孝 문화 체험기
남혜순
우연한 기회에 孝지도사 교육모집안을 보게 되었고 효실천운동본부 하남지부를 방문했다.
현대적 의미의 "효 HYO"를 알개되었고, (Harmony of young &Old의 준말이다.) 내가 그동안 알고 있었던 효는 시묘살이 효, 심청전 아니면 부모님이 어려운 가정에서 있는것, 없는것 구해서 부모님을 봉양하는 효가 떠오른다.
그래서 孝란 어렵고 힘들다는 생각이 앞섰다.
그러나 "HYO"의 효는 부모 자식간에 상생의 효로서 부모님의 내리사랑, 자녀들의 올리효도로서 부모님을 편안하게, 즐겁게 하며 감동을 시켜드리고 상호간에 조화로운 감성속에서 의무와 사랑을 베푼다는 것이다.
난, 순간 젊은이와 노인들의 함께 어우러져 조화롭고 상호보완적인 사회가 구성된다면, 언제나 돌아가고 싶은 '고향의 봄'이 아닐까? 한다.
누구나 현대인들은 고향을 잃은지 오래됐다고 한다.
그러나 마음은 언제나 평안하고 즐거운 고향으로 가고 싶은 그런 행복의 그림을 그릴 것이다.
삶은 순간 순간 속에서 기쁨이 잔잔히 물결쳐 온다면 작으나마 그것도 행복이다.
사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사람사는 모습은 거의 같다고 본다.
과거 선조들은 검허하게 선행을 했고, 부모님과 웃어른들을 공경하였으며, 이웃과 형제들이 가진것을 서로 나눴으며, 잘못을 행하면 반드시 고칠려고 했고, 잘못된 행위에 대해서 부끄러워 했다.
덕있는 스승님을 찾아가 배우고 그것을 나라를 위해 헌신했다.
그것이 결국 오늘날 부귀, 명예, 자식, 장수의 결과로 오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남지부의 권두어 "孝를 하면 행복 합니다" 나는 효지도사 교육에 등록을 하게 되었다.
몇주간 교육도 받고 교육의 일환으로 효문화탐방을 가게 되었다.
장소는 대전 뿌리공원과 우암사적지이다. 일정은 2012.4.7.하남도서관 앞에서 버스로 행선지를 출발했다. 전날만 해도 꽃샘추위가 야단이었는데 당일 날씨는 청량하고 하늘은 푸른하늘 원색 그 자체 였다. 달리는 버스 창밖은 이미 봄이 그냥 와 있었다. 차안에서 어떤 지도사분이 "효하는 사람이라 날씨도 하늘이 도운다"라고 말을 던져 차 안은 웃음바다를 이루웠다.
먼저 대전 효문화 지원센터에 도착했다.
오원균센터원장님이하 직원분들이 반갑게 우리를 맞이 하였고, "孝는 실천입니다."孝가 살면 가정이 살고 가정이 살면 나라가 산다"라는 원장님의 효사랑운도은 열정 그 자체 였다.
효의 정신문화 계승을 반드시 이 시대에 접목시켜 누구든지 인간의 덕목을 실천할 수 있는 인재양성을 육성하도록 노력하는 모습이 역력했으며, K-pop처럼 K-HYO도 세계 만방에 알린다는 결의가 대단한 것 같았다.
우리는 당일 대전시 효,문화지원센터 1주년 기념과 맞물려 도착함과 동시에 뿌리공원으로 향하였다. 버스 안에서도 원장님의 강의는 효 선양실천에 대한 여러가지 사례와 구심점 역활을 해 주기를 당부 하셨다.
효 지원센터 1주년 기념식이 장수마을 회관에서 준비 되었기에 참석하신 많은 분들과 함께 하남시 지도사님들도 기쁜 마음으로 축하했다. 효 실천 메카 도시 대전에 대한 자부심도 대단 했으며 앞으로 정신문화의 효가 사회에 잘 정착되도록 모든 이들이 다짐도 했다.
점심식사 후 뿌리공원을 관람했다.
광장과 공원이 흘러가는 강과 어울려져 자연경관이 시원 했다.
벗꽃과 목련이 꽃망울을 터뜨리려고 부산했고, 드문드문 개나리 꽃이 봄이 왔음을 말해 주었다.
전국 유일의 "효"테마공원! 조상들의 뿌리(족보)와 성씨 조형물 설치가 사뭇 이채롭다.
자기 집안의 성씨 조형물 앞에서면 먼 옛날부터 이어온 성씨 역사속에 자신도 함께 흘러 간다는 것이 감개무량해진다.
뿌리공원 관람실로 들어갔다.
안내하는 분의 풍부한 식견으로 모든 지도사님들이 새롭게 알았다는 표정이다.
옛 선조님들의 꼼꼼하고 정교한 세밀 붓글씨체로 적혀진 자손들으이 면면히 이어져온 족보들....
왕실 족보도 있었다, 낱말잇기 퍼즐의 성곽 같은 느낌이랄까?
