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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더(Gender)》
성차별은 왜 일어나는가?
우리 사는 사회에서 여러 문제로 발생하는 남녀 간의 혐오나 성차별의 원인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최근에 번역된 이반 일리치의 젠더란 글을 읽으면서 남녀의 성에 대해 깊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반 일리치는 성(sex)과 젠더(Gender)의 차이를 화폐경제 구조에서 찾는다. 산업사회 이후 자본주의가 나타나며 경제가 등장하면서 남녀의 구별은 젠더가 아닌 성으로 대체되었다. 이반 일리치가 소개하는 젠더는 현대 사회의 경제적인 구조가 아닌 자급자족 경제로 살아가는 사회에서 나타난다.
먼저 젠더를 정의하자면 젠더는 사회와 문화와 관련되어 있다. 어떤 사회든지 남자와 여자의 역할이 정해져 있었고, 심지어 도구를 사용하는 것에도 남녀 구분이 확실한 사회와 그런 문화에서 '젠더'가 존재한다. 아마존 정글 과야키족에서 여자는 월경이 시작된 후로 바구니를 혼자 만들고 남자는 사냥을 하는 활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고 한다. 각 역할에 따라 도구도 나뉘고 만약 여자가 어떤 사냥꾼의 활에 손이라도 대는 경우 그 사냥꾼은 남자의 자격을 잃는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원시사회에서만 젠더가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독일 다뉴브 강 상류 지역에서는 농사를 지을 때 여자가 흙을 고르고 씨를 뿌린다. 남자는 종자에 손을 댈 수 없었고, 어떤 지역에서는 여자가 젖소에게 풀을 먹이지만, 수레를 끄는 가축은 건드리지 않았다.
중세 시대에서는 영주에게 지대를 낼 때 화폐단위로 내지 않고, 남자와 여자가 그 역할에 따라 지불했다. 남자는 수도원에 내는 지대로 15일 동안 매일 가축 두 마리를 끌고 와서 노역하고 2년마다 양 한 마리를 바쳐야 한다. 반면 여자는 매년 가을 닭 5마리를 지대로 바쳤다.
화폐단위로 이루어지지 않는 경제에서 남녀의 공통분모는 없었고, 남녀의 역할이 정해져 있었다. 이것이 바로 젠더를 의미한다.
하지만 이와 반대로 화폐단위로 이루어지는 경제에서 남녀는 단일 성(Unisex)을 전제로 한다. 남성과 여성이 같은 일을 하기 위해 태어났고, 같은 현실을 느끼며 겉모습은 달라도 욕구는 같다는 젠더 없는 개인주의의 탄생이다.
이반 일리치는. 바로 경제사회 구조에서 성의 구분이 차별을 이끌어내는 것이다. 젠더 문화에서도 여성에게 억압이 있었다. 바로 가부장적인 억압이었다. 물론 가부장적인 문화가 아직도 곳곳에 남아 있지만, 이제는 예전만큼 심하지 않다. 가부장적인 문화가 수그러들면서 고개를 들기 시작하는 건 경제적 차별의 장이다.
이반 일리치는 기술 변화로 사회 전반에 노동 혁신이 일어났지만, 가사노동에 미치는 영향은 없었고, 주부들을 각자 집안에 가두는 역할만 했다고 이야기한다. 여성에게 더 많은 교육의 기회와 노동의 장이 열렸다. 미국 기준으로 1880년에 집 밖에서 일하는 여성은 5% 미만이었다. 이때는 학교도 직장도 여성에게 문을 열지 않았다. 요즘은 여성의 평균 고용 기간이 28년이지만 1880년에는 5년이었다고 한다. 이를 보면 경제적 평등이 크게 진전된 것은 틀린 말이 아니다.
