연관성을 가늠케 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보면 예곡마을이 춘산리에서는 가장 유서가 깊은 마을로 볼 수 있다. 덕동(德洞) 마을은 여수개마을 북쪽에 있는 마을로 ‘덕골’ 또는 ‘떡골’이라고도 불리는데, 동쪽에는 대덕산, 서북쪽에는 까치봉(鵲峰, 456m)이 있고 면내에서 세 번째 큰 마을로 전답이 풍부하다. 하천이 까치봉을 분수령으로 서북쪽에서 발원해 동남쪽으로 흘러 마을 앞을 지나간다.
까치울재에 산적이 많았다는 후기도 보이던데... 그걸 어떻게 아셨는지 저도 궁금했습니다.^^
♤ 까치울재
사람의 흔적이 많은 고개로 남쪽 전북 완주군 화산면 춘산리에서 북쪽 충남 논산시 양촌면으로 넘나들던 옛 고개이다. 피재에서 395m봉을 넘어서서 완만한 내림 길을 가면 전방에 까치봉이 얼굴을 내밀고 남쪽엔 연무읍 중산리 쇠목마을이, 북쪽엔 논산시의 우황저수지가 내려다보인다. 능선에서 커다란 차돌바위를 만나고 시그널이 휘날리는 산등성이에서 서쪽으로 방향이 꺾여 내리면 까치울재다.
♤ 까치울/ 작동(鵲洞)
『호구총수』에는 보이지 않지만 『고산현지도』에는 운서하면 덕동(德洞),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에도 운서하면 덕동, 『전주군면계변경예정도』에는 덕곡(德谷)으로 나오는 등 마을의 연원이 유구함을 알 수 있다. 덕동 북쪽에는 작동이란 마을도 있었다. 달리 까치울이라 불리는 곳으로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에 운서하면 작동(鵲洞)으로 나온다. 덕동에서 2㎞ 이상 떨어진 깊은 골짜기로, 까치울재를 넘으면 충남 논산시 가야곡면으로 갈 수 있는 곳이다. 교통이 불편해서 덕동으로 내려와 살면서 지금은 빈터가 되었다.
낮에 까치봉에 서면 계룡산이 바라다 보입니다. 하긴 선녀봉헬기장에서 용계재로 내려서면서 시야에 계룡산이 잡히기 시작했어요. 비온 다음날이라 시계가 멀리 나가는 행운도 있었지요.
까치는 영리한 새인지라 동구밖에 낯선 얼굴이 나타나면 소리를 낸다고 하니 귀한 손님이 온다는 사실은 어느 정도 과학적 근거에 바탕한답니다. 까치봉에서 조금 내려서면 화산면, 양촌면, 가야곡면의 삼면봉(400m), 여기서 우리 동네 고성산으로 산줄기가 분기가 되는군요.
♤ 까치봉(456m)
전북 완주군 화산면 춘산리와 충남 논산시 가야곡면 삼전리에 경계에 있다. 정상에 반공호가 구축되어 있고 표지판이 걸려있다. 금만정맥 구간은 고도가 400m에 불과하지만, 전북과 충남의 마을을 잇는 고개가 많고, 고도의 차이가 심하여 산멀미를 느끼게 한다. 전북 쪽은 산간지대인 반면, 충남방향은 평야지대여서 대조적이다. 춘산리 덕골 작동마을과 까치울마을의 뒷산이다. 작봉 아래 덕동소류지 덕동제가 있다. 까치울마을은 교통이 불편하여 큰 마을에 내려와 살고 있으며 지금은 빈터 뿐이다. 본래 고산군 운서하면이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개편에 따라 운서상면과 병합하여 화산면이라 하였다. 작봉산과 까치봉 사이에서 남쪽으로 나뉜 비봉지맥은 예봉산, 성치산(질마봉), 운제산을 솟구친다. 까치봉에서 북쪽 논산방향으로는 통박산 줄기를 나뉜다. 까치봉의 물줄기는 북쪽은 논산천을 통해 금강, 남쪽은 수락천에서 흘러내린 물이 춘산제와 경천제에 모아져서 화평천을 통하여 만경강 상류인 고산천을 이루다가 서해로 흘러든다.
♤ 고성산성(古城山城)
고성산성은 전북 완주군 화산면 화평리 북쪽 산봉우리 정상부에 있는 삼국시대 석성이다. 고성산성은 아직 한 차례의 발굴조사도 이루어지지 않아 산성의 축성 시기를 단정할 수 없지만, 축성 주체와 관련해서는 백제로 학계에 보고되었다. 모두 두 차례의 현지 조사를 통해 판석형 할석[깬 돌]을 수직으로 쌓은 성벽의 축조기법이 고성산성 동쪽 각시봉 봉수와 거의 흡사해 전북 동부지역 가야세력과의 관련성도 배제할 수 없다. 완주군 화산면 소재지 북쪽에 동서로 긴 고성산[373m]이 병풍처럼 소재지를 감싸고 있는데, 이 산봉우리의 동쪽에 고성산성이 있다. 고성산성은 고성산 동쪽 산봉우리 정상부를 한 바퀴 휘감은 테뫼식으로 동서 길이 140m, 남북 폭 65m 내외이다. 고성산 동쪽 산봉우리를 휘감은 고성산성은 그 평면 형태가 동서로 긴 장타원형이다. 대부분 판석형 할석을 수직으로 쌓은 성벽으로 일부 구간을 제외하면 상당 부분 붕괴되었다. 고성산성의 동쪽과 서쪽에 방형 혹은 장방형의 석축시설이 확인되었는데, 그 성격은 각시봉 봉수의 연대와 흡사해 봉수 시설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짐작된다. 고성산성은 현지 조사 때 유물이 전혀 수습되지 않아 산성의 축성 시기를 단언할 수 없지만, 구전으로 미완성의 성 이야기가 전해져 전북 동부 지역 가야세력의 일시적인 진출과 관련된다면 축성을 연구하는 데 큰 의미를 부여할 것으로 기대된다. 웅진천도 이후 백제가 정치적인 불안에 빠지자 이를 틈 타 대규모 철 산지인 완주군 동북부로 진출한 전북 동부 지역 가야세력에 의해 고성산성이 초축(初築)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전북 완주군 화산면 화월리에서 고성산성을 쌓은 오누이에 관해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가있다.한 어머니가 오누이를 데리고 살고 있었다. 어머니는 아들에게는 서울에 갔다 오고, 딸에게는 아들이 돌아오는 동안 고성산에 성을 쌓는 내기를 하게 하면서 지는 사람이 목숨을 내놓도록 했다. 딸이 먼저 성 쌓기를 마칠 상황이 되자 어머니는 딸을 계곡으로 오게 해 잠깐 쉬게 했다. 그 사이 아들이 서울에 갔다가 도착했고 어머니는 성 한쪽을 쌓지 못한 딸을 죽였다. 「오뉘가 쌓은 고성산성」의 주요 모티브는 오누이 힘겨루기, 성 쌓기 내기이다. 오누이 성 쌓기 설화에서는 보통 목숨을 걸고 내기를 하고 진 사람이 죽게 된다. 오누이 힘내기 설화는 전국적으로 분포되어 있는데 내기에서 더 월등한 능력을 갖춘 누이[여성] 쪽이 죽음을 맞이하는 경우가 많다. 「오뉘가 쌓은 고성산성」 속 누이도 남동생이 도착하기 전에 성을 다 쌓을 수 있었는데 어머니가 방해해 내기에서 지게 되고 목숨을 잃는다. 이런 결말에는 전통적인 남아 선호사상이 반영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논산을 통해 고향을 찾아 많이 지나다니던 길입니다만 대형 축사가 새롭네요. 만경강의 최상류라 마냥 반갑지만은 않은 일입니다만 깡촌이 붕어찜과 한우축산단지로 부촌을 이루었으니... 자정이 가까운 시각, 공비같은 산꾼이 나타나 석천교회 들머리를 찾아 헤매니 소가 개처럼 울부짖어 주인아저씨 대체 무슨 일인지 바지춤을 수습하고 나오는 난리를 피웠다는거 아닙니까, 다행인 것은 물보충이 요긴한 지점인데 석천교회에 수도가 있다는 사실, 여기서 2,000cc를 보충해 석불사거리까지 25km를 갈 수 있었답니다.
