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5학년 때의 일로 기억된다. 대구 교육대학교 재학생들이 내가 다니던 산골 초등학교로 교생실습을 나왔다. 그들의 숫자는 다섯 명 안팎이었고, 남자보다는 여자가 많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들 스스로는 대학생 신분이었지만, 나에게는 엄연한 선생님들이었다.
대도시에서 젊고 아름다운 여선생님들이 왔다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설레었다. 그 선생님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 시도 지어 보여 드리고, 서예 솜씨도 뽐내 보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 선생님들은 나와 내 친구들을 불쌍한 촌놈들이라고 보아서인지,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친절하게 잘 대해 주셨던 것 같다. 그때 그 선생님들로부터 받았던 분에 넘치는 사랑은 아마도 평생 잊지 못할 것 같다.
더욱 고마웠던 것은, 그 여선생님들 중 한 분이 교생 실습을 마치고 돌아간 뒤에도, 나에게 편지와 함께 귀중한 선물을 보내주었다는 사실이다. 당시의 편지 내용은 전혀 기억에 남아 있지 않다. 다만, 그분이 보내주었던 선물만은 또렷하게 기억된다. 그것은 어깨동무라는 어린이 잡지였다. 그 때까지 어린이 잡지라고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던 나에게, 그것은 정말 대단한 선물이었다. 너무나 재미있고 신기하여, 첫 쪽부터 끝 쪽까지 샅샅이 읽었던 기억이 난다. 광고내용까지도 빼놓지 않고 읽었던 것 같다.
특히, 기억에 남는 것이 '어깨동무'의 별책 부록이었던 만화 '아톰'이었다. 난생 처음 읽는 만화가 그렇게 재미날 수가 없었다. 로봇이 뭔지도 그때 비로소 알게 되었다. 그랬던 내가 지금은 아들이 만화만 보는 것을 탐탁하게 생각지 않으니 금석지감(今昔之感)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지금 그 선생님의 소식은 알 길이 없다. 교생실습을 마치고 돌아간 직후 그 선생님이 총 학생회장인가, 여학생회장인가로 선출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것이 마지막이었다. 중키에 약간 통통한 체구의 선생님이었던 걸로 기억된다. 졸업 후 어느 학교로 부임하였을 것이고, 지금은 누군가의 아내, 그리고 어머니가 되어 있을 것이다. 이 글을 빌어, 그 선생님의 행복을 빌어 본다. 그로부터 십 몇 년 뒤 나도 서울에서 어느 중학교로 교생실습을 나갔지만, 대도시 학교이기 때문인지 그런 애틋한 사연은 남아 있지 않다. 나는 사범대학교를 다니지 않았지만, 교직과목을 이수하여 교사 자격증을 땄고, 그 과정에서 교생실습을 나갈 기회가 있었다.
나의 초등학교 시절은 도회지와의 접촉이 전무하였던 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문명의 혜택이라고는 거의 받아보지 못한 시절이기도 하였다. 초등학교 입학 직전이었던가, 아버지 몰래 어머니를 따라 대구에 있는 외가에 다녀 온 것이 유일한 도시로의 여행이었다. 그 때, 여기저기 기워 입고 있던 누더기 내복을 벗어 던지고, 이모가 사준 새 내복을 입고 기뻐 동동 뛰던 내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또 하나 기억에 남는 것은, 도회지에서부터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로 잠시 전학 왔다 간 여학생이다. 하얀 얼굴에 말투도 약간 달랐던 그녀가 왠지 아름답게 보였고, 그녀를 남몰래 짝사랑하던 생각이 난다.
나는 1973년 2월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도 텔레비전을 보지 못하였다. 중학교에 입학한 후, 면소재지에 가서 처음 텔레비전을 보았다. 텔레비전을 통해 보는 권투시합과 레슬링 경기, 그리고 배삼룡 아저씨가 나오는 코미디 프로가 그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었다. 그 전까지는 시골 동네를 돌아다니며 야외에다 가설 극장을 차려놓고 틀어주는 흑백 영화를 본 것이 전부였다. 그 영화를 보려고 밤에 이웃 동네까지 원정 다니던 일이 떠오른다. 라디오는 초등학교 시절에도 들어보았던 것 같다. 해군에 입대한 맏형이 해외여행을 다녀오면서 조그마한 트랜지스터를 한 대 사왔던 걸로 기억된다.
