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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우리 어머니 2006, 6,10
이귀남(李貴南)
1917년 9월 21일(음력)생 전라남도 광양군 진상면 금이리에서 출생
1936년 전라남도 광양군 진월면 송금리 신송 김字계字준字(金季俊)와 결혼,
슬하에 2남 4녀를 둠
2006년 5월 19일 05시 45분 영면
"어머니, 사랑하는 어머니!
어머니가 계셨던 그 자리가 이제는 그리움으로 가득 채워지고 있습니다. 생전의 어머니의 말씀을 조금이라도 더 듣지 못한 것이 한(恨)으로 남고 있습니다. 어머니, 앞으로도 계속 우리들에게 삶의 지혜(智慧)를 주십시오."
" 가슴 속에 간직된 어머니의 말씀과 기억으로 어머니와 함께할 마음의 글을 어머니께 드립니다."
우리 어머니, 이귀남(李貴南)은 90년 전 전라남도 광양군 진상면 금이리 이천 부락에서 유복한 가정의 1녀1남 중 장녀로 태어나셔서, 남동생 이기수(李基洙)와 함께 부모님의 사랑과 엄한 가정교육을 받으시면서 성장하셨다. 어린 시절에 어머니를 여위시고 아버지의 사랑 속에서 성장하신 후, 인접해 있는 전라남도 광양군 진월면 송금리 신송부락으로 시집을 오셨다.
시집을 오신 후, 아버님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셔서 교토(京都)에서 7년간을 생활하시다가 해방 전 해인 1944년에 고향으로 귀국하셨다. 어머니께서는 일본에서 생활하시면서 일본생활에 빨리 적응하셔서 일본의 이웃들과도 절친하게 지내셨다고 하셨다. 또 고향의 할아버지께서 일본 구경을 오셨을 때에는 오사카로 모시고 가서 구경을 시켜드린 이야기도 해 주셨다. 어머니께서는 일본에서도 열심히 생활하시면서 고향에다 귀국후의 생활기반을 마련하셨다고 했다.
일본에서 귀국한 후 고향에서 자리를 잡으신 아버지와 어머니는 익숙하지 못한 농사일이지만 두분이 함께 열심히 일을 하시면서 생활기반을 넓히셨다. 어려움 없는 생활기반 위에서 행복한 생활을 하시던 중, 내가 초등학교 4학년이 되던 해인 1953년에 아버님께서 먼저 세상을 떠나셨다. 그 때 어머니 나이 39세가 되던 해였고, 슬하에는 2남 4녀의 자녀를 두시었다. 어머니의 애틋한 자식사랑과 파란만장의 인생여정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아버님에 대한 나의 기억으로는 내가 초등학교를 다닐 때에 아버지를 따라 산에 땔나무를 하려 다녔고, 또 들과 산으로 농사를 지으려 아버지를 따라 다니던 때가 생각난다. 아버지는 몸이 약하셨는데도 농사일을 너무나도 열심히 하셨다. 그래서 나도 초등학생이어서 힘이 부족했지만 그래도 힘든 일을 참아가면서 아버지를 열심히 도와드렸다.
아버지께서는 지금 당신이 쉬고 계시는 그 산을 사시고 너무나도 기뻐하시던 모습이 지금도 선하게 떠오른다. 아마도 당신이 영원히 계실 곳을 마련하셨다고 생각하셨던 것 같다. 아버지께서는 그 산에 가셔서 많은 시간을 보내셨다. 그 산이 좀 멀고 높은 산이었기 때문에 점심을 준비해 가지고 가셔서 하루 종일 그 산에서 일을 하셨다. 때때로 나도 아버지를 따라가서 같이 산에서 아버지와 함께 점심밥을 먹던 기억이 아련하게 떠오른다.
아버지는 마음이 무척 좋으셨던 것으로 기억된다. 동네의 모든 사람들이 아버지와 다정하게 지내셨다. 그래서 아버지께서는 술을 많이 드시지 못하셨지만 동네 사람들과 자주 어울리셨다.
그리고 또하나의 기억은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아버지가 직접 누님의 혼처를 정하셨다. 혼처를 정하시고 혼인을 기다리던 중에 아버지께서 타계하셨다. 그 때 우리 가족들의 슬픔은 헤아릴 수가 없었다. 누님의 혼사는 아버지께서 생전에 정해주신 혼사이어서 예정대로 진행을 했다.
