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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518년 어찌보면 참 길게도 해 먹었다 하겠지만 세계 역사로 봤을 때 전체 순위 22번째의 장수 국가다.
1위 국가는 일본으로 무려 1,484년의 왕조 역사가 있고, 우리나라에서 가장 긴 역사를 자랑하는 신라는 992년으로 6번째이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와 조선왕조 27명이 최고의 자리인 지존(왕)의 자리에 있었고 왕비(46명)를 비롯한 수많은
후궁(빈, 귀인, 소의, 숙원 ) 175명이 있었음에도 쌍둥이를 낳았다는 분은 한분도 없으셨다
안 낳은걸까! 못 낳은 걸까! 이유가 뭘까?
왕실에서 쌍둥이가 태어나면 흉조(凶兆)라 여겨서 한 명은 쥐도 새도 모르게 죽였는가?
아니면 도성(都城) 자리가 좋아 왕자나 공주 한분만 태어나는 특이한 명당터 때문인가?
신라 천년은 모르겠고, 고려 왕조 474년, 그리고 조선왕조 518년 합치면 거의 천년인데
누군가는 분명 쌍둥이를 낳았을 것으로 보이는데 왜 쌍둥이 낳았다는 기록이 없는지...
작은 녀석 방문에 걸린 조선왕조 계보도의 왕들 자식 숫자 세어보다가 눈이 아파서 그만두고
삼남길 마지막 3부 시작합니다.
느림의 미학을 강조하는 충청도 땅으로 들어오니 느릿한 갱상도 양반걸음이 딱 어울릴법한 곳에 서 있다
논산시 연무읍 봉곡서원은 조선시대 문신인 이계맹, 이순인, 남명한, 등을 모신 사당이며,
우암(송시열) 선생과 이호민이 건립하였고 조선 후기 고종 때 서원 철폐령에 의해 철폐되었다가 1965년에 이 자리에 다시 세웠다.
*1868년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
조선의 모든 서원은 성리학을 연구하고 유생들을 교육하며 선현들의 제사를 지내는 것이 목적이었고
그 외 마을의 질서를 유지하고 사림(유교를 닦는 선비)들이 활동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어 주었으나
조선후기에는 서원의 숫자가 너무 많아 경제적인 폐단이 너무 심각했다
사회적 지위와 명성을 유지하려는 수단과 세력을 확대 형성하려는 의도가 앞서 서원제도는 폐단을 낳기 시작하고
학연으로 맺어진 붕당(정치 집단)은 각자의 서원 중심으로 분할되어, 여론을 형성하면서 중앙에 진출한 자기세력 관료를
통하여 반영시켰다.
개인의 명예를 세우는데 급급 하였으며 타당을 배척하고 헐뜯는데 열중하다 보니 선열들의 가르침은 뒷전이고
당쟁만 일삼아 국정을 파탄으로 몰아넣으니 결국 처음과 다르게 교육에서 붕당의 거점으로 변질하였고
서원의 주인으로 행세하던 양반, 유생들은 대부분 하는 일 없이 서원의 재산을 독식하였다
살기 팍팍한 백성들은 자진해서 서원의 노비가 됨으로써 나라의 구역을 피하거나
어딜 가나 있기 마련인 상태 안 좋은 팔자걸음의 양반들이 고을을 휩쓸고 다니거나
그리고 무엇보다 서원은 세금이 없다 보니 특권을 남용하거나 국고를 축내고
유생들은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붕당에 가담하여 향교의 쇠퇴를 유발하였다.
고종 때 흥선 대원군이 이를 바로잡기 위해서 서원의 모든 특혜를 없애고 1000개 중 47개만 남겨 두고 철폐하기에 이르렀다
대한민국 국군의 요람인 논산 훈련소가 있는 연무대에서 깽이님을 만나
깽이님 집이 바로 옆에 있더군요
아침, 저녁으로 젊은 청춘들이 지르는 고함 소리를 들으며 생활을 하니 언제나 힘이 넘치는 깽이님이죠
조금 걸어 주시겠다며 나오셨으니 잠시 걷습니다.
논산 하면 딸기, 젓갈, 고구마가 있겠죠 그리고 논산 훈련소가 있고, 황산벌이 있고, 한국 3대 저수지인 탑정호가 있고
춘천에서 왔다는 닭갈비가 보이고
연무에서 가장 잘한다는 식당을 찾아 점심 겸 저녁으로 밥 한 끼 먹고 걸으며
대구쥐 시골마실 구경하듯 두리번거리며 하나하나 머릿속에 넣어보고
(배낭 옆에 보시면 노트가 보이는데 길을 걷다가 중요한건 적어 두며 한번 다녀오면 나름대로 배우는것들이 많은편이다.)
전통 한옥마을을 지나
예전 같으면 갓이며, 탕건이며 망건을 쓴 양반님들이 공자왈 맹자왈 읊조리는 소리가 들려겠지만
양반님네 집 개들이 짖는 소리만 들릴뿐이다.
