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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와
정암 박윤선 박사의 역사적 의미
박용규 교수_총신대학교
서론
1905년 12월 11일 전형적인 농촌 마을 평북
칠산군 백량면 장평동 351번지에 서 부친 박근수(朴根秀) 씨와 모친
김진신(金眞信) 사이의 2남 3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나 83년의 생애를
한국교회와 더불어 살다간 박윤선의 생애는 한 국교회사 및 한국근대사와 깊이
맞물려 있었다.
이 민족이 참으로 어두운 터널을 통과하던 1905년에
출생하여 을사조약, 한일 합방, 3�독립운동, 8�5 해방, 6�5전쟁,
4�9의거와 5�6 혁명, 1970년대 근대 산업화운동 및 1980년대 근대
민주화운동이 절정에 달하던 1988년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정암은 그의 생애 동안 영적으로는
원산부흥운동, 평양대부흥운동, 100만인 구령운동, 1920년대 김익두
부흥운동, 1930년대 부흥운동, 1950년대 부흥운동, 그리고 1970년대
대중전도운동 등 한국교회의 놀라운 부흥을 경험하는 복을 받았다. 그는
한국교회의 기적, 한국교회의 놀라운 영적각성의 자양분을 충실하게 공급받으며
자신의 꿈을 펼쳐나갔다.
이런 이유 때문에 박윤선의 생애와 신학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역사적 배경에 대한 선이해가 요구된다. 그가 성장하고
교육받은 선천 신성중학교, 숭실전문학교, 평양장로회신학교, 그리고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는 그에게 신학적 토양을 제공했고, 그가 살았던 당대의 시대적 환경은
그에게 영적 토양을 제공했으며, 한국교회는 그가 이룩한 학문적, 영적 결실을
제공받았다.
I. 정암 박윤선의 신앙 및 교육 배경
정암이 세상이 태어나던 1905년, 우리 민족은 유사이래 가장
암울한 시대를 통과하고 있었다. 1904년 러일전쟁, 이어 진행된 을사조약으로 외교권이 일본
의 수중에 들어갔다. 2년 후 고종이 강제 퇴위를 맞았고, 다시 1910년
한일합 방이 체결되어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당시 다섯 살의 어린 박윤선은 한일합방의 치욕 그 아픔과 슬픔을 피부로 느끼지 못했겠지만 14 살이 되던 해 만난 3�독립운동을 통해 민족의 주권 상실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를 절감했을 것이다.
정암은 일본의 경제 찬탈의 1번지 농촌에서 농민의 아들로서 나라 잃은 슬픔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피부로 경험하면서 성장했다. “가난한 가정” 형편 으로 정상적인 교육을 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박윤선은 당시 의식 있는 젊은이 라면 누구나 한번쯤 경험하는 진로 문제로 고민해야 했다.
그러던 1922년 17 세 되던 어느 날 자신의 고향 마을 장평에서 6Km 떨어진 동문동에 있는 교회를 처음 출석하면서 신앙의 입문에 들어섰다. 새로운 세계에 눈을 뜨기 시작한 박윤선은 이듬해 1923년 대동소학교 6학년에 편입하여 1년 만에 6년 과정을 마치고 1924년 2월 최우등으로 졸업하였다. 그의 나이 19세였다.
대동학교 졸업 후 잠시
오산중학교 2학년에 편입 학업을 계속하던 박윤선은 1925년 박형룡과 백낙준을
비롯한 유능한 한국교회 지도자를 배출한 선천신성 중학교 3학년에 편입하여 신앙
안에서 배움에 대한 그리움을 채워가기 시작했다. 방과 후 젖소를 먹이고, 밭에
나가 김을 매고, 심지어 변소 청소를 하면 서도 그의 심장은 끓어오르는
향학열로 불타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정암은 이 기간에 흔들리지 않는 든든한
신앙의 토대를 구축할 수 있었다. 박평흠(朴 平欽), 함가륜(C.S.
Holffman), 김선두 교장, 학교를 방문해 사경회를 인도하던 길선주는
박윤선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다.
