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無比스님이 읽어주시는 화엄경(2020.10.5.PM2시)
세주묘엄품(世主妙嚴品)2
화엄회상 대중들의 득법(得法)과 게송
오늘은 스님들 공부하는 날로 정해져 있어서 염화실TV에는 강의가 없는 것으로 했었는데, 부산에 코로나가 너무 극성을 부리는 바람에 갑자기 긴급속보로 타전을 해서 공부를 쉬기로 했다.
코로나 때문에 스님들 공부를 지난달에도 못했고 이달 10월달도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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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정대로라면 오늘 염화실 TV 공부가 쉬기로 되어 있었는데 이렇게 갑자기 하기로 했다.
상식이 있는 분이라면 ‘오늘 스님들 공부 안하니까 염화실TV 공부는 하겠구나’ 그 정도는 짐작했으리라 믿는다.
많이들 들어오셨다.
뉴스에 전세계적으로 코로나 확진자가 3700만명이라고 한다. 프랑스에는 하루에 만명이 코로나에 감염이 되었다고 한다.
우리나라는 100명 이하로는 떨어지기는 했지만 깨끗하게 끝나지 않고, 근래에는 부산쪽에 많은 사람이 감염이 돼서 오프라인에서 법회를 하려니까 걱정이 많이 되어서 오늘 스님들 법회를 못하게 되었다.
다음달은 또 어떻게 될지 염려스럽다.
금요법회는 또 어떻게 될지, 앞으로 금요법회에 대해서는 공고가 있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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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부터 한 일주일 전에, 지금 내가 만지고 있는 이 국화가 아주 작은 봉오리를 맺고 있었는데 한 일주일 사이에 이렇게 확 피었다. 국화향기가 진하게 진동을 한다.
서정주님의 ‘국화옆에서’ 라는 시도 떠오른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한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속에서
그렇게 울었나 보다.
연기(緣起)의 이치를 잘 표현한 시라고 정평이 나 있다.
그분은 불교에 깊은 조예가 있는 분이라서 한 송이의 국화꽃을 가지고 온 삼라만상 두두물물이 모두 이 국화 한송이와 연관되어 있다고 하는 법계연기적 사실을 ‘국화옆에서’라는 한 편의 시로 잘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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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예정에 없던 공부를 하는데 또 누가 왔는지 살펴보겠다. 핸드폰을 가지고 있고 유튜브에 염화실 TV 구독자로 등록시키고 알림설정을 해 놓으면 이렇게 갑자기 해도 연락이 간다.
그냥 지내면 또 뭐하겠는가?
특별히 바쁘지 않다면, 라이브로 같이 대면도 하고 스님은 무슨 말씀을 하시는가 등등 소식을 나누는 것도 바람직하다.
5일간 추석연휴를 지내는데 여러분들 추석 연휴 무사히 잘 보내셨는지 모르겠다.
이 법회를 많이 기다리셨을 것이다. 저도 기다렸다.
실시간 이렇게 우리가 서로, 여러분은 저의 얼굴을 보고, 여러분들이 들어오셔서 서로 인사를 나누고 내가 어떤 분들이 오셨는가를 본다.
어떤 복이 있어서 우리는 이런 좋은 가을날 국화 한송이를 감상하면서 화엄경을 공부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는가? 돌이켜 생각해보면 여러분은 복을 많이 받은 분들이다. 쉽게 하는 말로 무량대복을 받은 것이다.
이런 좋은 가을날 화엄경을 앞에 두고, 화엄경을 듣는다.
그것을 100퍼센트 다 소화 못하고 이해는 다 하지는 못해도 그나마 우리 그릇만치 우리 상식만치 우리 지혜만치 알고 있는만치만 이해를 해도 그것이 어디인가?
그것이 한량없는 복이라고 저는 생각한다.
중생수기득이익(衆生受器得利益) 어떤 현상도 그 사람의 그릇만치, 그 사람이 지혜를 얼마나 가졌느냐에 따라서 수용을 한다.