♤ 말목재
만경강과 금강의 분수령이다. 석천은 지방도 643호의 도로변에 위치한 마을로 골짜기에 있는 학정(전진바우), 산대울, 이방골, 말목재를 통합하여 석천이라 부르고 전북 완주군 화산면 운곡리에서 말목재를 넘으면 논산시 가야곡면 삼전리와 경계를 이룬다. 산이 말목처럼 생겨서 말목재라 부르고 있으나 삼전리 쪽으로 고개 아래 마을 이름이 만목리 또는 말목이다. 전라북도를 향하는 끝길의 막다른 골목이라하여 말목재라고 불렀다는 설도 있다. 도계지역으로 오가는 사람이 많아 옛날부터 주막이 있었으나 지금은 없고 석천교회가 있다.
옥녀봉을 오르며... 저 야경의 배경은 가야곡 정도가 아닐까...
♤ 가야곡면
논산시 가야곡면은 그 이전 시대엔 덕은군, 조선조 가야실이라는 말에서 가야곡이라 불렀는데 논산평야지대라 쌀이 많이 나고 까치봉과 옥녀봉 등 산지에서 약초를 구할 수 있어 맛있는 막걸리를 담글 수 있었답니다. 왕에게 진상을 해서 어주라 했는데 왕주로 불리는군요. 그런데 사육신 매죽헌 성삼문과도 관련있어요, 왜그런가 했더니 성삼문은 홍주 사람입니다만 단종복위에 연관되어 노량진 아니 군기감 앞, 한강 절두산 아래 모래백사장에서 사지를 다른 수레에 묶고 잡아 당겨 찢어죽이는 형인 차열형(거열형)을 당합니다. 이후 삼족을 멸해 대가 끊어지고 처자식은 공신들 노비로 보내졌지요. 그 시신 일부는 노량진 사육신묘에 묻히고, 일부는 전국을 돌며 구경을 시켰답니다. 성삼문 시신의 일부를 지고 가야곡을 지나던 인부가 날은 덥고, 시체 썩는 냄새는 역겹고, 무겁다고 투덜거리자 지게에서 "아무 데나 묻어라" 하는 말이 들렸다네요. 그래서 성삼문 묘가 가야곡면에 있답니다. 그 외 유명한 곳은 가까운 곳에 은진미륵과 쌍계사도 있고요.
초승달이라 달은 금방 기울고, 잠은 왜캐 쏟아지는지,,, 바람을 피할 수 있는 허름한 산불감시초소라도 있었더라면... 운산초교(지금은 세인고등학교) 정문에서 가게를 했던 퐁라라 절친이 선친께 전해들은 말로 옥녀봉 능선이 빨치산의 이동로였으며, 옥녀봉에서 운산으로 내리는 능선에 안검단이란 마을 맞은편으로 천녀골이 있는데 당시 수백 명의 공비를 사살한 장소였다는 것입니다.
♤ 옥녀봉(玉女峰:411.7m)
논산시 가야곡면과 완주군 화산면의 경계 능선에 있는 봉우리로 봉우리가 예쁜 여자처럼 생겼다고 해서 옥녀봉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완주군 화산면 운산리 밀파(密坡, 안금단) 뒷골짜기에 있으며 옥녀봉 아래 옥련암이 있고 지형이 범의 형국이라 하여 범에 대한 지명이 많이 붙었다. 옥녀봉에는 옥녀직금혈 또는 옥녀탄금혈이라는 명당이 있다고 전한다. 전북 완주군 화산면 운산리는 충남 논산시 연무읍과 도계를, 익산시 여산면과는 군계를 접하고 있다. 지대가 높아 구름이 산에 닿을 듯 하다 하여 운산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누하삼거리에서 좌측은 여산으로 통하며, 우측은 소룡재를 넘어 연무읍에 이르고 중앙은 고내곡재를 통과하여 황화에 이른다.
전북 완주군 화산면 운산리 상호마을의 범허리재 입니다. 근동에서는 무슨 뜻인지 모르고 "버머리재"로 불러요. 호랑이가 많았으니 호환도 많았을터 이 또한 금강정맥의 영향입니다. 범머리재에서 5분여 올라서면 삼면봉(완주군 화산면, 논산 가야곡면, 연무읍)을 지나갑니다.
♤ 범허리재
화산면의 최북단 상호마을이 있는 곳으로 충남 논산 연무읍과 도계를 접하고 있다. 동쪽에는 함박봉, 동남간에는 옥녀봉과 서북쪽은 성태봉이 있고 앞산이 범머리형(虎頭)이라 하여 범머리로 부르며 상호(上虎)는 한자어 표기이다. 그 호랑이 지형의 허리 부분을 넘나드는 고개라 범허리재이다. 마을입구에는 400년 이상 된 정자나무가 당산목으로 마을을 지켜주고 있으며, 매년 정월대보름날 당산목과 호신(虎神)에게 마을의 무사안녕을 기원하는 산제를 모신다.
빨치산 출신 비전향장기수 손경수님의 전언입니다.
전북 완주군 화산면 범어리에 잠깐 들렀다.
“이곳은 충남 남부블록과 논산군당과 산하기관과 호남부대가 있었고 전북 익산군당과 익산유격대, 익산시당, 옥구군당이 1950년 후퇴 후부터 1951년 1월까지 있었던 곳입니다. 전북 572부대도 잠깐 와 있었구요.”
송세영 동지의 설명이었다. 장윤규 동지가 입을 열었다.
“남진하던 인민군대와 중국 지원군을 마중하기 위해서 저 앞산에 우리가 한동안 와있었습니다. 산상에서 보면 강경평야가 한눈에 보입니다. 수많은 군중들이 남으로 내려가는데 끝이 없었어요. 그때 참 기쁨에 차 있었습니다.”
출처 : 통일뉴스(http://www.tongilnews.com)
빨치산 출신 비전향장기수 임방규(86) 선생의 ‘빨치산 격전지 답사기에 화산면은 여기 상호부락을 해방구로 표현했다. 그만큼 외지에서 접근하기 힘든 산간벽지에 해당했다.