양전백이 시무하는 선천북교회에 출석하며
선천중학교를 다니던 박윤선은 선천중학교에 깊이 배어 있는 신앙적 분위기가
그에게 모든 환경을 지탱할 수 있는 원동력이었다. 고학하며 학교 다니는 그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매일 드려지는 경건예배 설교에 귀를 기울였고, 신앙운동에
열중했으며 여러 전도대를 조직하여 전도강연에도 앞장섰다.
박윤선의 신앙과 비전은 숭실전문학교 시절에 와서 더욱 성숙해져갔다.
숭실 4학년 때 박윤선은
하나님의 일을 위하여 자신의 일생을 주님께 드리기로 결심하였고, 재학 중에
모란봉 뒷 동리 가현교회를 맡아 무보수로 봉사하였다.
모의리(牟義理,
E. M. Mowry) 선교사의 주선으로 관영철도호텔 종업원들에게 영어회화를
가리키면서 자신의 학비를 벌고 선천보성학교에 다니기 시작한 사랑하는 아내의
학업도 끝낼 수 있었다.
이미 주의 종이 되기로 결심한 그에게
1931년 평양신학교에의 입학은 그의 생애의 전환점이 되었고, 어떤 방향에서
자신의 사역을 펼쳐나가야 할지 방향을 제시받는 기간이었다. 무엇보다 그의
일생을 지배했던 “경건과 학문”의 표본을 그곳에서 만날 수 있었다.
II. 정암의 유학과 신학 배경
정암이 유학을
가던 1934년 웨스트민스터신학교에는 그레삼 메이첸, 윌슨(R. D.
Wilson), 앨리스(Allis), 매크래(Macrae), 반틸(Van Til), 카이퍼 (Kuiper), 스톤하우스(Stonehouse), 울리(Wooley) 등이 교수하고 있었다.
미국 프린스톤신학교에서 구 칼빈주의 개혁주의 기치를 내걸고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상황이어서 당시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안에는 정통 칼빈주의가 살아
숨쉬고 있었다. 하지만 북장로교와의 갈등이 심화되고 있었다.
1933년 메이첸은 장로교 해외 독립선교 본부를 조직하였고, 북장로교 총회는
모든 장로교인들이 독립선교본부에서 사퇴하지 않으면 중징계를 하겠다고 명
하였다. 결국, 1936년 메이첸이 미국장로교회(PCA)를 조직하자 매카트니
(Clarence Macartney)와 다른 사람들이 메이첸의 염세주의적
교회관에 공감하 지 않고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이사직을 사임하고
북장로교(PCUSA)에 잔류하기 로 결정했다. “전투적인 개혁주의 운동”이
새로운 학교, 교단, 선교회에서 시작된 것이다.
교수들 사이에 종말론을 두고 견해차가 심하게 노출하여 교단 분열의 조짐까지 나타나기 시작했다. 알랜 매크래, 올리버 부스웰, 그리고 칼 매킨타이어와 같이 새로 설립된 교단 안에는 비록 개혁주의이기는 하지만 “근본주의 운동 내에서 널리 퍼져 있는 견해들을 공유”하는 “완전 금연 및 금주를 적극 찬성하는 전천년주의자들”이었다. 당시 대체로 무천년설의 입장을 취하고 있던 상당수의 웨스트민스터 교수들과 새로 설립된 교단 지도자들은 비록 전천년주의에 관용적이었지만 세대주의는 철저하게 거부했다.
박윤선이 이 학교에 수학하던 1934년부터 1939년까지 메이첸(Gresham Machen)
과 반틸(Conelius Van Til)이 절대적인 영향력을 미치며 이 학교의
학풍을 주도하고 있었다.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안에는 메이첸을 구 프린스톤 신학
이, 반틸을 통해 화란 칼빈주의 신학이 하나로 조화를 이루며 개혁주의
유산을 풍요롭게 만들어 준 것이다.
비록 종말론에 있어서 역사적 전천년설을 견지하고 있었지만 박윤선은 전형적인 개혁주의 신학자였다. 박형룡 박사가 구 프린스톤의 영향을 받아 “영미에 서의 청교도 개혁주의 신학”이라는 용어를 선호한 반면 박윤선은 구 프린스톤 개혁주의와 화란개혁주의를 포함한 의미의 개혁주의를 선호했다.
