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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상 수훈 서른 한 번째. 오늘 기도에 대해서 공부합니다.
몇 차례에 계속 될 거예요.
마태복음 6장 5절에서 6절까지만 함께 읽습니다.
또 너희가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되지 말라
저희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이 말 때문에 기도 할 때 골방들에 열심히 들어 가는데 각자 집에도 또 골방을 만들어 놓는 사람들이 있더라고요.
기도원에도 그런 토굴 같은 걸 만들어서 기도하고 하는게 다 요런 것을 곡해 한 건데 절대 그런 거 아니예요, 여러분.
그렇게 남이 안 보는 데서, 기도할려면 남이 안보는데서 기도해라. 그러면 그 내용에 상관 없이 하나님께서 갚으시리라,
이런 내용이겠어요, 이것이? 내용이 문제지, 어떠한 방식으로 기도하는 가는 아무 문제가 아니예요, 사실은요.
그런 얘기 아닙니다. 갑자기 무슨 뭐 사랑을 흘려줄 때에는 이렇게 주의하라, 라고 하다가
기도 얘기가 갑자기 나오면 또 안되잖아요. 문맥상 안 맞잖아요. 그런 이야기겠냐고요, 이게. 그런 얘기 아닙니다.
6장은 5장에서 충분히 설명이 된 희생 제사의 그 문제와 또 간음의 문제 그리고 거짓 증거의 문제를 올바로 잘 깨달아서 사랑으로 완성하여 그 사랑을 전하는 역할로 살아야하는 그 진리가 된 자들이 주의해야 할 사항을 적어 놓은 거라 그랬죠? 그래서 6장이 프로세코 (προσέχω : prosechó), ‘주의하라’ 로 시작된다고 그랬습니다.
히브리어 헬라어는 가장 중요한 단어를 맨 앞에 둔다고 그랬어요. 그래서 그게 주제라고 생각하시면 딱 맞아요.
프로세코, 주의하라.
성경도 요러한 순서로 기록이 되어있는 거 아세요? 신약성경 특히. 구약성경도 마찬가지입니다.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가 신약의 사복음서와 똑같은 맥으로 흐르고 있어요.
그리고 신약에서는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이 네 깃, 옷의 네 조각, 겉 옷의 네 조각. 그래서 사복음 이란 말이예요. 그리고 나머지는 ‘전서’ 예요.
그래서 성경을 성경 전서 라고 하죠? 복음이 성경 이라면 나머지는 ‘전서’ 예요. 그래서 성경 전서 라고 하죠.
그래서 사복음서를 올바로 깨달으면 서신서는 여러분에게 필요 없는 책이예요, 사실은요.
그건 다 어떤 교회에게 ‘얘 데살로니가 교회야, 로마 교회야, 빌립보 교회야, 니들 왜 이거 못 알아먹어’ 이렇게 해서 보낸거잖아요. 뭘 못 알아 먹어요. 예수님이 한 그거를 왜 그렇게 곡해해, 이런 거였잖아요.
그러니까 사복음서를 올바로 이해를 하면 그런 서신서가 필요 없겠죠?
사복음서에서 복음의 핵심을 잘 설명해주고 그 뒤에 서신서에서 오해의 소지가 있거나 잘못 이해되어서 행해지는 그 말씀의 내용을 올바로 잡아주는 게 이제 성경의 순서인데, 그것처럼 산상 수훈도 그렇게 구성이 되어 있는거죠.
그렇게 희생 제사, 간음, 거짓 증거에 대해서 잘 설명해 주신 하나님께서 그것을 사랑으로 이제 하나로 묶어 주시고
그 내용을 다른 이들에게 이렇게 흘려주는 과정에서 그리고 네가 이해하는 과정 속에서 주의 해야 할 점이나 오해해서는 안 될 것들, 이런 것들을 6장에서 설명하고 있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기도도 고 내용으로 이해를 하셔야 된단 말이예요.
잘 생각해 보시죠.
마태복음은 누구에게 주는 책이죠? 유대인에게 주는 책입니다.
마태복음은 특히. 율법주의의 습관을 버리지 못하고 계속해서 율법적 신앙에 젖어 있던 유대인들에게 주신 책이란 말이예요. 심지어 사도들도 한동안 성령을 받고도 그 율법주의, 유대주의에서 못 벗어났잖아요.
그래서 베드로 같은 사람도 사람들에게 욕을 먹을까봐 율법주의적 습관을 버리지 못하고 이방인들과 밥먹다 도망가고
그러다가 바울에게 직싸게 욕을 먹고 그러지 않았습니까.
너희가 진리 안에서 하나님 아버지를 제대로 알고 있다면, 그 아버지를 제대로 알고 있다면
어떻게 계속해서 그 희생 제사의 제물과 같은 그 율법, 그 율법이 희생 제사로 대표되지 않습니까?
그 듀오 (δύο : duo), 희생 제사 드리다. 그 희생 제사의 제물과 같은.... 그 율법에 묶여 있을 수 있겠니.
이게 마태 복음이잖아요.
그러니까 살인하지마 프뉴오 (φονεύω : phoneuó). 희생 제사 드리지마 에 관한 내용이
마태복음에 자세하게 설명이 되어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성부 아버지와 관계를 잘못 맺게 되면 살인, 희생 제사를 계속 드리게 된다 그랬죠?
아버지가 그걸 원하는 줄 알고. 거기에 대한 이야기가 마태복음이란 말입니다.
그리고 마가복음은 아르케 호 유앙겔리온 헤수스 크리스토스 휘오스 홀 데오스
(Ἀρχὴ τοῦ εὐαγγελίου Ἰησοῦ Χριστοῦ, Υἱοῦ Θεοῦ : Archē tou euangeliou Iēsou Christou Huiou Theou) 로 시작이예요. 아주 이상하게 명사만 여섯개 쭉 나열한 그런 문장이 등장합니다. 동사도 없고 아무것도 없어요.
직역을 하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 복음, 시작 이란 말이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아들에 관한 이야기죠, 이게.
아들이면 성자, 성자면 어린양 예수, 우리 남편이죠?
그 신랑과 제대로 관계를 못 맺으면 다른 신랑에게 가서 간음을 하게 되는 거잖아요.
그래서 마가복음은 간음에 대한 이야기란 말이예요.
교회의 신랑이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에 관한 복음. 그게 바로 마가복음에 기록이 되어 있어요.
그 신랑에 대해서 잘 알면 너희들 간음하지 않을 수 있어. 그것이 마가복음이예요.
그럼 누가복음은 어떻게 시작하죠? 데오빌로 (Θεόφιλε : Theophile)로 시작하죠? 누가복음 1장 1절을 한번 보세요.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 이제 완성된 어떤 복음에 대해서 이야기 해요.
처음부터 말씀에 목격자 되고 일꾼 된 자들이 전하여준 그대로 내력을 저술하려고 붓을 든 사람이 많다.
그걸 그대로 적어주려고, 기술 할려고, 내력을 기술 할려고 붓을 든 사람이 많대요.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
그러니까 이제 확실히 알겠죠, 자기는. 나도 데오빌로 각하에게, 떼오 (theo) 빌로 (philus)가 실제 인물인지 아닌지
그건 뭐 이견이 많지만. 이여도 상관없고 아니어도 상관 없어요.
데오빌로라는 단어 자체가 데오스 필로스. 데오 (theo) 필로스 (philos), 하나님의 친구 라는 거예요.
테오빌로 각하에게 차례대로 써 보는 것이 좋은 줄 알았노니 이는 각하로 그 배운 바에 확실함을 알게하려 함이로다.
‘친구’ 라는 개념이 뭐라 그랬습니까, 히브리 사람들에게 있어서. 나와 너 사이에 있어서 감추는 것 없이 확실하게 다 털어놓는 사이 그 관계를 ‘친구’ 라고 한다 그랬죠.
그거를 확실하게 내가 본 그대로, 그 내력을 확실하게 전해주면 뭘 안 할 수 있어요? 거짓 증거 안 할 수 있잖아요.
정확히 그 순서로 간대니깐요. 그래서 누가복음은 테오빌로의 책이예요. 사도행전도 마찬가지고, 같은 책이니까.
그렇게 마태, 마가, 누가복음을 통해서 복음의 내용인 살인, 희생 제사에 관한 문제, 성부와의 관계죠? 간음의 문제, 성자의 관계입니다, 성자와의 관계. 그리고 거짓 증거에 대한 이야기. 누구와에 대한 이야기예요? 성령. 성령이 하나님에 대해서 올바로, 그 복음에 대해서 증거하러 오시는 분이니까.
고 세 관계가 잘 확립이 되면 어떻게 되요? 복음이 뭘로 완성이 되죠? 아, 그게 사랑이구나, 이렇게.
에스카톨로스쿼드란테스(escato los cuadrantes)로 완성된다 그랬잖아요.
그래서 요한복음이 사랑의 책인 거예요. 사도 요한이 사랑의 사도죠. 어떻게 끝나요, 요한복음이?
‘니가 나 사랑하니?’ 로 끝나잖아요. 니가 나 사랑해? 진짜 사랑이 뭔 줄 알아?
너 나 사랑한다 그랬지? 그래서 나 죽지 말라 그랬잖아. 그리고 나 목숨 걸고 나 지켜준다매? 그걸 사랑이라 그래?