서당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는데 양반집 개는 삼 년은 고사하고 그 해 초복, 중복, 말복만 넘겨도 장수하는 것 아닌가
논산시 은진면을 지나고
고종 때 지방제도 개정에 의해 공주부 은진군이 되었다가 1896년 갑오개혁(500년간 이어지던 노비제도 폐지) 2년 후 충청남도
은진군으로 되었다가 일제강점기 무렵인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논산군에 편입된 곳이다.
조선말 전국에 12만 개나 있었다던 주막과 지금의 여러 편의점이 전국에 6만 개 정도 있다고 하니 좋은 현상 아닌가
논산 시청을 찾아보고
살다 보니 논산 시청 투어도 해보는군요
논산시를 지나면서 본 논산천
논산천 따라 거슬러 올라가면 한국의 3대 저수지인 탑정호가 나오고 그 옆에 황산벌이죠
642년(선덕여왕 11년) 합천 황강변의 대야성(취적산 해발 90m)) 전투에서 김춘추의 사위인 김품석과 그 부인 (태종 무열왕 김춘추
의 딸 고타소)이 백제군 윤충과 1만 군사에 의해 죽고 1천여 명이 포로가 된다, 이로 인해 김춘추와 선덕여왕은 당나라에 17여 년간
끈질기게 도움을 청하게 되니 그로부터 수년뒤인 660년 당나라와 연합 결성이 되어 7월 백제 멸망의 꿈을 이룬다
참고:대야성 함락은 김춘추의 사위인 김품석이 부하 장수의 부인을 겁탈하면서 열받은 부하장수 검일이 백제군과 내통하여
무너진 계기가 되니 사위와 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김춘추가 엄청 열받아 몇 날 며칠 눈 한번 깜빡이지 않았다고 한다.
대야성 전투 이후에 신라는 같은 "하늘 아래 백제와 못 산다"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백제를 멸망시킬 동맹을 찾아 고구려로 찾아간
다.
한강 인근에서 늘 치고받던 고구려와 협상을 하게 되는데 "신라의 협상 조건은 고구려와 한편 먹고 백제를 멸망시키는 것이고
고구려의 협상 조건은 한강 이북의 신라땅을 다시 고구려에 되돌려주는 조건
결국 신라는 한강 이북의 신라땅은 절대 되돌려 주지 못한다고 입장만 내세우다가 협상이 결렬되자, 당나라 오랑캐를 찾아 무려
17년간 빌고 빌어(훗날 고구려를 칠 때 협조하겠다는 조건이다 이 무렵 645년 당나라 태종은 안시성에서 양만춘 장군께 영혼까지 탈탈 털린다) ) 신라는 우리나라 최초로 외세의 힘을 빌려 같은 민족을 멸망시키는 못난 행동을 하였고
이후 조선후기 동학 농민군을 잡으려 외세(일본군)의 힘을 빌려 농민군 수만을 학살한 일도 있었다
공주에서 흘러온 노성천이 논산천에 합류되는 곳
노성천은 계룡산 금잔디 인근 북, 서쪽 계곡에서 발원해 논산천으로 흐르는 29km의 하천이다.
논산천을 찾아왔으니 발원지가 어디일까
1번 왕사봉 남쪽 계곡입니다.
왕사봉 평전에서 흘러내린 빗물이 계곡으로 흘러드는 곳이고
2번 금남 정맥길의 태평 봉수대에서 정맥갈림길에서 계곡으로 흘러드는 곳
3번 태평 봉수대에서 정맥길 따라 700m 거리 안부에 위치하는 물줄기로서 거리는 조금 짧지만
논산천 발원지로 알려도 무방할 곳으로 보이는 곳이다.
금강 지류인 논산천을 이루는 물줄기로는
금남정맥 태평 봉수대에서 계룡산을 공주시 계룡면 향지리 거처 논산시 개척면의 불암산까지 이어지며
남쪽으로는 왕사봉-용화산에서 강경천을 데리고 논산천으로 합류시키는 유역면적 662㎢강이다
논산시 광석면 사무소 인근에서 노숙하고
새벽 일찍 길을 떠난다.
으! 추버라~~~!
공주 방향으로 장마루길(지방 643번 )이 이어진다
율 3리 마을버스 승강장
잠자기 좋은 곳
따듯해 보여 들어가 잠시 앉아 있다가
장구 2리 삽다리
논산시 노성면 장마루 마을
이곳은 논산시와 공주시의 경계마을이다.
공주시 땅으로 들어와 장선 2리 마을 회관
논산이여 안녕
이제 공주땅으로 들어서며
공주시 정안면의 차령고개를 넘으면 천안인데... 발걸음이 급해진다.
공주역 신영 휴게소
공주시 이인면 신영리 마을 앞 석성천이 흐르는 곳이다
석성천은 금남정맥 성항산 남쪽 계곡에서 발원하는 하천이며 축사로 인해서 물은 많이 더럽고
새벽길에 물가에서 퐁당퐁당 소리가 들려 하늘나라 선녀님들이 목욕이라도 하시나 싶어 렌턴불빛 비추자 수달 가족 몇 마리가
먹이 사냥 중이다.
금남정맥 구수리 고개를 지나며
금남정맥은 금강 남쪽의 정맥으로 백두대간 영취산에서 분기하여(하나의 산길의 두 개의 이름을 부여받은 정맥) 부여의 부소산성 아래까지 이어지는 옛 백제의 마지막을 지켜주던 산줄기다.