그는 개혁주의라는 용어가 널리 사용하여 한국교회 안에 개혁주의를 정착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감당했다. 그가 고려신학교, 개혁신학교, 합동신학교를 설립한 것도, <파수군>, <신학지남>, <신학정론>을 비롯한
수많은 신학지와 교계신문에 논문을 쓴 것도, 일생에 걸쳐 방대한 주석을 집필한
것도, 고신, 총신, 합신을 비롯 신학교 강단에서 소리 높여 외쳤던 것도 모두
칼빈주의 개혁주의 신앙에 대한 열망 때문이었다.
III. 박윤선과 합신동신학교: “칼빈주의 개혁신앙의 대변자”
고신에서의
14년의 교수 생활이 박윤선을 고려파의 대표적인 신학자로 만들어 주었고,
총신에서의 17년의 교수생활이 더 나아가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신학자로
만들어주었다면, 1988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8년 간의 합신에서의 교수 생활은 그를 한국교회에 뿌리내린 교권주의에 맞선 칼빈주의 개혁신앙의 대변자로 만들어주었다.
그가
1980년 총신을 이탈하여 합신을 설립한 것에 대한 평가는 어느 쪽에 있느냐에
따라 평가가 엇갈릴 것이다. 솔직하게 필자는 이 부분에 있어 당시 역사의
현장을 체험하지 못했고, 또 총신에 몸담고 있기 때문에 역사적 평가가 쉽지
않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단순히 하나의 신학교가 설립된 것으로 끝나지 않고
또 하나의 장로교단이 설립되었다는 의미에서 합동신학교 설립은 “그 자신뿐만
아니라 한국교회의 최근 역사에서 매우 중대한 사건”이었음에 틀림없다.
문제의 발단은 학생들이 학교 문제에 불만을 토로하고 시정을 촉구하면서
발화되었고, 학교 당국과 이사회가 이 문제 해결에 적극 나서지 않고
교권주의로 학생들의 요구를 묵살하고 그 중심 학생들을 중징계하면서 해결할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닫게 되었다는 것이다. 정의감에 불타는 학생들은 거룩해야
할 신학교 운영이 정상적으로 운영되지 못하고 있다고 보고 신학교 개혁을
요구하고 나섰다.
새로 설립된 신학교는 1982년 11월 9일 수원에 학교 부지를 매입했고, 이듬해 1983년 9월 교육부로부터 학교법인으로 설립인가를 받고 778평의 본관건물도 완성했다. 1983년 4월 10일 합동신학교의 기관지 <신학정론>도 출간 합동
신학교는 신학교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1980년 처음 이 학교가 설립할 때부터 학교가 지향하는 이상은 분명했다. 합동신학교 20년사가 밝히는 신학교 설립 이유는 “교권주의자들의 횡포,” “지역주의가 빚은 총회 분열,” “교단을 방관하는 잘못된 교회관,” “교리와 생활이 분리된 형식주의”를 개혁하기 위해 “교육자의 양심을 지키는 길을 선택”했다는 것이다.
합동신학교는 탈교권주의, 선명한 개혁주의 구현, 미국 웨스트민스터 풍의 신학교, 개혁세력의 구축과 선명한 개혁신학의 표방, 소수 정예의 신학교육으로 한국교회 안에 분명한 개혁 세력으로 자신들의 몫을 충실히 감당해왔다.
IV. 한국교회사에서 박윤선의 위치와 의의
1993년에
접어들어 장로회신학대학교 한숭홍 교수는 <목회와 신학>에 기고한 세
편의 논고 “박윤선 신학사상”에서 박윤선이 남긴 긍정적인 공헌으로 성경주석와
정통보수주의 신앙형성 두 가지를 든 후 다음과 같이 결론 내렸다.
박윤선 신학은 “결국 초기에는 박형룡식의 정통보수주의, 미국유학시절에는 칼빈주의, 해방 후에는 형식주의적 성결주의(=독단적 배타주의), 후기에 와서 는 관용적 개혁주의로 변했고 그래서 다양성을 갖게 되었다.” 이 같은 평가는 박윤선의 신학사상을 그의 생애에 따라, 평신재학시절, 웨스트민스터 재학
시절, 고려신학교 재직시절, 총신과 합신의 재직시절로 분류하고 나름대로
분석하여 내린 결론이다.
