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떡돌들을 데려다 가르친다 해도 변화는 금방 됩니다. 금방 하나님의 형상으로, 예수님의 형상으로 새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심지가 견고치 못한, 줏대 없는 떡돌들은 완전한 하나님의 형상으로 새겨서 하늘에 데려다 놓는다 할지라도 금방 변질되어서 또 죄를 짓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번 하나님의 형상으로, 예수님의 형상으로 새겨 놓으면 영원토록 죄 짓지 않는 완전한 참돌들, 심지가 견고한 참돌들만 택하셔서 하나님의 형상을 아로새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비용을 투자해서라도 견고하고 단단한 돌을 사오는 것입니다. 이러한 심지가 견고한 참돌은 오랜 세월이 지나도 변치 않기 때문에 투자할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가치는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얻으시기 위하여 얼마나 투자를 하셨는가를 생각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만일 어떠한 사업에 1억을 투자해서 8천만원밖에 거두지 못한다면 그 사업에 투자할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적어도 1억을 투자하면 두배인 2억이나 그 이상의 소득을 기대하고 투자하려고 할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도 온 우주보다 더 귀중한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투자하여 우리들을 얻으신 것을 볼 때 우리들의 가치는 투자하신 예수님의 가치 이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옛날 독일에 짓궂은 황제 한 분이 있었는데 제후들을 다 모아 놓은 자리에서 “여보게 경들! 짐의 몸값이 얼마나 나간다고 생각하는고?” 하고 묻는 것이었습니다. 황제 폐하의 몸값을 얘기하라고 하니 어느 누가 감히 말할 수 있었겠습니까? 꿀 먹은 벙어리와 같이 아무 소리 못하고 가만히 앉아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중에 짓궂은 제후 한 사람이 “예, 폐하의 몸값은 27원입니다.” “예끼! 나를 …. 짐을 27원이라고 ….” “아니, 하늘에서 오신 예수님도 30원에 팔렸는데 폐하는 조금 못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모두 웃었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의 몸값이 얼마나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최소한도 예수님 이상의 몸값입니다. 1억을 투자해서 8천만원을 얻는 사람은 없습니다. 적어도 본전 이상이 나와야 투자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을 위해서 하늘의 어마어마한 천군들이 전부 대동되었고, 하늘 아버지와 성령님, 그리고 예수님을 완전히 투자해서 우리들 하나하나를 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벌레만도 못한 것’이라는 그런 기도를 다시는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세계의 대통령을 다 묶어다 놓아도 우리들 하나와 바꿀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나는 성질이 이렇게 괴팍하다니까. 나는 천당에 못 가겠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떡돌은 깨뜨려 놓으면 문드르르해서 서슬이 시퍼렇지도 않고, 사람을 상하게 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참돌은 쪼개 놓으면 서슬이 시퍼래서 사람을 찌르고 잘못하면 베어서 피가 납니다. 왜냐하면 참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집안에서 남편을 찌르고, 아내를 못살게 굴고 하는 것은 참돌이라서 그런 것입니다. 그것을 좋아하시고 끝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반짝반짝하게 완전히 다듬어서 하나님의 형상을 한번 아로새기면 천국에 올려 놓아도 영원토록 변질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불공평하신 분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을 똑같이 사랑하시지만 눈물을 머금고 여기저기서 하나씩만 택하시는 것입니다. 떡돌들을 택하여 하늘에 옮겨 놓으면 금방 또 죄를 짓고 문드러지기 때문에 눈물을 머금고 저 일본에서, 저 필리핀에서, 저 미국에서, 저 서울 끝에서, 몇천명 나가는 교단에서 한 두 사람, 몇만명 나가는 교단에서 두세 사람 끌어오고 마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으면 보세품이 되어서 빠져 나가지 않도록 완성품들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께서 …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육으로 난 것은 (어디까지나)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어디까지나) 영이니」 「사람이 …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 3:3, 7, 6, 5).
우리가 50살, 100살을 살아도 육은 영원히 육입니다. 10살, 20살이라도 영으로 난 사람은 영입니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나셨다.” 하고 흔히 말하지만 우리들도 또한 성령으로 나야 합니다. 다만 시간적으로 그분은 빨리 나고, 우리들은 늦게 날 뿐입니다.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참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시고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 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눅 11:9, 요 15:1, 2).
많은 교회들이 왜 중생, 성화의 열매가 없는지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하늘의 농부의 손이 가지 않는다면 수십년, 수백년이 넘어도 성화의 열매가 달리지 않는 것입니다. 분명히 예수께서 하늘의 농부는 하나님 아버지라고 하셨는데 하나님 아버지는 필요 없다고 외면하고 ‘예수면 다’라고 외치고 있다면 열매가 달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과나무 같은 것은 몇십년을 길렀든지간에 1년만 농부의 손이 안 가면 다 폐수가 되어서 캐내야 합니다. 강원도 동해의 어떤 분이, 이삼십년을 잘 가꾼 사과나무인데 그 해에는 맡길 사람이 없어서 한 해를 묵혔습니다. 단 한 해를 묵혔는데 사과나무가 완전히 폐수가 되어 못 쓰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눈물을 머금고 그 공들인 사과나무를 다 캐냈습니다.
그런데 수많은 세월 동안 하늘의 농부의 손이 근처도 안 가고, 농부이신 친아버지를 마귀라고 하며 “예수면 됐지 하늘 아버지가 뭐 필요하냐?”고 다 도망간다면 비록 큰 교회라 할지라도 폐수가 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쓸모 없는 폐수들을 결국 내버리는 것입니다.
모든 밭의 곡식들이 잘 되고 못 되고, 모든 과수원의 나무들이 열매를 잘 결실하고 못 결실하는 것은 오직 그 농부의 손에 달려 있듯이 이 땅에 사는 모든 인간 나무들의 품성의 열매가 잘 맺히고 못 맺히는 것은 오직 천지의 「주인」(눅 13:8) 되신 하늘 아버지 크신 「농부」(요 15:1)의 손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우주의 가장 부지런하신 「농부」(요 15:1) 우리 하늘 아버지께서는 우리의 마음과 품성 가운데 못된 성질과 모난 품성의 가지들은 당신의 손의 전정 가위로 「이를 제해 버리시고」(요 15:2) 좋은 마음과 품성의 가지들은 잘 기르시고 가꾸신 후 좋은 열매 맺은 나무들을 골라서 저 하늘 당신의 아름다운 동산으로 파서 옮겨 심으시는 것입니다.
「대저 만군의 여호와의 포도원은 이스라엘 족속이요 그의 기뻐하시는 나무는 유다 사람이라」(사 5:7).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 하려 함이니라」(요 15:16). 과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과실을 맺는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 5:22, 23).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시고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 하여 이를」 더욱 「깨끗케 하시느니라」(요 15:2).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 좋은 열매 …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마 21:43, 마 7:21, 마 3:10, 마 21:43)고 말씀하십니다.
기록자가 회중들 앞에 설 때마다 가끔 그 앞에 모인 신자들에게 이런 질문을 해봅니다.
“여러분, 여러분께서는 참으로 예수님의 제자들이십니까?”
“예, 예수님의 참제자들이지요.”
“그러면 여러분은 구원 받으셨다고 확신하십니까?”
“예, 확신하지요. 구원 받았습니다.”
이렇게 질문마다 대답들이 시원시원한 것을 듣게 됩니다. 그러나 나는 여기에서 대화를 그치지 아니하고 다시 계속합니다.
“그러면 여러분의 말씀과 대답대로 과연 우리가 예수님의 참제자요 참으로 구원 받은 백성들인지 성경으로 확인해 보십시다.” 이리하여 우리는 성경을 펴서 읽기 시작합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요 15:8). 「오직」 과실은 「성령의 열매 …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라(갈 5:22, 23).