"완주군 화산면에는 초기에 논산군당과 각 면기관이 있었고, 익산군당과 이리시당, 옥구군당이 있었습니다. 무력은 논산군 유격대인 호남부대와 익산군 유격대가 있었고 전북의 572연대도 잠깐 와 있었습니다. 전주 논산 대전 간 도로 주변에 수시로 매복하여 저들에게 타격을 주었으며 익산군 유대가 고산 근방까지 나가서 쌀을 가득 실은 트럭을 노획하여 화산면까지 끌고 온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1951년 1월 하순경에 국방군 11사단, 이른바 화랑부대의 공격을 받고 동지들 여러 명이 전사했으며 화산면에서 철수했습니다. 1951년 음력 추석 경 우리 부대는 화산면에 진출하여 제2훈련소 건설장을 습격했고, 전북 익산군 금마면까지 진출하여 미적산에 거점을 두고 매복작전 기습전으로 군용차량을 파괴했습니다. 금산과 진산에 진출하여 교란작전을 수행했구요, 6지대 68사단 45사단의 연합무력은 1951년 10월 중순경부터 화산면 지서 운주면 지서를 치고 도로를 마비시켰습니다."
출처 : 통일뉴스(http://www.tongilnews.com)
논산훈련소가 가까워서 그런재 박격포 피탄지란 푯말이 자주 등장합니다.
♤ 함박봉(403.1m)
충남 논산시 연무읍 소룡리와 전북 완주군 화산면 운산리 경계에 있다. 조선시대 함박현 마을의 가장 높은 산으로서 함박봉(산)으로 일컬어졌으며 동남쪽 10km지점에 옥녀봉(410고지)이 있다. 남쪽은 전북 완주군이고 북쪽은 충남 연무읍 소재로 경계를 이룬다.
논산훈련소 5주간 신병훈련 중 마지막 4주째 40km 야간행군을 하면서 바로 이곳 소룡고개를 넘어 운산을 통해 전라북도 완주군 화산면 저희 동네 다리에서 U턴하여 복귀한답니다.
♤ 소룡고개(巢龍峙, 300m)
절개지 양쪽으로 보호 철책이 쳐있고 충남 연무대와 전북 완주군 화산면을 잇는 15번 군도 2차선 포장도로로 신도로명은 화산로이다. 소룡고개는 고개 아래 연무읍 소룡리라는 마을에서 유래한 고개 이름으로 마을에 이무기가 집을 짓고 반용이 되어서 천운을 기다렸다가 승천하는 용굴이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빨치산 출신 비전향장기수 손경수님의 전언입니다. 구자곡면은 논산시 논산훈련소가 들어선 곳의 옛 지명입니다.
구자곡면 해방작전
“1950년 11월 7일이 소련혁명 기념일입니다. 백두산부대와 논산군 유격대와 호남부대가 합동으로 급습해서, 보루대와 지서를 단숨에 점령했습니다. 우리 희생은 없었답니다. 경찰 수십 명을 생포하고 유치장에 갇혀있던 동지들 10여 명을 구출하고는, 지서를 소각했습니다.”
지서가 있던 옛터에 콩이 무성할 뿐 집은 없고 작은 부락으로 줄어들었단다. 송 동지는 고향마을, 어려서 다녔던 소학교를 손으로 가리키며 설명을 했다. 김영진은 한마디라도 놓칠세라 카메라를 조준했고 또 주위를 카메라에 담았다. 차가 출발했다. 구자곡면 소룡리 앞에 멈췄다.
민주부락 소룡리 인민들
“이 마을은 동지들의 칭찬이 자자했던 민주부락이었습니다. 구자곡면 지서를 해방시킨 부대가 소룡리에 집결했는데 마을 어른들이 돼지와 닭을 잡고 환영했습니다. 부대들이 소룡리에서 하루를 쉬고 1950년 11월 9일 강경을 쳤네요. 70호 남짓한 마을에서 보도연맹으로 5명이 학살되고 9.28후퇴 후에 경찰에게 여러 명이 학살당했습니다. 의용군으로 나갔던 3,4명이 북으로 가고 30여 명이 입산했습니다. 두 집중에 한 집이 우리 유가족입니다.”
출처 : 통일뉴스(http://www.tongilnews.com)
♤ 육군훈련소 (Korea Army Training Center , 陸軍訓練所 )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11월 1일 충청남도 논산시 연무읍(鍊武邑) 죽평리에 신병 기초군사훈련을 임무로 하는 육군본부 직할부대로서 기존의 제21교육연대와 교관단을 주축으로 ‘육군 제2훈련소’로 창설하였다. 육군의 신병과 신병외에 국방부 장관이 필요하다고 인정한 자에 대한 군사 기본훈련과 교육에 관한 사항을 관장하는 육군 교육훈련 기관이다. 창설 이듬해인 1952년 2월 1일부터 입소자들에 대한 훈련을 실시한 육군 제2훈련소가 육군훈련소의 모체이다. 제2훈련소의 설치는 당시 제주도 모슬포에 있던 육군 제1훈련소가 지리적 여건으로 인해 신병훈련 장소로 부적합함은 물론, 내륙에 위치한 각종 병과학교들과의 연계를 원활하게 할 필요성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현재 논산시 연무읍 일대에서 창설된 육군 제2훈련소는 창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친필휘호로 연무대라고 명명하여 국민들에게는 연무대라는 명칭으로 널리 알려지기도 했다. 창설 당시 14,000여 명의 수용 규모로 시작한 제2훈련소는 계속해서 규모를 확장해 갔으며, 1953년 11월까지 제23·25·26·27·28·29·30연대 등 총 7개의 교육연대를 보유하게 되었다. 1955년 12월 31일 제주도의 제1훈련소가 해체되면서 논산의 제2훈련소는 전 육군의 단일 신병훈련소가 되어 신병 양성의 요람이 되었다. 1999년 2월 육군훈련소로 부대 명칭이 변경되었으며 일명 논산훈련소, 연무대라고도 한다. 창설 초기에는 병기·병참 등 주로 특별병과 훈련을 실시하였으나 제1훈련소 해체 후에는 보병·포병 등 전투병과 훈련에 주력하였다. 1960년 이후 각 사단에 신병교육대가 설치되면서 군사기초교육만을 담당하다가 1979년부터는 특기병 위주로 군사기초교육을 실시하였다. 현재는 현역병과 부사관후보생을 대상으로 하는 현역 5주과정과, 사회복무요원·산업기능요원·공증보건의사·징병전담국제협력의사·전문연구요원·공익법무·공익수의사 등 보충역 편입자 및 의무경찰·의무소방 등 전환복무요원을 대상으로 하는 보충역 4주과정의 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현역병 교육은 3단계로 구분하여 실시되고 있는데, 제1단계에서는 군인기본자세 확립, 2단계에서는 야외종합훈련을 비롯한 기초 전투기술 숙달, 제3단계에서는 군인화 완성을 목표로 진행되며, 보충역 교육은 군인 기본자세 확립, 기초 전투기술 숙달, 전시 임무 수행 능력 배양 등을 목표로 진행되고 있다. 현재 육군훈련소의 규모는 주둔지와 훈련장을 합쳐 6,322,722㎡에 이르는데, 이는 서울 상암월드컵경기장 109개에 해당하는 것이다. 병영시설로는 내무실, 연병장, 실내·외 강의장 및 샤워실, 의무실, 취사장, 화장실 등으로 각 교육연대마다 2,400∼3,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를 갖추고 있다. 육군훈련소는 1951년 11월 창설 이후부터 현재까지 600만 명을 훨씬 상회하는 육군정예 병사를 양성하여 국가방위와 국가발전의 견인차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다.
