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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 있는 빛
자명
그는 이미 나목(裸木)이 되어 있었다. 충격도 아니었다. 왜였을까? 그의 주검 앞에서 문득 '케테 콜비츠'의 판화가 오버랩 되어 온다. 너무나 자연스럽고 편안한 주검의 형상들이 친숙하게 다가왔던 그의 흑색 판화들이 뇌리에서 맴돌고 있었다. 손을 내미는 모습, 살아 있는 자들 옆에 초연한 일상으로, 또는 갑자기 운명을 맞이하는 형상들을 음각한 주검의 표현은 편안하다 못해 평화 그 자체였다. 그랬다. 그 작가는 울부짖고 절망했던 우리들의 죽음에 대한 인식을 철저히 배반하고 있었다. 먼저 떠난 자식을 앞에 두고 망연히 서 있는 부모들 앞에, 아니 그 아내, 우리를 그대로 둔 채 떠나고 남겨진 사람들을 초연하게 음각으로 묘사한 작가는 어떤 사상과 의도였을까. 한 젊은 유명한 작가의 주검을 두고 콜비츠의 판화를 생각하며 나는 영안실에서 꿈꾸고 있었던 것이다.
남아있는 자들은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 금시 망각하고 만다. 그러나 많은 시간들이 지나가고, 추억들이 새로워지면 기억 저편의 정지된 것들은 큰 무게로 우리를 찾아오는 것이다. 드러나지 않음 속에서 침묵으로 짧은 생을 마감한 어느 작가를 애써 더 선명한 기억 속에 잡아 두려 함이 부질없는 짓일지 모른다. 그러함에도 애써 그것을 붙들어 두려 함은 더 이상 그리움의 대상으로만 머물러서 안 된다는 혼자만의 절박함 때문이다. 그는 이제 나목이 되었다. 온전한 독립영혼의 색채 또한 비오는 날의 나목이 아니던가.
살아오면서 수많은 인연으로 만나 정을 나누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연락이 단절된 이웃들이 많다. 살아 있는 동안 다시는 만나지 못할 사람들일지라도 어느 하늘 아래 살고 있는지 늘 안녕이 궁금해지지만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은 가슴에 남아 있을 뿐, 그리움조차 소용없는 일이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내 문학에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은 두 분이었다. 죽음을 말하기에는 너무 이른 열정이 남달랐던 그 분들은 이미 세상을 떠나고 없다. 떠난 분들이 남긴 족적의 흔적들이 결코 적지 않았음에도 잊혀져가고 있는 현실의 안타까움에 그 중 한 분을 반추해 보려 한다.
이균영/李均永(1951-1996) 소설가이자 역사학자. 전남 광양 출생. 77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소설당선. 84년 이상 문학상(어두운 기억의 저편)을 수상하였다. 요절하기까지 동덕여대 교수로 재직하는 동안 역사문제연구소(역사비평)편집위원으로 한국의 독립운동연구, 근대 역사를 정립하고자 고뇌하였다. 한국독립운동사 중에서도 "신간회연구"에 뚜렷한 업적을 이루어 우리 역사를 바로잡았다는 평과 함께 역사학술 부분 최고 권위의 제8회 "단재 학술상"을 받았다.
이 “신간회연구”는 일제강점기 사회연구에서 좌우익 어느 한쪽에도 치우치지 않은 “신간회”의 실체를 밝힌 최초의 본격연구서이며, 새로운 역사에 대한 지침서이기도 하다. 또한 그의 소설이 프랑스어와 영문으로 번역되어 우리문학을 세계에 알리는 선도의 공도 적지 않았다. 그는 진보적 역사학자로 민주화 투쟁에 앞장서 의로운 자들의 편에 서기를 주저하지 않았으며, 군부독재시절 민주화를 간구하는 모임이나 단체, 그 행동의 중심에 늘 그가 서 있었다. 문학과 역사 양면에서 뛰어난 재능과 그 성과를 인정받던 중, 그는 마흔 다섯이란 짧은 생애를 마감하였다.
