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 흙집이 보존이 되어 있으며 아브라함의
고향인 역사의 도시 하란을 찾아서!
울파와 하란지역 지도
이스탄불(Istanbul)에서 산르울파(Sanli Ulfa)까지는 1,274Km떨어져 있으며, 울파(Ulfa)에서 악차칼레(Akcakale)까지는 50Km거리인데 이 길을 통하여 시리아
국경으로 이어지는 도로이다. 악차칼레 10Km전 하란
방향으로 좌회전하여 10Km 더 들어가면 대단히 흥미롭고 전통 흙집이 있는 하란마을이 나온다.
울파와 하란
하란을 터키명으로 알튼바삭(Altinbasak)이라 한다. 바로 이곳이 5000년 동안 아나톨리아와 메소포타미아 사이를 연결하는 무역의
통로 역할을 맡았던 하란이며, 서쪽으로 유프라테스강이 흐르고 있고,
동쪽으로는 티그리스강이 흐르고 있어 광활한 농토를 볼 수 있다. 이 두 강은 지금도 터키의 중요한 물 자원 뿐만 아니라, 시리아와 이라크
국민들의 식수를 공급해 주는 생명의 강이다.
울파지역
하란 입구로 들어서면 마을이 폐허 된 것처럼 현대식 건물은 거의 찾아 볼 수 없지만 고대의 무너진 성벽과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큼직하고 네모난 바위들은 찬란했던 옛 하란의 명성을 상기시켜 주기에 충분하다.
하란 성벽은 성벽을 받혀주는 언덕이 없는 평원에 건설되었기 때문에 성벽 중간 중간에는 성벽을 지탱해 주는 큰 기둥들이
세워졌다고 한다. 성안으로 들어가려면 성벽을 따라 남쪽 방향으로 조금 돌아가야 하는데, 얼마를
지나지 못해서 성벽을 쌓은 모양과는 다른 자연석 돌무더기가 눈에 띄는데 바로 이것은 하란 인들의 무덤이다.
끝없이 펼쳐진 평야와 하란 마을 전경
하란
[Harran] 터키
울파(Urfa)주 발리크 강가에 있는 마을. 고대에는
전략적으로 중요한 도시였다. 니네베에서 카르체미시에 이르는 도로가 뻗어 있어 아시리아 왕들이 중요하게
여겼던 곳이다. 아시리아 시대에 '달의 신'에게 바치는 제사의식이 많이 이루어졌다.
아브라함의 가족이 갈대아
우르(창세 11 : 31~32: “데라가
그 아들 아브람과 하란의 아들 그 손자 롯과 그 자부 아브람의 아내 사래를 데리고 갈대아 우르에서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더니 하란에
이르러 거기 거하였으며, 데라는 이백 오세를 향수하고 하란에서 죽었더라)를 떠나 이곳에 머물렀기 때문에 성서에서도 자주 언급된다.
로마 시대에는 카르하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로마 총독 크라수스가 파르티아인들에게 처참하게 패했고(BC 53,
카르하이 전투), 그뒤 297년 갈레리우스
황제가 페르시아의 왕 나르세스에게 패한 곳이기도 하다.
전통 흙집 하란
그럼 여기서 크라수스와 카르하이(카레)전투에 대해서 알고 넘어가자! 크라수스
[Crassus, Marcus Licinius]
BC
115경~53.
