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에도 많이 나왔지만, 영조의 손자이자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는 조선에서 제대로 정치를 한 마지막 임금이라고 알려져 있다. 정조는 참으로 뛰어난 능력을 가진 왕이었는데, 한의학에도 무척 조예가 깊었다.
200년 전의 ‘동의보감’을 새롭게 분석하여 구성한 ‘제중신편’이라는 책을 저술할 정도였는데, 더불어 자기주장도 매우 강했기 때문에, 어의와 심심찮게 논쟁을 벌이는 장면이 나온다. 특히 정조가 사망할 무렵의 ‘왕조실록’은 거의 정조와 어의들의 논쟁으로 이루어져 있다.
‘왕조실록’에 의하면 정조의 사망 원인은 정조의 머리와 등에 생긴 종기다. 정조가 내의원 제조를 불러 진찰을 받은 것은 6월14일인데, 이때까지만 해도 상태가 많이 좋아졌다는 진단을 받았다. 그러나 6월23일이 되어 종기가 계속 번져 큼직한 벼루만 한 종기가 등 전체로 퍼져 서너 되의 피고름이 나올 지경이 되자, 정조는 다른 실력 있는 의사를 찾아서 자신의 병을 고치라는 명령을 내린다. 이미 이때부터 어의들의 실력을 믿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날 밤에는 정조가 잠이 들었을 때 피고름이 저절로 흘러 요에까지 번진 양이 몇 되가 넘었다.
이어서 25일부터 본격적으로 어의들과 논쟁이 생기게 된다. 정조는 “이미 많은 고름이 나왔는데도 계속 당기고 아픈 증상이 있으며, 피를 많이 흘렸는데도 식욕이 없어 음식 생각이 나지 않으며, 몸에 열 기운이 너무 많다”라고 증상을 얘기하면서, 이 증상에 대해 어의들에게 답을 요구한다. 어의들은 몸이 낫고 있는 좋은 증상이라면서 열을 식히는 약을 사용하지 말고 기운을 돋우는 생맥산이라는 처방을 사용하자고 얘기한다. 그러나 정조는 약리에 밝지 못한 의관만 있다고 핀잔을 준다. 오히려 인삼이 들어 있으면 번열이 더할 것이니, 열을 식히는 소요산과 혈을 보하는 사물탕을 합방하는 것이 옳다고 의견을 제시한다.
26일에는 싸움이 절정에 이른다. 어의들은 정조가 호소하는 열증은 원기가 허해서 생기는 허열이기 때문에, 차가운 약 대신 허열을 치료하는 처방을 제시한다. 그러나 정조는 자신이 열이 많은 체질이기 때문에 이러한 처방을 복용할 수 없노라고 거부한다. 이어서 제시되는 생맥산이나 경옥고 등의 보양 처방도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거부한다. 그러다 연훈방을 사용한 후 증세가 조금 호전되는 듯하니, 마지못해 경옥고에 지황(地黃)의 양을 배로 늘려 차가운 약성을 증가시킨 약을 먹는다.
그러나 이미 늦었던 듯. 경옥고를 먹은 정조의 정신이 몽롱해지기 시작했다. 27일에 어의들은 인삼의 양을 대폭 늘린 가감팔물탕 등의 처방을 제시하지만, 정조는 계속 거부하다가 간신히 받아들인다. 이후 따뜻한 성질을 지닌 인삼과 생강의 양을 높이고자 하는 어의의 의견은 무시되고, 전국에서 실력 있는 의사들이 왕진하게 만든다. 그러나 모든 의사들의 진맥이 자신의 주장과 다르게 나타나자, 정조는 더욱 불신에 빠졌다고 한다.
급기야 28일에 정조는 혼수상태에 빠지는데, 이때 나선 인물이 왕대비 정순왕후였다. 그녀는 정조의 증세가 영조의 증세와 비슷하다면서 ‘성향정기산(星香正氣散)’이라는 처방을 쓰게끔 한다. 이미 왕 스스로가 의사에 대해 심한 불신감을 가지고 있어 알맞은 치료가 진행되지 않은 데다, 엉뚱하게 중풍치료용 성향정기산이 투약되었다니, 그 치료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쯤은 충분히 짐작할 만한 일이다. 세상의 어느 일이든지 전문가의 의견을 배제한 채, 말 잘하고 목소리 큰 사람의 의견대로 흘러가게 되면 그 일은 필히 망할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