오직 「그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 성령의 열매를 많이 맺겠으며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마 7:16, 17)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내 제자도 아니요 또한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라(갈 5:19-21).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마 21:43).
「너희가 …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 라」(고후 13:5, 갈 6:7).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 열매는 맺지 아니하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이미」 심판의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어 불에 던지우리라」(마 3:8-10). 이리하여 우리들의 대화는 끝나게 되며 우리들은 엄숙히 자신을 살피며 하나님 앞에 통회의 기도를 드리게 됩니다.
진실로 하늘의 후사, 하나님의 가족이 되는 조건은 세속적 계급이나 혈통이나 국적이 아니요 또는 종교적 특권도 아닙니다. 오직 사랑이니 전 인류를 사랑하는 하나님의 품성을 가진 자가 곧 하늘의 후사요 하나님의 자녀들인 것입니다.
다시 이야기는 크신 「농부」(요 15:1) 하늘 아버지께로 돌아갑니다. 그분께서는 우리들에게 지금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인자야 포도나무가 모든 나무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랴 … 그 나무를 가지고 무엇을 제조할 수 있겠느냐 그것으로 무슨 그릇을 걸 못을 만들 수 있겠느냐 불에 던질 화목이 될 뿐이라」(겔 15:2-4).
‘인자야’ 하는 것은 우리 자녀들을 부르시는 우리 아버지의 음성입니다. “막둥아! 포도나무가 모든 나무보다 더 나은 것이 무엇이냐? 무엇이 잘생겼느냐? 그 나무를 가지고 무엇을 제조할 수 있겠느냐? 소구유를 파겠느냐? 함박을 파겠느냐? 아니면 서까래를 만들겠느냐? 아니면 작대기를 만들겠느냐? 아무짝에도 쓸데없어 다만 화목에 던질 뿐이라.”
그렇습니다. 포도나무가 모든 나무 가운데 이름이 뛰어나며 모든 과목 가운데 가장 아름답게 불리워지는 것은 그 나무 자체가 아름답거나 예뻐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 포도나무는 모든 나무 가운데 가장 아름답지 못하며 쓸모도 없는 나무로서 그것을 가지고 무슨 그릇도, 못도, 또한 집을 건축하는 재료로도 쓸 수 없는 다만 불에 던질 수밖에 없는 나무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 포도나무가 세상에서 그토록 아름답게 불리워지는 것은 오직 한 가지 그 포도나무에 달린 열매 때문인 것입니다. 그 열매가 그 포도나무 전체를 아름답게 하여 주며 모든 밉거나 부족한 점들을 온전히 감싸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아름다운 열매가 없고 보면 그 포도나무는 세상의 모든 나무 가운데 가장 쓸모 없고 비참한 미운 나무가 되는 것입니다.
포도나무를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전라도에 살 때 논 천평, 밭 천평, 포도원을 하나님께서 주셨는데, 포도나무를 가꾸다 보니까 얼마나 손이 많이 가는지, 거름 주어야지, 전정해야지, 봉지 씌워 주어야지, 약 쳐주어야지, 따야지, 팔아야지, 참으로 바쁩니다. 생전 농사도 안 짓던 사람이 논농사, 밭농사, 포도원까지 있으니까 정신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가을에 결심을 했습니다. 우리 아버지께서 나를 이곳에 보내신 것은 영혼의 포도밭을 가꾸라고 보내셨지, 입으로 들어가는 포도밭을 가꾸라고 보내셨는가? 하고 캐내기 시작했습니다. 그 포도나무 열매가 맛있기로 유명한 열매입니다. 다른 동네에서까지 그곳으로 먹으러 옵니다. 그런데 이것을 캐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동네 사람들이 “그 맛있는 포도나무를 왜 캐내십니까?” 하고 안타까워 해도 주인이 캐니 어쩔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인에게 잘 보여야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교회에서 인정하고 세상에서 인정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하늘의 우주 대왕 주인에게 사랑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두번째 오셔서 「아버지께 사랑 받은 자들이여, 창세로부터 너희 아버지께서 예비한 나라를 상속하라」(마 25:34)고 하늘의 주인 되신 분께 인정 받고 사랑 받은 자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인에게 사랑을 받아야 합니다.
나는 포도나무를 평상시에 존경을 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자신을 가리켜 포도나무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포도나무는 나무 중에 왕이구나.” 했는데, 열매도 없고, 낙엽이 떨어진 그 포도나무를 캐면서 얼마나 실망을 했는지 모릅니다. 세상에, 어쩌면 그렇게도 못생겼는지 꾸불텅꾸불텅하고, 흥청흥청하여 지게 작대기 하나 안 나옵니다.
성경에 우리 아버지께서는 화목은 할 수 있다고 하셨는데 나는 화목도 못하였습니다. 꾸불텅꾸불텅해서 그것을 아궁이에다 집어넣으면 아궁이가 다 무너집니다. 그래서 캐서 내버렸습니다. 내가 포도나무에게 그렇게 실망당한 것은 일생에 처음이었습니다. 정말 포도나무가 그렇게 못생긴 것은 처음 보았습니다.
이 포도나무는 우리들 곧 나 자신이니 「대저 만군의 여호와의 포도원은 이스라엘 족속이요 그의 기뻐하시는 나무는 유다 사람이라」(사 5:7).
그런데 왜 예수님은 우리를 그렇게 못생긴 포도나무라고 하셨는가? 그것은 이렇게 못생긴 포도나무라도 일단 중생의 열매만 달렸다 하면 왕 중의 왕, 나무 중의 왕입니다. 포도 열매는 피를 만들어 줍니다. 우리의 생명은 피에 있습니다. 그래서 포도나무는 우리에게 생명을 공급하는 나무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교회라는 것은 비록 못생겼을지라도 이 세상에 죽지 않는 영생을 나누어 주는 인간 통로들이기 때문에 포도나무라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이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다면 그 포도나무는 세상의 모든 나무 가운데 가장 쓸모 없고 비참한 미운 나무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일단 우리들에게 하늘의 중생과 성화의 열매가 달렸다 하면 이 세상 대통령 천명을 모아다 놓아도 바꿀 수 없는 것입니다. 열매가 달리기만 한다면 단연 왕 중의 왕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가 중생, 성화의 열매를 맺지 않으면 아무짝에도 쓸데없고, 멀쩡한 사람들을 다 데려다가 전부 도둑질해서 먹는 장사밖에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들이 중생과 성화의 열매만 달린다면 이 세상에 왕중 왕들이 되는 것입니다. 교회들은 하늘의 하나님께서, 또 예수께서 이 세상에 생명을 나누어 주는 매개체로 세운 것입니다.
「주께서 한 포도나무를 애굽(세상)에서 가져다가 … 이를 심으셨나이다」. 이는 「주의 오른손으로 심으신 줄기요 주를 위하여 힘있게 하신 가지」(시 80:8, 15)라.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사 5:2)으셨도다. 그리고 「가지를 자름」과 「북을 돋우」시며 「또 구름을 명하여 그 위에 비를 내리」(사 5:6)게 하시되 「이른비와 늦은비」(욜 2:23)를 내리게 하시며 「그 해를 … 비취게 하시며」(마 5:45) 「두루 파고 거름을 주」(눅 13:8)셨도다.
그리고 나서 열매를 맺어 세상에 영생을 나누어 주는 매개체가 되기를 바라셨는데 어떻게 되었는가? 여기 우리 아버지의 한탄을 들어 봅시다.
