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에 갔다가 야생에서 사자와 맞닥트린 경험이 있습니다. 사자 먹이를 직접 주는 프로모션이 있어서 제가 할 것이라고 호기를 부렸습니다. 두 칸짜리 사파리 버스 철창 사이로 생닭을 쥐고 있는 내게 달려드는 섬뜩한 사자의
눈빛은 그야말로 공포 그 자체입니다. - 철망 버스 지붕위로 올라와 갈기를 세우고 송곳 이를 드러내는데 어릴 적 “테스”에서 본 그 놈이 아닙니까? 호랑이를 맨손으로 때려잡은 영웅담을 못 들어본 건 아니지만 제
덩치만한 사자가 눈을 부라리며 달려드는데 간담이 서늘합디다. - 제가 수컷 한테 스스로 꼬리를 내리고 오그라들긴 처음이었던 것 같아요, 특별한 경험이었습니다. ‘야인시대’2부를 식음을 전패하고 보는 중입니다. 6.25를 다룬 반공영화는 70년대 국민학교에서 보고 40년도 넘은 것 같습니다. 소련제 T34탱크를 몰고 김책의 인민군 사단이 파죽지세로 남침을 감행했습니다. - 지금이야 900억짜리 국산 탱크도 팔고 수리온이라는 헬기도 자체 생산을 하지만 그땐(해방후 5년) 미군정시대라 이념(이데올로기)도, 정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이념이란 국가를 통치하는 형태를 말하는데 당시의 조국은 민족주의와 공산주의가 찬탁,반탁으로 갈라져 대립과 분쟁을 하고 있었어요. 피눈물나는 애기지요. - 언젠가 북침이냐, 남침이냐? 로 보수언론이 진보를 까던데 ‘북‘자를 먼저 쓸려면 북진으로 하고, ‘남‘자를 사용할 때는 북한이 남한으로 쳐들어왔으니까 남침입니다. 그렇다고 시험문제는 절대 안 나오니까 걱정은 하지 마시라. 김일성의 인민군대가 새벽4시에 내려와서 창동저지선을 뚫고 서울을 먹어치우는데 딱 3일 걸렸습니다. - 단 한 대의 탱크도 없었던 우리나라는 6사단이 근근이 버티다가 후방 3사단을 지원군으로 보내보지만 역부족입니다. 제가 84년도에 3군단 헌병대에 있었습니다. 과거 3사단이었던 3군단은 인민군이 남침을 했을 때 지원군으로 나갔다가 포로로 잡혀갔고, 1.4후퇴 때도 허망하게 군단 기를 빼앗겨버렸답니다. - 4개 사단(2X,12X,21,22X)을 묶어 군단으로 편성된 3군단사령부는 44번 국도와 아홉싸리 고개를 통과해 강원도 현리에 위치해있어요. 가리산, 방태산, 백담사, 기린면이 모두 3군단의 나와바리일 것입니다. 군단장은 쓰리스타로 10.26의 김재규도 3군단장을 한 것으로 압니다. 물론 全통이 군단장 명단에서 영구삭제하고 이등병 - 으로 강등시켜버렸지만 말입니다. 여기서 잠깐 3군단사령부는 강원도 현리, 2사단은 양구, 12사단과 21사단은 인제 원통에 위치해 있습니다. "이제가면 언제오나 원통해서 못살겠네"가 웬지 험한 지형과 암울했던 과거사를 말해주는 것 같습니다. 저는 85년도에 수방사에게 이곳으로 전출을 와서 만 2년을 지냈습니다. - 병이 소속부대를 옮기는 경우는 거의 없지만 제가 그 어려운 일을 해냈다는 것 아닙니까? 지나놓고 보니 덕분에 군 수뇌부의 경호, 공관 근무, 검문소, 순찰, 팀스피리트, 당직, 신병인도, 대민 봉사 등등 헌병대의 커리큘럼을 모두 경험해보았어요. 물론 '44번 국도의 사랑'과 방내초소의 추억들까지. 