하지만 정규직 남성과 여성의 연평균 소득을 비교한 통계에 따르면 그 변화는 1880년과 2020년은 3:5 비율에 머물러 있다고 한다. 물론 과거보다 현재 여성에게 훨씬 더 많은 기회가 주어지고 있다는 사실은 틀림없다. 그러나 여성의 수입이 남자에게 한참 못 미치는 상황은 바뀌지 않았다는 것은 남녀의 성이 자본주의 논리에 환원되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당연히 노동가치를 인정받는 사람이 임금을 더 많이 받게 되어 있다.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화폐단위로 이루어지는 경제에서 남녀는 단일 성(Unisex)을 전제로 한다. 현대 사회에서 남녀 구분은 찾기 힘들어졌다. 과거에 남자가 했던 일을 여자도 하고, 여자가 했던 일을 남자가 하고 있다. 경제 성장이라는 일에 남녀가 투입되었다고 하자. 신체적인 조건이 당연히 남자가 여자보다 체력적인 면에서 뛰어나다. 더 많은 힘을 쓸 수 있고, 더 많은 시간을 버틸 수 있다. 기업에 입장에선 똑같은 시간에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을 고용할 것이고,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할 수 있는 사람을 필요로 할 것이다. 여기에서는 남녀가 중요하지 않다. '기업이 요구하는 일을 잘 하는 사람을 필요로 할 뿐'이고 여기에 남자가 신체적인 조건이 유리하다는 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가사노동을 바라보는 시선
문제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경제활동에서 같은 일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 여성이 가정을 꾸리게 되면 가사노동이 있다. 우리나라 남녀 차별의 문제는 노동의 현장에서 비롯되는 것이고 가사노동 역시 예외는 아니다. 한 사람 전체 인생을 두고 볼 때 노동이라는 개념은 단순히 직장에서 정해진 시간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반 일리치는 이를 두고 그림자 노동이라고 표현한다. 드러나지 않는 경제 활동이라는 뜻으로 자신이 창작한 용어라고 소개한다. 예를 들어 통근을 생각해보자. 직장까지 통근해야 하는 시간이 왕복 2시간이라고 가정할 때 이반 일리치는 이를 그림자 노동, 즉 보이지 않는 경제활동으로 보는 것이다. 하루 일당 상당 부분을 자동차를 구입하고 유지하는데 쓰거나 세금을 내야 하고 이게 아니면 불편한 대중교통을 이용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회사들은 통근에 필요한 교통비를 제공하거나 버스 같은 교통을 제공하기도 한다.) 또 정해진 시간 외의 근무나 퇴근 후 상사에게 지시받는 일 등 열정페이나 work와 life의 unbalance도 그림자 노동에 포함될 수 있다.
그림자 노동은 소비
또 다른 형태로 그림자 노동은 소비다. 우리는 소비가 어떻게 노동이 되는지에 대해 의아할 수 있다. 하지만 인터넷 배송만 해도 우리는 물건을 받기 위해 여러 리스트를 감수해야 한다. 택배비, 물건이 안전하게 배송되는 것, 배송된 물건이 나에게 맞지 않을 때 드는 시간과 비용 등 감수해야 한다. 이반 일리치가 말하는 소비의 그림자 노동은 구매한 물건을 사용 가능한 물건으로 전환하기 위해 기울이는 노력이다. 이 노동은 가사노동에서 가장 많이 볼 수 있다. 마트에서 장을 본다. 여러 식재료를 사서 자동차에 싣고 집으로 온다. 집에 와서 엘리베이터로 짐을 옮기고 다시 그것을 집으로 옮긴다. 집으로 옮겨서 짐을 풀고 식재료를 정리한다. 당장 저녁에 먹을 것과 냉장고에 보관해서 나중에 먹을 것을 재배치하는 것이다. 이것이 경제 사회에서 나타나는 그림자 노동이다. 하지만 우리 할머니 시대를 생각해보자. 여성인 할머니는 그냥 집 옆 텃밭에서 채소를 캐고, 닭장에서 달걀을 가지고 와서 조리하는 자급자족인 젠더의 영역만을 담당했다.