태양빛이 아무리 밝은들 조그마한 한 송이 꽃은 자기가 수용할 만치 태양빛을 수용하고, 풀 한포기는 풀 한 포기만치 태양을 수용하고, 저 큰 나무는 큰 나무만치 태양을 수용한다. 매사가 다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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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50여 분이 동참을 하셨다.
유튜브TV라고 하는 기술을 구글회사에서 만들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대단한 기술 능력이고, 우리가 이것을 십분 활용해 줄 필요가 있다.
그래서 내가 늘 요즘에 줄기차게 스님들에게 이야기를 하는 것이 한 사찰 한 TV 개설 운동이다.
절마다 그 절의 상황들을 뉴스시간을 마련해서 이야기를 하고, 부처님 말씀을 전하고, 그 사찰의 행사라든지, 신도님들의 일이 있으면 전할 수 있는 것들을 전하는 것 이런 것을 하는 것도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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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화엄경 2권의 일곱 번째 시간 ‘자재천왕과 그 대중들의 득법과 게송’중에 게송부분을 할 차례다.
2) 게송
이시(爾時)에 자재천왕(自在天王)이 승불위력(承佛威力)하사 보관일체자재천중(普觀一切自在天衆)하고 이설송언(而說頌言)하니라
그때에 자재(自在)천왕이 부처님의 위신력을 받들어 모든 자재천 대중들을 두루 살피고 게송으로 말하였습니다.
불신주변등법계(佛身周徧等法界)하사 보응중생실현전(普應衆生悉現前)이라
종종교문상화유(種種敎門常化誘)하사 어법자재능개오(於法自在能開悟)로다
부처님의 몸이 두루 한 것이 법계와 같아서
중생들에게 널리 응하여 다 앞에 나타남이라.
갖가지 가르침으로 항상 교화하사
모든 법에 자재하게 깨닫게 하네.
부처님의 몸이 두루 한 것이 법계와 같아서
중생들에게 널리 응하여 다 앞에 나타남이라.
부처님의 몸은 그대로 법계 그 자체이다. 어디에 안 계신 데가 없다. 부처님은 어디에 안계신 데가 없어서 법계와 같다. 중생들이 널리 응하여 다 앞에 나타난다.
갖가지 가르침으로 항상 교화하사
부처님은 우주법계 그 자체이고 삼라만상 그 자체이고 그 자체로서 우리들에게 뭔가를 깨우치고 교화하고 성숙시킨다.
모든 법에 자재하게 깨닫게 하네.
‘성문 연각 보살 불’하는데 성인의 두 번째 단계에 연각이라는 말이 있다.
누구의 가르침을 받는 것도 아니고 자기 스스로 자연현상을 보고 깨달은 사람이다. 사람으로서 세상을 살아가면서 스스로 경험하는 온갖 인생사들을 가만히 사유하면서, 또 자연현상이 춘하추동 사시절 변해가고, 하루 가운데 아침이 있고 낮이 있고 해질녘이 있고 밤이 있고 하는 현상들, 또 사람들의 삶이 거기에 맞추어서 적절하게 조화를 이루면서 흘러가는 것들을 잘 사유하고 면밀히 관찰해서 거기에서 깨닫는 사람들이 연각이다. 혼자 깨달았다고 해서 독각이라는 표현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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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현상이나 사람의 살아가는 문제 거기에서 여러 가지 인연현상들을 잘 사유하고 관조해서 어떤 이치를 깨닫는 사람들을 연각(緣覺), 그들은 홀로 깨달았다고 해서 독각(獨覺) 그렇게 부른다.
이 우주 법계는 부처님이 어떻게 어떻게 가르쳐서 깨닫는 경우도 많지만 그냥 우리에게 이미 큰 교훈을 내려 주고 있다. 우리가 거기에 눈을 뜨지 못하고 무심코 지나칠 뿐이다. 다시 한 번 읽어보겠다.
부처님의 몸이 두루 한 것이 법계와 같아서
중생들에게 널리 응하여 다 앞에 나타남이라.