내가 살던 마을에 전기가 들어온 것은 그보다도 한 참 뒤였다. 나는 서울에 취직한 맏형을 따라 중학교 2학년 때 서울로 전학하였는데, 방학 때마다 내려가 보아도 여전히 전기는 들어오지 않았다. 대학에 입학한 1980년 이후에야 전기가 들어왔던 것으로 기억된다. 마을에 전기가 들어오고 텔레비전이 등장하자, 텔레비전이 없는 집 사람들은 저녁식사만 끝내면 텔레비전이 있는 집으로 달려가곤 하였다고 들었다. 전기가 들어오기 전까지 밤늦도록 호롱불 밑에서 영어 단어를 외우고, 수학 문제를 풀던 기억이 새롭다.
내가 살던 마을에서 중학교까지는 십리 길이 족히 되었는데도, 걸어서 통학하였던 것을 보면, 등교와 하교 시각에 맞는 버스 노선도 없었고, 자전거를 사서 타고 다닐 형편도 못되었던 것 같다. 당시만 해도 아침에 대구 쪽으로 나갔다가 저녁에 돌아오는 버스 한 대가 대중교통수단의 전부였다.
1974년 서울로 전학 올 때의 기억도 생생하다. 청량리역에서 내려 버스를 타고 미아리 길음 시장에 있던 형의 셋방으로 가는데, 그 도로변의 휘황찬란한 야경에 눈이 휘둥그레질 지경이었다. 말 그대로 서울은 별천지였다. 중학교에서 가르치는 공부의 내용이나 시험문제의 유형도, 청송에서 보던 것과는 크게 달랐다. 다행히, 나는 전학 후 첫 시험에서 학급 1등, 두 번째 시험에서 전학년 1등을 하여, 서라벌 중학교 전체에서 화제를 불러일으키기도 하였다. 그런 정도로 두각을 나타냈던 나이지만, 중학교 시절 선생님들에게 사랑을 받은 기억이 전혀 없는 걸 보면, 도시는 문명의 혜택 면에서는 더없이 좋을지 몰라도, 인간적인 풋풋한 정은 없는 곳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시작한 도회지 생활이 이미 30년째를 맞았다. 무려 한 세대에 걸친 도회지 생활을 하다 보니 이제는 어쩔 수 없이 도시 사람이 되고 말았다. 남들은 잘 안 바뀌는 말투마저 많이 바뀌는 바람에 고향에 내려가서 고향사람들과 어울릴 때는 조금 어색할 때도 있다. 내가 서울말에 익숙해진 것은 맏형과 단둘이 도회지로 나왔기 때문에 대부분의 시간을 서울의 또래 친구들과 지낸 데 연유한다. 대개 가족이 전부 도회지로 나오면 사투리가 잘 없어지지 않는다. 학교에서는 서울말을 쓰지만 집에 돌아오면 지방 말로 바뀌는 까닭이다. 마치 가족 전체가 이민 가서 몇 년이 지나도 영어를 못하는 것과 같다.
내가 청송 출신이라고 하면, 친구들은 개천에서 뭐가 난 셈이라고 놀리기도 한다. 청송 같은 벽촌 출신이 서울대학교 총 학생회장에 조선일보 정치부 기자까지 지냈으면 보통 출세한 게 아니라는 애정 어린 농담이다. 도시 생활은 한편으로는 온몸이 전율할 정도로 짜릿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눈에 피눈물이 나도록 서럽기도 했다. 도시의 공기는 자유를 준다는 말도 있지만, 그보다는 역시 집 떠나고 고향 떠나면 고생이라는 말이 내게는 더 실감이 난다. 객지생활, 타관생활이 고생스러울수록 고향생각은 더욱 더 간절하였다. 몸과 말씨는 도시 사람이지만, 마음은 여전히 촌놈인 것이다.
요즘은 농촌의 어린이들도 '어깨동무'와 같은 잡지를 비롯한 문화의 혜택을 그런 대로 누리면서 자라나지만, 내가 자랄 때만 해도 도농(都農) 간의 격차는 하늘과 땅의 차이만큼이나 컸던 게 사실이다. 문득 고향생각을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초등학교 시절 교생 선생님에게서 선물로 받았던 '어깨동무'여서, 그에 얽힌 소회를 몇 자 적어 보았다.
농촌이나 섬 지방 같은 곳에 책을 보내고, 도서관을 만들어 주고, 컴퓨터를 보내 주고, 장학금을 지원하고, 그곳의 혼자 사는 할머니와 할아버지, 소년소녀 가장들과 자매결연을 맺는 등의 사업이 날로 활성화하였으면 한다. 사단법인 좋은 책읽기 가족 모임이 그 대표적인 경우이다. 이 모임은 농어촌과 산간벽지, 섬 마을에 지금까지 21개의 작은 도서관을 지었다. 이러한 건전한 시민운동이 있기에 이 나라는 그래도 희망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한 사업이라면, 나도 이제 미력이나마 보탤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