내가 그 사랑 받고 너희를 구원하여 주는 거니? 오늘날 교회야, 너희들 나 사랑한다매 그래서 그렇게 열심히 섬겨주잖아. 내가 그 사랑 달라 그랬니? 사랑은 이런거야, 니가 나를 확실하게 예수를 세번 부인을 해야 니가 살아나는게 내 사랑이야, 이거 이야기 해주는거예요.
니가 나 부인했어. 너 그래가지고 니가 죄인 된거야. 그래서 내가 너 살려준거야, 죽어서. 이 얘기가 아니라.
인간은 그 율법인 예수를 세번, 완전하게 부인하지 않으면 절대 살아날 수 없다.왜? 내가 너희를 사랑하는거지,
니들이 나 사랑하지 않는다는 걸 보려주러 온게 예수이고 십자가니까.
확실히 부인해야 되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이 그런 거예요, ‘너 오늘 닭 울기전에 세번 나 부인해야돼 그래야 너 살어,’
그러시는 거죠. 그리고는 진짜 세번 부인하니까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봐 준 거예요.
이 새끼 너 내가 얘기한대로 그대로 너 세번 부인했다? 이거 확인할라고 그렇게 쳐다본게 아니라, 그래 그거야!
그게 내 사랑이야! 니가 나를 부인해야 너는 사는거야. 왜? 그래야 니가 너를 부인하는거고. 내 사랑으로 너는 살아난다는 걸 아는 거니까 그게 바로 니가 사는 길이야, 를 보여주는게 요한 복음이잖아요. 그래서 그 사랑으로 끝난다니깐요,
요한복음이.
그렇게 사랑, ‘내리 사랑이지 치사랑은 없다’ 라는걸 보여주는게 요한복음이잖아요.
그렇게 사랑으로 넷이 끝난단 말이예요. 넷.
이렇게 성경은 칠 이라는 안식의 숫자로 시작해서, 창세기에는 칠로 시작하죠? 이게 안식이다. 사바스 (Sabbath).
여섯째 날까지 일하시고 일곱째 날 안식으로 들어가는 거. 이게 칠이야. 이게 완성이다. 사바스.
그래놓고 출애굽기에서 뭘 줘요? 열을 주죠? 열개를 주잖아요. 십계명.
창세기에서 칠이라는 숫자로 이 완성을 설명한 다음에, ‘이거야 이게 완료야 이게 안식이야’ 라고 한 다음에
출애굽기에서 열을 줘요. 뭐예요? 하늘의 열입니다, 그게. 이 열로 너희들은 칠에 당도해야되는 거야
그러면 내가 너희를 열 둘, 아들로 부를 거야 이거예요. 그래서 그 열을 주는 자들을 열두 지파로 재편성 하는 거예요.
이런 숫자가 굉장히 중요해요. 왜? 성경에 나오는 모든 에피소드들은 전부 이 숫자에 걸리거든요.
그런데 그 열을 통하여 너희들이 열 둘, 아들이 되기 위해서는...... 이게 다섯 다섯으로 나누어서
다섯은 너희가 실패하고 나머지 다섯으로 너희가 성공하는 그 방식으로.... 내가 너희를 열 둘, 아들 삼을거야.
그래서 휘장이, 열폭 휘장이 다섯 다섯으로 찢어지는거예요.
그런데 그 다섯을, 앞의 다섯으로 너희는 실패하고 뒤의 다섯으로 성공해야돼, 이거는 너희들이 도저히 할 수 없는 거니까.
우리는 하나님이 누군지도 모르고 그분의 이름도 모르고 그분이 우리를 낳는 부모라는 것도 몰라요.
그러니까 그분을 모르니까 우상이 뭔지도 모르네? 그러면 앞의 다섯개를 어떻게 무슨 수로 우리가 이걸 지켜낼 수 있냐고요. 못 지키는 거예요. 근데 그것만 덜렁 주고 뒤의 다섯개는 아예 설명도 안 해줘요. 이거는 예수가 와서 우리에게 설명해 줄 거니까. 그 앞의 다섯개를 덜렁 주고 말았다는건 뭐예요? 실패하라고 준거예요.
하나님이 누군지도 모르고 감지도 못하는 그분을 어떻게 사랑하며 우상을 어떻게 감지하여 어떻게 인식을 하여 그거를 안 섬기냐고요. 그리고 어떻게 그분을 부모로 공경하냐고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도 그러지만 그분은 그 예수살렘은 하늘에 있는 어머니라고도 이야기하죠?
창세기에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게 사실은 ‘부모로 떠나’ 예요. 왜? 우리를 낳으러 오는 거예요.
그거를 모르니까 .....이거는 너희들이 할 수 없는 거야, 이게 율법시대예요.
근데 율법시대에는 하나님을 사랑하겠다고 사람들이 열심히 희생 제사 드리고 율법 지켰잖아요.
이걸 해보겠다고, 뭔지도 모르면서. 그러니까 하나님이 실패하라고 준거라니깐요.
하나님이 오셔서 그러는거예요, 이거는 니들이 못하는건데 어떻게 할라고 그랬어? 하나님의 법을 너희들이 어떻게 지키니? 그 하나님을 어떻게 법을 지켜 사랑할려그래? 그거는 이렇게 하는 거야,라고 보여준게 아래의 다섯이잖아요.
그래서 그 다섯을 산상 수훈에서 예수님이 넷으로 설명하세요. 왜? 이 땅의 숫자가 넷이잖아요. 사각형, 사방, 동서남북.
옜날에는 이 땅을 사각형으로 알았다고요. 그래서 바다 멀리 나가면 글로 뚝 떨어지는 줄 알았다니깐요.
그래서 안 나갔어요. 그래서 신대륙 발견하고 이런 사람들이 굉장히 칭찬을 받은게, 사람들이 못 나갔다니깐요.
땅이, 넷이.... 하늘의 열을 그 다섯으로 알게 되면 그걸 하나로 완성하게 되고그 하나, 사랑인 그 하나로 완성하게 된 그들이 바로 열 둘 이라는 아들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성경에 모든 그러한 복음을 설명하는 숫자, 그 숫자는 전부 이 숫자에 걸려요. 칠병이어, 오병이어, 남는 바구니 숫자도 그래요. 일곱 날, 일곱 대접, 만 이천, 십 사만 사천, 전부 여기에 걸린다니깐요.
자, 그렇게 율법의 시대에는 인간들이 최선을 다해서 그 하나님 사랑과 하나님 섬김을 시도해보는 시대예요.
그리고는 실패를 해야 돼요. 그래서 하나님 사랑에 대한 다섯 계명만 설명을 해 놓았던 거예요. 실패 하라는 거예요.
해보고, 확실하게 실패 하라는 거예요. 거기에서 인간의 한계, 그 피조 세계의 한계가 폭로 되는 거죠.
아래에서 난 자들의 실체,..... ‘죽은 시체임’ 이 확실하게 완전하게 드러나는 거예요.
그건 율법이 주어지기 이전의 시대에도 인간들이 계속 하던 거였잖아요. 그때도 계속 기도 했었고, 희생 제사 드렸고, 율법 지켰다니깐요. 자기들의 법. 함무라비 법전의 그 법이 율법하고 흡사하단 말이예요.
그러니까 그런 것을 하고 있는 인간의 실체가 뭔지를 설명해 주기 위해 율법이 온거예요.
그 전에도 인간들은 그거 하고 있었대니깐요. 그러니까 그게 뭔지를 가르쳐 주는 거예요.
하나님이 문자를 주어서 자기를 계시하기 시작한게 시내산에서 율법 준거죠?
그 전에 인간들이 신을 섬기고 있었대니깐요. 그 신이 무슨 신이었겠냐고요.
그래서 하나님이 그러는거예요, ‘그 신이 나야?’
그래서 십계명의 첫번째가 ‘너는 내 앞에서 나를 다른 신으로 섬기지 마’ 이런 말이예요.
내가 나를 계시하기도 전에..... 니네들이 나를 알아봤다고 이야기하면서 나를 섬기고 있는데, 그리고 제사까지 지내고 있는데, 그 신이 나야? 근데 이스라엘은 ‘맞아요, 그 신이 그 신이예요’ 그랬다니깐요. 그럼 한번 만들어봐 그랬더니 소를 만들어 온다고요. 하나님이 그러는거예요, ‘그래 그게 나니? 그 소가 나야?’ 그러면서 ‘그래, 그럼 내가 그 소가 뭔지 그 소의 내용을 가르쳐줄게.’ ‘그래, 그 소가 난데, 나는 이런 존재야’ 라고 가르쳐 주신게 율법으로부터 내려온 계시란 말이예요.
하나님은 그렇게 세상의 한계를 폭로하신 후에 그 십의 아래, 다섯. 그 위의 다섯을 어떻게 할 수 있는가를 아래의 다섯으로 설명을 해 주시는데 그게 이제 산상 수훈이란 말이예요, 우리가 공부하고 있는.
다시 말해서 너희는 이 현상계 속에서 하나님 사랑이라는 것을 할 수 없는 존재이므로 이웃 사랑이라는 걸 잘 하면 내가 그것이 바로 하나님 사랑으로 여겨 줄게. 그것을 하나님 사랑이라고 여겨 줄게.