로마의
정치가. 로마 공화정 말기에 율리우스 카이사르, 폼페이우스와 더불어 제1차 삼두정치를 펼쳐 실제적으로 원로원의 세력에 도전했다. 그가 죽은 뒤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 사이에 내전(BC 49~45)이 일어났다. BC 87년 가이우스 마리우스가 로마를 장악하자 그는 로마에서 도망갔다. 젊은 장교였던 그는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와 마리우스의 추종자들 사이에 내란이 일어나자(BC 83~82) 술라를 지지했으며, 82년 로마로 돌아와 술라가 권력을 잡을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폼페이우스에 대한 그의 적대감은 아마도 술라가 눈에 띄게 폼페이우스를 더 좋아했던 데서 비롯한 듯하다. BC 73년경 프라이토르(법무관)가 되었으며, BC 72~71년 스파르타쿠스 반란을 진압했으나 공적을 폼페이우스에게 빼앗겼다. BC 70년 폼페이우스와 힘을 합쳐 자기들을 콘술(집정관)로 선출하라고 원로원에 압력을 넣었으며, 콘술이 되자 이들은 술라의 체제를 일부 뒤엎어버렸다. BC 60년대 폼페이우스가 국외에서 군사적 승리를 거두고 있는 동안 그는 로마에서 정치적 추종세력을 만들었다. 주로 술라에게서 빼앗은 재산으로 얻은 막대한 부를 이용해 그는 빚이 있는 원로원 의원들에게 신용 대부를 해주었으며, 이런 식으로 BC 62년에 젊은 율리우스 카이사르에게도 도움을 주었다. BC 65년에는 켄소르(감찰관)가 되었다. BC 60년 폼페이우스 및 카이사르와 함께 소위 제1차 삼두정치를 시작했다. 그는 부분적으로 아시아에 벌여놓은 자신의 사업에 도움이 될 만한 법을 통과시키려는 목적으로 이 비공식적인 연합에 들어갔고, BC 58~56년에는 폼페이우스의 세력을 약화시키려는 움직임을 지지했다. BC 56년 에트루리아의 루카에서 열린 3명의 지도자 회의에서 폼페이우스와 화해했으며, 이듬해 이 두 사람은 다시 콘술이 되었다. 시리아 총독을 지내던 BC 54년 무공을 떨치기 위해 동쪽의 파르티아를 침략했으나 아나톨리아 남부의 카르하이(카레) 전투에서 패배 당하고 목숨을 잃었다.
둥그런것은 투둘리 동물 배설물로 연료로 사용
카레
전투 [Carrhae, Battle of]
3인
집정관의 한 사람인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의 파르티아령 메소포타미아 침입이 저지된 전투(BC
53). 크라수스는
자신의 파트너들인 폼페이우스와 율리우스 카이사르에게 맞먹을 만한 군사적 명성을 얻기 위해 메소포타미아 침공을 추진했다. 그는 7개 군단(약 4만 4,000명에
달했으나 기병의 수는 불충분했음)을 이끌고 메소포타미아를 침략했다.
그 당시 메소포타미아는 수렌 가문의 한 파르티아 귀족이 방어하고 있었다. 수렌인들이
유프라테스 강의 동쪽 사막에 있다는 사실을 알아낸 크라수스는 강이라는 차폐물을 떠나 곧장 카레로 쳐들어갔다.
이 행동은 성급하다는 비난을 받았지만 티그리스 강변에 있던 셀레우키아가 그의 최종 목표였기 때문에 그는 어느 때든 이 지역을 통과할
수밖에 없었다. 도중에 약 1,000명의 무장한
기병대원들과 거의 1만 명에 가까운 말탄 궁수들로 이루어진 파르티아 병사들이 갑자기 그의 부대를
덮쳤다. 그의 병사들은 사막전쟁에 익숙하지 않았으며 적응할 수도 없었다. 그의 아들 푸블리우스가 기병대를 이끌고 공격을 막아내려 했지만 소용 없었고 로마군의 주력은 포위하고 있는
파르티아인들에 맞서 4각의 진을 형성하고 쏟아지는 파르티아인들의 화살을 방패로 막아보려 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수렌인들이 10명에 1마리씩 1,000마리의 아라비아 낙타군단을 미리 준비해두었기
때문에 파르티아인들은 분대별로 교대로 물러서서 화살통을 다시 채워 싸울 수 있었다. 물자가 부족했던
크라수스는 사기가 꺾인 부하들 때문에 협상에 응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이 과정에서 다시 파르티아인들에게 퇴각로를 잘리고 말았다. 대략 1만 명의 로마인들이 달아났지만 나머지 병력들은 생포되거나
살해되었다.(크라수스도 사로잡혀 죽었음). 파르티아인들은
이로써 동쪽지역에서 로마의 패권에 일격을 가했으며 크라수스의 죽음은 로마의 정치에 심각한 영향을 미쳤다.