이인면에서
이인면은 동학농민군과 전봉준이 공주 우금티를 넘기 위해 모인 곳이죠
잠시 생각해 봅니다.
조병갑이 7천 냥이라는 뇌물을 명성황후에게 주고 얻은 알짜배기 땅 정읍 고부군수 자리
물세 문제로 전봉준의 부친 전창혁을 때려죽인 일로 발단된 고부군민의 반란은
인내천(人乃天) 동학사상을 기반으로 새로운 세상을 만들고자 조선왕조의 본관이며 전주이씨의 뿌리인 전주성 함락을 시킨다
이를 두고 양반들의 시각에서 어떻게 보았을지? 반란이며 용서하지 못할 일이니 속에서는 천불이 나고 억장이 와르르 무너지는
느낌이 들었을 것이다.
이인면사무소에서 공주시로 가는 길은 검바우로 길을 따른다.
이인면 오룡리
공주시 태봉동에 위치한 19대 왕 숙종의 태실이 보관된 태실봉(胎室峰)
숙종은 적장자로서 즉 적통으로 어린 나이에 왕이 되어 46년 동안 강력한 카리스마를 가진 왕이셨죠
다만, 희빈 장 씨와 인현왕후 틈에서 고생 좀한 왕이시고
엄마 배속에서 아기와 연결하는 고리로서 생명력을 부여받은 태실은 아기가 출산된 후에도 버리지 않고 보관하는데
신분에 따라 각기 다르다고 전한다
왕실일 경우는 국운과 관련이 있어 아주 소중하게 다루었는데 산신과 토지신께 제사를 지내고 태실 주위에 출입을 금한다는
금표(禁標)를 세우고 벌목이나 개간등 일체의 행위를 금지시켰다.
고의로 훼손했을 경우 국법에 따라 엄벌에 처했음은 물론이었으며 태실을 관리하고 순찰하기에 게을리하지 않았는데
이것도 벼슬이라면 벼슬이었을 시기다.
멀리 경북 성주군 월항의 세종대왕자 태실 이외 열여덟분과 손자 단종의 태실이 모셔져 있는 곳이고
영월 계족산 (정양산성) 자락에는 조선 2대 왕 정종과 22대 왕인 정조 대왕의 태실비가 있다.
참고로 조선 왕조 (태조-순종까지 27명) 시기에 다음 왕 순위 0순위인 적장자는 몇 명이었을까?
5대 문종, 6대 단종, 10대 연산군, 12대 인종, 18대 현종, 19대 숙종, 27대 순종이며, 19대 숙종을 제하고 나면 모두가 단명(短命)하는 불운을 격은 분들이니 평균 수명으로는 33세이며, 정치 생명은 불과 5년이다.
이분들 중 아버지와 자식까지 적통을 따진다면 단종과 숙종뿐인데 숙종은 왕위만 45년 했고 단종은 겨우 4년 정도이다.
태실에 관심이 있으신 분들은 주위에 태실봉이 있나 찾아보시고 가보시면 좋을 듯합니다.
잠시 길에서 벗어나 길 위의 역사를 찾아보고 이제 공주시로 넘어가는 길에 동학농민군의 우금치 전투 현장으로 가본다.
공주시로 넘어가는 우금티 고개에서
지도를 보면 공주는 말발굽 모양으로 천혜의 요새처럼 보인다.
동학 농민군이 공주로 향하는 길은 우금티만 있는 게 아니기에 월성산 자락의 능치고개
가운데 우금치 고개와 오실마을에서 주미산 오르는 곳
그리고 금강 옆 곰나루 인근의 금성여고 인근(동학농민군이 많이 죽어 송장이 산처럼 쌓여 송장배미라 불리는 곳) 네 곳에서
싸움은 되었고 그중에 우금치 고개에서 가장 많이 희생된 것으로 보인다.
한자리 숫자가 죽으면 비극이고, 두 자리 숫자 이상이 죽으면 숫자에 불과하고
그당시 동학농민운동 정신은 참으로 위대했지만 모두가 슬퍼하지 않았다.
동학농민 위령탑
싸움은 남쪽에서 크게 일어났지만 위령탑은 북쪽(조선, 일본 연합군이 있던 자리)에 서 있는데
농민군들이 숨 가쁘게 오르던 곳에 위령탑이 있었다면 얼마나 더 좋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며
훗날 본래의 자리인 남쪽에 동학혁명 위령탑이 새로이 건립되기를 바래본다.
동학농민군의 우금티는 전투인가 학살인가? 하는 문제가 다가오는데 밖으로는 제국주의 서구 열강인 일본과 청의 압박이 거세였고, 안으로는 전통의 봉건사회 그리고 신분질서로 곪아있던 상황
농민군 2만명(북접,남접 각각 1만명) , 조,일 연합군 2천 명
무기 화승총 대 신식소총과 게틀링 기관총
일반 백성의 단순한 전술 대 강력한 무기와 전술에 많은 차이가 남
1894년 11월 9일 동학 농민군 입장에서는 추위가 오기 전에 공주를 꼭 넘어야 할 고개였지만, 동민군 집압하는 조, 일 연합군은
미리 좋은 위치인 우금티 고개 위에서 만반의 준비를 하고 기다리는 상황이고, 농민군은 공주시 이인면 목동리(목골)에 주둔하다가 화승총과 죽창으로 1km의 우금티 오르막을 밀집대형으로 올라가며 돌격한다
전봉준은 많은 사람들과 함께 좁은 골목 같은 계곡으로 밀어 넣었고, 고개 위에는 조선, 일본 연합군이 게틀링 기관총으로 무자비한 학살을 시작한다.