이제 크신 「농부」(요 15:1)께서 가로되 「내가 내 포도원을 위하여 행한 것 외에 무엇을 더할 것이 있었으랴」. 내가 내 포도원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까지 아끼지 아니하고 내주었노라. 그러나 「좋은 포도 맺기를 기다렸거늘 들포도를 맺힘은 어찜인고」(사 5:4, 요 3:16). 「내가 너를 순전한 참종자 곧 귀한 포도나무로 심었거늘 내게 대하여 이방 포도나무의 악한 가지가 됨은 어찜이뇨」(렘 2:21). 「공평을 바라셨더니 도리어 포학이요 … 의로움을 바라셨더니 도리어 부르짖음이었도다」(사 5:7).
기록자는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우리 나라 어떤 지방에 배나무 과수원이 있는데 그 과수원 한쪽 밭에는 비료나 퇴비를 하지 않아도 다른 땅의 배나무들보다도 훨씬 많이 달리고 크고 굵은 배를 많이 수확한다는 것입니다. 그 까닭인즉 한국 6·25사변 당시 불의의 죽음을 당한 많은 선량한 백성들의 시체를 크고 넓은 구덩이를 파서 한꺼번에 묻었다는 것입니다. 그후 오랜 세월이 지난 뒤 아무 일도 모르는 사람들이 그 땅 위에다가 배나무들을 심어 놓고 보니 선량한 백성들이 묻혔던 곳에는 밑거름이 되어 그토록 해마다 큰 풍성한 수확을 가져오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만군의 여호와의 포도원 이스라엘 족속과 그의 기뻐하시는 포도나무 유다 사람들을 이처럼 사랑하신 하늘의 크신 「농부」(요 15:1) 하늘 아버지께서는 오직 이 유다의 포도나무들에게서 극상품 열매 맺히기만을 소원하여 자기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 예수를 이 포도밭(지구) 한 가운데 유다의 포도나무들 밑(갈바리)에 묻으시고 오직 한 가지 소원으로 좋은 밑거름 위에 좋은 열매 맺히기만을 손꼽아 기다리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말씀하시를 「내가 내 포도원을 위하여 행한 것 외에 무엇을 더 할 것이 있었으랴」. 나는 내 하나밖에 없는 내 아들까지 그 밑거름으로 주었노라(사 5:4).
그러나 그후 거룩한 농부의 입술에서는 실망과 낙담의 비통한 탄식 소리가 나왔으니 「내가 좋은 포도 맺기를 기다렸거늘 들포도를 맺힘은 어찜인고」(사 5:4)! 「내가 … 참종자 곧 귀한 포도나무로 심었거늘 내게 대하여 이방 포도나무의 악한 가지가 됨은 어찜이뇨」(렘 2:21)!
이리하여 크신 농부의 기대는 산산 조각이 나 버린 것입니다.
오! 오늘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좋은 열매(갈 5:22, 23), 품성의 거룩한 참열매는 없으면서도 말하기를 “나는 하나님의 자녀로다! 나는 하나님의 나라로 갈 것이다! 나는 구원 받았도다.”라고 허무맹랑한 소리를 외쳐 대는가? 저들은 하늘의 크신 농부를 이토록 배은 망덕, 크게 실망시켜 놓고 아무렇지도 않은 양 「주여 주여」 불러대며 여전히 희희낙락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만 헛죽여 버린 저 들포도, 저 거친 들포도원을 하늘의 농부께서 어떻게 할 것인가?
이제 우리는 거룩한 농부의 음성을 다시 들어 보겠습니다.
「이제 내가 내 포도원에 어떻게 행할 것을 너희에게 이르리라 내가 그 울타리를 걷어 먹힘을 당케 하며 그 담을 헐어 짓밟히게 할 것이요 내가 그것으로 황무케 하리니 다시는 가지를 자름이나 북을 돋우지 못하여 질려와 형극이 날 것이며 내가 또 구름을 명하여 그 위에 비를 내리지 말라 하리라」(사 5:5, 6). 「열흘갈이 포도원에 겨우 포도주 한 바트가 나겠고 한 호멜지기에는 간신히 한 에바가 나리라 하시도다」(사 5:10).
“이제는 내가 저 교회들을 다시는 돌보지 않고 그 울타리를 걷어 사단이 집어먹게 내버려 두고, 그 담을 헐어 사단이 들어가서 교회를 짓밟도록 내버려 두리니 교회가 황무해서 다시는 중생, 성화되지 않을 것이다. 또한 다시는 하늘 아버지께서 그들을 돌보아 주지 않으시리니, 그러므로 그 교인들의 품성은 서로 찌르는 가시 같은 흉악한 품성, 못된 성질만 이루어질 것이다. 그리고 다시는 이른비 성령과 늦은비 성령은 절대로 내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성읍에서 하나, 족속에서 둘만 구원 받고 말 것이다.”라는 말씀입니다.
오늘도 성경은 이스라엘을 향하여 외칩니다. 「이스라엘 족속아 돌이키고 돌이키라 너희 악한 길에서 떠나라 어찌 죽고자 하느냐」(겔 33:11). 「명령이 시행되기 전 광음이 겨같이 날아 지나가기 전 여호와의 진노가 너희에게 임하기 전 여호와의 분노의 날이 너희에게 이르기 전에 그리할지어다」(습 2:2). 「너희가 자기를 위하여 의를 심고 긍휼을 거두라 지금이 곧 여호와를 찾을 때니 너희 묵은 땅」 마음 밭「을 기경하라 마침내 여호와께서 임하사 의를 비처럼 너희에게 내리시리라」(호 10:12).
하나님을 아무리 잘 믿는다고 할지라도 가시 같은 품성으로 서로 찌르고, 서로 비난하고, 서로 물어 뜯는 곳에는 늦은비가 한 방울도 내리지 않고 오직 한 성읍에만 내리는데 그곳은 하나님을 배신하지 않는 거룩한 레위 성읍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친아버지께 돌아와 거룩한 레위 족속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당신의 자녀들을 벌하시는 데 마음 약하신 우리 친아버지께서 다시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스라엘아 네가 돌아오려거든 내게로 돌아오라 네가 만일 나의 목전에서 가증한 것을 버리고」 돌아와 「스스로 할례를 행하여 너희 마음 가죽을 베고 나 여호와께 속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 행악을 인하여 나의 분노가 불같이 발하여 사르리니 그것을 끌 자가 없으리라」(렘 4:1, 4).
「배역한 자식들아 돌아오라 내가 너희의 배역함을 고치리라」. 「나는 긍휼이 있는 자라 노를 한없이 품지 아니하느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렘 3:22, 12).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곧 … 거룩하고 흠없」는 품성으로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니) …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엡 1:3, 4, 벧전 1:3, 4).
오직 우리의 거룩한 품성의 열매를 위하여 밑거름으로 독자 예수 그리스도를 주시고 하늘의 단비로 성령을 한량없이 부어 주시며 친히 우리 품성의 가지들을 전정하사 아름답게 돌보시는 거룩하신 농부 우리 친아버지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을 세세토록 돌릴지로다. 할렐루야!
우리를 살리시려 독자 예수를 내주신 우리 친아버지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니라」(요일 3:1).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요일 4:9). 그는 「우리의 죄를 따라 처치하지 아니하시며 우리의 죄악을 따라 갚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하늘이 땅에서 높음같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그 인자하심이 크심이로다」(시 103:10, 11).
「여호와의 인자하심은 자기를 경외하는 자에게 영원부터 영원까지 이르 … 리니」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나니」라(시 103:17, 13).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 자기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 죄인들「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후 5:21). 하나님이 「오직 …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으니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벌 주고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요일 4:10, 요 3:17). 오! 이 얼마나 조건 없이 쏟으시는 하늘 아버지의 크나큰 사랑이신가!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요일 4:10).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 아들 예수「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 53:6). 이는 사망의 권세에 사로 잡혀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 이 땅의 자녀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이는 실로」 하늘의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 이 땅의 죄인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히 2:15, 16). 미쁘다, 이 말이여! 찬양치 아니할 자 없도다.