우리 눈 앞의 모든 현상들은 부처님이 나타난 것이다.
갖가지 가르침으로 항상 교화하사
모든 법에 자재하게 깨닫게 하네.
세간소유종종락(世間所有種種樂)에 성적멸락위최승(聖寂滅樂爲最勝)일새
주어광대법성중(住於廣大法性中)케하시니 묘안천왕관견차(妙眼天王觀見此)로다
세간에 있는 갖가지 즐거움 중에
성스러운 적멸락(寂滅樂)이 가장 훌륭하여
넓고 큰 법성(法性) 중에 머물게 하니
묘안[善目] 천왕이 이것을 보았네.
세간에 있는 갖가지 즐거움 중에
성스러운 적멸락(寂滅樂)이 가장 훌륭하여
세간에는 즐거움도 여러 종류로 많다. 사람마다 다 즐거워하는 것이 다르다
전에 내가 설악산 어느 폭포에 갔다가 내려오는데 어떤 관광단체가 올라가면서 그 중에 한 사람이 ‘아유 이런 데를 왜 사람을 데려왔느냐’고 하는 말을 들었다.
오르막이니까 숨도 차고 힘들어서 그랬을 것이다. ‘세상에 이런 데를 사람을 데려온다’고 불평불평을 하면서 따라 올라갔다. 마침 그 때가 가을이었다. 경치가 너무 아름다워서 모두들 숨이 막힐 정도이고, 탄복을 하는 입장인데, 그것을 보고 아무것도 볼 것도 없고 느낄 것도 없고 깨달을 것도 없다 하면서 불평을 토로하면서 가는 것을 보고 제가 많이 깨달았다.
그분에게는 미안하지만 그분의 이야기를 가끔 한다.
세간에는 즐길거리가 많고 사람마다 다 즐기는 것이 다르고 아주 다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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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는 그 모든 즐거움 중에 성스러운 적멸락이 가장 훌륭하다고 하였다.
적멸락, 고요한 상태, 어떤 아름다운 것을 보고, 어떤 좋은 것을 가지고 즐긴다 하더라도 그 모든 것이 다 조용해진 자리, 적멸한 자리, 무심한 자리 그 자리가 가장 훌륭하다. 그것은 법성(法性)과 계합하기 때문에 그렇다. 법의 성품, 진리의 본성과 계합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넓고 큰 법성(法性) 중에 머물게 하니
라고 하였다.
묘안[善目] 천왕이 이것을 보았네.
여래출현변시방(如來出現徧十方)이여 보응군심이설법(普應群心而說法)하사
일체의념게제단(一切疑念皆除斷)하시니 차묘당관해탈문(此妙幢冠解脫門)이로다
여래께서 온 시방에 출현하시어
널리 중생들의 마음에 응하여 설법하사
모든 의심을 다 끊어 없애시니
이것은 묘보당관 천왕의 해탈문이로다.
여래께서 온 시방에 출현하시어
곳곳에 여래는 출현해 계신다.
널리 중생들의 마음에 응하여 설법하사
중생들의 마음에 딱 맞게 설법하고 계신다.
화엄경은 상설(常說) 변설(徧說)이다. 삼라만상이 항상 진리를 설하고 있고, 어디서든지 진리를 설하고 있다.
그래서 상설변설이 곧 화엄경의 참모습이다 라고 이야기 한다. 널리 중생들의 마음에 응하여 설법하사
모든 의심을 다 끊어 없애시니
어떤 의문도 답이 거기에 다 있다. 어떤 궁금한 점, 어떤 어려운 문제도 답은 다 그 가운데 다 있다.
이것은 묘보당관 천왕의 해탈문이로다.
우리 마음하나, 법성자리, 진여자리, 참마음자리, 참나인 자리에 딱 이렇게 머물고 있으면 거기에 모든 답이 다 있다는 의미다.