금강의 남쪽, 이곳에 마련된 산성은 과연 어느 시대 어느 나라간 대치한 국경이었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지금도 전쟁중 휴전은 맞나봅니다. 부사관학교 독도법 부호가 곳곳에 붙어있으니...
♤ 성태봉(城太峰, 371.3m
완주군 화산면과 논산시 연무읍의 경계에 있는 봉우리로 옛 성의 흔적(태)이 남아 있어서 성태봉이라고 부른다. 예전에 백제의 고성으로 알려진 성터 같은 곳이 나온다. 이곳은 백제 8대 고종왕의 셋째 딸인 매화공주가 있었는데 문무가 출중하고 지혜도 남달랐다 하며, 신라와 전쟁을 할때 신라를 방해하기 위해 용장을 인솔하고 이곳에 와서 성을 쌓고 대기한 곳이라는 전설이 있다.
고내곡재를 뚫을려고 얼마나 파들어갔는지 아래로 내려서는 길이 배랑빡 맹키로 만만치가 않습니다.
♤ 고내곡재(高內谷, 240m)
논산시 연무읍과 완주군 화산면을 잇는 22번 군도가 지나가는 시멘트 포장도로가 있다. 논산벌판 쪽으로 연무읍과 고내곡저수지가 보인다. 연무읍 고내리(高內里) 고내곡에서 유래한 고내곡재는 심한 비탈을 갖고 있다.
♤ 傳견훤묘(견훤왕릉)
충청남도 논산시 연무읍(鍊武邑) 금곡리에 있다. 1981년 12월 21일 충청남도기념물 제26호로 지정되었다. 《삼국사기》에는 “걱정이 심하여 등창이 나 수일 후 황산의 한 절에서 죽었다.”라고 적혀 있다. 죽을 때 후백제를 일으킨 완산이 그립다고 하여 전주의 완산쪽을 바라볼 수 있는 곳에 묻어달라는 유언에 따라 완산의 칠봉이 보이는 이곳에 묘를 썼다고 한다. 묘에서 내려다보면 멀리 완주·전주 일대가 시야에 들어온다. 견훤의 묘라 하지만 확실한 고증이 없어 전할 전(傳)자가 붙었다. 또한 1454년(단종 2)에 간행된 《세종실록지리지》〈은진현조〉에 “견훤의 묘는 은진현의 남쪽 12리 떨어진 풍계촌에 있는데 속칭 왕묘라고 한다.” 라고 하였으며, 1757년에 간행된《여지도서(輿地圖書)》에 “현남 12리에 견훤묘, 현남 13리 금곡사우”라고 밝혔으나 확실치 않다. 견훤은 상주의 농민 아자개의 아들로 태어났다. 신라의 군대에 들어가 경주의 서남쪽 바닷가를 지켰는데 용맹함이 알려져 비장이 되었다. 마침내 진성왕 6년(892)에 26세의 청년 견훤은 서남쪽 방면의 적도를 토벌한다는 구실로 무리를 모으니 한 달 만에 지금의 광주인 무진주를 점령하여 독자적인 세력을 이루게 되었다. 전라도 지방의 민중들에게 비교적 광범한 지지를 얻으며 금강 유역의 충청도 일부까지 세력을 넓혀가다가 마침내 900년에는 완산주에 입성하여 나라 이름을 후백제로 정하고 스스로 왕이 되어 관제를 정하여 나라의 체제를 갖추었으니 그의 나이 34세 때였다. 중국의 오와 월과 국교를 맺고 궁예와 왕건에 대항하였다. 927년 경주 포석정에서 연회를 베풀던 경애왕을 공격하여 자살하도록 하고 경순왕을 왕으로 내세우는 등 한때 세력이 막강하였다. 견훤이 넷째 아들 금강에게 왕위를 물려주자 장남 신검이 반란을 일으키고 견훤을 금산사에 가두었다. 견훤은 도망쳐 나와 왕건에게 항복하고 그를 도와 후백제를 멸망시켰다. 견훤은 스스로 일구었던 후백제를 세운 지 45년 만인 936년에 왕건에게 내어주고는 마음의 심화를 달래지 못하고 등창이 나서 마침내 그해 9월 8일 936년(태조19)에 지금의 개태사로 추정되는 사찰에서 나이 일흔으로 명을 다하고 말았다.
연무읍쪽의 야경이고,
여긴 강경쪽 야경일려나...
샐목을 조금 지난 지점에서 연무읍과 여산면 그리고 화산면 경계지점을 만나고 도계를 약간 따르다 365m 봉에서 완전하게 여산면으로 진입합니다.
♤ 노동근산(365m)/ 태백이산
금강정맥이 충남을 벗어나 다시 전북 익산시 여산면으로 들어선다.
누항재에서 오르니 송전탑이 있고 곧이어 아찔한 절개지가 나타납니다. 야간임에도 바짝 다가가 아래를 확인해보니 서있는 곳이 무너지지 않을까 오금이 저릴 정도로 아찔합니다. 이곳은 원래 석회광산이었는데 천호동굴이 발견되어서 석회생산이 중지되고 원상복구공사를 한다는 안내문이 있고요.
♤ 누항재(漏項峙)/ 성치
전북 완주군 화산면 누항마을과 익산시 여산면 호산리(壺山里)를 잇는 1차선 740번 지방도가 지나는 곳으로 이 고개 근처에는 석회광산등이 있어서 '작은 독고개'라고 부른다.
천호산 정상에 성터의 흔적입니다. 정상석은 없고 성터 안내판만...
비교적 최근에 설치된 표시인데, 봉화대터를 알리려는 말뚝일까요?
♤ 천호산(天壺山/ 501m)/ 삼면봉
천호산은 전북 익산시 여산면 호산리, 완주군 비봉면 대치리에 걸쳐 있는 산이다. 호산(壺山), 문수산(文殊山)으로 부르기도 하며, 성태봉이라 부르기도 한다. 하늘(天) 병호(壺)를 쓰는 천호산은 속이 텅 빈 산이라는 의미다. 천호산 서북쪽에 호남에서 유일한 길이 800m의 천호동굴(天壺洞窟)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치마을 주민들에 의하면 비가 많이 올 때면 성치마을 위쪽 냇가에 있는 구멍 속으로 냇물이 빨려 들어간다고 한다. 그 텅 빈 구멍으로 스며들어간 물이 석회를 녹여 큰 동굴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이를 증명이나 하듯 동굴이 있는 마을 이름도 호산리壺山里다. <완주군지>로 살펴본 천호산 주변의 기록은 이렇다. 비봉면 내월리 천호마을은 호평天呼, 천호天壺, 용천내, 중뜸 등으로 불리며, 천호는 천호산 남쪽 기슭에 있다. 성주산(聖主山) 기슭에는 성주 산제당이 있다. 천호공동묘지에는 오선지(吳善智)의 천주교 순교비가 있다.’ 천호산 북쪽에 위치한 화산면 운산리 누하(漏下)는 누항(漏項, 시어목, 시우목)의 본 이름으로서 천호동굴 속으로 스며들어 가는 목(좁은통)이라는 뜻이다. 천호산은 병인박해가 일어났을 때 수많은 천주교도들이 은거를 했던 성지다. 천호산 서북쪽 기슭에는 호남에서는 하나밖에 없는 석회동굴(천연기념물 제177호)이 발견된 뒤부터 그 이름이 널리 알려진 산이다. 천호산은 서쪽은 익산시 여산면, 남쪽은 완주군 비봉면, 북쪽은 화산면에 경계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여산)의 "호산(壺山)은 군의 동쪽 5리에 있는데, 진산이다."라는 기록으로 당시에 천호산이 '호산'으로 통칭했음을 알 수 있다.
