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V. 한국 불교사佛敎史
1. 한국 선종사禪宗史
13) 사찰령寺刹令과 30본산제도本山制度
1910년 8월 한일합방 이후 일제는 총독부를 설치하고 식민지 조선의 통치체제를 정비하였다. 이어 종교계를 장악하기 위해 1911년 6월 3일 사찰령寺刹令을 제정制定 반포頒布한다. 그리고 7월 8일에는 시행규칙施行規則이 공포公布되었다. 사찰령은 전문 7조와 부칙으로 되어 있었으며(총독부 제령 7호), 시행규칙(총독부령 제84호)은 전문 8조와 부칙으로 되어 있었다. 내용을 보면 일제가 조선불교를 통치하는 기본 골격이 그대로 드러난다.
사찰령을 대체적으로 살펴보면 첫째, 사찰을 병합 이전하거나 폐지하고자 할 때는 총독의 허가를 받아야 하고, 둘째, 사찰 터와 가람은 지방장관의 허가 없이 전법(傳法)·포교(布敎)·법요(法要) 집행과 승려의 거주 목적 이외에 사용하지 못한다고 하였다. 즉 총독과 지방장관의 허가 없이는 일체의 수행과 포교, 의식거행을 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다.
셋째, 사찰의 본말(本末)관계, 승규(僧規), 법식(法式) 등의 사법(寺法)을 각 본사(本寺)에서 제정하도록 했고, 또한 조선총독의 허가를 받아야만 한다고 규정했다. 한국불교를 본말사법(本末寺法)에 의거하여 중앙집권적으로 통제하고, 사찰의 자주권을 박탈한 것이었다.
넷째, 사찰의 주지는 사찰을 대표하며, 그 사찰에 속하는 일체의 재산을 관리하며, 사찰의 행정과 법요(法要)를 책임진다고 했다. 결국 주지제도를 통해 사찰의 재산과 종교 활동을 통제하고자 했던 것이다.
다섯째, 각 사찰에 소속되어 있는 토지(土地)·산림(山林)·건물(建物)·불상(佛像)·석물(石物)·고문서(古文書)·고서화(古書畵) 등의 귀중품을 조선총독의 허가를 받아야만 처분할 수 있다고 규정했다. 이것은 한국사찰의 재산권을 침해하는 조치였다. (오경후(한국불교선리연구원 선임연구원),「민족불교 성지 선학원 역사를 되짚다, ⑥ 선학원 설립 배경, 사찰령 공포」.)
사찰령과 시행 규칙에 따르면, 원종과 임제종은 해체하고 30개의 본산本山을 지정해 그 주지는 총독부의 취임승인을 받도록 하였다. 그리고 30본산은 각 본산별로 사법을 제정 총독부의 인가를 받아 시행하며, 그 외 사찰은 30본산의 말사로 부속시키고 그 주지 취임 승인권은 각도 장관이 갖는다는 것이다. 이는 한마디로 기존의 원종과 임제종을 해산하고 총독부가 이를 대신해 교단의 역할을 하며 전국 사찰을 관리하겠다는 의도였다.
일제가 사찰령을 반포함에 따라 불교교단은 30본산 체제로 전환되었다. 30본사가 정해지고 30명의 주지가 차례로 승인을 받는다. 총독부는 조선 불교가 ‘선교겸수禪敎兼修’를 종지로 한다는『경국대전經國大典』의 내용을 들어 ‘조선불교선교양종朝鮮佛敎禪敎兩宗’으로 명칭을 정하자고 제안하였다. 일부에서 임제종이라는 종명을 고집하였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원종은 본래의 뜻과 종명을 포기하고 총독부가 의도한 대로 선교양종으로 하는 데 선도적 역할을 한다.
조선을 침탈侵奪한 일제는 식민지 인민의 정신 교화를 위해 불교를 이용한다. 사찰령을 제정해 총독부를 정점으로 조선 불교를 지배하는 기형적인 교단 체제를 확립한 것이다. 총독의 지시가 반영되는 통로는 30본산 주지였고, 주지들을 파격적으로 우대하고 사회적 지위를 보장해 줌으로써 조선 불교를 원활하게 통제하려 하였다. 주지의 입장에선 조선 왕조로부터 받았던 천민의 신분에서 하루아침에 신분상승의 극진한 대우를 받고 보니 일각에서는 조국보다 일제의 통치가 더 낫다는 인식마저 생겨나게 되었다. 일제는 바로 이런 점을 노렸던 것이다. (박희승 지음, 시련과 도전의 한국불교근세사『이제 승려의 입성을 허함이 어떨는지요』들녘 p. 288.)
30본산의 주지회의소住持會議所는 원흥사에 두게 된다. 1911년 말 원흥사 원종 종무원 간판을 내리게 되었고, 1912년 6월 ‘조선 선교양종禪敎兩宗 각본산주지회의원各本山住持會議院’으로 바뀌게 된다. 1915년에는 주지회의住持會議의 상설기구화가 이루어지면서 ‘30본산연합사무소本山聯合事務所’가 설치되었다.