대부분의 농민군은 몰살당하고 전봉준과 3천의 농민은 살아남아 여러 지역을 싸우다가 다시 도망치며 후퇴하다가
12월 전북 순창군 쌍치면 피노마을에 피신중 옛 부하였던 김경천의 밀고로 잡혀 이듬해 사형 당한다.
새로운 세상을 만들고자 했던 키 작은 녹두장군은 41세에 사형당하였고 더 좋은 세상을 꿈꾸며 목숨을 버렸던 수많은 동학 농민군
그리고 일방적인 전투의 주체는 조선관군과 일본군으로 백성들의 포로나 항복은 필요 없고 오로지 죽음뿐인 학살이었다
이후에 손병희가 교주가 되어 천도교라는 이름으로 지금까지 그 이름을 유지해 온다.
이번 걸음은 한양까지 최단거리로 찾아가는 삼남길이라 시간이 된다면 정읍시 이평면 고부 초등학교에서 공주까지 다시 한번
더 걸음하며 동학 농민군들의 발자취를 찾아보고 싶다
이문복 시인이 남긴 패배하지 않았다
우금티를 지나며
공주 고 국어 선생님인 팔개님과 지나가는 학생들 붙잡고
공주는 대한민국에서 곰(熊)과 관련한 지명중 대표적인 곳이다. 산으로 본다면 대간길 소백산 자락에 곰넘이재와 멀리 지리산
자락의 웅석봉 정도가 있고 신화 속의 곰은 쑥을 먹고 사람이 되어 단군을 낳았을 정도로 우리 민족에게 특별한 존재로 여겨진다.
이곳 웅진(공주)의 유래는 곰나루(태동지)라는 지명에서 전설을 찾을 수 있는데 "어느 어부가 연미산에서 약초를 캐던중
암컷곰에게 잡혀 부부의 연을 맺어 자식을 두 명 낳았지만 인간과 곰이 살기에는 조금 그랬던지 어부가
"니하고 살다가는 미쳐 버리겠다! 야이 곰팅아 "라며 마지막 말을 남기고 도망쳐 버리자 암곰은 자식 둘을 가슴에 꼭 안고 금강물에 투신해서 죽었다고 한다. 그래서 곰나루라는 지명도 있고...
공주시청
팔개님과 함께 걸으며 공주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눠본다.
공주는 금강을 가운데 두고 북쪽으로 자장율사께서 창건한 천년고찰의 마곡사가 자리하는 유구읍과 사곡면, 밤으로 유명한 정안면이 대표적이며
남쪽으로는 탄천면과 이인면 , 계룡을 지척에 둔 계룡면과 반포면이 대표적이다.
남, 동쪽으로 계룡산이 있으나 공주의 진산은 월성산이며 그 곁에 웅진성이 있다
충청도포정사 문루
조선 팔도 감영중 하나인 충청감영이 있던 곳 지금은 공주 사대부고와 함께 쓰고 있다.
참고로 조선시대 관아는 334개였고 백성을 아끼고 사랑한 목민관이 얼마나 있었는지 알 수 없다
이곳 공주는 조선시대 3대 도시로 알려져 있는데 경북의 상주와 경남의 진주가 대표적이다.
상주는 조선 초기 약 3백 년 동안 경상도를 대표하는 도시였고
공주는 천혜의 요새 같은 지형으로 북쪽으로는 금북정맥의 차령과 금강이 있고 한양과 호남을 잇는 가장 가까운 육로로서
충청도에서 가장 큰 도시였고
진주는 서부 경남의 모든 교통이 진주로부터 모여 각지로 퍼져나가 지리적인 이점이 많은 도시이다
한번 읽어 보시고
공주성이 길게 보이고 안정적인 나라운영을 한 백제 25대 무령왕께서 오는 차량 가는 차량 모두 한 바퀴 돌아서 가라며 손짓하고 계시고
공산성
백제 문주왕 시대에 이곳 웅진에 천도한 이후 약 65년간 도읍지로 백제를 지켜 주었던 성이다
생사를 가르던 순간에 서로가 살고자 쌓아 올린 산성
위기의 순간 절박했던 마음과 가족을 지키고자 했던 절실함 그리고 모두가 살고자 했던 털긋 같던 희망
둘러싸인 성을보니 분명 고지(高地) 안에도 작은 희망이 있었을 것 같다.
이후에 나당 연합 전쟁으로 의자왕이 부소산성에서 이곳으로 왔지만 공산성의 성주이던 예식진한테 포박되어
소정방이나 김춘추에게 조리돌림당한 후 당나라로 끌려가 북망산에서 허무하게 생을 마친다.
이곳에서 에식진 같은 인간만 아니였다면 훗날을 다시 도모해봤을 텐데...