제불변세연묘음(諸佛徧世演妙音)이여 무량겁중소설법(無量劫中所說法)을
능이일언함설진(能以一言咸說盡)하시니 용맹혜천지해탈(勇猛慧天之解脫)이로다
모든 부처님이 온 세상에 미묘한 소리를 연설함이여,
한량없는 겁 동안 법을 설하심이라.
능히 한 말로써 모두 다 설하시니
용맹혜 천왕의 해탈이로다.
모든 부처님이 온 세상에 미묘한 소리를 연설함이여,
한량없는 겁 동안 법을 설하심이라.
시간도 한량없는 겁동안 설하신다고 했다.
부처님은 미묘한 소리로 법을 연설하는데 한량없는 세월 동안 법을 설한다.
그것이 상설변설이다. 그러한 사실을 이야기를 안해도 되는데, 화엄경이 우리들에게 일깨워줄 뿐이다.
진짜 화엄경은 시간적으로 항상 설하고 있고 공간적으로 어디서든지 설하고 있는 것이 진짜 화엄경이다.
그렇다는 것을 중생들이 모르니까 문자와 언어를 통해서 우리에게 일깨워 주는 것을 가지고 우리는 ‘화엄경이다’ 라고 이야기한다.
화엄경은 화엄경의 안내서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화엄경은, 팔만대장경 해인사에 산적해 있는 종이와 먹으로 된 화엄경은 화엄경 안내서다.
진짜 화엄경은 항상 설하고 있고, 언제든지 어디서든지 늘 설하고 있다. 우리가 귀를 막고 있고 눈을 감고 있을 뿐이다. 항상 열려 있는 마음, 열려 있는 눈, 그것만 준비되어 있으면 진리의 가르침을 항상 들을 수 있고 진리와 함께 하고 있다고 말씀드릴 수가 있다.
이런 이치를 우리가 화엄경을 통해서 알게 되니까 참 ‘역시 화엄경이 대단한 경이구나’ 하는 것을 또 알 수가 있다. 좋은 말, 진짜 진리는 이미 설하고 있는데, 사람이 말하는 것이 얼마만큼 좋은 이야기를 하겠는가?
능히 한 말로써 모두 다 설하시니
용맹혜 천왕의 해탈이로다.
세간소유광대자(世間所有廣大慈)가 불급여래일호분(不及如來一毫分)이라
불자여공불가진(佛慈如空不可盡)이시니 차묘음천지소득(此妙音天之所得)이로다
세간에 있는 광대한 자비가
여래의 가는 털 하나만치도 미치지 못함이라.
부처님의 자비는 허공과 같아서 다할 수 없으니
이것은 묘음구 천왕의 얻은 바로다.
세간에 있는 광대한 자비가
여래의 가는 털 하나만치도 미치지 못함이라.
세간에서 얼마나 불쌍한 사람, 어려운 사람을 위해서 자비를 베풀고 있는가? 그런데 그것은 여래의 가는 털 하나만치도 미치지 못한다.
부처님의 자비는 허공과 같아서 다할 수 없으니
이것은 묘음구 천왕의 얻은 바로다.
일체중생만고산(一切衆生慢高山)을 시방최진실무여(十力摧殄悉無餘)여
차시여래대비용(此是如來大悲用)이시니 묘광당왕소행도(妙光幢王所行道)로다
일체 중생들의 교만의 높은 산을
열 가지 힘[十力]으로 남김없이 다 꺾어 없앰이라.
이것은 여래의 큰 자비의 작용이니
묘광당 천왕이 행한 바 도(道)로다.
일체 중생들의 교만의 높은 산
최절인아산(摧絶人我山)하고 장양공덕림(長養功德林)이라.
우리가 이렇게 부처님의 경전을 앞에 놓고 설하고 있다.
어떤 법도 혼자 해석하는 법문은 삼가해야 한다.
부처님 이후 부처님께서 설법하신 경전이 부처님을 대신해서 있는 이상, 경전을 읽고 경전을 전해 주는 것이 법문이다. 거기에 어려움이 있으면 그것을 조금 더 풀어주고 부연설명해 주는 것, 그것이 가장 기본적인 법문 형식이고 가장 정상적인 법문의 형식이다. 그래서 법을 청할 때도 보면
차경심심의(此經甚深意)
대중심갈앙(大衆心渴仰) 이렇게 한다.