「하나님이 그 사람을 긍휼히 여기사 이르시기를 그를 건져서」 사망의 「구덩이에 내려가지 않게 하라 내가 대속물을 얻었」(욥 33:24)노라.
오! 이 얼마나 우리 하늘 아버지의 놀라운 사랑이신가! 만일 우리 아버지의 준비하심이 없었던들 이 땅의 어느 한 자녀인들 저 무서운 사망의 함정에서 피할 자 있었으랴.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요일 4:10, 19). 「아들(죄인)아 번제할 어린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창 22:8)셨느니라. 「너는 내게로 돌아오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음이니라」(사 44:22).
할렐루야! 「주께서 나의 영혼을 사랑하사 멸망의 구덩이에서 건지셨」(사 38:17)도다.
이러한 모든 증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선의 대적 사단은 사람의 마음을 어둡게 하였으므로 사람들은 사랑의 하나님을 공포심으로 대하게 되고 또 하나님을 가혹하고 용서성이 없는 이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사단은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은 그 주요 특성이 엄혹하게 처단하시는 자, 엄격한 법관이나 각박하고 인색한 고리 대금업자와 같이 생각하게 합니다. 또한 사단은 하늘 아버지는 사람들의 허물과 잘못을 찾아내어 저들에게 벌을 주려고 질투적 눈으로써 항상 주목하는 자처럼 보여 줍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인류 가운데 사시려고 오신 것은 그가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을 세상에 나타내심으로써 이러한 몽매한 오해를 없이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께서 하늘에서 강림하신 것은 하나님 아버지를 나타내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 1:18).
예수를 통하여 나타난 신령한 긍휼의 흐름은 하늘 아버지의 마음에서부터 흘러내려 인류에게 미친 것입니다. 자애로우시고 긍휼하신 구주 예수께서는 「육신으로 나타난」(딤전 3:16)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아들밖에는 아무도 우리의 구속을 완성시킬 수 없나니 이는 아버지의 품에 있는 자만이 능히 아버지를 나타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사랑의 높이와 깊이를 아는 자라야 그것을 드러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타락한 인류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드리신 무한한 희생이 아니고는 인류에 대한 사랑을 표현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하나님께서 그를 주신 것은 다만 인류 가운데 사시고 인류의 죄를 담당하시고 인류의 희생 제물로 죽게 하신 것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 아들을 타락한 인류에게 아주(영원히) 주셨습니다.
하나님과 일체이셨던 예수께서는 도무지 끊을 수 없는 줄로 그 자신을 인류에게 붙들어 매셨습니다. 그는 우리를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히 2:11)십니다. 그는 아버지의 보좌 앞에서 인성을 쓰신 우리의 희생 제물이시요, 우리의 중보자시요, 우리의 맏형님이시요, 영원한 시대를 통하여 당신의 구속하신 인류와 일체가 되신 인자(人子)이십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인류를 멸망과 죄의 타락에서 건져내시고 또한 인류로 하여금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반사시켜 거룩한 기쁨을 누리게 하시려 하심입니다.
우리의 구속을 위하여 치르신 대가 곧 그 아들을 주사 우리를 위하여 죽게 하신 하늘 아버지의 희생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가 어떠한 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의 고상한 관념을 우리로 가지게 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감동을 받은 사도 요한은 멸망할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높이와 깊이와 넓이를 보았을 때에 찬탄과 존경의 마음이 충만하여 이 사랑의 위대함과 그윽함을 표현할 적당한 언사를 찾지 못하여 세상을 향하여 「보라」라고 부르짖었습니다.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요일 3:1). 이것은 사람을 얼마나 가치있게 보심인가! 범죄로 말미암아서는 인류가 사단의 백성이 되었으나 그리스도의 속죄의 희생을 믿음으로 말미암아서는 아담의 자손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인성을 쓰심으로 인생을 고상하게 하셨습니다. 타락한 인류가 그리스도로 더불어 연합함으로 과연 「하나님의 자녀」라는 명분을 가지기에 합당한 처지에 있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사랑은 무엇으로든지 비교할 수 없습니다.
하늘 나라 왕의 자녀! 귀한 허락! 이는 가장 깊이 명상할 제목입니다.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 세상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 이러한 생각은 우리의 심령을 부드럽게 하며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게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품성을 십자가에 비추어서 연구할수록 그의 자비와 온유와 공평과 의로 섞인 사유(赦宥)를 깨닫게 되는 것이요, 또한 그의 무한하신 사랑의 무수한 증거와 자기의 불순종하는 자녀에 대한 인자한 어머니의 애정보다도 뛰어나는 인정 깊은 인자한 사랑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사람을 긍휼히 여기사 이르시기를 그를 건져서 구덩이에 내려가지 않게 하라 내가 대속물을 얻었다」(욥 33:24).
신라 시대에 만들어진 에밀레 종에는 슬픈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종을 만드는 데는 많은 돈이 들어갑니다. 많은 재정이 들어가기에 하나의 종을 만드는 데는 많은 정성이 기울여지는 것입니다. 신라의 임금은 나라에서 가장 훌륭한 기술자를 불러 임금과 나라를 위하여 종을 만들라고 분부했습니다. 종을 만드는 기술자는 많은 쇠를 준비하여 쇳물을 끓여 정성스럽게 종을 만들었지만 엄청난 돈을 들여 만든 종이 소리가 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저 ‘징’ 하는 탁한 소리만 날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깨뜨려 녹이고 다시 부어서 굳히고 꺼내서 쳐보지만 여전히 탁한 소리만 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계속 실패만 거듭하여 낙담하고 있을 때 지나던 어떤 사람이 “종소리가 유창하게 나려면 당신의 무남독녀 외딸을 끓는 쇳물에 집어넣으면 됩니다.” 하는 것이었습니다. 종을 만드는 기술자에게는 사랑하는 무남 독녀 외딸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딸을 너무나 사랑했기에 차마 죽일 수가 없었습니다. 많은 날을 고통스럽게 지내다가 드디어 종 기술자는 나라와 임금님을 위하여 딸을 바치기로 결심했습니다. 다시 쇠를 녹여 쇳물이 부글부글 끓고 있을 때, 그 사랑하는 딸, 하나밖에 없는 딸을 끓고 있는 쇳물 속으로 집어넣었습니다. 그러자 “엄마 -” 하고 울부짖으면서 펄펄 끓고 있는 쇳물 속에 떨어졌습니다. 눈물을 철철 흘리면서 종을 만든 후 높이 매달아 쳐보니 종소리가 유창하게 멀리까지 퍼져 나가는데 “에밀레 - 에밀레 -, 엄마! 엄마!” 하는 소리가 울려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에밀레 종이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우리 아버지께서 우리들에게 세상에 영생을 외치는 종이 되게 하기 위하여 하나밖에 없는 독자 예수님을 끓는 환난의 불 속에 집어넣어 죽이셨습니다. 우리들은 우리 아버지의 독생자를 죽인 그 쇳물에서 나온 종들이니 이제부터는 세계 끝까지 영생을 외치는 종들이 되어야겠습니다.
또한 우리 아버지와 예수께서 우리를 어떻게 구원하셨는가? 시골에 가면 개미 귀신이 있습니다. 이 개미 귀신은 개미가 제일 잘 다니는 길목, 모래 사장이나 흙에다가 함정을 파 놓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모습은 하나도 보이지 않게 흙 속에 숨어 있는 것입니다. 개미가 일단 이 함정에만 빠졌다 하면 주루룩 미끄러져서 헤어나오질 못합니다. 그리곤 어느새 개미 귀신이 나와서 개미의 피, 그 진액만 쫙 빨아먹고 껍데기는 버리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깨끗이 해 놓습니다. 그러니까 개미가 10마리가 빠졌든지, 100마리가 빠졌든지 흔적이 없는 것입니다.