금강교를 지나
금강은 멀리 장수군 뜬봉샘에서 발원하여 장주- 진안- 무주- 영동- 대청호- 신탄진- 세종 그리고 공주까지 흘러와 있고
금강과 산성
호서와 호남을 나누는 분수령인 금강을 건너며
경상도는 산 빼면 이야기가 안되고, 호남은 들판 빼면 이야기가 안되고
이제 한양이 지척으로 다가와 있으니 과거객이던 보부상이던 발걸음은 한결 가벼워졌을 것 같다.
1900년대의 금강 주변과 공산성주변 풍경
논인지 밭인지 보이고 금강과 초가지붕 몇 채가 있어 그 당시 주막임을 말하는 것 같은 풍경이 그려지고
들판 사이로 비포장 임도길에 버스라도 한대 달리면 뽀얀 흙먼지가 가득 일어날 것 같은 분위기다
공주시 의당면 청룡리를 지나며
이 길 따라가면 공주 밤막걸리로 유명한 공주밤의 고장인 정안면이 나온다.
공주 수촌리 고분군
백제시대 한성기 지방세력의 실체를 드러낸 고분군이라고 한다.
정안천을 건너며
예전 2차선 국도인 정안중앙길 따라
이순신 장군 백의종군길
이 길은 천안과 서울을 이어주는 차령으로 올라가는 길이며 호남을 잇는 도로이니
그동안 수많은 영웅호걸들이 지났던 길인데 지금은 너무 조용하기만 하다.
이순신 장군 백의종군길 670km
1597년 장군께서 정탁의 신구차상소문으로 의금부에서 출옥하시고 합천군 율곡면 낙민리까지 고된 몸을 이끌고 이 길을 지나가셨는 것 같다.
체육진흥회와 해군의 고증 그리고 지방 자치단체와 향토 사학자들의 고증으로 만들어진 길
경로를 보면 서울 의금부,수원, 오산, 평택, 아산 현충사, 공주시, 논산시, 익산시, 여산, 전주시, 임실, 남원, 운봉, 구례,
순천-구례-하동, 산청 , 합천 율곡면 낙민리까지다.
정안면
공주하면 밤 그리고 밤 막걸리
금강 북쪽의 면(面)이며 차령남쪽에 자리 잡았는데 흙이 모래성분인 마사토 땅이라 밤나무 생육에 아주 좋고
유명한 품종보다 옛 토종밤이 인기가 많다고 한다.
정안면에는 대략 1000 농가 중 약 60%가 밤 농사를 짓고 있다고 하니, 6월에 공주시 정안면에 가면 밤꽃 향기가 대단할 것 같은데
밤꽃 향기는 좀 특별한 비릿한 향이 나는데 유아를 기르는 어머니 품속 같은 향기라고 하고... 그리고
그대 이름은 공주 토종밤이라...
토실토실한 밤 하나 땅에 심으면 이듬해에 새싹이 나고 몇 년 뒤부터 밤이 열리는데
수령이 오래된 밤나무라도 땅 아래 뿌리에는 썩은 껍질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걸 볼 수 있으니
밤은 삼정승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조상을 잊지 말라는 의미를 가르치는 과일이기도 하다.
정안면에서 길 따라 오르면 금북정맥 차령고개에 쉽게 도착한다.
금북정맥은 속리산 천황봉에서 안성 칠장산으로 온 한남, 금북정맥길이 칠장산에서 남, 서쪽으로 이어져 안성, 천안, 아산, 홍성, 서산, 태안군 근흥면으로 이어지는 산줄기다
한남정맥이 전국에서 가장 비싼 땅이라면 금북정맥이 다른 정맥길과는 다르게 독립투사 분들이 많은데 그중에 홍성은 축산업 1등 도시이며 , "영웅은 절대 죽지 않는다"는 곳이다
고려를 끝까지 지키고자 했던 최영 장군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는 윤리 하나를 목숨보다 더 높게 받들던 성삼문(계유정난 이후 단종복위로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하셨고
암울했던 시기에 지금의 대한민국이 있기까지 최고의 영웅으로 기록된 김좌진, 한용운. 윤봉길 등 독립투사분들께서 태어나 성지가 바로 금북정맥길의 홍성이며, 유관순 열사 생가터옆에 독립기념관 있고 역시 금북 정맥길에 자리한다.
차령고개
고려를 창건한 왕건의 유언인 훈요 10조 내용 중 "차령이남 혹은 금강 이남의 인재는 등용하지 말라"는 글이 있다
후삼국을 통일하면서 왕께서 단디 삐지신 모양이다
신라는 경순왕이 "아나 여있다"며 천년을 견딘 나라를 바친 것에 비해, 대구 팔공산 전투에서 죽을 고생을 했던 왕건이
삼국을 통일한 뒤에도 백제에 대한 원한이 장난 아니셨던 모양이다.
어지간하면 그냥 덮고 가시지 문서로 작성한 글을 유언처럼 남기셨다니
차령에서 천천히 내려오니 멀리서 누군가 다가오시는데 충주에서 맥가이버님이 밥 사주시겠다며 오셨다.