현대 사회에서 이 그림자 노동의 큰 피해자는 약자와 여성이 될 수밖에 없다. 어쩌면 성차별의 문제는 임금노동이 시작되어 남녀 사이의 구분 없이 어떤 선이든 일을 잘하는 사람을 요구하는 사회 구조에서 비롯된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노동자의 잉여로 이윤을 남긴다. 결국 이 잉여를 잘 남기는 성이 더 많은 배당을 가져가는 것이다. 만약 여성이 잉여를 더 잘 남기는 존재라면 남성보다 더 많은 배당을 가져간다. 예를 들어 얼굴이 이쁜 여성은 평범한 남성보다 외모지상주의에 특화된 자본시장에서 우위를 점한다. 자본시장에서 외모는 잉여를 창출할 수 있는 좋은 소스이기 때문이다. 기업에서 광고 모델로 이쁜 여성과 평범한 남성 중 누구를 고르게 되겠는가? 당연히 이윤을 많이 가져다줄 수 있는 이쁜 여성을 선택할 것이다. 이를 두고 성차별이라고 말한다면 코웃음을 치지 않겠는가? 임용고시 합격자를 보면 여성의 비율이 높다. 우리나라에서 여성은 군대를 가지 않는다. 20대 시절 2년에 가까운 시간을 버는 셈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시간은 곧 자본과 연결되고 경쟁을 주도하는 중요한 소스가 되기 때문에 시험을 준비함에 있어 여성이 우위를 갖는다. 이를 두고 남성이 성차별이라고 말하면 남자니까 당연히 군대 가야 하는 거 아니냐는 식으로 우리나라 여성들은 이해를 못 한다. 입장을 바꿔 생각해보자. 의무적으로 남성이 군대를 가지 않고 여성이 군대를 가게 됨으로써 2년이라는 시간 차이가 난다고 하면 여성들은 이걸 성차별이라고 말할 것이다. 여성은 또 힘없는 피해자라는 식으로 말이다. 이런 식의 공방은 의미가 없다. 본질을 잘못 짚고 있기 때문이다. 남자라서 혹은 여자라서가 아니라 사회 구조는 이미 단일 성을 요구하고 있고, 그 단일 성을 요구하는 사회에 부합하는 존재가 우위를 점하는 성이 된 것뿐이다. 그게 남성이 되었다고 한다면, 여성들은 성차별을 당하게 된 남성 중심의 권력구도에 초점을 맞출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구조를 비판해야 한다. 자본주의 사회는 남성과 여성에게 똑같은 역할을 부여하면서 더 많은 이윤을 창출하는 존재를 선호하기 때문이다. 남녀의 임금 차이 역시 마찬가지다. 여성이 임금이 적을 수밖에 없는 건 남성의 성차별적 태도가 아닌 자본주의 구조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이윤 구조 때문이다. 이 이윤 구조를 바꾸지 않는 한 여성이 남성보다 임금이 높아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성'으로 만들어진 젠더 없는 존재
토박이 문화에서는 누구나 젠더를 가지고 태어나서 젠더로 성장하지만 현대 사회의 성 역할은 경제 구조에 맞추어 주어진 것이다.
'성'으로 만들어진 젠더 없는 존재, 얼마든지 성형 가능한 개인이라는 것이 암묵적으로 가정되어 있다. 그래서 많은 성소수자들은 자신이 경제 구조에 맞추어진 성이 아니라는 것을 목소리 내는 건지도 모르겠다. 결혼도 동서양을 막론하고 복잡한 가계와 혈통이 맺어지는 의식이었지만 지금은 새로운 경제단위 즉 쉽게 세금을 거둘 수 있는 개인 단위로 축소되었다. 이반 일리치는 이를 두고 "두 개인을 세금 징수 단위로 용접하는 일"이라고 표현했다.
예전에는 아웃사이더라는 말이 특별했다. 다른 것들을 추구하고 다양한 모습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요즘은 인사이더 문화다. 안정된 자리에서 즐기는 유형이 발생한 것이다. 그 외의 사람들은 안정된 자리에서 배제되는 동시에 자급자족하던 환경에서 추방당한 것과 다름없다. 우리는 경제 구조로 이루어진 자본주의 사회에 맞추기 위해 자신을 톱니바퀴로 만드는 가공을 하고 있다.