하루는 개미 엄마가 그 아들에게 개미 귀신에 대한 교육을 시키려고 밖으로 데리고 나왔습니다. “얘, 아가!” “예, 엄마.” “여기 좀 봐요. 여기는 우리 개미들을 잡아먹으려고 하는 귀신이 함정을 파 놓은 곳이야. 그러니 여기서 내려가면 안 돼요.” “어디가? 귀신이 안 보이는데.” “글쎄, 저 속에 숨어 있단 말이야.” “뭐, 안 보이는데 …. 머리도 안 보이는데 ….” “글쎄, 있다니까.” 아무리 엄마가 일러주어도 이 아들이 믿지를 않는 것입니다.
이 믿음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서만의 행복이 아니고 온 우주가 믿음으로 연결되어서 사랑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모와 자식간에 믿음이 없으면 가정이 파탄되고, 부부 사이에 믿음이 없으면 이혼해야 하고,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믿음이 없으면 영원히 헤어져 죽어야 합니다. 믿음은 참 보배로운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 서로 형제끼리 믿고 사랑하며 사십시다.
그런데 개미 엄마가 아무리 설득해도 안 보인다는 것입니다. 귀신이 안 보이는데 어떻게 믿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 들어가서 숨바꼭질하며 놀겠다는 것입니다. 엄마가 아무리 설명을 해도 이 아이가 도무지 엄마의 말을 믿어 주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엄마는 결심을 했습니다. ‘내 한 목숨 죽어서 이 아들을 살리리라.’ 아들을 위에다 앉혀 놓고 “자, 그럼 엄마를 봐요.” 그리고 쭈루룩 내려갔습니다. 내려가니까 웬걸, 그때까지 보이지 않던 개미 귀신이 갑자기 나타나서 엄마의 허리를 날쌔게 물고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이것 봐요! 이것 봐요! 너는 절대로 이곳에 빠지지 말고 영원히 행복하게 잘 살아라.” 이것이 개미 엄마의 마지막 자녀 교육이었던 것입니다.
이분이 바로 우리 친아버지이십니다. 우리가 빠져 죽을 보이지 않는 그 무시무시한 함정, 50억이 다 빠져 죽을 그 함정에 우리 아빠와 예수님이 거기서 빠져 죽으시면서 “너희는 절대로 이곳에 들어오지 말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과 우리 아버지께서만 희생하시고 우리는 이렇게 살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이렇게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심정과 그 사랑의 희생을 알게 될 때 우리가 다시는 그분을 속 썩여 드리지 않고, 그분을 실망시켜 드리지 않고, 그분을 기쁘게 해 드리는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분을 기쁘게 해 드리는 것은 바로 우리가 살아 주는 것, 죽지 않고 영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양을 잡아 바치라, 돈 바치라 하는 그런 거지 하나님이 아닙니다. 모든 산의 생축이 다 하나님의 것이고, 금도, 은도 다 하나님의 것인데 우리의 돈이나 몇 마리의 양을 요구하시는 하나님이신 줄 알면 큰 오해입니다. 재물이 있는 곳에 마음이 따라오기 때문에 재물을 좇아 마음이 따라오면 변화시켜서 살리려고 그러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것은 무엇을 바치는 것이 아니라 살아 드리는 것, 곧 영생하는 것입니다.
서양 나라에 가면 해협이나 큰 강 어귀에 내리면 전차가 지나다니고, 올리면 큰 배들이 왔다 갔다 하는 다리가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근무하는 다리지기가 하나 있었습니다. 이 다리지기는 직업이 변변치 못하니까 월급도 적었습니다. 그러나 이 다리지기는 하나밖에 없는 아들, 이제 갓난 조그마한 아들을 키우는 재미로 이 다리지기를 무슨 천직이나 되듯 그냥 만족하면서, 얼마 안 되는 봉급을 타면 그 아들에게 옷을 사 입혀 주고, 과자를 사다 주고 하는 재미로 다리지기에 만족하면서 살았습니다.
아장아장 걸음마하는 이 아이가 하루는 다리 건너편에 나와서 “아빠” 하는 것입니다. “응, 너 나왔어?” 하면서 좋아서 이야기를 주고 받고 하는 동안에 시간 가는 줄을 몰랐습니다. 사랑하는 아들과 대화하다 그만 시계를 못 본 것입니다. 갑자기 뒤에서 전차가 마구 달려오는데 그 아이는 피하지도 않고 위험하니 피하라고 소리쳐도 위험이 뭔지, 죽는 것이 뭔지 모르는 것입니다.
‘아! 저걸 어떡하지! 어떡하지!’ 다리지기는 발을 동동 구르며 정신이 없었습니다. 이 다리를 내려 놓아야 저 전차에 탄 사람들이 죽지 않고 지나갈 수 있는데 …, 이 다리를 놓았다 하면 아이는 짓깔려져서 시체도 없고, 또 아이 하나 기르는 재미로 자기는 그 천한 직업을 천직인 줄 알고 기쁨으로 만족하게 지금까지 살아 왔는데 저 아이가 죽는 세상을 자기는 살 필요도 없고 보람도 없는 것입니다. 아이를 살리려면 전차에 탄 수백명을 죽여야 하고, 수백명을 살리려면 하나밖에 없는 자기 아들을 죽여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 몇 초 안에 결정지어야 합니다. 사정도 모르는 전차는 왜 그렇게 빨리 달려오는지, 더 빨리 달려오는 것 같았습니다.
안절부절 못하다가 눈을 꽉 감고 철커덕 스위치를 내렸습니다. 다리는 ‘웅’ 하고 내려앉아 그 아이는 짓깔려져 간 곳이 없고, 이 다리지기는 자기 생명보다도 더 귀중히 여기는 그 아이를 죽여 놓고 쓰러져 졸도해 버렸습니다. 이제 아이 없는 세상, 살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전차에 탄 수백명의 사람들은 다리지기가 쓰러진 것을 보고 마구 비웃고 히죽거리면서 다리지기가 술 먹고 대낮에 누워 있다고 조롱하며 가는 것이었습니다. 그 전차에 탄 사람이 누구인가 하면 바로 이 지구 열차, 이 지구 전차에 탄 모든 사람들과 교회들인 것입니다.
누가 누구를 죽여서 자기를 살린 것을 모르고 예수만을 부르고 아들을 보내신 친아버지를 배척하며 광신이니 악령이니 하면서 비웃고 지나가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그런 어리석은 승객들이 되지 마시고, 하나밖에 없는 당신의 아들을 희생시키시고 우리들을 살리신 하늘의 다리지기에게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를 구하려 아들과 함께 십자가상에서 고통하신 우리 친아버지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 벌써 왔도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요 16:32). 이 말씀은 우리 맏형님 예수께서 이 땅의 죄인들을 위해 희생 제물로 드려지기 위하여 저 무서운 고난의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시기 바로 직전에 당신을 버리고 다 도망하여 버릴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으로 세상이나 제자들은 당신을 홀로 버려두고 다 달아날지라도 당신의 아버지, 곧 어린 양과 같은 아들 예수를 무서운 세상에 홀로 보내지 않으시고 함께 내려오사 베들레헴 말구유에서 이곳까지 친히 함께 동행하여 오신 당신의 아버지만은 당신 곁을 떠나지 아니하시고 끝까지 남아 계실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인자를 든 후에 … 알리라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요 8:28, 29).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요 16:32).
예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에 하늘 아버지께서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직접 거기에, 예수께서 돌아가신 현장에 나타나셨습니다. 무지막지하고 사랑이 없는 우리 인간 부모들도 우리의 어린 자식을 위태한 곳에 보낼 때는 홀로 보내지 않고, 업고 가고, 안고 가고, 손잡고 가는데 사랑이 생명이신 아버지께서 억천만년 전부터 같이 걸어온 그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죽음의 사지에 보낼 때에 너 혼자 가서 죽으라고 하셨겠습니까? 그것은 천부당 만부당한 말씀입니다.