84년도 이상 문학상 발표는 신선한 충격으로 문학 지망생이나 기성작가들에게 큰 반향을 일으킨 문학계의 대 사건이었다. 문단에 잘 알려지지 않았던 신인으로 33살 나이에 최고의 문학상을 수상한다는 것이 충격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활동했던 동인회 “날개” 에서는 주요 수상작을 토론하는 모임이 있었는데, 그 때, 이상 문학상 “어두운 기억의 저편”을 토론하면서 이 작가를 알게 되었다. 권위 있는 문학상으로는 참신성의 미흡, 주제의 진부성 등, 분분한 의견들이 많아 그 작품을 몇 번이고 정독한 탓에 작가에 대한 기억이 유달랐다.
그 후 난 결혼을 하였고, 잠시 문학공부를 멀리하고 있었던 가장 암울한 시기였다. 사업을 하는 지인에게 아내와 난 보증을 서 주었고, 그 친구가 파산하여 그 후유증으로 혹독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을 때였다. 우연히 시내버스 짐받이에 놓여 있던 헌 신문에서 그의 칼럼 "역사는 소시민이 만들어 간다"를 읽었다.
"우리의 역사는 몇 번의 확인을 통해 고쳐져 새롭게 써야 하며, 그 진실은 소시민들이 알고 있다"라는 역사 앞에 대중의 참여를 주장하는 강한 사회성을 내포하고 있는 그의 논조였다. 양심이 숨죽이던 군부독재시절 지성인을 향한 그의 메시지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의 칼럼을 읽자마자 편지를 보냈다. 바로 답장을 보내 준 그는 시간이 허락되면 한 번 만나자고 했다. 자정이 가까워지는 시간까지 대학 연구실에서 나를 기다리던 그는 한 겨울임에도 전기난로 하나를 두고 원고정리를 하다 반겨 주었다. 유난히 맑은 눈빛, 작은 행동 하나에도 겸손이 자유스럽고, 주로 상대의 말을 들어주는 편이었다. 겉으로 풍기는 그 잔잔함 속엔 내공의 강한 흐름이 있었다. 우리의 첫 만남은 그렇게 시작 되었다. 시위 전력으로 대공과 형사들의 감시와 빛 독촉에 시달리며 혼돈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내게 그는 빨리 다시 자본의 중심으로 들어가 빨리 경제적 자유를 찾으라고 채근했었다. 나는 그의 의견에 동조하여 안정된 직장에서 금융의 중심 여의도로 들어갔지만 정신의 공허감은 쉬 지워지지 않았다. 마음의 공허가 클 때마다 그의 캠퍼스 연구실로 달려갔다. 그는 자정이 넘은 시간에도 신간회에 관한 논문을 준비하거나 때론 원고를 손보고 있다가 불쑥 초고를 건네주곤 했다. "역사에 문외한인 내가 뭘 알아서"라고 거절하면 "모르는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글이 가장 좋은 글" 이라고 강변했다. 그리고 언젠가 술자리에서 자기를 형이라고 불러 달라고 주문하였다. 교수나 작가 호칭은 사람냄새가 없고, 허세로 감싸 있어 왠지 거부감이 든다고 했다.
그를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모 신문사에 칼럼을 발표했는데, 그것을 본 형은 못 마땅해 하며 충고를 잊지 않았다. “삶을 진취적으로 치열하게 살면서 원하는 위치까지 오른 다음 글을 써도 늦지 않다”라고 호되게 나무랐다. 한 가지도 제대로 한 게 없으면서 허명에 집착할 수 있다면서 적잖은 핀잔을 주었는가 하면 성공하는 현실참여가 곧 문학이고, 주제이며, 행동으로 이미 작품을 쓰고 있는 중이라고 말했다.
우리가 더 가까워진 계기는 "신간회연구"자료 수집을 위한 전국일주에 동행하면서다. 신간회 창당 당시에 관여했던 생존자들의 살아 있는 증언을 직접 듣고, 그 현장을 취재하기 위해 전국을 순회하는 일정에 함께했었다. 그 전에도 그는 관련 자료들을 찾아 전국 순회를 몇 번 했던 터였다. 어느 지역에서는 신간회 활동이 좌익으로 오인되어 평생을 고통 받고 살아온 사람들에게 그 사실을 옳게 규명하였는가 하면 잘못된 사료들을 고쳐 쓰게 했다. 그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사, 그 중에서도 특히 “신간회” 실체에 대해 정확한 역사기록을 새롭게 고쳐 쓰려했다. 그 동안 잘못 발표되었던 역사 논문이나 사료들을 체계적으로 재정립 하고자 모든 창작활동을 중단한 채 그것에만 매달렸기 때문이다.