‘이 경전의 깊고 깊은 뜻을 대중들은 목이 말라서 물을 찾듯이 우러러 보고 있습니다.’
유원대법사(唯願大法師)
‘오직 원하옵나니 큰 법사께서’
광위중생설(廣爲衆生說)
‘널리 중생을 위해서 설해주십시오.’
그것이 원칙으로 다 정해져 있다.
그런데 그런 원칙을 지키려고도 하지 않고, 그런 원칙이 있는 줄도 잘 모른다. 그것이 안타까운 일이다.
모르니까 경전은 팽개쳐 버리고 자기 마음대로 이야기 하는 것이다. 거기서부터 잘못되었다.
본래 경전을 펴 놓고, 그 경전의 뜻을 부처님 대신으로 전해 주는 것이 법문이다.
차경심심의(此經甚深意)라고 했잖은가. 앞에 놓은 이 경전의 매우 깊고 깊은 뜻을
대중심갈앙(大衆心渴仰) 대중들은 마음에 목말라 하듯이 우러러 보고 있습니다.
유원대법사(唯願大法師) 오직 원하옵나니 법사께서는
광위중생설(廣爲衆生說) 널리 중생을 위해서 설해주십시오.
이것이 만고의 움직일 수 없는 철직이고 원칙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함부로 어그러뜨려서 자기 하고 싶은 이야기를 법문이라고 하면서 한다. 심지어 옛날에 절 환경이 소를 먹이기가 좋으니까 소를 몇 마리 키워서 조금 크면 시장에 갖다가 갖다 팔아서 절 운영을 하던 시절도 있었는데 장에 소팔러 갔던 이야기, 소를 팔았는데 어떻고 어떻고 그런 이야기를 법상에서 늘 한다. 그래서 ‘저 스님은 소 판 이야기만 한다’고 하는 웃지 못할 상황들도 있었다.
어떤 이들은 유행가 노래를 연결해서 법문하는 이도 있는가 하면, 처음부터 줄기차게 웃기는 이야기만 하는 사람들도 있다. 신도님들에게 웃기는 이야기 한마디씩을 하라고 강요를 하는 사실들도 있었다.
그런 것은 우리가 생각해 봐야 할 일이다.
경전을 놓고 공부하는 이 일은 최절인아산(摧絶人我山)이다. 나다 너다 하는 아만심, 아상(我相) 그것 꺾어버리자는 것이다. 나를 없애자고 하는 것이다.
반야심경 270자를 한 마디로 번역하면 ‘나는 없다’가 아닌가.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런 뜻이다.
‘내가 처음부터 공(空)하다’고 하는 것까지는 욕심낼 것이 없고, 우선 ‘나는 없다’ 나는 바람에 눕는 풀처럼 자기 자신을 낮추는 노력이 바로 경전을 앞에 놓고 산림을 하는, 경전 공부를 하는 목적이다.
그리고 장양공덕림(長養功德林)이라.
인아산이라고 하는 나니 너니 하는 높고 높은 생각이 무너져야만 장양공덕림이다. 공덕의 숲이 자꾸 자라난다.
그것이 경산림을 하는 목적이다.
으레 법문할 때 그런 말을 많이 한다.
열 가지 힘[十力]으로 남김없이 다 꺾어 없앰이라.
여기도 보면 일체 중생들의 교만의 높은 산을 열 가지 힘으로 남김없이 다 꺾어 없앰이라.
열 가지 힘은 부처님이다.
부처님은 여러 가지로 표현하지만 십력(十力) 열 가지 힘을 가진 분이 부처님이다 해서 부처님을 대신 표현하기도 한다.
이것은 여래의 큰 자비의 작용이니
그것이 여래의 큰 자비의 작용이다.