대학건물
아브라함 [Abraham]
우르를 떠난(BC 2000경) 뒤 다른 곳은 알려지지 않았으므로 맨 처음 머문
중요한 장소는 하란이며 이곳에서 데라 일행은 한동안 머물렀다. 이
도시는 메소포타미아 북부,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 사이의 발리크 계곡에 자리잡았던 것이
분명하며, 오늘날 터키의 하란 자리에서 발견할 수 있다.
학자들은 하란이 '신'(Sin)
숭배의 중심지였고, 따라서 우르의 달신 숭배와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순례도시였다고 주장해왔다. 마리 서판으로 족장 시대, 특히
도시 하란에 관한 새로운 사실들이 드러났다.
마리의 왕궁에서 발견한 수천 점의 서판들 중에는 놀라운 것이 많이 있었다 아브라함의 형제들 중 나홀의 집안만 이곳에 남고,
그는 가나안 영을 향해 떠났다.
나중에 아브라함은 이삭의 아내를 고르기 위해 종을 하란에 보내어서 나흘의 손녀 리브가를 며느리로
맞이한다. 리브가가 곧 야곱과 에서의 어머니가 된다.(창
천문 관측대
성벽 서쪽 부근에 지금은 초라하게 보존도 되지 않은 상태로 버려져 있는 우물이 있다.
이것이 야곱의 우물이다. 우물은 아브라함의 종이 이삭의 아내 리브가를 만난
곳이며, 야곱이 라헬을 만나 사랑에 빠진 곳이다. 이
우물을 누가 만들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사막에서의 사랑의 로맨스를 만든 아름다운 우물이다. 이 지역에 살고 있는 주민들의 건축양식이 특히 관광객들의 눈길을 끄는데 즉 집의 지붕을 진흙으로 구운 벽돌을 사용 4-5m 높이의 원뿔 모양으로 높게 만들었는데, 이것은 천장에
공간을 많이 둠으로 해서 한 여름의 태양열을 감소시킨다. 바로 이곳 하란의 상징은 흙집이다. 원뿔 모양 같고, 벌집 모양과도 같은 이 흙집은 매우
인상적이다. 이 흙집은 지붕이 몇 개가 겹쳐져 있는데 부엌, 거실,
응접실, 창고 등으로 사용하도록 연결되어있다.
집 구조는 매우 단순하지만 흙으로 지어져서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하다. 이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주로 아랍인들이다. 하란의
성읍 북쪽에는 세계 최초로 세워진 대학의 터가 남아있다. 이곳에서는 주로 의학 그리고 수학과 천문학
등을 가르쳤다. 별들을 관측하던 천문 관측소는 지금도 옛모습 그대로 남아있다. 이
대학은 징기스칸의 손자 홀레구가 1259년 시리아 원정 길에 이곳을 진출하여 성을 무자비하게
함락시키고, 모든 건물을 기둥뿌리까지 뽑아버려 완전히 폐허가 되었다
하란 흙집 모습
성서에서는
하란을 어떻게
설명하는지 알아보자! 하란(Haran)은
'가두'(街頭),
'통로',
'대상'이라는
뜻으로 일어나 떠나야 할 도시를 말하며,
수메르어와
아카드어에서 '하란'은
'무역로
교차점'을
의미한다. 하란은
오늘날 베를린과 바그다드를 연결하는 철로에서 북서쪽으로 약 17킬로미터
되는 곳에 있는 '하란'(Harran)으로
여겨지는데,
이곳은
발리크강이 발원하는 두 계곡의 합류점에 자리잡고 있다. 티그리스강과
지중해를 연결하는 '고산'과
'갈그미스'
사이의
중간에 위치하여 통상로의 교차점이 되었고 교역의 중계도시로 번영했다(겔
27:23) 아브라함
가족이 가나안 땅으로 가던 도중 일시 체류한 곳으로 여기서 부친 데라가 죽음(창
하란 흙집
체류 중
아브라함이 하나님께로부터 가나안으로 가라는 소명을 재차 받은 곳(창
이삭의
아내 리브가의 고향이며(창24장),
훗날
야곱이 에서를 피하여 도망한 곳(창
27:43) 하란은
살만에셀 1세에 의해서 B.C.1274-1745년
앗수르에 합병되었고 B.C.610년
바벨론에 의해 침략 당할 때까지 앗수르 제국의 속주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도시 중 하나였다. 하란에서
발굴된 유적에 의하면,
B.C.2500년 이전에
설립된 것으로 판명됨. 최근
발견된 설형문자 서판에 의하면 하란 인근지역은 남쪽 세력의 상업 식민지 장소가 된 것을 알 수 있음.