혼자되신 어머니는 힘이 많이 드는 농사일을 하시면서 6남매를 정성을 다해서 키우셨다. 어머니는 혼자서 그 힘든 농사일을 하시면서도 그 당시에는 일반화 되지 않았던 자녀들의 고등교육에 대해서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계셨다. 사람은 어떤 환경 속에서도 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누님에게는 미안한 생각이 든다. 그 당시만 해도 여성교육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철저하지 못해서 교육에 대해서는 아들에 대한 어머니의 관심이 더 많았던 것 같다.
누님은 아버지가 안 계셨기 때문에 어머니의 일을 도우면서 집안 일과 동생들을 키우는 일을 맡아 하셨다. 명절이 가까워지면 누님은 등잔불 아래서 동생들의 명절빔으로 양말과 장갑을 직접 손으로 뜨셨다. 우리들은 그 선물을 기다리면서 잠도 자지 않고 등잔불 옆에서 기다리던 생각이 난다. 그 때의 어머니와 누님의 힘들었던 생활을 생각하면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누님에 대한 고마움이 온 가슴을 감싸온다.
어머니의 교육에 대한 주관은 확고하셨다. 혼자되신 어머니의 어려움을 생각한 주변 사람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아무리 어려워도 자식들의 공부는 반드시 시켜야 된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으셨다. 이 때부터 어머니는 주변의 만류에 개의치 않고 자식들의 교육을 위해 지금까지 애써 마련하신 생활 기반인 논과 밭을 조금씩 팔아가면서 어려움을 참으면서 자식들의 교육에 정성을 쏟으셨다.
젊은 나이에 혼자되신 어머니는 오직 자식교육에 정열을 쏟으시면서 어렵고 고된 생활을 하셨다. 어머니께서는 교육의 중요성에 대한 확고한 소신에 따라, 어려운 살림에 자식들의 공부는 왜 시키느냐는 주변의 곱지 않은 시선을 뿌리치시고, 자식들의 교육에 전념하셨다. 그 때 어머니는 광주에서 공부하고 있는 형의 성공을 손꼽아 기다리시면서 일을 하셨다. 그 때 나는 가까스로 시골 중학교를 졸업하고, 어머니를 따라다니면서 농사일을 도와드렸다. 그러면서 광주에서 간간이 날라오는 형의 편지를 기다리는 것을 낙으로 삼았다.
시골의 장날이 되면 농사지은 농작물을 지게에 지고, 머리에 짐을 이고 장(市場 )에 가시는 어머니를 따라 하동(河東)장과 진상(섬거)(津上)장으로 팔려 가기도 했다.
“어머니, 그 때 그 무거운 짐을 머리에 이고 십리길, 이십리길을 걸어 가실 때에 얼나나 힘드셨습니까? 지금 생각하면 어머니가 너무나도 존경스럽습니다. 어머니 정말 감사합니다.”
힘든 농사일을 하시면서, 또 한편으로는 자식들의 학비마련을 위해 돈을 융통하시는데 여념이 없으셨던 어머니, 그 때의 어머니의 힘드셨던 상황은 지금도 다 헤아릴 수가 없다. 다행히도 아버지와 어머니의 올바른 삶의 덕분으로 어머니가 혼자서 자식들의 학비를 융통할 때면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도움을 주셨다. 그 어려움 속에서도 주변에서 도와주시는 분들이 많아서 그나마도 어머니의 어려움을 조금이라도 줄일 수가 있었다.
어머니는 대단하셨다. 그리고 머리도 비상하셨다. 지금도 기억이 나는 일은 자식들의 학비 조달을 위해 돈을 융통하실 때 그 많은 일들을 머리 속에다 모두 기억하셨다. 그래서 년말이 되면 돈을 갚기 위해서 머리 속에 기억해두신 돈을 빌려준 사람들과 빌려준 시기, 그리고 이자를 머리속으로 계산하셔서 나에게 하나하나 불러주시면서 적으라고 하셨다. 빌린 돈을 갚아야 할 섣달이 되면 나는 어머니 옆에 앉아서 어머니가 불러주시는 학자금 융통 현황을 받아 적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게 떠오른다.