나니 너니 하는 아상을 꺾어버리는 것이다.
생각해 보면 나를 내세울 것이 뭐가 있는가? 별로 없다.
정치인들을 두고 아무리 어떻다 어떻다 하더라도 나는 사실 그들만도 못하다. 못해도 이만저만 못한 것이 아니다. 백분의 일, 천 분의 일도 못하다. 못한다고 해서 그런 말을 하지 말라는 법은 없지만 그렇게 비교해서라도 내 아만, 내 아상을 잠재울 수 있다면 그것 또한 좋은 길이다. 내 아상을 잠자게 하는 것이 덕이다. 내 복이 되고 내 덕이 된다.
묘광당 천왕이 행한 바 도(道)로다.
혜광청정만세간(慧光淸淨滿世間)이여 약유견자제치암(若有見者除癡闇)하야
영기원리제악도(令其遠離諸惡道)케하시니 적정천왕오사법(寂靜天王悟斯法)이로다
지혜의 광명이 청정해서 세간에 충만함이여
만약 그것을 보는 이는 어리석음을 제거하여
모든 악도를 멀리 떠나게 하시니
적정경 천왕이 이 법을 깨달았네.
지혜의 광명이 청정해서 세간에 충만함이여
지혜가 세상에 환하게 비추면
그것을 보는 이는 어리석음을 제거하여
태양이 뜨면 밤의 어둠은 저절로 물러가게 되어 있다.
지혜의 광명과 어리석음의 밤 캄캄함 이것을 늘 대비해서 경전에서는 자주 이야기를 한다.
모든 악도를 멀리 여의게 한다
악도가 무엇인가?
중생들의 어리석음에서 오는 삶의 부정적인 요소들이다. 생활하는 데 부정적인 요소가 전부 악도다.
크게 나쁜 짓을 하고 큰 죄를 범해서 악도가 아니라 우리가 살면서 실수하는 것들, 부정적인 요소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런 것이 전부 지혜의 광명이 없어서 그렇다는 것이다.
적정경 천왕이 이 법을 깨달았네.
모공광명능연설(毛孔光明能演說) 등중생수제불명(等衆生數諸佛名)하사
수기소락실득문(隨其所樂悉得聞)케하시니 차묘륜당지해탈(此妙輪幢之解脫)이로다
모공(毛孔)에서 내뿜는 광명이
중생들의 수와 같은 부처님의 명호를 연설하사
그 즐기는 바를 따라서 다 듣게 하시니
이것은 묘륜장엄당 천왕의 해탈이로다
모공(毛孔)에서 내뿜는 광명
부처님의 모공에서 내뿜는 광명이
중생들의 수와 같은 부처님의 명호를 연설하사
중생수와 똑같은 부처님의 이름을 연설하고 있다. 어디에서 연설하는가? 모공에서 한다. 모공에서 내뿜는 광명, 그것이 뭔가? 두두물물 삼라만상 일체 산천초목이다. 거기에서 중생들의 수와 똑같은 부처님의 명호를 연설하고 있다.
‘계성변시광장설(溪聲便是廣長舌) 시냇물 소리가 그대로 부처님의 광장설법이다
산색기비청정신(山色豈非淸淨身)가, 저 산천초목은 어찌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이 아니던가?’
소동파 거사님이 툭 터진 그 소리 한 마디를 했다.
만고에 절창이다. 그런 표현이 어디에 있는가?
그 즐기는 바를 따라서 다 듣게 하시니
산에 산책을 하다가 특히 요즘 같은 가을, 조금 있으면 단풍이 들어서 형형색색 더 고와진다. 그러면 저절로 ‘나무대자연보살마하살 나무대자연보살마하살 나무대자연보살마하살’ 사방으로 돌아가면서 절을 안할 수가 없다.