아니, 인간들의 수준에서 할 수 있는 하나님 사랑은 그것 밖에 없어, 라고 이야기 해주시는거예요.
근데 그 사랑은 진리를 받고 진리를 전해주는거래요, 그렇죠? 우리가 5장에서 공부한게 그거잖아요.
‘그게 사랑이야. 그렇게 완성이야, 그게 완전이야’ 그러잖아요?
사랑은 하나님이 해 주시는 것이지 인간이 하나님을 사랑하는게 아니다, 를 확실히 알아서,
‘하나님 그런거군요 저는 하나님의 사랑을 안 받으면 안되는 자군요’ 라고 그분의 사랑을 알아드리면,
‘그래 니가 나를 사랑하는구나’ 이렇게 말씀해 주시는 거예요.
여러분이 무슨 뭐 목숨 걸고 그분을 섬겨주면 그걸 사랑으로 인정해주는게 아니라니깐요.
마태복음 22장 36절 보세요.
선생이여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위의 다섯개죠,
둘째는 그와 같으니, 이게 호모이오스 (ὁμοία : homoia)예요. 여기서 호모 (homo) 라는 말이 나온거예요.
호모. 호모이오스. ‘둘은 첫째와 같은 거야’ 라 그래요. 같은 거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그 밑의 다섯 개가 위의 다섯 개와 같은 거래요.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그러니까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그 열이 온 율법인데, 그 위의 다섯과 아래의 다섯은 정확하게 같은 거야.
이런 말이예요. 그렇다면 위의 다섯에 실패한 인간들에게 아래의 다섯을 설명해서 위의 다섯을 성공할 수 있는 방법을
설명 해 주면 되잖아요. 그게 산상 수훈이란 말이예요. 그래서 아래의 다섯을 하나하나 설명해 주시는 거예요. 근데 넷으로 축약을 해가지고. 아래에서 난 자들을 위에서 나게 하는 작업을 시작하시는 거예요. 뭘로? 말씀으로.
그래서 산상 수훈이 어떻게 시작해요? ‘그가 위의 입을 열었다’ 그래요. 위의 입을 열었다. 아래에서 난 자들에게 위의 입을 열어 낳게 하는거예요. 진리로 낳게 하는거예요. 그래서 산상 수훈은 ‘입을 열어’ 라고 시작하는 거예요.
마태복음 5장 2절 보세요.
입을 열어 가르쳐 가라사대. 입을 열어 가르쳐 가라사대.
자, 아래의 넷이 하늘의 열을 고 아래의 다섯을 통해서 사랑이라는 고 하나로 가지게 되는 거예요.
칠에서 십으로 십에서 열 둘로. 열 둘이 다섯으로 되는 거고 다섯이 넷으로 되고, 넷이 하나가 되어,
그러면 둘에 불과한 (인간이라 그랬어요) 자들이 하나로 (하나님의 그 하나로) 완성이 되는 것.
그러니까 보세요, 칠, 오, 사, 이, 십이, 십, 일, 여기에 다 걸리죠? 그 숫자예요. 히브리 사람들이 이 개념을 갖고 있다고요. 그들은 아라비아 숫자가 없었기 때문에 그냥 이런 의미로 그 숫자들을 썼단 말이예요.
이렇게 하나님의 계시에 의해서 십을 (하늘의 그 십을) 일로 가지게 되어서 열 둘로 완성이 되는게 성도의 구원이고,
그 진리를 다른 세상에게 흘려주는게 사랑이라면 (아가페라면) 그 모든 건 하나님의 열심에 의해 이루어 지는 거죠?
이사야도 이야기 하잖아요. 하나님의 열심이 이루시리라 그러잖아요. 니들이 열심을 내는게 아니라.
그러면 그 과정 속에서 단순히 소리의 역할을 하는게 성도예요, 우리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역할을 한다지만
우리 안에 있는 진리가 그 일을 하는거지 사실 그 진리가 빠진 나는 그냥 허수아비란 말이예요.
그렇게 하나님의 열심이 그 일을 하는 건데, 도데체 이 껍데기인 우리가 무슨 기도를 그렇게 열심히 해야 하기에
여기에 기도에 관한 설명이 장황하게 기록이 되어 있냔 말이예요.
성도가 기도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언약이 성취되지 않나요? 예, 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어요.
왜냐면 성경이 말하는 기도는 우리가 알고 있는 그 기도가 아니예요. 그거는 하나님이 율법을 주기 전에도 모든 인간이 다 하고 있던 거래니깐요, 그 기도는. 도데체 누가 가르쳐 줬는지 모르겠는데 모든 인간들이 그걸 하고 있었다고요.
자기보다 힘 센 어떤 절대자에게 자기의 육적 필요를 구하는 그런 일을 누가 가르쳐 주지도 않았는데 그 존재가 뭔지도 모르면서 하고 있었다니깐요. 물 떠놓고 하고, 기둥 세워 놓고 하고. 인간들이 그걸 하고 있다라는 거예요. 거기에 하나님이 ‘그거가 너희들이 지금 기도라고 하는데 ....내가 말하는 건 그 기도가 아니야, 그 내용이 뭔 줄 알아?’ 가르쳐 주시는게
성경에 나오는 기도의 내용이예요.
그러니까 호 코스모스의 세상에서 인간들이 하고 있는 껍데기로 보고 그렇게 현상계 속에서 하고 있는 그것들을
올바로 잡아주고 그 내용을 계시해 주는게 성경이라니깐요. 근데 그걸 그대로 받아들여서 그걸 더 강화하는데 쓰고 있어요, 오늘날 교회는, 성경을. 그렇지 않단 많이예요, 여러분.
오늘 본문의 내용을 잘 이해하시기 위해서는 율법을 진리로 풀어서 설명을 해 주는 이 산상 수훈의 위치를 눈 여겨 보실 필요가 있어요. 모세가 예수님을 ‘나와 같은 선지자’ 라 그랬죠? 그러면 예수님은 분명히 모세의 행보와 같은 행보를 가셔야 돼요. 모세는 예수로 죽은 겁니다. 그래서 약속에 땅에 못 들어가고 광야에서 죽은 거예요, 모세가. 그래서 어떻게, 모세는 그럼 약속의 땅에 못 들어갔나요? 아니, 들어갔어요. 예수님이 역사 속에서 죽으셨지만 그리스도로 약속의 땅에 들어가셨던 거예요. 하늘 승천하셨죠? 모세는 여호수아로 들어간거예요. 그 이야기 하는 거라니깐요. 그래서 모세는 반드시 광야에서 죽어야 돼요. 왜? 예수의 역할이니까. 율법의 역할이니까.
그래서 모세가 간 길, 모세는 또 이스라엘을 품에 품고 간 길이니까, 이스라엘이 간 그 길이 모세가 간 길이거든요?
그래서 이스라엘이 일 세대가 광야에서 다 죽는거예요. 못 들어가요. 새 세대, 새로운 피조물, ‘광야에서 난 자’ 만 들어가는 거예요. 어떻게? 교회에서 ‘위엣 입으로 난 자’ 만 들어가는 거예요.
이 산상 수훈이 어떠한 내러티브로 이어지는지 한번 보세요. 그래야 이게, 이 기도가 도데체 뭔지를 우리가 알 수 있어요. 성경 신학은 이렇게 하는 거예요.
마태복음 2장 14절 보세요.
요셉이 일어나서 밤에 아기와 그의 모친을 데리고 애굽으로 떠나가 헤롯이 죽기까지 거기 있었으니
이는 주께서 선지자로 말씀하신바 애굽에서 내 아들을 불렀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
애굽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부를 때 ‘내 장자다’ 이러죠? 내 장자들 풀어줘!
자, 하나님의 아들이 애굽으로 들어갑니다. 그리고는 애굽에서 나오는 거예요. 왜? 성경 말씀을 그대로 이루려고, 라고
이야기 해줘요, 성경이. 그리고 나오셔서 사십 일 광야를 사시죠? 성경이 그렇게 이어져요.
나이가 몇 살이고 그게 몇 년 터울이고 이런 건 아무 상관 없어요.
그냥 애굽에서 나오고 광야의 이야기가 이어지고 그 다음에 산상 수훈이 이어진다니깐요.
신명기 8장을 보면, 그러한 이스라엘과 모세의 사십 년 광야가 뭐라그래요?
내가 너희를 광야에서 시험한 것은, 그러잖아요. 사십 년 광야, 시험이라 그래요.
마태복음 4장 1절 보세요.
애굽에서 나온 예수님이,
그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사십 일을 밤 낮으로 금식하시매 주리신지라
정확하게 같은 단어들이 열거가 되죠, 신명기하고요. 그리고 5장부터 산상 수훈이 강설 되는 거예요.
그 산상 수훈은 두 말 할것 없이, 율법이니까, 율법의 뒤의 다섯 개니까.
시내산에서의 하나님의 율법 수여를 가리키는 거겠죠? 당연히.
광야에서 사십 일 시험 받고 산에 올라갔단 말이예요. 그리고 거기서 율법을 이야기 하신다니깐요.
모세가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아 내려와서 그 율법을 이스라엘에게 전달해요. 어떻게?
열 둘로 재편을 해서 그들에게 율법을 사십 년 광야 동안 가르친단 말이예요.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서 사십 일간 머물면서 하나님으로부터 율법을 받아 내려와 땅에다가 율법을 던진 사건과
이 산상 수훈의 이야기는 데칼코마니 같은거예요. 이렇게 짝 붙이면 하나로 합쳐지는 거예요.
