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산초당의 천일각 1974년에 동쪽 산마루에 지었다. 백련사로 가는 산길에 있는 천일각에서는 강진만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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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역사에서 다산 정약용만큼 다방면에 걸쳐 두각을 드러낸 인물도 없을 것이다. 그는 정원과 식물 분야에도 조예가 깊었다. 다산은 강진으로 유배 오기 전에 궁궐의 정원뿐만 아니라 경기도와 강원도 이남의 수많은 누정과 별서, 원림 등을 보아왔다.
남다른 안목의 대정원가
다산은 영조 38년인 1762년 음력 6월 16일에 태어났다. 다산은 어렸을 때부터 명승지를 돌며 시를 짓곤 했다. 열다섯 살이던 1776년에 아버지 정재원이 전라도 화순으로 부임하자 동림사에서 독서하며 지냈다. 이때 화순의 적벽과 물염정, 서석산 등을 탐방했다고 한다.
▲ 여유당 남양주에 있는 정약용의 생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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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 때에는 광주의 경양지를, 19세 때에는 경상도 예천과 선산 일대의 누정을, 그리고 합천의 함벽루, 진주의 촉석루까지 탐방했을 정도로 각 지방의 수려한 산수와 누정을 탐방했다. 다산은 이러한 다양한 활동과 경험으로 훗날 남다른 산수관과 정원에 대한 안목을 키운 것으로 보인다.
20대에도 남양주의 수종사를 비롯해 한명회의 별서인 압구정, 300여 가지의 꽃과 나무가 있었다는 오승지의 용진별서, 송동(松洞)이라 불리던 송시열의 저택뿐만 아니라 과천, 경주, 영천, 울산, 안동, 단양 등을 두루 유람했다. 30대에도 벼슬을 하면서 틈틈이 산수를 유람하고 시를 남겼다.
▲ 다산초당의 가을 무엇보다 다산초당을 조성할 당시의 화초나 채원 등의 여러 가지 정원 요소와 특징을 되살리는 것이 중요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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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중에서 다산이 정원에 대해 남다른 식견을 가졌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이 있다. 규영부교서로 일하던 1795년 봄, 그의 나이 34살 때였다. 정조가 창덕궁 후원의 부용정에서 베푼 연회에 다산이 참여한 것이다. 다산은 당시 연회의 모습을 <부용정시연기芙蓉亭侍宴記>로 남겼는데, 이때 본 부용정 연못을 훗날 다산초당을 조성할 때 참고했던 것으로 보인다.
36살 때인 1797년에는 한양의 명례방에 있던 자기 집 뜰에 석류, 매화, 치자, 동백 등 10여 종의 식물을 36개의 화분에 심고 대나무를 둘러 난간을 만들어 분재원을 조성했다. 또한 곡산 부사로 봉직하고 있던 1797~1798년에는 정각을 짓고 뜰에다 연못을 판 후 목단과 작약 등의 꽃과 나무를 심어 정원을 꾸미기도 했다. 이것이 <서향묵미각기(書香墨味閣記)>로 전해진다. '서향묵미각'은 못가에 세운 누각을 말한다.
▲ 다산초당 다산은 1800년 6월 28일에 정조가 승하하고 이듬해에 순조가 즉위하자 천주교 사건에 연루되어 강진으로 유배를 오게 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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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련사 정약용은 백련사의 혜장선사와 초의선사와도 인연을 쌓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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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배를 와도 버릴 수 없는 산수 탐방
다산은 유배를 와서도 어렸을 때부터 몸에 밴 산수를 탐방하는 벽을 버릴 수 없었던 모양이다. 44살(1805년) 때에는 보은산방에 기거하면서 혜장선사와 지기가 됐고, 48살(1809)에는 초의선사와도 인연을 쌓았다. 50살(1811)에는 덕룡산에 있는 윤개보의 별서를 찾아 <조석루기>를 남기기도 했다.
이처럼 다산은 산수 탐방과 유람으로 40여 년간 각지를 누비면서 높은 안목과 다양한 경험을 쌓았다. 다산은 당시의 조경기법을 총망라하여 다산초당을 아름다운 원림으로 직접 가꿨다. 물론 다산초당은 유배지에서의 원림인 만큼 소박한 미가 있는 다산만의 정원이었다. 대정원가였던 다산은 유배가 끝난 1819년에는 <아언각비>를 지어 식물 19종의 이름을 고증하여 바로잡기도 했다.