저는 해인사 선방에 있을 때 산책하는 시간에 쓰윽 나가서 산책을 하곤 했다. 맑은 공기와 청정한 풍경들, 그런 것들이 저절로 그 소리가 나오게 한다. 그래 사방을 향해서, 곳곳을 향해서 어떤 방향이 됐든 돌아가면서, 꼭 남이 보면 조금 정신이 이상한 사람처럼 합장하고 절을 하면서 ‘나무대자연보살마하살 나무대자연보살마하살 나무대자연보살마하살’ 한참을 읊조리곤 했다. 절을 하고 내려가다 또 풍경에 감동을 하면 ‘나무대자연보살마하살’ 하고 절을 했던 경험들이 수차 있다.
화두만 들고 가는 것만이 꼭 좋은 공부겠는가?
자연과 혼연일체가 되고 거기에 감동을 해서 그런 느낌이 오면 그렇게 표현하는 것, 그것도 바람직한 모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여래자재불가량(如來自在不可量)이여 법계허공실충만(法界虛空悉充滿)하사
일체중회개명도(一切衆會皆明覩)케하시니 차해탈문화혜입(此解脫門華慧入)이로다
여래의 자재함을 헤아릴 수 없음이여
법계와 허공계에 모두 충만하사
모든 법회에서 다 보게 하시니
이 해탈문은 화광혜 천왕이 들어갔도다.
여래의 자재함을 헤아릴 수 없음이여
법계와 허공계에 모두 충만하사
여래의 자유자재한 것이 너무 헤아릴 수 없이 많아서 법계와 허공계에 가득하다.
법계에 가득한 것이 그대로 여래의 자유자재한 모습이다.
모든 법회에서 다 보게 하시니
사심이 없고, 잡된 망념이 하나도 없이 가라앉아서 산천초목을 바라보면 그대로 법계와 허공계에 부처님의 자재함이 다 드러난 것을 느낄 수가 있다.
그래서 그 느낌의 표현으로 ‘나무대자연보살마하살’ 이렇게 이야기가 나오는 것이다.
여러분들, 방안에 앉아서도 그렇게 느낄 수 있다.
그렇게 하셔도 좋다.
밖에 나가서 요즘 같은 청명한 가을 하늘 가을 산천을 거닐면서 곳곳에, 남이 미쳤다고 하든 정신이상자라고 하든 아무 상관없다. 그 사람이 내게 밥먹여 준적이 있는가? 라면 한 그릇을 사준 적이 있는가? 커피 한 잔 사준 적이 있는가? 설사 사준 적이 있다 한들 그것하고 아무 관계없이 그저 내 느낌대로 표현하는 것이다.
그것이 인연이 되어서 잘 깨우칠 수도 있다.
여래의 자재함을 헤아릴 수 없음이여
법계와 허공계에 모두 충만하사
모든 법회에서 다 보게 하셨다.
무량무변대겁해(無量無邊大劫海)에 보현시방이설법(普現十方而說法)하사대
미증견불유거래(未曾見佛有去來)니 차묘광천지소오(此妙光天之所悟)로다
한량없고 끝도 없는 오랜 세월 동안
시방에 두루 나타나서 법을 설하시나
부처님은 가고 옴이 있음을 보지 못하였네.
이것은 인다라묘광 천왕의 깨달은 바로다.
한량없고 끝도 없는 오랜 세월 동안
시방에 두루 나타나서 법을 설하시나
부처님은 가고 옴이 있음을 보지 못하였네.
이미 와 계시고, 감도 없이 가고, 옴도 없이 오고, 사실은 늘 여여한 그 자리다.
우리는 나니, 너니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 이것으로 꽉 쩔어 있어서 눈앞에 나타난 현상들만 계산을 한다.
작은 것을 계산하다가 큰 것을 다 잃어버린다.
중생들은 그릇이 작아서 늘 그렇게 산다.
공부를 제대로 해서 마음이 툭 터져 버리면 경계가 없어진다. 너니 나니 하는 경계가 없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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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량없고 끝도 없는 오랜 세월 동안 시방에 두루 나타나서 가고 오고, 간 것도 아니고 온 것도 아닌데, 그것을 간 것도 아니고 온 것도 아닌 것을 보지 못한다.