그리고 그 율법을 진리로 전해주기 위해서 이스라엘이 열두 지파로 편성되는 것처럼 산상 수훈이 가르쳐지기 전에
열두 제자가 거기에서 모아져요. 똑같애요.
그렇다면 이 복음서에서 산상 수훈 바로 이전에 나오는 이야기는 예수님이 하나님으로부터 계명을 받는, 그 모세의 시내산 이야기가,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계명을 받는 그 시내산 이야기가 그려지고 있어야 되잖아요. 정확히 같은 이야기로 가니까. 그런데 모세가 하나님께 올라가서, 산에 올라가서 사십 일 동안, 오랜 기간 동안에 그가 감추어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밑에서 못봤거든요. 밤이었어요. 거기에서 그렇게 율법을 받는 그 이야기를 신약에서는 이렇게 그리고 있단 말이예요, 한번 보세요.
누가복음 6장 12절 보세요.
이 때에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그래요.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맞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 밝으매 그 제자들을 부르사 그 중에서 열 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가라사대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산상 수훈이 떨어지죠? 그 전에 열 둘이 모아져요. 그러면 모세의 이야기와 이거를 이렇게 대조를 해보면
그 전 이야기는 모세가 하나님에게 계명을 받으러 산으로 올라간거잖아요? 근데 복음서에서는 예수님이 기도를 하러 산으로 올라가셨다, 그래요. 그리고 밤이 맞도록 (오랜 시간을 가리키는 단어예요) 기도했다 그래요.
이건 뭐 밤새 기도했다 이렇게 이제 사람들이 번역을 하는데, 그래서 철야 기도가 생긴거 아니예요? 이것 때문에.
밤에 잠을 자야지, 왜. 그거 하나님한테 그냥 그렇게 잠 안 자고 졸르면은 하나님이 혹시 들어줄까봐 그러시는 거예요?
그런 무당 잡교의 기도가 어딨습니까.
자, 이 단어, 여기에서 ‘예수님이 기도하시러 산으로 올라가셨다’ 에서 이 기도가 프로슈코마이 (προσεύχομαι: proseuchomai) 예요. 오늘 우리가 공부하는 바로 그 단어예요.
‘그’ 산에 올라가서 하나님께서 기도를 하셨는데, 그리고는 밝아졌어요.
내려오셔서 열 둘을 모으고 그 때부터 ‘그’ 산에서 받은 어떤 것을 전해주는 이야기란 말이예요.
그러니까 중요한건 성경이 모세가 산에 올라가서 계명을 받고 하나님으로부터 설명을 들었죠? 이게 사십 일,
사십 일 걸렸습니다. 설명을 들은 그 사건을 예수님의 기도로 그려내고 있다, 라는게 중요한 거예요.
예수님이 진리의 계명을 그 산에서 비로소 받았다는 그런 말이 아니라는 거예요. 그런 말이 아니라,
니들이 생각하는 그 기도라는게 무엇인지를 ,,구약의 그 모세 이야기를 통해서 여기서 한번 재확립을 해보라는 거예요.
그게 그 기도가 맞냐, 라고 물으시는거란 말입니다.
기도, 그 프로슈코마이는 제가 여러번 설명 해 드렸지만 ‘프로스’ (pros : toward) 그런 전치사가 앞에 붙어있는 거예요, ‘어디를 향하여.’ 슈코마이 (euxomai: to wish, pray), ‘원하다,’ ‘간절히 원하다,’ 간절히 바라다,’ 그리고 ‘어디어디를 향하여 신앙 고백을 하다’ 란 뜻이예요. 프로슈코마이라는 단어 자체가.
성경에는 ‘구하다,’ ‘간구하다,’ ‘기도하다’ 이 단어가 여러 개로 쓰여요.
‘간구하다,’ ‘구하다’ 이건 뭐 아이테오 (αἰτέω : aiteó)로도 쓰이고 제테오 (ζητέω : zéteó)로도 쓰이고
다른 단어도 많이 쓰인다고요.
그런데 프로슈코마이는 그렇게 뭐를 열심히 졸라서 얻어내는 그런 개념으로 쓰이지가 않는다니깐요.
내가 받은 신앙 그것을 누군가에게 흘려 주고 고백하는 것, 그리고 무엇무엇을 향하여 간절히 그렇게 되기를 원하는 걸
프로슈코마이라 그래요.
그런데 한 번 보란 말이예요.
피조물이라는 존재가 자기가 알지도 못하는 그 하나님이라는 분에게 먼저 무얼 구할 수 있는 존재입니까?
프로슈코마이라는건 어떤 존재가 어떤 대상을 향하여 ‘나는 니가 그렇게 됐으면 좋겠어, 내 원함은 이거야’ 라고 하실 수 있는 분은 창조주 밖에 없다니깐요. 먼저, 1차적으로.
창조주가 자기가 만든 피조물들에게 프로스 (향하여), ‘나는 니가 이렇게 되었으면 좋겠어’ 라고 마음을, 자기의 뜻을 그렇게 밝히는 거. 이걸 프로슈코마이라 그래요. 그러면 그 뜻을 내가 깨달아 알았어요, 진리로, 성령에 의해서.
아, 그분이 나에게 원하는게 이거야?
하나님이 나에게 간섭하시기 전에는 그걸 알 수가 없어요, 우리는 (피조물, 먼지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나에게 간섭하셔서 ‘내가 너에게 원하는게 이거야 내가 너에게 줄려고 하는게 이거야’ 라고 말씀을 해주셨을 때 ‘내가 그렇게 됐으면 좋겠어요? 하나님이 나에게 주실려고 하는게 그거예요? 그러면 하나님 당연히 그거 주셔야죠!’ 라고 할 반응 할 때 이걸 내 신앙 고백이라고하고 이걸 기도라고 하는 거예요. 그게 프로슈코마이란 말입니다.
피조물들은 자기가 무엇을 구해야 할 지를 몰라요. 그래서 하나님이 자기를 계시 하기도 전에 이 피조물들이 누군가에게 무엇을 구하고 있었다니깐요. 하나님은, 그거는 나에게 구하는거 아니다, 라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내가 누군지 계시도 안했는데 누구에게 무엇을 구하고 있었어? 기도는 그거 아니라니까! 로 가르쳐 주는 거예요.
로마서 8장 26절 보세요.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성령이 프뉴마 (πνεῦμα : pneuma) 예요, 여기서. 진리, 영, 말씀이예요.
우리 연약함을 도와요, 뭐가? 말씀이 도와요. 진리가 도와요.
그런데 우리의 연약함이 뭐예요?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는 것’ 이래요.
근데 진리가 니들이 무엇을 구해야 하는지를 알려준대요.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하나님의 뜻.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주실려고 하시고 우리에게 무엇을 구하라고 하시는지 그분만 안다는 거예요.
진리만이, 성령만이 안다는 거예요. 자, 여기에 쓰인 단어가 프로슈코마이예요. 똑같은 단어예요.
우리는 ‘기도를 할 수 없는 존재다’ 라고 그래요.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한다, 이게 프로슈코마이니까.
너희들은 기도를 못해, 그래요.
근데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정말 구하는 바를 알지 못해요? 인간은요, 자기가 간절히 원하는 게 없으면 기도를 안하는 종자들이예요. 그죠? 자기가 간절히 원하는게 없는데 무슨 기도를 해요. 그러면 우리는 무얼 구하는지 알고 있잖아요.
그런데 성경은 모른다 그런대니까? 그러니까 인간들이 지들이 알고 있는 어떤 것을 간절히. 뭐, 육의 필요겠죠. 보이는건 이거 밖에 없으니까. 그건 너희들이 마땅히 빌 바를 모르고 비는 거라는 이야기예요.
그래서 성령이, 진리가 진짜 너희들이 구해야 할 바를 무엇인지를 알려준다는 거예요. 뭘로? 진리로. 말씀으로.
하나님은 그 진리가 너희들에게 무엇을 구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기 전에 너희가 너희 것으로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 거기에 필요한 것들로) 구하는 것은 하나님이 관심도 없다는 얘기예요.
기도가 뭔지도 모르고 무엇을 구해야 할지도 모르면서 그저 육의 필요만 채울려고 소리만 지르고 있는거.
그것이 오늘 날 교회의 기도예요. 그래가지고 사실은 사람들이 기대도 별반 하지 않아요, 기도 하면서. 그렇잖아요. 로또만큼도 기대 안한다니까. 그냥 혹시나해서 그냥 해요. 다 찔리니까, 웃음으로 때울려고 말이죠.
그래서 진리가 우리를 위해 친히 간구한다는 거예요.
휘페렌 팅카노 (ὑπερεντυγχάνω : huperentugchanó), 이거는요. 중보하다, 중지하다 라는 뜻이예요.
하나님의 중보와 사람의 기도를 대조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사람의 기도는 중보의 역할을 하는 어떤 것이라는 뜻이예요. 사람의 기도라는 건.
그래서 여기에서 하나님의 중보라는 단어를 끌어다 쓰는 거예요. 사람이 기도를 모르니까 하나님이 중보를 해주신다는 거예요. 사람의 기도는 중보의 역할을 해야되는데 지들이 육적 필요만 그냥 열심히 외치고 있으니까 하나님이 간구하신다, 중보를 하신다라고 이야기 하는 거란 말입니다.