과연 박윤선 사상이 시대와 흐름을 따라 변천을 맞았는가? 정암 자신의 고백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가장 분명하고 확실한 변천은 평신과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시절 사이의 변천이다. 박윤선은 평양신학교 시절에는 정통주의 신학, 보수주의 신학을 섭렵했으면서도 분명한 칼빈주의 개혁주의 신학 교육을 받지 못했고,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 와서 칼빈주의 개혁주의 신학을 선명하게 접하고 그 입장을 그대로 받아들이게 되었다고 몇 차례 고백하였다.
하지만 고려신학교 시절 그의 신학이 형식주의적 성결주의나 독단적 배타주의이고, 총신과 합신에 와서는 관용적 개혁주의로 변했다는 평가는 정확한 평가는 아니다. 고려신학교에서 재직하는 동안 웨스트민스터 메이첸과 반틸 풍의 성경의 무오 사상에 근거한 철저한 개혁주의 전통을 견지하면서 회개를 촉구했고, 교회건물보다 영적 생명력을 더 중시하고, 기계적이고 형식적인 안식일 준수 개념보다 신앙의 자율이 뒷받침된 주일성수를 주창했다는 점에서 박 윤선의 신학은 “형식주의적 성결주의나 독단적 배타주의”는 아니다.
물론 시각에 따라 견해를 달리하겠지만 필자의 관점에서는 1936년 그의 공식 적인 첫 사역인 표준성경주석 편집 일을 맡은 후 봉천신학교, 고려신학교, 개혁신학교, 총회신학교, 그리고 합동신학교에서 교수사역, 40여년에 걸친 신구약 성경 66권의 주석 집필, 봉천 모 교회, 진해 모 교회, 동산교회, 부산
모교회, 한성교회 등에서 주일강단을 지켜오면서 박윤선이 한국교회사에 남긴
가장 큰 유산은 아마도 칼빈주의 개혁신학, 주경주석, 교회를 위한 신학,
그리고 삶이 동반된 신학으로 집약할 수 있을 듯하다.
마치는 말
정암 박윤선은 한국이 낳은 참으로 위대한 신학자이다. 그가 이룬
업적이 그렇고, 그가 가르친 신학이 그렇고, 그가 보여준 삶이 그렇다. 분명
그는 평양 신학교, 봉천신학교, 고려신학교, 개혁신학교, 총회신학교, 그리고
합동신학교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생애를 신학교에서 몸담아왔고, 신학교육을 통해
수 많은 목회자를 배출했으며, 주석을 통해 교파와 교단을 초월하여 한국교회
강단을 풍요롭게 만들어주었다.
그는 자신의 생애 동안 어느 한 교단이나 신학교에 소속을 분명히 했지만 강단에서의 그의 사역은 한국교회를 위한 신학의 구현이었다. 따라서 그는 전국적인 인물로 존경을 받아야 하고, 한국교회는 그를 통해 경건과 학문이 신앙의 인격 속에 어우러진 훌륭한 모델을 배출한 것으로 인해 감사해야 한다. 이 제 한국교회에서 “한국교회와 정암 박윤선의 역사적 의의”를 마무리하면서
몇 가지 평가와 함께 제언을 하고자 한다.
첫째, 합동신학교는 박윤선을 자신들의 전유물로 만들지 말아야 한다. 비록 박윤선이 자신의 생애 말년 총신을 이탈하여 합동신학교와 한 교단을 설립했지만 그 일차적 동기가 한국교회가 역사적 개혁주의, 전통적인 칼빈주의 신앙의 토대 위에 구축하기를 바라는 염원에서라고 볼 때 합동신학교는 박윤선을
자신들의 전유물로 만들지 않아야 하고, 실제로 이를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한상동 목사를 고신의 전유물로 고착시키는 오류를 범함으로 고신과
고려파에서는 큰 인물로 존경받으면서도 여타 교단에서는 다른 이미지를 갖고
있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둘째, 이를 위해서는 정암은 일생동안 함께 동역해 온 박형룡 박사와 지나치게 차별화 시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박윤선과 박형룡은 몇 가지 점에서 시각적 차를 보인 것이 사실이지만 한국교회가 보수주의, 칼빈주의 노선에 확 하게 서야 한다는 점에서는 일치했다.