어머니께서는 어린 시절에 옛날의 시골 풍습에 따라 학교를 다니지 못하셨다. 어머니께서는 말씀하시기를 그때에 학교에 가고싶어서 혼자 학교를 찾아갔더니 나이가 많아서 안 된다고 말했다면서 세월이 흐른 후에도 그일을 못내 아쉬워하셨다. 그래서 어머니께서는 학교 다니는 남동생이 공부를 할 때 옆에서 한글을 익히고 간단한 한자도 익혔다고 하셨다. 어머니께서는 가끔 ‘내가 공부만 했으면 큰일을 한번 할 수 있었을 턴데, 하시면서 입가에 미소를 머금곤 하셨다.
누님께서 전해주시는 말씀에 의하면, 어머니의 자식사랑은 대단하셨다고 한다. 어머니께서는 자식들에 대한 중요한 일이 있을 때에는 자식들이 잘되기를 빌기 위해서 낮에도 혼자 가기가 무서운 산길을 밤중에 혼자서 걸어 올라가 깊은 산골에 있는 맑은 우물에 가서 물을 길어 와 정화수를 떠놓으시고 자식들이 잘 되기를 지성으로 비셨다고 전해주셨다.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면, 오늘의 우리가 있는 것은 모두가 어머니의 깊은 사랑의 결실임을 가슴이 저리도록 느끼곤 한다.
누님이 들려주시는 또 하나의 이야기는, 내가 어렸을 때 심하게 아픈 적이 있었다고 했다. 그때 위급한 상황을 감지하신 어머니는 나를 등에 업고 하동 읍내 병원까지 십리 길을 멀다하지 않고 단숨에 달려가서 치료를 받도록 해주셨다고 했다.
내가 자랄 때의 시골은 농사철이 되면 무척이나 바빴다. 그래서 농사철에는 많은 학생들이 농사일을 하려고 학교에 결석을 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농사일이 아무리 바빠도 내가 학교에는 빠지지 않도록 해주셨다. 시골에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나는 경제적 사정이 허락하지 않아서 집에서 어머니의 농사일을 도우면서 있었다. 그 때 어머니는 내가 상급학교를 진학하지 못하고 집에 있는 것을 너무나도 안타까워하셨다.
어느 날 광주에서 공부하고 있던 형이 집에 와서 나에게 서울에 가서 함께 공부를 하자고 했다. 그 때 어머니께서는 우리 집의 경제적 사정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음을 아시면서도, 걱정을 속으로 삼키시면서 일단 서울에 가서 열심히 공부하라고 하셨다. 지금 생각하면 어머니께서 대단한 결심을 하신 것이었다. 모험적인 결심을 하신 것이었다.
형과 함께 서울에 온 후 우리는 어머니의 도움을 받으면서 고학의 형태로 서울생활을 시작했다. 형과 함께 자취방에서 생활하면서 공부를 했다. 우리가 서울에서 고학을 하면서 공부를 할 때에 자식들이 어렵게 공부하는 것이 애처로워 어머니께서 서울에 한번 올라 오셨다. 어머니께서는 고생하는 자식들을 생각하시면서 시골의 음식들을 이것저것 마련하여 서울에 올라오셨다.
그때 나는 어머니가 서울에오신 것이 너무나 좋아서 고등학교 입학 준비를 위해 다니던 도서관에 가는 것을 하루 쉬면서 어머니를 모시고 전철을 타고 서울 시내를 구경시켜드리고, 또, 남산에도 올라가서 서울의 야경도 구경시켜드렸다. 그 때 나는 도서관에 다니면서 공부를 할 때여서 시력이 약해져서 어머니와 함께 남산에 올라가 서울의 네온싸인 야경을 보면서 "어머니 저 불빛 글자들이 둘로 보이네요" 하면서 눈을 비비던 기억이 난다. 또 남산 약수터에서 어머니와 함께 미끄러지던 기억이 떠오른다. 지금 생각하니 그 때의 일들이 너무나도 그립게 되살아난다. 어머니께서는 며칠 동안 서울에 계시면서 어렵게 생활하고 있는 우리들을 지켜보시고 걱정만 안고 시골로 내려가셨다.
서울에서 고등학교를 다닐 때 방학이 되어 집에가면 어머니께서는 깊숙히 보관해 두셨던 시골의 특별한 음식들을 내어다 주시기도 했다. 특히 겨울 방학 때에는 그당시 시골의 별미였던 조청을 만들어서 보관해 두셨다가 방학이 되어 집에 가면 꺼내서 주시기도 했다. 나는 그 때 방학이 되어 집에 가면, 어머니의 수고를 조금이라도 덜어드리려고, 매일 산으로 가서 땔나무를 힘이 닿는데까지 마련해드리고 서울로 올라왔다.