사람의 기도는 일차적으로 하나님의 중보가 전제되어야 한다는 거예요. 왜냐면 성도라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께 기도를 못하기 때문에 그 진리, 성령이 하나님과 성도를 먼저 중재해야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기도는 하나님의 뜻, 그 ‘하나님의 원하심’이 먼저 전제가 되어야 하고, 그게 이제 하나님의 기도죠?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 안에서 간구하시는 하나님의 기도란 말이예요, 그게.
‘이게 내가 너희들에게 원하는 거야’ 라고 가르쳐 주는게 하나님의 기도라고 하잖아요, 휘페렌 팅카노.
이게 ‘중보’ 란 말이예요. 그리고 그 전제에 의해 깨달음을 얻게된 이들이 그분의 뜻을 흘려주고 구하는 것. ‘그렇게 되게 해주세요. 맞아요, 그게 맞습니다’ 라고 하면 그게 기도라는 거예요.
그래서 ‘기도를 가르쳐주세요’ 그랬더니 하나님이 다 이루실 주기도문을 가르쳐준 거예요.
그건 하나님이 다 이루실 거래니깐요, 이루신거고.
근데 그 복음의 내용을 ‘그래, 이게 기도야’ 라고 딱 고만큼만 가르쳐 주었대니깐요.
자, 그게 무슨말인지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을 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구하라,’ ‘부르짖어라,’ ‘찾아라’ 이렇게 반복하여 권고를 합니다. 기도하라는 거예요. 구하라.
구하라. 그때 쓰인 단어가 아이테오라 그랬습니다. 그건 ‘빚 갚으세요’ 라는 말이라 그랬죠? ‘내 빚 내놔’ 이런 말이예요.
내 빚 내놔. 니가 반드시 나에게 줘야할 거 그거 내놔. 이게 아이테오예요. 그러니까 ‘구하라’ 예요, 구하라.
그러니까 기도라는건 일단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그 ‘빚.’ 그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아야 할 수 있는 거예요. 그래야 구할 수 있다니깐요.
뭘 준다고 하는지 알아야 ‘그거 주세요’ 라고 할거 아니예요, 그걸 기도라고 한다는데 성경이.
하나님께서 당신의 택한 백성들에게 마땅히 주셔야 할 거. 그것이 뭔지를 알아야 돼요. 그게 뭐죠?
하나님이 우리가 생겨나기도 전에 택함을 받은 우리에게 약속한 게 뭐예요? 아들이예요.
그건 ‘내가 내 아들을 죽여 너희를 구원할 거야, 내 아들 만들거야’ 라는 말이기도 하지만
그 ‘아들을 주겠다’ 말이기도 하지만. 내가 너희를 내 아들 삼을거야. 어떻게? 아들 주어서. 이런 약속이기도 해요.
그래서 아들을 주겠다고 한거예요, 우리에게. 그게 하나님의 약속이예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진 빚이라니깐요, 그게.
아들을 주겠다. 그래서 그 아들이 되어 내가 그분을 믿게 되면. 우리 개역 성경에는 ‘아들을 믿는 자는’ 이렇게 되어 있는데 ‘아들로 믿는 자는’ 이예요, 전부 다. 그 아들을 받아 아들로 믿는 자는, 다 그들이 성도라는 이야기예요.
아들을 믿는게 아니라니깐요.
자, 그 아들, 그 아들을 우리에게 준다 그랬어요. 아무튼 그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하는 빚은 그 아들이예요.
그 아들은 진리라고도 쓰고, 복음이라고도 쓰고, 약속이라고도 쓰고, 한 마음이라고도 쓰고, 모노게네스 (μονογενής : monogenés : 독생자)라고도 쓰고,은혜라고도 쓰고, 사랑이라고도 써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우리에게 빚으로.
그러니까 우리가 가진 단어 한계가 그거예요. 하나님이 반드시 주어야 할 거.그거를 ‘빚’ 이라는 단어로 밖에 표현을 하지 못하는 이 인간의 비루함이예요. ‘빚’ 이라니깐요, 그게.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으로부터 계명을 받고 그 계명이 의미하는 바를 하나님에게 배웠죠?
사십일 동안 배웠다는 건, 우리 인간들의 인생. 사십 년이예요, 그게. 광야 사십 년. 인생, 역사 전체.
그것이 역사 전체를 통하여 가르쳐질거라는 얘기예요. 그래서 모세가 사십 일 있다가 내려왔다 그러는 거예요.
그 계명, 사십 일 동안 하나님으로부터 계명을 받고 그걸 배웠단 말이예요, 거기서. 이게 뭔지.
너희는 아들에 의해 살 것이고 그렇게 살아난 너희가 아들이 될 거야. 그 아들이 유월절 어린양이었어.
이걸 모세에게 다 가르쳤단 말이예요. 그래서 모세가 사십 년 광야 동안에 이스라엘에게 그거 가르치는 거예요.
이게 하나님의 언약이란 말입니다. 그 말은 너희의 육은 광야에서 완전히 죽여버릴 거라는 약속이기도 해요.
그래서 그들의 1세대가 다 죽은 겁니다.
나는 애굽 사람처럼 자기들 스스로 세상의 성전과 세상의 성을 쌓겠다고 펄펄 뛰며 날 뛰는 너희를 광야에서 말씀으로 (만나가 그래서 쏟아진 거예요) 죽이고 열 둘이라는 아들로 만들어서 (내 아들이 유월절 어린양으로 벌써 죽었잖아요),
열 둘이라는 아들로 만들어서 (그래서 열두 지파입니다) 약속의 땅에 들여보내겠다는 거예요. 그게 율법의 역할이었잖아요. 그리고 그 전체가 하나님의 창세전 언약의 내용이고요.
너희들은 (육을 포함한 그 세상 성전은) 반드시 허물어져야 된다는 거예요. 니들이 애굽에서 애굽의 대표적인 것으로 세우고 있던 그 성전과 그 성, 그것은 너희들의 육과 함께 반드시 허물어져야 되는 거라는 거예요. 그래서 거기서 빼내오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거기를 쳐버리는 거예요. 그래야 영원한 성전으로 세워질 수 있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집도 들어가지 않은, 집도 안 줬다 그러죠? 그런 흙 벽돌로 짓는 집, 출애굽기 5장부터 나오잖아요?
어떤 세력에 의해 강요 되고 고단하게 지어야 하는 그것을 율법의 종이라 그러죠? 강요되는 거예요, 그게.
그런 그 세상의 성전이 얼마나 허무한 것이며 허황된 것인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그렇게, 그 땅의 왕에게 핍박을 받는 모습으로 그려졌다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내게로 와 내가 거기서 건져줄게’ 그러는 거예요. 그게 애굽의 삶이라니깐요.
그들이 애굽의 성전을 짓고 있었고 애굽의 성을 쌓고 있었단 말이예요. 그들에게 수고로운 일을 시킨 그 왕이 어떤 왕인지 한번 보세요.
출애굽기 1장 8절.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일어나서.
요셉을 알지 못하는’ 이 아니라. 원문으로 보면, ‘요셉을 알지 않기로 한’ 새 왕이예요.
애굽을 다스리더니 감독들을 그들에게 세우고 그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워 괴롭게 하며.
예수님이 이 짐 갖고 오라는 거예요.
그들로 바로를 위하여 (세상 왕을 위하여) 국고 성 비돔과 라암 셋 (성전입니다)을 건축하라 그랬어요.
예루살렘 성전은 예루살렘 성으로 둘러싸여 있었죠? 그걸 모형하는 거예요. 율법의 성전과 성.
그걸 자기들의 열심과 노력으로 짓고 있어요. 근데 누군가가 어떤 것에 의해 강요된 무거운 짐으로 짓고 있다니깐요.
이게 율법의 행위예요. 하기싫어 죽겠는데 지옥 안 갈라고 억지로 하고 있는거. 그건 자유 아니야, 그건 종이야.
그래서 애굽에서 고통받는 이런 모습으로 그려져 있는거란 말입니다. 실제로 고통을 받았을 거예요.
그러나, 우리는 그런 껍데기만 보지 말자는 거예요. 그 내용이 뭔지를 먼저 알아야 된다는 거예요.
자, 요셉을 알지 못하는 왕. 요셉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넷, 완성으로 보여주는 인물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은 완성이기 때문에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 그러지
요셉의 하나님이라고 안 그래요. 이건 완성이거든요.
근데 요셉은 누구예요? 예수님의 아버지 이름이예요. 아들을 낳는 자, 아들을 낳아 아들이 되는 자의 모형이 요셉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요셉의 아들이 누구예요? 에브라임과 므낫세예요. 므낫세는 ‘제거되다.’ 에브라임은? ‘많은 열매를 맺다.’
하나가 장자가 제거되어, 므낫세죠? 에브라임, 많은 열매를 맺는 거. 차자가 장자가 된 거잖아요. 요셉을 설명하는 거예요. 아들로 설명하거든요. 그 요셉.