박윤선은 평양신학교에서부터 사제 관계로 박형룡 박사와 관계를 맺기 시작한 이후 표준성경주석 출간, 봉천신학교, 고려신학교, 총회신학교에 이르기까지 박형룡과 동역하면서 직간접으로 그의 영향을 지대하게 받았다. 정암이 성경의 무오성과 완전-유기적-축자영감론을 견지하고 종말론에 있어서도 웨스트 민스터 신학교의 분위기와 달리 역사적 전천년설의 입장을 취한 것도 어느 정도는 박형룡의 영향이 작용했을 것이다. 박윤선을 한국교회 신학자로 부각시키기 위해서도 박형룡과의 지나친 차별화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셋째, 박윤선이 구 프린스톤 개혁주의와 화란 개혁주의 전통을 자신의
신학 속에 종합하려는 노력을 기울였고, 실제로 그의 작품에 화란 칼빈주의
신학자 들을 상당히 인용하여 그들의 작품에서 자양분을 섭렵했지만 실제로는 화란
개혁주의의 특징이 박윤선의 신학에 일관되게 반영된 것은 아니다.
조지 말스던이 지적한 것처럼 화란개혁주의의 특징은 개혁주의자라고 했을
때 “기독교와 문화와의 관계에 대해 확실한 견해를 갖고 있는 자들을
말한다.” 화란개혁주의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
세계-인생관(World-and-life view)
이 박윤선의 신학에는
약했다. 구 프린스톤의 개혁주의 위에 화란 칼빈주의를 받아들였고, 반틸의
전제주의적 변증학을 수용하고, 그가 말한 유추적 사유를 ‘계시의존사색“이라는
말로 수용하였지만 반틸과는 달리 계시를 성경에 국한시켰다.
따라서 성경을 신앙과
삶의 정확무오한 법칙으로 수용하는 한국장로교와 잘 조화를 이루어 한국교회에
선명한 보수적인 칼빈주의 신앙을 정착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지만 본의
아니게 화란 개혁주의 전통에서 소중하게 다루는 자연계시 영역이 사역 및 삶의
전 영역에서 충실하게 구현하도록 만드는 데는 한계를 노출했다.
넷째, 박윤선은 역사적 칼빈주의와 전통적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을
한국이라는 토양 속에 어느 정도는 한국적 칼빈주의, 한국적 개혁주의로
수정시키는 역할을 했다는 사실이다. 이 말이 역사적 칼빈주의와 개혁주의의
전통과 성격 그리고 신학을 훼손했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더구나 한국적
방식으로 토착화시켰다는 의미도 아니다.
정암은 오히려 한국의 실정 속에서 기왕의 선교사들과 한국교회 1세대 신학자들이 구축해 놓은 신학적 작업을 존중하면서 칼빈주의와 개혁주의 기치를 선명하게 내걸었다는 사실이다. 그 단적인 예가 역사적 전천년설이다. 요한계시록을 깊이 묵상하고 연구하는 가운데 역사적 전천년설이 성경이 가르치는 종말론이라고 확신했던 것이다. 종말론이 보여주듯 칼빈주의 전통 역시 성경의 가르침을 통해 해석하고 평가한 것이다.
다섯째, 박윤선은 자신의 신앙양심에 따라 소신껏 자신의 의견을 개진했고, 이 때문에 교단 및 신학교 방향을 놓고 종종 소위 교권주의와의 의견 대립과 갈등이 빚어져, 결국에는 자의든 타의든 교단을 떠나 새로운 신학교와 교단을 설립했다. 교권주의의 등장이 신학교육의 자율성을 침해하고 전통적인 칼빈주의 개혁신학의 구현을 심각하게 침해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곧 신학의 변천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박윤선이 관여된 교단의 분열이 교회 사적으로 정당성을 갖는 데는 한계가 있다.
분명 약점과 한계에도 불구하고 박윤선 목사는 해방 이후 박형룡, 한경직과 더불어 한국교회를 빛낸 가장 위대한 인물 가운데 하나로 평가받기에 손색이 없을 것이다. 교파와 교단과 신학적 입장을 초월하여 아마도 한국교회 역사를 진지하게 연구한 이들이라면 예외 없이 여기에 동의할 것이다. 정암이 남긴 신학교육, 주석, 설교는 먼 훗날 더 놀라운 결실로 역사 앞에 다가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