내가 서울에서 고등학교를 마치고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에 합격을 했을 때 어머니는 입학금을 마련하시기 위해서 이마을 저마을을 다니시면서 돈을 빌리셨다고 전해 들었다. “어머니, 그 때 얼마나 힘이 드셨습니까?” "어머니 감사합니다." 대학을 다닐 때 아르바이트를 해서 모음 돈으로 취사용 석유곤로를 사드린 기억이 난다. 그 때 시골에서는 땔감을 구하기가 무척 어려웠었다.
어머니께서는 젊으셔서부터 치아가 좋지 않으셨다. 그래서 무척 고생을 하셨다. 그래서 내가 대학다닐 때 아르바이트를 해서 조금씩 모은 돈으로 어머니께 시골에서 싸게하는 틀이(치아)를 해드렸는데, 그 틀이(치아)를 돌아가실 때까지 쓰시면서, 가끔 "야메로 한 이 틀니가 아주 잘 되어서 지금까지 쓴다"고 말씀하셨다.
대학 졸업일을 앞두고 군대에 입대하기 위해서 고향에 갔을 때, 어머니께서는 음식을 준비하셔서 고향 친구들과 시간을 보내게 해주셨다. 입대하던 날 어머니는 광주 31사단 신병교육대로 가는 버스정류장이 있는 하동읍내에 까지 같이 오셔서, 약간의 돈을 손수건에 싸서 주머니에 넣어주셨다. 그때를 생각하면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가슴이 메이도록 벅차오른다.
내가 대학을 졸업하고 군대에 가 있을 때에는, 어머니는 자식들을 위해서 정성을 다하셨다는 생각으로, 자식들의 성공을 기다리셨다. 생활의 어려움은 계속 되었지만, 그러나 그 어려운 생활 속에서도 어머니는 막내 여동생을 상급학교에 진학시켰다. 어머니께서는 자식들의 공부 때문에 어려워진 생활에 대해서는 당연히 하실 일을 하셨다는 마음으로, 생활의 어려움에 대해서는 조금도 움추러들지 않으시고 의연하게 그리고 올곧게 생활을 하셨다.
3년간의 군대생활을 마치고 나서 나는 바로 직장을 가졌다. 그리고 몇 년 후 집을 마련하였다. 그때 내가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이 고향에서 동생들과 고생하고 계시는 어머니를 서울로 모셔서 온 가족이 함께 사는 것이었다. 어머니를 서울로 모셨을 때, 어머니는 서울의 자식들이 성공해서 서울로 간다는 자부심을 안고 서울로 이사를 오셨다. 그 때 고향의 사람들도 고생 끝에 자식들을 성공시켰다고 부러워했다.
자식들이 서울에서 생활의 터전을 잡았을 때 어머니의 얼굴에는 자신감에 넘치는 기운이 감도셨다. 이제부터는 서울에 가서 모두 모여서 살수 있다고 기뻐하셨다. 시골의 조금 남은 재산을 정리해서 동생들을 데리고 서울로 이사를 하셨다. 이제부터 그렇게도 기다리던 우리 가족의 서울 생활이 시작되었다. 서울로 이사를 온 후에는 억척스러웠던 어머니의 얼굴에도 이제 여유가 자리 잡으면서 평온함이 찾아왔다.
우리는 가족이 함께 모여 서울 생활이 시작되면서 어머니의 사랑을 가까이에서 받을 수 있어서 행복했다. 어느날 하루는 서울의 생활에 익숙하지 못한 어머니를 모시고 서울 근교의 시골풍경을 구경시켜드리기 위해서 도봉산 줄기인 방학동 골짜기에 가서 논밭길을 걸으면서 시골이야기를 하며 하루를 보낸일이 지금도 생생하게 떠오른다. " 어머니, 지금은 많이 변해 있을 그 들녁길을 어머니를 가슴에 모시고 다시 한번 걸어보고 싶습니다."