길가에 자리 잡은 어느 뷔페집에 들어가 얼른 먹고 나와 백가이버님은 댁으로 가시고 다시 혼자 걷는다.
맥가이버님 감사드려요
오늘은 천안 삼거리까지 가야 하니 대략 70km는 걸어야 할 듯
지난날 걸었던 곡교천을 잠시 만나 지나면 세종시 소정면이 나온다.
멸치의 영혼까지 탈탈 털었다는 어느 국수집
멸치는 뼈대있는 가문이라 어지간한 양반님네 보다 더 지체 높은 가문의 생선?이다
등골뼈가 44개, 볼기뼈가 46개 합 90개의 뼈대로 이루어져 있으니 어디 가서 큰소리치는 건 당연지사인데
그 뼈대 높은 가문의 자식들의 영혼을 탈탈 털었다니...
남해 바다에서 올라온 멸치 걱정할 때가 아니라
잠은 오고 도심에서 노숙하다가는 경찰서로 불러 갈 것 같아 인근 주막에 들러 잠을 청하기로 한다.
새벽에 일어나니 뭐가 잘못된 건지 골반뼈가 너무 아파서 걷지를 못하겠다.
전날까지 이상이 없었는데... 늘 가지고 다녔지만 먹지 않았던 진통제 2알 입에 넣고 조금 걸으니 통증은 없어지고
그러나 골반뼈에 뭔 이상이 있는지...
천안 선무대 앞을
천안은 교통의 중심이라 해남에서 올라오는 삼남길
그리고 천안 -청주 -문경새재를 거처 부산으로 가는 영남길
다시 천안에서 한양으로 올라가는 교통의 중심이며 요지다
천안 삼거리 주막집
어느, 양반님네 두 분의 주안상이 보이고
주막에는 역시나 국밥이니 갈길 급한 사람은 빨리 먹고 가야 해서 국에다 밥을 말아서 한상 내준다.
과거객이 공자의 유교사상을 공부하시는데
유교 경전 속의 한자는 모두 47만 자 10년은 외워야 할 것 같다
선비님 이번 과거 시험에는 "멸치뼈가 몇 개인지 나온다"고 합니다.
독립운동가 이동녕 선생 동상
대한민국 사람들은 누구나 독립운동가들에게 빚을 안고 있으니
천안은 홍성과 함께 독립운동가들의 성지이며 그래서 이곳에서 가까운 곳에 독립기념관이 자리하는 이유다
천안 중앙시장을 지나
천안역을 지나고
공주대 천안캠퍼스를 지나고
천안시 성환읍 성환 초등학교
골반뼈가 많이 잘못된 듯 진통제 약발이 두 시간을 못 넘긴다.
이러다 그만두고 집으로 가야 하는 건 아닌지
남해바다 멸치 영혼 털리듯 나 또한 골반뼈 통증으로 영혼이 탈탈 털릴 것 같다
1번 국도길에 만나는 봉선 홍경사 갈기비 (비석) 국보 7호
홍경사는 현종 12년에 왕명에 의해 여행자의 보호 및 편의를 제공하기 위해 교통의 요충지에 창건한 절이였으나,
고려 명종 때 망이, 망소이가 민난(民亂)을 일으켰을 때 불타 없어져 지금까지 갈기비만 도로가 옆에 서있다
갈기비는 절 창건에 관한 기록으로 고려 현종 17년에 제작된 것으로 보며, 비문은 당대최고의 유학자인 최충이 짓고 비문의 글씨는 서예가 백현례가 썼다고 전한다
하늘을 지배한 까마귀 떼
대략 1천 마리는 될듯한데
전깃줄에 까맣게 앉아 있으며 날아다니는 녀석들 중에는 도로 위로 똥을 싸는 놈들도 있다.
안성천이 자리하는 곳 안성천교
상류의 경기도 안성은 삼국시대 때 고구려 백제 신라의 전쟁터로써 4세기 전에는 백제땅이었으나 그로부터 100년 뒤인 5세기
무렵에 고구려 광개토대왕. 장수왕의 남하정책으로 고구려의 영토가 되었고(이때 안성은 내혜흘이란 지명을 얻는다.)
이후 6세(501-600년)무렵 신라가 한강 유역까지 진출하면서 신라의 영토가 되었다가 고려초 본격적인 안성현이 되었다.
안성천
안성천은 고려시대나 조선시대에 옹천강, 또는 남천, 대천, 한천, 영봉천으로 불리다가 현재는 안성천으로 불린다.
우리나라 도시 지명을 강에 붙인 곳을 찾아보면 북한강 지류인 홍천의 홍천강과 한강의 지류인 평창군의 평창강이 있으며
이곳 안성천 역시 지명을 사용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안성천 발원지를 찾다 보니 발원지에 관한 몇 가지가 있어 적어 볼까 한다.
첫번째 발원지로 추정되는 진위천의 용인시 부아산:아산 방조제 하구에서 가장 먼 곳인 용인시 이동면 서리 부아산 계곡에서
발원한 물이 아산만까지 74KM를 이어 오지만, 안성땅과 무관하게 용인시와 평택시를 거처 아산만으로 빠져난다.