1912년 5월 28일, 11개 본산 주지들이 사찰령 제정과 관련한 문제를 논의하고자 원흥사의 원종 종무원에서 회동해 30본산 주지회의를 발기하고 연락을 취했다. 6월 17일, 사찰령 제정 이후 처음으로 30본산 주지회의가 열렸는데, 22개 본산에서 주지 또는 대리인이 참석해 ‘사법과 사찰령 시행 규칙 준수의 건’, ‘사법 통일의 건’, ‘본원 과거와 미래 방침에 관한 건’ 등을 무려 6일 간 논의했다.
(중략)
이렇게 해 일제 총독부의 사찰령 시행 이후 처음으로 열린 30본산 주지회의에서 각 본산의 종지와 사법을 통일시키고 본산의 연합을 위해 조선불교 선교양종 각본산 주지회의원을 발족하고 그 대표에 회광 스님을 선출했다. 이 회의에서 출범한 주지회의원은 사실상 원종 종무원의 전통과 재산을 계승한 것이었다. )박희승 지음, 시련과 도전의 한국불교근세사『이제 승려의 입성을 허함이 어떨는지요』들녘 pp. 288~290.)
조선불교가 30본산 체제로 전환되면서 이회광은 총독부의 승인을 얻어 초대 해인사海印寺 주지가 되었고, 이어 조선선교양종 각본산주지회의 원장이 된다. 오늘날 대부분의 불교 근세사 연구자들은 원종을 친일단체로 보고 이회광을 친일승으로 간주한다. 이회광은 일제강점기 동안 총독부 정책에 호응하는 행정을 펴는 등 친일행각을 계속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조선조 말 대강백大講伯으로 명성이 높았지만, 일제강점기에는 극렬한 친일 활동으로 강대련姜大蓮, 곽법경郭法鏡, 이보담李寶潭 등과 함께 대표적인 친일 승려로 거론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회광은 일제에 협력하는 등 이용당한 측면이 있지만 조선불교의 자주적 발전을 위해 어느 누구보다 노력한 인물이기도 하다.
오히려 원종과 이회광 종정은 몇 가지 점에서 조선불교의 자주적 발전을 지향하고 있었다고 판단된다.
첫째, 의병전쟁 무렵 조선 주요 사찰이 일본 종파에 가입해 보호를 받고자 할 때 원종은 조선불교의 독자적인 결집을 통해서 자활을 지향했다.
둘째, 원종은 대한제국 정부와 일제 통감부, 총독부에 종무원과 각황사의 인가를 신청했으나 일관되게 거부당했다. 심지어 종정 이회광 스님은 이 때문에 실정법 위반으로 징역형을 위협받고 있었다.
셋째, 원종은 창립 이후 일본 각 종단의 연합 제의와 친일 집단인 시천교와의 병합 제의도 모두 거절하면서 자신의 독자성을 고수했으며 일제 강점 이후 일본 조동종과의 연합을 통해 종단의 인가 문제를 해결하려다 실패했다.
물론 원종과 회광 종정에 문제점이 있었다는 건 분명하다.
첫째, 불교의 세계관에 철저하지 못해 세속 권력의 종단 인가 문제에 지나치게 연연함으로써 당시 스님들의 사회역사의식의 한계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오히려 정교분리의 원칙을 견지하며 불법 중심으로 본분에 충실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둘째, 조선불교의 전통과 종지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해 많은 파란을 초래했다. 조선불교의 종지를 바로 체득하지 못한 한계는 이후 회광스님을 비롯한 원종 지도부의 대부분이 점차 일제에 예속되어 일본불교의 풍습을 따르는 것이 조선불교의 발전이라 인식하는 오류를 범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결국 한국불교 근현대사에 또 다른 파란의 소용돌이를 낳게 된다. (박희승 지음, 시련과 도전의 한국불교근세사『이제 승려의 입성을 허함이 어떨는지요』들녘 pp. 282~283.)
사찰령 이후 무소불위의 권력을 지닌 주지들의 등장하게 되면서 ‘주지전횡시대住持專橫時代’가 열린다. 종전에는 한국 사찰의 경우 ‘산중공사山中公事’라는 제도가 있어 모든 일을 산중의 장로와 각종 소임을 맡은 승려들이 모여 결정하였다. 그런데 그 결정 권한이 주지 한 사람에게 몰리게 된 것이었다.
또한 조선조 5백 년의 천대받던 위치에서 벗어나 갑자기 총독이 인가하는 관직에 올랐을 뿐 아니라, 새해에는 총독관저에 초대받고, 총독부의 공식연회에 종교계 요인으로 참가하는 등 신분 상승이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사찰령 이후 본산 주지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일반사찰의 주지까지도 가히 신천지를 만난 듯 했다고 한다.