근데 그 요셉을 알지 않기로 한 왕은 뭐겠어요? 그 진리와 복음과 상관 없는 어떤 것. 율법이란 말입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언약과 상관 없는 세상 왕. 그 왕이 뭘 짓게 해요? 세상의 성전과 성을 짓게 하는데, 무엇으로? 흙으로. 근데 그 흙이 뭐예요? 하나님의 저주 받은 거. 저주를 받은 흙이라니깐요. 근데 그 흙으로 성을 지을라면 짚을 넣어야 되는데 그 짚을 ‘니들이 가서 구해와’ 그래요. 너희들의 노력으로, 종들의 노력으로 종들이 지은 성전 파괴해 버리는 거예요. 그게 출애굽기라니깐요. 그 흙 성전은 하나님 앞에 아무 소용이 없다라는 거예요. 그래서 그 건축 현장에서 빼내오는 거예요.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예수니까.
그 세상 성과 세상 성전의 건축자들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반드시 울타리 밖으로, 자기들의 성전 밖으로 던져버리게 되어있기 때문에 그들을 그 건축 현장에서 빼내오는게 출애굽기라니깐요.
근데 그 건축 현장이 뭐예요? 인간들의 자아 확장, 자기 확립, 자기 계발, 자아 성숙 뭐 이런거죠?
그러면 거기에서 빼내온다는 거는 뭐예요? 그 자아를 죽이겠다는 거 아닙니까? 그걸 ‘자기 부인’이라 그래요..
그러니까 거기에서 빠져나오는게 뭐 대단하게 행복하고 기쁘기만하고 그런 것이 아니라니깐요.
자유 자유 그러니깐 뭐. 그게 굉장히 감정적으로도 기쁘기만하고 행복하기만 할 줄 아는 분들이 있는데 그런 기대하지도 마세요. 거기서 뽑아 내는 거예요.
그리고는 왜 그렇게 하셔야 하는지를 율법이라는 시청각 교재를 사용해서 설명을 해 주시는 거예요.
그래서 거기서 뽑아낸 다음에 시내산에서 율법을 주는거란 말입니다.
왜 너희들이 거기에서 빠져 나와야 되는지 알아? 이렇게.
율법을 주니까 똑같이 세상의 성과 세상 성전을 쌓고 있네, 이것들이? 그래, 그래서 너희들은 거기서 빠져 나와야 되는거야. 그래놓고 다 죽여버리는 거예요, 광야에서.
하나님이 자기를 문자로 계시하기 이전에도 인간들의, 인간들이 신이라는 걸 섬기고 있었어요.
그런데 그 신은 여러 모양으로 나타나고 있었지만 결국 자기 자신이라는 신이었어요.
그래서 율법이 있기 전에는 양심이 율법의 역할을 했다라고 하는 거예요. 그 말은 다른 말로,
‘그 율법은 니들의 양심이 뭔지를 설명해 놓은거야’ 그런거예요.
근데 양심이 뭐예요? 에피뚜미아 (ἐπιθυμία : epithumia), 두 마음이라니깐요, 인간의 생래적 양심은.
그걸 율법으로 설명해 주는 거예요. 봐, 모든지 너희들은 둘로 갈르짆아?
모세가 그 내용을 하나님께 율법을 받으면서 배운거죠. 그리고 사십 년 동안 이스라엘에게 그걸 가르친거죠.
근데 스데반 집사는 그걸 교회라고 부르네요, 또? 광야 교회.
그런데 복음서는 그렇게 모세가 산에서부터, 산에서 하나님으로부터 그렇게 율법을 받는 그 그림을 고자리에 넣어놓고
그걸 ‘기도’ 라고 부른다는 거예요.
그렇게 하나님으로부터 진리가 무엇인지를 계명을 통하여 받으면 ‘살인하지마,’ ‘간음하지마,’ ‘거짓 증거하지마’ 를 사랑이라는 진리로 완성을 하면 이거를 흘려줘야 되잖아요. 자, 그걸 우리가 전 시간에는 ‘구제’ (엘레모수네 : ἐλεημοσύνη : eleémosuné)라고 배웠고 그걸 성경이 ‘기도’ 라고 한단 말입니다.
그러면 기도라는 것은 1차적으로 누구의 것? 하나님의 것이란 말이예요. 하나님이 우리를 향하여 주시는 거.
그게 하나님의 마음이예요. ‘내 마음이 이래, 너희를 향한 내 마음이 이래’ 이게 하나님의 기도라니깐요.
우리는 그걸 진리로 깨달아, ‘하나님의 마음이 그러세요? 나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 그거였어요?
내가 이렇게 해달라는 이런 헌신을 요구하는게 아니었어요? 그래요, 하나님.
근데 저는 이 에피뚜미아, 두 마음을 갖고 있어서...... 자꾸 그리로 가네요.
하나님 저를 죽여주세요. 그리고 그런 하나님의 원함이 내 안에서 이루어지게 해 주세요’
가 뭐예요? 아들의 이름으로, 이름은 뭐? 계시록에서 찾아 봤죠. 말씀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
그걸 어떻게 한다? 아들의 이름으로 구하는 건 다 들어준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이렇게 뒤에다가 갖다 붙이면 무조건 다 들어준다는 말이 아니라.
그 아들에 관한 그 말씀으로, 그걸 깨달아 나에게 ‘빚 갚으세요’ 라고 하면 ‘내가 왜 안 갚아 니들이 그걸 알고 있는데 당연히 줘야지.’ 그게 아들의 이름으로 구하면 다 준다 이 말이예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해서 다 받았어요? 아니면서 말이죠.
그래서 이 기도의 이야기가 사랑을 흘려주어야 하는 성도들의 주의사항에 들어가 있는거란 말이예요.
갑자기 그냥 기도가 여기 들어가는게 아니라. 그러니 우리가 얼마나 잘못 된 기도들을 하고 있냐고요.
뭐를 구하지 말라는게 아니예요. 어려서는 그럴 수 밖에 없어요. 그래야 살아 있을 수 있다니깐요. 우린 너무 약해서.
그래서 어릴 때는 엄마한테 ‘젖 주세요, 기저귀 갈아주세요’ 해야되요.
그러나 점점 자라면서, 나이 사십 오십 됐는데 ‘엄마 젖 줘’ 이러면 뭐에요, 그게. 근데 우리는 여전히 그러고 있다니깐요, 기도를.
그러한 기도, 어린 시절의 기도를 통하여 진짜 나의 기도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배우면은 돼요.
그게 나쁜 기도라는게 아니라. 하시라니깐요. 정말 못 살겠거든 그 아버지한테 구해야지 뭐 어떻게 하겠어요.
그러나 점점 그 구함도 시들해지게 되어 있어요.
그래, 그게 성취된다고 나의 이 공허가 메꿔질까? 아니라는거 점점 진리를 통하여 알아가게 되거든요.
그거 해결된다고 내 인생이 진짜 행복해 지곘어? 아냐, 그걸로 행복해지는게 아니야~~~ 라는걸 알기 때문에 점점 거기에 대해서는 관심을 놓게 되어 있어요. 진짜 프로슈코마의 기도가 뭔지를 안다면.
그 기도, 프로슈코마이라는 단어는 히브리어 파랄 (פָּלַל : palal)이라는 단어를 그대로 옮긴건데 그 파랄이 ‘중보하다’ 예요. 중지하다. 아까 로마서에서 우리 봤잖아요. 하나님이 중보하신다. 그 의미라니깐요. 그럼 뭐예요?
하나님과 그분의 원수를 중보하는건 뭐예요? 진리의 말씀 밖에 없다고요. 그걸 내가 올바로 깨닫고 올바로 흘리는 거,
그리고 올바로 고백하는 거,정 누가 들을 사람이 없으면 스스로 시편 기자들처럼 중얼중얼 자기에게 들려주는 것. 이걸 기도라고 그래요. 그래서 시편을 기도라고 하는거예요, 독백인데.
그래서 예수님이 기도를 ‘가르쳐주세요’ 하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가르쳐준 거예요.
누가복음 11장 1절 보세요.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제자 중 하나가 여짜오되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기도할 때 이렇게 하라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에 임하옵시며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일용할 양식은 오늘 하루 먹을 양식이 아니라 그랬어요. ‘내일의 양식’ 이라는 뜻이예요, 이 단어가.
‘내일의 양식,’ ‘하늘의 양식,’ ‘위의 양식’ 이런 뜻이란 말이예요. 그건 당연히 주죠? 하나님이 우리에게.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소서.
뭐예요, 이게 다? 하나님이 이루셔서
우리가 그 하나님에 의해 도구로 사용되어 지는 하나님에 의해 시작되고 완성되어지는 모든 복음의 이야기잖아요, 이게. ‘이게 기도야’ 라고 이야기 한다니깐요.
근데 이들이 기도를 몰라서 ‘기도를 가르쳐주세요’ 이랬겠어요? 기도는 모세 이전에도 있었다니깐요.
그리고 히브리 사람들의 기도에 대한 열심은 남들보다 더 특심이었어요. 그래서 그들은 시간을 정해놓고 기도를 했다니깐요. 이들도 그랬다고요. 그런데 무슨 기도를 또 가르쳐 달라고 그래요. 그리고 이스라엘 사람이면 모두 다 외워야 하는 기도문이 몇 개가 있었어요. 그리고 그걸 주문처럼 외우고 다녔었다고요. 이 무슨 기도를 가르쳐 달라는 거예요, 이게?
당시에는 바리새파, 사두개파, 열심당, 에세네파 이런 파 들이 있었죠? 학파들이예요, 이게.