경기도를 시작으로 전국일주를 향한 2주일의 긴 여정이 시작되었다. 당시 “신간회”에서 활동했던 생존자를 찾기 위해 시. 군 문화재 담당자나 지역 문화원을 방문하여 그 곳에 남아있는 기록을 토대로 생존하고 있는 사람들을 추적하여 신간회의 이념과 활동상황, 가족관계, 성장배경 등을 취재 하고, 자료들도 수집했다.
시간이 촉박했던 우리는 하루에도 수 십 군데를 다니며, 차 안에서 빵으로 끼니를 때웠다. 그런 와중에도 여관으로 들어가면 형은 씻기가 바쁘게 그 날의 자료를 정리하고, 녹취록을 편집했다. 새벽에 눈을 떠보면 그 때까지 원고를 쓰거나 관련서적을 읽고 있었다. 한 줄 역사의 기록이 나오기까지 그 과정은 그 어떤 연구나 작품 활동과는 달라 보였다.
그 때 역사학자로서의 길이 어떤 것인지 가까이서 지켜보았다. 평소에도 형이라 부르며 따랐지만 한 번도 자세가 흐트러지거나 긴장을 늦춰 보지 못한 데는 언제나 그는 내게 큰 산으로 우뚝 서 있었기 때문이다. 직장이란 조직 서열 그 강박감 치열한 경쟁 속의 수동적 내 삶은 물질의 빈곤은 벗어나 있었지만 정신의 황폐함은 풀리지 않은 숙제였다. 그런 내게 그는 정신적으로 큰 버팀목이 되어주어 미래의 희망이기도 하였다. "현실참여의 꿈이 이루어지거든 네가 살아온 궤적을 토대로 글을 써보라"면서 새로운 이상 세계를 심어 주었기 때문이다. 형을 따라 여러 사회단체활동을 했었다. 특히 한국역사문제연구소는 학계 정치권에서도 많은 관심과 긴장의 끈을 놓지 않은 주요한 사회단체로 자리매김했었다.
“신간회 연구"를 시작한 지 7년 만에 그것을 끝낸 형은 몇 편의 소설을 발표했다. 그러는가 하면 문학도 학문도 새로움을 모색해야 한다며 자신의 한계에 고뇌하였다. 그토록 원했던 "신간회연구"을 끝내면 한가한 시간이 필요할 것으로 생각했으나 그는 더 공허해 하며 새로운 목표에 고뇌하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몇 대학의 교수들이 제자들의 논문을 베끼거나 외국 논문을 표절한 것이 발각되어 큰 사회 문제로 충격을 주었던 당시 지식인들의 가식과는 큰 대조를 이루었다.
어느 날은 술 생각이 났다며 우리 동네에 불쑥 찾아왔다. 그 때마다 늘 전철을 이용했다. 빛바랜 보자기에 책을 싸 들고 오거나 연구실에서 밤을 새운 채 부스스한 차림으로 찾아와 늦으면 집에서 자고 갔다. 내 차로 집까지 태워다 준다고 하면 절대 사양하고 전철을 탔는데, 그 것이 지금도 마음이 아리다.
새로운 학문과 작품의 한계에 고뇌하던 그는 시대적 변화가 필요하다며, 안식휴가를 얻어 파리로 훌쩍 떠났다. 시차가 다른 파리에서 걸려온 전화는 늦은 시간이거나 이른 아침이었다. 마지막 그의 목소리를 들은 것도 이른 새벽의 국제전화였다. "곧 한국에서 만나자"라는 목소리를 들은 3일 후 믿겨지지 않는 비보를 접했다. 신도시 아파트 지역임에도 귀뚜라미가 요란스럽게 울어 대던 늦가을 자정 무렵.
광주민주화 운동으로 투옥되었고, 고등학교 때부터 군사독재반대투쟁을 해 왔던 B국회의원과 저녁을 함께 하고 막 집으로 들어와 사망했다는 전화를 받았다. 그 날 저녁시간 내내 B의원과 그의 이야기를 했었다. 귀국 파티를 걸쭉하게 열어 주자고 기뻐하던 그 시각 그는 이미 저 세상 사람이 되어 영안실에 있었던 것이다. 죽음이란 예고 없이 누구에게나 다가 올 수 있는 엄연한 사실임을 확인 시켜 준 것이다.