종전의 한국 사찰, 특히 대찰인 경우는 ‘산중공사(山中公事)’라는 공의(公議)제도가 있어 모든 일을 산중의 장로와 각종 소임을 가진 승려는 물론, 산중의 비구들이 공론하여 결정했다. 때문에 종전의 한국 사찰에서는 주지나 소임을 가진 소수의 승려들이 전횡(專橫)을 하거나 사사롭게 사찰의 일을 도모하지 못했다. 그러던 것이 일본 사원의 주지제도를 그대로 도입해서 만든 사찰령과 시행규칙, 그리고 사법 등을 근거로 임명된 주지는 종전의 주지에 비해 그 권한이 대단히 컸다. 사찰의 모든 일의 처리는 주지에게 일임되었기 때문에 몇 사람의 소임승(所任僧)이외에는 주지가 하는 일에 간섭하는 자가 없어졌다. 따라서 오랜 전통을 가진 공의제도는 일변하여 주지의 전횡제도(專橫制度)가 돼버렸다. (강석주 · 박경훈 공저, 『불교근세백년』 , 민족사, p. 78.)
한국불교가 오래도록 지켜오던 민주적인 관습과 제도가 무너지고, 주지는 종권장악을 위해 일본불교에 동화되거나 예속되는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일본불교에서는 주지나 관장(管長, 종파의 장)이 세습 직이었으므로, 이러한 일본불교제도는 일부 한국 승려들에게 더욱 매력적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주지는 수행은 뒤로 한 채 오로지 그 자리를 고수하려고 노력하게 되었다.
한편, 종전의 한국불교에서 본사本寺는 종풍 중심 사찰로 본말사의 관계는 수행의 가풍과 유대紐帶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러던 것이 사찰령 때문에 행정적인 유대로 전락해 버렸으며, 더불어 사법寺法에 의해 보장받는 직책이 되어 버렸다. 소위 ‘주지전횡住持專橫’ 시대가 열린 것이다.
흔히 일제강점기의 한국불교를 ‘주지전횡시대(住持專橫時代)’라고들 한다. 사찰 행정의 기본 주체인 주지를 관권(官權)으로 임면(任免)하였던 것이 직접적인 원인이었다. 본사 주지의 임명과 해임의 승인권을 조선총독이 장악하고, 말사주지의 임명과 해임의 승인권은 지방의 도장관이 행사하도록 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주지는 관권을 배경으로 사찰의 온갖 실권을 장악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전통적인 한국불교의 산중공의제도(山中公議制度)를 없애버린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오경후(한국불교선리연구원 선임연구원),「민족불교 성지 선학원 역사를 되짚다, ⑥ 선학원 설립 배경, 사찰령 공포」.)
주지의 권한이 높아지고 경제적으로 부유해지면서 타락한 주지들은 은밀히 취처娶妻하는 자들이 늘어나게 된다. 그러나 당시 처첩妻妾을 거느린 자는 비구계를 받지 못하였으므로 주지 또한 될 수 없었다. 다만 절 밖에서 취처하는 것을 눈 감아 주는 정도였는데, 이들 본산 주지들은 주지직住持職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앞장서서 아예 계율을 무시하거나 사법寺法의 대처금지 조항을 개정 또는 삭제하려는 움직임이 일기 시작했다.
총독부는 처음에는 급격한 변화로 인해 야기될 사태를 바라고 있지 않았으므로 그러한 사법의 개정을 허가하지 않았다. 다만 주지가 취처하는 것을 모른 채 묵인해 오다가 1926년 10월에 가서야 인가하게 된다. 취처를 금하는 조문이 삭제되자 승려들은 너도나도 다투어 처첩을 거느리게 되었다.
우리나라의 불교는 엄격하게 계율을 지키는 데에 그 특성이 있다. 특히 처첩을 거느리거나 음계(婬戒)를 범하면 사찰에서 퇴거해야 했으며, 일반사회에서도 승려의 표준을 벗어난 사람으로 간주했다. 그러나 한국 승려 중 일부는 일본 승려와 접촉이 잦아지면서 계행에 대한 생각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일본의 승려가 처자를 거느리고 있음에도 존경을 받는 것을 보고 지계(持戒)에 대한 가치관의 변화가 온 것이다. 1910년대에는 숨어서 처첩을 거느린 승려의 수가 상당수에 달하고 있었다. 이 무렵에 한용운스님이 중추원과 통감부에 대처금지를 해제하라는 건백서를 냈고, 또 《불교유신론》에서 거듭 강조했으나 승단 안에서 이를 반대하는 이는 극소수였다. 대처자에게 있어서는 한용운스님이 그들에게 대처의 명분을 세워 준 셈이 되었다. (강석주 · 박경훈 공저, 『불교근세백년』 , 민족사, p. 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