그들은 자기들의 교훈, 자기들의 가르침을 하나로 요약을 해서 외우게 시켰어요. 그걸 그들이 기도라 불렀다고요.
근데 예수님을 쫒는 제자들이 ‘우리는 그런게 없네?’ 남들은 다 자기들것이 하나씩 있는데 우리는 그게 없는거야.
그러니까 우리도 그거 하나 만들어주세요, 그러는 거예요. 기도가 뭔지를 몰라서 그러는게 아니라.
그랬더니, ‘그래 내가 만들어줄게.’ ....우리가 가르치고 배우는건 이거야, 가르쳐 주는 거예요.
그래서 이걸 올바로 알면 ‘아, 그게 진리구나’ 라고 알게 된다니깐요. 그랬을 때 이걸 올바른 기도라고 하는 거예요.
자기들이 신앙하는 바에 관한 요약. 다른 파들도 그걸 기도로 알고 있었다고요.
인간들의 육적 필요에 관한 기도는 모든 종교에 다 있는 기도예요. 모든 종교에. 그냥 부르는 이름만 다르지 전부 그 존재가 뭔지 몰라요. 아무도 다 미루어 추측하는 거예요. 그러면 그 대상이 누군지도 몰라, 그리고 다들 열심은 있어요, 그리고 방법도 비슷해 다. 전부 왜 기도를 이렇게 할까. 간절한 모습인가 이게? 무릎 꿇고. 근데 내용도 다 똑같네?
보세요. 병 낫게 해주세요. 부자되게 해주세요. 승진하게 해주세요. 부자되게 해주세요. 집 값 오르게 해주세요.
대학교 들어가게 해주세요. 모든 종교인들의 기도 내용이 똑같애.
하나님이 그 기도 쉬지 말고 하라고 그랬겠습니까, 우리에게? 근데 여태까지 그렇게 배워왔으면서 항의 한마디 못했잖아요. 목사들이 말씀을 진리로 전하는가, 여기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항의 못하고 그 사람이 조금 실수하면 그거 가지고 물어뜯고. 병신들이야. 진짜 따져야 할 거는 못 따지고는 말이죠.
영원한 생명을 죽이고 있는 그 행위에 대해서는 지들도 모르니까 한 마디도 못하고 그냥 자기들이 알고 있는 고 수준에서 어떻게 물고 뚜드릴려고 말이죠. 진짜 따질려면 그가 전하는 말씀을 갖고 따지라니깐요.
성경이 말하는 기도는 그런 기도 아니예요. 그런 남들도 다 하는 기도, 남들이 안 보게 골방에 들어가서 하면
‘그래 잘했다’ 그러고 칭찬해주는 그런 얘기가 여기 써있겠냐고요. ‘내용에 관계없이 그냥 남들 안보게 겸손하게 해 그럼 내가 들어줄게’ 그런 말이곘어요, 이게? 거 골방 같은데 너무 찾아들어가고 그러지 좀 마세요.
그러니까 보세요, 우리가 열심을 부리고 있는 그 모든 것들이 진짜 진의가 다 왜곡되고 있어요.
기도 그렇고, 구제 그렇고, 금식 그렇고, 헌신 그렇고.
우리가 배웠잖아요. 성경이 말하는건 전부 그거 아니였거든요? 근데 비진리는 인간들이 하기 쉽고 열심을 부릴 수 있는 어떤 것을 비슷하게 그 옆에 놔 두고 그걸 열심히 하게 만들어요. 안하게 만드는게 아니라. 그래서 엉뚱한걸 열심히 하게 만들어서 ‘나 잘했죠?’ 하고 지옥가게 만든다니깐요.
종교 개혁을 하니까 엉터리 ‘개혁주의’ 라는게 생겨버리고 진짜 개혁주의가 아니라.
진짜 개혁주의는 로만 캐톨릭의 율법주의에서 벗어난 게 개혁 이잖아요. Reformed, 원래 form으로 돌아가자.
근데 그거보다 더 엉터리 같은 것에게 이상한 옷을 입혀서 ‘개혁주의’ 이렇게 이야기해요.
제가 그 왜곡된 ‘개혁주의’를 뭐라 그러는거지, 진짜 개혁주의 그거 하자니깐요, 우리가.
하도 뭐 번역본에 문제가 많아서 이제 원어에 대한 그런 관심이 높아지니까,
아 요즘은 이단놈들이 전부 또 히브리어 헬라어로 설교를 하네? 아, 그러니까 덩달아 혹시 저것도.
아, 나는 걔네랑 틀려요. 그 사람들이 히브리어 헬라어로 설교를 한다그래서 몇 개 들어봤더니,
히브리어 헬라어를 이렇게 읽기는 하는데 번역은 개역성경이랑 똑같이해. 읽기만 히브리어로 읽고.
내용을 모르는거예요, 그러니까. 그니까 사람들이 혹하다가 거 뭐 다 비슷하네, 이렇게 되는거예요 또. 항상
그래요, 항상. 비진리는. 엉터리 모조품들 이렇게 만들어가지고 말이예요. 사람의 기운을 뺀다고요.
그러면 오늘날 교회가 기도라고 이름붙여 행하는 그거. 자기의 소원을 이루기 위해 행하는 그건 성경이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가.
야고보가 잘 설명하고 있어요. 4장 1절 보세요.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 다툼이 어디로 쫓아 나느뇨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 좇아 난 것이 아니냐
너희가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고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나니 너희가 싸우고 다투는도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
진짜 여러분 우리가 구하지 않아서 못 받습니까? 우리만큼 열심히 구하는 사람들이 어딨어, 이 한국 사람들 만큼?
산기도, 들기도, 새벽 기도, 철야 기도. 기도만 해. 근데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
그럼 또 착한 사람들이 ‘아, 내가 정욕으로 쓸려고 구해서 안주는 거구나.’ 스스로 또 정리를 잘 해요.
여기서 싸움이라고 번역이 된 단어는 단순한 싸움이 아니라 요한계시록에 아주 많이 등장하는 단어예요.
영적 전쟁 있죠? 아마겟돈 전투. 곡과 마곡의 전쟁. 짐승과의 전쟁. 이럴 때 쓰는 단어예요. 영적 전쟁.
그러한 전쟁이 왜 일어나는지 아니? 어디서 일어나는 줄 알아? 너희 안에 정욕 때문에 일어나는 거야, 라 그래요.
헤도네 (ἡδονή : hédoné). 헤도니즘 알죠? 헤도네,
육적인 쾌락. 나의 육을 행복하게 하고 기쁘게 할려고 하는 어떤 마음. 헤도네. 거기에서 그런 전쟁이 일어나는 거야.
그러면서 야고보가 사람들의 기도를 뭐라그래요? 너희가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 하고 그러죠? 그건 너희가 욕심을 내는 거야, 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욕심을 내는 거야, 에서 그 욕심이 에피뚜미아예요. 희생 제사 드리려고 하는 그 마음, 율법의 마음, 너희의 두 마음. 그것, 그것으로 너희들은 못 얻어. 그것으로 너희가 뭐하냐면, 살인해. 프뉴오예요 (희생 제사 드리다). 그 말이예요.
그 단어예요, 그게. 살인하고 사랑해. Jealous. 질투, 시기. 이런 종류의 사랑이죠.
그러니까 너희들이 그 두 마음으로, 희생 제사 (에피뚜미아) 열심히 드릴려고 하는 그 율법의 그 두 마음으로 뭐를 해요? 열심히 희생 제사 드리고 (살인하고) 열심히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그 희생 제사 드리는데.... 근데 너희는 못 얻어, 이런 말이예요. 우리는 그 마음으로 그 열심으로 기도하잖아요.
그 에피뚜미아의 기도는 하나님이 응답해주는 기도 아니란 말이예요.
그리고 이어서 너희가 아무리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희생 제사 열심히 드린다고 해도 너희가 얻을 수 있는 하늘의 좋은 것은 없다, 그래요.
그러면서 너희는 구하지 않기 때문에 못 얻는 것이야, 그러죠?여기서 쓰인 단어가 아이테오예요. ‘빚 갚으세요’ 라는 그 단어. 그러니까 구하지 않기 때문에 라는 그 말은 하나님이 너희에게 구하라고 한 그걸 너희가 모르니까 그걸 못 구하고
엉뚱한 것들을 구하고 있잖아. 뭘로? 에피뚜미아로 살인하며, 사랑하며, 니들이 섬기며.
그거는 니들이 그걸 정확히 그걸 모르고 그걸 못 구하니까 하나님이 안 주는 거야, 이런 말이예요.
그래서 구하지 않기 때문에 못 얻는거다, 라고 이야기 하는 거란 말입니다.
그래서 거기에 아이테오라는 단어가 쓰인 거예요. 니가 무얼 구하는지 모르는구나.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에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죠? 뭘 구했어요, 그들이? 우리 아들들 좌의정 우의정 시켜주세요,
그랬잖아요. 내가 그거 빚 갚으러 온 사람이냐? 그 말이란 말이예요. 거기도 아이테오가 쓰였단 말이예요.
그러면서 그렇게 구하는 걸 ‘정욕으로 쓰려고 구하는 잘못 구하는 것’ 이라고 이야기를 해요. 헤도네.