성차별이라는 것도 어쩌면 자본주의와 무관하지 않다. 많은 기회들이 여성에 열렸지만, 경제적 구조에서 성은 획일화되어 있다. 이 구조에서 성은 인간의 노동력, 성 충동, 성격 또는 지성을 남과 여로 양분한 다음, 그 각가이 인간이라는 추상적이고 무성적인 기준에서 얼마나 벗어나 있는지 진단(diagnosis) 하는 도구로 보인다. 진단(diagnosis)는 그리스어로 차별(discrimination)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경제적 구조가 정해준 기준에서 많이 벗어날수록 차별은 심화된다. 그리고 그 기준에 만족스럽지 못한 행동을 보일 때 차별이 시작되는 것이다.
노동을 젠더로 나눠 수행하던 방식이 임금 노동과 그림자 노동이라는 경제적 분업으로 바뀌었다. 이제 새로 발견된 남녀 성 특징이 경제적 구조의 기준에 맞추어 차별적으로 노동의 대가가 배당된다. 남자도 가사노동을 해야 한다는 슬로건이 유효하다면, 여자도 남자처럼 일을 해야 한다는 슬로건도 유효해진다. 가사노동에 참여하지 않는 남성은 여성과 동일한 요구를 받고, 이 요구에 응하지 않으면 남성들도 설자리가 없다. 마찬가지로 경찰이나 소방관 등 현장에서 일하는 여성들이 남성과 같은 동일한 의무를 지지 못하면 역시 차별적으로 대우받을 수밖에 없다. 이건 가부장적인 시각이 만든 편견이 아니라 자본주의가 만든 새로운 편견이다. 아이를 키우고 가사노동을 의무적으로 맡아야 하는 것처럼 사회 분위기가 조성되어 있는 사회에서 어떤 여성도 결혼과 가사노동이라는 덫에 자신을 내어주지 않으려고 한다. 그래서 싱글이 늘어나고 딩크족이 생기는 것이다.
하지만 그 차별로 인해서 받는 손해의 타격치는 통계적으로 여성이 크다. 이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남성 중심의 사회가 지속적으로 이어져왔기 때문에 남성이 기준에 못 미치는 차별과 여성이 기준이에 못 미치는 차별은 경중이 있다.
가톨릭(Catholic- 보편성)의 논리
단일 성의 역사는 가톨릭(Catholic- 보편성)의 논리에 의해서 자본주의보다 700년 앞서 종교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가톨릭은 구교를 뜻하는 용어가 아니라 보편성이라는 뜻을 가진 용어다. 이반 일리치는 신학으로 보편적으로 인간의 죄를 판단하는 기준을 만들면서 남녀에 차별 없이 '죄'를 주입시켰고, 이를 Care(돌봄)이라는 목적으로 사제에게 고해성사를 하게 함으로써 죄를 진단하고 관여하기 시작하면서 젠더 없는 보편 인간이 탄생했다고 말한다. 정통 신앙 중세에 들어 가톨릭적 행위 곧 보편 행위를 뜻하는 것으로 바뀌면서 사제도 전례를 이끄는 사람에서 남녀 성을 표준화된 양 떼를 이끄는 목자 내지 고해신부로 바뀌어 사제는 교회 첨탑 위에 앉은 수탉이 되어 남녀로 이뤄진 양 떼를 굽어 살펴보는 위치에 서게 된 것이다.
이런 남녀 차이 없이 적용된 법으로 인해 남녀 사이의 동거는 오히려 성차별적으로 변했다. 간통이라는 죄에서 남자와 여자는 처음에 같은 죄인이지만 이 죄목에서조차 남자의 자연스러운 위치는 여자 위여야 했다. 히에아르키아는 중세 시대에 만연한 신학 체계였다는 걸 부인할 수 없다.
그렇게 교회는 양 떼를 치는 목자로서 죄를 판별하고 들어야 하는 사제로서 신자의 집안과 잠자리 영혼까지 피고들 권한을 갖게 되었다.