B 국회의원 또한 형이 내게 소개를 해준 사람으로 후에 한국방송광고공사 사장을 지낸 현역국회의원이다. 굳이 B의원을 쓰는 이유는 형과 B의원은 남다른 사연을 갖고 있어서다. B의원이 광주 민주화운동 주동자로 수배되어 신촌 어느 하숙집 다락방에 숨어 있을 때, 형이 몰래 찾아가 정보를 제공하고, 도피처를 옮겨 주는 등, 뒤 바라지를 해 주었던 남다른 인연이었다. 당시 B의원이 숨어 있던 하숙집 딸은 유명대학을 졸업하고 이태리로 유학 준비를 하던 중, 수배자를 숨겨 주게 되었다. 수배자를 돌보는 동안 둘의 사랑은 싹트기 시작했고, 그를 보호하기 위해 하숙집 딸은 유학을 포기하고 하숙집 다락방에서 촛불을 켜 놓고 결혼식을 올리게 된다. 그 때의 실화가 오페라 무대에 올랐고 영화로도 만들어져 80년대 젊은이들에게 큰 반향을 일으켰던 "서울 에비타"다. 그 B의원을 형이 내게 소개해줘 셋이서 자주 어울렸던 분이기에 잠시 서술한 것이다.
사망했다는 비보를 믿을 수 없었지만 전화를 해 준 사람이 그의 동생이었기에 믿지 않을 수 없었다. 찾아간 그 곳에 그는 이미 나목(裸木)이 되어 있었다. 그는 귀국 한 다음날 시골에 계신 부모님께 귀국 인사를 드리고, 상경하여 귀가 하던 중 택시에서 사고로 변을 당한 것이다. 술이 거나해 지면 형은 이런 말을 자주 했다. "젊은 열정이 있다는 것은 고뇌할 수 있는 특권이다, 하지만 그것이 이론 속에 머물러 있다면 쓰레기나 다름없다"라고. 그건 ㅡ그가 내게 주고 간 마지막 화두가 아닌가?
*이균영의 주요저서*
-.신간회연구-단재 학술상(1993)
-.어두운 기억의 저편-이상문학상 (1984)
-.불붙는 난간(1985)
-.멀리 있는 빛(1986)
-.노자와 장자의 나라(1995)
-.유작 장편소설-"떠도는 것들의 영원"
-.동화집 "무서운 춤"-"겨울 꿈의 색상"(1986)
-.한말 애국운동(1991)
-끝-
본 헤럴드 신문에 게재
https://www.bonhd.net/news/articleView.html?idxno=15366
첫댓글 댓글로 조문하기에는 그의 죽음은 너무 아깝고 가슴 이픈 이야기입니다.
하늘도 시샘한 죽음이라고까지 했던 어느 문학지의 기사도 떠오릅니다.
이야기 잘 들어주는, 겸손한, 그러면서도 내공있는 형과의 추억을
담담한 필치로 흑백영화처럼 적어내려간 글을 읽으며
참으로 여러가지 상념에 젖어드는 밤입니다.
이 분이 살아게셨다면 당연히 저는 캐나다에 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럴 여유도 마음도 없었으니까요.
더 많은 세상을 살아보니 뭐 사는 게 별게 아니다 라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됩니다.
이렇게 글을 통해 소통함도 참 좋습니다. 대면보다 더 깊이있고 공감하게 되어서요.
글 감사합니다.
감동이 오는 글이네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부족한 글에 관심 주셔서 고맙습니다.
누구도 내일을 예측하고 예단할 수 없듯, 살다보면 참 예상치 못함을
이 글을 다시 보며 느낍니다. 소식 남겨 주셔서 감사합니다.
God takes the best ones first.
형님 떠나시고 오랫동안 방황하셨다는 말씀 기억합니다.
이균영 선생님께서 꿈꾸던 세상을 위해 좋은 일 많이 하고 계시는 아우를
하늘에서 흐믓하게 응원하고 계시지 않을까요?
좋아하는 사람들은 더러 곁은 떠나기도 합니다.
한쪽의 소홀함과 노력부족으로도요. 하지만 불가항력적으로 맞이하는 이별도 있구요.
인연은 하늘이 맺어주지만 그 인연을 인어가는 것은 노력과 배려, 애정으로 가능한다는
명구를 늘 기억하고 있었는데
그 외의 일도 이렇게 현실이 되곤 합니다.
소통하여 기쁨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