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복궁 자경전 십장생 굴뚝(서울 종로구 세종로 1-1)
경복궁 자경전 뒤뜰 꽃무늬담에 연하여 설치된 조선시대 굴뚝으로 자경전 뒷담의 한 면을 돌출시켜 만들었다.
굴뚝은 십장생과 길상(吉祥) 무늬를 넣어 만든 벽돌 구조물로 너비 381cm, 높이 236cm, 두께 65cm이다. 화면은 가로 302cm, 세로 88cm의 직사각형으로 해ㆍ산ㆍ물ㆍ구름ㆍ바위ㆍ소나무ㆍ거북ㆍ사슴ㆍ학ㆍ불로초 등 십장생을 배치하였다. 또 중앙에는 용문전(龍文塼)과 우측에는 학문전(鶴文塼)을, 양측 벽면에는 당초문(唐草紋)과 박쥐무늬를 배치하였다.
굴뚝 윗부분은 목조 건물의 형태를 모방하였고 꼭대기에는 10개의 연가(煙家)를 올려놓아 연기가 빠지도록 하였다. 굴뚝의 기능을 충실히 하면서 꽃담장으로서의 조형미도 살려 조선시대 궁궐 굴뚝 중 가장 아름답다.
우정총국(郵征總局)(서울 종로구 견지동 397)
조선 말기 우편 업무를 담당하던 관청으로 1884년에 설치되어, 그해 10월에 처음으로 우편 업무를 시작한 곳이다.
앞면 5칸ㆍ옆면 3칸 규모의 지붕 옆모습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 건물이다. 현재는 우정기념관으로 쓰이고 있으며 기념관 기능에 따라 일부를 고쳐 옛날 모습을 제대로 간직하고 있지는 못하다. 기념관 안에는 우표와 문헌, 유물들이 보존되어 있다.
이 건물은 처음으로 근대식 우편제도를 도입하여 국내ㆍ외 우편사무를 시작한 유서 깊은 곳으로 그 의의가 크며, 우정총국 개국식을 계기로 개화파가 갑신정변을 일으킨 장소로 역사적 가치가 높은 곳이다.
운현궁(雲峴宮)(서울 종로구 운니동 114-10)
운현궁은 흥선대원군이 살았던 집으로, 고종이 태어나서 왕위에 오를 때까지 자란 곳이기도 하다. 한옥은 제일 앞 남쪽에 대원군의 사랑채인 노안당이 자리 잡고, 뒤쪽인 북쪽으로 행랑채가 동서로 길게 뻗어 있으며 북쪽에 안채인 노락당이 자리잡고 있다.
고종이 즉위하자 이곳에서 흥선대원군이 정치를 하였고, 궁궐과 직통으로 연결되었다. 흥선대원군은 10여 년간 정치를 하면서 세도정치의 폐단을 제거하고 인사ㆍ재정들에서 대폭적인 개혁을 단행하였고, 임진왜란으로 불에 탄 경북궁을 다시 짓기도 하였다.
지금은 궁의 일부가 덕성여자대학으로 사용되고 있고 방송국 시설이 있기도 하다. 이로 인해 대원군이 즐겨 사용하던 아재당도 헐려 나가고 영화루와 은신군ㆍ남연군의 사당도 모두 없어졌다.
몽촌토성(夢村土城)(서울 송파구 오륜동 88-3)
한강의 지류인 성내천 남쪽에 있으며, 둘레가 약 2.7㎞ 되는 백제 전기의 토성이다. 자연 지형을 이용해 진흙으로 성벽을 쌓고, 나무 울타리로 목책을 세웠던 흔적도 확인되었다. 자연 암반층을 급경사로 깎아 만들기도 하였으며, 성을 둘러싼 물길인 해자도 확인되었다. 조사 결과 문터와 집자리, 저장용 구덩이가 확인되었고, 출토유물로는 동전무늬가 찍힌 자기조각과 여러 종류의 토기류, 철제 무기류 등이 나왔다. 특히 동전무늬가 찍힌 자기조각은 중국 서진(265∼316)대의 유물이어서 시대 확인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한다.
성의 성격에 대해서는 두 가지 의견이 있는데, 백제의 도성인 위례성이라는 견해와 방어용 성이라는 견해가 있다. 위치ㆍ규모ㆍ출토유물로 볼 때 백제 초기 군사적ㆍ문화적 성격을 살필 수 있는 좋은 유적이며, 주변에 풍납토성과 백제 석촌동 무덤들을 비롯한 백제 전기의 유적이 있어 역사적으로도 가치 있는 곳이다.
첫댓글 눈앞에 있는 명승지가 왜 이리 멀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