성의 보편화 작업은 이미 중세 교회부터 시작되어 근대 사회와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젠 강요받게 되었다. 자급자족해왔던 삶에서 이제는 노동집약적이라는 상황으로 내몰린 남녀는 그동안 젠더의 역할로 철저히 분리되어 있던 현실에서 이제는 같은 일을 강요받는 동일체로 환원된다.
그렇기에 근대 사회의 이혼이라는 개념이 등장하고 여자들은 남자들이 갑자기 일터에서 자기들에게 내려진 지시를 받는, 그전에는 겪어보지 못한 상황과 자신의 고유 영역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혼동의 상태로 내몰린 것이다.
Unisex로 획일화된 세대
우리나라에서 남녀의 불화가 심화되는 것은 젠더 영역이 존재했던 세대에서 이제는 Unisex로 획일화된 세대로 변화하면서 겪는 고통 때문이다.
우리나라 여자들이 결혼을 기피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결혼을 하면서 자신의 영역이 직장인지 가사인지 가족인지 알 수 없는 미궁의 상태로 걸어가야 하는데 그 누구도 논리적으로 설명해 주지 않기 때문에 힘든 것이다.
길거리에서 페미니스트들이 외치는데 그들이 무엇을 외치는지 논리적이지 못한 것을 많이 보았을 것이다. 공장 노동을 위한 무대가 가설되고 근대 경제의 세트장이 올라가고 있는데 그 무대에 맞는 새롭고 낯선 성을 연기하기 위한 대본이 없는 것이다.
오늘날 경제로 인해 젠더가 기괴하게 변모했음을 먼저 알아채는 사람은 여자다. 그들의 호소는 여성이 다른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음은 물론 여성 자신의 눈에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경제학 지배체제에서 남자와 동등한 파트너로 여성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여성은 경제 지배체제의 성과주체로 적합하지 않다는 시선이 지배적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여성들은 자신의 차별이 어디서 기한 것인지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채 소리만 높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감정으로 호소만 하려니까 설득력이 떨어진다. 사실 경제 체제의 전반적인 비판으로 시작한 건설적인 페미니스트 운동을 지금은 기대하기 어렵다. 무엇이 나쁘다는 걸 본능적으로는 알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소리만 높이는 주장은 별 소득이 없기 마련이다. 그래서 좀 더 건설적인 이야기를 위해 많은 페미니스트들이 더욱 심혈을 기울여서 연구하길 바란다.
대안을 생각해보자면 경제 체제를 먼저 손봐야 된다. 남성과 여성의 차별화 문제는 단일 성을 전제로 똑같은 힘과 능력을 요구하는 자본주의 체제에서 비롯된다. 인간은 생산 주체 혹은 성과주체로 획일화하는 모든 것들에 대해 저항하는 것부터 모든 것을 시작해야 한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비롯되는 문제는 성차별의 문제만이 아니다. 그리고 성차별 단일의 문제만도 아니다. 모든 문제는 서로 얽혀 있다. 그러므로 어느 한 문제만은 의제로 삼아 풀어낼 수 없으므로 많은 지식인들이 연대하여 이 문제를 건설적으로 해결해야 한다. 젠더의 영역에 대해 심도 있는 역사적 반추가 이반 일리치에서 시작되었다면 이 반추를 현실에 어떻게 적용해야 할지는 앞으로 더욱 논의하고 다듬어야 할 일이다. 더 많은 것들이 희생되어야 할지도 모른다. 여성이 진정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찾고 남녀가 차별 없는 시대를 기다리기까지 수많은 아픔과 다툼, 고통이 수반되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인류는 계속해서 발전하는 것으로 나아가야 한다. 더 선한 의미를 찾고 그걸 위해 싸우는 모든 일에는 가치가 있다. 비록 논리적이지 못할지라도 다듬어지지 않더라도 그 소리를 내는 것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반 일리치가 수면 위로 올린 이 논의는 이제야 시작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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