『동국여지지』(여산)에는 "호산(壺山)은 군의 동쪽 8리에 있는데, 진산이다. 일명 문수산(文殊山)이라 한다."라는 기록이 있어, 당시 천호산의 다른 명칭으로 '문수산'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해동지도』(여산)의 '천호산(天壺山), 문수사', 『여지도서』(여산)의 '천호산', 『대동여지도』(여산)의 '문수산', 『1872년지방지도』(익산)의 '천호산, 문수암'이 기재되어 있어, 18세기 중반경에 호산이 '천호산'으로 변경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신구대조』(익산)에는 호월리 · 유점리 등을 통합하여 '호산리'가 신설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여기에서 산 지명인 호산에서 촌락 지명인 '호산리'가 파생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한국지명총람』에는 "천호산에는 문수사와 깊은 굴이 있다. 호산리는 천호산 밑이 되므로 호산리라 해서 익산군 여산면에 편입되었다. 호월은 죽말이다."라는 기록이 있다.
♤ 천호산성(天壺山城)
천호산성은 여산면 호산리 천호산의 가장 높은 500m의 중봉을 둘러싸고 있는 주위가 약 4km에 이르는 거대한 테뫼식 산성이다. 성의 둘레는 669m이며, 현재 보존된 성벽의 폭은 6m 내외, 잔존 높이는 2.5m 내외로 비교적 넓게 성저(城底)를 잡았다. 봉수시설로 추정되며 속칭 태성(台城), 농성으로 부르기도 한다. 농성은 <조선고적조사자료> 익산 여산면조에 성 주변에서 백제 수막새 기와와 토기 조각들이 발견되고 있어 백제 때 초축한 것으로 사료된다는 기록이 있다. 성의 축성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문헌기록은 없고, 다만 여산 구지(礪山舊誌)에 의하면 천호산성은 부의 동쪽 십리에 있는데, 성 아래 용추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서쪽으로 미륵산성이 한눈에 들어오는 곳에 위치해 있다. 성벽은 크기가 일정하지 않은 부정형 뗀돌을 이용하여 경사면을 따라 쌓았다. 후백제군과 고려군의 격전지라고도 전해지는 곳이다. [이병기 생가]천호산 입구인 신리마을 건너편 800m지점 진사동은 1920년대 시조부흥(時調復興)의 선구자이며, 1천여 편의 시조를 남기고 간 가람 이병기선생의 생가가 있다.
♤ 천호성지(天呼聖址)
천호 성지는 전북 완주군 비봉면 청호성지길 124에 있는 천주교 성지이다. 150여 년의 전통을 가진 천호 공소가 있던 천호산 기슭에 있다. 1839년 기해박해를 전후하여 충청도 지방의 천주교 신자들이 탄압때문에 숨어들면서 천주교 신자들의 마을이 이루어졌다. 1866년(고종3년) 병인박해 등으로 순교한 성인들이 묻혀 있으며 2007년 5월 19일 천주교 전주교구 천호 부활성당이 완공되었다. 여산(현재 진북 익산)면 여산리 숙정이는 병인박해 당시 수많은 천주교도들을 학살하여 순교자들의 피를 흘린 성지다. 여산 관아에서 형벌과 굶주림, 그리고 얼굴에 백지를 붙여 질식케 하는 백지사형과 교수형으로 죽어간 선열들의 뜻을 기려 순교비와 백지사 기념비를 세워 성지로 조성했다. 병인년(1866) 전주 숲정이에서 순교한 손선지(베드로, 1820~1866), 정문호(바르톨로메오, 1801∼1866), 한재권(요셉, 1836~1866), 이명서(베드로, 1821~1866) 등 네 분의 성인이 묻혀 있다. 세계 각국에서 수집된 다양한 가톨릭 성물 600여 점이 전시돼 있는 천호가톨릭 성물박물관이 있다. 천호산 주변에는 과거 천주교 박해를 피해 숨어 지내거나 미사를 집전했던 공소터가 남아있는데 이를 연결하여 조성한 품안길이라는 순례길이 있다. 박해시대의 ‘천호’(天呼) 마을은 “천주(天主, 하느님)의 이름을 부르며 살아간다”는 뜻을 지닌 천주학쟁이들의 거처에서 비롯되었으며, 이 마을을 둘러싼 천호산(天壺山)의 이름과도 연관이 있다. ‘천호산’은 “하늘 아래 호리병[壺]처럼 둘러싸인 외진 산골” 또는 “순교자들의 피를 가득 머금은 병 모양의 산골”이라는 뜻으로 풀이되며, 역시 순교자들의 시신이 이곳에 묻히고 그 후손들이 삶의 터전으로 살아오면서 형성된 지명이다. 천호산 일대에는 가장 큰 마을이자 중심지인 천호(다리실, 용추내), 산수골, 으럼골, 낙수골, 불당골, 성채골, 시목동 등 모두 7개의 공소가 형성되었으나, 현재는 천호, 성채골, 산수골 등 3개의 공소만 남아있다.
♤ 봉화대터
여산면 주민들은 천호산을 성태봉으로도 부르고 있는데, 그 이유는 정상 북서쪽에 축성연대가 미상인 옛 성터(혹은 봉화대)가 있기 때문이다.
배창랑선배님이 다녀오셨다고 후기 올려주신 그곳이네요.^^
♤ 비봉단맥, 수봉화산단맥
금강정맥 천호산에서 비봉지맥은 동쪽으로 수봉산을 일으키고 수봉산에서 동쪽은 화산(294m), 동남쪽은 성뫼산(394m), 남쪽은 비봉산(291m)를 일으킨다. 물줄기는 사곡천을 통하여 만경강에 합수되어 서해로 흘러든다. 행정구역은 완주군 비봉면 내월리다.
표지판이 바람에 퉁탕거려 고정시킬려도 방법이 없네요. ㅋ
♤ 갈매봉(370.5m)/ 삼면봉
완주군 비봉면에서 익산시 왕궁면으로 넘어간다. 익산시 여산면과의 삼면봉이다.