2600년 전에 석가모니 부처님이 이 땅에 오셨다. 그래서 어떻게 일생을 사시다가 열반에 드셨다. 그리고 그 열반 이후 제자들이 어떻게 불법을 펴고, 부처님의 사리를 모시는 탑을 세우고 곳곳에 불상을 세우고 신앙의 대상으로 모시고 지금까지 내려온다.
이런 불교가 쉽기는 하다. 쉽기는 하지만,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것 그것만이 부처님이라면 너무 왜소하지 않은가?
그래서 제대로 깨달으신 분들은 이렇게 대승경전으로써 부처님을 표현한다. 이 대승경전이 나와서 부처님의 진면목, 불교의 참 면목을 시원하게 표현하고 있다.
이것이 진정한 불교다.
초기불교 근본불교 그것만 가지고 불교라고 해서는, 대승불교가 만약에 일어나지 않았다면 참 큰 손해를 볼 뻔했다.
사실 그럴 일은 없었을 것이다.
왜냐, 부처님이 깨달으신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른 뒷사람들이 많이 나왔기 때문이다.
깨달음에 이른 그들을 보살이라고 하고, 세월이 흘러가다 보니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깨달은 것을 근거로 해서 그분들이 거기에서 더 발전시키고 더 크게 성장시켜놓은 불교가 대승불교다.
한 예로써 우리는 지금 스마트폰의 여러 가지 기능을 아주 편리하게 쓴다. 요즘 같은 스마트폰이 나오지 않고 옛날의 유선전화 청색전화 백색전화 하는 유선전화만 집에 있다면 비교해 보라. 얼마나 큰 차이가 있는가?
초기불교는 유선전화와 같은 것이고, 대승불교, 아주 툭 터진 소견으로 진리를 설해놓은 화엄경이나 법화경이나 유마경같은 대승불교는 오늘날 아주 발달한 스마트폰과 같다. 정말 스마트한 전화기와 같은 것이다.
이런 비유를 들어서 제가 자주 말씀드리는데 오늘 이야기가 대승불교와 근본불교의 차이점과 연관시켜서 좀 이야기를 해봤다.
40분의 시간이 흘렀다. 너무 길면 지루해하고 사람들이 싫증을 낸다. 지금 60명이 넘는 분이 동참을 해서 공부하고 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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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에서부터 오신 분들을 살펴보겠다.
많은 분들이 동참을 하셔서 화엄법석을 빛내주셨다.
염화실 TV는 내일부터 하기로 했는데 오늘 스님들이 코로나 때문에 공부를 못한 바람에 이렇게 오늘 화엄경 공부를 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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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일증휘(佛日增輝) 법륜상전(法輪常轉)
불일증휘(佛日增輝) 법륜상전(法輪常轉)
불일증휘(佛日增輝) 법륜상전(法輪常轉)
부처님의 태양은 더욱더 밝게 빛나고
진리의 수레바퀴는 쉬지 않고 항상 굴러가서
중생들의 어리석음을 거둬가 주십시오.
성불하십시오.
첫댓글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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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 _()()()_
불일증휘(佛日增輝) 법륜상전(法輪常轉)
불일증휘(佛日增輝) 법륜상전(法輪常轉)
불일증휘(佛日增輝) 법륜상전(法輪常轉)
부처님의 태양은 더욱 더 밝아지고
부처님의 태양은 더욱더 밝게 빛나고
진리의 수레바퀴는 쉬지 않고 항상 굴러가서
중생들의 어리석음을 거둬가 주십시오.
어른스님의 염원이 바로 내 몸을 스칩니다.
항상 건강하시고 오래토록 저희들을 보살펴 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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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 戒香ㆍ定香ㆍ慧香ㆍ解脫香ㆍ解脫知見香!
@釋대원성 고맙습니다^^
@釋대원성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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華嚴經은 華嚴經의 안내서다.
大方廣佛華嚴經 大方廣佛華嚴經 大方廣佛華嚴經... 고맙습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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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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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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