▲ "정석" 각자 바위에서 본 다산초당 다산은 산수 탐방과 유람으로 40여 년간 각지를 누비면서 높은 안목과 다양한 경험을 쌓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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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산초당의 동백 다산은 고행에 돌아와서도 다산초당을 그리워했다. 동백은 무성하게 우거졌는지, 차는 잘 자라는지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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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8년 9월, 정약용은 18년간의 유배생활을 마치고 고향인 열수(洌水)로 돌아왔다. 다산은 그곳에서도 다산초당을 그리워했다. 편지를 띄워 안부를 묻거나 열수를 방문한 유생들에게 그간의 사연을 다 듣고선 되묻곤 했다. 동암의 이엉은 이었는지, 붉은 복숭아가 말라 죽진 않았는지, 우물가의 수석은 무너지지 않았는지, 연못 속 잉어는 더 컸는지, 차는 따서 말렸는지, 꽃은 잘 피는지, 동백은 무성하게 우거졌는지, 차는 잘 자라는지 (…)
다산은 자유로운 몸이 된 후에도 여전히 자연과 벗하며 살았다. 그러다 1836년 2월 22일 75세로 세상을 떠났다.
▲ 다산초당도 다산이 머물던 당시의 다산초당 풍경이 아주 상세하게 그려져 있다. 그런데 지금과는 더러 다른 부분이 있어 눈길을 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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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초당도'로 본 다산초당의 어제와 오늘
다산은 <백운첩>을 만들며 초의선사에게 '백운동도'와 함께 '다산초당도'도 그리게 했다. '다산초당도'에는 다산이 머물던 당시의 다산초당 풍경이 아주 상세하게 그려져 있다. 그런데 지금과는 더러 다른 부분이 있어 눈길을 끈다.
우선 기와집이 그러하다. 다산초당은 원래 초가집이었으나 1958년에 기와지붕으로 바뀌면서 옛 정취를 잃고 말았다. 연못도 예전엔 상지와 하지 두 개였는데, 지금은 하나만 있다. 지금과는 달리 초당의 둘레에는 담장이 둘러쳐 있었고, 석가산은 연못 가운데가 아니라 언덕 위에 있었다.
▲ 다산초당 다산초당은 원래 초가집이었으나 1958년에 기와지붕으로 바뀌면서 옛 정취를 잃고 말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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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암 동암에는 ‘보정산방(寶丁山房)’이라는 편액이 있다. ‘정약용을 보배롭게 모시는 산방’이라는 뜻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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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지금의 초당 가운데에는 마루가 있어 연못과 화초를 감상하는 구조로 맞지 않다. 무엇보다 다산초당을 조성할 당시의 화초나 채원 등의 여러 가지 정원 요소와 특징을 되살리는 것이 중요하다. 옛 모습대로 제대로 복원이 되어야 단지 유배지로만 알고 있는 다산초당을 다산이 꿈꾸었던 세계와 철학이 담긴 원림으로 기억할 것이다.
지금의 '다산초당(茶山草堂)' 네 글자는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1786~1856)의 글씨를 집자한 것이다. 1974년에 지은 동암에는 '보정산방(寶丁山房)'이라는 편액이 있다. '정약용을 보배롭게 모시는 산방'이라는 뜻인데 중국의 옹방강이 소동파를 좋아해서 '보소재(寶蘇齋)'라 했고,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1786~1856)가 담계 옹방강을 기려 '보담재(寶覃齋)'라는 당호를 쓴 데서 비롯됐다. 보정산방은 옹방강과 친분이 두터웠던 추사의 글씨로 다산의 제자들이 부탁해서 쓴 글로 보인다.
▲ 보정산방 동암에는 ‘보정산방(寶丁山房)’이라는 편액이 있다. ‘정약용을 보배롭게 모시는 산방’이라는 뜻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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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초당은 백운동, 소쇄원, 명옥헌 등과 여러모로 닮았다. 위아래 두 연못에 물을 끌어오고, 화계를 두어 꽃과 채소를 심고, 암벽에는 글자를 새기고, 구역을 나누어 꽃과 나무를 심었다. 호남의 옛 정원에서 볼 수 있는 공통된 특징이다.
다산팔경 |
다산은 초당의 풍경을 다산팔경(茶山八景)으로 삼고 시로 읊었다. 담을 스치는 작은 복숭아나무(불장소도拂墻小桃), 문발에 부딪히는 버들가지(박렴류서撲簾柳絮), 봄 꿩 우는 소리 듣기(난일문치暖日聞雉), 가랑비에 물고기 먹이 주기(세우사어細雨飼魚), 아름다운 바위에 얽힌 단풍나무(풍전금석楓纏錦石), 못에 비친 국화꽃(국조방지菊照芳池), 언덕 위 대나무의 푸르름(일부죽취一埠竹翠), 골짜기의 소나무 물결(만학송파萬壑松波)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