시골 이웃마을 비봉면 수선리에 문화류씨 집성촌이 있는데 아마도 이곳 문드러미재를 통해 여산에서 비봉으로 넘어갔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문드러미재
전북 완주군 비봉면 내월리와 익산시 여산면 원수리를 잇는 741번 지방도가 지나는 고개이다. 문드러미재는 조선시대에 문치(門峙), 문수치(文殊峙)라 부르기도 하였다.
차소리가 시끄럽지만 배가 고프니 잠깐 앉아서 요기를 채웁니다. 앞으로 호남고속도로를 타게되면 기억이 나겠지요.
♤ 호남고속도로
광주에서 서울로 잇는 왕복 8차선의 시원한 호남고속도로가 보이고, 북쪽으로 2km 정도를 가면 여산 휴게소가 나온다는 안내판이 설치되어 있다.
왕궁으로 시집간 막내 고모가 있었는데 고모부는 전도사이셨습니다. 처음 와보네요. 지도상 저 아래로 내려가면 왕궁저수지가 나옵니다.
♤ 왕궁리성지라 불리우는, 왕궁리유적
익산 왕궁리 유적(益山 王宮里 遺蹟)은 전라북도 익산시 왕궁면에 있는 백제의 유적이다. 1974년 9월 27일 전라북도 기념물 제1호 모질메산성으로 지정되었다가, 1998년 9월 17일 대한민국 사적 제408호로 승격, 지정되었으며, 2015년 7월 4일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백제역사유적지구로 지정되었다. 왕궁리 유적은 익산시 왕궁면 왕궁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왕궁평성(王宮坪城),’ ‘모지밀산성(慕枳密山城),’ 또는 ‘왕궁리성지’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마한·도읍지설, 백제 무왕의 천도설이나 별도설, 안승의 보덕국설, 후백제 견훤의 도읍설이 전해지는 유적이다. 발굴조사한 결과, 이 유적은 적어도 세 시기(백제 후기∼통일신라 후기)를 지나면서 만들어진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석탑 동쪽으로 30m 지점에서 통일신라시대 것으로 보이는 기와 가마 2기를 발견했다. 특히, 탑을 에워싼 주변의 구릉지를 중심으로 직사각형 모양의 평지성으로 생각되는 성곽 유물을 찾았다.성곽의 모습은 현재 발굴을 통해 점점 드러나고 있다. 이 지역 안에 있는 왕궁리 5층석탑(국보 제289호)과 절터의 배치를 알 수 있게 하는 유물, 바깥쪽을 둘러싸고 있는 직사각형의 성이 발견되어, 백제 후기의 익산 천도설이나 별도설을 뒷받침하는 중요한 유적으로 떠오르고 있다. 왕궁리유적은 인접한(차로 10분 거리) 익산 미륵사지(彌勒寺址)와 함께 최대 규모의 백제 유적으로 꼽힌다. 크기를 떠나 왕궁리유적이 관심을 받는 이유는 왕궁리유적터가 백제의 왕도였다는 왕도설과 백제 후기 익산 천도설 등의 역사적 가설에 뒷받침이 되는 유적이기 때문이다.익산이 백제의 왕도였다는 학설은 신증동국여지승람대동지지 익산읍지 등의 문헌들을 통해서도 알 수 있는데, 이곳이 '옛날 궁궐터’ '무왕이 별도(別都)를 세운 곳', '마한의 궁성터'라고 적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자료와 왕궁리유적의 발굴로 익산 왕도설이 힘을 받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익산이 백제의 왕도였다는 왕도설 등은 아직까지 백제사의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양동마을은 좀 더 안쪽으로 들어가야 있는것 같고,,,
여름이라면 물보충이 요긴한 지점입니다. 내려오면서 보니 여산면쪽으로 가까이 다세대빌라가 넓은 정원엔 조각전시품도 서있어 공동으로 사용하는 수도 하나쯤 있어보입니다.
♤ 양동재
전북 익산시 왕궁면과 여산면의 경계 능선에 있는 고개로 799번 지방도가 지나고 있다.
난초라는 시가 생각나요. 4 3조 운율이라느니...
♤ 가람 이병기 선생
가람 이병기 선생은 1891년 익산시 여산면 원수리 진동마을에서 태어났으며, 국문학자이자 시조시인으로 한국 현대시조 발전에 큰 발자취를 남긴 분이다. 가람 선생은 1921년에는 권덕규·임경재·최두선 등과 함께 조선어 연구회를 조직하여 활약했고, 1922년부터 동광·휘문고등보통학교 교원, 1926년부터 시조에 대한 논문과 시조시를 발표하기 시작했다. 1942년 조선어학회사건으로 홍원형무소에서 1년간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가람 선생은 전북대학교에서 후학들을 가르치다 1956년 정년퇴임한 후 이듬해 뇌일혈로 쓰러져 앓다가 1968년 여산 고향에서 생을 마감했다.
양동재에서 다시 산으로 올라서니 천주교 부활의동산이던가 공동묘지를 지나고, 좌측으로 시대산이 보이지만 길은 우틀하여 내려서서 1번국도가 지나는 쑥고개로 떨어집니다.
밭을 가로지르는 쑥고개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만 어느 분 후기에 용화리쪽 버스정류소로 내려가니 슈퍼가 있다고 한 기억이 나네요. 용화리마을 앞에 용화제라는 유료낚시터가 있고, 뒤엔 용화산이 있어서 산과 물을 품고 있는 부자 동네입니다.
♤ 쑥고개
전북 익산시 여산면과 왕궁면의 경계로 1번국도가 지나가고 있다. 옛날 산적이 많이 출몰하여 이를 방지하기 위하여 항상 수비병을 배치한 곳이라 하여 수(守)고개라 부르다가 변형이 되어 쑥고개라 부르고 있다고 한다. 금강정맥(금강과 만경강 분수령) 익산과 금마를 잇는 1번 국도인 쑥고개는 도로를 확장하면서 절개지에 동물이동통로를 만들어 들머리 찾는데 혼선이 온다. 구도로 좌측에 있는 진주 소씨 표석을 따라 올라야한다.
♤ 1번국도
목포∼신의주선이라고도 한다. 목포시를 기점으로 호남 지역의 인구와 산업이 밀집된 서부 평야지대(무안, 함평, 나주, 광주, 장성, 정읍, 김제, 전주, 완주, 익산), 충청남도 중심부(논산, 공주, 연기, 천안)와 대전광역시 그리고 수도권 남부(평택, 오산, 화성, 수원, 의왕, 안양)와 서울특별시를 관통한 다음 경기도 서북부(고양, 파주)를 거쳐 평안북도 신의주시까지 뻗은 도로이다. 원래 구간 종점은 평안북도 신의주시이나 경기도 파주시 문산읍 이후 구간은 군사분계선 및 북한 지역이라 자세한 정보를 구할 수 없다. 국도 제1호선의 많은 구간은 근대 이전부터 주요 도로로 이용되었다. 서울에서 평안도 의주까지 이어지던 의주로는 오랫동안 중국과의 사신왕래 및 교역에 이용되는 도로였고 서울에서 수원까지 구간은 조선시대 정조가 건설한 시흥로와 중복된다. 현재 국도 제1호선 노선은 일제강점기에 ‘신작로’를 설치한 것을 근간으로 하는데, 충청남도 천안 이북 구간은 조선시대 ‘대로(大路)’와 거의 일치하지만, 이남 구간은 일본의 미곡 수탈과 식민 통치의 목적에 따라 일부 변형되어 오늘에 이른다.