두 번째 용인시 처인구 한남정맥 문수봉 남쪽 계곡에서 흐르는 한천은 안성시 대덕면 환경사업소까지 32KM 흘러와
안성천과 만나 합류하지만 문수봉 남쪽계곡에서 발원한 물이 10km 구간을 흐르는 동안 용인시 땅이며,
이후로는 안성시 보개면 치재마을부터 22km 구간만 안성땅으로 흐른다
세 번째 국토지리원 지도를 보면 안성천이란 지명답게 안성에서 발원한 물줄기를 찾다 보니 한남정맥길의 뒷산이 가장
유력하다.
한남정맥길에서 이어지는 안성천이 안성땅을 벗어나기까지 37KM를 흐르며 나머지 평택땅을 지나는 거리가 대략 30KM
길이는 짧아도 안성천이라 지명답게 그곳으로 찾아간다.
참고:아산방조제:1971년 착공 1973년 12월에 착공하기 전에는 평택시 합정동(조개터) 인근으로 바닷물이 유입되었다고
하며, 강 하류 일대는 매년 홍수와 여름철 사리기간 때 역류하는 바닷물의 유일으로 연안침식으로 피해를 입었으나 평택지구
농업개발 사업으로 방조재가 건설되었다)
평택시 합정동까지 바닷물이 유입되었다는 전제하에 그곳까지 강으로 본다면 안성천은 대략적인 실거리는 35km의 강인셈이다.
결론은 안성천 최장 발원지는 진위천이 가장 길고, 그다음 문수봉 남쪽에서 흐르는 한천, 그다음이 뒷산 남쪽 계곡에서 발원하는
안성천순이다.
안성천을 건너면 경기도 평택시가 반기지만
골반뼈가 너무 아파 평택시 합정동의 계현정형외과에서 x레이 찍어보니 뼈에는 이상이 없다고 하시고
근육 이완제 주사 궁둥이에 한방 맞고 그리고 진통제 10일분 약 타고 나온다.
평택 시청
평택 5로 114번 길 길가에 자리 잡은 깔끔한 국수집에 들러
주인장 분의 요청에 위해 싸인해 드리고 배웅을 받으며 나온다.
다음에 가면 식당 매장에 제 싸인 걸려 있을 것 같으니 이 길을 지나시는 분 계시면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지재역으로 가는 길에
평택 지재역 앞을 지나며
수원지방 법운 송탄 등기소 앞도 지나고
진위천을 건너고
진위천은 용인시 처인구 이동읍 묵리 시궁산 남동쪽 계곡 이 물이 흘러 용덕사천이 되었다가 용인시 처인구 이동읍 천리에서
한남정맥 부아산 서, 남쪽 계곡에서 흘러온 송전천과 만나 송전천이 된다.
이후 이동읍-이동 저수지에서 본격적인 진위천이 되어 흐르며 용인시 처인구 남사읍을 지나 경기도 평택시 진위면-평택 비
행장-평택시 서탄면-고덕면 동고리까지 61KM를 흘러와 안성천에 합류하면서 서해로 빠져나간다.
영조 때 여암 신경준 선생의 산수고(山水古)에는 조선의 산과 강을 12곳으로 나누어 설명해 놓았다. 산수고의 조선 12강(江)
과 산경표(山經表)의 백두대간에서 흐르는 10 대강(구색 맞추기:청천강, 예성강, 임진강)과는 몇 가지 다르다 할 수 있겠다.
산수고의 조선 12대강을 살펴보면
1,조선의 궁궐 앞으로 흐르는 한강(임진강)을 가장 먼저 최우선으로 하고
2,고려의 수도가있던 예성강을 예우 차원에서 두번째로 넣은듯
3,농업의 기반이 되고 한양을 지척에 두면서 서해로 흐르는 두강인 대진강(진위천과 무한천)
4,옛 백제땅으로 흐르는 금강
5,나주평야를 이루는 영산강,
6, 섬진강,7,낙동강,8,대동강,9,청천강,
10 용흠강(태조 이성계 위로 5대조의 신위와 제사를 지내던 함경남도 함흥에 있고 태조의 높이기 위해 넣은강
11,압록강,12,두만강 조선의 변방을 넣어 12대강을 만들었다
글에서 알 수 있듯 서열 3위까지는 모두 한양 인근으로 한강을 통해서 물자나 자원을 빠르게 실어 나르기 용이하다는 이점 때문에 그런 것 같다
진위역 앞을 지나고
수원 병점으로
아침에 주사 맞은 약효는 끝난 건지 이놈의 골반뼈가 어떻게 된 건지 걸으면 걸을수록 더 아프니
칼로리 소모량도 더 많은 것 같아 먹어도 먹어도 배는 고프다
길을 걸으며 자주하는 듣는 질문이 있는데
왜 이리 힘든길을 걷느냐?고
골란하면서도 쉬운 질문이다.
"가보지 않으면 모른다"는 답변만 해줄뿐 어떤 말로도 설명이 안된다.
사진이 많아 마지막 4부는 수요일쯤에 올려 드리겠습니다.