어머니가 서울로 올라오신 후, 우리는 가족들이 모두 한 집에 모여서 어려움 없이 화목한 생활을 했다. 어머니를 모시고 나의 바로 밑의 여동생을 먼저 결혼 시키고, 이어서 형님이 결혼을 하시고, 또 둘째 여동생을 결혼시켰다. 내가 대학원을 졸업하던 날 어머니는 아들의 졸업식에 참여하기 위해 둘째 여동생과 함께 서울대학교 동숭동 캠퍼스에 오셔서 기념 사진도 찍으셨다. 그리고 그날 쌍문동 집에서, 졸업식에 온 친구들을 대접하기 위해 음식을 장만하시면서 바쁜 하루를 보내시며 즐거워 하셨다.
내가 결혼을 한 후에도 어머니를 우리집에서 계속 모셨다. 이제부터는 어머니를 편안하게 모시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하면 어머니를 좀더 편안하게 모시지 못한 것이 못내 한(恨)이 되어 가슴을 저리게 한다.
내가 결혼 한 후 쌍문동에서 어머니를 모시고 막내동생을 데리고 단란한 생활이 계속되었다. 그러다가 같은 동네에 살던 형님이 신림동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이사짐이 떠날 때 어머니께서는 이제부터는 큰아들 집에서 살아야 한다면서 우리집에서 놀던 어린 조카 지혜를 등에 업고 우리 집을 떠나셨다.
서울의 생활이 안정되고 편안함을 찾으신 어머니에게, 이제부터는 지금까지는 생각하실 겨를도 없었던 외로움이 찾아들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어머니는 외로움을 삼켜가시면서 집안일을 도우시면서 손자들을 키우시는데서 삶의 보람을 찾으시려고 했다. 살림을 하시고 싶었지만 자식들이 결혼한 후에는 모심을 받아야 하는 위치이기 때문에 살림에는 손을 놓으셨다. 그래서 때로는 무료하실 때가 많으셨다.
어머니께서는 손자들을 데리고 이야기를 하시면서 "옛날에는 시골에서 여자들한테 공부를 시키면 시집가서 어려우면 편지한다고 학교를 보내지 안했단다." 또 식사를 하실 때에는 "‘옛날에는 여자들은 고기를 먹지 못하게 했단다" 하시면서 그 이유는 여자들이 고기를 먹으면 시집가서 고기가 먹고 싶으면 친정집에 자주 오기 때문이라고 하시면서 웃으셨다. 또 손자들과 시간을 함께 할 때면 사람은 행실이 곧아야 한다고 말씀하셨고, 또 공부를 열심히 해야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러시면서 가끔 ‘내가 공부가 하고싶어서 학교에 찾아가니까 나이가 많아서 안 된다고 했다’고 하시면서 아쉬워하셨다.
신림동에서의 어머니의 생활은, 생활이 안정되면서 찾아드는 외로움을 달래가시면서 손자들을 키우시는데 정성을 쏟으셨다. 또 동네의 많은 친구들과 어울리시면서 인생 후반의 삶을 사셨다. 그 때만해도 어머니께서는 방배동에 있는 작은 아들집인,우리 집으로, 수원의 큰딸 집으로, 이리의 둘째 딸 집으로, 인천의 셋째 딸 집으로 그리고 같은 동네의 막내 딸 집으로 다니시면서 자식사랑을 계속 나누어 주셨다. 방배동에서 칠순 잔치를 해드릴 때에는 신림동의 친구들을 모셔드렸는데 그 때에 어머니께서는 너무나도 흐뭇해 하셨다.
우리가 문정동으로 이사를 하고, 형님이 방이동으로 이사를 한 후에도 어머니는 아들 딸 집들을 두루 다니시면서 사랑을 나누어 주셨다.
가끔 어머니를 뵈려 가면 밥이라도 먹고 가라고 하시면서 급히 밥상을 차려 주시기도 했다.
팔순이 되시던 해에 팔순기념으로 인도네시아로 여행을 모셨을 때에 그렇게도 좋아하시던 모습이 지금도 너무나도 생생하게 떠오른다. 그때를 생각하면, 그때의 그리움이 가슴이 미어지도록 밀려오면서 나를 그리움의 세계로 끌어가고 있다.
여행을 모시려할 때 팔순의 나이가 걱정이 되셨는지 혼자서 동네병원에 가셔서 여행을 가도 되느냐고 의사에게 물어보셨다고 했다. 그때 의사가 가도 좋다고 했다면서 기뻐하시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인도네시아의 발리섬 호텔에 여장을 풀었을 때 어머니의 만족스러워하시던 모습이 떠오른다. 호텔정원의 이곳 저곳을 구경하시고, 발리섬 해변에서는 준비해 가신 ‘선그래스’를 쓰시고 멋있는 모습을 보여주셨다. 여행을 가서도 우리 중 한사람이 보이지 않으면 빨리 찾아보라고 걱정을 하셨다. 열대의 좀 더웠던 날씨에 시원한 코코넛 물을 마신 것이 그렇게도 기억에 남으셨던지 돌아오셔서도 코코넛 물을 마신 이야기를 자주 하셨다.