정상부가 약간은 가파릅니다만 용화산을 넘으면 미륵산 하나 남았다는게 힘이 됩니다. 여기처럼 정상부에 무덤을 조성한 모습이 많을거라 봅니다만 후손의 욕심이 과한 것도 같고... 풍수학상으로 호령하듯 산정상에 묘를 쓰는게 아니라던데...
♤ 용화산(龍華山 342m)
미륵산(彌勒山)에서 3.3km 거리에 있는 용화산은 남쪽의 왕궁면 용화리에서 따온 것으로 추측된다. 왕궁면과 여산면 경계에 걸쳐있는 옥녀봉, 선인봉, 노승봉, 성태봉으로 이어지는 산줄기다. 북쪽의 성태봉에는 석성이 있고, 선인봉 동쪽 기슭에는 도산사, 동산사, 상원사 등의 절터가 있다. 용화산 자락의 원수리 샘골 동쪽 기슭의 절벽 중간에는 30평 정도의 자연석굴에 작은 샘이 있어 약수로 이용된다. 용화산은 서쪽의 미륵산과 함께 마한의 성터로 추정되는 산이다.
물이 요긴할 장소입니다만 역시나 다듬재에는 아무 것도 얻을 수 없습니다. 다만, 용화산과 미륵산의 등산로다 보니 자가용이 꽤 주차되어 있습니다.
♤ 다듬재/ 아리랑고개
익산시 낭산면과 금마면을 잇는 고개이다. 2차선 포장도로 15번 군도가 지난다. 이곳은 다듬잇돌이 많이 나오는 고개라 하여 다듬재라 한다.
용화산 전망대에서 다듬재가는 능선으로 마지막 남은 미륵산이 보입니다. 저 V자 모양이 복원된 미륵산성이네요. 우측의 성벽을 따라 능선까지 오르고 좌측 봉우리로 이동합니다.
♤ 익산미륵산성(益山彌勒山城)
1973년 6월 23일 전라북도 기념물 제12호로 지정된 미륵산성은 <동국여지승람>에 고조선의 왕 기준이 이곳 금마 땅에 내려와 마한을 개국하고 이 성을 쌓았다 하여 기준성(箕準城)으로 불린다는 기록이 있다. 용화산성(龍華山城)이라고도 부르며 馬韓의 여러 나라 중 하나가 이곳을 중심으로 세력을 누리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 산성도 그때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高麗 太祖가 後百濟의 신검과 견훤을 쫓을 때 이를 토벌하여 마성에서 신검의 항복을 받았다고 하는데, 그 마성이 바로 이 미륵산성이다. 산성의 길이는 약 1,822m, 높이 4~5m, 폭 약 5m로 익산지역 최대 규모의 산성이다. 정상에서 사방으로 능선을 따라 성이 만들어졌고, 그 중 하나는 물 흐르는 곳을 향하여 내려가는데 여기에는 동문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성문에는 작은성을 따로 쌓아 방어에 유리하게 하였으며, 성안에서는 돌화살촉, 포석환 등 기타 유물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미륵산성은 우제봉과 장군봉 두 봉우리에 동쪽으로 계곡을 돌아서 쌓은 석성이다. 성안에서 청동기시대와 백제시대의 유물들이 발견되고 있으며 출토되는 유물에는 마한 시대의 것은 발견되지 않았다. 다만 백제 후기의 토기와 금마저성이라 쓰인 백제 와편이 여러 곳에서 출토되고 있다. 따라서 그곳을 ‘금마저’라 칭한 백제성으로서 백제 말기에서 조선시대까지 몇 차례 개축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발굴조사 결과 미륵산성은 여러 차례 보수를 거쳐 조선시대 전기까지 사용되다가 폐지되었음을 확인하였다. 성의 형식은 계곡을 감싸고 성벽을 축조한 포곡식(포곡식) 산성이다. 내부에는 여러 단으로 조성된 건물터와 정수시설, 우물이 남아 있다. 성문은 동문, 남문, 서문 등 모두 3개가 있었던 것으로 조사되었다. 동문은 미륵산성의 정문으로 성문 앞에는 조선 초기에 둥굴게 축조한 옹성이 남아 있다. 그리고 남문은 사다리를 통해 성을 오르내리는 구조였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미륵산성은 익산지역에서 가장 큰 규모의 산성으로 높이는 4~5m, 폭은 5~8m, 길이는 2,095m에 이른다.
오늘구간 마지막 봉우리이자 금강정맥이 이후로는 힘을 쓰지 못한다니...
익산지역의 명상인지 등산객이 꽤 붐비네요. 잠시 둘러보며 방향을 잡아보고...
♤ 미륵산 장군봉(彌勒山 將軍峰, 430.2m)/ 삼면봉
전북 익산시 금마면·삼기면·낭산면에 걸쳐있는 산이다. 원래 이름은 용화산이었으며, 601년(백제 무왕 2년) 남쪽 기슭에 미륵사가 창건된 이후부터 미륵산이라고 불렸다고 한다. 또한 봉우리가 사자 형상처럼 보인다고 해서 사자봉이라고도 한다. 백제의 최대 가람이자 미륵산앙의 요람으로 마한과 백제의 문화가 살아 숨쉬는 미륵사는 신라의 최대 가람이자 화엄신앙의 요람으로 신라문화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경주 황룡사와 함께 삼국시대의 대표적 사찰이다. 냉정약수는 미륵산 중턱의 암벽에서 솟아나는 샘으로, 물맛 좋기로 소문났다. < 금마지>에 오월 단오절, 칠월 칠석과 백중, 팔월 한가위가 되면 인근 주민들이 미륵산 정기를 받은 약수로 목욕을 하기 위하여 인산인해를 이룬다는 기록이 있다. 미륵산의 물줄기는 기양천과 부곡천을 통하여 금강과 만경강에 살을 섞고 서해로 흘러든다. 행정구역은 익산시 금마면, 삼기면, 낭산면이다.
가파르게 미륵산을 내려서면 석불사로 가는 산자락에 이정표가 있습니다. 1.1km라니 가볼 엄두는 나지않고....
♤ 간재 전우(艮齋 田愚)선생(1841~1922)
조선후기의 성리학자로 고향이 전북 익산이며 호가 간재이다. 선생이 학문을 연구하던 곳은 계화도이고 묘지는 이곳 고향 익산에 있다. 선생은 임헌희 문하에에서 20년간 학문을 배웠으며, 고종19년(1882년) 벼슬에 올랐으나 곧 사임하고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1910년 국권이 일제에 강탈되자 선생은 통분하였으며 스스로 귀향하여 도학으로 국권을 회복하고자 노력하였다. 그러나 의병을 일으키지 않고 도학만을 이야기한다고 지탄을 받기도 하였다. 1922년까지 이곳에서 도학을 가르치며 항일정신을 고취하여 민족정기를 진작하는데 일생을 바쳤다. 전우선생의 성리학적 연구업적은 높이 평가되고 있으며 전통적인 유학사상을 그대로 실현시키려 한 점에서 조선 최후의 정통 유학자로 추앙을 받고있다.