근데 그렇게 구하면 하나님이 안 준다 그랬어요, 지금.
근데 우리는 간혹 우리가 정욕으로 쓸려고 구하는 거. 솔직히 얘기해서. 그렇게 구하고 받은거 있잖아요. 누가 준 걸까요? 하나님은 안 준다 그랬습니다, 그거. 내가 갚을려고 하는 그거 안 구하면 나는 다른 걸로 안 줘, 그랬어요.
적어도 하나님은 아니겠죠? 그렇다니깐요. 마귀도 ‘야, 나한테 절만 해. 내가 세상 만국의 저 영화를 너에게 줄게’
그랬다니깐요. 그러니까 무슨 뭐 기도빨 있다고 하는 권사들이나 전도사들 목사들 이런 사람 너무 믿지 마세요.
나한테 기도 받어 그러면 나을 거야. 나한테 기도 받어 그러면 해결 될거야. 내가 기도했더니 이러이러하대.
이건 백프로 무당들이예요. 백프로 무당들이예요. 예수믿는 사람 아닙니다. 그럴 수가 없어요.
진짜 기도가 뭔지 아는 사람은.
여러분 보세요.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가 뭐였어요? 복음이 무엇인지를 설명한 거였어요.
요한복음 17장의 그 긴 기도가 다 뭡니까? 진리가 뭔지를 설명하는 거래니깐요.
그래서 예수님이 기도하시면 제자들이 그걸 다 기록할 수 있었던 거예요. 왜? 귀에 못이 박히게 가르친 거거든요, 그게 다. 그게 프로슈코마이예요. 기도예요.
하나님이 그렇게 이룰 거야. 그걸 이해하고 또 흘려 주는 거예요, 우리가. 그리고 하나님에게
‘하나님, 그거죠? 그렇게 된다 그랬죠? 근데 왜 아직 저는 이 모양이죠? 분명히 될거죠?’ 라고 빚 갚으세요’ 구하는 거예요. 기도예요.
여러분이 습관처럼 하는 거. 식사 기도는 언제부터 한 걸까요?
성경에 식사할 때 기도하라는 말 있어요, 없어요? 없습니다. 근데 누가 시켜서 한 거예요? 그게 ‘유전’ 이라는 거예요.
하지 말라는거 아니예요. 하세요. 근데 솔직히 식사 기도하면서 진심으로 기도해본적 몇 번이나 있으십니까.
거 남에게 보일려고 억지로 그러는거. 그럴라면 하지마세요, 차라리.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그런 거예요. 날더러 주여 주여 하는 놈들은 천국에 절대 못 들어가.
왜? 주, 그리스도는 내 안에 있는데, 주여주여 하는건 내 밖에다가 두고 뭘 자꾸 원하는 거거든요.
그 주가 내 안에 들어와서 그리스도로 계시면 내가 구할 바가 이미 내 안에서 완성이 되어 있기 때문에 주여주여 안해요. 근데 여기 없으니까 그렇게 큰 소리로 목이 쉬도록 부르는 거예요. 주여주여 그냥.
근데 예수님이 그랬어요, 분명히. 나더러 주여주여 하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다 못 들어 간다, 이렇게 써 있는데.
그러니까 혹 들어가는 사람이 있을 지도 모른다, 라고 이렇게 미루어 추측하는데 원어는 ‘아무도 못 들어간다’ 예요.
아무도 못 들어간다.
이렇게 주의하라, 프로세코로 시작된 산상수훈 6장이 구제 (엘레모수네)와 기도 (프로슈코마이)에 관한 주의사항으로 이어지는 건 당연한 거예요. 같은 이야기니까, 그게. 둘 다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사랑으로 잘 전해주는 이를 말하는 거예요.
마태복음 18장 15절. 여기 가서 제가 결론으로 말씀드리고, 오늘은 마치고
다음 주부터 제가 한 절 한 절 설명 해 드릴게요.
니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네 형제가 하마르티노 (ἁμαρτάνω : hamartanó), 죄를 범하는 걸 네가 봤다. 그러면 가서 너는 그에게 아쿠오 (ἀκούω : akouó), 들려주래요. 뭘 들려줘요? 말을 들려주래요. 가서 권고, ‘너 그렇게 하지마,’ 이렇게 야단치는 걸로 알고 있는데 그 말이 아니예요. 말을 들려주래요.
그러면 그 말을, 뭘 들려주겠어요? 죄를 뭔지 알아보는 사람이면 진리를 들려주겠죠?
근데 그가 그걸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는 거란 말이예요. 진리를 들었으니까.
16절. 만일 듣지 않거든. 파라쿠오 (παρακούω : parakouó). 아쿠오의 반댓말이예요.
안 들으면 한 두 사람을 더 데리고 와서 두 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라고 번역이 되어 있는데,
‘말마다’ 가 레마 (ῥῆμα : rhéma) 예요. 레마로 증참케 하라가 뭐예요? 난 도데체 무슨 말이지 모르겠네.
아이테오. 굳게 세워라, 예요. 레마로 다른 이를 데리고 와서 혹시 내가 다 못 전했을 수도 있으니까,
다른 이를 데리고 와서 증인들을 데리고 가.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을 증거하는 증인들을 데리고 가서
레마 (말로) 히스테미 (ἵστημι : histémi) 굳게 세워라예요. 굳게 세워라.
만일 그들의 말도 (λόγος : logos : 로고스) 듣지 않으면 (파라쿠오예요)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파라쿠오 (듣지 않으면)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여기서는 관사가 붙은 이방인과 세리예요. 진짜 죄인으로 여겨. 그 말 안 들으면 그냥 죄인으로 여겨.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우리에게 주도권이 있다는 말이 아니라, 하늘이 선택한 자는 너의 말을 알아듣게 되어있다는 뜻이예요.
근데 내가 진리로 말한다.
19절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합심하여가 뭐냐면. 두사람이가 뭐예요? 지금 무슨 얘기 했어요? 말하는 자, 듣는 자죠?
두 사람이 합심하여, 이 말은 한 마음이 되면. 마음이 동일하게 하나로 합쳐지면, 일치되면 그 말을 받아들인단 뜻이죠? ‘합심하여’ 라고 번역이 되어 있는데, 합동하여 구해, 소리질러. 이 말이 아니라 전해주고 들은 둘이 마음이 하나가 되면,
그래서 구하면. 아이테오예요, 이게. ‘빚 갚으세요’ 라고 하면. 둘이 뭔지 알았잖아요, 그게 뭔지.
그렇게 한 마음이 되어 구하면 당연히 들어주지, 이 말이예요. 야, 혼자 기도했더니 하나님이 못 들으셨나, 야 둘이 모여 기도하자. 우리 밤마다 우리 조 함께 모여 기도하자. 그런데 쓰라고 준 말이 아니란 말이예요.
20절 두 세사람이 내 이름으로. 이름은 뭐? 말씀. 그 말씀, 그 진리. 그 말씀으로
두 세사람이 그렇게 모이는 곳에 내가 있다. 진리가 거기 있는 거다, 이런 말이예요. 이게 기도라니깐요?
두 세사람이 그냥 모여서 열심히 기도하면 다 들어줄게, 아니란 말입니다.
합심 기도, 통성 기도, 방언 기도 이런거 하잖아요? 다 헛 짓이예요. 하나님은 그런 열심을 요구하시는 분이 아니란 말입니다.
진리이신 아버지가 일하는 현장은 ‘둘이 한 마음이 되는 곳이야.’ 심프호네요 (συμφωνέω : sumphóneó).
동의하는, 일치하는. 둘이 한 마음이 되는 곳이야. 거기서, 하늘들 안에 아버지가 일하는 거야.
그래서 성경에 내 이름으로 구하라. ‘내 말씀으로 구하라’ 죠, 그건.
진리로 구하라. 아이테오. 빚 갚으세요 하라. 그러면 다 받게 될거야 그러는거예요.
뭐, 여러분이 원하는거 다 들어준다는 그런 말 아니예요. 그러니까 엉뚱한거 구하지 말고 제대로 구하라는 것이죠.
거 엉뚱한거 구하고 상처받고 그러지 마세요. 줄 수 도 있고 안 줄 수도 있는 거니까.
뭐. 그냥 주면 행복하게 잘 받으시고 안 주면 그냥 ‘아, 내가 엉뚱한거 구했구나’ 이렇게 깨달으시면 돼요.
그러면 다음 주부터는 우리가 제대로 구할려면 제대로 알아야 되니까
어떻게 하면 우리가 제대로 알아 제대로 구하게 될까, 를 본문 한절 한절을 제가 풀어드리며 설명 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은혜를 감사를 드립니다.
아버지 하나님. 우리는 그렇게 하나님이 주신 좋은 것들을 엉뚱한 것으로 바꾸어 내는데 선수들입니다.
그래놓고는 왜 그것이 내 뜻대로 되지 아니하고 불쾌해하고 실망하고 절망하고 하는게 우리들의 수준입니다.
아버지 하나님, 기도가 무엇인지 하나님의 뜻대로 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우리가 조금 배웠습니다.
올바른 기도하게 하시고 그 기도가 쉬지 않고 끊어지지 않게 하시며
그것이 우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조금씩 경험하면서
그 속에서 진짜 찬송과 진짜 하나님을 향한 찬양이, 예배가 터져나오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K목사님 산상수훈31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