베들레헴 말구유에서 십자가까지 같이 동행하셨던 우리 아버지께서는 이제 마지막으로 당신의 아들 예수를 죽이기로 결정하시고 그 아들을 내주실 때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고통하신 아들보다 몇 갑절의 몸부림을 치시면서 함께 죽자고 나서신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 … 라」.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요 10:38, 30).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곧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저버리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저버리는 것이라」(눅 9:48, 눅 10:16).
이 말씀은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박대하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박대하는 것이며, 또한 누구든지 나를 핍박하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핍박하는 것이라.” 이는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요 10:38)이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은 곧 그를 보내신 이, 그와 함께 일체로 행하시는 아버지를 못박는 행위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예수)와 아버지는 하나」(요 10:30), 곧 일신 동체(一身同體)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사야 53장에 나온 하나님 아들 예수의 고난은 진실로 아버지의 고난장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사 53:1). 「그」 예수가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 바 되었」던 것은 곧 예수 안에 계셨던 아버지께서 멸시를 받으시고 싫어 버림을 받으신 것이요, 아들 예수가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한 것은 곧 아들 안에 말없이 거하셨던 아버지께서 당하신 멸시이라.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사 53:3). 「그」 예수가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신 것은 그 예수 안에 계셨던 아버지께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신 것이라(사 53:4). 「그」 예수가 「우리의 허물」과 「우리의 죄악을 인」하여 「찔림」과 「상함」을 입으신 것은 진실로 그 아들을 품고 계셨던 우리 하늘 아버지께서 당하신 찔림과 상함이시라(사 53:5).
기록자는 여러해 전에 기록자가 가장 존경하는 목사님들 가운데 한 분이신 어느 목사님께서 가르치시는 강의 시간에 참석했던 중 그 목사님께서 아주 나이 어린 시절에 6·25 동란당하셨을 때에 자기가 당했던 체험담을 말씀하시던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 당시 그 목사님께서는 아버님을 여읜 홀어머니 밑의 아들로 위로 소녀 누이 하나뿐인 외아들이었던 것입니다. 지금 온통 적군 비행기들이 집들과 사람들에게 폭탄을 쏟아 붓느라고 그 폭음으로 천지를 진동시키고 있을 때에 그 어린 외아들을 가지신 목사님 어머님께서는 허둥지둥 어린 아들과 어린 딸을 방으로 불러들이시더니 “우리 죽어도 함께 죽자꾸나.” 하시면서 어린 아들을 방바닥에 엎드리라 하신 후 다음은 그 손위의 누이 되는 어린 딸보고 동생 위에 포개 엎드리라 하시더니 당신 자신은 마지막으로 제일 위에 아들과 딸의 보호하심의 덮개로서 아들과 딸을 감싸 안고 엎드리시더라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자녀를 위한 어머님의 희생적 사랑이십니까! 자기 몸이 무슨 큰 방탄 철판이라도 되신다고 지금 원수의 폭탄 속에 아들과 딸을 굳게 품안에 감싸 안고 계신 것입니다. 지금 어머니의 마음에는 만약 원수의 폭탄이 자기들 위에 떨어진다면 자녀를 위해 당신 자신이 제일 먼저 파열되고 그 다음에는 딸이 파열되고 마지막으로 행여나 어린 독자 외아들이 살아 남을까 하여 제일 밑에 외아들을 간직해 놓으신 것입니다. 이 얼마나 외아들을 사랑하시는 어머님의 극진한 사랑이십니까!
이제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자기 「자식」을 이토록 사랑할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눅 11:13) 이 무서운 원수들이 우글거리는 흑암 사지(黑暗死地)의 땅에 어린양 같은 당신의 외아들을 보내실 때에 어찌 외아들 홀로만 보내시겠느냐? 진실로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요 10:38) 감싸 안겨 있는 것이라.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요 10:30).
그렇습니다. 진실로 하나님의 외아들 예수가 상함과 찔림을 받으신 것은 그 외아들을 감싸 부둥켜안으신 아버지께서 먼저 상함과 찔림을 받으신 것이요, 「그」 예수「가 징계를 받」고 「채찍에 맞으」심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 우리가 나음을 입」(사 53:5)은 것은 진실로 그 외아들을 꼭 감싸 안고 계신 아버지께서 먼저 맞으신 징계와 채찍이었던 것입니다.
저 포악한 로마의 병정과 그보다도 더 간교하고 악했던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손과 발과 옆구리에 무자비하게 못질과 창질을 한 것은 진실로 당신의 외아들을 당신의 몸으로 품어 감싸 안고 계셨던 아버지 하나님의 손과 발과 옆구리를 못질함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아들 예수가 이 지구의 한복판 갈바리 산상의 하늘과 땅 사이에서 십자가에 매달려 돌아가심은 진실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시고 그 독생자와 함께 「하나(一體)」(요 10:30)로 계셨던 하늘 아버지의 달리심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 … 그러하도다 … 세상이 … 그(아버지)를 알지 못」(요일 3:1)하도다. 저 유대 땅에 당신의 외아들과 함께 세상을 구하시려 내려오신 아버지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2천년 전 어제 우리를 건지기 위해서 저 유대 땅에 당신의 외아들과 함께 세상을 구원하시려고 내려오신 아버지 하나님께 우리의 시선을 돌려 봅시다. 하늘의 아버지께서 직접 내려오셔서 아들의 손을 잡고 다니셨습니다.
저 베들레헴 말구유에서부터 갈바리 십자가 언덕까지 당신의 아들과 함께 동행하시는 아버지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저 굶주린 이리떼와 성난 「개들」(시 22:16) 같은 군중들에게 둘러싸여 갖은 모욕과 굴욕을 당하며 서 계신 두 부자(父子)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마음의 눈을 열어 저 유대 땅에 나타나신 아들의 손을 잡고 동행하시는 우리 아버지의 모습, 이 아들을 내가 죽여야 된다는 그 초조하고 괴로워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바라보십시오. 그 기가 막히게 사랑하는 아들의 손을 잡고 그를 죽이려고 나타나신 아버지의 모습을 바라보십시오.
저 베들레헴 말구유에서부터 갈바리 십자가 언덕까지 당신의 아들의 손을 잡고 걸어가시는 아버지의 모습이 얼마나 측은한지 동정이 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떻게 그 아들을 죽인다는 말입니까? 그것은 다 이 막둥이 자식들을 사랑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더니 감사하기는커녕 굶주린 이리떼와 성난 개들처럼 달려들어 죽이고 말았습니다.
개도 미친 개가 아니고는 주인을 무는 개는 없습니다. 종교 안에 하나님이 없다면 미친 개만도 못한 것입니다. 시대마다 종교 안에 하나님이 없었기 때문에 그렇게 흉칙한 짓을 했던 것입니다. 이 시대에 또 그런 미친 군중들이 되지 않도록 우리는 참으로 조심하고 친아버지의 곁을 떠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죄인들을 구하시려 갈바리 언덕, 하늘과 땅 사이에서 십자가에 매달리시고 고통하신 두 부자(父子)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오! 이는 실로 무지하고 제한된 인간들의 두뇌로는 가히 측량할 수 없는 지식 밖의 「지식에 넘치는」(엡 3:18) 아들과 아버지 하나님의 희생이신 것입니다.
만일 기록자가 화가라면 갈바리의 십자가 그림에서 십자가 하나만 그리지 아니하고 십자가 둘을 그리리라. 하나는 큰 십자가, 하나는 작은 십자가 두 부자(父子)의 십자가를 그리리라.