미륵산을 다 내려왔어요. 밭둑길을 따라 저 느티나무 집을 지납니다. '옥수공방'이라는 도예가의 아담한 집입니다. 삼기주유수까지 계속 길을 따라갑니다.
석불사가 앉아있는 얕은 구릉이 정맥의 흐름이 아닌가 싶습니다.
♤ 석불사거리
익산시 삼기면 연동리에 있는 네거리이다. 석불사거리에서 미륵산을 바라보고 있는 석불사(石佛寺)는 백제시대 무왕(600~641)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한다. 산속이나 산자락이 아닌 평지의 야트막한 구릉에 자리하는 모습이 특이하다. 백제시대 불교가 일반 백성들과의 밀접한 관계를 추측하게 한다.
♤ 석불사(石佛寺)
익산시 삼기면 연동리 산220-2번지에 위치한 한국 불교 화엄종(華嚴宗) 본산으로 등록되어 있으며 보물 제45호로 지정된 백제시대의 석불좌상과 광배가 있다. 조성 시기는 AD 600년경으로 여겨지며, 삼국시대 환조불로서 국내 최대의 것이고, 광배 또한 최대 규모다. 창건연대는 백제武王 7세기 전반에 미륵사지 창건에 앞서서 건축된 것으로 판단된다. 이 석불좌상은 백제시대에 조성된 매우 귀중한 불상이다. 높이가 156cm나 되는 거구의 여래좌상은 당당한 자세로 얇게 표현 통견의 법의를 結跏趺坐한 무릎위로 흘러 덮었다. 그리고 거대한 주형광배는 7개의 화불과 불꽃 무늬를 조각하였다.
중국집은 일욜이라 쉬고 옆 '나들목식당'에서 맥주 한병과 백반을 시켜 오랜만에 식사를 합니다.^^ 공기밥은 당근 두 그릇이고 저 반찬 중에 살아 남은자 뉘 있으랴~
이후 농공단지 공단길을 따라 평지를 계속 걷습니다. 봄바람이 몹시 불어요. 옷을 하나 꺼내입는 건데 귀찮아서리....
KTX선로도 아래도 통과하고 호남선 철길 건널목도 건너네요.
♤ 호남선 건널목
바람공원-새말공원-삼기제일교회-중국정원-삼기공원-KTX호남선-함열 상마사거리-호남선건널목
함열읍 다송리 고스락? 고스락이 최고를 의미한다는군요. 암튼 함열, 황등을 지나 함라로 바람을 맞으며 아스팔트 평지를 계속 걷습니다. 함라파출소까지 11.8km... 한여름엔 저기서 아스께끼 하나 사먹어야겠죠.^^
♤ 23번국도 지하도-용산초등학교(익산시 황등면 용산리 슈퍼)
아무리 힘들어도 마지막인데 평지길 걷는 것쯤이야... 무릎보호대도 탈착하고 스틱도 거뒀습니다.
드뎌 사거리를 지나니 개교 100년이 넘었다는 함라초교 옆에 익산을 오가는 버스 정류소도 보이고...
♤ 구자마을-봉곡마을-원불교 효도마을- 갈마마을- 함라초교-함라파출소
조금 더 들어가니 함라파출소... 저 뒤에 함라 삼부잣집 고택도 보이고요. 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
파출소 들어가 커피 한잔 나누며, 인근 음식점도 알아보고 여기에서 서울 오가는 대중교통편도 문의해 봅니다.
♤ 행동교차로(함라초등학교)
금강과 만경강의 분수령을 이루는 금강정맥은 함라면사무소에서 함라우체국으로 이어진다. 함라에서는 학교와 면소재지의 각종 건축물들이 정맥 위에 들어차 있다.
금욜 저녁 야근하며 새벽 6~9시 휴게근무라 조금 일찍 나가겠다고 팀원들에게 야식 쐈어요. 담날 아침먹을 시간이 없을듯 하여 야식으로 먹은 찐빵을 남겨두었다가 진안터미널에서 아침으로 때우고 출발했는데 ,,, 많이 왔습니다.
미륵산에서 내려서서 평지를 따라 함라산 들머리인 함라파출소까지 11.8km를 걸었네요.
남은 구간 52km 약간 넘는가봅니다. 마음은 이미 금강이 졸업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
첫댓글 이번에도 겁나 걸으셨네요
미륵산에서 함라초까지 속도좀 내셨겠네요 택시나 버스타고 이동도 하시더군요 담산행 수월하게 마치시고 장항이나 군산에서 뒤풀이가 기대됩니다 몸조리 잘하세요 ^^
네 happy마당쇠님!^^
다음 구간을 생각해 함라까지 똥바람 맞으며 걸었습니다.
후기를 예닐곱개 봤더니 수로며 마을표석 등 사진이 척척 나타나더군요.
평지는 6~7로 걸어야하는데 체력이 딸려 5km/h 왔다갔다 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일주일전 말골재까지 가면서 초죽음이 되었는데 도대체 어디까지 간거요? 긴시간 수고했습니다
엉~ 선배님도 금강하세요?^^
말골재에서 언제 가시죠, 시간 맞으면 낮에 따라가서 복습하고 싶어서요.^^
여전하시군요~
안산 즐산하세요~
Y2K 누구시더라??? 제이쓰리 케이님 이시군요. ㅋㅋㅋ 열심히 하세요~^^
ㅋ K9~
금북, 금남길에 이은 이번에는 금강길로 드셨네요.
헌데 두 구간에 끊으신다면 대단하신 발걸음 남기시는 셈입니다.
주야 없이 산하와 동요되시는 모습이시구요.
늘상 접하는 명품산행담을 오늘도 즐겁게 감상합니다.
남은 구간도 멋지고 안전하게 마무리되시길 바랍니다.
수고많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방장님!
이젠 이 정도 거리에 적응이 되었는지 40km로 중간 기준이 잡혀집니다.^^
잡풀이 무성하기 전에 한남 한구간 끝냈음 좋겠구요.^^
이제 추억의 대간, 정맥 큰 산줄기 마무리도 한강의 남.북 산줄기면 끝나가는거죠?
너무 무리않고 즐기시면서 건강하게 잘 진행하세요.
화이팅!입니다.
겨울철 뽀드득 눈을 밟으며 걸어 올랐던
싸리재 의 삭풍이 생각 나네요 ^^
홀산으로 장거리 쉽지 않으실텐데
대단하신 걸음이십니다...
이어 지시는 행보 응원합니다. ^^
감사합니다. 다류대장님!^^
무한도전 후기 참고 했습니다. 여기까지는 짧게 끊어 가셨더군요.^^
이번에도 엄청나게 걸으셨네요.
우린는 함라까지 가는데 3구간으로 진행했는데도 꽤나 힘들던데.
이제 한번만 가시면 큰산줄기 하나를 또 졸업하시겠습니다.
수고 많으셧습니다.
넵! 부뜰이운영자님 감사합니다.
이번엔 코로나-19로 운동을 안하다보니 체력이 딸려 힘이 들었습니다. 평소 운동이란게 중요하네요.
담구간은 텐트 지고가 한숨 자고가도 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