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윤익 교수 정년기념 원고
“형, 아우~” 잊을 수 없는 영원한 동반자~
장윤우(성신여대 명예교수, 한국문인협회 수석부이사장/월간문학발행인, 시인)
장윤익~
이분을 어디에서부터 시작하면 대체적인 모습이 그려질까.
우리 문단의 별, 교육계에 한 軸을 이룬 거목.
그저 내가 겪은 斷面만을 두서없이 적어놓으련다.
내가 그를 처음 만난 것은 1960년대가 마악 시작되는 무렵 서울에서였다고 생각된다.
그 무렵 정국은 전쟁이후의 피폐함이 아직 가셔지질 않은 스산한 모습이였고 따라서 학교교육도 본격적인 가동이라고 보기가 힘들었었다. 무슨 일이 터질 때마다 우리는 수업은 제쳐놓고 “관제 데모”에 동원되기가 일쑤였다.
아직 북한공산당의 위협과 사회불안이 해소되 않고 이를 기회로, 아니 독재자의 통치수단의 방법인지도 모른다만 여하간 전국적으로 학생들의 군사훈련으로 교내엔 교관이 상주하고 있었다. 감수성이 예민하던 시절이었다. 서울고등학교안에서 나는 교내신문반에 가입하였다. 문예면을 다루면서 어쩌면 내 꿈을 펼치게 될런지도 모른다는 작은 희망이 도사렸다. 다불로이드 판 4면 신문에는 마침 후배인 황동규,마종기,갈천문과 박동규등이 자주 등장하였고 나는 그 뒤를 따른다고 보아야 했다.
문학에 향하는 갈증은 어느곳으로든지 표출되기 마련이다. 여기저기 새벗,어린이, 소년잡지건 성인물이건 가리지 않고 투고를 하였다.
그리고 해당잡지가 서점가에 나오면 뛰여가서 우선 문예란부터 훑어 보았다.
희비쌍곡선~
실리기도하고 안실리기도 하지만 개의치 않고 누구의 작품이 실려있는가를 열심히 살폈다.
특히 <학원>잡지가 초점이었다. 당시 인기가 절정이였다. 시가 두어번, 산문이 두어번.... 그런 가운데서 머얼리 대구에서 오는 글도 눈에 띄였다. 장윤익이라는 (대구사범중학생)-
나와 비슷한 이름이었다. 그는 누구일까 어떻게 생겼을까.
얼마 후에 드디여 그 학셍을 만나게 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이른바 중앙학도호국단에서 주최한 기관지 <학생주보>작품공모에 나는 “시”로서 그는 중학생부 “산문부”에 나란하게 당선되었던 것이었다.
시상식장에 나타난 그의 첫 모습은 동굴동굴한 얼굴에 유난하게 커다란 눈망울이 시언스럽게 생겼다. 같은 성씨에 비슷한 이름이 어디 그리 흔한가 우리는 대번에 친하게 되였고 대구로 다시 내려간 이후로도 서신왕래가 있었다.
자연스럽게 “형~ 아우~”가 되여진 것이다.
그 무렵 그의 소개라기보다는 같은 학생문학도로서 경주의 서영수 대구의 김원중도 겻드리게 되였으니 2인 시집 <별과 야학>은 어린 학도로서 대단한 인기를 뫃았다.
장윤익은 대구에서 진학하여 대구사범학교 본과와 영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로 진학하였다.
서울 서라벌 예술대로 진학한 서영수는 우리집에 찾아와 함께 자고 놀기도하며 그의 대학등록금을 내가 대신 찾아가 대납하기도 했다.
장윤익의 문학에 대한 열정은 아마도 누구보다도 끓어올랐던 것으로 안다 그곳에 원화여고 국어교사로서 근무하면서도 중앙문단에 가는 관심은 결국 이뤄지게 되였으니 서울 명지여고에 교직자리가 마련된 것이다.
터전을박차고 멀리 서울로 올라와야 하는가에 대한 苦心을 내게 털어놓던 그의 모습이 아직 서언하다.
“장형! 힘을 내시게, 역시 당신같은 큰 존재는 큰 물로 가야해!”
이후 나보다도 더 많은 절친한 교우관계가 있게 되고 그는 보이지 않는 흡인력이 있으며 사교적이라서 장래의 성공은 거의 약속된거나 다름없었다.
그렇다 치열한 작가정신과 끝장을 보는 열의는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평론당선이란 “장원급제”를 당당하게 안았다 대학강의와 문예지에 묵직한 집필도 지속적이었다. 22회 조연현문학상수상. 그리고 국제언어문학회장, 이력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대구소년 장윤익의 아름답고도 어찌보면 여성스런 섬세함이 오늘- 대학 총장에... 박목월 기념사업위원회 책임자의 위치에까지 단숨에 다달으게 하지 않았는가.
이제 中老의 장박사는 뛰어온 과거를 어떻게 정리하고 있는가. 그가 남긴 숱한 업적들- 평론계와 제자양성과 학교운영능력 등에서 어떤 귀결점을 구상하고 있는가 자못 궁금하다. 그간에 받은 각종 수상도 그의 진면목을 다 헤아리지 못한다.
서울 명동의 한구석에서 1960년초에 만났던 10대의 어린 시골학생이 오늘- 국내외에서 주시하는 유력인사로서 그의 일거수일투족이 주시(注視)속에서 살고 있으니 <인생무상>이 바로 이런게 아닌가 느껴진다. 어느날 밤- 달동네 금호동 꼭대기로 달려 올라가던 일이며~ 서대문에 <시문학>잡지사 부근에서 질타하게 마시던 酒席, 그가 분규에 휘말려 잠시 교직을 비운 사이에 만나고 격려하던 아현동 출판사 사무실시절~
같히 의기 투합하여 걷고 또 동반하며 마셔댄 人情어린 술은 얼마나 될까. 간간히 내 졸시에 얹어준 귀한 글(玉稿)에 대한 예의도 잘 갗추지 못한 나는 영원한 빚쟁이다. 그가 정년을 맞이하게된다니~ 믿어지지가 않는다.
허나 장윤익 평론가의 세계는 오히려 이제부터라고 여긴다. 불굴의 정신, 문학에 대한 집념과 업적은 앞으로가 더 큰 시금석이며 文壇史에 길이 귀감이 될 일이다.
교환 교수로서 프랑스에서 익혀온 세련된 매너와 안면에 늘 띄우고 있는 미소~
평생을 더불어 살아가는 친구 장윤익, 학자로서 길이 남으라, 한국문단사에 신기원(에폭)을 이룩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