팔순이 지나고 85세를 넘으시면서 어머니의 몸은 점점 노약해지셨다. 노환에 뼈가 약해저서 뼈를 자주 다치시면서 거동이 불편해지시기 시작했다. 그러나 거동이 부편하신 중에도 우리 집에 와 계시면서 불편하신 몸으로 집안일을 조금이라도 도와 주시려고 애쓰시던 어머니의 생전의 마지막 부분의 사랑을 생각하면 지금도 목이 메인다.
불편하신 몸으로도 항시 현관의 문단속을 잊지 않으셨고, 밤중에도 나오셔서 가스의 밸브를 확인하시면서 이것을 잠그지 않으면 가스값이 많이 나간다고 검침 아주머니가 말했다고 하시면서 그 말을 믿으셨다. 식사시간이 끝나면 불편한 몸을 이끄시고 설거지를 해주시면서 손녀들에게 생활교육도 시키셨다. 빨래가 마르면 어느틈에 빨래를 예쁘게 정리하시면서 "내가 어디 가면 빨래 정리하는 것이 걱정이 된다"고 하셨다.
불편하신 몸으로도 식사시간에는 흐트러지심이 없으셨고, 식탁에서도 손자들의 예절에 대해서는 항상 관심을 가지시고 일깨워주셨다.
어머니가 쓰시는 방은 언제나 가지런히 정리하셨고, 노년에 생기는 얼굴의 검은 점을 지우려고 ‘파운데이션’을 진하게 바르시곤 하셨다. 자식들한테서 한푼 두푼 받으신 용돈은 고이고이 모아두시곤 하셨다. 휴지 한 장이라도 아끼시는 모습을 끝까지 보여주셨다.
어머니께서는 노후에도, 조금씩 조금씩 사라져 가시는 삶 속에서도 끝까지 의연함을 잃지 않으시고 우리들을 지켜주시면서, 당신의 가실 길을 준비하셨다.
병원에 누어계시면서도 몸의 상태가 조금이라도 좋아지시면 ‘호접나비’노래를 부르시면서 사랑의 메시지를 전해주셨다. 의식이 몽롱해서 누어 계시다가도 잠간씩 의식이 돌아오셔서 나를 알아보시면 ‘바쁜데 왜 왔느냐’ 하시면서 자식에 대한 걱정을 끝까지 놓지 않으셨다.
어머니의 삶, 사랑과 올곧음의 삶, 우리는 그 훌륭하신 삶이 조금씩 조금씩 사라져 가시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어머니를 우리들의 가슴 속에 영원히 모셨다. (2006년 5월 19일, 음력 4월 22일, 금요일 새벽 5시 4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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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할머니! 이제는 우리들의 마음속에서만 대답을 주실 수 있네요.
어머니! 할머니!께서는 언제나 인자하신 그 모습으로 우리들의 마음속에 영원히 살아계십니다.
파란만장의 한평생, 그러나 누구보다도 올곧게 살아오신 어머니는 우리들의 가슴 속에 영원히 살아계십니다. 생전에 보여주신 어머니의 올바른 삶이 지금의 우리들을 있게 해주셨습니다. 어머니는 가시는 순간까지 우리들을 사랑해 주시고 아껴주셨기에 우리들의 가슴 속엔 어머니의 사랑이 더욱 더 두터워지고 있습니다. 어머니, 우리들은 영원으로 향하면서 어머니를 사랑할 것입니다’
어머니, 어머니께서 지금의 우리들이 있게 해 주시기 위해서 애쓰신 어머니의 사랑과 노고를 생각하면 한없는 그리움이 복받쳐 오릅니다. 어머니, 이제서야 제가 철이 들어가고 있나 봅니다.
어머니! 할머니! 사랑합니다. 우리들은 어머니를, 할머니를 영원토록 우리들의 가슴 속에 모실 것입니다.
어머니! 할머니! 사랑합니다. 영원히 사랑합니다.
2006년 6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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