하란 흙집 마당
'아사으
야름자'(Asagi
Yarimca)와
'술탄테페'(Sultantepe)
지역에서
발굴된 유적에 의하면 하란인들이 섬긴 신은 월신(月神)으로
밝혀짐. 하란은
아브라함이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기에 앞서 잠시 체류한 중간 기착점이다. 하나님은
이곳에서 아브라함을 재차 부르셨는데,
이와 같은
사실은 하나님 나라를 향하여 전진하는 성도는 그 길을 지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하란은
갈대아 우르와 함께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한 도시로서 우상 숭배의 중심지였다(왕하 따라서
부르심을 입은 자가 체류하기에는 부적당한 곳이었다.
즉
하나님과 우상은 겸하여 섬길 수 없는 것이다. 비록
하란은 소돔과 고모라와 같이 세상의 안락을 위해서는 적당한 곳이라 할지라도 소돔과 고모라의 최후가 불과 유황으로 멸망당했다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부르심을 입은 신자는 부단히 각자의 하란을 떠나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향하는 소망된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창
하란 흙집 야경
유적으로는 하란(Harran)지역은 로마시대의 대학건물, 대상숙소, 흙집 마을이 있으며, 울파지역도 볼만하다. 터키 이스탄불에서 터키지기 필자 (turkhan@hanmail.net) 다음카페-터키 길라잡이 (http://cafe.daum.net/turkhan)
하란 마을의 천진난만한 어린이들
울파 성채에서 바라본 시내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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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터키 여행 길라잡이 원문보기 글쓴이: 터키지기
첫댓글 성경상에 나오는 하란과 갈대아 우르는 이름만 들어보았지 터키에 가는 일반여행객들에게는 쉽게 접근할 수 없는곳이기에 이번 여행계획에서는 가보고자 합니다. 저도 못가본 곳이라 궁금합니다.
저두 가고싶은곳이네요 시라아국경으로 알레포에서 넘어왔는데 ~~다음코스에는 이란에서 넘어가는코스이기에 꼭 가봐야겠습니다 뚝베기님 정말 휘귀한 정보에 감사드립니다
꿈과 여행님과 같은 여행고수님이 함께 해준다면 우리드빙식구들 영광이지요. 함께 동행을 기대합니다. 년말 건강하십시요. 사업번창도 기원합니다.
터어키는 잠깐 갔다 왔는데 주로 패키지에서 가는 곳들이었습니다. 꼭 드빙에서 갈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늘 직장 때문에 퇴직만 하면? 이라고 벼르고 있습니다.
직장에 충실하다보면 여행기회도 오기마련입니다. 어느분들은 직장도 팽개치고 장기간 배낭여행 또는 산티아고길을 걷는데 저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됩니다. 여행은 인생을 살찌우면서 직장생활의 활력소를 얻기위함이니까요. 꿈은 이루어지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