첫댓글 참 대단하신 방장님
존경 안할수 없는사람입니다
산꾼이신지 역사학 교수님인지
지나는 곳마다 역사와 문화가~~
어디에서 그 많은 자료를 찾아 내시는지
정말 감탄 스럽습니다
체력은 또 누가 따라 가겠습니까
막내 해병아들이 예전에 나에게한 말
우리 아빠 대단하신 아빠라고 자랑스럽다고 한말이
생각 나네요
역사 이야기 다 외우지는 못하지만
많은것 배우고 갑니다
어디를 가시든 몸 잘챙기시고
건강하세요
지난날 아들을 이해서 도움 다시한번 더 감사드립니다.
아들녀석은 방학이라 자장면집에 알바하러 갔구요
가끔 선배님 안부 물어 보곤하빈다. 올한해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방장님 뼈 튼튼 위해 올 명절에 멸치선물박스라도 보내드려야겠습니다.
지금은 골반뼈 아프시지는 않는지...
골빙 드는 길... 왜 걷냐고 묻는다면 역시 "가보지 않으면 모른다." 그게 답인 듯 싶습니다.
방장님 걸음길에 궁금해 하시는 것들 보면
어찌 저런 게 궁금하셨을까? 신기하기도 하고...
후기 보며 저도 쫓아 찾아 보기도 합니다.
찾다 찾다 안찾아지는 것들도 있고요. ㅠㅠ
논산시의 논산딸기, 상월고구마, 강경 젓갈...
그리고 탑정저수지까지 빠짐없이~~
논산 걸음해주셔서 감사하다는 논산 대표로 인사 드리며^^
방장님 후기 덕분으로 잊고 있던 공주대간길도 올봄 꽃 필 때 꼭 걸어봐야지 싶어집니다.
늘 건강 잘 챙기세요.
J3클럽의 대들보시잖아요.
못난이 제자라 늘 죄송한 마음...전하며.
늘 멀리서 응원만 이리 댓글로 전합니다. 휴~
참 대단해
혹서기 천리길을 참고 걸었다니
그대가 진정 갑(甲)입니다.
걷지 않으면 알수없는길 걸어본자만이
그 힘든 고통을 알수 있는길..
아무나 할수없는 그 긴걸음을 걸으신
방장님 참으로 대단하고 멋집니다
감사합니다
올해는 지부장님도 긴것 하나 하셔야죠
시산때 뵙겠습니다.
위대한 역사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한겨울,
시린 콘크리트 위를 맨발로 걸어가신 방장님,
너무 큰 고생을 하셨습니다.
빠른 시일 안에 몸이 정상을 되찾기를 바랍니다.
먼길을 걸으며 처음에는 눈이 즐거워야 하지만 그이후로는 발이 즐거워야 만사형동 이랍니다.
맨발이지만 발이 그걸 원하니 맨발로 걸어야겠죠
꽃피고 새 우는날 공주에 한번 갈 것 같으니 그때 뵙도록 하겠습니다.
길을 걸으면서 무엇을 얻기위해 저토록 몸부림을 칠까요?... 사서고생한다는 옛말이 실감날정도로
누가 돈을 준다고해도 못할것을 아마도 사명감이 아니면 못하실그길을 걷고있으시네요..
응원합니다
먼길을 떠날대 두달정도 공부를 하고 가는데
나이가 드니 기억력이 영 아닙니다.
시산때 뵙겠습니다.
가보지 않으면 모른다
천고만난을 겪으시며 가는길 무탈하게 이어가시길 기원합니다
아울러 통증이 있는 골반뼈 조속한 시일내 회복되시길 바랍니다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저야 길위로 걷지만 산길은 다소 조심해야겟죠
대장님의 산길 응원 드리며 시산때 놀러 오시기 바랍니다.
여인처럼 보고싶고 만나고 싶어
달려는 갔지만 근거리 발치에서 마중 나가는
저에 마음은 참으로 작기만 하던군요 .....
준비도 없이 가서 미인하고요 잠시라도 손꼭잡고
걷는길은 어둠만 재촉하고 해는 떨어져 렌턴꺼내
불밝이고 떠나는 님 둿모습만 바라보며
~~~~~~
늘 건강한 걸음 하시길 바랍니다
해는 지고 뜻밖의 만남이라 깜짝 놀랐습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리구요 시산때 꼭 오시기 바랍니다.
많이 걷다보니 몸이 힘든걸 알아달라고 시위를 하나봅니다.
이제는 몸조리 잘 하시면서 걸으시고 항상 무탈한 걸음 하시기 바랍니다
갈길이 머니 안가고는 안되고
그저 가야 끝나니
올해도 잘 부탁드리겠구요 시산때 뵙겠습니다
평택.. 거기도 한천이 있네요.
구미 우리 고향에도 한천이 있는데
어린 시절 멱감고 놀던 한천.. 그 이름만 들어도 그리움이 밀려오네요 ㅎㅎ
오늘 후기서 한양땅까지 마무리 하실줄 알았는데
한번 더 여운을 남겨주시네요.
소중한 글 잘보고 갑니다.^^
넵 평택에서 한천이 있는데 문수산남쪽엣 흘러 옵니다.
올한해도 잘 부탁드리겠구요 시산때 빕겠습니다.
새해 복 많이 엄청 받으세요~~~
어여쁜 나나님 보고 싶네요
멋진 도시락도 보고 싶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