기록자가 즐겨 읽는 책들 가운데서 기억나는 것 중 보이스사에서 출판한 그리스도께 가까이란 책과 시조사에서 출판한 구원의 소망이란 책에서 다음과 같은 것들을 읽고 깊은 감명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류의 구속을 위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自身)을 희생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고후 5:19)셨습니다.”
“예수께서 젖먹이로서 베들레헴에 나타나셨을 때부터 … 갈바리까지 사단의 분노의 폭풍이 그에게 휘몰아쳤으나 그것이 무자비하게 치면 칠수록 하나님의 아들은 더욱더 굳세게 아버지의 손(품)에 매달려서 그 피로 물들여진 길을 헤치고 나아갔습니다.”
로마의 채찍은 세계 역사상 독하기로 유명한 채찍입니다. 갈래갈래 갈라진 가죽 끝에 쇠붙이와 뼈붙이가 달린 채찍으로 잡수지도 못하고 마시지도 못하신 예수님,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땀을 너무 흘려서 수분이 다 말라 버린 예수님을 벗겨 놓고 칠 때 선지피가 흐르는 예수님은 너무나 매가 아프고 너무 고통스러운 그때에 자기 아버지의 손을 붙잡고 몸부림치면서 견디셨습니다. 아무 죄도 없이 피투성이가 된 채 비틀거리며 아버지 손에 매달려 신음하면서 가는 그 아들의 손을 이끌고 가시는 그 아버지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 아들보다 아버지를 바라보십시오. 아버지의 심정이 얼마나 미칠 지경이 되셨었겠는가? 그러다가 아들이 그냥 쓰러져서 졸도하면 다시 일으켜 세우면서 “아들아! 조금만 참아다오. 이렇게 희생해야 막내들을 살릴 수 있단다. 조금만 참아다오. 조금만 참아다오.” 하시며 부축해서 일으키시는 아버지의 심정을 보십시오. 아들이 쓰러지면 같이 털썩 주저앉으신 아버지의 심정을 바라보십시오.
나는 맞아서 피투성이가 된 아들이 될지언정, 아무 죄 없이 맞고 피투성이가 되어 졸도하는 아들을 붙잡고 부축하는 아버지는 죽어도 되지 못할 것입니다. 이것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할 너무나도 흉칙하고 처절한 일입니다. 이것은 꿈에도 견디지 못할 일입니다. 아무 죄도 없는 어린양, 새끼양 같은 순진한 아들이 남의 죄를 위하여 그렇게 맞고, 쓰러지고, 피투성이가 될 때 아버지의 손에 매달려서 신음하는 그 아들의 신음 소리를 들으면서 졸도한 아들을 다시 일으키는 아버지의 심정이야말로 어떠하셨겠습니까?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고후 5:19)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아들과 함께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겟세마네의 고민과 갈바리의 죽음으로써 무한한 사랑의 마음을 가지신 자(天父)께서 우리의 구속의 값을 치르셨습니다.”
우리의 죄 값을 치르신 분은 예수님뿐만 아니라 우리 아버지께서 직접 치르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우리의 죄값을 치르셨지만 또한 우리 아버지께서도 그 희생으로, 아들을 죽이는 그 엄청난 희생으로 우리의 죄의 값을 치르시고 계셨습니다. 희생의 값을 우리 예수님보다 우리 아버지께서 더 치르셨습니다. 두 자식들 다 죽는 꼴을 보시면서 희생을 치르신 것이었습니다.
갈바리 십자가 위의 “그 짙은 어둠 속에 하나님의 임재하심은 감추어진 바 되었습니다. 그는 어두움으로 그의 장막을 만드시고 그의 영광을 인간의 눈으로부터 감추셨습니다. 하나님과 그의 천사들은 십자가 곁에 계셨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아들과 함께 계셨습니다. 그러나 그의 임재하심은 인간의 눈에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만일 하나님의 영광이 구름에서 비춰 나왔다면 모든 관중들은 멸망되었을 것입니다. 또 그리스도께서는 그 무서운 시간에 아버지의 임재하심에서 오는 위로도 받지 못할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짙은 어둠 속에 당신의 아들과 함께 계셔서 그의 아들의 마지막 인간으로서의 고민을 가리우셨습니다.”
나 하나를 구원하시려고 하늘을 다 버리고 십자가에 내려오셔서 죽은 아들을 붙들고 우시는 아버지를 바라보십시오.
오늘날 많은 설교자들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 검은 먹구름이 그곳에 둘려 있었다고 말들은 잘합니다. 그러나 그 검은 먹구름이 무엇인가는 모릅니다. 바로 그것이 벌거벗고 죽은 아들을 눈물을 철철 흘리면서 먹구름 홑이불로 싸고 계셨던 아버지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도 아버지의 영광의 빛이 나오면 우리가 죽을까 봐 그 영광을 가리우시고 십자가 곁에 나오셔서 죽은 아들을 감싸 부둥켜안으시고 목놓아 우시는 아버지이셨던 것입니다.
“아무 눈도 그 십자가를 두르고 있는 아버지의 임재의 어둠을 꿰뚫어 볼 수 없었으며 그리스도의 고통하는 영혼을 싸고 있는 아버지의 임재의 어둠을 통찰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어떤 인간의 눈도, 이 썩어질 육신의 눈을 가지고는 아무리 봐도 죽은 외아들을 감싸 부둥켜안고 우시는 아버지의 모습을 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아들과 함께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 하늘 군대(천사)들은 이 무서운 광경에서 저들의 얼굴을 가리웠습니다. 무생물계도 모욕을 당하시고 숨을 거두시는 조물주에게 동정을 표하였습니다. 태양은 이 무서운 광경을 보기를 거절하였습니다. 세상을 밝히 비추고 있던 한낮의 햇빛이 그때 갑자기 없어진 것처럼 보였습니다. … 그 짙은 어두움 속에 하나님의 임재하심은 감추인 바 되었습니다. 온 하늘은 경탄으로 충만하였습니다. … 하늘의 우주 거민들에게 얼마나 놀라운 광경이었던가!” “하나님은 죄인을 사랑하사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구원을 얻게 하시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몸을 통하여 자신(自身)을 주시었습니다.”
우주 대왕께서 아들의 죽음의 현장에 따라 내려오셔서 그 피 묻은 길을 한 발자국 한 발자국, 쓰러지는 아들을 일으켜 세우시며 아들과 함께 고통하시는데 그 무서운 악한들, 다른 자가 아닌 기독교들이 예수님을 죽이고 있었습니다. 십자가에 매달려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아버지 왜 나를 버리십니까?” 하는 마지막 고민의 음성을 발하고 고개를 떨구고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그 죽은 아들은 죽음으로써 모든 고통에서 헤어났고 해방되었지만 죽은 아들을 감싸 부둥켜안고 한없이 우시는 아버지의 통곡하심을 바라보십시오. 얼마나 십자가의 피보다 더 진하고 십자가의 희생보다 더 강하신 아버지의 희생이 아닌가! 차라리 아버지께서 죽을 수 있는 생명이 있어서 아들과 같이 돌아가셨더라면 훨씬 나았을 텐데, 죽을 수 없는 생명을 가졌기에 고통이 천배나 만배나 크셨던 것입니다.
이때 하늘의 구름떼 같은 천군, 천사들이 죽은 아들을 붙들고 우시는 아버지의 모습을 볼 수가 없어서 고개를 돌리고 울었던 것입니다. 한낮을 비추던 태양이 두 눈을 뜨고 볼 수가 없어서 눈을 감아 버려서 그 정오의 때에 칠흑 같은 검은 흑암이 둘렸었고, 지구는 가슴이 터져서 바위가 튀어나왔습니다. 삼라 만상이 울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성직자란 제사장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아버지의 죽음이었습니다. 우리가 중생의 눈이 열린다면 이제 만물에게 가서 물어보면 알 것입니다. “태양아! 네가 2천년 전에 보았느냐?”고 물으면 태양은 대답할 것입니다. “내가 2천년 전에 이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노라.”고. 또한 땅이 말할 것입니다. “내가 가슴이 터졌었노라.”고. 모든 천사들이, 모든 우주의 삼라 만상이 말할 것입니다.