이상무, 신현덕, 신인규 박종기 모두들 보고싶다. - 제가 전역한 후 직속상관 전통이 백담사에 유배를 왔다갔고요, 가리산 특공연대 차대령이 사고사했다는 말, 철정검문소 고상사가 전역했다는 것까지 들었습니다. 6.25당시 남북 군사 전력을 비교해보면 한국군이 보병8개 사단 등 총10만5천명, 북한군이 20만 명 이었습니다. 하지만 실제 전투력에서는 북한과 비교자체가 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 북한군은 전투기와 탱크가 있었습니다. 1950년대 T34 탱크는 천하무적이었어요. 탱크는 밀어붙이는 공격용 무기인데 철갑 두께도 중요하지만 자주포에 무엇을 탑재했느냐가 성능을 좌우할 것입니다. 탱크 중 걸작은 T34이고, 대전차 자주포는 SU100이 최강으로 알고 있습니다. 물론 호랑이 담배 피던 70여 년 전의 이야기 - (Oldies But Goodies)지만 말입니다. 시대가 변해서 종종 어제의 적이 오늘의 우방으로 바뀌기도 하는데 자주포 SU100은 소련에서 우리가 수입한 무기입니다. ‘불곰 사업’으로 T80U를 들어올 당시, 소련은 어떤 장비도 다운그레이드 시키지 않고, 당시로서 최신예의 T80U를 그대로 내주는 - 성의를 보였었다고 해요. 이 탱크의 성능에 몹시 만족한 국군은, 도입 숫자를 대폭 늘려 T80U 1개 기갑 여단을 창설하려고 했고 반대에 봉착했다고 합니다(러시아한테 받을 돈이 꽤 남았었고, 천하무적인 탱크 단가도 저렴했으니까) 물론 꼴통 보수단체나 미국이 가만있을 리 만무하잖아요. 미국으로 봐선 한국이 영원한 미국 무기 시장이며, 언제나 - 미국 군산 복합체의 봉이 되길 원하는데, 난 데 없이 러시아 제 무기를 수입하고
자빠졌으니, 극히 못 마땅해 했을 것이고, 국내 탱크 제조업체 역시 T80U가 맘에
안 드는 건 마찬가지 이었을 것입니다. 잘 못 하다간 K시리즈 탱크의 주문량이 줄어
드니까 말입니다. 그래서 T80으로 이뤄진 기갑여단 창설은, 이뤄지지 못 했다고 합니다. - 물론 국산 탱크도 우수하고 2018년 현재 기갑 여단도 여러개가 있지만 러시아산 T80U탱크부대 창설은 불발된 상황입니다. 사드배치의 백그라운드에도 복잡한 이해 관계가 얽혀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국군의 날 행사에 언제나 T80U가 빠졌습니다. 국군의 날 행사에서 T80U을 본 적 있는가? T80U은커녕, 100밀리 포의 보병
- 전투 차 BMP-3도 본 적이 없습니다. 특히 T80U, 나오기만 하면 그 작은 포탑에 장대한 포신, 그리고 한국에선 접해 보지 못 한 소련제 무리라는 점에서, 상당히 인기를 끌 것 같은데, 우리 국민의 돈으로 사오고, 국군이 장비한 우리 무기가, 도입이 꽤 오래 전 일인데도 나온 적이 없습니다. T80U가 주는 상징성은 큽니다.
- 소련제 정통파 탱크로, 소련제 탱크의 아류를 너끈히 제압한다는 의미가 있지요. 북한 지휘관들도 T80U에 대해 상당한 껄끄러움과 함께 콤플렉스를 느끼고 있을 게 틀림없어요. 자기네들이 수 십 년에 걸쳐 애쓰고 애써서(70년 말부터 T-62를 라이선스 생산하기 시작했다), 지금의 폭풍 호와 선군 호까지 만들기에 이르렀는데, 남반부는
- 단번에, 그걸 뛰어넘어 버렸으니까요. 누나가 30년째 군납업체을 하는데 개인적으로
기갑부대용 전투조끼가 가장 쓸만합니다. 보급용과 사재의 차이겠지만 말입니다.