각 성씨 집안의 본, 집안의 내력, 자손의 번창, 학문을 성취하여 벼슬에 올랐고, 왕궁을 출입했던 벼슬들의 종류, 집안의 혼사내력, 삶과 어우러진 죽음과 묘비의 안장지역까지 모든 시간의 영속성이 보는 사람들에게 숙연하게 해 주었다.
족보마다 퇴색된 빛깔을 품은 채 물이 번져서 얼룩이 생겼고 찢어지고 낡아서 글씨체가 희미해 보이고 구멍이 뚫려져 있고 너덜 너덜 부서질 것 같은 모양, 꾸겨지고...다시 편 모습들...
수백년 동안 족보책은 생존하여 관괌실 유리관 속에 소장되어 있었다.
우리 선조들의 뿌리의 애착 모습니 눈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뿌리의 역사가 없었다면 오늘 이렇게 좋은 세계 선진국 대열에 당당하게 대한민국 국민임을 말할 수 있겠는가!
우리 삶이 뿌리에서 자양분을 받아서 현대로 이어온것은 부인 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모든 직계 친인척들이 그물망 처럼 연결되어 서로서로 나눔의 삶을 살았을 것이고 서로간의 갈등의 문제도 화합으로 해소 했을 것이다.어려움 속에서도 소통했을 모습이 보였다.
그시절 서로 화합과 소통이 안된다면 도저히 족보책을 만들기에는 무척 어려웠을 것이다.
공자는 그의 자손들이 100대 이상 지속 할 수 있는 공덕을 쌓았기에 세계 어느곳에 가든 공자의 자손들은 대접을 받는다. 덕있는 가문이 2~3대까지 갈 수 있는 공덕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좋은 씨앗을 심으면 좋은 결과를 얻는다는 것은 분명히 알 수 있다. 우리의 인생도 한생으로 끝나는 것이 아닐 것이다. 자손대대로 영화와 안녕은 결국 현재에 나의 존재감을 부각 시킨다.
삶이 안겨주는 뿌리에 대한 고찰은 현대에 사는 우리들이 무시 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물질만능의 시대에 접하다 보니 과거 선조들의 삶이 피부에 와 닿지 않는다는 점도 있다.
과거가 있기에 현재가 있고, 그래서 미래를 현재의 바탕으로 가꾸어 나가는 것은 아닐까 싶다.
뿌리에 대한 우리의 안녕이 결국 튼튼한 뿌리가 건강한 열매와 꽃도 풍성하게 해 주듯이 선조들의 성실한 삶이 있었기에 나의 삶도 성실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들 삶이 이야기가 되어 다시 뿌리책에 기재 될 것이고 아이들을 데리고 뿌리에 대한 인식을 심어줄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관람이 끝나고 사진 찰칵-
바로 우암 사적지로 향했다. 우암 송시열선생님의 삶의 흔적이 사적지에 꽉차 있었다. 제자들을 양성하고 학문을 연구 해 성리학의 체계를 확립했고 무수히 많은 학문을 편 흔적의 필체들.....
송시열 존영의 모습은 거대한 몸집에서 보여지듯이 대단한 기개와 포부, 야망들이 단번에 눈에 들어왔다. 기거했던 가옥은 연못과 어울려 참 아름답고 멋스러웠다.
그리고 단아했다, 定과 動을 함께 견비했다고 할까? 우암선생님의 충효정신도 또한 남달랐다고 한다. 한가지 일화로 어머니가 스승님께 떡을 쪄서 갖다 드리라고 하였는데 遠거림임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빨리 뛰어갔는지 떡시루를 내려 놓고 뚜껑을 여니 김이 무럭무럭 났다고 한다. 또 한가지 일화는 근검 절약 정신이 무서울 만치 투철한 선생님은 궁궐출입시 단 의복이 한벌 뿐이였다고 한다. 임금님이 보기에 추운 겨울에도 입고 다니는 것이 안타까워 입고 있던 가죽모피를 벗어서 입으라고 하였는데 궂이 사양 하였기에 임금님께서 나라와 국민을 위해 하사 한다고 하시니 마지 못해 받으셨다 한다. 지금 그때 하사 받았던 가죽 모피옷이 사적지 전시장에 걸려있다.
스승님께 예를 다하는 사람은 반드시 부모님도 공경할 수 밖에 없다. 효의 마음이 더욱 확대 된다면 나라를 사랑하고 이웃에 예의를 지키고 자신의 삶도 성실하게 살 것이다.
2002년 월드컵 대회를 상기해 보면 정말 세계가 깜짝 놀랐다고 했다. 대한민국의 저력은 끈끈한 정과 우애가 아니겠는가! 그것이 결국 깊이박힌 상호간의 뿌리의식인지 모른다.
뿌리가 견고하고 튼튼하면 높고 높은 하늘도 찌를 수 있다.
"孝를 실천하면 내가 살고 나라도 산다." "개인의 성공 뿐아니라 가문의 영광이다."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을 것이다. 확장되는 우리의 내일을 위해 孝 운동에 파이팅 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