그런데 시대마다 하나님을 모시지 못한 그 종교인들은 그 하나님, 주인을 죽이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그런 흉악한 무리에 들어가지 않도록 이 마지막 때에 정신을 차려서 친아버지를 떠나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나는 “내가 만약 화가라면 갈바리 십자가를 하나만을 그리지 않고 둘을 그리겠노라. 더 큰 희생을 치르신 아버지의 십자가와 아들 십자가, 둘을 그리겠노라.”고 말했습니다. 우리 예수님의 희생뿐만 아니라 더 큰 희생을 치르신 우리 아버지! 두 자식 다 죽는 꼴을 보시며, 큰아들은 죽고, 작은 자식은 큰아들을 죽이는 그 꼴을 보시며 그 상황에서 아버지가 얼마나 가슴이 터지셨겠습니까?
예전에 서양 사람들이 한국에 선교사로 나와 일할 때에 있었던 일입니다. 한번은 선교사가 나무다리 위를 운전하며 가고 있었습니다. 지금은 시멘트가 많이 나와서 전부 콘크리트 다리이지만 옛날에는 시멘트가 없어서 시골의 다리는 거의 다 나무다리로 만들었습니다. 나무다리는 자동차가 세계 달리면 무너집니다. 그래서 살피며 살살 가야 됩니다. 이 나무다리를 서양 사람이 눈이 잔뜩 쌓인 추운 겨울날 아침에 지나가는데 다리 밑에서 아기 울음 소리가 들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서양 사람이 이상하다고 차를 세워 놓고 다리 밑을 들어가 보았습니다.
다리 밑에 들어가 보니까 어떤 여자가 팬티만 하나 입은 벌거벗은 몸으로 큰 둥치를 끌어안고 죽어 있는데 그 둥치 속에서 아기 울음 소리가 나는 것이었습니다. 서양 사람은 그 시체를 제쳐 놓고 그 둥치를 풀기 시작했습니다. 제일 겉에는 그 여자가 입었던, 때가 잔뜩 묻은 남루한 내복이 감싸 있었습니다. 그 내복을 제쳤습니다. 벗기고 나니까 그 여인이 입었던 그 남루한 겉옷, 떨어진 겉옷이 둘둘 말려 있었습니다. 그것을 벗기고 나니까 그 여자가 입었던 다 떨어진 오바가 또 감겨 있었습니다. 그것을 또 벗기고 나니 때에 찌들은 포대기가 나왔는데 그 포대기 속에서 아기가 울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여인은 그 어린것을 안고 다니다가 이집 저집 재워 주기를 바랐지만 다 거절당하고 아무도 영접하는 자가 없어서 거리를 헤매다가 눈을 피해 보려고 다리 밑에 들어간 것입니다. 밤이 깊어지면서 온도가 급강하하고 아기가 추워서 새파랗게 되어 발발 떠니까 자기가 입었던 오바를 입혀 주고, 그래도 떠니까 자기가 입었던 겉옷을 벗어서 입혀 주고, 더 떠니까 자기가 입었던 내복을 다 벗어 주고, 그래도 추워 하니까 자기 몸으로 부둥켜안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서양 사람은 여인의 시체를 가져다 양지 바른 곳에 잘 묻어 주고 그 날부터 그 아기를 데려다가 키우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제 국민학생 정도로 컸을 때였습니다. 이 아이가 동네 아이들하고 놀다가 하루는 눈물이 범벅이 되어서 뛰어 들어오더니 “엄마, 아빠! 엄마, 아빠는 내 진짜 엄마, 진짜 아빠가 아니지요? 동네 애들이 그러는데 나는 다리 밑에서 주워 온 애라고 하던데요.”라고 마구 울면서 바로 좀 이야기해 달라고 조르는 것이었습니다.
이 서양 사람은 할 수 없이 사실은 이러저러해서 너를 몇년 전에 갖다 키웠다고 실토를 했습니다. “그럼 우리 엄마 무덤이 어디 있어요?” 하고 물어서 저 산모퉁이 양지 바른 데 가면 있다고 가르쳐 준 것입니다.
그런데 하루는 아이가 없어졌습니다. 간 곳이 없었습니다. 그때도 마침 추운 겨울이었습니다. 아이가 밥 먹을 때가 되어도 밥을 먹으러 들어오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혹시나 하고서 이 서양 사람은 그 산모퉁이 양지 바른 곳, 아이의 엄마를 묻은 곳에 가 보았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이 아이가 거기 와서 눈으로 쌓인 자기 엄마의 무덤에다 그 서양 사람이 사 입힌 예쁜 털 코트를 벗어서 덮어 주고 자기의 겉옷을 다 벗어서 엄마의 무덤에다 덮어 주고 그 다음 서양 사람이 사 준 그 좋은 내복을 다 벗어 덮어 주고서 자기는 팬티만 입고 “엄마! 이만큼 추웠어요? 이만큼 추웠어요? 왜 엄마는 나만 살리고 엄마는 돌아가셨어요?” 하면서 무덤을 부둥켜안고 우는 것이었습니다. 이 서양 사람은 두 눈을 뜨고 쳐다볼 수가 없었습니다.
이 철모르는 어린것도 자기 엄마가 어떠한 사랑으로 자기를 살리고, 자신은 죽은 것을 못 잊어서 울면서 그렇게 떼굴떼굴 뒹굴었는데 우리는 다 컸다는 사람들이 우리 친아버지께서 우리를 어떻게 낳고, 어떻게 우리를 살리셨다는 사실을 들으면서도 무감각하고 그 사실을 알면서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못하는 퇴화된 피그미 족속이 되었단 말입니까? 우리가 이렇게 정신이 퇴화되었단 말입니까?
우리는 어떠한 사랑으로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가슴이 다 터져 버리고 피 흘리고, 쓰러지고, 졸도하는 아들을 부둥켜 일으키면서 “조금만 참아다오. 조금만 참아다오.” 하셨는지, 우리 아버지의 그 모습을 바라본다면 어떠한 환난이라도 넉넉히 이기고 저 하늘까지 걸어가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와 자신까지 「주셨으니 이는」 누구든지 저 갈바리의 두 부자(父子)를 바라보고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
할렐루야! 우리 아버지께 영광!
두 십자가
저 쪽 쓸쓸한 갈바리 언덕 위에
두 십자가가 나란히 서 있네요
하나는 큰 십자가
하나는 작은 십자가
큰 십자가는 아버지 십자가고요
작은 십자가는 아들 십자가랍니다
그것은 죄인 나 하나를 위하여 돌아가신
나의 아버지와 맏형님이 지셨던 십자가들이랍니다
찬 송
1. 저 먼 언덕 위에 우뚝 솟아 있는 낡고 거칠은 두 십자가
성부님과 성자 죄인 구하시려 고난 당하신 표적일세
낡고 거칠은 두 십자가 내가 극진히 사랑함은
오직 나 하나 구하시려 하늘에서 내려 오심일세
2. 갈바리 언덕 위에 우뚝 솟아 있는 크고 작은 두 십자가는
죄인 나를 위해 구원하시려고 아버지 형님 돌아가신
피와 죽음의 희생으로 오직 나 하나 구하시려
무한하신 희생으로 나를 구속하신 표적일세
3. 골고다 언덕 위에 우뚝 솟아 있는 낡고 거칠은 두 십자가
탕자 나를 위해 데려 가시려고 하늘 아버지 형님께서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흑암사지에 찾아오사
나를 위해 돌아가신 한량없으신 사랑일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