하여간 T34는 국산 k2의 상대가 않되고, 우리의 기갑부대가 주로 북한 군이 남침을
해온 한수 이북에 밀집되어 있다는 것까지 확인했습니다. - 제가 추정해본 남침 경로는38선-화천-포천-동두천-의정부-창동-미아리-시청입니다. 포천 호국 로에서 군인용품 숍을 해서 잘 아는데 포천에서 노원(창동)역까지는 차로 1시간이면 넉넉합니다. 탱크속도로도 2시간 내 주파할 것입니다. - “미아리 눈물고개 님이 넘던 이별고개/화약연기 앞을 가려 눈 못 뜨고 헤매 일 때/ 당신은 철사 줄로 두 손 꽁꽁 묵인 채로/뒤돌아보고 또 돌아보고 맨발로 절며, 절며 끌려가신 이 고개여 한 많은 미아리 고개“ - 반야월 씨가 가사를 쓰고 오아시스레코드에서 발매된 이 음반은 당시의 상황을 생생히 증언하고 있는 듯합니다. 바벨론 유수 같은 지경이 된 배경에는 가슴아픈 실책이 있었습니다. 인민군이 창동저지선을 통과할 때까지 '국방장관 신 성모'가 대통령에게 각하, 걱정하지 마시라고 하더이다. 총이 있으면 콱 쏴버리고 싶었어요. - 그래서 승만 이 할아버지가 내보낸 대국민 라디오 담화문 때문에 국민들은 피난을 안 갔고, 다급해진 국방장관 꼴통이 마침내 한강철교를 폭파시켜버립니다. 당시 서울 시 인구가 100만 정도 되었다는데 이 일로 10만 명 이상이 총 맞아 - 죽고 물에 빠져 죽었습니다. 오호통제라. 오호애제라. 오호비제라. 일제36년 동안 백지상태가 되어버린 한반도는 모스크바3상회를 거쳐 북은 소련이, 남한은 미국 군정이 들어서게 되었지요. 혹자는 자주독립이 아닌 연합군의 승리로 얻은 해방 탓 이었다고 하지만 저는 당시상황에선 그것이 최선이었다고 봅니다. -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이 있고 못하는 것도 있습니다. ‘미스터션샤인’에서 보았듯이 얼마나 더 잘해야 한답니까? 수 많은 의병과 독립군, 지도자(김구, 박헌영, 여운영, 김규식, 이승만)가 없었습니까? - 제가 1차 독자이었다면 일제시대 에는 어떤 식으로든 독립군을 했을 것이고 해방 후라면 깡패나 경찰을 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야인시대 100회까지 보고 나니 연병, 친일이나 좌익에 대한 생각이 조금은 관대해진 것 같기도 합니다. 대신에 김두환 같은 민초들이 위대해 보이는 일면도 생겼습니다. - 이승만이 대통령이 취임 하고 첫 번째 잘못한 사건은 대국민 안심 방송이 아닐 런지요? 해방 후 5년 동안 휴전선에서 크고 작은 국지전이 있었고, 노상 빨치산들이 출몰하고 있었기 때문에 4.3 제주 사건은 예고된 비극일 것입니다. 하지만 한강 철교 폭파나 조봉암 간첩단 사건은 오롯이 대통령이 - 져야할 몫이 아닐까? 이승만은 정동 제일 감리교회의 장로이었다고 해요. MB는 소망교회,YS는 충현교회 장로에요. 홍준표는 깡패일까? 장로일까? 유행가 가사에도 나오는 정동교회, 내부는 보지 못했지만 외부는 성당처럼 수려하게 생겼습니다. 독재, 부정선거, 친일인사비리로 하야 하기까지 결국 - 박정희를 만들어 내는데 이승만이 일조한 것으로 저는 봅니다. 만약에 유석 조병욱 박사가 죽지 않고 제2공화국의 대통령이 되었다면 조국의 역사가 달라졌을 것이라고 봅니다. 그렇게 되었다면 친일은 물론이고 3.8선도 쳐지지 않았을 것인데 아쉽습니다. 조순영씨가 그의 아들인데요, - 그 양반 활동할 때보면 부전자전입디다. 세간에는 조병욱씨를 친일파라고 하는 분들도 있지만 간디같은 사람도 불편한 진실이 있는 것이고 그의 다른 행적과 종합해보면 그는 조국의 지도자로 자격이 충분했다고 봅니다. - 다만 제주4.3사건은 그가 우익이었다는 것인데 당시 우익은 조국의 정체성입니다. 바야흐로 서슬퍼런 유신정권이 막을 내렸고 육군대장이 공관병의해 짤렸습니다. 교황이 미국 방문은 거절하고 방북은 승인했다니 인간만사 새옹지마가 아닙니까? 2018.10.16.tue.악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